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3-03(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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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산아제한 폐지, 노령화에 적극 대응해야③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2019년 중국의 인구는 14억 명을 돌파했다. 하지만 국가인구발전계획(2016~2030년)에서 예기했던 2020년 가서 14억 2000만 명에 도달한다는 계획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2019년 중국 총인구는 14억 5만 명으로 14억을 돌파, 2018년에 비해 467만 명이 증가했지만 인구의 증가량은 지속적으로 협소했고 자연증가 상황 역시 점차 완만해졌다. 1949년 건국시기 중국 인구(홍콩, 마카오와 타이완 및 해외동포는 포함되지 않았음)는 5.4억 명, 1981년에는 10억 명을 돌파했고 2019년에는 14억 명을 돌파했다. 중국 인구가 8억 명으로부터 10억 명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12년이었고 10억 명으로부터 12억 명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14년이었으며 12억 명에서 14억 명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24년이었다. 2016년 국가인구발전규획에는 2020년까지 중국 인구를 14억 2000만 명에 이르게 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이 예정 목표에 도달하자면 2020년까지 중국 인구가 약 2000만 명이 증가하여야 했지만 이는 명확하게 불가능한 사실로 되고 있다. 국가인구발전규획이 예견 착오를 범한 원인은 바로 과분하게 둘째 자녀 정책이 생육율 상승에 큰 영향을 줄 것이라고 평가하고 분석한데 있다. 즉 2015년의 총 생육 율이 1.5% 내지 1.6% 사이이고 2020년부터 2030년 사이의 총 생육율이 1.8%로 되어 2030년 후가 되면 중국 인구가 14.5억 명으로 절정을 이룰 것이라고 인정한 것이었다. 다음 유엔 역시 중국 인구의 증장에 대해 같은 평가를 했다. 즉 중국 측은 2031년이 되면 중국인구가 14억 6000명에 달할 것이라고 예측했고 유엔 또한 ‘세계인구의 전망(2019)’에서 중국인구의 9가지 예측방안을 출범, 이 중 중국 측 방안에 가설로 2015~2020년, 2020~2025년, 2025~2030년의 중국의 총생육율을 각각 1.70%, 1.72%, 1.73%로 예측하면서 2024년에 이르러 중국 인구가 14.5억 명의 절정기를 이룰 것이라고 내다봤다. 예측에 따르면 중국 인구가 14차 5개년 계획 기간에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설 전망이며 2050년 좌우부터는 중국 인구의 총량이 급격히 위축될 것으로 분석되었으며 2100년에 가서 중국 인구는 8억 명에 못 미칠 것으로 그 때 가서 세계에서 중국인구가 점하는 비율은 지금의 약 19%에서 7%로 내려갈 가능성이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인구총량의 불변을 유지하는 세대교체 수준은 2.1이었다. 이는 일본의 1.4% 총출산율은 매 한 세대를 건너가면서 3분의 1 정도가 위축된 것을 의미하며 0.98을 보이고 있는 한국의 총출산율을 보면 매 한 세대를 건너가면서 50% 이상씩 감소폭을 보이고 있다. 비록 2019년 중국의 총생육율은 1.5%였지만 생육 퇴적효과가 소실됨에 따라 생육율은 진일보로 하락될 전망이다. 1.4%의 총 생육율로 추산해보면 중국 인구는 2022년 전후에 절정기를 맞게 된다. 만약 총생육율이 1.3% 혹은 1.5%일 경우 중국 인구는 2021년이나 2024년에 가서 절정기를 이루게 된다. 이어 인구의 절정기에 이른 뒤 2025년부터 2030년 기간 동안 중국 인구의 위축속도가 비교적 완만해지겠지만 1962~1975년 높은 출산율 시기에 출생한 인구가 생명의 종점기에 들어서면서 중국 인구의 위축속도는 현저하게 빨라지게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그렇게 되면 2050년에 가서 중국 인구는 2022년에 비해 9% 감소할 것이고 2075년에 가서 중국 인구는 2050년에 비해 22% 감소할 것이며 2100년에 가서 중국 인구는 2075년에 비해 25% 감소할 전망으로 약 7.5억 명에 이를 것으로 보이고 있다. 그리고 세계인구속에서 중국인구가 점하는 비례를 보면 1950년에는 22%, 2019년에는 19%, 2100년에 가면 대폭도로 하강되어 약 7%가 될 전망이다. 그러면 그 때 가서 인구 총량의 위축으로 거대 시장에서의 중국우세가 점차 소실될 것이며 종합국력 또한 큰 영향을 받을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인구우세의 소실은 중국경제의 잠재 성장율 하강 의미 경제성장의 각도에서 보면 중국의 노동연령 인구의 비례는 2010년에 벌써 절정기를 맞았다. 이제 2050년이 되면 노동연령의 인구가 2019년에 비해 23% 감소할 것으로 예견되고 있다. 2010년부터 2018년 기간 동안 중국의 경제성장은 10.6%로부터 6.1%로 하강, 이제 곧 ‘경제성장 5% 시대’에 들어서게 되었다. 중국에 있어서 인구 수량의 우세는 과거 경제 고속성장을 유지할 수 있었던 하나의 중요한 인소였다. 1978년 개혁개방 후 중국은 방대하고도 젊은 노동력 자원과 거대한 통일된 시장에 의거하여 세계 제2대 경제체를 쾌속 이룩했다. 그리고 1962년부터 1975년 2라운드 출산 붐 시기에 태어난 인구가 개혁개방 40년간 건설의 주력으로 되었다. 또한 이 세대는 생산과 저축이 많았고 소비가 적었으며 저축율과 투자율 상승을 이끌면서 저축의 투자부분을 초과하였고 부분적 무역수지의 흑자를 기록하기도 했다. 동시에 남아도는 유동성과 인당의 평균 수입수준의 향상은 소비를 추진했으며 경제향상의 잠재력으로 되었다. 하지만 장시기 동안 저 생육 율 배경으로 중국에서 15세부터 64세 사이의 노동연령인구의 비례 및 규모는 2010년과 2013년에 그 절정기를 보인 후 인구 수량의 우세는 곧 소실되기 시작했으며 중국경제의 잠재력의 하강을 초래, 중국경제 증장의 변속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2010년부터 2019년 사이 중국경제의 성장속도는 10.6%에서 점차 6.1%로 하강, 이제 곧 ‘5% 시대’에 진입하게 되었다. 현재 절대적인 수준을 볼 때 중국 인구의 총부양 비율은 약 40%이다. 이제 미래 한 단계에 들어 여전히 인구부양 부담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인구기회 창구기간(人口机会窗口期)’으로 인구부양 부담이 50%를 초과하지 않을 전망이다. 2010년의 중국 인구 보편조사에 따르면 80후, 90후와 00후의 인구는 각각 2.19억 명, 1.88억 명과 1.47억 명으로 90후의 인구가 80후의 인구보다 약 3100만 명이 적었고 00후의 인구가 90후의 인구보다 4100만 명이 적었다. 예견하건대 2050년이 되면 중국 인구가 2019년보다 2.3억 명 내지 7.6억 명이 감소될 것으로 감소비율은 약 23%가 될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리고 노동력 공급 총량의 지속 위축에 따라 노동력 원가가 날로 상승하고 부분적 제조업은 이미 동남아거나 인도 등지로 전이하였거나 이제 향 후 지속 전이될 전망이다. 소비를 놓고 볼 때 노령화는 소비비율을 제고하고 있지만 반대로 소비증속을 하강시킴과 아울러 소비구조의 변천을 인기시키고 있었으며 또한 의료보건이 점하는 비율이 점점 높아지게 됐다. 생명주기의 소비이론에 따르면 노인들의 평균 소비경향은 높아지고 있지만 노령화가 보편화로 되면서 소비의 증가속도는 감소시키기 마련이다. 2010년과 2018년 중국 주민의 소비가 GDP에서 점하는 비율은 각각 35.6%와 39.0%, 주민들의 소비지출 증가속도는 15.3%에서 9.5%로 하락했다. 아울러 부동한 세대에 따라 소비 편향의 차이가 뚜렷했다. 예하면 80후는 육아와 자동차 등에 소비편향이 있고 60후와 70후는 주류 등에 소비편향이 있었으며 60 전의 세대는 의약보건 등에 소비편향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때문에 인구 연령 구조의 변화가 부동한 업종에 대한 영향의 차이가 큰 것이다. 예하면 2017년의 정점에서 25세부터 54세 사이의 부류는 술 담배 구매속도가 점차 느려졌고 2013년의 정점에서 20세부터 50세 사이의 주력업종 부류가 차지하는 신건주택 면적이 2011년과 2013년에서 14억 평방미터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들의 가전, 가구와 건축 인테리어 등 산업관련 소비는 2010년에 절정에 달했다. 또한 25세부터 45세 사이의 자동차 구매 부류는 2003년의 자동차 구매 절정기에 비해 자동차 구매량 증가속도가 파동 중에서 하락되고 있으며 2018년에 들어 처음으로 자동차 구매량이 마이너스로 하락, 하지만 신에너지 자동차 구매의 잠재력은 여전히 거대하다는 분석이다. 이 외 노령화를 추진하는 의료보건 소비는 2013년부터 2018년 사이 6.2%에서 7.8%로 성장하였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1-02-19
  • 중국 산아제한 폐지, 노령화에 적극 대응해야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2019년 중국에서 65세 및 그 이상의 연령을 가진 인구비례는 12.6%에 달해 ‘부유해지기 전에 늙어버린 중국’이란 문제가 돌출해졌다. 그 비교로 미국, 일본과 한국의 노년인구의 비중도 12.6%였지만 그들의 GDP는 모두 2.4만 달러 이상에 달했다. 하지만 중국의 GDP는 겨우 1만 달러에 불과하다. 2019년 중국에서 65세 및 그 이상 연령을 가진 인구는 1억 7603만 명으로 2018년에 비해 945만 명이 증가, 점하는 비중은 12.6%였으며 이는 2018년에 비해 0.7%가 늘어난 셈이다. ▲70년대 계획생육 선전 포스터 역사적인 데이터 비교로 인구 노령화 속도를 보면 2001년부터 2010년 사이 중국의 노령화 정도는 연평균 0.2%씩 증가, 2011년부터 2018년까지는 연평균 0.4%씩 증가했다. 그리고 중국의 노령화 수준을 국제사회와 비교해 보면 2019년 중국의 노령화 정도는 글로벌 경제체 중 61위를 차지, 중등이상 수입 계층보다 2.2%가 더 높았다. 2019년 세계의 65세 및 그 이상 연령의 인구가 점하는 비중은 9.1%, 고수입 계층 및 중등이상 수입 계층이 점하는 비중은 각각 18.0%와 10.4%였다. 세계에서 노령화 정도가 앞 3위인 일본, 이탈리아, 포르투갈도 노령인구가 각각 28%, 23%와 22.4%였다. 그리고 노령화 정도와 경제발전 수준의 국제적 대비로 보면 미국, 일본, 한국과 중국의 GDP가 1만 달러로 된 시기는 1978년, 1981년, 1994년과 2019년이었으며 당시 이런 나라들의 65세 이상의 인구가 점하는 비율은 각각 11.2%, 9.2%, 5.8%와 12.6%였다. 또한 미국, 일본, 한국과 중국의 65세 및 그 이상 인구의 비율이 12.6%로 된 시기는 각각 1990년, 1992년, 2015년과 2019년이었다. 당시 이런 나라들의 인당 평균의 GDP는 각각 2.4만 달러, 3만 달러, 2.7만 달러와 1만 달러였다. 다음 발전추세로부터 보면 중국인구의 노령화 속도와 규모는 2022년이면 중국의 노년인구가 점하는 비율이 14%를 초과하면서 정식으로 노령화 사회의 문턱에 넘어서게 되고 2033년에 가서는 노년인구가 20%를 초과하면서 초 고령사회에 들어서게 된다. 그 뒤에는 노년인구가 계속 상승하면서 2060년에 가서는 35%를 점할 것으로 보이고 있다. 생육률의 저하와 수명이 연장됨에 따라 고령화는 지구촌의 보편적인 현상으로 되고 있다. 다르다면 중국은 장시기 동안 실행한 계획생육 조치로 인해 노령화 속도가 전례 없이 빠르다는 것이다. 발달한 국가의 상황을 보면 65세 및 그 이상 인구가 7%를 초과하면 노령화이고 그것이 과도하여 14%에 이르면 고령화로 인정, 프랑스는 그것이 126년에 거쳐 진행이 됐고 영국은 46년, 일본은 24년(1971년부터 1995년)에 거쳐 진행됐다. 고령화로부터 노년인구가 20% 이상을 차지하는 초 고령화에 이르기까지 프랑스는 28년(1990년부터 2018년), 독일은 36년(1972년부터 2008년), 일본은 11년(1995년부터 2006년)이 걸렸다. 그렇다면 중국은 2001년에 65세 이상의 인구가 7%를 초과하면서 인구의 노령화에 진입했다. 중국은 오는 2022년에 고령화에 진입할 것으로 보이는바 노령화로부터 고령화까지 걸린 시간은 21년이고 다시 11년이 지난 2033년이 되면 중국은 초 고령사회에 진입하게 된다. 이어 2050년엔 노년인구가 29.5%, 2060년이 되면 35.2%로 될 것으로 예측되며 그 때로부터 한 단계의 안정기를 거친 후 다시 2084년이 되면 노년인구가 약 40%가 될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게다가 저변인구가 많기에 중국의 노년인구 규모는 전대미문의 규모로 되고 있다. 2019년 중국의 65세 이상 인구는 이미 1.76억 명에 달했으며 그것이 2050년에는 3.76억 명, 2058년에는 4.14억 명으로 직상승하여 그 때에 가면 3명 중 1명이 65세 이상의 노인인 셈이다. 한편 고령화 문제 역시 날로 돌출해지고 있다. 2019년 중국의 80세 이상의 고령노인은 3200만 명을 초과, 비중은 2.3%를 점했다. 예측에 따르면 2030년에 가서 중국의 고령노인 인구는 5300만 명이 달해 전체 인구의 3.8%를 점하게 되고 2073년부터 고령인구가 직 상승, 그 해에는 1.74억 명으로 전체 인구의 17.1%, 2100년에 가서는 고령인구가 1.56억 명으로 전체 인구의 20.8%를 점하게 된다. 이 외 인구연령 중 중간 연령대를 놓고 보면 1980년부터 2015년 사이 중국인구의 중간 연령대는 21.9세부터 36.5세로 상승, 예측에 따르면 2030년과 2050년에 이르러 중국인구의 중간 연령대는 각각 43.0세와 50.7세로 나타났다. 국제적으로 보면 2015년 미국, 유럽, 일본과 인도의 인구 중간 연령대는 각각 37.6세, 41.1세, 54.7세와 38.1세였다. 하다면 2050년에 가서 중국 인구의 중간 연령대는 미국, 유럽과 인도 등에 비해 현저하게 높아 국제경쟁력에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인구의 노령화는 사회보험의 수입과 지출의 모순을 더욱 돌출하게 하여 앞으로 양로금 발급 부담이 날로 증가되기 마련이다. 2018년 중국에서 사회보험기금 수입 지출 실제 잉여액은 마이너스 6033만 억 위안으로 6년 연속 마이너스 기록을 작성하였다. 중국에서 양로보험이 사회보장 체계에서 점하는 비율은 70%로 2018년 양로보험 기금의 실제 잉여 액은 - 4504억 위안으로 실제 잉여액 역시 연속 6년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현재 사회보험에서 뚫린 구멍은 역사적으로 남아 내려온 연체액으로 계획경제 시대에 국유기업들과 사회의 부분적 부류가 퇴직 전에 보험금을 납부하지 않고도 퇴직 후 양로금 지급 복지를 향수하고 있는 것이다. 2017년 11월 중국 국무원은 ‘부분적 국유자본을 사회보험기금 실시에 획분 전환할 데 관한 방안(划转部分国有资本充实社保基金实施方案)’를 발부, 2020년 말 전까지 기업의 국유주식 10%로 사회보험에 보충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인구 노령화 속도가 부단히 가심해짐에 따라 양로금의 ‘뚫린 구멍’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돌출해지는 양상, 이는 전 세계가 공동으로 직면한 보편적인 난제이기도 하다. 중국 도시 직원들의 기본 양로보험 기금을 볼 때 중국의 누적 잔액의 지불 가능 시간은 2012년의 18.5개월에서 2018년의 13.7개월로 내려갔고 부양비율(재직 인수/퇴직 인수)은 2.55% 내려갔다. 그리고 2018년에는 4개성이 수입보다 지출이 많아졌고 18개성의 잔액 지불 가능 시간이 12개월 이하로 내려갔으며 8개성의 부양비율이 2% 이하로 내려갔다. 이 중 헤이룽장(黑龙江)의 양로보험 기금은 2013년부터 수입보다 지출이 많아졌으며 2016년의 잔액 지불 가능 시간은 마이너스로 전환되었다. 다음 노령화가 가속화됨에 따라 의료지출 압력이 갈수록 커졌다. 중국 국가보건서비스 조사에 근거하면 2003년부터 20013년까지 중국에서 조사받은 지역 주민들의 2주간 발병률(발병인 차 수/조사받은 인원수)은 14.3%에서 24.1%로 증가, 이 중 65세 이상 인구의 발병률은 33.8%에서 62.2%로 증가했으며 2013년 노년 인구의 발병률은 평균 수준의 2.58배로 되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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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1-02-04
  • 상하이 암흑가 3대 보스-장소림
    ○김희수 장소림(張嘯林)은 1877년 6월 14일에 절강성 자계현의 한 시골에서 출생했다. 그는 1887년에 사당에서 공부하다가 1890년에 아버지 장전해가 사망되자 형님 장대림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항주로 이주하여 견직물을 짜는 방직실에 들어가 견습공으로 있었다. 1897년에 20살이 된 장소림은 힘이 세고 근육이 발달한 자신의 체질을 믿고 주먹으로 살아가려고 결심했다. 그는 몇몇 깡패들을 긁어모아 상인들을 위협하는 수단으로 돈을 벌었다. 1903년에 장소림은 절강성 무비학당으로 들어가려고 배에 올랐다가 한 청년이 깡패들에게 죽도록 매맞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달려가 깡패들 중에서 한놈을 두손으로 머리우까지 들어올렸다가 땅바닥에 내던졌다. 그것을 본 다른 깡패들은 무서워서 뿔뿔이 도망쳤다. 장소림이 구해준 청년은 란계현 사람인데 장재양이라 불렀다. 그 후 그들은 막역지교로 되였다. 그들은 함께 청왕조를 위해 하급군관들을 양성하는 무비학당으로 들어갔다. 원래 주먹싸움을 좋아했던 장소림은 무술과와 사격과에 흥취를 가졌고 성적도 매우 출중했다. 하지만 기생집 출입을 한 규율위반으로 그는 학당에서 처분을 받았다. 화가 난 그는 졸업도 하지 않고 학당을 떠나버렸다. 고향 공신교로 돌아온 그는 차집을 차리고 힘깨나 쓰는 사람들에게 술을 사주고 기생을 붙여주면서 그들을 주위에 끌어들였다. 그 시기 그는 12살의 루려금에게 반했다. 그 후 그는 루려금에게 접근했는데 생각밖에도 그녀가 못이기는척 하고 그에게 몸을 맡기는 것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장소림은 루려금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루려금은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미혼부부가 낳은 남자아이를 양자로 삼았다. 그 후 장소림은 아편매매를 하다가 일대에서 자신보다 세력이 더 강한 깡패두목 전표의 패거리에게 아편을 빼앗기게 되였다. 화가 난 장소림은 패거리들을 데리고전표의 패거리와 무리싸움을 벌렸는데 싸움 중에 도망치다가 아내 루려금을 전표에게 빼앗기게 되였다. 전표는 장소림의 아내가 자색이 뛰어난 것을 보고 2개월동안이나 데리고 살았다. 전표에게 쫓기어 강물에 뛰어들었던 장소림은 묘지암의 지능이란 여승에게 구원되었다. 지능은 장소림을 암자에 숨겨놓고 치료해주면서 건장한 체구를 가진 사내에게 반했다. 장소림은 이렇게 미모의 여승과 남녀의 즐거움을 나누게 되었다. 그 후 그는 부하를 통해 전표가 숨겨놓은 아내의 거처를 알게 되였다. 그의 아내는 그가 몰래 보낸 편지를 보고 그날 밤에 깊은 잠이 든 전표의 성기를 가위로 베어버렸다. 때를 같이하여 장소림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덮쳐들었다. 전표가 황망히 도망치자 두목이 없게 된 전표의 부하들은 손을 들고 투항했다. 장소림은 앙가품을 하려고 전표의 아내를 찾았으나 벌써 도망치고 없었다. 그대신 전표의 12살 되는 딸을 붙잡았는데 장소림의 아내는 전표의 딸과 자는것으로 앙가품을 하라고 시켰다. 하지만 장소림은 전표의 딸이 못생긴 것을 보고 생각이 없어 기생집에 팔아넘겼다. 1912년에 상해로 들어간 그는 무비학당을 다닐 때 친했던 장재양 등의 도움으로 세력을 넓히고 재물을 긁어모았다. 무비학당을 함께 다녔던 학원 중에 벼슬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군벌군관이 된 사람도 있었다. 그는 1919년에 가족을 데리고와서 상해에 자리잡으면서 “대자(大字)”서열의 번근승을 스승으로 모셨다. 그 후 황금영, 두월생과 함께 “삼흠회사”를 경영하면서 그들과 함께 상해탄의 3거두로 되었다. 1925년에 화격얼로에 위치한 장공간(张公馆)에 이주했는데 그해 북양정부의 재정부 참의에 임명되었다. 1927년 4월 12일에 황금영, 두월생과 함께 장개석을 도와 공산당을 살해했다. 장개석은 그의 공로를 치하하여 그를 “군사위원회 소장참의”, “해륙공군 총사령부 고문”, “행정부참의”로 임명했다. 장소림은 명기로 소문난 장수영을 둘째부인으로 맞아들였다. 그외 셋째부인과 넷째부인이 있었지만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1937년 10월에 일본군이 상해를 맹렬하게 공격해오자 상해를 포기하려고 생각한 장개석은 상해탄의 3거두가 일본군과 괴뢰정부에 이용당하는것을 방지하기 위해 황금영, 두월생, 장소림을 불러 홍콩으로 피신하라고 권고했다. 3거두의 서열은 원래 황금영, 장소림, 두월생이였지만 그 당시에는 두월생, 황금영, 장소림으로 변했다. 장소림은 두월생보다 먼저 깡패세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자격도 한급 높았기에 마음속으로 두월생이 최고두목으로 된 것을 불복하고있었다. 그는 장개석이 피신하라고 하자 속으로 수판알을 굴렸다. (일본군이 상해를 점령하면 꼭 깡패세력을 끌어들이려고 할것이다. 3거두중에 황금영은 이미 일본군을 위해 일하지 않겠다고 표시했고 두월생은 상해를 떠나겠다고 했으니 이는 내가 혼자서 상해탄을 쥐고흔들 수 있는 좋은 기회야.) 과연 장소림의 예산대로 일본군이 상해를 점령하자 일본의 상해파견군 사령관이 장소림을 찾아와 협의를 맺었다. 그 후 장소림은 일본침략군이 점령한 강서성 정부의 괴뢰성장을 담임하면서 일본군의 괴뢰가 되어 각 항업의 인사들을 일본군에 순종하도록 핍박했다. 그리고 깡패들을 풀어 항일활동을 진압했고 애국지사들을 잔혹하게 살해했다. 그는 “신아평화촉진회” 회장의 명의로 외지에 깡패들을 파견하여 양식, 면화, 석탄, 약품을 강제로 헐값에 사들이거나 빼앗아가지고 일본군에게 보내주었다. 그는 괴뢰군을 모집해들여 일본군한테 충성하게 했고 대량적으로 깡패들을 모아들여 일본군의 졸개로 만들었다. 장소림의 친일활동은 장개석을 불안하게 했다. 장개석은 군통국 국장 대립한테 장소림을 죽여 버리라고 명령했다. 대립은 상해에 잠복한 군통국 상해구 구장 진공주한테 장소림을 제거해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진공주는 장소림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진묵을 대장으로 하는 행동소조를 조직했다. 진묵은 두번이나 장소림을 암살하려고 했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이에 진묵은 장소림의 측근을 매수하려고 생각했다. 그는 장소림의 경호원 중에서 림회부를 선택했다. 림회부는 장소림의 운전기사 아사의 소개로 장소림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초기에 그는 문지기로 일했다. 장소림은 두 번이나 암살을 당할번 한후 무예가 사격에 능한 경호원을 모집하려고 했다. 그때 문지기로 있던 림회부는 사격시험에서 합격되어 장소림의 경호원으로 되었다. 진묵은 몰래 림회부를 만나서 대한간(大漢奸) 장소림을 제거하는 것은 민족의 대의라고 말하면서 5만원을 넘겨주었다. 진회부는 동의하고 돌아가 장소림의 동향을 살피면서 진묵의 지령을 기다렸다. 1940년 8월초에 진공주와 진묵은 림회부를 만나서 “요 며칠사이에 손을 쓰라. 성사 후 군통총부에서 방법을 대어 자네를 프랑스조계지의 순포방에 들어가도록 해주겠네”라고 말했다. 1948년 8월 14일에 손님이 장소림을 찾아왔다. 림회부는 장소림이 손님을 바래주러 아래층으로 내려갈 때 손을 쓰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후 손님을 모셔온 집사가 내려와 기생을 불러들이러 나갔다. 기생하고 놀면 밤을 지새울 것이니 손을 쓸 방법이 없게된 것이다. 림회부는 생각하다가 차를 닦고 있는 장소림의 운전기사 아사를 찾아가 말했다. “선배님, 집에 일이 있어서 며칠 동안 청가를 맡아야 하겠는데…” “그런데 어쨌다는 거야?” “선배님이 위층에 올라가 장선생님한테 말해줄수 없겠소?” 아사는 머리를 가로흔들었다. “장선생은 손님이 왔을 때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게 해. 너도 이런 규칙을 알잖아?” 림회부는 격장법으로 아사를 자극했다. “선배님은 평소에 장선생님이 선배님을 가족처럼 중하게 여긴다고 자랑하더니 이제 보니 모두 허풍이였군요. 보아하니 선배님이나 나나 다름이 없군요.” 아사는 화가 나서 “내가 네놈을 장선생한테 소개해주었는데 네깐 놈이 감히 나하고 비기다니?”하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림회부도 지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위층에 있던 장소림은 “누가 떠는거냐?”하고 소리치더니 창문으로 내다보았다. 장소림은 두 사람이 다투고 있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림회부를 가리키면서 고함쳤다. “이 거북손자같은 놈아! 밥을 처먹고 일은 하지 않고 싸우기만 하는 거냐? 이 어른이 이제 일본병사들을 더 불러오면 너같은 놈은 필요 없어!” 림회부는 약을 올리느라고 맞받아 소리쳤다. “장선생님, 당신 눈에는 내가 일본 놈들보다 못하다는겁니까?” 장소림은 화를 참을 수 없어서 상반신을 창문 밖으로 내밀면서 말했다. “아사야, 그 거북손자놈의 총을 빼앗고 그 놈을 쫓아버려라!” “그럴 필요 없어. 나절로 나갈 테니깐!” 림회부는 허리춤에 총을 뽑아들었다. 모두들 림회부가 총을 바치려고 그러는 줄 알았다. 그런데 림회부는 별안간 총을 장소림한테 겨누더니 잽싸게 방아쇠를 당겼다. 장소림은 당장에서 비명을 지르며 숨을 거두었다. 향년 64세였다. 림회부는 장소림의 죽음을 확인하려고 총을 든 채 웃층으로 뛰어올라갔다. 그때 장소림을 찾아왔던 손님이 프랑스조계지의 경찰에 전화를 거는 것을 보고 림회부는 그 손님을 쏘아죽였다. 그 다음 장소림이 숨을 거둔 것을 확인하고 도망치려던 림회부는 장소림의 경호원들에게 붙잡혔다. 그때 현장으로 달려온 프랑스조계지의 순포장에서 림회부를 붙잡아갔다. 림회부는 15년형을 받았다가 항일전쟁이 승리한 후 석방되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1-01-24
  • 중국 산아제한 폐지, 노령화에 적극 대응해야①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중국은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인구대국이다. 무려 14억이란 인구를 가진 인구대국이다. 중국은 인구 우세로 큰 덕을 입기도 했지만 반대로 인구 때문에 큰 골칫거리로 된 적도 있다. 사례로 건국 후 20여 년 간은 낙후하고도 뒤 떨어진 경제토대에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나라의 부담이 기하급수로 늘어났으며 그 뒤 그런 폐단을 막고자 1970년대 중반부터 대대적인 ‘계획생육’ 정책을 나라의 국책으로 삼고 강력하게 밀어부친 결과 인구의 대폭발을 효과적으로 억제했다. 하지만 ‘계획생육’ 정책이 지나치게 한 쪽 극으로 강조되었기에 이번에는 또 지나치게 아이를 적게 낳는 폐단이 초래되었다. 그래서 몇 년 전 중국에서는 둘째 아이 출산을 허락하는 정책을 출범하였다가 오늘 와서는 셋째 아이의 출산까지 허락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건의가 제출되고 있다. ▲80년대 대로변에 설치된 계획생육 선전 광고판 최근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특별기획으로 ‘생육정책 전면 개방하여 인구노령화 적극 대응해야’란 제목으로 된 장문의 글을 실었다. 그럼 본지는 오늘부터 이 글을 몇 번에 나누어 발췌하여 전재하기로 한다. 출생인구 지속 둔화, 2030년 출생인구 1100만 명 안 될 듯 2018년 들어 중국이 중국의 출생인구가 전년 대비 200만 명이 하락한 후 2019년 들어 출생인구가 재차 58만 명이 줄어든 1465만 명이었다. 1949년에 성립된 신 중국은 선후로 세 번에 거친 자녀출산 고조기가 있었다. 그것은 1950년부터 1958년 사이에 연평균 2100만 명이란 출산기록을 작성했다. 이어 1962년부터 1975년까지 연평균 2628만 명이란 출산기록을 작성했으며 세 번째로 1981년부터 1994년까지 연평균 출산수치는 2246만 명이었다. 그 뒤 중국의 출산인구는 점차 하강세를 보이다가 2003년부터 2012년까지의 연평균 출산인구는 1600만 명 이하로 떨어졌다. 그 중 2012년 중국의 출산인구는 1635만 명에 그쳤다. 중국의 총적인 출산자녀 하강 율은 1970년대 이전의 6%였고 1990연대의 2%였으며 심지어 2010년 후의 1.5%가 되기도 했다. 중국의 제 4 라운드 자녀출산 고조는 규칙적으로 보면 마땅히 2010년 후에 나타나야 했다. 하지만 장시기 동안의 엄격한 계획생육 정책으로 이러한 자녀출산 고조는 소실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중국의 외동자녀 정책은 드디어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 2012년 말 중앙에서 두 번째 자녀 출산 정책을 실시, 하지만 효과는 예측했던 목적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2013년부터 2015년 사이 출산인구는 각각 1640만 명과 1655만 명에 그쳤다. 2015년 말, 중공중앙에서는 둘째 아이 출산을 전면 개방하기로 결정, 이러자 그 이듬해 중국의 출생인구는 1786만 명에 달해 2000년 이래의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2017년에 와서 중국의 출생인구는 1725만 명, 2018년에는 재차 200만 명이 하강한 1523만 명에 달했고 2019년에는 1465만 명까지 내려갔다. 2019년 출생인구의 감소폭이 현저한 것은 주로 주력으로 되고 있는 가임여성 수자의 감소폭이 현저하게 좁아진 것과 생육율의 기본안정에 있은 한편 외동자녀와 두 자녀 출생 수 감소폭이 2018년에 비해 현저하게 좁아진 데 있다는 분석이다. 가임여성의 데이터를 놓고 보면 2016년부터 2019년 사이 15세 - 49세의 가임여성의 데이터는 각각 491만 명, 398만 명, 715만 명과 502만 명이 감소되었다. 이 중 생명자녀 데이터의 85%를 점하는 20세 - 35세 주력 가임여성의 데이터가 각각 194만 명, 264만 명, 398만 명과 331만 명이 감소하였고 2018년의 주력 가임여성 데이터가 2017년에 비해 134만 명이 감소했으며 2019년에는 2018년에 비해 67만 명이 감소하였다. 다음 생육수준으로 놓고 볼 때 2016년의 총 출산율이 1.7%가 높았는바 2015년보다 현저하게 상승, 하지만 2017년에는 다시 하강, 2018년에는 1.5%로 현저하게 하강하였다가 2019년에는 기본상 평형을 유지했다. 국제적으로 비교해 볼 때 목전 중국의 총 출산율은 국제 평균의 2.47%보다 낮을 뿐만 아니라 고수입 경제 체의 1.67%보다도 더 낮았다. 그리고 어린애 별 출생수를 놓고 보면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첫 째 아이 출생 수는 각각 879만 명, 981만 명, 713만 명, 629만 명과 593만 명이었고 둘째 아이 출생 수는 각각 658만 명, 715만 명, 892만 명, 760만 명과 747만 명이었으며 셋째 아이 출생 수는 각각 118만 명, 90만 명, 117만 명, 134만 명과 125만 명이었다. 2016년에는 출생인구가 대폭도로 131만 명이 증가, 주로는 첫째 아이의 출생 율이 대폭 증가하여 출생 기여율이 78%가 되었고 둘째 아이 출생 수는 57만 명이 증가하여 2015년의 53만 명보다 소폭 증가했으며 2017년에는 둘째 아이 출산 효과가 현저하게 나타났다. 비록 그 해에 첫째 아이 출생수가 대폭 하강되어 268 만 명에 그쳤지만 둘째 아이의 출생 수가 대폭 증가하여 총체적인 출생 수는 177만 명이 증가하였다. 하지만 2018년에 들어서는 출생인구가 대폭 하강하여 200만 명이 감소, 주요하게 둘째 아이의 출생수가 132만 명과 첫째 아이의 출생수가 84만 명이 감소하였다. 그리고 2019년에 들어 첫 째 아이와 둘째 아이의 출산수가 각각 36만 명과 13만 명이 감소, 총 출생인구의 감소율은 각각 62%와 22%에 달하였다. 장기적인 추세로 볼 때 생육 퇴적효과가 점차 소실되고 가임여성의 규모가 지속 하강하고 있는 양상이며 지금은 출생인구의 쾌속 하강기가 지속되고 있으면서 2030년에 이르러서는 출생인구가 1100만 명에도 이르지 못할 예측이다. 아이의 출산수별로 볼 때 둘째 아이 및 그 이상의 아이가 점하는 비율은 2015년과 2016년의 45%와 47%에서 2017년엔 58.6%로 상승했고 2018년과 2019년엔 각각 58.7%와 59.5%로 상승했다. 첫째 아이가 없으면 둘째와 셋째 아이가 있을 수 없다. 생육퇴적효과가 소실된 후 첫 번째 아이가 점하는 비율이 이제 곧 둘째 아이가 점하는 비율보다 높은 정상상태로 회복될 전망이다. 2016년부터 2019년 사이 1자녀 출생인구가 40%로 대폭 감소, 600만 명도 채 안 되는 역사적 저조기에 이르게 되었다. 거기에 출생인구가 향후 현저하게 하강될 전망이다. 가임여성 데이터로 볼 때 20세부터 35세 사이 주력 가임여성 규모가 1997년에 1.86억 명으로 고봉 기를 맞았다가 2006년엔 1.67억 명으로 하강되었으며 2013년엔 1.73억 명으로 소폭 상승하였다. 예측에 따르면 현재의 가임여성 감소추세는 2031년까지 계속 감소하다가 2032년부터 2038년 사이에 어느 정도 상승세로 돌아설 전망이지만 2039년부터 다시 지속 감소될 가능성이 크다. 분석에 따르면 2030년 20세부터 35세 사이의 가임여성 규모는 2019년에 비해 약 28%가 감소될 전망이고 2050년에 가서는 2030년에 비해 19%가 감소될 전망이다. 목전의 추세로 보아 중국의 출생인구는 향후 지속적으로 쾌속 하다가 2028년에 가서는 1100만 명도 안 될 전망이며 2029년부터 2036년까지 어느 정도 안정을 이루다가 2037년부터 다시 하강되기 시작하여 2050년에 가서는 약 800여만 명 정도에 그칠 전망이다. 다음 주택, 교육과 의료 등 직접 지출, 양로부담 등 기회적인 지출이 생육행위를 억제하면서 ‘낳기는 쉬워도 키우기가 힘들다(生得起、养不起)’란 말이 나올 정도이다. 첫째 주택 값이 엄청 빨리 오르고 있다. 2004년부터 2018년 사이 주택대출 지출이 (주민 주택대출 잔액/가처분 소득)이 16.2%로부터 47.6%로 상승했고 주민채무를 이끄는 지출(주민 채무 잔액/가처분 소득)은 28.6%로부터 88.4%로 상승했다. 둘째, 교육원가가 현저하게 상승, 특히 공립유치원 공급이 엄중하게 부족하여 가정에서는 어쩔 수 없이 비용이 많이 드는 사립유치원을 선택하게 되는 것으로 자녀교육에 많은 투자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1997년부터 2018년 사이 중국 공립유치원에서 공부하는 유치원생의 비례는 95%로부터 43%로 내려갔다. 셋째, 의료비용이 지속 상승, 1995년부터 2018년 사이 주민들의 의료보건지출이 27배로 상승했으며 이는 주민가처분 소득의 9.2배를 엄청나게 초월하고 있다. 넷째, 외동자녀 부부의 ‘421’ 가정결구가 양로부담을 무겁게 만들고 있어 생육계획을 억누르고 있다. 다섯째, 여성의 노동참여율은 높지만 취업권익은 잘 보장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며 이는 생육기회의 원가를 높게 만들고 있다. 1990년부터 2019년간의 20년 사이 중국여성의 노동참여율은 남성에 비해 11.6%로부터 14.8%로 확대되었으며 미국, 유럽연맹, 일본 등 선진국 남녀의 노동참여율과의 차이가 점점 축소되는 태세를 보이고 있다. (다음에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1-01-20
  • 추악한 위선, 드러난 이중잣대
    ●천웨이화(차이나데일리 EU 사무국)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이 1월 6일 워싱턴에서 미 국회 의사당을 습격한 사건은 미국과 전 세계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자는 "폭동, 폭도, 반란군, 국내 테러리스트"라고 불렀다. 그리고 CNN 방송은 미국인들은 "공포"와 "혐오"로 국회 의사당 폭동을 지켜봤다고 전했다. FBI는 화요일에 160 건의 사건 파일을 열었고 워싱턴 DC 마이클 셔윈 (Michael Sherwin) 미국 변호사 대행은 이미 70 건의 사건이 접수되었다고 밝혔다. 상원 민주당 지도자 척 슈머는 미국 국회 의사당을 습격한 폭도들의 항공기 탑승을 금지하고 정부 "항공기 탑승 금지"명단에 추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부 폭도들은 이미 탑승 금지 명단에 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폭동에 대응하여 트위터는 8천8백만 명 이상의 팔로워를 보유한 트럼프의 계정을 영구적으로 정지했다. 또한 큐아논(QAnon, 극우음모론집단)과 관련된 7만 개 이상의 계정을 폐쇄했다. 다른 소셜 미디어 플랫폼도 그 뒤를 따랐다. 애플, 구글 및 아마존은 폭력적인 콘텐츠를 유포 한 혐의로 팔러(Parler)에 대한 서비스를 중단했다. 팔러는 미국 극우 세력이 선호하는 소셜 미디어 플랫폼이다. 그리고 수요일 유튜브는 "계속되는 폭력의 가능성"을 인용하면서 적어도 일주일 동안 트럼프의 계정을 정지하는 최신 온라인 플랫폼이 되었다. 메르켈 총리 대변인은 “기본권으로서 표현의 자유는 입법기관이 제한할 수는 있지만 특정 기업이 이를 제한해선 안 된다”라며 “메르켈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계정이 영구 차단된 데 대해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다”라고 말했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을 설득하여 트럼프를 해임하기 위한 제25차 수정안을 촉구하는 데 실패한 하원은 수요일에 두 번째로 트럼프를 "폭란 선동"혐의로 탄핵했다. 게다가 2020년 선거 결과에 도전한 테드 크루즈와 조쉬 하울리와 같은 미국 의원들도 폭동 이후의 폭풍을 주시하고 있다. 독일의 도이치 은행과 뉴욕에 본사를 둔 시그니처 은행은 트럼프의 가업에 대한 대출을 중단하거나 계좌를 폐쇄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미국 프로 골프협회(PGA America)는 2022년 챔피언십이 뉴저지의 트럼프 내셔널 골프 클럽에서 열리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번 폭동 사태와 관련해 미국과 대부분의 서방 언론 매체와 정치인들의 반응은 2019년 7월 1일 폭도들이 홍콩 입법회를 습격한 후 보여준 반응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홍콩특별행정구 입법부 건물과 기물은 폭도들의 석유, 폭탄 등 투척으로 훨씬 더 심각하게 파괴되고 폭력적이었지만 BBC와 CNN과 같은 언론 매체는 폭도를 "폭도"라고 부르지 않고 시위대라고 불렀다. 뉴욕 타임스는 그날 보고서에서 그들을 "활동가 집단"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크루즈, 홀리, 톰 코튼, 마르코 루비오와 같은 미국 의원들은 폭도들을 비난하는 대신 홍콩 당국의 법적 대응에 대해 비난을 아끼지 않았다. 미 국회 의사당 습격은 비난받을 수 있으며 책임자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미 의회에 대한 공격은 서구 언론과 정치인의 위선과 이중 기준을 다시 한번 드러냈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21-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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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잃어버린 조선족의 역사
    조선족은 중국에 살고 있는 한민족으로 대개 조선시대 말부터 중국으로 이주하여 생활하면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형성된 역사가 짧기에 여기서 잃어버린 역사 얘기를 하게 되면 대부분 조선족 지식인들이나 역사학가들은 실소를 금할 수 없을 것이다. 백여 년밖에 안되는 조선족 역사에 그 무슨 비밀 같은 것이 있으며 잃어버린 것이 있을쏘냐고... 역사는 예전에나 지금이나 잃어버리고 고쳐지고 망각되는 일이 허다하다. 중국 조선족의 역사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잃어버리게 되었을까? 1931년은 조선족의 역사에서 아니 중국 나아가서 세계의 역사에 큰 변화가 있은 해였다. 1931년 중국은 동북의 만주국 통치를 인정하면서 일본에 동북을 빼앗기고 만다. 동북을 강점한 일본은 바로 중국 동북의 길림성 조선 접경지대의 백두산 일대에서 맹활약하던 조선독립군(조선 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군대로 잠시 지칭하며 당시 이 군사력의 정확한 명칭은 모른다)을 첫 타깃으로 삼는다. 사실 1931년 전까지 동북은 중국 땅이어서 일본은 영사관의 병력과 현지 경찰 등으로는 조선독립군을 제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31년 이전의 조선 독립 세력은 이미 중조 접경 지역에서 이십여 년간 발전을 하여 대규모의 병력을 가졌던 것이다. 그 예로 최서해 강경애 등 당시 프롤레타리아 계열의 작가들을 보면 모두 중국 땅으로 이동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의 검열로 다만 중국 땅을 생존과 기회의 땅으로 묘사하였지만 실제는 백두산 일대에는 조선의 독립투사들이 대거 포진하여 있었다. 그중에는 파산된 농민도 있었겠지만 땅과 집을 팔고 구국 운동을 하려는 조선의 의로운 사대부 귀족과 의인들도 많았었다. 하여 연변과 동북에는 그 당시 애국지사들이 세운 학교가 많았다. 그 예로 윤동주는 심지어 기독교 계열의 학교를 용정에서 다니며 애국주의를 전수받았다. 1931년은 중국 조선족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한 해였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그냥 일본의 동북 강점으로 나온다. 조선족의 역사에서 백두산 일대에서 총칼을 갈며 광복을 꿈꾸는 피 끓는 인생들을 그냥 별 볼일 없는 사람들로 취급하고 있을 때 중국공산당은 당시 그렇게 보지 않았다. 중국 역사에서의 항일연군은 곧 조선독립군과의 연합을 의미한다. 정사에서는 지금 그 누구도 당시 조선독립군의 세력이 어떠했는가가 나오질 않는다. 다만 중국공산당의 영도하에서의 항일연군의 활동이 부각될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역사적 환경하에서의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해석되지만 결코 우리가 망각해서는 안 될 역사이다. 조선독립군의 군사세력은 당시 동북에서 으뜸가는 위치에 있었으며 이 사실을 잘 아는 중국공산당은 조선독립군에 연합 제의를 한다. 그 당시 중공은 중국 전역에서 국민당에게 잔혹하게 탄압을 당해 겨우 수만 명이 정강산에 오를 때라 동북지역은 군사력과 당조직이 상대적으로 약해있었다. 일설로 양정우가 동북으로 올 때에도 단신으로 왔었다. 그만큼 동북의 중공의 조직과 군사력은 약했다. 1931년 일본의 동북 강점 이후 연변 일대 조선독립군에게 있어서 중국공산당과의 연합 유혹은 컸다. 다만 조선독립군은 성분이 복잡했는데 독립군 중 젊은층은 소련 사회주의 혁명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나이가 있는 일부는 서방 민주주의 혁명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대체로 소련의 혁명 성공을 인정하는 편이었으며 소련이 이끄는 국제공산당과 연계를 가지고 있었다. 국제공산당은 조선독립군의 현 병력으로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소련 접경지대로 이동하여 세력 보전하라고 조선독립군에 제의하였다. 중국공산당은 조선독립군이 중국 경내에 남아서 같이 항일연군을 성립하여 일제와 싸울 것을 요구하였다. 1932년, 일제는 동북 강점을 마치고 백두산 일대의 조선독립군에 대한 정벌을 준비한다. 조선독립군은 연변과 동북 각지에 산재하여 있는 독립군 우두머리들을 모아서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 회의를 연다. 즉 소련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중국에 남아서 유격전을 할 것인가? 이 고위층 회의가 반역자 혹은 간자에 의하여 일본군에 알려지며 조선독립군의 각 지대의 중대장들과 수령들이 포위를 당해 전부 희생된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어랑촌 13용사가 나타나게 된 전말이다. 어랑촌 13용사는 사실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유격대원들의 희생이 아니고 동북 일대 조선독립군 영수들의 마지막 울부짖음이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김구를 말하고 이승만을 알지만 이들을 모른다. 어랑촌 13용사는 유격대원으로 포장이 되었으며 그들의 이름도 사적도 전부 허구로 되어있으며 심지어 이 사건이 발생된 시점도 전부 허구로 되어있다. 우두머리들을 전부 잃은 조선독립군은 일부분은 소련으로 들어갔으며 (김일성) 일부분은 중국공산당과 합병하여 항일연군을 이루었다. 후에 이들의 대부분은(일설에 6개 사단 6만 명이라고 함) 김일성을 따라 조선군으로 편입되었으며 나중에 조선전쟁에서 대부분이 사라졌을 것으로 믿는다. 하여 오늘날에 와서 백두산 조선독립군의 역사는 영원히 미제로 남아있으며 전부 김일성 주석(그 당시 나이가 십 대)이 한 일로 역사를 쓰게 되었다. 1957년에 조선에서 사람이 와서(옛 조선독립군으로 추측이 된다) 어랑촌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사적을 묻는다. 이때에서야 중국에서는 이 부분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이들의 이름을 복구하려 했으나 이미 이십여 년이 흘렀는지라 어려웠다. 문화대혁명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연변에 어랑촌 13용사의 기념비가 세워진다. 그러나 그중의 인물들은 이젠 더는 알 수 없었으며 심지어 살아있는 사람이 용사에 들어가고자 하는 일이 발생했다. 역사는 똑똑히 적은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만약 중공의 유격대와 유격대원이었다면 그렇게까지 수십 년간 방치할 수도 없었으며 죽은 뒤에도 사적이 모호한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오늘날에 우리가 보는 어랑촌 13용사는 일개인의 서술에 의하여 역사를 이용하는 자들에 의하여 가공이 되고 흐트러진 것이지만 역사의 진면모는 그 자리에 있었으며 지나간 역사는 결코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이제 백 년이 다 돼가는 이 시점.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고 그걸 증명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흘렀다. 아마 우리의 후대들은 지금 역사책으로 전해져오는 어랑촌 13용사 이야기를 알고 믿으며 자랄 것이다. 우리의 조선족 역사는 이렇게 영원히 잃어버렸다. 주 : 본문은 본지의 주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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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21-03-02
  • 조선의용군과 만주 독립군 활동
    한국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조선의용군’을 검색해보면 만주에서 싸우던 독립군 부대라고 버젓이 나온다. 해서 만주에서 조선의용군 혹은 조선 의용대가 싸웠거니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조선의용군이 곧 조선독립군이고 만주에서 만들어진 조선독립군 백두산 독립군이나 만주 독립군이라고 생각하고 나아가서 항일연군에도 가담하지 않았나 혹은 항일연군에 속하거나 관련된 거 아닌가 하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중국 모처에서 조선 독립을 위해 싸운 건 맞으나 조선의용군은 1920년 좌우부터 진행된 만주의 독립운동 독립혁명 독립군 그리고 항일연군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조선의용군은 1938년경에야 만들어졌으며 즉 급조한 것이며 광복이 될 때까지 300명 좌우였으며 게다가 대부분이 비전투원이었다. 조선의용군을 조선독립군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만주의 조선 독립 세력은 훨씬 전에 이루어졌다. 1938년이면 김좌진이 가담한 청산리 전투도 끝난지 십수 년이 되는 해이다. 그리고 장소도 틀린다. 만주가 아니라 한구 즉 오늘의 중국 후베이성 무한시에서 의용군을 설립했다. 설립한 배경에는 장개석은 상하이에 있는 김구와 호흡이 맞았고 조선 독립을 돕고자 했으나 김원봉 같은 좌파랑은 맞지 않았다. 그래서 국공합작을 빌미로 김원봉 세력을 연안에 보냈는데 그게 조선의용군이다. 그 당시 동북의 항일연군에는 만주의 조선독립군 세력이 절반 넘어 포진해 있었으며 중국공산당의 입장으로 볼 때 조선인은 모두 한민족이고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였기에 김원봉의 조선의용군에 대해 접대를 잘해줬다. 1945년 항일 전쟁이 끝나자 항일연군에 속해있던 수만 명의(일설에 6개 사단 6만 명) 조선독립군과 화북 일대의 조선의용군이 조선 김일성 휘하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중 대표적인 게 정율성이라고 봐야겠다. 하여 모택동이나 중공의 입장에서는 조선인은 대단히 고마운 존재로 그것이 조선 의용대이든 만주 독립군이든 모두 동일시 하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김학철에 대한 예우이다. 김학철은 나이를 보나 독립활동에 가담한 시기나 시간을 보나 항일연군과 다른 조선의용군에 비겨도 한참 떨어진다. 그러나 김학철이 중국에 왔던 시기는 중국에서 공을 세웠던 조선인들이 대거 조선반도로 회 괴하던 시기였으며 중국은 아직 그 감사함이 따뜻하게 몸에 배어 있던 시기였다. 그래서 분대장에 불과한 김학철은 버젓이 모택동과도 이웃으로 잠깐 산 적이 있다. 그리고 해방 후 행정구역을 정할 때 원체 연변은 조선인의 공헌으로 볼 때 연변조선족 자치구로 해줄 수 있다는 게 중공의 공론이었지만 그 당시 주덕해를 비롯한 혁명가들은 비교적 적은 조선족 인구와 지역을 감안하여 조선족 자치주로 하겠다고 겸손하게 결정하였으며 이것이 그 후 중공에서 조선족이라면 소수민족 중 최고로 취급하는 결정적 계기다. 말이 엇나갔지만 조선의용군은 만주 독립군 혁명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김원봉이 개인적으로 만주에는 자주 다녀갔지만 조선의용군은 한날한시라도 만주 땅을 디딘 적이 없었으며 전투나 혁명은 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오늘날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만주의 독립군이 조선의용군으로 버젓이 나오는데 이는 역사 왜곡이다. 만주의 독립군은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한 1912년경부터 중국과 조선의 접경지대인 백두산 약수동 근처에서 태동을 하였으며 1931년 만주가 일본의 손에 들어가자 일본 관동군을 상대하여 소탕당할 험악한 상황에 맞닥뜨려 일부는 소련 경내로 이동을 하였으며 대부분은 중공과 연합하여 항일연군으로 바뀌었다. 다시 말해서 항일연군 중의 조선인이 곧 만주의 독립군 활동을 한 장본인이란 말이다. 조선 의용대는 그냥 조선인이라는 것 외에 활동 무대는 중국 화북 일대였으며 최고 인수가 300명에 그쳤다. 항일연군 중의 조선인은 나중에 조선에 들어간 것만 6만 명이다. 개중에 안 간 사람과 군인이 아니어서 못 간 사람(중국공산당 지하당원) 등을 포함한다면 만주 독립군 활동 세력은 십수만도 가능하다. 중국에서는 항일연군의 조선인 사적을 최대한 줄여 중공의 업적을 과시하는데 유리하므로... 이 세 세력은 조선족이라는 근대의 가장 위대한 한민족의 역사적 업적을 가로채였으며 김원봉 같은 300명 부하를 거느린 하루라도 제대로 된 전투도 못해보고 테로 분자 비스름한 행적을 기록한 사람에게 영광을 주었다. 누구를 탓하랴 우리 조선족 자신도 우리의 역사를 모르고 있지 않는가? 그것이 설령 눈앞에 있다고 하여도 ……. 주 : 본문은 본지의 주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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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21-02-20
  • 중국 산아제한 폐지, 노령화에 적극 대응해야③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2019년 중국의 인구는 14억 명을 돌파했다. 하지만 국가인구발전계획(2016~2030년)에서 예기했던 2020년 가서 14억 2000만 명에 도달한다는 계획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2019년 중국 총인구는 14억 5만 명으로 14억을 돌파, 2018년에 비해 467만 명이 증가했지만 인구의 증가량은 지속적으로 협소했고 자연증가 상황 역시 점차 완만해졌다. 1949년 건국시기 중국 인구(홍콩, 마카오와 타이완 및 해외동포는 포함되지 않았음)는 5.4억 명, 1981년에는 10억 명을 돌파했고 2019년에는 14억 명을 돌파했다. 중국 인구가 8억 명으로부터 10억 명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12년이었고 10억 명으로부터 12억 명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14년이었으며 12억 명에서 14억 명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24년이었다. 2016년 국가인구발전규획에는 2020년까지 중국 인구를 14억 2000만 명에 이르게 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이 예정 목표에 도달하자면 2020년까지 중국 인구가 약 2000만 명이 증가하여야 했지만 이는 명확하게 불가능한 사실로 되고 있다. 국가인구발전규획이 예견 착오를 범한 원인은 바로 과분하게 둘째 자녀 정책이 생육율 상승에 큰 영향을 줄 것이라고 평가하고 분석한데 있다. 즉 2015년의 총 생육 율이 1.5% 내지 1.6% 사이이고 2020년부터 2030년 사이의 총 생육율이 1.8%로 되어 2030년 후가 되면 중국 인구가 14.5억 명으로 절정을 이룰 것이라고 인정한 것이었다. 다음 유엔 역시 중국 인구의 증장에 대해 같은 평가를 했다. 즉 중국 측은 2031년이 되면 중국인구가 14억 6000명에 달할 것이라고 예측했고 유엔 또한 ‘세계인구의 전망(2019)’에서 중국인구의 9가지 예측방안을 출범, 이 중 중국 측 방안에 가설로 2015~2020년, 2020~2025년, 2025~2030년의 중국의 총생육율을 각각 1.70%, 1.72%, 1.73%로 예측하면서 2024년에 이르러 중국 인구가 14.5억 명의 절정기를 이룰 것이라고 내다봤다. 예측에 따르면 중국 인구가 14차 5개년 계획 기간에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설 전망이며 2050년 좌우부터는 중국 인구의 총량이 급격히 위축될 것으로 분석되었으며 2100년에 가서 중국 인구는 8억 명에 못 미칠 것으로 그 때 가서 세계에서 중국인구가 점하는 비율은 지금의 약 19%에서 7%로 내려갈 가능성이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인구총량의 불변을 유지하는 세대교체 수준은 2.1이었다. 이는 일본의 1.4% 총출산율은 매 한 세대를 건너가면서 3분의 1 정도가 위축된 것을 의미하며 0.98을 보이고 있는 한국의 총출산율을 보면 매 한 세대를 건너가면서 50% 이상씩 감소폭을 보이고 있다. 비록 2019년 중국의 총생육율은 1.5%였지만 생육 퇴적효과가 소실됨에 따라 생육율은 진일보로 하락될 전망이다. 1.4%의 총 생육율로 추산해보면 중국 인구는 2022년 전후에 절정기를 맞게 된다. 만약 총생육율이 1.3% 혹은 1.5%일 경우 중국 인구는 2021년이나 2024년에 가서 절정기를 이루게 된다. 이어 인구의 절정기에 이른 뒤 2025년부터 2030년 기간 동안 중국 인구의 위축속도가 비교적 완만해지겠지만 1962~1975년 높은 출산율 시기에 출생한 인구가 생명의 종점기에 들어서면서 중국 인구의 위축속도는 현저하게 빨라지게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그렇게 되면 2050년에 가서 중국 인구는 2022년에 비해 9% 감소할 것이고 2075년에 가서 중국 인구는 2050년에 비해 22% 감소할 것이며 2100년에 가서 중국 인구는 2075년에 비해 25% 감소할 전망으로 약 7.5억 명에 이를 것으로 보이고 있다. 그리고 세계인구속에서 중국인구가 점하는 비례를 보면 1950년에는 22%, 2019년에는 19%, 2100년에 가면 대폭도로 하강되어 약 7%가 될 전망이다. 그러면 그 때 가서 인구 총량의 위축으로 거대 시장에서의 중국우세가 점차 소실될 것이며 종합국력 또한 큰 영향을 받을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인구우세의 소실은 중국경제의 잠재 성장율 하강 의미 경제성장의 각도에서 보면 중국의 노동연령 인구의 비례는 2010년에 벌써 절정기를 맞았다. 이제 2050년이 되면 노동연령의 인구가 2019년에 비해 23% 감소할 것으로 예견되고 있다. 2010년부터 2018년 기간 동안 중국의 경제성장은 10.6%로부터 6.1%로 하강, 이제 곧 ‘경제성장 5% 시대’에 들어서게 되었다. 중국에 있어서 인구 수량의 우세는 과거 경제 고속성장을 유지할 수 있었던 하나의 중요한 인소였다. 1978년 개혁개방 후 중국은 방대하고도 젊은 노동력 자원과 거대한 통일된 시장에 의거하여 세계 제2대 경제체를 쾌속 이룩했다. 그리고 1962년부터 1975년 2라운드 출산 붐 시기에 태어난 인구가 개혁개방 40년간 건설의 주력으로 되었다. 또한 이 세대는 생산과 저축이 많았고 소비가 적었으며 저축율과 투자율 상승을 이끌면서 저축의 투자부분을 초과하였고 부분적 무역수지의 흑자를 기록하기도 했다. 동시에 남아도는 유동성과 인당의 평균 수입수준의 향상은 소비를 추진했으며 경제향상의 잠재력으로 되었다. 하지만 장시기 동안 저 생육 율 배경으로 중국에서 15세부터 64세 사이의 노동연령인구의 비례 및 규모는 2010년과 2013년에 그 절정기를 보인 후 인구 수량의 우세는 곧 소실되기 시작했으며 중국경제의 잠재력의 하강을 초래, 중국경제 증장의 변속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2010년부터 2019년 사이 중국경제의 성장속도는 10.6%에서 점차 6.1%로 하강, 이제 곧 ‘5% 시대’에 진입하게 되었다. 현재 절대적인 수준을 볼 때 중국 인구의 총부양 비율은 약 40%이다. 이제 미래 한 단계에 들어 여전히 인구부양 부담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인구기회 창구기간(人口机会窗口期)’으로 인구부양 부담이 50%를 초과하지 않을 전망이다. 2010년의 중국 인구 보편조사에 따르면 80후, 90후와 00후의 인구는 각각 2.19억 명, 1.88억 명과 1.47억 명으로 90후의 인구가 80후의 인구보다 약 3100만 명이 적었고 00후의 인구가 90후의 인구보다 4100만 명이 적었다. 예견하건대 2050년이 되면 중국 인구가 2019년보다 2.3억 명 내지 7.6억 명이 감소될 것으로 감소비율은 약 23%가 될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리고 노동력 공급 총량의 지속 위축에 따라 노동력 원가가 날로 상승하고 부분적 제조업은 이미 동남아거나 인도 등지로 전이하였거나 이제 향 후 지속 전이될 전망이다. 소비를 놓고 볼 때 노령화는 소비비율을 제고하고 있지만 반대로 소비증속을 하강시킴과 아울러 소비구조의 변천을 인기시키고 있었으며 또한 의료보건이 점하는 비율이 점점 높아지게 됐다. 생명주기의 소비이론에 따르면 노인들의 평균 소비경향은 높아지고 있지만 노령화가 보편화로 되면서 소비의 증가속도는 감소시키기 마련이다. 2010년과 2018년 중국 주민의 소비가 GDP에서 점하는 비율은 각각 35.6%와 39.0%, 주민들의 소비지출 증가속도는 15.3%에서 9.5%로 하락했다. 아울러 부동한 세대에 따라 소비 편향의 차이가 뚜렷했다. 예하면 80후는 육아와 자동차 등에 소비편향이 있고 60후와 70후는 주류 등에 소비편향이 있었으며 60 전의 세대는 의약보건 등에 소비편향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때문에 인구 연령 구조의 변화가 부동한 업종에 대한 영향의 차이가 큰 것이다. 예하면 2017년의 정점에서 25세부터 54세 사이의 부류는 술 담배 구매속도가 점차 느려졌고 2013년의 정점에서 20세부터 50세 사이의 주력업종 부류가 차지하는 신건주택 면적이 2011년과 2013년에서 14억 평방미터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들의 가전, 가구와 건축 인테리어 등 산업관련 소비는 2010년에 절정에 달했다. 또한 25세부터 45세 사이의 자동차 구매 부류는 2003년의 자동차 구매 절정기에 비해 자동차 구매량 증가속도가 파동 중에서 하락되고 있으며 2018년에 들어 처음으로 자동차 구매량이 마이너스로 하락, 하지만 신에너지 자동차 구매의 잠재력은 여전히 거대하다는 분석이다. 이 외 노령화를 추진하는 의료보건 소비는 2013년부터 2018년 사이 6.2%에서 7.8%로 성장하였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1-02-19
  • 고강, 임표가 항미원조를 반대했는가?
    ○김희수 1954년에 중국공산당 제7기 4중전회에서 고강(高岗), 요수석사건에 대해 결정을 내린 후 고강이 조선(북한) 출병을 반대했다는 설법이 있었다. 1971년의 “9.13”사건 후에도 또 임표(林彪)가 조선 출병을 반대했다는 설법이 있었다. 20세기 90년대 말까지 항미원조전쟁(6.25전쟁)에 대해 언급한 개별적인 저작에서 이런 설법이 있었다. 그럼 고강과 임표가 정말로 항미원조 출병을 반대했을까? 고강과 임표가 조선 출병을 반대했다는 설법은 근거가 부족하다. 1950년 6월 하순에 미국이 무장으로 6.25전쟁에 개입하고 대만해협을 노리자 중공중앙에서는 조선에 출병하고 대만 해방을 뒤로 미루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당시 각 중앙국의 주요 지도자들 중 고강이 제일 먼저 알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1950년 7월 7일에 중앙군위에서 동북변방군을 조직할 데 대한 문제를 연구했고 그 이튿날에 변방군에 편입된 부대는 즉시 광주, 중원 등지로부터 동북으로 집중되었다. 이미 확정된 변방군 사령원 겸 정치위원 속유, 부사령 소경광, 부정치위원 소화는 병으로 직무를 맡을 수 없었다. 1950년 7월 22일에 주은래와 섭영진은 연명으로 모택동에게 “변방군을 먼저 동북군구에 귀속시켜 고강(사령원 겸 정치위원)의 지휘를 받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하고 건의했다. 모택동은 그 건의를 비준했다. 동북변방군의 공급과 참전에 수요되는 물자준비, 장비의 보충과 수리, 운수, 전방동원 등 참전준비는 모두 고강의 직접적인 지도하에서 진행되었다. 1950년 8월 중순 후에 6.25전쟁은 대치국면이 나타났다. 그해 8월 31일에 고강은 모택동에게 6.25전쟁 상황과 변방군 준비사업에 대한 몇 가지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보고했다. “현재 아군의 어떤 간부들 중에는 일본군이나 국민당군과 싸울 때의 안광으로 오늘의 적을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적들의 전술, 공군, 대포 등 특점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또 일부 간부들은 미국 공군에 대해 속수무책인데 전문가들을 조직하여 적의 작전 특점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야만이 작전 시 적을 소멸할 파악이 있게 됩니다.” 모택동은 1950년 9월 3일에 고강에게 “반드시 현대 전쟁의 관점으로 부대를 교육해야 합니다. 절대 적을 경시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의 의견은 정확합니다. 그 문제에 대해 연구해봅시다”라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이는 고강이 동북 변방군의 작전 준비사업에 대해 적극적이고 주동적으로 나섰다는 것을 말해준다. 주은래와 팽덕회가 그 후에 했던 보고에서도 볼 수 있다시피 중공중앙정치국에서 조선 출병에 대해 토론할 때 확실히 부동한 의견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상곤 신변에서 사업했던 일군의 말에 의하면 양상곤은 “당시 출병에 대해 찬성하는 사람은 소수였습니다. 출병을 하지 말자거나 잠시 출병을 하지 말자는 의견이 다수였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중앙정치국 회의에서 결정을 내리기 전에 고강이 출병하는데 찬성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가 혼자 아니었을 것이다. 찬성했건 반대했건 모두 당내의 민주 체현으로 정상적인 것이었다. 더구나 어떤 의견이든 모두 당과 국가의 이익을 책임지기 위해 고려한 것이었다. 때문에 누가 찬성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내놓았다고 해서 조선 출병을 반대했다고 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것이다. 중공중앙정치국에서 중국 인민지원군을 조직하여 “항미원조, 보가위국”의 결정을 내린 후 출병을 찬성하는 고강의 태도는 견결했고 매우 적극적이었다. 1950년 10월 8일에 모택동이 중국인민혁명군사위원회 주석의 명의로 서명한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직할 데 관한 명령 중의 규정에는 “중국인민지원군은 동북행정구를 총후방기지로 한다. 총후방기지는 모든 후방사업과 조선을 지원할 데 대한 사무를 담당한다. 동북군구 사령원 겸 정치위원 고강 동지가 총부방사업의 배치를 지휘하고 책임진다”는 내용이 있다. 그날 고강은 방금 지원군 사령원 겸 정치위원직을 맡은 팽덕회와 함께 심양으로 날아갔다. 1950년 10월 9일에 고강은 팽덕회와 함께 지원군 군 이상 간부회의를 열고 출국 작전에 대해 상의했다. 1950년 10월 8일에 주은래는 모택동과 중공중앙의 위탁을 받고 임표더러 소련에 가서 스탈린 등 소련 지도자들에게 중공중앙정치국 회의에서 출병을 결정한 정황을 통보하고 소련 측에서 무기장비와 공중엄호를 제공해 줄 것을 요구하라고 부탁했다. 스탈린은 소련 공군이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서 3개월 내에는 중국군 작전을 엄호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이 소식이 북경에 전해지자 모택동은 1950년 10월 13일에 다시 중공중앙정치국회의를 소집했다. 그 번 회의에서 고강은 조선 출병에 대한 태도가 매우 견결했다. 고강과 팽덕회는 소련에서 공군이 출동하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는 반드시 출병해야 한다고 표시했다. 모택동은 그날 주은래에게 보내는 전보에서 “고강, 팽덕회동지 그리고 기타 정치국 동지들과 상의한 결과 우리 군은 반드시 조선에 출병해야 한다고 일치하게 인정했습니다”하고 썼다. 1950년 10월 14일 3시에 모택동은 다시 주은래에게 전보를 보내어 “팽덕회와 고강 동지는 적군과 싸우면 승산이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들과 나는 모두 참전이 꼭 유리하다고 인정했습니다. 첫째, 지원군이 출동한 후 팽덕회는 동북 총후방기지의 사업에 만족을 표시했다. 팽덕회는 항미원조전쟁 기간에 “지원군이 전선에서 승리한데는 두 사람의 공로가 크기에 응당 그들에게 감사를 드려야 한다. 그중 한 사람은 고강이고 다른 한 사람은 홍학지(지원군 부사령원 겸 지원군 후방근무 사령부 사령원직을 맡았음)이다. 둘째, 중공중앙정치국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직하여 항미원조, 보가위국의 결책을 내온 후 고강의 태도와 행동을 보면 고강이 항미원조에 대해 태도가 견결했고 적극적 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1951년 11월에 고강과 임표는 동시에 중앙군위 부주석으로 임명되었다. 임표가 조선 출병을 반대했다는 설법은 주요하게 그가 병을 핑계로 지원군 통수직을 맡지 않겠다고 한 것과 관계된다. 그리고 또 중공중앙정치국에서 조선 출병을 결정한 후에도 임표가 의연히 출병을 반대했다는 것이다. 모택동은 확실히 임표에게 지원군 통수직을 맡기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1950년 8월 31일에 고강은 변방군이 출동 후 해당 문제 대해 모택동에게 보낸 편지 중에는 “부대를 지휘하는 통수와 전문인재가 빨리 동북에 올 것을 건의합니다. 그래야 충분히 준비할 수 있습니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모택동은 1950년 9월 3일에 고강에게 회답 편지를 보냈다. “임표와 속유는 병이 있고 또 두 사람은 이 기간에 해야 할 사업이 있어서 잠시 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아마 몇 개월 후에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모택동의 이 편지에서 임표는 확실히 병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한 달 후에 중국 인민지원군을 조직하여 항미원조에 출병할 때 임표는 지원군 통수를 맡을 수 없었던 것이다. 중공중앙의 결정에 의해 임표는 소련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당시 임표는 중공중앙정치국 위원이 아니었다. 양상곤의 일기와 이번 회의에 참가했던 박일파에 따르면 임표는 1950년 10월 4일 오후와 5일 오후에 중공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 참가했다. 임표가 회의에서 무슨 의견을 발표했던 조선 출병을 반대했다고 말할 수 없다. 중공중앙정치국에서 조선 출병을 결정한 후에도 임표가 조선 출병을 반대했다는 설법은 증거가 없어 믿음성이 없다. 그러나 1951년 11월 5일에 중앙인민정부위원회 제13차 회의에서 고강과 임표를 동시에 중앙군위 부주석으로 보충선거했다. 1951년 말과 1952년 초에 임표가 3개월간 중앙군사위원회의 일상 사업을 주최했다. 항미원조는 당시 중국공산당과 중국 인민에게 첫째가는 대사였기에 만약 고강과 임표가 조선 출병을 반대했다면 모택동과 중공중앙에서 그들을 그토록 신임하지 않았을 것이고 항미원조전쟁이 시작되어 1년이 지난 후 그들을 중앙군위 부주석으로 보충선거하지 않았을 것이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1-02-16
  • 중국 산아제한 폐지, 노령화에 적극 대응해야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2019년 중국에서 65세 및 그 이상의 연령을 가진 인구비례는 12.6%에 달해 ‘부유해지기 전에 늙어버린 중국’이란 문제가 돌출해졌다. 그 비교로 미국, 일본과 한국의 노년인구의 비중도 12.6%였지만 그들의 GDP는 모두 2.4만 달러 이상에 달했다. 하지만 중국의 GDP는 겨우 1만 달러에 불과하다. 2019년 중국에서 65세 및 그 이상 연령을 가진 인구는 1억 7603만 명으로 2018년에 비해 945만 명이 증가, 점하는 비중은 12.6%였으며 이는 2018년에 비해 0.7%가 늘어난 셈이다. ▲70년대 계획생육 선전 포스터 역사적인 데이터 비교로 인구 노령화 속도를 보면 2001년부터 2010년 사이 중국의 노령화 정도는 연평균 0.2%씩 증가, 2011년부터 2018년까지는 연평균 0.4%씩 증가했다. 그리고 중국의 노령화 수준을 국제사회와 비교해 보면 2019년 중국의 노령화 정도는 글로벌 경제체 중 61위를 차지, 중등이상 수입 계층보다 2.2%가 더 높았다. 2019년 세계의 65세 및 그 이상 연령의 인구가 점하는 비중은 9.1%, 고수입 계층 및 중등이상 수입 계층이 점하는 비중은 각각 18.0%와 10.4%였다. 세계에서 노령화 정도가 앞 3위인 일본, 이탈리아, 포르투갈도 노령인구가 각각 28%, 23%와 22.4%였다. 그리고 노령화 정도와 경제발전 수준의 국제적 대비로 보면 미국, 일본, 한국과 중국의 GDP가 1만 달러로 된 시기는 1978년, 1981년, 1994년과 2019년이었으며 당시 이런 나라들의 65세 이상의 인구가 점하는 비율은 각각 11.2%, 9.2%, 5.8%와 12.6%였다. 또한 미국, 일본, 한국과 중국의 65세 및 그 이상 인구의 비율이 12.6%로 된 시기는 각각 1990년, 1992년, 2015년과 2019년이었다. 당시 이런 나라들의 인당 평균의 GDP는 각각 2.4만 달러, 3만 달러, 2.7만 달러와 1만 달러였다. 다음 발전추세로부터 보면 중국인구의 노령화 속도와 규모는 2022년이면 중국의 노년인구가 점하는 비율이 14%를 초과하면서 정식으로 노령화 사회의 문턱에 넘어서게 되고 2033년에 가서는 노년인구가 20%를 초과하면서 초 고령사회에 들어서게 된다. 그 뒤에는 노년인구가 계속 상승하면서 2060년에 가서는 35%를 점할 것으로 보이고 있다. 생육률의 저하와 수명이 연장됨에 따라 고령화는 지구촌의 보편적인 현상으로 되고 있다. 다르다면 중국은 장시기 동안 실행한 계획생육 조치로 인해 노령화 속도가 전례 없이 빠르다는 것이다. 발달한 국가의 상황을 보면 65세 및 그 이상 인구가 7%를 초과하면 노령화이고 그것이 과도하여 14%에 이르면 고령화로 인정, 프랑스는 그것이 126년에 거쳐 진행이 됐고 영국은 46년, 일본은 24년(1971년부터 1995년)에 거쳐 진행됐다. 고령화로부터 노년인구가 20% 이상을 차지하는 초 고령화에 이르기까지 프랑스는 28년(1990년부터 2018년), 독일은 36년(1972년부터 2008년), 일본은 11년(1995년부터 2006년)이 걸렸다. 그렇다면 중국은 2001년에 65세 이상의 인구가 7%를 초과하면서 인구의 노령화에 진입했다. 중국은 오는 2022년에 고령화에 진입할 것으로 보이는바 노령화로부터 고령화까지 걸린 시간은 21년이고 다시 11년이 지난 2033년이 되면 중국은 초 고령사회에 진입하게 된다. 이어 2050년엔 노년인구가 29.5%, 2060년이 되면 35.2%로 될 것으로 예측되며 그 때로부터 한 단계의 안정기를 거친 후 다시 2084년이 되면 노년인구가 약 40%가 될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게다가 저변인구가 많기에 중국의 노년인구 규모는 전대미문의 규모로 되고 있다. 2019년 중국의 65세 이상 인구는 이미 1.76억 명에 달했으며 그것이 2050년에는 3.76억 명, 2058년에는 4.14억 명으로 직상승하여 그 때에 가면 3명 중 1명이 65세 이상의 노인인 셈이다. 한편 고령화 문제 역시 날로 돌출해지고 있다. 2019년 중국의 80세 이상의 고령노인은 3200만 명을 초과, 비중은 2.3%를 점했다. 예측에 따르면 2030년에 가서 중국의 고령노인 인구는 5300만 명이 달해 전체 인구의 3.8%를 점하게 되고 2073년부터 고령인구가 직 상승, 그 해에는 1.74억 명으로 전체 인구의 17.1%, 2100년에 가서는 고령인구가 1.56억 명으로 전체 인구의 20.8%를 점하게 된다. 이 외 인구연령 중 중간 연령대를 놓고 보면 1980년부터 2015년 사이 중국인구의 중간 연령대는 21.9세부터 36.5세로 상승, 예측에 따르면 2030년과 2050년에 이르러 중국인구의 중간 연령대는 각각 43.0세와 50.7세로 나타났다. 국제적으로 보면 2015년 미국, 유럽, 일본과 인도의 인구 중간 연령대는 각각 37.6세, 41.1세, 54.7세와 38.1세였다. 하다면 2050년에 가서 중국 인구의 중간 연령대는 미국, 유럽과 인도 등에 비해 현저하게 높아 국제경쟁력에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인구의 노령화는 사회보험의 수입과 지출의 모순을 더욱 돌출하게 하여 앞으로 양로금 발급 부담이 날로 증가되기 마련이다. 2018년 중국에서 사회보험기금 수입 지출 실제 잉여액은 마이너스 6033만 억 위안으로 6년 연속 마이너스 기록을 작성하였다. 중국에서 양로보험이 사회보장 체계에서 점하는 비율은 70%로 2018년 양로보험 기금의 실제 잉여 액은 - 4504억 위안으로 실제 잉여액 역시 연속 6년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현재 사회보험에서 뚫린 구멍은 역사적으로 남아 내려온 연체액으로 계획경제 시대에 국유기업들과 사회의 부분적 부류가 퇴직 전에 보험금을 납부하지 않고도 퇴직 후 양로금 지급 복지를 향수하고 있는 것이다. 2017년 11월 중국 국무원은 ‘부분적 국유자본을 사회보험기금 실시에 획분 전환할 데 관한 방안(划转部分国有资本充实社保基金实施方案)’를 발부, 2020년 말 전까지 기업의 국유주식 10%로 사회보험에 보충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인구 노령화 속도가 부단히 가심해짐에 따라 양로금의 ‘뚫린 구멍’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돌출해지는 양상, 이는 전 세계가 공동으로 직면한 보편적인 난제이기도 하다. 중국 도시 직원들의 기본 양로보험 기금을 볼 때 중국의 누적 잔액의 지불 가능 시간은 2012년의 18.5개월에서 2018년의 13.7개월로 내려갔고 부양비율(재직 인수/퇴직 인수)은 2.55% 내려갔다. 그리고 2018년에는 4개성이 수입보다 지출이 많아졌고 18개성의 잔액 지불 가능 시간이 12개월 이하로 내려갔으며 8개성의 부양비율이 2% 이하로 내려갔다. 이 중 헤이룽장(黑龙江)의 양로보험 기금은 2013년부터 수입보다 지출이 많아졌으며 2016년의 잔액 지불 가능 시간은 마이너스로 전환되었다. 다음 노령화가 가속화됨에 따라 의료지출 압력이 갈수록 커졌다. 중국 국가보건서비스 조사에 근거하면 2003년부터 20013년까지 중국에서 조사받은 지역 주민들의 2주간 발병률(발병인 차 수/조사받은 인원수)은 14.3%에서 24.1%로 증가, 이 중 65세 이상 인구의 발병률은 33.8%에서 62.2%로 증가했으며 2013년 노년 인구의 발병률은 평균 수준의 2.58배로 되었다. (다음에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1-02-04
  • 中 동북지역 노동인구 평균 연령 40세, 인구유실 ‘심각’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최근 중국 중앙재정경제대학 인력자원 및 노동경제 연구센터는 중국 최신 인력자원 추산 결과 보고서인 ‘중국 인력자원 보고서 2020’(이하 ‘보고서’로 약칭)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중앙재정경제대학 특별 초빙교수인 미 조지아 이공대학 교수 리하이정(李海峥)의 주도로 집필, 중국 인력자원의 분포와 발전 동태를 통해 정량적 설명을 한 것으로 인력자원이 중국 경제발전 중의 작용을 탐구함에 있어서의 중요한 조건을 창조해 주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1985년부터 2018년간 중국 노동인구(학생 포함)의 평균 연령은 32.2세로부터 38.39세로 상승하였다. 동북지역 ‘근로자’ 나이가 가장 많아 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 중국 내 노무시장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근로자들의 소속 성 순으로는 헤이룽장(黑龙江), 랴오닝(辽宁), 지린(吉林), 충칭(重庆), 후난(湖南), 저장(浙江), 네이멍구(内蒙古), 후베이(湖北), 장수(江苏), 허베이(河北)와 쓰촨(四川)이었다. 이 중 동북 3성이 앞자리 3위를 점했다. 평균 나이가 가장 많은 헤이룽장은 40.19살이었으며 중국에서 유일하게 노동력 평균 나이가 40살을 초과하는 성으로 되었다. 그리고 랴오닝과 지린 역시 39.7살을 초과하는 2―3위를 차지했다. 중국 내 노무시장에서 젊은층은 갈수록 적어지고 중년층은 갈수록 많아지는 현상을 보아낼 수 있다. 이 중 동북지역 노동인구의 외지 유출문제가 줄곧 주목을 받고 있다. 공개된 집계 자료를 보면 2019년 전국의 주요 장기거주 인구에서 동북 3성과 베이징(北京)은 장기거주 인구가 마이너스 기록을 보인 성과 시었다. 이 중 헤이룽장, 지린과 랴오닝의 장기거주 인구는 각각 21.8만 명, 13.33만 명과 7.6만 명이 감소하였다. 실제 상황으로 보면 2013년부터 동북지역의 장기거주 인구는 7년간 지속적으로 유출, 인구 유출 규모는 2013년의 0.79만 명으로부터 2019년의 42.73만 명으로 늘어났다. ‘21세기 경제보도’의 집계에 따르면 이 7년간 동북 3성에서 순 유출된 인구는 164만 명에 달했다. 헤이룽장성 하얼빈(哈尔滨)에서 태어난 징 씨 여성은 고중을 졸업하자 동북지역을 떠나 베이징에 가서 대학교를 다녔다. 그녀는 “동창들치고 그리고 외지에서 공부 한 친구들 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 친구는 거의 없다"라고 나서 “외지에 가서 공부하다 보면 무의식 간 하얼빈은 총체적으로 연해의 발달 지역보다 낙후하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그리고 북방지역은 몹시 추우며 동북의 겨울은 진짜 견디기 힘들 정도로 너무 매섭다"라고 말했다. 징 씨 본인 역시 하얼빈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인터페이스 직장(界面职场)에서 헤이룽장은 경제발전이 상대적으로 낙후하고 주력으로 되고 있는 기둥 산업이 없으며 취업 기회가 적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가 대학에서 전공한 것은 연극 영화이기 때문에 하얼빈에서는 TV방송국 외에는 별로 알맞은 분야가 없었다. “사업적으로 발전할 기회가 적고 적합한 일자리를 찾기가 매우 어렵다. 헤이룽장 TV 방송국은 수준 상 제약성이 많으며 직업 발전 전망이 매우 암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고향에서 발전하자면 오직 대외사업을 선택해야 한다. 집에서 타성이나 특대 도시에 투자하는 등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는 기필코 주요 발전 도시가 되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이는 징 씨의 말이다. 한편 징 씨는 하얼빈에서 대학에 간 친구들이 고향으로 돌아온 사례가 있다고 말한다. 이런 친구들을 놓고 볼 때 고향은 안전감이 더욱 높다고 한다. 부모가 주택을 사주기도 하고 자가용과 어느 정도의 인맥도 있기에 생활의 질은 외지에서 표류하기보다 더욱 높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필경 소수에 불과했다. “4년간 대학에 다니다 보니 익숙한 친구와 생활권이 모두 여기에 있기에 이 도시를 선택하여 계속 발전하기로 했어요.” 이는 환고향을 꺼리는 징 씨의 어느 한 친구가 하는 말이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적지 않은 친구들이 동북지역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졸업한 후엔 비록 동북지역에 일정한 사회적 토대를 구축하였지만 여전히 동북지역에 남아 발전하기를 꺼린다는 것, 이것 또한 동북지역이 인재를 붙잡아 두지 못하는 요소 중의 하나이다. 동북지역의 지린대학(吉林大学), 하얼빈공업대학(哈尔滨工业大学)과 대련이공과대학(大连理工大学) 등은 모두 동북의 명문 대학으로 해마다 전국 각지로부터 모집하는 학생 수가 적지 않다. 지린대학에 따르면 2020년에 모집한 본과생은 1만 259명으로 전국 대학교의 학생모집 순위에서 앞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반대로 2019년 지린대학의 졸업생 취업 보고서에 따르면 본과 졸업생이 졸업한 후 단 17.7%만이 동북지역에 남아 계속 발전하기를 선택했으며 대부분이 베이징(北京), 광둥(广东)과 산둥(山东) 등 성과 대도시를 선택했다. 일부 동북지역 태생 외 동부 연해지역, 남부 연해지역과 북부 연해지역에서 온 졸업생들은 최종 그래도 고향이 있는 성이나 대도시의 소재지로 돌아갔으며 그 비율은 각각 73.7%, 65.42%와 64.87%가 되었다. “동북지역은 취업 기회가 적고 발전 전경도 별로 없어요.” 이는 지린대학 졸업생 한 명이 인터페이스 직장(界面职场)에서 들려준 말이다. 그에 따르면 지린대학을 놓고 보면 학생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우수한 교수들도 연해지역 혹은 대도시로 빠져나간다고 한다. 예하면 지린대학의 명함장이라고 할 수 있는 법률 학부는 말 그대로 지린대학은 ‘5대 학원, 4대 학부’의 대표적인 명문 학부라고 할 수 있으며 최근년 간 유출된 인재들을 조합하면 기필코 하나의 최정상급 법률 학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구 유출을 통제할 수 없는 동북지역이다. 동북지역 출생률과 자연 성장률은 중국 내에서도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고 있는 지역에 속한다. 국가통계국 집계에 따르면 2019년 헤이룽장, 지린과 랴오닝 각 성의 인구 출생률은 각각 6.73%, 6.05%와 6.45%였고 인구의 자연 성장률은 각각 - 1.01%, - 0.85%와 -0.8%였으며 전국에서 3개밖에 안 되는 인구 마이너스성장을 기록한 3개성이었다. 더욱 많은 인재로 하여금 동북지역에 남게 하고 동북지역의 진흥 발전을 위해서는 동북지역의 산업 고리 중 과학과 시장이란 2개의 고급 자원의 부족한 분야를 많이 미봉하고 거기에 동북지역의 무역 발전을 많이 강화해야 하며 이 외 동북지역 진흥의 중요한 개혁과 중대 항목이 뒤떨어지지 말아야 한다고 동북아 경제 연구원 왕훙 정(王洪章) 원장은 제기하고 있다. 그는 또 동북지역의 국유기업 및 시장화를 향도 하는 혼합 소유제 개혁을 심화하고 동북에 토지, 인구와 환경을 주체 내용으로 하는 종합개혁 시험 구를 건립하여 선양(沈阳), 창춘(长春)과 하얼빈(哈尔滨) 등 3개 중심도시의 지역 경제 일체화 발걸음을 다그쳐야 하며 다롄(大连) 국제 자유항으로 하여금 동북아 지역 경제 일체화로 되게 하는 가능성을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고 건의했다. 광둥의 ‘현장 근로자’ 가장 젊어 동북과는 반대로 광동의 노동인구 연령이 보편적으로 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집계에 따르면 시짱(西藏), 구이저우(贵州), 하이난(海南), 신장(新疆)과 광둥(广东)의 노동인구 평균 연령이 37세로 나타났다. 시짱, 구이저우, 하이난과 신장 이 2개 성, 2개 자치구는 줄곧 인구 출생률이 비교적 높은 지방으로 일정한 정도로 인구 노령화 문제가 심각하지 않은 상황이다. 전문가에 따르면 경제발전이 빠른 지역일수록 여성의 생육 욕망과 출생률이 비교적 낮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예하면 베이징이나 상하이의 실례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반대로 경제발전이 비교적 낮은 지역 특히는 농촌지역 여성의 생육 욕망이 비교적 강한 것으로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 양자 사이는 절대적 관계가 아니며 부동한 작용은 부동한 영향을 산생하기 마련이다. 예하면 광둥은 경제가 발달한 성에 속하지만 전통적인 생육 관념의 영향으로 인구의 자연 성장률은 전국의 평균 수준을 초과한다. 2019년 광둥성의 인구 증가율은 8.08%로 전국 총 인구의 자연 성장률에 비해 4.74%가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외 이 광둥의 노동인구로 유입되는 대량의 청장년의 연령구조도 비교적 젊다. 광둥성 통계국 집계에 따르면 2019년 연말 광둥의 장기거주 인구는 1억 1521만 명, 전년 대비 175만 명이 증가했다. 집계가 보여주다시피 광둥은 이미 전국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성으로 되었다. 그리고 새로 증가된 광둥의 175만 명의 인구 중 광둥 자체의 자연 성장 인구 92.38만 명을 제외하면 2019년에 광둥으로 유입된 인구는 82.62만 명이었다. 최근 5년간 광둥에는 매년 대규모의 인구가 유입되었다. 2015년, 2016년, 2017년엔 각각 51.65만 명, 68.72만 명, 68.47만 명이 유입됐고 2018년에는 무려 84.24만 명이 유입되었다. 후 씨는 후난(湖南) 사람이다. 그녀는 중산대학(中山大学) 석사생으로 졸업하자 광저우(广州)에 남았다. 그녀에 따르면 광저우를 놓고 볼 때 한편으로는 고향이 비교적 가깝고 이 외 경제가 비교적 활성화되어 취업 기회가 많으며 자기발전에도 더욱 유리하다는 점이다. 지난대학교(暨南大学) 공공관리학원 교수 후강에 따르면 광둥이 지속적으로 외래인구를 흡인할 수 있게 되는 데는 첫 째, 민영기업이 많은데서 취업 기회가 많으며 취업흡수 능력이 매우 강하다. 다음 광저우와 선전(深圳)이라는 양대 일선도시가 있다. 목전 이 양대 일선도시의 인구정책은 4개의 일선도시 중에서 상대적으로 개방되어 있다. 거기에 광둥의 기후와 환경 조건이 우월하고 문화 분위기가 상대적으로 비교적 개방되고 포용되고 있다. 이 역시 인구집결을 흡인하는 다른 하나의 중요한 요소로 되고 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1-02-02
  • 상하이 암흑가 3대 보스-장소림
    ○김희수 장소림(張嘯林)은 1877년 6월 14일에 절강성 자계현의 한 시골에서 출생했다. 그는 1887년에 사당에서 공부하다가 1890년에 아버지 장전해가 사망되자 형님 장대림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항주로 이주하여 견직물을 짜는 방직실에 들어가 견습공으로 있었다. 1897년에 20살이 된 장소림은 힘이 세고 근육이 발달한 자신의 체질을 믿고 주먹으로 살아가려고 결심했다. 그는 몇몇 깡패들을 긁어모아 상인들을 위협하는 수단으로 돈을 벌었다. 1903년에 장소림은 절강성 무비학당으로 들어가려고 배에 올랐다가 한 청년이 깡패들에게 죽도록 매맞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달려가 깡패들 중에서 한놈을 두손으로 머리우까지 들어올렸다가 땅바닥에 내던졌다. 그것을 본 다른 깡패들은 무서워서 뿔뿔이 도망쳤다. 장소림이 구해준 청년은 란계현 사람인데 장재양이라 불렀다. 그 후 그들은 막역지교로 되였다. 그들은 함께 청왕조를 위해 하급군관들을 양성하는 무비학당으로 들어갔다. 원래 주먹싸움을 좋아했던 장소림은 무술과와 사격과에 흥취를 가졌고 성적도 매우 출중했다. 하지만 기생집 출입을 한 규율위반으로 그는 학당에서 처분을 받았다. 화가 난 그는 졸업도 하지 않고 학당을 떠나버렸다. 고향 공신교로 돌아온 그는 차집을 차리고 힘깨나 쓰는 사람들에게 술을 사주고 기생을 붙여주면서 그들을 주위에 끌어들였다. 그 시기 그는 12살의 루려금에게 반했다. 그 후 그는 루려금에게 접근했는데 생각밖에도 그녀가 못이기는척 하고 그에게 몸을 맡기는 것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장소림은 루려금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루려금은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미혼부부가 낳은 남자아이를 양자로 삼았다. 그 후 장소림은 아편매매를 하다가 일대에서 자신보다 세력이 더 강한 깡패두목 전표의 패거리에게 아편을 빼앗기게 되였다. 화가 난 장소림은 패거리들을 데리고전표의 패거리와 무리싸움을 벌렸는데 싸움 중에 도망치다가 아내 루려금을 전표에게 빼앗기게 되였다. 전표는 장소림의 아내가 자색이 뛰어난 것을 보고 2개월동안이나 데리고 살았다. 전표에게 쫓기어 강물에 뛰어들었던 장소림은 묘지암의 지능이란 여승에게 구원되었다. 지능은 장소림을 암자에 숨겨놓고 치료해주면서 건장한 체구를 가진 사내에게 반했다. 장소림은 이렇게 미모의 여승과 남녀의 즐거움을 나누게 되었다. 그 후 그는 부하를 통해 전표가 숨겨놓은 아내의 거처를 알게 되였다. 그의 아내는 그가 몰래 보낸 편지를 보고 그날 밤에 깊은 잠이 든 전표의 성기를 가위로 베어버렸다. 때를 같이하여 장소림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덮쳐들었다. 전표가 황망히 도망치자 두목이 없게 된 전표의 부하들은 손을 들고 투항했다. 장소림은 앙가품을 하려고 전표의 아내를 찾았으나 벌써 도망치고 없었다. 그대신 전표의 12살 되는 딸을 붙잡았는데 장소림의 아내는 전표의 딸과 자는것으로 앙가품을 하라고 시켰다. 하지만 장소림은 전표의 딸이 못생긴 것을 보고 생각이 없어 기생집에 팔아넘겼다. 1912년에 상해로 들어간 그는 무비학당을 다닐 때 친했던 장재양 등의 도움으로 세력을 넓히고 재물을 긁어모았다. 무비학당을 함께 다녔던 학원 중에 벼슬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군벌군관이 된 사람도 있었다. 그는 1919년에 가족을 데리고와서 상해에 자리잡으면서 “대자(大字)”서열의 번근승을 스승으로 모셨다. 그 후 황금영, 두월생과 함께 “삼흠회사”를 경영하면서 그들과 함께 상해탄의 3거두로 되었다. 1925년에 화격얼로에 위치한 장공간(张公馆)에 이주했는데 그해 북양정부의 재정부 참의에 임명되었다. 1927년 4월 12일에 황금영, 두월생과 함께 장개석을 도와 공산당을 살해했다. 장개석은 그의 공로를 치하하여 그를 “군사위원회 소장참의”, “해륙공군 총사령부 고문”, “행정부참의”로 임명했다. 장소림은 명기로 소문난 장수영을 둘째부인으로 맞아들였다. 그외 셋째부인과 넷째부인이 있었지만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1937년 10월에 일본군이 상해를 맹렬하게 공격해오자 상해를 포기하려고 생각한 장개석은 상해탄의 3거두가 일본군과 괴뢰정부에 이용당하는것을 방지하기 위해 황금영, 두월생, 장소림을 불러 홍콩으로 피신하라고 권고했다. 3거두의 서열은 원래 황금영, 장소림, 두월생이였지만 그 당시에는 두월생, 황금영, 장소림으로 변했다. 장소림은 두월생보다 먼저 깡패세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자격도 한급 높았기에 마음속으로 두월생이 최고두목으로 된 것을 불복하고있었다. 그는 장개석이 피신하라고 하자 속으로 수판알을 굴렸다. (일본군이 상해를 점령하면 꼭 깡패세력을 끌어들이려고 할것이다. 3거두중에 황금영은 이미 일본군을 위해 일하지 않겠다고 표시했고 두월생은 상해를 떠나겠다고 했으니 이는 내가 혼자서 상해탄을 쥐고흔들 수 있는 좋은 기회야.) 과연 장소림의 예산대로 일본군이 상해를 점령하자 일본의 상해파견군 사령관이 장소림을 찾아와 협의를 맺었다. 그 후 장소림은 일본침략군이 점령한 강서성 정부의 괴뢰성장을 담임하면서 일본군의 괴뢰가 되어 각 항업의 인사들을 일본군에 순종하도록 핍박했다. 그리고 깡패들을 풀어 항일활동을 진압했고 애국지사들을 잔혹하게 살해했다. 그는 “신아평화촉진회” 회장의 명의로 외지에 깡패들을 파견하여 양식, 면화, 석탄, 약품을 강제로 헐값에 사들이거나 빼앗아가지고 일본군에게 보내주었다. 그는 괴뢰군을 모집해들여 일본군한테 충성하게 했고 대량적으로 깡패들을 모아들여 일본군의 졸개로 만들었다. 장소림의 친일활동은 장개석을 불안하게 했다. 장개석은 군통국 국장 대립한테 장소림을 죽여 버리라고 명령했다. 대립은 상해에 잠복한 군통국 상해구 구장 진공주한테 장소림을 제거해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진공주는 장소림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진묵을 대장으로 하는 행동소조를 조직했다. 진묵은 두번이나 장소림을 암살하려고 했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이에 진묵은 장소림의 측근을 매수하려고 생각했다. 그는 장소림의 경호원 중에서 림회부를 선택했다. 림회부는 장소림의 운전기사 아사의 소개로 장소림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초기에 그는 문지기로 일했다. 장소림은 두 번이나 암살을 당할번 한후 무예가 사격에 능한 경호원을 모집하려고 했다. 그때 문지기로 있던 림회부는 사격시험에서 합격되어 장소림의 경호원으로 되었다. 진묵은 몰래 림회부를 만나서 대한간(大漢奸) 장소림을 제거하는 것은 민족의 대의라고 말하면서 5만원을 넘겨주었다. 진회부는 동의하고 돌아가 장소림의 동향을 살피면서 진묵의 지령을 기다렸다. 1940년 8월초에 진공주와 진묵은 림회부를 만나서 “요 며칠사이에 손을 쓰라. 성사 후 군통총부에서 방법을 대어 자네를 프랑스조계지의 순포방에 들어가도록 해주겠네”라고 말했다. 1948년 8월 14일에 손님이 장소림을 찾아왔다. 림회부는 장소림이 손님을 바래주러 아래층으로 내려갈 때 손을 쓰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후 손님을 모셔온 집사가 내려와 기생을 불러들이러 나갔다. 기생하고 놀면 밤을 지새울 것이니 손을 쓸 방법이 없게된 것이다. 림회부는 생각하다가 차를 닦고 있는 장소림의 운전기사 아사를 찾아가 말했다. “선배님, 집에 일이 있어서 며칠 동안 청가를 맡아야 하겠는데…” “그런데 어쨌다는 거야?” “선배님이 위층에 올라가 장선생님한테 말해줄수 없겠소?” 아사는 머리를 가로흔들었다. “장선생은 손님이 왔을 때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게 해. 너도 이런 규칙을 알잖아?” 림회부는 격장법으로 아사를 자극했다. “선배님은 평소에 장선생님이 선배님을 가족처럼 중하게 여긴다고 자랑하더니 이제 보니 모두 허풍이였군요. 보아하니 선배님이나 나나 다름이 없군요.” 아사는 화가 나서 “내가 네놈을 장선생한테 소개해주었는데 네깐 놈이 감히 나하고 비기다니?”하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림회부도 지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위층에 있던 장소림은 “누가 떠는거냐?”하고 소리치더니 창문으로 내다보았다. 장소림은 두 사람이 다투고 있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림회부를 가리키면서 고함쳤다. “이 거북손자같은 놈아! 밥을 처먹고 일은 하지 않고 싸우기만 하는 거냐? 이 어른이 이제 일본병사들을 더 불러오면 너같은 놈은 필요 없어!” 림회부는 약을 올리느라고 맞받아 소리쳤다. “장선생님, 당신 눈에는 내가 일본 놈들보다 못하다는겁니까?” 장소림은 화를 참을 수 없어서 상반신을 창문 밖으로 내밀면서 말했다. “아사야, 그 거북손자놈의 총을 빼앗고 그 놈을 쫓아버려라!” “그럴 필요 없어. 나절로 나갈 테니깐!” 림회부는 허리춤에 총을 뽑아들었다. 모두들 림회부가 총을 바치려고 그러는 줄 알았다. 그런데 림회부는 별안간 총을 장소림한테 겨누더니 잽싸게 방아쇠를 당겼다. 장소림은 당장에서 비명을 지르며 숨을 거두었다. 향년 64세였다. 림회부는 장소림의 죽음을 확인하려고 총을 든 채 웃층으로 뛰어올라갔다. 그때 장소림을 찾아왔던 손님이 프랑스조계지의 경찰에 전화를 거는 것을 보고 림회부는 그 손님을 쏘아죽였다. 그 다음 장소림이 숨을 거둔 것을 확인하고 도망치려던 림회부는 장소림의 경호원들에게 붙잡혔다. 그때 현장으로 달려온 프랑스조계지의 순포장에서 림회부를 붙잡아갔다. 림회부는 15년형을 받았다가 항일전쟁이 승리한 후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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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1-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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