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동포투데이] (전번 계속)

 

포병 전문가로 된 장군


중국 노농홍군 제3군단은 1930년 7월 31일 호남성 평강에서 군단 산포련을 창설했다. 당시의 포병이었던 한 노병은 무정이 이 해 말 포병련에 있었다고 회상한다. 무정은 소련에서 포병 기술을 배워 귀국해 포병 교관으로 있다가 제3련(第三連) 연장(連長)으로 되었다. 1931년 5월, 강서피두에서 중국 노농홍군 중앙군사위 포병퇀이 창설, 초대 퇀장이 실직행위가 있었기에 파면되고 대신 그해 6월에 무정은 이 포병퇀 제2임 퇀장으로 임명됐다. 홍군 시기에 전공이 혁혁한 무정은 승진이 빨랐고 급기야 중국공산당 군사위원회에 들어가기도 했다. 당시 아무런 정치적 배경이 없는 외국인이었던 무정으로서는 파격적인 승진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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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12월부터 1934년 10월까지 장개석은 다섯 차례에 거쳐 서금의 홍군을 포위토벌했다. 특히 5차의 포위토벌로중국 공산당의 소비에트 지역 대부분을 장개석 군대가 점령하고 장악했다.


이렇게 수세에 몰리자 중국 공산당 중앙과 중국 노농홍군은 강서성 서금에서 가까운 안전지대로 근거지를 옮기기로 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2만 5000리 장정이다. 1934년 10월 14일에 출발하여 1936년 12월 12일에 섬서성 연안에 도착한 기나긴 대행군이었다.


장정 기간 동안 무정은 중앙군사위원회 직속 포병부대 지휘관으로 공격할 때나 후방 차단 때나 항상 전형적인 화력지원 임무를 맡았다. 한 노홍군이 쓴 ‘나원발 회고록(罗元发回忆录)’에서 무정의 업무 성격을 언급한 기록이 있었다.


“11월 하순 중앙군사위원회는 4개 종대로 나뉘어 신안(新安)과 전주(全州) 사이에서 상강을 건너 적의 4차 봉쇄선을 뚫기로 했다. 이는 대장정 시작 이래 가장 긴장되고 치열했던 전투였다. 우리 5사단은 팽덕회 군단장의 명령에 따라 밤낮 급행군으로 하루 100여 리씩 줄달음치면서 상강나루터를 먼저 점령했다. 사단장은 “좀 있으면 무정 동지가 군사위원회 종대와 제3야전지대의 사령관이 되어 포병영, 공병영, 운수 제1대대 그리고 부속병원을 포함한 기술병종을 지휘하게 될 것이다”라고 전해왔다. 후에 무정은 홍군 제3군단 포병영 영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장정 시기 무정의 중요한 역할


장정 도중 무정의 중요한 역할에 관해서는 ‘장정: 전대미문의 이야기(长征:前所未闻的故事)’에서 찾아볼 수 있다. “팽덕회의 옥중 진술에 따르면 그때 사람들은 점점 더 두 홍군 군단 간의 충돌을 몹시 걱정했다. 특히 팽덕회는 홍군 제1군단과 연락이 끊길까 봐 걱정했다. 안내자가 없었기에 홍군 제1군단은 아계의 근처에서 발이 묶였다고 하며 그 당시 무전의 비밀번호가 바뀌었기 때문에 팽덕회는 홍군 제1군단과 연락할 수 없었다. 그는 새 비밀번호를 만들어 믿을 만한 조선인 장교인 무정에게 건네는 한편 나침반을 하나 주면서 임표와 섭영진에게 연락하게 하였다. 섭영진의 회상에 따르면 당시 홍군 제1군단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으며 그가 받은 유일한 전보는 그 자리에서 대기하라는 것뿐이었다. 당시 무정은 팽덕회의 두터운 신임을 갖고 있었다.


중국 노농홍군의 대장정은 하루도 쉼없이 장개석 군대와 크고 작은 500여 차례의 전투를 치르면서 이뤄낸 기아와 고난의 행군이었다. 장정이 시작됐을 때 홍군에는 조선인 혁명가 30여 명이 있었지만 섬북에 도착했을 때는 오로지 무정과 양림 두 사람만 남았고 그 양림 또한 얼마 후에 있은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것이 이를 잘 설명했다. 그렇게 되어 무정은 장정 결속시의 유일한 조선인 생존자였다고 할 수 있었다.


후에 무정은 한 지인에게 이렇게 당시의 고통된 심정을 토로하였다고 한다. “장정 결속한 후인 1936년 2월, 홍군이 황하를 건너게 되었으며 그 때 양림은 황하강행도하 돌격대장으로 선발되었다. 이는 일종 결사대의 임무였다. 당시 돌격대는 강을 도하하여 개펄에 진지를 구축하였으나 양림은 적탄에 명중되었다. 그때의 의료 여건으로는 그의 생명을 구할 수가 없었다. 양림은 하루 종일 진통을 참아내다가 끝내는 숨을 거두었다.”


한편 양림의 희생은 아이러니하게도 무정의 생명을 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양림이 희생된 후 팽덕회는 “너무 많은 외국국적 혁명가들이 중국의 혁명사업을 위해 희생됐다. 만약 우리가 그들을 계속 중국에서 희생되게 한다면 누가 그들 조국의 혁명을 위해 싸울 것인가. 우리는 이미 죽은 그 동지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는 없으나 더 이상 외국동지들의 생명을 소모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팽덕회의 호소에 중앙 군사위원회에서는 무정에게 학습연구를 하라는 휴식 명령을 내렸고 당시 무정 또한 위장병 악화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던 터였다. 이렇게 팽덕회는 사실상 무정의 목숨을 구했고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평생 친구이자 동지로 되었다.


1936년 무정은 홍군대학에서 전략학과 당 사업 연구를 진행했다. 그 후 무정은 홍군대학을 다니면서 학습하는 한편 군관학교에서 강의까지 했다.


홍군대학을 졸업한 후 무정은 팔로군 총사령부 작전과장으로 임명되었다가 1937년 말 팔로군 포병부대 재편 임무를 받고 팔로군 본부 포병처 주임으로 임명되어  팔로군의 포병부대를 창설했으며 1938년 초 팔로군 본부 포병퇀장에 오르면서 팔로군 포병부대의 최고 권위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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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조선인 혁명가 무정장군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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