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자존심을 붙안고 몸부림치던 나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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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을 붙안고 몸부림치던 나날에

기사입력 2014.11.17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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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5월 12일, 나는 천진에서 한국으로 향한 기선에 몸을 실었다.
 
남들이 하듯이 빚을 내서 한 보따리 되는 중국약을 사 가지고 희망의 꿈에 한껏 부풀어서 29시간을 기선에서 보냈다.
 
푸른 물결이 끝간데 없이 무연히 펼쳐있는 바다도 처음 보았고 커다란 물고기 세 마리가 곡예를 하듯이 공중에 올리 솟는것도 처음으로 보았다.
 
이로서 우물안의 개구리가 세상 바깥을 나오게 되었다고나 할까?!
 
내가 산 배표는 3등선실인데 노란 장판을 깔아놓은 커다란 방에서 사람들이 기쁨에 들떠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떠들썩하였다. 지금도 눈에 선한것은 커다란 텔레비화면에서 나오던 드라마 “장군의 아들”이였는데 너무나 흥미진진하게 보았다. 그때 처음으로 한국 드라마에 접하였던것이다.
 
내 몸에 흐르는 피와 같다는, 같은조상의 후예라는것을 실감하는 시작이였다.
 
인천부두에 도착하였지만 새볔이라서 해관 사무원들의 출근을 기다리느라고 다 도착한 배우에서 멀거니 몇시간을 보내고 늦은 아침이 되여서야 한국땅을 밟게 되었다.
 
나는 본래 별걱정없는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몸은 편하였으나 한달 벌어서 한달살기가 모자라는 생활에 환멸을 느끼던 차에 “직장에 적을 두고 나와서 개인 사업을 벌릴수 있는” 정책이 나왔다. 별로 큰 고민도 없이 신청을 하였고 1987년에 출근을 그만 두고 자체로 돈을 벌기 시작하였다.
 
식당도 해보고, 멀리 관내에 가서 식료품을 구입하여 지방의 상점들에 넘겨주기도 하다가 침직 기계 몇 대를 사 놓고 집에서 침직품 생산을 하였다.
 
그때 출근하면 한달 월급이 인민페 76원이였으나 류행에 맞는 털실세타를 연구 개발하면 하루에 인민페 280원씩 벌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한국행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나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한국땅을 밟고 처음으로 서울전철역에 갔다. 젊은 아줌마들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앞에 약들을 널어 놓고 앉아 있었다. 나도 한자리 차지하고 앉아서 약들을 차려놓고 앉아 있으면 되는판이다. 가방을 든채로 왔다리 갔다리 몇 번을 반복하였지만 손바닥만한 이 얼굴을 내놓고 편히 앉아있을수 있는 마음의 준비는 도저히 없었다. 결국 약가방을 메고 돌아왔고 노원구의 한 식당에 취직을 하였다. 한달 월급이 한화로 45만원이였다. 그때에는 일하는 교포들이 없었고 아마도 그때가 일하는 시작이였을것이다.
 
가지고간 약들은 후에 친구에게 맡기고 친구가 주는 한화액수 그대로 받아넣고 말았다.
 
삼계탕을 하는 자그마한 식당이라서 주인장하고 내가 주방에서 일하고 그 안주인되는 이쁘장한 아줌마는 안방에서 화장하고 항상 어디론가 갔다가 오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주방일과 집청소에, 그집의 빨래까지 하여야하였다. 아줌마가 시키는대로 세탁기를 돌렸고 찌든때는 손으로 비벼서 세탁기에 돌렸지만 빨간 쇠물이 든 흔적이 지워지지 않은적이 있었다. 안주인이 빨래감을 들고 나와 “아줌마~”하고 부른다. 가슴에서 쿵하고 뭔가 떨어지는 감에 몸이 오싹해온다.
 
“예”하고 내가 주방에서 내다보면 그 빨래감을 들고 서서 흔들어 댄다. 저번에 빨때도 때가 안 졌다고 뭐라하던 그 빨래감이다. 세 번째로 그 빨래감을 들고 흔들어댈때 나는 이상한 감이 들었다. 그렇게도 세제를 선택하여 바르고 손으로 비벼서 세탁기에 넣었지만 그냥 그 본새로 흔적이 남아있고 나는 나대로 안주인한테서 번번히 질책을 들여야하였다. 그 빨래감을 받아서 자세히 들여다 보며 “ 아무래도 쇠물 흔적인 같아요” 라고 말해서야 그 다음부터 안주인의 성화가 뭠췄다.
 
그 집에 딱 한달 있었는데 거짓말보태면 눈물을 한동이는 흘렸을것이다. 두고온 자식과 부모생각에 눈물이 났지만, 받아당할 수가 도저히 없는 안주인의 횡포였다. 지금만하면 충분히 리해할 수가 있을법도 하건만 중국의 급별과 상관없이 모두가 평등했던 그 사회주의 체제에서 살아온 나는 억울하고 분하고 리해할수 없는 일종의 모욕감에 치를 떨면서 밖에 나가 눈물을 흘리던 날들이 며칠건너 한번씩이였다.
 
중국이라는 넓고 넓은 땅우에서 몇십년을 한족들과 함께 살아오면서 언어부터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서로가 섞어져버린 버릇이 몸에 밴 나는 우리 민족의 바른례절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중국에 비해 발전한 한국사람들의 그 예민한 반응과 그네들이 알고 있는 상식과도 거리가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주인들은 또 나를 보기가 얼마나 한심하였을가 싶다. 처음으로 잇발쑤시개라는것을 접했던 나는 주인과 마주 앉은 밥상에서 손으로 입을 막지도 않고 잇발을 쑤셔대기도 하고 한 사발의 밥을 먹던 중국의 습관에 한국의 작은 밥공기로 밥을 먹어야하는데 그 식사가 또 너무나 맛있었다. 한공기를 더 달랄수는 도저히 없는 나의 체면에 식사때마다의 나의 곤혹이 얼마나 컸을지 그분들은 빤히 들여다 보고 있었을것이다.
 
처음 내가 받은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으면 열흘동안이나 배변을 보지 못하였을까?! 그것이 속에서 독이 되어 죽은 사람도 있다하던데.
 
한달동안의 월급을 손에 쥐고 나는 가방을 챙겨서 그 집을 나오려고 하였다. 안주인이 나를 고발하여 중국에 붙잡혀 가게 만든다고 방방 떨면서 나를 소개한 친척에게 전화하며 난리법석이다. 방법이 없어 누구에게 선물하려고 두었던 다이어트약을 주어버리고 말았다. 그때 돈으로 꽤나 비싼 약 4곽을 전부 주고 그집을 나올수가 있었다.
 
두 번째 의정부에 있는 식당에서 일하면서 일년이 지나게 되자 손님들이 나를 보고 “ 어~ 이 아줌마 많이 세련됐네.”하고 말하는것을 가끔 들었다. 들으면서 한국온후 일년간은 시골 암탉을 시내 장에 갔다 놓은 꼴을 보여줬을것이란 생각을 하면서 푸후~ 하고 웃음이 나가기도 하였다.
 
불법체류를 감추기 위하여서는 한국말을 빨리 잘하도록 애써야했고 주인의 잔소리를 안 듣고 나의 인격을 긍정받기 위해서는 온 신경을 다 모아 일을 빈군데없이 깔끔이 하여야만 되었다.
 
일하는 목적이 두가지였는데 돈을 버는것이 하나이지만 그보다 중요한것은 번돈을 가지고 집에 돌아가서 근사한 식당하나 꾸리려는 목적이라서 한식당의 기술을 배웠다싶으면 다른 메뉴의 식당으로 옮겨서 일하군 하였다.
 
한번은 회사내식당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그 사장이 가까이에 있는 또 다른 식당도 운영하고 있었다. 내가 일하는 식당은 아침 40명, 점심 100명, 저녁에 40명에 밤 12시에 20여명이 식사하였다. 그 분량을 사모님이 점심에 와서 거들어주고 오후에 가고 나면 나 혼자서 하였는데 일하는것은 그런대로 괜찮은데 잠을 제대로 잘수가 없어서 눈앞에 불찌가 날리는 정도였다.
 
그래도 힘 다내여 일하느라고 하였더니 사장님이 가끔 와서 돌아보고는 회사 노조에서 내가 하는 식당음식이 입에 맞는다고 칭찬이 있었다고 하면서 월급을 10만원 올려주겠다고 하였다.
 
그 이튿날부터 사모님이 성깔을 부리기 시작하였고 며칠후 일이 터지였다. 일도 아닌것을 붙들고 나를 닦아 세우려고 괜히 폼을 잡고 언성을 높이는데 불법체류자인 내가 대들어버렸다. 여자 둘이 한창 피대를 높이고 시야비야하는중에 사장님이 오셨다.
 
걸상에 앉아서 오가는 말을 듣던 사장님이 일어서더니 선포하였다. 사모님을 향하여 손가락질하면서 “당신, 래일부터 여기 나오지마. 여기 얼씬거리지 말란말이야.” 하고는 휭하니 가 버렸다.
 
이튿날 저쪽 식당의 아줌마가 점심때에만 건너와서 나를 도와주고 사모님은 과연 얼씬하지 않았다.
그후 안산에 있는 시화공단의 작은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쇠로 만든 각종 출입문, 간판, 매대, 또 어디에 사용하는지도 모를 알수 없는 물건들을 주문을 받아서 뼁끼칠을 하는 공장이였다.
 
공장에는 또 중국 흑룡강에서 온 한국땅을 밟은지 한달도 채 안된 김철이라는 남자교포가 있었다. 김철이는 공장의 류수작업이 습관이 안 되였다. 중국에서 한가히 살아가던 일상에 습관된터라 휴식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작업대뒤에 가서는 혼자서만 담배를 피우고 나오면 류수작업이 차질이 빚어지는것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은 터졌다. 회전하는 줄에 닦아 놓은 물건들을 걸어야하는데 물건이 미처 따라가지 못하였다. 평시 누구하고 걸고 들어 싸움질을 잘하는 최씨라는 남자가 담배를 피우고 나오는 김철을 향하여 소리 질렀다.
 
“야, 이 씨팔 놈아. 다른 사람들 일하는게 안 보여. 너만 피곤하냐. 너 같은 놈하고 일하다가 내가 스트레스 받아 못 산다. …..” 깜짝 놀라서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니 최씨가 자기보다 이상나이인 김철이한테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김철이가 뭔가 말을 떼려고 입을 여는데 그 소리가 나오기 바쁘게 최씨가 김철이의 뺨을 철썩하고 후려친다. 김철이의 뺨은 순식간에 붉게 달아 오른다. 뺨을 붙들고 서 있는 김철이를 향한 최씨의 욕지거리는 완전 거지 취급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또 싸움이야, 그만두지 못해!” 언제 들어 왔는지 사무실에 있던 장과장이 최씨를 향해 큰소리를 하신다. 그 광경을 보는 나의 마음속에는 뭔가 부글부글 끓어 번지고 있었다. 남들이 일하는 시간에 혼자서 담배를 피운 김철이도 원망스럽고 교포라고 인격이하로 취급하는 최씨도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나에게 불똥이 떨어진것은 그날 이후부터였다. 최씨가 마음 먹고 나를 무시하는 행위들을 하기 시작하였던것이다.
 
“너같은 불법 체류자 교포는 내가 이래도 할말이 없다.”하는뜻이 그의 언행에서 튀여 나오고 있었다. 한 두 번은 참을수 있으나 아무 반항이 없는 나에게 무시하는 짓꺼리를 해대는 그를 보면서 나의 마음은 독으로 번져지고 있었다.
 
“기회를 보자. 네가 입이 열이라도 할말이 없을때까지 기다리자.” 얼마 안 가서 그 기회가 오고야 말았다.
 
최씨가 무거운 쇠문짝을 받쳤던 스츠로프를 돌아서 일하는 나를 향하여 걷어찼다. 스츠로프는 나에게 맞쳐왔고 그것이 아프지는 않지만 나는 그 기회를 놓칠수가 없었다. 획 돌아서는 찰나에 최씨가 곁에 있는 친구에게 입을 비쭉이면서 너털웃음을 웃는 광경을 보았다. 나는 빽 소리 질렀다.
 
“이것을 왜 나한테 걷어차는거예요?!”
 
“왜? 내가 차고 싶으면 차는거지 그게 어쨓단 말인데?” 최씨는 완전히 의기양양하였다.
 
“이런것을 함부로 차 저한테 맞혔으면 사과를 해야는거 아닙니까? 그러고도 웃어대는 저의가 무엇이예요?” 내가 소리 질렀다. 공장은 기계소리 때문에 거리가 좀만 떨어져도 들리지 않기에 소리 칠 수밖에 없었고 나는 독을 품고 있는 상태였다.
 
“야. 이 씨팔년아. 내가 웃고 싶으면 웃지. 너 때문에 내가 참아야 되는거니? 안 그래 .” 여전히 희죽거리는 그한테 나는 별렀던 포탄을 터뜨렸다.
 
“야, 너 부모가 있니? 너같은것도 아들이 있다고 밖에 나가 남들하고 말하겠지?!”이것이 내가 터뜨린 첫 번째 폭탄이였다.
 
“이 미친년이 부모는 왜 욕 보이는거니?” 최씨는 그래도 효자일수는 있었다. 길길이 날뛰면서 나한테 때릴듯이 다가 왔다. 나의 고사포가 울리기 시작하였다.
 
“야, 너 학교라는데 다녀 봤니?
 
너 부모 교육이라는걸 받아 봤니?
 
인피쓰면 다 사람인줄로 아는데. 천만에! 분명히 알아 둬! 너보다 못한 사람은 이세상에 없어,
 
중국에서 살면서 소수민족이지만 너처럼 우리를 무시하는 사람은 종래로 못 봤어.
 
이 개보다 못한 물건짝아! 대한민국에 너 같은 야만이 있다는 것이 내가 창피스럽다. ……………” 또박또박, 높은 톤으로 내뱉는 나의 목소리에 공장은 가동을 뭠췄고 언제 들어 왔는지 사무실의 장과장을 비롯한 공장안의 모든 사람들이 소리를 죽이고 빙둘러 서 있었다.
 
나한테 다가왔던 최씨가 슬금슬금 자기 자리를 가고 있었지만 나는 따라가면서 계속 고사포를 쏘고 있었다.
 
말을 마친 나는 그자리에서 로동복을 벗어 버리고 숙사로 들어가 나의 물건들을 챙겼다. 그것이 끝나자 곧장 사무실로 들어갔다. 밖에서 금방 들어온 사장님이 장과장한테서 전후과정을 듣고 있었다. 사장님께 다가가 여쭈었다.
 
“저 인제 일을 그만 두겠습니다.”
 
“아줌마 그러지마요. 아줌마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물러서는거야. 아줌마가 가면 아줌마가 잘못했다고 승인하는것밖에 안 되잖아”
 
“저 불법체류이기 때문에 저 사람이 고발하면 잡혀가요. 그러니 다른 일자리로 갈랍니다. 그 동안 관심해 주어서 고마웠어요.”
 
사장님은 나를 자리에 앉혀주며 말씀했다.
 
“저 사람이 못 그러게 내가 한다니깐. 책임지고. 아줌마한테 사과하게 할게.”
 
나는 다시 공장으로 돌아 갔다. 이튿날부터 나를 보는 사람들의 눈길이 변한것을 나는 느낄수가 있었다. 최씨의 친구인 고씨와 리씨도 “아줌마 중국에서 변호사한거 아니야?!” 하고 놀려주었고 우리는 함께 통쾌한 웃음을 웃을수가 있었다.
 
그 후 공장의 나날들이 즐거웠던것은 더 말할것도 없고 이상한것은 한달가량 지나자 최씨가 나한테 적극적인 호의을 보여줬던 일이다.
 
한국에 갔다왔기 때문에 우물안의 개구리였던 내가 다문 얼마간이라도 세상이라는것을 알게 되었고 경제적으로도 많은 해방을 받았었다. 서로 다른 체제에서 살아왔던 거리감 때문에 많은 오해도 있었지만 피는 물보다 진한 친정집같은 감정은 그 무엇으로도, 그 누구도 무마할 수가 없다. 내가 흘렸던 눈물과 내가 힘들어했던 그 나날들이야말로 내가 보다 성숙된 인간으로 성장하는 과정의 주춧돌 역할이였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힘든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수많은 형제 자매 교포님들이 건강하시고 돈도 많이 벌면 좋겠다. 그리고 하루 빨리 이산가족들이 모여 살 수 있는 해결책이 나왔으면 얼마나 좋을가 생각한다.
 
 중국 연길시 김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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