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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김학철을 다시 읽다

“조선의용대 마지막 분대장”, “조선족 문단의 거목” 김학철
기사입력 2015.03.02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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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혁(재중동포 소설가)

캡처.PNG
 
우리앞에 한 거인이 우람하게 뻗쳐 서 있다.

양쪽 겨드랑이에 목발을 짚은 척각의 로인, 하지만 깨끗이 늙은 강파른 얼굴에 사려 깊고 슬기가 넘치는 한쌍의 눈. 그이가 바로 중국조선족문단의 맨 들머리에 우뚝 각인된 김학철 옹의 모습이다.

어제 저녁(3월1일) 우리는 또 오랜만에 그이의 거룩한 형상과 마주할 수 있었다.

SBS방송에서 스페셜 “나의 할아버지 김학철,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이 방영된 것이다.

스페셜은 선생이 끔찍이도 아꼈던 손녀 김서정양이 할아버지를 되돌이켜보며 그이의 려정을 따라 중국의 하북성, 한국의 밀양, 일본의 나가사키를 순례하는 과정을 통해 할아버지가 스스로 삶을 마감하면서까지도 끝까지 지키고자 한 것은 무엇이였는지? 그 답을 찾는 려정을 선생의 많은 영상기록물과 더불어 보여주었다.

평생 펜으로 불의와 싸웠던 “조선의용대 마지막 분대장”, “조선족 문단의 거목” 김학철의 파란많은 삶을 다시 돌이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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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철은 1916년 11월 4일 북조선의 함경남도 원산에서 누룩제조업자의 둘째 아들로 태여났다. 본명은 홍성걸(洪性杰.).7세에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랐다. 원산에서 제2공립보통학교를, 서울에서 보성고등학교를 다니다 1932년 약관 17세에 빼앗긴 조국을 찾겠다는 웅지를 품고 중국으로 들어왔다.

처음 상해에서 의렬단에 가입. 무정부주의자로 탈바꿈하여 반일지하테로활동 종사했다. 흰 셔츠에 검은 넥타이, 뒤주머니에 권총 한자루- 전형적인 당시 아나키스트들의 행색으로 쿨하게 상해의 황포강변을 누볐다.

1936년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했다.

1937년 중앙육군군관학교 (황포군관학교, 교장 장개석)에 입학하였다. 제1대대 제4중대에 편입되였으며 여기서 맑스주의사상과 접촉하면서 단순한 민족주의자로부터 맑스주의자로 변신하였다.

중일전쟁으로 3년제과정을 1년간 앞당겨 미친 김학철은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 전신, 대장 김원봉)에 가입, 창립대원으로 제1지대 소속되었다. 창립대회 당시 주은래와 국민혁명군사위원회 정치부 제3청 청장 곽말약도 참석했다.

그해에 김학철은 화북항일전장에서 분대장으로 활약, 1939년 호남성 북부일대에서 항일무장선전활동을 전개했다.

1940년 가을에는 태항산항일근거지에서 팔로군에 참가했다. 태항산에서 조선독립동맹 선전부의 선전간사로 일하였다. 부대의 수요에 따라 신문편집, 연극 극본, 가사집필도 하면서 문학적 끼를 선보였다. 이시기 단막극 “서광”, “승리”, “등대”등을 창작하여 무한, 류양, 태항산 등지에서 공연하였다.

1941년, 여름 김학철은 화북 팔로군 지역으로 들어가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제2분대장으로 참전, 그해 12월 12일 하북성 원씨현 호가장(胡家庄)전투에서 대퇴골관통상을 입고 일본군에 포로되었다. 약 5개월간 석가장의 일본총령사관 경찰서 류치장에 갇혀있다가 그후 예심에서 치안유지법위반죄라는 판정을 받고 1942년 5월 일본의 나가사끼형무소 이시하야 본소에 이송되었다. 1943년 4월 29일 나가사끼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0년, 미결가산 200일 언도를 받았다.

김학철은 나가사키형무소에서 원폭피해는 요행 면할수 있었으나 감옥에서 치료를 받지 못했다. 단지 전향서를 쓰지 않는다는 리유로 총상당한 왼쪽 다리를 치료받지 못하여1945년 2월 감옥에서 다리절단수술을 받았다.

김학철은 전쟁포로가 아니라 정치범으로 인정되여 나가사끼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0년, 미결가산 200일을 언도받았다.

1945년 10월 6일 정치범을 무조건 석방할데 관한 맥아더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석방되었다.

해방받은 몸으로 서울로 돌아와 조선독립동맹 서울위원회 서울시 위원으로 활동했다.

1945년 12월 “주간건설” 잡지에 소설 “지네”를 발표했으며 그 후 1년간 육속 “문학”지에 “담배국”, “신문학”에 “균렬”, “서울문학”에 “어간유정” 등 10편을 발표했다.

1946년 조선으로 건너가 “로동신문”기자, 외금강휴양소 소장, “민족군대”주필등 직을 지내기도 했다.

조선전쟁이 일자 중국으로 들어와 저명한 여류작가 정령이 소장으로 있는 북경 중앙문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지냈다. 이동안 중편소설 “범람”, 단편집 “군공메달”을 중문으로 출판했다.

1952년 12월 자치주 주장 주덕해의 요청으로 연길로 와서 연변문학예술련합회 준비위원회 주임으로 임명 되였으나 반년만에 사직하고 전업작가로 맹활동했다.

1953년 9월 단편집 “새집 드는 날”을 연변교육출판사에서 출간했으며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 1, 2, 3부와 소설집 “고민” 중편소설 “번영”을 출간했으며 로신의 “아Q정전”을 번역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로신의 작품을 맨처음 조선문으로 번역한 작가이다.

1957년 중국 전역에서 불어친 반우파투쟁 속에서 “반동분자”로 획분되었다.

1964년부터 문제작인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를 창작하기 시작하여 1965년 5월에 완성했다. 1966년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이 폭발하자 그해 12월 반란파들에게 “20세기의 신화”원고가 발견되면서 필화를 입어 10년 유기징역 으로 판결, 추리구(秋梨沟)감옥에서 복역했다.

문화대혁명이 결속되자 1977년 12월에 만기석방되었다. 하지만 그 후 3년간 의연히 반혁명전과자 취급을 당하는 신세였다.

1980년 12월 연변주법원에서 “원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로 선고한다”고 선포되여 1983년에 정식으로 루명을 벗었다. “20세기의 신화”는 미발표작인만큼 사회에 영향을 주지 않았으며 원고의 집필 자체는 범죄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연변주법원에서는 원 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로 선고했다. 무죄를 선고받는 공판정에서는 김학철은 “나는 일찍이 이 북간도땅에 이렇게 긴 땅굴이 있으리라군 꿈에도 생각을 못했었습니다. 이 “반동”이라는 무시무시한 명칭으로 불리는 땅굴은 사람이 한번 들어가기만 하면 강산이 두 세번씩 바뀌여서야 겨우 벗어날 수 있습니다.”고 감개에 넘쳐 당시의 심정을 밝혔다.

1983년 김학철은 국적문제를 철저히 해결하고 중국국적을 가졌으며 정식으로 공직에서 리직하였다. 1989년 12월에는 49년만에 당적을 회복하였으며 항일로간부의 대우를 받게 되었다.

장장 24년의 정치박해로 상처받은 몸을 추슬리고 김학철은 다시 일어섰다. 이미 65세의 나이였지만 녹쓴 펜을 닦고 만강의 열정으로 창작활동을 재개했다. 1983년 항일회상기 “항일별곡”을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 출간했으며, 1985년 “김학철단편소설집”이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1986년 3월에는 장편소설 “격정시대”가 료녕민족출판사에서 출간되였으며 1987년 6월에는 “김학철작품집”이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1994년에 한국 KBS로부터 “해외동포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이밖에 자서전인 “최후의 분대장”이 한국의 문학과 지성사에 의해 1995년에 출간되였고 1996년과 2001년에 걸쳐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와 산문집 “우렁이속 같은 세상” 한국의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간되었다. 수백편의 수필과 잡문을 여러 신문, 잡지에 발표.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다권집 “김학철문집” 을 출판하면서 중국조선족문단은 물론 세계 한겨례 문단에서도 한획을 그었다.

학계는 “김학철선생의 문학은 우리가 세계문학과 대화할 수 있는 하나의 큰 창구인바 이 책이 우리 민족의 정신사에 있어서의 하나의 이정표로, 영원한 고전으로 될것”이라 내다보았다.
 
2001년 9월 25일 오후 3시 39분, 김학철은 85세를 일기로 연길에서 타계했다.  

타계 20일전부터 자기의 병이 완치될 가망이 없음을 알고 가족의 부담을 덜기 위하여 자진 절식을 단행,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깨끗한 모습으로 조용히 죽음을 기다렸다.

본인의 소원대로 유체는 화장해 두만강에 뿌려졌고 일부는 우편함에 담아 동해바다로 띄워 보냈는데 우편함에는 “원산 앞바다 행 김학철(홍성걸)의 고향 가족, 친우 보내드림” 이라고 적었다.
 
유언으로 자신이 평생 지켜온 생활신조를 남겼는데 바로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
그것이였다.
 
김학철은 반일투사이며 중국조선족을 대변하는 민족작가로서 일평생 곡절많은 인생길을 걸어왔다. 식민지시대의 고난을 눈물겹도록 맛보면서 지낸 비애의 소년시절, 항일전쟁의 피와 불의 세례를 겪은 격정의 청춘시절, 일제침략자의 감옥에서의 인고의 시간, 서울, 평양, 북경, 연변에서의 지역을 넘나든 폭넓은 문필생활… 이렇게 파란많은 인생길을 걸은 작가는 고금중외에 드물다고 해야할것이다.

우리 문단의 지성인들이 정평하다싶이 “세상에 실로 열화 속에서 아홉 번 나보고 빙설 속에서 아홉 번 얼어보고 피못속에서 아홉 번 목욕해본” 작가가 있다면 그가 곧 김학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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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아는듯, 하지만 잘 아지 못한 김학철의 삶을 다시금 읽으며 우리의 작은 문단에 세계적인 지성들과 비견(比肩)할만한 인물이 있다는데서 큰 자호감을 머금었다.

전통의 연속과 재발견의 필요성은 지금 흔들림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환기시켜 준다.

지금 우리 조선족 공동체는 격변의 물굽이에서 미중유의 파고(波高)를 경험하고있다.

불굴의 저항의식으로 강렬한 비판정신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가려던 김학철의 행보는 리뉴얼을 요구하며 고심하는 우리의 상황을 풀어갈수 있는 코드가 될 수 있고 우리 사회와 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낼 수 있는 계시로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김학철의 올곧은 궤적은 오늘날에도 유통기한이 지나지 않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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