기사제목 역사의 살아있는 증인, 조선족 항일투사 - 이재덕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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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살아있는 증인, 조선족 항일투사 - 이재덕①

기사입력 2018.02.13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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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이(리)재덕(李在德)- 동북항일연군 내의 조선족 여투사이자 국제주의 전사였으며 살아 있은 역사의 증인이다. 그리고 조선인으로부터 중국조선족으로 탈바꿈하게 된 특수시대가 낳은 여성강자이기도 하다.
 
1917년 12월 29일, 이재덕은 조선 평안남도 개천군 답도리(介川郡沓道里)에서 태어났다. 이재덕이 2살 되던 해 이재덕의 부친 이상희(李相熙)가 조선광복을 목적으로 하는 독립단체에 참가했다고 일제에 의해 체포되자 1920년 전 가족은 할머니 안순희(安顺姬)를 따라 중국 요녕성 안동(지금의 단동)지구의 농촌으로 이주, 다시 4년 뒤 송강성 탕원현 복흥툰에 정착한다.
 
당시 복흥툰에는 송강성의 군벌 오준생이 개설한 <복풍도전회사(福丰稻田公司)>가 있었으며 이재덕 일가는 그 회사의 논을 임대맡아 지으면서 입에 풀칠이나마 할 수 있었다.
 
1928년 초봄, 복흥툰에 3명의 조선인이 찾아왔다. 이들 중 한 사람은 키가 크고 우람지었으며 목소리도 우렁우렁하였으며 특히 그의 중국어구사가 아주 유창하였다. 그가 바로 유명한 혁명가였으며 후에는 조선의 제2임자로 된 최용건(崔庸健)이었다. 그 얼마 전 최용건은 공산당이 일으킨 광주봉기(广州起义)에 참가, 황포군관학교 교관 겸 제5기 제2구대 대장의 신분으로 200-300명의 병력으로 100여 시간에 달하는 격전을 벌이다가 봉기가 실패하자 국민당 특무들의 감시와 겹겹으로 된 적들의 봉쇄망을 뚫고 광주로부터 동북으로 오게 되었었다.
 
동북으로 온 최용건은 다니는 곳마다 혁명의 진리를 선전, 결국 이재덕이 살고 있는 복흥툰까지 오게 되었던 것이다.
 
복흥툰에 온 최용건은 김치강(金治刚)이란 가명으로 송동모범학교(松东模范学校)를 창립하고는 이 지구의 조선인들한테 민족 및 계몽 교육을 진행, 당시 10살인 이재덕은 제일 선참으로 이 학교에 입학했다.
 
계몽교육을 받는 기간 이재덕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압박하에 있는 중국과 조선은 모두 공동한 운명 속에 있으며 오직 제국주의 침략을 물리쳐야만 진정한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쟁취할 수 있다는 혁명의 진지를 깨닫게 된다.
 
이 송동모범학교에 다니면서 이재덕은 선후로 공산주의 아동단 및 소년선봉대에 가입했으며 소대장에 이어 중대장으로 되기도 했다. 당시 이 학교에서는 어문, 산수, 체육과 음악 등 학과를 설치, 음악학과에서는 제일 처음 배운 노래가 최용건 교장이 지은 모범학교 교가였다.
 
구락부로 된 학교는 저녁마다 마을 사람들로 붐비었다. 이재덕은 늘 어머니와 할머니를 이끌고 학교로 가서는 최용건 교장의 강연을 들었으며 여기에서 <공산당>이란 세 글자도 알게 되었다. 최교장은 또 일제가 조선과 중국을 침략하고 약탈한 죄행을 폭로하였고 레닌이 영도한 10월 혁명에 대해 소개했으며 장개석이 혁명을 배반하는 과정과 자신이 광주봉기에 참가하던 과정을 감명 깊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런 혁명도리들을 들으면서 마을사람들의 인식과 각오는 날로 높아만 갔다.
 
최용건의 영향을 받은 복흥툰 마을에는 농민협회, 부녀협회와 반일대동맹, 반일청년회 등 대중혁명조직이 성립되었으며 부녀협회에서 김성강의 활약이 가장 돌출하였다.
 
1928년 10월, 최용건의 양성과 도움으로 배치운(裴治云), 최규복(崔圭福), 이재덕의 어머니 김성강이 입당, 이들은 삼강지구(三江地区)에서 가장 선참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사람들이었다. 이어 1929년 봄이 되자 학립(鹤立) 부근의 북칠호툰(北七号屯)에 중공 탕원현위가 성립, 이는 삼강지구에서 성립된 첫 현위였으며 전반 동북에서 가장 일찍 성립된 현위의 하나였다.
 
1931년 항일투쟁의 수요와 중공 만주성위의 비준으로 중공 탕원현위가 확대되었고 이재덕의 어머니 김성강은 현위위원 겸 현 부녀연합회 주임으로 되었다.
 
그 시기, 이재덕은 어머니 및 기타 공산당원들의 영향을 받아 사상상 재빠르게 진보하였다. 당시 이재덕은 늘 당조직과 공청단 조직에서 조직하는 가무, 연극, 강연 등 문예활동에 참가하여 각종 형식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죄행을 폭로하는 한편 반일계몽 선전에도 열성을 다하였다. 1932년 초만 하더라도 이재덕은 40여 일간에 거쳐 선전대를 따라 학립진(鹤立镇), 연강구(莲江口), 태평천(太平川), 격절하 금광(格节河金矿). 학강탄광(鹤岗煤矿) 그리고 나북(萝北)경내의 압단하(鸭蛋河), 도로하(都鲁河), 의란현(依兰县) 북부 등지를 돌면서 순회공연, 공연장마다 관중들의 눈물바다로 되었으며 이는 또한 대중들의 반일각오를 불러일으킴에 있어서도 큰 작용을 하였다. 원 흑룡강성 군구 부사령원이었으며 저명한 항일장령이었던 왕명귀(王明贵) 등 많은 사람들 역시 항일선전대의 영향으로 총부리를 일제에게 겨누면서 항일전선으로 달려나갔던 것이다.
 
2.png▲ 이재덕과 남편 우보합
 
1932년 봄 이재덕은 김성철과 배경천(裴敬天)의 소개로 공청단에 가입, 그 뒤 이 지구에서 가정 어린 공청단 촌소조장이 되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15살에 불과했다.
 
공청단 간부가 된 이재덕은 기타 공청단원들을 이끌고 항일표어를 붙이고 삐라도 뿌리었으며 또한 편지를 나르고 망을 보기도 하면서 공청단 활동의 중견으로 활약했다.
 
그해 봄의 어느 날, 풍중운(冯仲云)과 현위의 간부들이 이재덕의 집에서 회의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변복을 한 마적떼가 복흥툰 서쪽으로부터 마을로 기어들었다. 그러자 이를 발견한 이재덕은 즉시 집으로 달려가 이 위기상황을 알렸지만 이 때는 마적떼가 이미 집집마다 수색을 하기 시작한 뒤었다. 상황은 아주 위급했다. 풍중운은 기타 간부들더러 피신하게 한 뒤 회의서류들을 정리해 가방 안에 넣기 시작했다.
 
풍중운의 위기탈출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이 때 이재덕의 할머니 안순희 노인이 위기 중 기발한 착상을 내놓았다.

“풍동지, 벙어리처럼 가장하우다. 절대 입을 열지 마시우. 모든 것은 내가 막아 나설테니…”
 
뒤이어 총을 꼬나든 마적들이 들이 닥치면서 이재덕과 할머니의 뒤에 있는 풍중운을 발견, 놈들은 풍중운한테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고는 그를 끌고 가려고 했다. 이러자 안순희 노인은 급기야 풍중운의 앞을 막아나서면서 “제발 끌고 가지 말아 줘유. 그 애는 나의 벙어리 아들로서 얼마 전 조선으로부터 이 어미를 보려고 여기에 왔수다…”라고 하며 울고불고 하였다. 이어 이재덕과 어머니 김성강 역시 풍중운을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하지만 마적들은 할머니와 풍중운한테 총 박죽으로 치고, 발로 차고 하며 물매를 들이대면서 기어코 끌고 가려고 했다. 이 위급한 관두에 촌에 있던 지하당원과 마을 사람들이 몰켜와 이구동성으로 “그 벙어리는 확실히 안할머니의 아들이 맞수다. 이제 온지 며칠 안 되우다”라고 하며 막아나섰다.
 
그제야 마적들은 마을 사람들의 말에 믿음이 가는지 풍중운을 놔주면서 물러갔다.
 
마적들은 물러갔지만 안순희 할머니는 옷이 갈기갈기 찢어졌고 피투성으로 됐으며 얼마 안 되어 병으로 세상뜨고 말았다.
 
한편 이재덕의 어머니 김성강은 정직하고도 소박했으며 견정하고도 군중위신이 높은 여성간부였다.
 
1933년 10월 4일은 음력 8월 15일로 추석날이었다. 추석날 밤, 김성강과 기타 현위 지도일군들은 배치운, 최규복 등과 함께 유격대를 조직할데 관한 과제를 갖고 회의를 하고 있었다. 회의는 그 이튿날 동틀 무렵까지 진행, 바로 이때 갑자기 학립에 있는 일본헌병대가 들이닥쳤으며 회의참가자 300여명은 포위된 채 가도 오지도 못하고 붙잡히고 말았다. 일제는 반역자 이원진(李元珍)을 통해 대부분 군중들은 돌려보냈으나 중공 탕원현위서기 배치운, 조직부장 최규복, 현위 부녀주임 김성강과 공산당원인 정중구(丁重九), 김술룡(金术龙), 임국진(林国镇), 공청단원인 석광신(石光信), 손명옥(孙明玉), 김봉춘(金峰春) 등 12명은 석방하지 않았다.
 
뒤이어 적들의 비인간적인 고문이 시작되었다.
 
처음에 일제는 여성인 김성강을 보고 쉽게 입을 열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얼리고 닥치고 하는 수법은 김성강한테 통하지 않았다. 나중에 놈들은 “딸이 있는 곳만 알려주면 집으로 보내주겠다”라고 구슬렸다. 이에 김성강은 “나의 딸은 지금 산에 들어가 일본놈들을 족치고 있다. 내 딸은 언제든지 꼭 너희들을 족치러 올 것이다. 기다려보아라, 이 강도놈들아!”라는 한마디로 대답해 주었다.
 
이에 악에 받친 일제놈들은 김성강 여인의 손톱을 뽑는 등 갖은 악행을 다 가했으나 그한테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였다. 그 외 놈들은 최규복 등 혁명가들한테 채찍을 휘두르고 입에 고추물을 부어넣고 죽창으로 손톱눈을 찌르고 하면서 고문하였으나 여전히 이들을 굴복시킬 수가 없었다.
 
결국 일제놈들은 이들 12명 동지들을 생매장, 그것이 세상을 격노시킨 <8.15> 참안이었다.(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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