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18(월)
 

 

●김정룡(다(多)가치 포럼 위원장)

 

 

76.png

조조는 천자를 받들어 모신 이후 전투마다 승리하여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영원한 승자란 없듯이 조조도 전투에서 대패하여 삼국정립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어 그의 인생에서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조조가 세상에 이름을 떨친 이후 처음 대패한 전쟁이 바로 적벽대전이었다. 적벽대전에서 천재적인 제갈량이 귀신처럼 바람의 방향을 바꿔놓았고 이 바람이 주유의 부하 황개가 조조의 진영의 배에 지른 불길에 키질이 되어 조조가 대패했다고 하는데 이 스토리는 나관중이 지어낸 문학적인 이야기일 뿐 사실이 아니다. <삼국지>를 비롯해 여러 사서에서는 당시 조조 진영에 역병이 돌아 사망자가 속출하자 조조가 배에 불을 지르고 퇴각했다고 기록했다.

 

물론 조조의 적벽대전의 패배 이유가 역병에만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사실이 그랬다면 조조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곽봉효(봉효는 곽가의 자)가 있었다면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통탄했다. 바꿔 말하자면 적벽대전 당시 곽가가 살아있었다면 그가 반드시 교묘한 계책을 내어 승리를 이끌어내고 조조가 패배에서 벗어나 승리하도록 하며 위험을 평온한 상태로 바꿀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만약 곽가가 있었다면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배하지 않았더라면 역사는 다르게 흘렀을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 추측이고 역사는 추측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안타까운 입장에서 나온 말이다.


나관중은 조조의 탄식을 문학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성했다. 조조가 화용도(華容道)에서 빠져나와 남군(南郡)에 이르자 조인이 주연을 베풀어 위로하였는데 여러 모사들이 모두 자리에 있었다. 조조가 갑자기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통곡하였다. 여러 모사들이 ‘승상께서는 재난을 만났을 때에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셨고 지금은 안전하게 성안으로 돌아와 군사들은 배불리 먹고 있고 말도 사료를 충분히 먹었으며 군대를 재정비하여 원한을 갚을 수 있는데 도리어 통곡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조조는 ‘내가 통곡한 것은 곽봉효 때문이오. 봉효가 있었다면 결코 내가 이런 실수를 저지르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오.’라고 했다. 이어서 그는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크게 곡하면서 ‘슬프도다, 봉효여! 애통하도다, 봉효여! 안타깝도다, 봉효여!’라고 했다. 이에 여러 모사들이 모두 침묵하여 부끄러워했다.


곽가가 군사책사로 얼마나 뛰어났기에 조조가 그토록 슬프고 애통하고 안타까워했을까?


곽가는 본래 원소의 사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곽가는 원소의 무능을 보아내고 그의 모신(謀臣) 신평과 곽도에게 말했다.


“무릇 지혜가 있는 사람은 주군이 될 사람을 헤아려야만 백 번 군사를 일으켜 백 번 완벽하게 공명을 세울 수 있는 것이오. 원공(袁公)은 한갓 주공의 낮은 선비를 모방하려고 하고 인재를 등용하는 기틀을 알지 못하고 있소. 일을 처리할 때 생각은 많으나 요령이 적고 모략을 좋아하지만 결단력이 없어 그와 더불어 천하의 큰 난국을 구제하고 패왕의 대업을 정하기는 어려울 것이오.”


그리고는 마침내 원소를 떠났다.


곽가는 영천군 양적현(陽翟현) 사람이다. 영천에 희지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책략이 뛰어난 인물이므로 조조는 그를 매우 중용했지만 일찍 죽었다. 아마 영천의 인재들이 수명이 짧았던 모양이다. 이런 일이 닥칠 줄 몰랐던 조조가 순욱에게 부탁해 말했다.


“희지재가 죽은 후로는 더불어 일을 계획할 사람이 없소. 여남과 영천에는 본래 우수한 인물이 많거늘 누가 희지재를 계승할 수 있겠소?”


순욱은 곽가를 추천했다. 조조는 곽가를 만나보고 천하의 일을 논했다. 그때 마침 유비가 달아나서 예주목으로 임명되었다. 어떤 이가 조조에게 말하기를, “유비는 영웅의 포부를 갖고 있으므로 지금 도모하지 않으면 후에 반드시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조조는 그것을 곽가에게 물어보았다. 곽가가 대답하기를 “그것은 옳은 말입니다. 공은 검을 뽑아 의로운 군사들을 일으키고 백성을 위해 어지러움을 제거했습니다. 성의를 보고 신의에 의지하는 영웅을 불러도 충분하지 않을 듯 걱정입니다. 지금 유비에게는 영웅이라는 평가가 있고 우리 쪽으로 몸을 돌렸는데 그를 살해하면 현인을 살해했다는 평가를 듣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지혜가 있는 선비들은 의심을 품을 것이며 마음을 바꾸어 다른 주군을 택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공은 누구와 함께 천하를 평정하겠습니까? 한 사람의 화근을 제거하려다가 천하의 기대를 막아 어찌 위험하게 하는 일을 살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조조는 크게 만족하여 말했다.


“그대를 얻었소. 내가 대업을 이루게 할 이는 바로 이 사람이구나.”


곽가도 역시 대만족이었다. 기뻐서 이렇게 말했다.


“조공은 나의 주공이시다!”


조조는 즉시 표를 올려 곽가를 사공군좨주(司空軍祭酒)로 삼았다.


조조는 여포와의 세 차례 전투로 병사들이 피로를 느끼자 철군을 준비했다. 곽가는 철군을 반대하고 다시 전투를 벌일 것을 극력 주장하고 전투를 벌이면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단정했으며 결과적으로 여포를 사로잡았다.


조조가 원소와 관도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강동에서 천리 진지를 구축한 손책은 강을 건너 북쪽으로 허도를 습격하고자 했다. 조조의 진영의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모두 두려워하고 있는데 곽가가 이일을 헤아려 보고는 말했다.


“손책은 이제 막 강동을 병탄했고 그에게 주살된 자들은 모두 영웅호걸로서 다들 사람을 얻기 위해 죽을힘을 다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손책은 경솔하고 대비도 없으니 비록 백만의 군대가 있다고 해도 혼자 중원에 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만일 자객이 숨어 있다가 일어나면 단지 한 사람의 적일뿐입니다. 제가 그를 보건대 반드시 필부의 손에 죽을 것입니다.”


과연 손책은 장강에 이르러 건너기도 전에 허공(許貢)의 식객에게 죽임을 당했다.


원소가 죽고 나서 조조는 그의 잔재세력인 아들 원담과 원상을 정벌하러 나섰다. 조조의 기세가 무서울 정도로 강해 연전연승하자 여러 장수들은 다시 전투를 벌이자고 주장했지만 곽가는 철군을 주장했다.


곽가가 말했다.


“원소는 두 아들을 사랑했으나 생전에 누구를 세워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곽도와 봉기가 그의 모신이 되었지만 반드시 원씨 형제는 함께 다투다가 서로 어그러질 것입니다. 우리 군대가 그들을 압박하면 그들 형제는 군대를 합쳐 우리와대치할 것이고 느슨하게 풀어주면 그들 형제는 다투려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차라리 남쪽으로 가서 유표를 정벌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형세의 변화를 기다렸다가 변화가 생긴 후에 공격하면 한 번의 출동으로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조는 곽가의 계책을 받아들여 남쪽으로 정벌을 떠났다. 군대가 서평에 이르러서 보니 과연 곽가의 예측대로 원담과 원상은 기주를 차지하려고 다투고 있었다. 원담은 원상에게 패하여 달아나 평원을 지켰으며 아울러 신비를 보내 조조에게 항복하겠다며 목숨을 구걸했다.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 그를 구해주었으며 마침내 업성을 공략하고 또다시 남피에서 원담을 공격하여 기주를 평정했다.


조조가 원상과 삼군의 오환족을 정벌하려고 할 때 부하들은 대부분 유표가 유비를 파견하여 허도를 습격할 것이라고 여기고 두려워했는데 곽가만은 이렇게 말했다.


“명공이 비록 천하에 위세를 떨치고 있지만 호족(胡族)은 명공이 먼곳에 있는 것만 믿고 반드시 방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방비하지 않는 것을 틈타 갑자기 그들을 공격하면 격파해 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원소는 항상 백성과 오랑캐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며 원상 형제도 아직 생존해 있습니다. 지금 원씨가 다스리는데 주의 백성은 공의 위세를 두려워하며 잠시 귀순한 것이며 명공께서 아직 은덕을 베푸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지금 만일 원상을 남겨놓고 남쪽으로 정벌하러 가시면 원상은 오환족의 도움에 의지해 다시 주인을 위해 죽음을 마다치 않던 신하들을 불러들이게 될 것이고 호족이 다시 한 차례 충돌하면 백성과 오랑캐 모두 호응할 것입니다, 그러면 오환의 선우 답돈은 또다시 남쪽으로 중원을 넘보려고 야심을 품을 것이니 그가 만일 제업을 이루려는 야심을 이루면 아마도 청주와 기주도 우리 소유가 아닐 것입니다.”


다음 곽가의 말이 중요했다.


“유표는 단지 앉아서 얘기하는 세객(說客)일 뿐입니다. 그는 자신의 지략이 유비를 제어하는데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유비에게 중임을 맡기면 제어할 수 없고 하찮은 직책에 앉히면 쓸모가 없어집니다. 공께서는 비록 나라를 비워두고 멀리 정벌하러 가더라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곽가의 판단이 정확히 맞았다. 유표는 움직이지 않았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곽가는 깊은 통찰력이 있고 모략을 세우는 데 뛰어났으며 사리와 인정에 통달했다.”


조조는 곽가의 예리한 예측과 판단에 탄복하여 말했다.“오직 봉효 만이 나의 뜻을 확실히 알 수 있소.”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천재적인 지략가는 서른여덟에 병이 심해 숨졌다. 조조는 장례식에 직접 참석하여 매우 슬퍼하면서 순유를 비롯한 여러 신하들 앞에서 말했다.


“여러 분은 모두 나와 동년배인데 오직 봉효만이 가장 젊소. 천하를 평정하는 일이 끝나면 그에게 뒷일을 부탁하려 했는데 중년의 나이에 요절했으니 이는 운명이오!”


곽가가 조조의 책사로 일한 지가 11년이었고 이 기간 동안 조조를 승승장구하게 했다. 그의 공이 누구보다 컸으므로 조조는 천자에게 표를 올려 말했다.


“군좨주 곽가는 정벌에 따라나선 지 11년이 되었습니다. 중대한 논의가 있을 때마다 적을 만나면 변화에 따라 대처했습니다. 신이 미처 책략을 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도 곽가는 쉽게 처리했습니다. 천하를 평정하는데 그의 계략과 공적은 높습니다. 불행하게도 명이 짧아 대업을 마치지 못했습니다. 곽가의 공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진실로 잊을 수 없습니다. 그에게 식을 8백호를 더해 이전의 것과 합쳐 1천 호가 되도록 해주십시오.”


곽가가 죽은 해인 건안 12년(207)에 유비는 제갈량을 책사로 맞이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곽가의 죽음은 조조의 남방 점령과 천하제패에 제동이 걸렸고 무일푼으로 알거지였던 유비는 제갈량을 만나 비로소 운이 트기 시작했다.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삼국지' 재해석⑰ 하늘이 내린 최고 군사가 곽가(郭嘉)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