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제2차 세계대전시 미소군대의 성폭행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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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시 미소군대의 성폭행 기록

새로 폭로된 “해방자들”의 만행
기사입력 2015.06.30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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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투데이 김민기자] 올해는 제2차 세계대전 결속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70년전 소련홍군은 미군과 더불어 독일, 프랑스 등 나라의 인민들을 도와 그들로 하여금 나치스의 독재에서 해탈되어 “해방의 자유”를 누리게 했다.
 
1944년 여름부터 유럽대륙에서 동맹군의 대반격이 시작되었다. 당시 미국은 여러 전장에서 “해방자”라는 거룩한 형상으로 유럽대륙의 곳곳에 나타났고 독일군은 패전을 거듭하였으며 최종 유럽대륙은 나치스의 잔혹한 통치에서 벗어났다.
 
그 뒤 허다한 문인들은 미군에 대한 찬양의 필묵을 아끼지 않으면서 “나젊고 영준한 남아들이 압박으로 시달리는 국토를 해방하였다”고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년간 육속 폭로되는 자료들을 보면 점령지에서의 미군의 행위를 보면 그 이미지가 그닥 광채롭지 못하였으며 소련홍군 역시 독일을 점령한 후 소름에 끼치는 행위를 많이 감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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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들을 숨겨 두어라”
 
미국사병들은 유럽에서 대담하게 “성쾌락”을 즐기었다. 영국에 진출한 뒤 이들 건장하고 자신감이 넘치며 정력이 왕성한 젊은이들은 쵸콜렛, 나일론 양말과 비누 등 작은 예물로 당지의 소녀들을 유혹, 매춘소녀가 적지 않았다.
 
로만디 등륙 전야, 런던의 많은 나이트클럽과 스탠드바에는 많은 미군들이 출입, 이들은 주흥이 도도해지자 거리에서 “사냥감”을 물색하였으며 가격을 정하고는 군외투를 가리고는 총망히 “교역”을 마치군 하였다.
 
당시 한 미군사병은 친구한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현재 우리는 ‘두번째 전장’을 개척하고 있네. 나는 밤장막이 드리운 영국공원에서의 장면을 도무지 형용할 수가 없네. 이는 하나의 거대한 ‘전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더라도 1942부터 1945년 사이 미군은 영국에서 도합 126건의 강간사건을 저질었다. 상대적으로 볼 때 당시 영국은 교전국이 아니었기에 미군은 그래도 어느 정도 자제하는 모습이였다.
 
하지만 일단 영국해협을 건너 전쟁구역에 들어서자 “해방자”란 감투를 쓴 미군들은 한차례, 또 한차례의 “성쾌락”을 미친듯이 즐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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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고향을 멀리 두고 떠나온 미군 관병들은 일단 시간이 흐르자 심리 및 생리적 압력을 이겨내기 힘들어 하였으며 또한 자신들은 프랑스를 위해 밑지는 일을 너무 한다고 여기면서 이 나라의 여성들은 미군을 위해 “헌신”할 의무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때문에 이들은 흔히 유혹이 실패하면 폭력적 수단으로 자기의 성욕을 해소하군 하였다.
 
당시 로만디 지역에서는 한가지 유행어가 전해졌는데 그 유행어인즉 “이전에 독일군이 오면 우리는 여성을 남성으로 위장시켰으나 현재 미군이 오니 우리는 여성을 숨기게 된다”였다.
 
미군사병들의 성행위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1945년, 로만디의 제2 대도시 르아브르(勒阿弗尔)항구에는 귀국을 준비하는 미군사병들로 가득했다. 이들은 귀국전의 마지막 “성욕해소”를 강행, 이들은 기혼여성을 포함한 모든 프랑스 여성을 성욕해소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공원, 건출물 페허, 공동묘지와 철길 등은 모두 청천백일하의 음란장소로 되었다.
 
그 나날, 원래 고요하던 르아브르는 대뜸 “제복을 입은 표객”들로 인해 난장판이 되었다. 이러자 골치가 아파난 르아브르 시장 피에르 바찬은 부득불 당지 미군지휘관인 웨이드 대령한테 편지로 “시민들은 심지어 공원에서 산보하지 못하고 공동묘지에 가서 고인을 기리지도 못한다. 조금만 조심하지 않아도 여성들은 미군의 성노리개로 된다”며 이런 현상을 제지시켜 줄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편지에서 피에르 바찬 시장은 미군들더러 교외에 있는 한 창녀촌으로 가게 해달라고 건의했으나 웨이드 대령의 거절을 당했다. 리유는 만약 이 소식이 미국으로 전해질 경우 군인들의 아내 및 연인들과의 관계에 해를 끼친다는 것이었다.
 
종족전쟁: 시작은 히틀러 계승은 스탈린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소련군의 작전능력은 세계가 공인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소련군의 난잡한 군기 또한 정시할 바였다.
 
1941년 스탈린은 전쟁발발 4개월 이래 소련군은 도합 175만명(희생 35만명, 부상 103만명, 실종 37만명)을 손실보았다고 발표하였다.
 
막대한 손실이었다. 한편 거대한 상망의 손실은 평민에 대한 무차별적인 보복으로 이어졌다. 자료에 따르면 소련군은 폴란드를 시작으로 반공에 진입하여 베르린 함락에 이르기까지 도합 200만명에 달하는 독일여성들을 성폭력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그 속에는 윤간을 한 사례도 수두록했다.
 
성욕해소 대상자를 찾음에 있어서 소련군은 선택이 없었다. 피해자들로는 10세의 아동으로부터 80세 로인 및 출산을 앞둔 임산부들도 있었으며 베르린에서만도 도합 13만명에 달하는 여성들이 소련군의 성노리개로 되었으며 이중에는 후에 전 독일총리 리컬의 부인도 포함, 당시 그녀는 12살이었다. 그리고 이 중 만여명에 달하는 여성들은 수치감으로 모대기다가 자결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니모스토푸촌은 소련군이 최초로 점령한 독일영토었다. 피점령 당시 이 곳의 여성과 아이들은 거의 모두가 살해되었는데 당시 거리와 골목 그리고 교외에마저 살해된 싸늘한 시체로 깔렸으며 독일군인들은 십자가에 못박혀 피살당하거나 건물에 매달려 살해되기도 했다.
 
이는 순 종족전쟁이나 마찬가지었다. 종족전쟁으로 말하면 시작은 히틀러가 했으나 마무리는 스탈린이 한 셈이었다.
 
전쟁터에서 소련군의 군기는 대단히 엄했다. 교전시 소련군은 퇴각자만 나타나면 일률로 기관총 소사로 죽여버리는 것이 관습으로 되었다. 하지만 작전행동외 소련군의 군기는 대단히 허술했다. 거기에 소련군 사병 거개가 문화적 자질이 낮았기에 이들은 적대국가의 평민에 대해서까지도 난폭한 폭행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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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은 교화소에서 개조를 받고 있는 인원들에게 군복을 입혀 전장으로 내보내는 사례가 많았다. 당시 소련군 포병대위로 있었던 솔레니친의 회고에 따르면 그의 부대가 동프로이센으로 진군할 때 사병들은 독일여성들의 내의를 빼앗아 입고 또한 강탈한 물건을 탱크안에 넣었으며 또한 물건을 빼앗은 뒤 집 여주인들을 강간하였는가 하면 심지어 강간 뒤 살해하기도 했다.
 
강간은 인류문명사에서 가장 야만적인 행위로서 인류의 존엄과 가치를 무시하는 것이며 강자가 약자를 짓밟는 가장 전형적인 범죄라 할 수 있다. 때문에 문명사회는 강간행위에 대한 처벌이 줄곧 중하게 정해졌다.
 
히틀러의 독일군이 폴란드와 소련으로 진공할 때 이들은 도처에서 당지 여성들을 강간하였으며 아울러 대량의 비공개적인 “기원(妓院)” 설치하여 독일군을 “위로”하도록 하였다.
 
이러자 고도로 격분한 스탈인은 반공이 시작되자 제일 처음으로 한말이 “피값은 피로 받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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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승리자”이고 “해방자”란 허울밑에 벌어진 많은 사연들은 오랫동안 숨기어져 오다가 최근 20년 사이에 갈수록 많은 책들을 통해 폭로되고 있다. 즉 반세기 이상 침묵을 지켜온 피해자들이 분분히 침묵을 깨고 이 한단락의 역사에 대해 증인으로 나섰던 것이다.
 
독일군이 투항한 날자는 1945년 5월 8일이었다. 그 뒤 소련군 각 부대에는 사병들의 방종행위를 금지할데 관한 명령이 하달되었다. 이는 당시 독일주둔 소련군 총사령인 주코프 원수가 8월 3일에 하달한 것이다. 이는 소련군의 영예를 수호하고 독일국민들의 반항심리를 눅잦히기 위한 주코프 원수의 큰 결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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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통한 새로운 발견
 
1945년 5월 2일, 베르린 전역은 종말을 고했다. 이러자 소련의 종군기자들이 대거 베를린으로 몰려 들었다.
 
당시 이미 공략된 베를린 제국빌딩 앞에 도착한 소련 타스사의 촬영기자 할제이프는 총포알 구멍투성이인 이 나치스 독일의 상징건물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영감이 떠올라 한장의 역사적 및 시대적 의의가 있는 사진을 남기기로 결심했다. 그는 소련군 3명을 찾아 합작촬영을 해줄 것을 요청, 그것인즉 이 3명 군인이 제국빌딩 꼭대기에 올라가 붉은 기를 꽂는 것이었는데 이 3명의 군인은 순순히 응해나섰다.
 
이 날 할제이프는 도합 30여장의 사진을 찍었고 이 중 한장을 선택하여 대외에 발표하였다. 이 한장의 사진이 소련 각 매체에 발표된 후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한장의 사진이 바로 소련이 나치스 독일을 정복한 상징이었기 때문이었다.
 
헌데 당시 이 사진이 세계를 뒤흔든 동시에 자상한 사람들에 의해 한가지 흠집이 발견되었다. 그것인즉 당시 촬영에 응한 한 군인의 양쪽 손목에 모두 시계가 채어져 있었다. 이는 그 소련군인이 당시 독일주민들한테서 강탈한 것임을 간접적으로 폭로한 것으로 되었다.
 
그 뒤 이 사진은 수정되어 발표될 때마다 그 소련군인은 한쪽 손목에만 시계를 차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결코 역사의 진실을 감출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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