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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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2부 말미에 삼국시대가 열리기 전 전란이 당시 시대배경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당시 전란은 모두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크게 나누면 모두 네 가지 전란이 있었다. 환관과 외척의 싸움, 환관과 선비집단의 싸움, 황건적의 난, 반동탁의 난이다.

 

앞부분에서 이미 환관과 외척의 싸움을 자세하게 다뤘기 때문에 본문에서는 주로 환관과 선비집단의 싸움을 다루려 한다.


선진시대(先秦時代)의 관료집단은 두 부류였다. 한 부류는 무관(巫官)이요, 다른 한 부류는 사관(史官)이다.


독자들은 무속인, 무속신앙이란 말을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도대체 뭔 뜻일까? 무(巫)란 글자의 뜻은 위 가로는 하늘을 뜻하고 아래 가로는 땅이며 내리 줄은 하늘과 땅을 만나 교감을 이뤄내는 것인데 누가 이 역할을 담당하나? 바로 내리 줄 양 옆에 있는 두 사람이다. 뭘 어떻게 역할을 수행하나? 노래와 춤을 통해서, 즉 가무강신(歌舞降神)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민속종목에 그네뛰기가 있는데 이 그네뛰기 유래를 아는가? 농경사회에서 강수의 양에 따라 풍년과 흉년이 판가름 난다. 오월단오가 되면 파종이 끝나고 천신에게 제를 올리는 행사가 있었다. 이 행사는 거국적인 이벤트였다. 진수의 <삼국지> 고구려 편에 의하면 “매월 오월과 시월이면 나라에서 군데군데 크게 모여 연일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춘다(國中大會, 連日飮酒歌舞). 남녀 할 것 없이 손에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머리를 땅에 향했다가 하늘을 쳐다보면서 발로 땅을 힘껏 밟는다.” 이 기사에서 우리는 우리 민족이 딴따라민족이 된지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적어도 2천년의 역사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건 그렇고 오월단오에 처녀가 그네 뛰는 것은 여자는 음이고 천신은 양이며 음의 대표자 처녀가 하늘 공종에 치솟아 올라 양신과 결합하면 비를 내를 수 있다는 민속적인 신앙행위였다. 방울을 울리는 것은 처녀가 천신과 교감했다는 것을 대지에 알리는 신호이다. 이 때 여자는 시집갔거나 나이 지긋한 늙은 여인이면 안 된다. 반드시 음기가 왕성한 낭랑 처녀여야 한다. 조선시대까지 기우제 때 거국적으로 300여 명의 무녀(巫女)가 동원되어 속옷을 벗은 채 치마를 벌리고 앞뒤로 가로세로다리를 들었다 놓았다하면서 바람을 일으키는 춤을 추었다. 무녀들의 음기발산을 통해 양신인 천신이 교감되어 비를 내려준다는 것이다. ‘바람피운다.’는 우리말의 유래.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련다.


이런 행사를 관장하는 관리가 천관(天官)이며 <주례>에 의하면 천관은 힘이 센 관직이었다.


천관이 바로 무관이며 무관은 주로 제사를 관장하는 관직이었으며 당시로서는 제사행사가 으뜸의 행사였기 때문에 왕이 제사장을 겸하는 제정일치 시대였다. 이 제사장인 왕을 보좌하는 관료들 다수가 무관(巫官)이며 무관은 당시 정치무대에서 실세였다.


상나라 때까지 귀신의 일이 사람의 일보다 더 중요해서 모든 일에 길흉화복을 알아보는 점을 쳤으니 무관이 얼마나 굉장한 집단이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주나라에 이르러 귀신의 일보다 사람의 일이 더 주목받기 시작했다. 즉 귀신의 중심문화에서 인간의 중심문화로 전이되는 과정이었다. 요즘 말하는 ‘인문학’은 여러 가지 세상만사가 내포되어 있으나 실제로 인문학의 뿌리는 여기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공자의 어록 중에 이런 말이 있다. “귀신을 경하되 멀리하라(敬鬼神, 而遠之).” 뭘 뜻하는가? 귀신중심시대에서 인간중심사회를 구축하려는 사상과 이념이 담긴 말이었다.


당시 공자 같은 선비들(그의 500년 선배인 주공이 물론 인문학의 창시를 열었던 것), 각 학파들의 논쟁을 통해 확실히 인간중심사회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그 증거 중의 하나가 바로 관직 중에 사관(史官)이란 관직이 주목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공자보다 더 명성이 높았던 당시 최고 엘리트였던 노자 선생이 바로 주주사(周柱史)였다. 지금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중앙도서관의 관장을 맡고 있었는데 주나라에서 기둥역할 하는 사람의 일을 관리하고 기록하는 높은 벼슬자리였다.


잠깐! 사관(史官)이라면 태사공(太史公) 사마천을 떠올리면서 역사책이나 쓰는 별 보잘 것 없는 관직이 아니냐고 생각하기 일쑤인데 노자가 맡은 사관(史官)이란 관직은 역사서를 쓰는 것이 업무인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기록하고 관장하는 관직이었다. 갑골문 학자들의 해석에 의하면 일 사(事)와 역사를 뜻하는 사(史)는 같은 글자에서 분리된 것이라고 한다.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천하를 제패하고 겸병 전쟁을 벌임에 있어서 선비들이 대거 등용되어 각국의 왕의 책사를 맡았다. 공자님도 무려 14년 동안이나 어디 마땅한 감투가 없을까 하면서 여기저기 머리를 기웃거렸던 것이다. 장자는 머리 쓰고 사람과 사람이 아귀다툼으로 부대끼는 것이 싫어 관직을 주어도 팽개치고 거지 삶을 살았던데 비해 가장 휘황찬란하게 자신의 뜻을 펼친 선비는 바로 상앙이었다.


위(魏)나라 출신이었던 상앙이 자신의 나라에서는 뜻을 펼치지 못하자 진(秦)나라에 가서 꿈을 펼쳤다. 물론 마지막 인생길은 참혹했지만 이 부분은 논외로 하고 그의 개혁업적 가운데 필자가 가장 눈길이 가는 것은 관료세습제를 폐지하고 군공에 따라 사회기여도에 따라 간부임명제를 실시한 것이다. 이는 중국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개혁에 꼽히는 업적 중 하나이다.


당시 주나라 신분은 천자, 제후, 대부, 사인, 서민 등 다섯 계급이었다. 천자가 전쟁을 일으켜 빼앗은 이민족의 땅과 본래 대대로 내려온 토지소유권을 형제, 친인척, 전공이 있는 자들에게 땅을 나눠주고(分封) 제후를 세워 다스리는(建國) 제도 즉 봉건제에 있어서 천자는 천하의 태평을 도모하고 제후는 절대적 세력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치국에 힘쓰고 그 밑에 대부를 두어 채읍을 다스리는 것을 제가(齊家)라 하였고 대부 밑에 사인(士人)이 있는데 이들 집단은 공부하여 즉 수신(修身)하여 대부를 도와 제가에 힘쓰고 혹자는 대부를 뛰어 넘어 제후의 책사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라는 유교이념이 이렇게 유래된 것이다. 혹자는 제가(齊家)란 한 가족의 집식구를 다스리는 것으로 착각하는데 역사에서의 제가는 대부의 채읍을 다스리는 것을 뜻한다.


이렇듯 굳건하던 봉건제 타파에 나선 인물이 바로 상앙이다. 그는 그 막대한 권력을 갖고 있는 대부 집단의 기득권을 빼앗고 공에 따른 간부 임명제를 실시하였으니 당연히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부딪히게 마련이고 종당에 가서 편안한 천수를 누릴 수가 없이 참형을 당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상앙의 군현제의 꿈은 진시황이 계승하여 능력에 따른 간부 임명제가 실시된다. 그런데 시황제의 태산에 올라 천신에게 제사를 올린 것에 입을 나불거렸다는 이유로 선비들이 변을 당하는 이른바 분서갱유 사건이 있었고 이때 선비들이 고전을 천정에 감추고 땅에 파묻으며 음지에서 연명하면서 기회를 노린다.


그 결실은 한나라 무제 때에 이루게 된다. 그냥 하늘에서 내려주는 것이 아니라 동중서(董仲舒)라는 최고 엘리트에 의해 선비들이 출세의 길이 열린다.


동중서는 오늘날의 상식으로 말하자면 능력이 뛰어난 장사꾼이었다. 그는 무제와 다음과 흥정을 건다. 제국이 천년만년 가려면 법가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만약 법가에만 의지한다면 앞선 왕조 진나라의 꼴이 된다는 것이다. 그럼 도가의 이념은 어떨까? 무위자연을 이념으로 소국을 지향하는 도가이념으로 한나라 초기 재미를 쏠쏠하게 보았으나 황제는 힘이 없고 주변 오랑캐는 자꾸 시끄럽게 집작 거려 위협이 되고 있으니 강력한 제국 건설이 급선무라고 황제를 선동한다. 황제는 들어보니 들으면 들을수록 그럴듯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 임자.”


‘흠, 드디어 황제께서 내가 던진 낚시에 코가 걸렸군.’


동중서는 속으로 ‘쾌’자를 불렀다.


동중서의 주장은 이렇다. 유가의 선비들이 입을 나불거려 시끄럽긴 하지만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이란 삼강과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의 오강으로 강력한 사회질서를 구축한다면 제국이 오래갈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황제는 결국 동중서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따라서 선비들의 출세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군현과 주에 간부를 임명함에 있어서 우수한 인재를 추천하는 ‘천거(薦擧)’제에 의해 선비들이 대거 관직에 등용되어 세상을 주름잡기 시작하였다.


동중서의 덕분에 후한에 이르면 유교가 뿌리를 내려 낙양의 태학 학생은 3만 명에 달했고, 태학의 건물도 여러 번 증축되어 말기에는 24동에 1,850개의 교실을 갖게 되었다. 아마 요즘 지구촌의 지식분야의 최대 상징인 하버드를 훨씬 능가하는 규모였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지방에서도 각각 사숙이 만들어져 이름 있는 학자를 스승으로 하는 동문의 학생들이 배출되었다.


그런데 그놈의 환관들이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간부로 등용되고 싶다면 뇌물을 바치라고 노골적으로 대놓고 금품사냥에 혈안이 되어 있어 유교적 의식에 고취되고 정상적인 관리 등용문이 가로 막힌 이들은 반환관 운동에 앞장섰다. 환관파와 유생을 주축으로 하는 반환관파의 대립은 '당고의 금(黨錮之禁, '당고의 옥'이라고도 불림)'으로 불리는 2차례의 대탄압으로 청류 지식인(유생들은 자신을 청류, 환관무리를 탁류로 여겼음)들이 관계에서 일소되었다.


그 후 원소가 환관학살에 적극적이었던 이유가 바로 그 자신이 사족가문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환관은 유생집단을 관직에서 씨를 말릴 정도로 몰아냈으나 결국 사족가문 출신인 원소에 의해 다시 자신들이 씨를 말릴 정도로 학살당했다는 것이 참으로 흥미롭기도 하고 아이러니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이 당시 시대배경 중 한 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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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재해석③ 환관과 선비집단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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