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9-22(수)
 


[동포투데이] 근 현대사 이래 동방이 세계에서 점하고 있는 지위를 보면 말 그대로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 싶이 중국의 근대사는 한 부의 재난, 낙후와 얻어맞는 굴욕 사였고 중국 국민이 구국의 길을 탐색하고 자유를 실현하는 탐색사였다. 또한 중국의 근대사는 저항의 역사였고 특히는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민족해방을 실현하는 역사였으며 봉건사회를 뒤엎고 국민의 부강을 실현하는 투쟁사였다.

 

그럼 일찍 광활하고도 부유하던 동방의 중국이 어찌하여 수백년 전 서방에 의해 압도되면서 붕괴를 초래하게 되었을까? 역사발전 중심의 전이는 구경 그 어떤 참고적 증거로 되는가? 그리고 동서방 각 측의 현실상황과 미래발전의 방향은 오늘에 와서 그 어떤 태세로 출현하고 있는가? 이런 문제를 두고 우리는 진짜 명석하고도 이성적인 안광으로 반성하고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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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로 많은 학자들은 동서방 역사의 변천인소에 대해 수차 탐구하였는바 대부분 학자들의 분석 각도는 대부분 경제로 편향, 군사에 대한 해부와 분석은 상대적으로 아주 적었다. 하지만 실제상 전반 인류사회의 역사가 어떻게 군사와 이탈할 수 있겠는가? 호호탕탕한 중국사를 놓고 볼 때, 송조로부터 명조와 청조에 이르기까지의 분열, 합병 그리고 매 타협 등은 모두 군사기술의 작용과 갈라놓을 수 없었다.

 

군사기술의 발전, 그리고 군사 활동은 정치를 추동하기 마련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동 서방의 군사력을 비교하면 더욱 진일보 피차일반의 역사 분류 원인에 접근할 수 있을 것 같다.

 

중국 송조의 화기가 중요하던 발전시기, 하지만 그 시기 해상역량의 전략능력은 점차 육지의 강권을 압도했다. 당시 중국은 해상과 육지란 이 두 역량의 대비가 연변(演变) 중에 있었고 점차 강자로 될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 중국의 송조로부터 청조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관외 지역과 장성 이남의 전략경쟁에서 중국 왕조와 남방의 해양세계 사이의 교류와 충돌은 모두 하나의 중요한 역사주제로 되고 있었다. 때문에 해륙권력과 해륙전략의 발전모델의 경쟁에서 이미 누군가 복선을 깔기도 했다. 아울러 1840년, 영국의 함포가 광동을 포격한 것은 그 도화선에 불과했다. 송원의 변천은 육군을 중시하고 해군을 홀시하는 발전의 결과를 낳았고 명조시기 정부는 원양개척을 철저히 포기하였으며 일심으로 북방의 흉노에 대적하려 했지만 오히려 남왜(南倭)와 홍이(红夷-네덜란드 열강)의 침범을 당했다.

 

청조시기에 이르러 해륙권력의 발전은 재차 중국역사의 정상에 도달했다. 하지만 해양은 피동에 처했다. 하긴 청조말년 역사를 갖고 동 서방 역사의 변혁을 판단한다면 매우 불 완정한 것이다. 청조말년의 국면은 사물발전의 마지막 결과에 불과하며 진정 그 원인과 과정은 송조시기부터 그 침전이 누적되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의 문제만은 사색의 가치가 있는바 그것은 곧 명청 시기 화기기술과 해상사업의 발전은 군사방면의 일정한 실력을 갖추게 했다.

 

하다면 왜 최종 실질적인 변혁과 승리로 이어질 수 없었을까?

 

사실은 그래도 당시 명청의 시야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시기, 통치자들은 복잡한 국내 분쟁과 평화를 우려하면서 화기 등 군사장비에 대한 혁신과 개발을 중단, 이것이 곧바로 장비의 세대교체가 정지되도록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다른 한편 육지에서 성벽건축의 기술이 발달하고 정련될수록 화기는 그 기능을 발휘할 전장이 없는 국면에 처하게 되었으며 이 역시 통치자들로 하여금 화기발전의 결심을 동요하게 했다. 하지만 당시 서방의 식민주의자들은 아주 세심하게 이를 이용, 이들은 직접 육지에 올라 도발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기민하게 연해요새들을 공략해서는 식민지 거점으로 만들곤 했다.

 

일찍 세계 각 국보다 멀리 그리고 많이 앞섰던 중국 ㅡ 하지만 혁신이란 두 글자를 외면하다보니 모든 것은 탁상공론에 불과했다. 서방열강들이 늘 아시아,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에서 소수의 군사로 다수의 군사를 이기게 된 것은 무기장비가 앞서서일 뿐만 아니라 군사역량의 기술진보와도 매우 큰 관계가 있었다.

 

청조시기의 중국은 비록 부단히 무기장비를 들여오고 개진했지만 가장 유효적인 신형 무기장비 효능의 조직방식 및 발생하는 변혁에 들어서는 상당히 제약성이 있었다. 또한 조직기술과 장비기술의 공동 진보에 있어서 흔히 소수의 정예군 혹은 새로 편성되는 군부대에 국한되었고 조직체제 심지어 신식장비의 철저한 보급을 실현할 수 없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청조 말년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역사의 발전은 곡선적인 진전이었으며 직선적인 발전은 아주 드물게 표현되었다. 중국 근대의 ‘낙후’는 단시기 동안에 조성된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장시기 동안 정체되어 내려온 결과도 아니다. 중국인은 마땅히 역사로부터 다시 자신감을 되찾아야 한다. 중국인들은 중국굴기의 전경에 대해 기뻐하고 있으며 아울러 역사를 두고 내려온 각종 ‘함정’이 더 이상 없기를 희망하고 있다.

 

역사의 교훈에 대해 반성해보노라면 적극적인 일면도 보여 지고 있다. 아울러 역사적으로 소위 ‘진화’는 ‘도전과 응전’ 모델 중에서 발생한다. 하지만 그 발생작용의 방식을 보면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으며 능력의 발전은 흔히 만족의 수요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만약 수요가 없으면 동력이 부족하게 되며 능력 역시 굴기로 이어질 방법이 없는 것이다.

 

솔직하게 말해 기술에 들어서는 당시 중국도 진작 얼마든지 대응할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결과는 중국 자체가 더욱 선진적인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포기 했던 것이다. 때문에 시종 세계조류의 선두에서 달리려면 주동적으로 용왕매진하고 압력이 나타나는 것을 기다려 반응을 보이는 관례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즉 압력이 나타나기를 기다려 반응을 보인다면 그 때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늦은 것이거나 침중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날로 새로워지는 상태를 유지하자면 의식전환이 수요 된다. 하지만 의식전환이란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것이 아니며 부단히 현 상태에 대한 멈출 줄 모르는 추구와 사색이 필요한 것이다. 오늘 와서 그 치욕적인 역사를 회고하면서 역사적 교훈을 잘 섭취해야 한다. 즉 낙후하면 얻어터진다는 법칙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가 부유하고 국민이 강대해야 만이 일체의 재난을 피할 수 있으며 영원히 동방대지에 우뚝 솟아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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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리드하던 중국 100여년 사이에 왜 몰락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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