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6(화)
 

 

●김정룡(다(多)가치 포럼 위원장)

 

 

<후한서>에서는 원술과 유표를 묶어 하나의 열전으로 구성했고, 유언, 원술, 여포를 합하여 하나의 열전으로 만들었다.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동탁, 원소, 원술, 유표를 하나의 챕터로 묶어놓고 다음과 같이 평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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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탁은 사람이 흉악하고 잔인하며 포악하고 비정했으니 문자로 기록한 이래 같은 자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원술은 사치스럽고 방자하며 음탕했으므로 생을 다할 때까지 영화를 지킬 수 없었던 것은 자업자득이다. 원소와 유표는 모두 위엄과 무용이 있었고 도량과 식견이 있었기에 당시 이름을 떨쳤다. 유표는 한수 남쪽을 지배하고 원소는 황하 북쪽에 세력을 구축했으나 그들은 모두 겉으로는 관대했지만 속으로는 질시했고 모략을 좋아하고 결단력이 없었으며 인재가 있어도 등용하지 않았고 좋은 말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적자를 내쫓고 서자를 세웠고 예의를 버리고 편애를 숭상했으니 후계자의 대에 이르러 거꾸러지고 넘어지는 고통을 당하고 사직이 엎어졌어도 결코 불행한 것이 아니다.”


소설 <삼국연의>에서는 유표가 영향력이 있는 중요한 인물로 다뤄지지 않았다. 이에 비해 사서에서의 유표는 비중이 꽤 컸고 영향력도 괜찮은 인물이어서 필자는 진수의 <삼국지> 배열 순서에 따라 이번 편에서 유표를 다루기로 했다.


<후한서>에 따르면 유표는 노공왕(魯恭王)의 후예였고 키가 8척(184센티미터) 남짓하고 모습이 온화하고 훤칠했으며 장검(張儉) 등의 사람들과 함께 ‘팔고(八顧, 덕행이 있어 남들을 선도하는 여덟 명의 명사)라고 불렸다. 유표가 황실의 후손이라는 것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유비의 황실후손 주장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심을 받은 것과 질적으로 달랐다.


유표는 후한 말기 환관들의 눈에 나 지식인을 탄압한 ‘당고의 화’를 입어 환관집단의 추적을 물리치고 도망하여 목숨을 부지했다.


헌제 초평 원년(190) 장사태수였던 손견이 형주자사 왕예를 죽이자 조정에서는 유표에게 이 직무를 맡겼다. 그러나 원술이 그의 부임을 가로막았고 ‘종적(宗賊)’이 성행하여 직무수행이 매우 어려웠다. 그런 긴박한 상황에서 유표는 인복이 있었는데 그를 도와 준 사람은 괴월과 채모였다.


채모는 비첩(婢妾)이 수백 명이고 별장을 오십여 채나 소유한 대부호였다. 채모는 후일 유표와 동서 사이가 되고 제갈량의 처에게는 이모부가 된다. 괴월은 지혜가 뛰어나고 계략이 많아 조조가 가장 좋아한 형주의 사인(士人)이었다. <후한서> 유표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건안 13년(208) 유종(유표의 차남)이 투항하자 조조는 형주를 차지했는데 이때 그는 순욱에게 편지를 써서 ‘형주를 얻은 것이 기쁜 게 아니라 이도(異度, 괴월의 자)를 얻은 것이 기쁠 뿐이오.”


이는 조조가 얼마나 인재에 목말라 있었는가 하는 좋은 증거이다.


만약 괴월이 없었다면 유표의 형주자사 직무수행이 이뤄지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었을 만큼 상황이 급박했다. 과연 괴월의 계책은 무엇이었을까?


“평화로운 상황을 다스리는 사람은 인의를 우선하고 혼란한 상황을 다스리는 사람은 권모를 우선합니다. 군사(軍事)는 그 숫자의 많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적재적소의 인물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형주를 다스리는 데에는 반드시 도덕적인 감화와 무력적인 위협이 필요합니다. 공의 적은 원술과 종적들 아닙니까? 원술의 특징은 대체로 탐욕스럽고 포악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먼저 종적을 멸한 후에 원술을 막아야 합니다. 구체적인 방법은 무도한 자들을 주살하고 그 인재들에게는 등용의 길을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공이 위엄과 덕행을 행하면 모든 사람들이 귀순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남으로는 강릉(江陵)에 근거하고 북으로는 양양을 지킨다면 형주 8군은 격문만 돌려도 평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원술이 공격해온다 해도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유포는 괴월의 이 계책을 받아들여 괴월로 하여금 종적 두목 15명을 불러들인 다음 그들을 모두 참수하고 그들의 군대를 습격했다. 결과 강남(후난성과 후베이성에 해당함)을 모두 평정했다. 유표도 양양에 주둔할 수 있게 되었다. 원술은 손견과 손잡고 유표를 습격하자 황조가 유표를 구원했고 손견은 황조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때부터 원술은 형주 접근을 포기하고 말았다.


양대 주적을 제거한 유표는 훌륭한 정치를 펼쳐 동네방네 소문난 훌륭한 주목(州牧)으로 거듭났다. 땅이 사방 천리에 달하고 병사 10만을 거느렸으며 영토 내에는 만 리가 숙청되었고 모든 사람이 기뻐하며 복종하였으니 실로 명실상부한 ‘독립적인 왕국’이었다. 중원의 선비들이 이를 보고 다투어 형주로 피난을 왔고 유표에게 의탁한 학사들이 모두 1천여 명에 달했으며 유표도 그들을 위로하고 재물로 도와 모두가 구제될 수 있었다. 동시에 그는 학교를 세우고 유학을 진흥시켰으며 형주를 난세 속의 ‘왕도 정치가 시행되는 지상 낙원’이라 불리는 곳으로 만들었다.


유표가 역사에서 중시 받는 이유는 형주라는 곳의 중요성도 한몫 하고 있었다. 형주는 익주와 함께 100개 현을 갖고 있는 규모가 가장 큰 주(州)였고 유비의 세력과 강동의 손씨 세력 및 조조마저 탐내고 있었던 곳이다. 당시 삼대 전투 중 하나인 관도대전도 결국 원소와 조조가 형주를 차지하려고 벌였던 전쟁이었다.


관도대전에서 원소는 사람을 보내 유표에게 원조를 요청했는데 유표는 원소의 청을 허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출병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조조를 도와주지도 않았다. 후일 조조가 오환을 정벌할 때 유비가 그에게 허현(조조의 근거지)을 습격하자고 권유했지만 그는 역이 요지부동이었다. 결과적으로 좋은 기회를 모두 날려 보내게 되었다.


과도대전에서 산에 앉아 호랑이들이 싸우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는 유표에 대해 답답함을 느낀 부하 한숭(韓嵩)과 유선(劉先)이 그에게 말했다.


“호걸들이 함께 다투어 두 영웅이 서로 대치하고 있으니 천하의 무게중심은 장군에게 있습니다. 장군이 만약 성과를 내시고자 한다면 그들 지친 틈을 타는 것이 좋을 겁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면 그중 한쪽을 선택하십시오. 현재 장군께서는 십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편안히 앉아서 관망하고 계십니다. 지지해야 할 사람을 보고서도 돕지 않고 강화를 권하지도 않는다면 결국 양쪽의 원한이 모두 장군에게로 집중될 것입니다.”


괴월마저 이 두 사람의 말에 동조하고 나서자 유표는 한숭을 조조 진영에 보내 정탐하고 상황판단하라고 부탁했다. 조조 진영에 다녀온 한숭은 조조의 위엄과 덕을 자세하게 말하자 유표는 그를 배신자로 낙인찍고 죽이려고 한바탕 조사에 착수했다. 결국 아무 단서도 찾지 못하자 체면 유지차원에서 한숭을 감옥에 처넣었다. 역사학자 진수는 이 사건을 두고 “유표의 외모는 온화하고 품위 있어 보이지만 속마음은 시기심이 많아 일처리가 대체로 이런 식이다.”고 기록했다.


유표는 시기심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큰 뜻도 없었다. 진수의 <삼국지> 곽가전에 의하면 곽가는 “유표는 앉아서 반말이나 해대는 자에 불과합니다.”고 말했다. 조조는 “내가 여포를 공격할 때 유표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으니 그는 관도대전에서 원소를 구원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만을 지키는 놈이다.”


한숭은 얻기 힘든 인재였다. 이런 인재를 적재적소에 쓰지 못하였으니 유표는 실로 이 면에 있어서 유비나 조조에 견줄 바가 못 되는 속 좁은 인간이었다. 여기서 <후한서>에 기록된 한숭이 유표에게 올린 진실하고도 멋진 간언을 감상해보자.


“저의 어리석은 견해에 따르면 조공의 영명함으로 볼 때 앞으로 반드시 천하에서 뜻을 이룰 것입니다. 장군이 만약 조조에게 의탁할 생각이시라면 저를 중원에 파견하여 사신으로 가게 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만약 마음속에 주저하는 바가 있다면 적합하지 않습니다. 폐하는 제가 일단 경사(京師)로 들어갔기 때문에 아마도 저에게 말단 관직이라도 내릴 것입니다. 제가 사양하고 사양하지 않고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사양하지 못하게 된다면 이때부터 저는 천자의 신하가 되어 장군에게는 옛 관리가 됩니다. 천자에게 있을 때에는 천자를 위하게 될 것이며 더 이상 장군을 위해서는 죽을 수 없을 테니 청컨대 장군께서는 심사숙고하십시오.”


한숭을 이렇게 냉대했을 뿐만 아니라 유표는 인재등용에 문제가 많았다. 유표는 유비가 찾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먼 거리까지 나가 마중하였으며 상빈의 예로 대접했고 군대까지 나눠주었다. 그러나 유표는 유비를 항상 경계했고 중용하지 않았다. 뒤늦게 유비가 위협이 되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연회를 베풀어 유비를 죽이려고 했는데 유비는 소피보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밖에 나가서 그 걸음으로 도망가 버렸다(홍문연을 연상). 곽가는 유표가 유비를 대한 태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자신도 유비를 막기에 재주가 부족함을 알기 때문에 유비에게 중임을 맡기면 통제할 수 없을까 염려할 것이고 또 가벼운 임무를 맡기면 유비가 그를 위해 일하지 않을 것입니다.”


유표는 또 그에게 귀의한 1천여 명의 지식인들의 안전을 보장해주고 의식주를 제공했을 뿐 적당히 알맞게 인재로 등용시키지도 않았다.


유표는 후사처리에도 문제가 심각했다. 여기서 말하는 후사처리는 계승자 선정을 뜻한다. 유표에게는 유기와 유종이란 두 아들이 있었다. 둘 다 정실의 소생이다. 그런데 유표의 후처인 채부인은 친정 쪽의 조카딸을 유종에게 시집보냈기 때문에 유종이 후계자가 되기를 바랐고 실제로 유표를 설득하여 일을 성사시켰다.


진시황제부터 시작해 적자가 아닌 서자를 후계자로 세워 성공한 사례가 매우 드물다. 장남은 집안의 전통과 대통을 이으려는 야망이 큰 반면에 차남부터는 대세에 따르는 경향이 있다. 조조가 형주를 공격해오던 건안 13년(208) 유표는 병들어 죽었다. 장남인 유기는 조조를 대항하는 항조파(抗曹派)인데 비해 차남인 유종은 후계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조에게 투항해 가문에 먹칠하는 항조파(降曹派)였다. 유표가 일궈놓은 강산을 후계자가 조조에게 바쳐버렸다. 이로서 유표의 강산은 역사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유표는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큰 뜻이 없고 넓은 흉금과 도량도 없었다.


“조그마한 땅 한 뙈기 지키며 부인과 아이들 그리고 집 한 채 정도를 소유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너무 지나친 평가기이긴 하나 결과적으로 유표는 보수적인 인물임에는 틀림없었다. 하지만 한 때 형주를 천하 난세 속에서도 지상낙원으로 만든 그의 공로는 마멸할 수 없이 역사에 길이 남아 내려오고 있다. ‘삼국지 강의(品三國)’로 유명해진 이중턘은 유표의 생애에 대해 이렇게 요약했다.


“난세에 태어나지 않고 치세에 태어났다면 훌륭한 관리였을 것이다. 유표는 실로 불행한 행운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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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재해석⑧ 대세를 읽지 못하고 수성만 하다가 자멸한 유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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