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한국생활수기] 땀내 나는 아저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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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생활수기] 땀내 나는 아저씨들

[한국생활수기] 땀내 나는 아저씨들
기사입력 2015.08.08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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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형섭 (중국) 

한국 노무를 갔다온 분들에게서 일해 돈 벌기가 정말 쉽지 않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나는 한번도 겪어본 적은 없었다.  돈 벌기가 여간 쉽지 않다는 말은 많이 들었어도 한번도 겪어본적은 없었다. 얼굴이 떡판같고 기름이 번질했던 오촌아저씨가 한국에 가서 몇년 안돼 주름살이 주륵주륵 패인 홀쪽한 얼굴로 돌아오고, 머리털이 더부룩했던 동생이 가발을 쓰고 온 것을 보고는 기가 막혀 할말을 잃었다. 거기가 대체 어떤 곳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얼마전, 단기 관광비자를 맡고 한국 관광에 나선 나는 돈 한푼이라도 벌어 갈겸 한국에서 조선족들의 말단 일터라고도 하는 노가다판을 체험키로 했다. 거처도 일할데도 없는지라 우선 사촌동생의 연줄로 한국 온지 오래된 쇼리(小李)네 셋방에 림시 더부살이를 하면서 신세를 좀 입기로 했다.

ㅇ 일당 첫날

저녁 환대술에 녹초가 돼서 바지 입은 그대로 골아 떨어졌는데 쇼리가 <<쩡거!쩡거!>>하고 소리쳐 깨우는 것이였다. 겨우 눈을 비비고 시계를 보니 아직은 세시반도 되지 않았다. 왜 이리 일찍 깨우냐고 못마땅해 투정질 하자 쇼리가 급한 목소리로 늦게 가면 일이 차례지지 않는다며 빨리빨리 일어나 일차비를 하라고 재촉했다. 나는 더부살이 신세에 그들에게 도움은 못줄망정 보따리는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얼른 일어나 그들이 주는대로 배낭주머니에 작업복과 안전화, 노동장갑 따위를 쑤셔넣고 그들 뒤를 따랐다.

이른새벽이라 바깥은 아직 어두컴컴했고 하늘에는 아직도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손전지를 들고 앞장서 걷고 있는 쇼리를 따라 쪽방촌의 좁다란 골목을 빠져 큰 길에 들어서니 길 양쪽에 꽉 들어찬 각종 간판들이 현란한 빛을 내뿜고 있어 길바닥은 바늘이라도 주을만큼 환했다. 길을 가면서 드문드문 눈에 띄는 사람들 거의 모두 배낭주머니를 둘쳐메고 잰걸음을 치고 있었는데 그들 역시 우리같은 일당족이라 한다. 독산동 막끝에서 가랑이에 비파소리 일게 걸어서 남구로에 위치한 남부인력까지 가는데 한 오십분 시간이 걸렸다.

인력소개소 두리마리 철문은 아직 꾹 닫겨져 있는데 어둑시그레한 주위에는 벌써 일당을 나온 한국 근로자들과 조선족들이 삼삼오오 모여서서 소개소 임원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꾼들은 줄레줄레 점점 더 모여들고 있었다. 드디어 소개소 임원이 와서 문을 열자 일꾼들은 우르르 따라들어가 저마다 직원의 책상우에다 신분증이나 외국인등록증을 꺼내놓았다. 그런 것이 없는 사람(불법체류)들은 신분증만한 종이장에다 이름자를 써서 바친다.

아침 다섯시를 넘기니 칠십평이 되나마나 한 소개소안은 발 디딜 자리 없이 일꾼들로 차넘쳐 일부는 문밖에서 발꿈치를 들고 안쪽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일꾼들 반수이상은 중국에서 온 조선족들이었다. 남부인력에서는 인력 주문이 많은 시기에는 하루 일당 송출인수가 400명도 웃돈다고 한다.

소개소에서는 전날부터 건축 현장들에서 들어온 인력주문에 따라 현장 지점과 인력수, 전화번호가 적힌 인력송출표를 작성해 둔다. 그리고 상위에 배열된 일꾼 명함장들을 주어서는 송출표에 해당한 팀을 하나씩 묶어 현장으로 내보낸다. 그런데 인력소개소마다 인력 주문은 적고 일꾼은 남아도는 터라 이런 건출 현장에 배치받은 사람들은 한시름을 던듯 개운한 표정으로 코치를 따라가는 것이었다.일부 건축 현장에선 차를 보내지 않아 부랴부랴 전철역에 뛰어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날 우리 일행은 운좋게 자가용이 있는 한국 코치와 한팀이 되여 그의 승용차에 편안하게 앉아 섬북동 신축 건설 현장으로 가서 현장을 청리하는 일을 하게 됐다. 지하 2층에 내려가 물이 질퍽한 바닥에 난잡하게 널린 기자재들을 걷어내 한쪽에 정연하게 쌓아놓고 자갈콩크리트 쓰레기들을 박박 끌어내가는 힘들고 어지러운 일이였다. 공장설비를 가설할 자리에 가로세로 콩크리트구조물을 만들어놓아 니야까(밀차)는 들어갈 수 없으므로 젖은 자갈콩크리트쓰레기를 편직주머니에 반쯤씩 넣어 직접 등에 지고 지게차가 닿을수 있는 곳까지 날라가야 했다. 등이 젖을가봐 비닐쪼각을 주어 등에 치기는 했지만 뾰족뾰족한 돌모서리가 등을 찌르고 흙탕물이 궁둥이를 타고 흘러내려 오줌을 싼것처럼 바지가랭이가 젖어들어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한참 일하고 나니 일꾼들의 작업복은 땀과 흙탕물에 범벅이 되어버렸다. 처음 그런 일을 하게 된 나는 엉덩뼈가 물러나는 것 같고 두다리가 후들거렸다. 그 일을 하면서 나는 썩 오래전에 봤던, 탄부들이 갱속에서 석탄을 등에 지고 기어다니던 영화장면까지 떠올랐다.

아침 일곱시반에 시작한 일은 오후 여섯시에야 끝났다. 거기서 오전오후 각각 십분씩 새참(빵하나와 깡통음료 한통)먹는 휴식과 점심휴식 한시간을 빼면 순 노동시간만 아홉시간이다. 점심과 저녁 때가 다가올 쯤엔 배가 고프고 맥이 빠진 일꾼들이 여윈 소 밭갈이 하듯 행동이 굼떠지고 쓰레기 주머니를 멘채 쓰레기무지에 벌렁벌렁 나자빠지기도 했다.

저녁이 되자 코치가 소개소에 가서 하루 임금을 받아다 우리한테 나눠주었다. 건축업체에서 소개소에 지불하는 잡부 임금은 인당 하루 6만원인데 소개소에서 수수료 10%를 떼고 승용차 기사가 인당 교통비 4000원을 떼고나니 우리 손에 들어오는 돈은 딱 5만원이였다. 그 5만원을 받아 속호주머니에 넣고 무거운 몸을 질질 끌며 세방을 오면 저녁 아홉시가 거의 돼간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라면으로 대충 에때운후 이내 이부자리에 착 넘어져 잠에 곯아 떨어진다.

ㅇ위장

지금 한국 3D(노동환경이 열악하고 급여가 적고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일터)업종에는 조선족이 없는 곳을 찾아보기 힘들다.요즘들어 더욱 많은 조선족들이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3D업종에 몸을 담그고 있어 인력난 부족에 시달리던 한국 건설업체들이  일꾼이 남아돌 때가 많았다. 상황이 이러하자 일부 업체들은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인력소개소에 인력주문을 할 때면 한국 근로자들만 보내달라는 조건부를 달기도 한다. 경험이나 기술적 측면에서 조선족들이 한국적 근로자들에 비해 큰 열세에 처해있기 때문이다.그런데 인력소개소에서는 때로 한국 근로자가 부족할 때엔 들어온 일감을 포기하기 아쉽고 하니 부득불 한국인 근로자와 조선족을 섞어서 내보낼 때도 있었다. 

용산역 실내미장현장에 나갔을 때 일이다. 한조는 틀비계위에 올라서서 낡은 천정장식목질판을 뜯어내고 다른 한조는 바닥의 타일을 까내는 일을 하게 되였다. 일을 시킬 때 반장은 말을 빨리 하는데다 경상도 방언까지 곁드는 바람에 조선족 일꾼들은 그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니야까>>에 <<비계>>, <<데꾸>>따위를 싣고 엘리베이터 이용해 5층을 올라오라는데 한국에 온지 얼마 안되는 나는 미처 무슨 말인지 몰라 멍해졌고 <<예? 뭐라구요?>>라고 하니 반장은 대뜸 짜증을 냈다. <<아저씨들 교포요?>> 라며 따져묻고 조선족임을 확인한 반장의 얼굴은 대뜸 무섭게 일그러져 갔다. 우리 여섯 사람중 한국인은 단 한사람, 네사람은 조선족이고 다른 한사람은 한족이였다. 한족사람은 우리가 사전에 주의를 주어 처음부터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졸졸 따라만 다녔으나 반장이 한사람씩 질문할 때엔 몽땅 들통나고 말았다.반장은 화김에 소개소에 전화를 걸어 왜 한국인만 요구했는데 교포들을 보냈냐, 말길도 바로 알아듣지 못하는 일꾼들을 보내 하루 일을 망쳤으니 배상하라는 등 한동안 야단을 쳐댔다. 우리는 당장 쫓겨날가봐 마음을 조이며 반장의 눈치를 살폈다. 반장은 당장 쫓지는 않았지만 우리들이 하는 모양새가 마뜩찮았던지 하던 일도 끝나지 않았는데 오후에는 딴 일을 한다는 핑계로 반날 임금을 주어 돌려보냈다. 우리가 이제 돌아가면 오후에 어디 가서 일을 찾겠냐며, 오후까지 시켜달라고 사정해 봐도 쓸데없는 짓이었다.

한국에 온지 얼마 안되는 조선족들은 외래어와 방언이 섞인 한국말에 능통치 못해 의사소통에서 장애를 받게 될 때가 많다. 더군다나 한국 노가다판에 진출한 조선족 대부분은 중국에서 그런 일을 한번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이라 한국인 근로자에 비해 많은 열세에 처한 것은 사실이다.
( 니야까 ㅡ 밀차, 틀비계 ㅡ 높은 곳에 올라서서 일할수 있게 철관으로 만든 가설물, 데꾸 ㅡ 못빼기.)

ㅇ 일독촉

고용제 노동은 중국의 호도거리 농사같은 제집 일과는 완판 다르다. 제집 일은 힘들면 천천히 하고 수시로 쉴수 있지만 고용된 일꾼은 그렇지 않다. 임금을 정하고 일꾼을 쓰는 고용주는 제한된 노동시간내에 보다 많은 경제효익을 높이기 위해서 노동 효율을 매우 중시한다. 그래서 노가다판에서 일하는 조선족들은 현장 관리한테 일독촉을 받으며 바삐 돌아칠 때가 많다. 특히 성질이 사나운 현장 관리를 만나면 좀 얼쩡거려도 꾸중 듣기 십상이다.

두 사람이 큰 마대 속에 들어있는 나무쪼각을 한아름씩 안아다가 키넘는 화목상자에 담는 일을 했다. 마대속에 아직 적잖게 남아 둘이 들기엔 버거울 것 같아 좀 더 안아나르던 중이다. 헌데 그 몇아름 차이를 두고 현장 관리의 눈총을 맞을줄이야. 현장 관리는 씽 ㅡ 달려오더니 고까짓거 왜 둘이 마대채로 들어다 쏟지 않고 질질 시간을 끄냐면서 우리와 함께 마대를 들어다 화목상자에 쏟는것이였다. 늑장 부리지 말고 일을 빨랑빨랑 하라는 경고였다. 현장에 널린 고철을 주어서 밀차에 싣고 고철 무지에 가져다 부리울 땐 밀차를 고철무지에 바싹 올리붙힌후 뒤엎지 않고 손으로 한뭉큼씩 쥐어내 부리운다고 잔소리다.

사모리를 할 때 우리는 반장의 요구대로 명심해서 모래와 세멘트가루 비례를 5:1로 맞추느라 먼저 모래 다섯 삽을 떠내놓고 거기에 세멘트가루 한삽을 뿌려놓군 했다. 제딴엔  일을 깔끔히 하느라 세멘트 주머니도 아구리실을 풀고 헤쳤다. 헌데 옆에서 비뚜름한 눈길로 지켜보고 있던 반장이 “지금 새기놀음을 하구 있어?”라고 책망하더니 삽을 나꿔채가지고는 시범을 보이듯 삽으로 세면트주머니 중둥을 둬번 푹푹 찍어 터치워서는 모래무지한귀퉁이에 활 쏟아놓는 것이였다. 그리고 삽자루가 부러지라 세멘트가 덮힌 모래를 옆으로 활활 퍼넘기고는 삽을 던지고 우리에게 “봤어? 이렇게 하란 말이야!”하고 큰소리쳤다. 모래세면트 비례는 색깔을 보고 짐작하면 될것이지 그렇게 한삽씩 셈을 세고 자빠져 밤을 새울 작정이냐고 비아냥거렸다. 우리로서는 또 그렇게 거칠게 일했다간 꾸중을 들을것 같아 걱정이고, 참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처지에 놓여있었다.

단국대 건축현장에서 기자재정리를 할 땐 억척스런 책임지경을 만나 모두가 녹초가 되어버렸다. 일꾼을 부리려면 주인이 먼저 일꾼 노릇을 해야 한다고 책임지경은 처음부터 달궈빼려는 듯 600센치미터짜리 폼을 한손에 한장씩 두장을 들어 나르는것이였다. 잡부들은 보통 400센치미터짜리 폼은 두장씩 나르지만 600센치미터 짜리는 무겁기에 오래 나를 때는 한장씩 메여나른다. 어느 현장에서든 그 정도로 일하면 몸을 사린다고 아니꼽게 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책임지경이 먼저 두장씩 시작을 뗐다는건 잡부들에게 너희들도 이렇게 하라는 무언의 호소와 마찬가지여서 잡부들은 무조건 두장씩 날라야 했다. 다 같은 남자로서 책임지경이 두장씩 나르는데 잡부들이 달랑 한 장씩 들고 그의 뒤를 따를수야 없잖은가. 관리인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잡부로서는 그렇게 할수가 없다. 책임지경은 나르다가도 때론 다른 일을 보는척 하고 어디로 갔다 한참씩 지나서 왔지만 온 오전 두장씩 들어나른 잡부들은 작업복이 땀에 흠뻑젖고 걸음이 막 휘청거렸다. 너무 힘들어 화장실에 가서 시간을 질질 끌다오는 사람도 있었다.

한국에서 셋방살이를 하는 조선족 남성들은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고된 노동에 바삐 돌아치고 지친 몸에 귀가해도 저녁을 챙겨 줄 사람이 없다. 그들은 손쉽게 먹을수 있는 빵이나 라면 따위로 대충 에때우고는 잠에 곯아떨어지는 것이 일상이다. 일은 고되고 먹는 것은 부실한 탓에 신체만 못쓰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국에서 건강을 챙기겠다고 보건품을 사먹고 각가지 남새,육류,과일들을 먹고싶은대로 다 사먹는다면 돈을 모을 수가 없게 된다. 함께 일당을 다니던 최씨의 코구멍만한 셋방에 가본 적이 있었는데 그 집 한구석엔 그냥 라면상자와 쭈글쭈글해진 오이 몇개,된장주머니와 전기주전자 하나밖에 없었다. 일하고 들어와서는 그저 전기주전자에 물을 끓여 라면을 데워먹고 물도 수도물을 끓여 마신다고 했다.두달이 넘도록 고기를 구경도 못했단다.

연길에서 왔다는 원로인(62세)은 독신생활을 하면서 노가다판을 전전한지 벌써 5년 된다는데 금방 일을 시작한 조선족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노가다판에서 오래 버티며 일을 하려면 눈치 있게 제몸도 알아서 챙기구말야. 관리자가 자리를 뜰 때믄 틈틈이 숨을 돌리고 일손두 좀 늦추란 말이야, 힘을 남겨야 다음날 계속하잖겠나. 매일 열시간씩 하는 고된 일을 우직하게 밑구멍 빠질줄을 모르고 힘을 쓰다간 한달도 못 버텨낸다니깐!”

ㅇ 한국근로자들의 원성

한국 일용직근로자들은 다년간 중국 교포들이 한국 3D업종에 몰려드는 바람에 일거리 찾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인건비가 오르지 못한다고 원성이다.일당을 나갔다가 <<데마>>맞는 날엔 조선족들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기도 한다. 영등포구 광세건설현장에가서 함께 일하던 한국인 코치는 휴식시간에 지금은 일당을 해서 식구들을 먹여살리기도 힘들다며 한탄했다.

<<지금은 노가다판에 중국교포와 짱개놈들이 너무 많아 단가가 올라가지 못한다잉. 일꾼이 흔해뿌리이까 현장서는 배부른 흥정이 아이가? 나 이젠 노가다를 이십년 넘어 하문서말여 예전에 일당으루 4ㅡ5만원을 받았는디. 지금도 그값이니 이게 뭔 개판인겨? 물가란건 몇배나 올리뛰는데 노가다 단가는 개뿔두 오른게 없잖노. 교포들이 아니믄 이렇게꺼정 되지 않을건디.씨바, 그까짓 5만원짜리 일당도 하지 못해 지랄이니 이거 어디 사람이 밥 먹구 살것는가!>>

실은 조선족 노무일군들이 한국으로 대거 진출하기 전에는 한국 3D업종은 인력이 많이 부족됐기에 한국 근로자들은 대우와 로동환경,강도에서 우열을 선택할 여지가 있었고 보수가 적으면 고용인과 협상도 가능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족들의 진출로 노가다 일꾼이 넘쳐나다보니 고용업주들은 «너희들이 안해도 싼값으로 일을 시킬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일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하기 싫으면 그만두라»는 배포유한 태도로 나온다.지금은 환경이 열악하고 일이 힘들다는 이유로 단가를 올리려 들다간 아예 일감마저 떼우고 쫓기울 수가 있다.

12명 잡부들이 부평건축현장으로 배치받아 갔을 때였다.지하 2층의 형틀을 철거한 기자재들을 정리하는 일이였다. 파이프와 폼, 다루끼 (각목), 사포드가 가로세로 난잡하게 덧쌓여 있고 바닥에는 물까지 고여있어 기자재들을 정리하려면 땀동이를 꽤 쏟아야 할 것은 물론이고 입고 간 옷은 흙투성이가 될 것은 불보듯 뻔했다.하지만 일급은 고정된 6만원인데 소개 수수료와 교통비를 떼고 나면 실제 수입은 5만원밖에 안되었다. 그날 팀장과 한국인 잡부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좀처럼 일에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반장이 왜 시작안하냐고 묻자 팀장이 고개를 외틀며 정해진 단가로는 일을 못하겠다고 한다.통풍이 안돼 숨이 막힌다니, 바닥에 물이 고여 신과 작업복을 버린다니, 일이 너무 힘들다니 ... 여럿은 이 핑게,저 핑게 대며 단가를 올려달라며 만원만 올려주면 바쁜대로 해주겠다고 했다.그러자 반장은 고려할 여지가 없다는듯 냉소를 던지며 할 사람은 계속 남아하고 하기 싫은 사람은 지금 돌아가란다. 배짱을 부려 단가를 좀 올려보려던 한국인 잡부들은 그만 코를 떼우고 안전모를 벗고 돌아섰다.그러나 조선족들은 반장이 시키는대로 수걱수걱 일을 시작한다.매일마다 일이 차례지는 것도 아니고 앞에 차례진 일도 만원 더 안준다고 그만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조선족 일군들이 일을 시작하는 것을 본 한국인 잡부들은 가면서 저 좃족들땜에 될일도 안된다며 큰 소리로 욕지거리했다 반장이 인력소개소에다 전화를 한통 치더니 얼마 안돼 수명의 조선족 일군들이 도착했다.그날 그 힘들고 어지러운 일은 완전히 조선족들의 몫이었다.

ㅇ 스트레스

관리가 엄한 한국 3D업종에서 일하는 조선족들은 육체의 고달픔은 물론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자주 받게 된다. 어쨋든 노동 현장에서 고용주는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고 노동자는 임금을 제대로 받기 위해 일을 해야 하고 또 고용주한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물론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대체로 관리인들은 노동자를 엄하게 대하고 때론 인격 모욕도 서슴치 않는다.또 변명을 좀 하면 대든다고 욕하고 쫓아내고 직업소개소에 반영하기도 한다.대부분 조선족들은 사고치지 않고 돈을 버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기때문에 자존심은 온데간데 없어진지 오라다.더군다나 불법체류로 일하고 있는 조선족들은 신고에 의한 강제송환이 무서워 항상 머리를 숙이고 다닌다.한국인들과는 눈치도 맞추려 하지 않는다.그러나 자존심이 강하고 인격을 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겉으로는 복종하는체 하지만 마음은 그렇게 편할리가 없다.한국인들한테 온갖 스트레스를 받고 혼자 분을 삭이느라 속이 곪아터지다보니 우울증이 오고 식욕을 잃고 불면증에 시달리는 등 몸도 정신도 다 망가지는 경우도 많다.

성북구 한 학교건물 확건 건축현장에 갔을 때다. 우리팀은 한국인 두사람과 조선족 여섯이였다. 그날은 교통체증때문에 반시간 넘어 지체하다보니 8시가 다 돼서야 현장에 도착했다. 턱에 칼자국 흉터가 길게 나있는 무뚝뚝한 반장이 우리를 보자마자 거친 소리로 왜 이리 늦었냐고 호통치고는 때가 지났는데도 아침 먹으란 소리는 없이 인차 작업복을 바꿔입고 일부터 하게 했다. 다들 바쁜 걸음에 배가 촐촐해 맥이 나지 않는데도 아침(현장마다 아침,점심은 면비로 제공)은 주지 않고 무거운 일부터 시키니 일꾼들은 마지못해 복종은 하면서도 속으로는 내키지 않아했다.반장은 우리가 늦게 왔다고 일부러 밥을 주지 않는게 분명했다.

두 한국인을 포함한 네사람은 동쪽에서 기자재를 정리하고 나머지 조선족 네사람은 서쪽에서 배수로를 덮었던 낡은 콩크리트 뚜껑을 걷어내 지정된 곳에 날라다 쌓았다. 콩크리트뚜껑 하나 무게가 25키로그람은 넘었는데 두사람이 맞들어 나르면 덜 힘들었지만 혼자서 한장씩 메고 나르자면 이내 숨이 헐떡헐떡 차고 다리도 후둘둘 해나른해진다. 사달은 그때문에 생겼다.조선족조에서 제일 경력자인 김씨성의 남자가 아침이 지났는데도 밥은 주지 않고 힘든 일부터 시킨다고 툴툴거리며 둘이서 맞들고 천천히 나르자고 했다. 우리는 반장이 있을 때엔 혼자 한장씩 들고 열심히 나르는척 하다가 반장이 없어지면 두사람이 한 장씩 맞들고 천천히 날랐다. 헌데 반장이 엉큼하게도 층집위에서 우리를 빤히 지켜볼줄은 그 누구도 몰랐다. 그는 내려오자마자 독기 어린 눈으로 일꾼들을 쏘아보며 <<씨바,너희들은 대체 일하러 온거야 농땡이를 치러 온거야? >> 하고 욕사발부터 안겼다. 이때 김씨가 아침 때가 지났는데 밥을 먹지 않고 어떻게 맥을 내며 일하겠냐고 말대꾸를 했다.한국서 이미 5년간 노가다를 해서 벌만큼 벌어놓은 그는 아무 때든 집을 돌아가도 좋다는 배포유한 심정으로 무서울게 없었다.

일개 조선족 잡구가 감히 자기와 대든다고 하니 성이 상투밑까지 치민 반장은 당장 나가라고 축객령을 내렸다.김씨도 질세라 또 몇마디 대꾸하자 반장의 입에서는 «씨팔놈새끼»가 연달아 튀어나왔고 김씨는 조선족들만 알아 들을 수 있는 «차오니마»로 맞받아쳤다. 순간 반장의 손이 번뜩이더니 김씨의 뺨을 부리나케 후려갈겼다. 김씨도 한대 얻어맞고 가만있으려 하지 않았다. 반장의 멱살을 거머쥐고 주먹으로 패려는 순간 일군들이 급히 뜯어말려 대판 싸움은 피면했지만 우리 조선족 네사람은 현장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넷 가운데 두사람은 불법체류다보니 그냥 남아서 시비하다간 경찰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넷은 교통비를 팔고 반시간남짓이 공맥만 빼고 배를 촐촐 곯으면서 패잔병마냥 돌아왔다. 억울했지만 어디가서 하소연할데도 없었다.

ㅇ 걸싼 일꾼

일당을 뛰는 조선족라고 해서 모두가 <<데마>>를 걱정하는것은 아니다. 일이 년장 노릇을 한다고 어디서든 눈치보기를 말고 일을 시키는대로 걸싸게 해내면 당연히 관리인의 호감을 사게 되고 인력소개소에도 좋은 반영이 올라가게 된다. 그러면서 그들과 유대관계가 형성되고 혜택을 보게 된다.

현장들에서는 하던 일이 채 끝나지 않았을 때는 다음날 또 인력소개소에 인력주문을 하게 된다.그들은 원래 하던 일꾼들의 표현이 안좋을 때면 소개소에서 보내는 새 일꾼들을 받지만 원래 일꾼들이 맘에 들면 그들을 다시 요구한다. 그런 팀에 든 일꾼들은 열흘이고 한달이고 일이 끝날 때까지 거기에 발을 붙이고 일할 수 있기에 매일 인력소개소에 가서 일배치를 초조하게 기다릴 필요가 없고 더우기 <<데마>>맞을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아도 된다. 한 현장에서 여러날동안 일하노라면 관리인들과 친해져 그들의 도움을 받아 계약공이 될 수도 있고 간단한 기술도 익혀 높은 임금을 받기도 한다.

최기사는 자기가 선택한 8ㅡ12명의 고정일꾼들로 팀을 무어 그냥 자기 봉고차에 태워가지고 현장을 다닌다. 일꾼 대부분은 일정한 노가다 경력을 가진 조선족들로서 신체가 든든하고 현장청소, 기자재정리, 꼼방같은 잡역은 물론 일부 초보자 목공일에도 막힘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새벽부터 인력소개소에 가서 명함장을 내놓고 일 배치를 기다릴 필요없이 일곱시쯤에 지정한 곳에 모여 최기사의 차에 앉아 직접 현장으로 가면 된다. 그리고 저녁에 소개소에 들려 그날 임금을 받아가지고 돌아간다.

<<정예부대>>나 마찬가지인 최기사팀은 한 현장에 가면 보통 일이 끝날 때까지 며칠 지어 한달넘어 일할 때도 있다.부천데크노파크신축건설 등 현장들에서는 용역일꾼이 수요될 때마다 정해놓은 듯 최기사팀을 요구하군 한다. 일을 잘한덕에 현장에 목수가 부족될 때면 사포드세우기, 반도채우기, 형틀철거 등 기공일까지 맡아해 잡역보다 일급을 1ㅡ2만원씩 더 받는다.

우리 넷이 인력소개소를 통해 경희대학신축현장으로 일당을 갔을 때였다. 크레인이 들어올린 석고보드를 구루마(현장에서 원자재를 운반하는 달구지)를 리용해 여러 층에서 일하는 내장팀에 공급해주는 일이였다. 네사람은 내장팀에 공급이 딸릴세라 석고보드를 넘쳐나게 싫은 구루마를 밀고 땀벌창이 되어 달아다녔다. 다음날 미장작업에 지장이 없게 하기 위해 저녁때가 지났지만 그 자리에서 빵으로 대충 요기를 하고는 두시간반동안 연장작업까지 했다. 어오야지는 일꾼들의 노동 표현에 아주 만족한나머지 6만원인 일급을 7만원으로 높여주었고 거기다 연장작업비까지 넉넉히 3만원씩 보태주었다. 일꾼들은 있는 힘껏 일한 보람을 느끼며 기뻐했다. 돌아갈 때 어오야지는 일꾼들의 전화번호를 일일이 적어두었다가 이틀후에 일꾼이 수요되자 또 그 네사람을 불렀다.그들은 그곳에서 거의 열흘동안 열심히 일하면서 일급을 만원씩 더 받았고 인력소개소를 거칠 필요없이 직접 현장을 갔기에 10% 용역소개비도 절약했다.

돈화에서 왔다는 박로인(65세)은 매일 아침 남부인력소개소에 와서 소개소에서 배치해주는 일꾼들을 데리고 건축현장으로 간다.얼굴에 주름이 깊숙이 패이고 양볼이 홀쪽하니 여윈 그런 늙은이가 어디서 맥이 나길래 건축현장에서 지경으로 있으면서 매일 잡부들을 이끌고 힘든 일, 어지러운 일을 가리지 않고 해내는지 참 이해가 안됐다. 헌데 일품새를 보니 과연 육십대 노인 같잖게 잽쌌다. 생산대 대장처럼 일순서를 미리미리 예산하고선 사전에 기자재를 쌓을 받침틀이나 화목저장상자를 만들어 놓고 노동 공구도 마련해 놓아 일꾼들이 서성거리고 기다리는 일이 전혀 없게 한다. 일꾼들이 보통 한대씩 메여나르는 큰 사포드도 박로인은 두 대씩 메고 선줄을 끌었고 시멘트주머니를 등허리에 척 붙이고는 층계를 씨엉씨엉 걸어올라간다. 얼굴에서 구슬땀이 뚝뚝 떨어지고 작업복 등어리가 땀에 질펀한데도 로인은 휴식시간이 될 때까지 담배 한대 피지 않고 직심스레 일한다. 그러니까 그를 따라 일하는 인부들도 마찬가지로 땀똥이를 꽤나 흘리게 된다. 휴식시간이 되자 우리가 그렇게 제 몸을 사릴줄 모르고 고지식하게 일하는데 대해 못마땅해 하자 박로인은 <<일꾼이 일을 할때는 열심히 해야지. 그렇잖으믄 일꾼이 흔해빠진 지금에 어디서 일을 시켜주나? 나 한국 와서 칠년째 노가다를 한사람인디 어디가두말야 일 못한다는 소리는 한번도 못들어본겨. 그러길래 이 나이에도 일을 시켜주는데가 그냥 있잖아...>> 라고 했다. 박로인은 아마도 노가다판에서 몸을 혹사한 탓에 체내 지방이 다 빠지고 이젠 단단한 뼈와 근육만 남은것 같았다.

한국 노가다판은 어디든 노동 시간은 길고 휴식시간은 담배 필 시간도 모자란다. 해가 긴 여름같은 계절에는 건축현장을 포함한 노가다판의 하루 로동시간은 보통 열시간에 달하는데 농장과 어선작업처럼 계절성이 강한 업체들에서는 일이 딸릴 때면 노동 시간을 하루 12시간까지 늘이고 연장작업도 들이댄다. 노가다판에 일이 많은 봄과 가을사이에 낮 기온이 30도를 웃도는 고온에서 안전모와 작업복, 안전화를 착용하고 파고 쌓고 메고 끌며... 땀을 흘리는 건축공사장의 노동이야말로 육체를 혹사하는 고역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노가다판을 다니는 아저씨들은 가는 곳마다 염분이 푹 스민 내의로 주위 사람들의 후각을 흐리우는 땀내를 풍기군 한다. 버스나 전철에서 <<땀내 나는 아저씨들>>이 곁에 와 앉으면 자리를 내면서까지 코를 가리고 피하는 <<결벽족>>들을 흔히 볼수 있다.

또한 한국 노가다판에서는 무더위를 무릅쓰고 일하다 갑자기 쓰러지거나 뇌출혈을 일으켜 구급차에 실려가는 일이 자주 있다. 그속에는 물론 우리 조서족 일꾼들도 다수 포함된다.

몇년전부터 실시되고 있는 무연고동포 방문취업제는 악덕 브로커들의 사기행각을 효과적으로 배격하고 조선족들의 노무 송출에 넓은 길을 틔워주었다. 한국 노가다판으로 진출하는 조선족들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또한 일자리 찾기가 갈수록 힘들고 3D업종의 임금이 오르지 못하는 등 불리한 요소도 병행되고 있다. 건축공사와 실외 작업이 중단되는 겨울철엔 일부 남성 일꾼들이 일할데가 없어 여름에 번 돈을 축내기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중국에 있을 때처럼 소비한다면 나머지가 별로 없게 된다.그러니 어찌 맘놓고 먹고 놀 수가 있으랴. 때문에 중국에 송금하는 뭉치돈에는 그들의 피땀과 스트레스가 고스란히 배여있다. 그 돈은 우리가 빈곤에서 탈출해 풍요로운 생활을 마련하고 화목한 가정,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가는데 주춧돌이 되고 있다.

<본문은 중국조선족 한국생활수기 모음집 "빵상과 쭝국애 혀네언니"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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