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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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조선족축구가 중국에서 살아 버티자면 자기 전통풍격을 잃어서는 안된다. 지금 우리의 축구가 유럽식이요, 남미식이요 하는 축구형식을 도입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굴할 줄 모르고 과감히 도전하는 정신력을 토대로 해야 한다. 왜냐하면 키가 크고 기술도 좋은 다른 팀들과 이기자면 오직 그럴 수밖에 없다. 남이 80%의 노력을 경주하면 우리는 100% 혹은 그 이상의 에너지를 발산해야 한다.”이는 중국조선족 축구원로인 지청용 선생이 다년간 자신의 축구생애를 통해서 얻어낸 결론이다.

오늘도 그렇지만 1965년 길림성축구팀이 전국갑급리그에서 우승을 할 때도 길림성팀에는 선수들의 신체소질이나 개인기술은 다른 팀과는 비교도 안될 지경이었다고 한다. 또한 전문 체육학교훈련을 거친 선수도 별반 없는 것이 더욱 사람들의 화제거리로 됐었다.

그것은 원로축구인 지청용 선생의 개인서류를 펼쳐봐도 대뜸 짐작할 수 있었다.

1935년 12월 26일, 지청용이 태여난 곳은 화룡현 2구(지금의 용성향)의 천수촌이었다. 그때는 일제식민지 시대인지라 다른 모든 가정과 마찬가지로 지청용의 가정도 째지게 가난했다. 때문에 남자 3형제중 막내인 지청용은 축구에 장끼가 있는 두 형의 영향을 받아 축구운동을 그토록 좋아하면서도 축구공이나 운동화 같은 것은 살 엄두도 못냈다. 그러니 당시 전문 축구인재를 키우는 학교도 없었거니와 설사 있다손 쳐도 그런 곳에 갈 형편이 못되기도 했다.

하지만 타고난 천성이라고나 할까? 그만큼 어린 지청용은 축구운동을 포기할 수가 없어 자주 집의 이불솜이나 베천같은 것을 훔쳐서는 볼을 만들어 차군 했으며 그때문에 부친한테 경하면 욕을 먹었고 심하면 휘초리에 장딴지에 줄이 가도록 얻어맞군 했다.

그후 소학교를 졸업해 해방을 맞자 지청용은 그래도 축구를 잘한 덕분에 구정부의 통신원으로 될 수 있었고 또 1년 후에는 구정부의 추천으로 돈화현 관지중학교에 가서 3년간 공부도 할 수 있게 됐다. 그 때로부터 지청용의 객지생활은 스타트를 뗀 셈이었다.

중학교를 마친 지청용은 다시 화룡으로 돌아와 현임업국의 과외축구선수로 활약하게 됐다. 그러다가 1955년에 화룡으로 선수고찰을 내려 온 길림성축구팀 박노석 감독의 눈에 들어 전업축구선수 생애를 시작, 그 때 길림성축구팀 선수들의 경력을 보면 모두가 전문훈련같은 것을 거치지 못한 것이 대체적으로 지청용의 경우와 비슷했다.

길림성축구팀은 창립되자 바람으로 공격형 축구를 팀의 풍격으로 자리를 굳혔다. 또한 앞이 강하고 뒤가 약한 팀 실정으로 봐도 공격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방어었기 때문이다. 그 때 길림성팀의 포메이션을 보면 공격선에 늘 이광수, 손중천, 지청용 이 3명의 선수가 포진, 이 3명이 서로 패스해 주며 공격한다 하면 모든 팀들이 주눅이 들기가 일쑤었고 두번의 공격에 한번은 기본상 골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길림성축구팀은 늘 전국 4개 강팀 중 하나로 인정받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일까. 국가체육운동위원회에서는 외국축구팀이 중국을 방문할 때마다 자주 길림성축구팀을 내세워 그들과 격돌하게 했다.

다음 더욱 주목할만한 것은 1959년 제1회 전국운동회 축구종목에서 지청용, 이광수, 지운봉 등  3명 선수가 득점순위 1, 2, 3위로 뽑혔고 지청용선수가 최우수공격수(골 13개 득점했음)로 선발됐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길림성축구팀이 당시 얼마나 거센 공격형축구를 구사했는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평소의 훈련에 대해 회고하면서 훈련이 경기보다 몇갑절 더 힘들었다는 것이 지청용 선생의 일가견이다. 그 때 길림성팀은 늘 땡볕이 쨍쨍 내리 쬐이는 한낮에 훈련, 훈련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그 모두가 체력소모를 극한으로 요구하는 고강도 훈련이었으며 훈련내용의 70% 이상이 슈팅내용이었다. 하기에 일단 경기에 뛰어들면 선수들 모두가 지칠줄 모르는 체력과 투지를 갖고 90분간의 스피드를 보장했으며 슈팅명중율도 대단히 높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당시 선수들마다 완강하면서도 자아특점이 있었는바 예하면 “탱크”, “제비”, “무쇠머리”, “도리깨”, “집계”, “참새”, “특공대” 등 별호들이 있었다. “탱크”는 진공한다 하면 막을 수 없다는 이광수 선수의 별호었고 “제비”는 속도가 빠른 동경춘의 별호었으며 “무쇠머리”는 헤딩능수 최철봉, “도리깨” 공을 감아서 잘 차는 김동하, “집계”는 상대의 공격수를 물고 늘어지는 김익갑, “참새”는 패스기술이 뛰어난 손중천, “특공대”는 기습에 능한 정종섭의 별호(지청룡원로한테는 돌연슈팅으로 슈팅명중률이 높아 “대포”란 별호가 붙었음) 등이었다.

한편 당시 감독과 선수들 사이의 직책과 분공이 명확했다. 감독의 포치라면 선수들은 절대성, 무조건성 복종이 강요됐다. 1965년 길림성팀이 전국우승을 할 때 박만복 감독은 한창 30대의 젊은 축구인이었지만 선수들중에는 박만복과 나이가 엇비슷한 선수들이 한두명 아니었다. 하지만 선수들 모두가 선수라면 반드시 감독의 지시를 따라주는 것이 전반 길림성팀의 풍격중 하나었다.

팀의 실력을 따진다면 그 때 중국 국가축구팀은 모종 원인으로 올림픽이나 월드컵같은 경기에 참가하지 않다 보니 그 수준여하를 가늠할 수 없었지만 중국의 갑급팀중의 하나인 길림성 축구팀이 국제축구무대에 자주 진출하는 조선국가팀과 엇비슷한 실력으로 경기를 치렀으니 그 때 중국의 축구수준은 매우 괜찮은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런 논리로 추리해본다면 그 후의 30여년 사이에 아시아의 한국이나 일본,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축구는 많은 발전을 가져 왔으나 중국축구는 제자리에서 맴돌아쳤거나 아주 굼뜨게 발전했다는 설명이 된다.

이를 두고 지청용 원로는 중국선수들은 돈을 많이 받지만 직업선수의식이 결핍하다 보니 감독을 감독처럼 보지 않고 있으며 특히 운남의 해경훈련기지에는 숱한 삼배동아가씨들까지 선수들을 찾아오는 현상이 나타 난다는데 이 모든 것이 잘못돼도 한창 잘못된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러한 것은 당시 1950년대나 1960년대에는 당치도 않는 행위로 치부됐다. 그 때까지만 해도 선수들은 무단적 외출이란 근본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고작 외출을 해도 영화구경이나 하면 그 것이 전부었다. 그리고 선수들은 결혼해도 집사람과의 생활을 몹시 절제 받아야만 했다. 지청용 선수만 해도 1957년에 부인인 한영혜 여사와 결혼했지만 결혼생활이란 1년에 겨우 1주일 정도, 그것도 경기가 없는 겨울철에만 가능했다. 오죽했으면 따님마저도 1년에 겨우 한번씩 집으로 아빠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정도었을까?

그러다보니 부인 한영혜 여사의 고생은 이루다 말할수 없었다. 남편이 없는 가정을 이끌어 나가느라 그토록 사랑했던 직업마저 버려야 했고 겨울에 온돌에 불길이 들지 않아 몇몇 선수의 안해들과 함께 집들을 돌며 온돌을 고치며 역사를 하군 했다. 아니 젊은 여인으로서 남편을 그리며 살아오던 그 수많은 나날들, 하여 지청용 원로는 지금도 자기 때문에 너무나도 고생한 부인 때문에 자주 눈굽을 찍군 한다. 하지만 프로선수라면 반드시 많은 것을 희생할 각오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바로 지청용 원로의 지조었고 양심이기도 했다.

우리 중국조선족축구의 어제와 오늘, 시대가 바뀌고 축구를 하는 사람들이 받는 대우도 바뀐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조선족들로 주축을 이루고 공격형 축구를 구사하고 있는 우리 연변축구, 그렇다면 우리의 선수들은 그제날의 원로들한테서 과연 어떤 것들을 따라배워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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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조선족 축구원로 시리즈(4) 선수다운 선수의 자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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