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18(월)
 

 

●김정룡(다(多)가치 포럼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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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의 명사들은 대체로 문교(文敎)에만 뛰어났지 군정(軍政)에는 무능했다. 삼국시대 명사들은 관념을 바꾸는 데 힘썼지 조금도 우환의식이 없었다. 그래서 시대가 극렬히 변화할 때 새롭게 조성된 잔혹한 투쟁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점점 역사에서 도태되어 정치적인 고아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사들은 잘 난 척하는 고질병에서 벗어나지 못해 주군의 심기를 건드려 죽임을 당한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대표적인 예로 공융, 예형, 양수, 최염을 들 수 있다.


공융은 공자의 20대 손이다. 어릴 적부터 신동이라 불릴 만큼 재능이 뛰어났고 동한 말년에 사족을 대표하는 인물로 부각되었다.


공융은 경학에 밝은 것은 두말할 것 없고 문필이 뛰어나 문인으로서의 영향력도 상당했다.


그러나 공융은 대가 너무 바르고 성품이 너무 강직하여 어느 곳에 가나 환영 받지 못했다.


건안칠자(建安七子, 건안 연간(196-220)에 활동한 7명의 문인을 함께 일컫는 말. 처음으로 칠자를 언급한 사람은 조비)의 한 사람으로, 좌중엔 손님이 가득차고 술잔에는 술이 비지 않았다고 한다. 십상시(十常侍)의 전횡을 비판한 청의파 선비로 유명했으며,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노식(盧植)의 부장으로 활약했다. 동탁(董卓)이 권력을 잡자 그의 포악함을 비판하다가 북해의 상(相)으로 전출되었다.


당시 북해는 20만을 넘는 기주 황건적의 침입으로 크게 피폐해졌었으나 공융은 황건적을 몰아냄과 동시에 영내에 학교를 세우고 도덕성의 회복을 장려하는 등 통치에 힘썼다. 초평 4년(193년) 공융은 도창(都昌)에 주둔하다가 황건적의 잔당인 관해(管亥)의 습격을 받고 포위되어 위기에 빠졌으나 유비(劉備)와 태사자(太史慈) 등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이후 원담(袁譚)과 거듭 싸움을 벌인 끝에 패하여 영지를 빼앗겼고 처자식까지 모조리 붙잡힌 채로 도망쳤으나, 마침 황제의 부름을 받았으므로 허(許, 許昌)로 가서 장작대장(將作大匠), 소부(少府)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공융은 당시 황제를 옹립하며 점차 야심을 드러내고 있던 조조(曹操)와 자주 대립했는데, 거듭 글을 올려 조조의 정치를 비판하며 망신을 주었다. 조조 역시 공융을 증오하며 꺼렸으나 워낙 공융의 명망이 높았으므로 겉으로는 용인하는 척 했다.


건안 13년(208년) 조조의 형주 정벌에 분개하여 조조를 비판했으니 마침내 조조의 명령으로 처형당했고 가족도 몰살당하였다.


공융을 처형한 표면적인 이유는 예형과 함께 서로를 성인(聖人)인 공자와 안회로 지칭한 불경을 범했으며, 기근이 들어 모두 죽게 생겼을 때 아버지가 불초한 인간이라면 그를 살리느니 차라리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이 낫다는 패륜적인 주장을 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조조의 심기를 심하게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후세 사람들은 당시 최고 명사 공융을 죽인 조조를 비인간적인 행위라고 비난하지만 조조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오갈 데 없는 유랑신세였던 자를 거둬주었더니 주인의 발뒷꿈치를 물어먹은 자는 용서할 수 없다는 결론이었을 것이다.


예형은 공융이 조조에게 천거한 인물이다. 예형은 문재가 있고 성품이 강직하였다. 황조가 강하태수로 있을 때 아들 황역이 크게 빈객을 모아 잔치를 하는데, 이때 앵무새를 바치는 자가 있자 황역이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앵무부를 짓게 하니 예형은 즉석에서 지어내 문장을 과시하였다. 공융의 거듭된 추천을 받고 조조가 예형을 보고 싶어 하였으나 예형은 병을 핑계대고 가지 않았으며, 다시 방자한 말을 하여 조조를 욕하니, 조조가 분노하여 그를 불러서 고사(鼓史)를 삼았다. 조조가 빈객들을 많이 모아 놓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고사의 복장으로 갈아입게 하여 그를 우세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예형은 서슴없이 어양참과(漁陽參撾)에 따라 북을 쳐 비장한 음절을 낸 다음 다시 조조 앞에 가서 나체로 옷을 갈아입고 북을 치면서 갔다. 공융이 물러가서 그를 꾸짖으며 조조에게 가서 사죄하게 하니, 예형은 거짓 응낙하고 조조 면전에 가서 크게 꾸짖어댔다.


대중 앞에서 망신당한 조조가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어진 이를 해쳤다는 이름을 받을까 두려워서 그를 유표에게로 보내버렸다. 유표가 처음에는 그를 소중히 여겼으나 얼마 안 가서 그가 오만하므로 용납하지 못하고 그를 또 강화 태수 황조에게로 보내버렸다. 황조는 급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끝내는 그가 불손한 말을 한다고 죽여 버렸는데 그의 나이 겨우 26세였다. 예형의 죽음으로 공융에 대한 조조의 감정은 악화되었다.


양수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헌제 건안 연간에 효렴으로 추천되어 낭중(郎中)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조조의 주부(主簿)가 되었다. 처음에는 조조도 그의 총명함을 좋아했다고 한다.


한번은 조조가 정원을 건설하라고 명령했다. 장인(匠人)들은 미리 조조에게 설계도를 보여주었다. 조조는 아무 말도 없이 정원의 문 앞에 활(活) 자 하나만을 적었다. 장인들은 도저히 그 뜻을 알 수 없어서 황급히 양수를 찾아가 물었다. 양수는 이렇게 말했다.


“승상이 문(門) 앞에 활(活)자를 썼으니, 이는 넓을 활(闊) 자를 의미합니다. 정원의 크기를 줄이시오!”


조조는 장인들이 고친 정원을 보고 마음에 들어서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아맞혔는가?”라고 물었다.


장인들이 양수가 일러주었다고 하자 조조는 그의 총명함을 칭찬했다고 한다.


양수가 조조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계륵의 의미 간파’이다.


조조가 한중(漢中)을 평정하려 했으나 연전연패했다. 촉한(蜀漢)의 장수 마초의 수비를 격파하기는 어렵고, 철군하자니 촉한 군사들의 웃음거리가 될까봐 창피하여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닭곰탕이 식탁에 올랐는데, 그 안에 계륵(鷄肋, 닭의 갈비)이 있어서 무언가를 깨달았으나 말하지 않았다. 그때 한 부하가 들어와 그날 밤의 암호를 무엇으로 정할지 묻자, 생각나는 대로 ‘계륵!’이라고 말했다.


양수는 그날 밤의 암호가 계륵이란 말을 전해 듣고 서둘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보고 이상하여 물었다.


“곧 돌아갑니까?”


이에 양수가 대답했다.


“곧 철군하기로 결정하신 것 같다. 계륵은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버리기도 아까운 것으로 무익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조조는 양수에게 마음을 들킨 것이 부끄럽고, 또한 앞으로 그로 인해 내부에서 동요가 일어날 것이 두려워 양수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일설에 의하면 조조는 본래 철군할 마음이 없었는데 양수가 계륵의 의미를 임의로 해석하고 풀이하여 전략전술을 망친 죄를 물어 죽였다고 한다. 신하는 너무 총명해서 앞서가도 문제가 발생한다. 마치 회사에 오너보다 더 똑똑하고 영리한 직원이 있어 불편한 것과 마찬가지 도리이다. 신하는 알고도 모르는 척,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하는 처세술이 필요하다. 양수는 너무 총명하고 똑똑하고 영리해서 화를 당한 케이스에 속한다. 또 다른 일설에 의하면 조조가 양수를 죽인 이유는 그가 조조의 경쟁자였던 원술의 생질이었고, 후계자 선정에서 조비보다 조식을 지지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최염은 문무를 고루 갖춘 드문 명사였다. 대장군 원소가 최염에 관해 듣고 초빙했다. 원소의 군대는 수적으로는 가장 강력했지만 기강이 말이 아니었다. 사졸들이 몹시 교만하고 난폭하여 분묘를 파헤치는 파렴치한 행위까지 저질렀다. 이에 최염이 원소에게 간언했다.


“옛날에 손경(孫卿, 순자의 존칭)이 말하기를 ‘병사들이 평상시에 가르침을 받지 않고 무기를 날카롭게 하지 않는다면 비록 은의 탕왕이나 주의 무왕 같은 성왕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을 이기게 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지금 길에는 시체를 거두어주는 사람이 없어 유골이 드러나 있고 백성은 은덕은 입지 못하고 있으니 응당 군현에 칙령을 내려 유골과 썩은 시체를 묻게 하여 측은하고도 애통해하는 당신의 인자한 마음을 나타내시고 주 문왕과 같은 인정(仁政)을 따르십시오.”


원소는 최염을 기도위로 삼았다.


원소가 조조와 생사결단의 최후 일전을 준비하려고 하자 최염이 말했다.


“천자께서 허창에 계시고 백성은 천자를 돕고 순종하기를 희망하니 변방지역을 지키면서 직무를 보고함으로써 구역을 안정시키는 것이 낫습니다.”


원소는 최염의 간언을 무시하고 관도대전을 벌인 결과 크게 패했고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하였다.


원소가 죽고 나서 그의 아들 원담과 원상이 서로 다투어 최염을 얻으려고 경쟁했다. 최염은 병을 핑계로 간곡히 사양했는데 이 일로 죄를 받아 감옥에 갇혔는데 음기와 진림의 구원으로 사면되었다.


조조가 원씨를 격파하자 최염은 조조에게 귀의했다. 조조가 병주를 정벌할 때 최염을 업성에 남겨 조비를 보좌하게 했다. 태자 조비는 자주 수렵을 나갔는데 옷과 수레를 수렵용으로 바꾸고 머릿속은 짐승을 쫓을 생각으로 가득 찼다.


최염은 글을 올려 간언했다.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놀이와 사냥에 정신을 잃는 것을 <사서>에서 경계한 바 있고 노 은공(魯隱公)이 물고기를 보고 끌리는 것을 <춘추>에서 비난했다고 들었는데 이것은 주공과 공자의 격언이자 <상서>와 <춘추> 두 경전에서 명확히 밝힌 진리입니다.”


태자 조비가 답했다.


“이전에 당신의 좋은 충고로 여러 차례 고매한 이치를 깨달아 수렵용품을 이미 파기하게 했고 말 탈 때 입는 옷도 버리게 만들었소. 지금 이후로 이와 유사한 일이 또 발생한다면 충고를 해주시오.”


조조는 최염을 동조(東曹)의 관직에 임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백이의 풍격이 있고 사어(史魚)의 강직함이 있어 탐부(貪夫)는 그대의 명성을 사모하여 청렴하게 되었고 장사(壯士)는 그대의 명예를 숭상하여 떨쳐 일어났으니 그대는 시대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동조의 관직을 제수하니 그 직무를 이행하도록 하라.”


조조가 후사를 세우는 문제를 결정하지 못해 봉하는 문서로 은밀히 외부에 자문을 구했다. 그 중 최염만이 봉하지 않은 편지로 대답했다.


“제가 듣건대 <춘추>의 뜻에 의하면 태자를 세울 경우에는 맏아들로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오관장(五官將, 조비)은 어질고 효성이 지극하며 총명하므로 정통을 이어야 합니다. 저 최염은 죽을 각오하고 이것을 지키겠습니다.”


조식은 최염 형의 사위이다. 조조는 최염의 공정함을 존중하며 감탄하고 중위(中尉)로 승진시켰다.


최염은 음성과 자태에 기품이 있고 눈썹은 시원스럽게 퍼져 있고 두 눈은 밝으며 수염은 길이가 넉 자나 되어 더욱 위엄이 있었다. 조정 대신들은 그를 우러러 따랐으며 조조조차도 그를 존경하면서도 꺼려했다.


최염이 조조에게 양훈을 인재로 추천했다. 조조가 위나라 왕이 되자 양훈이 표를 올려 조조의 공적과 정벌의 노고를 칭송하고 성덕을 찬양했다. 이 때문에 추천한 최염의 체면에 먹칠 되었다. 최염은 양훈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신의 상주문을 살펴보니 위 왕의 사적이 우수할 ‘뿐[耳, 而와 같은 의미]’입니다. 시대여! 시대여! 응당 변혁해야 할 시대입니다.”


최염의 본래 의도는 의를 논한다는 자들이 견책하기만 좋아할 뿐 정리(情理)를 살피지 않는 것을 풍자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조조에게 최염의 이 편지가 시대를 무시하면서 조조를 원망하고 비방한 것이라고 말했으므로 조조는 화가 나서 최염을 노예로 만들고 감시하도록 했는데 최염은 조금도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자 주음을 내렸다.


삼국시대 연구가들은 위 네 사람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왜냐하면 이 네 사람보다 조조의 심기를 심각하게 건드린 자들도 많은데, 예하면 장수 같은 자는 조조의 아들과 조카를 죽이고도 환대 받았는데 이에 비하면 이 네 사람의 죄는 세발에 피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조조도 칠정을 지닌 사람이고 대의를 꿈꾸는 영웅으로서 심기를 건드린 자를 전부 모조리 죽일 수는 없고 때에 따라 필요에 따라 경중과 상관없이 죽이기도 하고 관용을 베풀어 살려두기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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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재해석⑭ 조조의 심기를 건드려 죽임을 당한 명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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