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07-05(일)
 

 

최선향 (장강사범학원)

 

 

젠더(gender)는 생물학적 성차(性别差异)가 아닌 사회적인 성별(社会性别)을 나타내는 용어로서 여성성(女性气质,女人味)과 남성성(男性气质,男人味)은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본다. 1970년대 이후 여성주의학자들에 의해 쓰이기 시작한 젠더라는 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시대가 바뀌고 사회가 발전하면 여성성, 남성성의 내용도 달라지고 성역할 규범이라든가 성별분업(性别分工)에도 변화가 따른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지난 9월 학술회의 차로 연길에 다녀왔는데 10여년 만에 가 본 연길은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중 제일 반가운 변화가 주말 연길공원에서 본 아기를 안고 공원을 돌던 젊은 아빠의 모습과 중학생으로 보이는 쌍둥이 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공원을 산책하던 다정한 아빠의 모습이었다. 아이와 함께 산책 나온 아빠들을 보며 홀연 10년 전 조선족 여성 노인들의 노후생활을 연구하기 위해 만났던 한 할머니의 남편이 해 주신 이야기가 떠올랐다. 연변 화룡 출신의 그분은 퇴직간부였는데 젊은 시절 화룡에 살 때 아내를 돕고 싶어도 주위 사람들이 비웃을가 봐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하셨다. 물을 길어도 날이 어둡기를 기다려 남들이 안 볼 때 가서 길어왔다고 하셨다. 그러고 보니 세상이 많이 바뀐 것 같다.


한금옥 선생의 <도시 조선족 맞벌이가정 주부들의 가정지위에 대한 조사>라는 논문을 보면 1990년대초 조선족 가정의 가사분담에서 남편의 참여는 아주 저조하였다. 조복희 등 학자들의 논문 <연변지역 조선족의 가족생활 및 육아방식의 실태조사>를 보면 1990년대초 연변조선족 가정의 육아분담 조사에서 남편은 거의 안 한다고 답한 비례가 40.5%나 된다.(이화, 2019: 43, 45) 하지만 개혁개방 이후 도시화, 지구화를 배경으로 한 이주의 물결 속에서 조선족의 생활세계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주의 여성화와 엄마의 부재라는 전에 없던 현상들이 나타나면서 가사에 별로 손을 대지도 않던 조선족 남성들이 아내가 한국이나 외지에 일하러 가고 홀로 집에 남게 된 것이다. 그들이 홀로 가사일과 아이를 돌봐야 하는 상황이 많아지며 연변 소품(小品)에도 가정 살림을 맡아하는 남자들의 모습이 담겨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에는 많은 낯설음과 심리적 갈등, 콤플렉스 등 여러 가지 감정들이 교착되였을 것이다.


몇 년 전 추석에 남편의 고중 동창네 가족이 우리 집에 놀러 왔었는데 그 친구의 변화를 보고 많이 놀랐다. 예전에 본 그는 한국기업에서 한창 잘 나가던 시기라 사람이 성격이 활달하고 자신감 있어보였다. 그런데 중년에 들어서며 직장을 잃고 거의 3년 동안 집에서 놀아서(그의 말을 빌린다면) 그런지 사람이 기가 많이 죽고 많이 소침해 있었다. 남편이 왜 이리 많이 변했는가고 묻자 그 친구는 “너도 집에서 한 3년 있어봐. 이렇게 돼.”라고 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그런것 같다. 남자가 젊은 나이에 일하지 않고 집에서 ‘놀기’만 한다는 것은 보통 상식적으로 리해가 안 가는 일이다. 실은 남자들도 집에 있으면서 ‘놀기’만 하는 게 아닌 데 말이다. 그의 아내 말을 들어 보면 남편이 직장 생활을 안하는 대신 집에서 집안일도 많이 하고 애도 많이 돌보며 직장생활을 하는 자신을 많이 돕는다고 했다.


우리는 주변에 애를 돌보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전업주부로 있으며 가정과 아이들을 돌보는 여성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녀들은 그처럼 그 정도까지는 기죽지 않는다. 왜 그럴가?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이지만, 여기에는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성별분업이라는 이데올로기가 한몫해서다.


우리는 남자가 할 일, 여자가 할 일을 따로따로 구분해 놓은 남여의 성별분업에 많이 익숙해져 있다. 가사일과 자녀양육은 먼저 여성과 연결시키는 대신 남성들은 바깥일을 잘 해야 하고,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사람으로 인식해 왔다. 보통 돈을 벌어 오는 일차적인 책임은 남편이 짊어져야 한다고 여긴다. 남편이 그런 책임을 잘 못 질 경우 부실한 남자, 못난 남편으로 평가 받는다. 남편은 생계를 책임지는 대신 집안일은 안 해도 되고 못해도 된다. 반대로 집안일은 잘하지만 돈을 못 벌거나 많이 못 버는 남자는 좀 모자란 남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여가생활에서도 남자와 여자는 취미가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예전에 아는 지인 부부가 부부싸움을 많이 했는데 들어보면 아내는 남편이 매일 드라마나 본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남자라면 뉴스나 큰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왜 드라마만 보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 아내 되는 사람이 아주 여성적이지도 않은 데 말이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하는 만큼 성역할 분담을 잘 못해서 불만을 가질 때가 많다.


여성은 돈을 잘 벌고 능력이 있어도 집안 살림을 잘 못하거나 자녀양육에 신경을 많이 못 쓸 경우 가족과 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못 할 때가 많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일수록 자신의 녀성스러움, 즉 현모양처의 이미지를 더 굳히려고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다. 이렇게 성별분업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할 때가 많다. 그런 의식에서 벗어나야 남자든 여자든, 직장일이든 가사일이든, 자녀 양육이든 편하게 할 수 있는 데 말이다.


지금까지 조선족의 발전을 논함에 있어 경제나 사회, 교육 등 공적 영역에 관한 언급이 주를 이루고 생활세계에 관한 언급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독일의 철학자 하버마스에 의하면 사회는 크게 체계와 생활세계로 나눌 수 있다. 체계는 권력, 돈과 같은 매개체를 통해 도구적 이성과 목적합리적 행위가 작동하는 세계이고, 생활세계는 가치, 규범, 상징적 상호작용 등 의사소통적 행위가 작동하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심영희,1999:90) 공적 령역에 관한 연구와 거시적인 안목, 거대담론도 중요하지만 사적 영역, 생활세계, 조선족의 일상에 관한 미시적인 접근도 필요하다.


일상이란 반복되고 체화 되여(생각, 사상, 이론 따위가 몸에 배여서 자기 것이 됨.)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것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일상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자질구레한 일과들의 공간인 동시에 인간의 사적이고 내면적인 삶과 닿아있는 중요한 영역이다. 일상생활은 흔히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국가나 민족, 사회의 구조도 따지고 보면 개개인의 반복적인 일상생활에 의해 유지된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족들이 일상적인 생활세계 안에서 일상적인 활동을 어떻게 꾸려가는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활동은 상황에 구속받음과 동시에 상황 자체의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실천적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족은 지금까지 시대와 사회의 발전과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해왔다. 오늘날 지구화라는 현실에도 빠르게 적응하며 새로운 생활패턴을 만들어가고 있다. 가족구성원들이 서로 다른 나라, 지역에 흩어져 살며 초국적 가족이 늘어나고 있는 오늘, 새로운 현실에 더욱 잘 적응하려면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남겨져내려온 전통적 습관과 문화를 새 시대에 걸맞게 바꾸어나가야 할 것이다. 특히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스며들어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기존의 젠더 규범과 젠더 질서의 변화가 요구된다. 일상생활 속에서, 가정에서 남녀가 보다 평등하고 민주적인 관계를 만들어가야 보다 행복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려나갈 수 있으며, 가족구성원 누구나 자신의 가치를 실현해가며 보다 발전된 모습으로, 보다 충실하고 성장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그러한 실천과 노력들이 이어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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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생활세계와 젠더 질서의 변화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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