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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재] '삼국지' 재해석②
    ●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삼국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선 먼저 한나라 말기 시대배경부터 알아야 한다. 실제로 <삼국지>는 한나라 말기 시대배경을 그리고 있긴 한데 역사지식이 없으면 이해가 어렵다. 그래서 당시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되어 <삼국지> 재해석 제2편으로 ‘한나라 말기 환관과 외척의 권력 다툼’을 잡았다. 여느 왕조가 다 그러했듯이 왕조말기에 천하가 대혼란 상태에 빠져 있긴 했으나 한나라 말기 시대배경은 굉장히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중국역사에서 통일제국의 문을 연 것은 진(秦)나라이지만 천년만년 이어가리라던 진 왕조는 15년 만에 홀딱 망해버렸다. 진 제국이 망하고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유방과 항우의 땅 따먹기 게임인 초와 한의 싸움에서 유방이 승자가 되어 한나라를 건립한다. 한나라는 서한과 동한을 전후하여 거의 400년 가까이 수명을 유지한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화폐, 도량형, 차바퀴 등 일련의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15년이란 세월이 너무 촉박하여 완전한 통일은 한나라에 이르러 이뤄졌던 것이다. 중국문자를 한자, 중국말을 한어, 중국 주체민족을 한족이라 부르는 것이 바로 유방이 세운 한나라에서 유래된 것이다. 왕조라는 개념은 왕족혈통의 세습제를 의미한다. 유씨가 나라를 세웠으면 유씨 혈통이 황위(皇位)를 이어받는 것이 바로 세습왕조이다. 그런데 문제가 복잡하다. 황제가 아들이 있는데 너무 어려 황제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더라도 황제로 등극시키는데 아들이 없으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이 경우 붕어한 황제의 친동생을 황위에 앉히느냐, 조카 중 서열을 따져 앉히느냐는 쟁투가 벌어진다. 또는 종실의 번왕(藩王)들 중에서 후계자를 찾기도 하였다. 유씨 가문의 왕조를 이어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후한의 황제 13명 중 10명이 마흔 살도 못 살았고 4명은 아들이 없었다. 또한 제위를 계승할 때 11명이 20살 이하였으며 그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이가 19살의 장제(章帝), 가장 어렸던 이가 100일도 안 된 상제(傷帝)였다. 충제(冲帝)는 겨우 2살, 질제(質帝)는 겨우 8살이었다. 황제가 나이 어려서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면 그 어미인 태후가 섭정한다. 태후가 섭정하게 되면 정권은 자연스레 외척이 잡게 된다. 한 화제(和帝) 때는 두태후(竇太后)가 국정을 맡고 두헌(竇憲)이 정권을 잡았고, 한 안제(安帝) 때는 등태후(鄧太后)가 국정을 맡고 등즐(鄧騭)이 정권을 잡았으며, 북향후(北鄕候) 때는 염태후(閻太后)가 국정을 맡고 염현(閻顯)이 정권을 잡았다. 또 한 환제(桓帝) 때는 양태후(梁太后)가 국정을 맡고 양기(梁冀)가 정권을 잡았고 한 영제 때는 두태후가 국정을 맡고 두무(竇武)가 정권을 잡았으며 소제(少帝) 때는 하태후(何太后)가 국정을 맡고 하진(何進)이 정권을 잡았다. 이렇듯 태후가 여섯 번 국정을 맡고 역시 여섯 번 외척이 정권을 잡았던 것이다. 태후가 섭정하고 외척이 정권을 잡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우선 황제가 기분이 나쁘다. 어미와 외삼촌한테 휘둘리다 보니 자신의 의도대로 되는 것이 없게 된다. 이 문제는 황제가 나이를 먹어 성인으로 향해 성장해가면서 더욱 심각해진다. 즉 황제는 자기주장을 세우려는데 어미와 외척이 양보를 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서 권력의 맛이란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내려놓으려 하지 않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다. 이렇게 되면 황제는 어미와 외척을 제거하려 들기 마련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원한 허수아비가 되기 때문이다. 권력 구조에서 세력이 없는 어린 황제는 누구한테 기대야 자신의 야망을 실현할 수 있을까? 그 대상이 바로 환관 무리다. 밤낮으로 황제 곁에 붙어 있는 것은 환관들이이니까 그들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환관의 역사는 지구상 중국만의 특이한 현상이었다. 물론 이웃나라인 조선에도 환관역사가 있긴 하지만 ‘흉내’를 내는데 그칠 뿐 중국처럼 환관이 역사를 바꿀 만큼의 세력으로 역사무대에서 쥐락펴락하지는 못했다. 진 시황 때 환관 조고는 황제가 궁녀들과 운우지정을 나누는 장소에서 한쪽 모퉁이에서 쪽걸상에 앉아 지켜볼 정도로 하루 12시진(지금의 24시간)을 황제에게 붙어 있었다. 황제가 죽자 결국 조고가 천하를 쥐락펴락하였고 심지어 황제의 유서를 조작하여 장자를 밀어내고 둘째 호해(胡亥)를 황위에 앉힐 만큼 세도를 부렸던 것이다. 그 유명한 사슴보고 말이라고 하는 ‘지록위마’ 고사의 주인공이 바로 조고였다. 진나라가 15년 만에 망한 이유 중에 환관 조고의 탓이 크다고 필자는 본다. 당나라가 전성기를 달리던 때 당 현종은 양귀비한테 빠져 정사를 뒷전으로 하고 환관 고력사(高力士)가 황제의 옥쇄를 쥐고 국정을 맡아보기까지 했다. 명나라 때는 10만의 환관도 모자라 조선에서 빌려 갔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환관은 생리상 불구로 남자의 구실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권력과 재산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여 왔고 눈에 밟히는 가족(처자)이 없기 때문에 권력다툼에서 마음이 독하다는 속설이 있다. 어찌되었든 환관들은 황제의 신변에 늘 머물고 있기 때문에 황제의 믿음을 얻고 있었다. 한 순제(順帝) 때 외척 두목인 염현을 환관들이 황제와 논의도 없이 자기네들이 알아서 죽였던 것이다. 한 환제의 어미 양태후는 황제가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면 독살했다. 뿐만 아니라 황제가 28살이 되도록 국정을 맡아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황제는 더는 참을 수 없어 손을 써야 했다. 그런데 외척의 세력이 얼마나 강했던지 황제는 비밀모의를 화장실에서 꾸밀 수밖에 없었다. 화장실 비밀모의는 성공했다. 천하를 호령하던 외척 양기 부부는 자살했고 양씨 가문은 전부 참수되어 조리돌림을 당했다. 그리고 양기와 관련 있는 관리 300여 명을 파면하고서야 정권을 바로 잡을 수가 있었다. 2015년 12월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정윤회 문건’ 파동 사건이 있었다. 당시 대통령 주변에서 국정을 농단한 자들을 가리켜 ‘십상시’라는 말이 등장했다. 이 ‘십상시’의 유래가 바로 한나라 영제(靈帝) 때에 환관(宦官) 장양(張讓)·조충(趙忠)·하운(夏惲)·곽승(郭勝)·손장(孫璋)·필남(畢嵐)·율숭(栗嵩)·단규(段珪)·고망(高望)·장공(張恭)·한리(韓悝) 등 10인을 가리키는데 영제는 어린 나이로 황제가 되어 전혀 통치 능력이 없었으므로, ‘십상시’는 영제의 관심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하여 주색에 빠지게끔 만들고, 하진(何進)의 누이를 바친다. 장성한 뒤에도 십상시의 농간에 놀아나 정치를 돌보지 않자, 여러 곳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그 중에서도 장각(張角)이 이끄는 황건적(黃巾賊)의 세력이 가장 컸고 황건적의 난이 평정되자 ‘십상시’는 모두 열후(列侯)에 봉해진다. 십상시가 멋대로 천자의 칙명을 내리자, 하진이 누이의 세력을 빌려 ‘십상시’와 권력을 다투게 되고, 하진이 제후(諸侯)들을 불러 모아 ‘십상시’를 제거하려 하다 오히려 죽임을 당하게 된다. 남을 물에 빠뜨리려다가 자신이 물에 빠진 격이었다. 환관무리와 외척 사이 권력투쟁에 ‘보리알’처럼 끼어든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영제를 지키던 근위군의 두 번째 인물인 원소이다. “장군이 천하를 위해 그 화근을 제거하신다면 틀림없이 길이 이름을 남길 겁니다.” 원소가 환관을 모조리 죽이라고 하진을 선동한 말이다. 그러나 하진은 망설였다. 이유가 있었다. 원래 돼지백정이었던 하진은 누이동생이 황후가 되는 바람에 대장군의 자리에 올랐다. 그런 하진이 환관무리를 몰살할 배포도 그럴만한 간도 크지 못했다. 하진의 누이동생 하태후도 환관을 죽일 마음이 없었다. 그 이유는 환관들한테 빚진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그녀가 유협의 생모 왕미인을 독살했을 때 환관들이 황제에게 사정해 겨우 재난을 모면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항상 마음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하태후는 이렇게 말했다. “환관이 황궁을 관리하는 것은 전래의 법이자 제도인데 어떻게 바꾸겠습니까? 하물며 선제가 막 붕어하셔서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못했는데 내가 어떻게 노골적으로 사대부의 편에 서겠습니까?” 태후가 허락하지 않자 하진은 더욱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 살벌한 권력다툼에서 과감히 결단을 내리지 못한 하진은 결국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진의 죽음은 일개 대장군의 개인의 목숨이 아니라 사대부 집단과 군벌들의 분노를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하진이 피살된 후 혼란에 빠진 낙양성에서 하씨와 원씨 두 가문이 각기 군사를 일으켰는데 원소가 더 적극적이었다. 군대를 이끌고 성 안에서 환관들을 색출해 죽였다. 수염 안 난 남자만 보면 칼을 휘두르는 바람에 많은 젊은이가 부득이하게 바지를 벗어 보여야 했다. 마치 나치 독일에서 유태인과 비유태인을 가리는 방법인 ‘바지 벗기 증명’과 비슷한 광경이었을 것이다. 환관 중에도 선행을 베푼 환관들도 있었고 기타 좋은 일을 남긴 환관도 있었건만 물불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학살하여 죽은 자가 모두 2000여 명에 달했다. 환관도 죽고 외척도 죽었다. 이 두 집단의 다툼은 장장 90여 년간 벌어졌다. 매번 외척의 패배로 투쟁이 끝났지만 이번에는 양쪽 다 파멸되었다. 문제는 어린 황제였다. 외척도 환관도 모두 죽었으니 누구에게 기대야 하나? 천하지존이었던 대제국의 천자가 졸지에 몸도 의탁할 곳 없는 구차한 ‘난민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때 원소의 부름을 받고 성으로 향해 진군하던 서량(西涼)의 호족 동탁(董卓)이 칠흑 같은 야밤에 황하의 강 언덕에서 우연하게 피난길에서 방황하던 황제 변(辯)을 발견한다. 이 발견이 동탁에게는 로또를 맞은 셈이었다. 하늘이 준 기회를 동탁이 놓칠 리가 없었다. 그는 재빨리 황제를 모시고 입성하여 궁정을 장악하고 횡포를 부리게 된다. 이때부터 천하는 대혼란에 빠지게 되고 지방 호족과 권력의 제3의 세력인 사족(士族) 집단 및 군벌들의 군웅할거의 대전란이 시작된다. 여기까지가 한 나라 말기 시대배경이고 삼국시대가 열리는 서막을 알리는 ‘종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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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0-08-08
  • 동포정책과 이민정책
    ●김도균 우리 민족처럼 디아스포라를 이루고 사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역사적, 경제적 심지어 정치적 이유로 조국을 등지고 전세계 곳곳에 흩어져 부평초 같은 삶을 사는 동포가 750만 명에 이른다. 실무상 동포는 재외국민과 외국국적 동포로 나뉘는데 이는 국적 기준이다. 이런 배경으로 우리에게 동포정책은 각별한 관심과 포용 나아가 활용이 필요한 데 해외거주 동포는 외교부에서, 국내거주 동포는 법무부에서 어떤 경우는 서로 하겠다고 나서고 어떨때는 서로 자기 부처 일이 아니라고 우긴다. 법무부만 해도 동포업무를 전담하는 '외국적동포과'가 잠깐 생겼다가 사라지고 지금은 '체류관리과'에서 담당자 2명이 동포정책을 담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국내 동포정책이라야 비자정책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비자정책 하나 하나에 동포사회가 일희일비 하였고, 그나마도 출신국 동포간 차별과 불편으로 점철된 것이 동포정책의 현실이다. 동포들의 출신국에 따라 비자발급을 달리하는 재외동포법이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고나서 노무현 대통령과 (당시 문재인 민정수석)의 지시로 방문취업제를 시행한지도 14년이 지났지만, 동포들의 불편은 여전하고 최근에는 오히려 동포들에 대한 비자정책이 역행하고 있다. '이민동포청'을 만들어 동포라는 자산을 이민정책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지원하고 활용하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정치인들 표 계산과 정부부처의 이해관계를 뛰어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여러번 입법을 시도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현실 대안으로 법무부에 동포정책을 전담하는 '외국적동포과'를 부활시키고 동포들의 비자체계라도 서둘러 합리적으로 개편해야 한다. 외국 국적의 동포들을 이민정책의 틀 나아가 남북경협 분야에서 활용하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있음에도, 동포를 정부 부처의 업무활용이나 정치적 거래 대상쯤으로 치부하여 정책 후순위에 두는 것은 너무나도 국익에 반하는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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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0-08-08
  • [연재] 진의(秦怡)-눈물겨운 김염(金焰)과의 결혼생활②
    ▲진의와 유명 영화배우 김염 [동포투데이] 이혼 후 진의는 다시는 결혼하지 않고 모든 정력을 쏟겠노라고 맹세했다. 하지만 맹세는 어디까지나 맹세에 그쳤고 실행은 아니었다. 그리고 진의의 그러한 맹세는 조선인 남자 김염(金焰)의 등장으로 크게 흔들렸다. 김염(원명: 김덕린) ㅡ 1910년 조선 서울에서 태어난 김염은 1912년 한의사이며 독립운동가인 부친한테 지명 수배령이 떨어지자 가족을 따라 중국 흑룡강성 치치할시에 이주, 1919년 부친이 사망되자 상해에 있는 고모한테로 가서 의탁했다. 그 뒤 고모가 천진으로 이주하자 김염은 천진 남개 중학교에서 공부하면서 혁명사상을 접수하게 되었고 남개 중학교를 졸업한 후엔 홀로 배에 올라 다시 상해로 향발, 상해에서 그는 소설도 써보고 영화회사의 잡부로 일하기도 하면서 유랑걸식 생활을 하다가 1934년 영화계에 입문했다. 영화 <대로(大路)>에 출연하면서 자기의 예술적 재능을 과시했으며 뒤이어 영화 <야초한화(野草闲花)>, <신도화선(新桃花扇)>, <들장미(野玫瑰)>와 <장지능운(壮志凌云)> 등 수많은 영화의 주인공으로 출연하면서 1930연대부터 상해의 <영화황제>로 입지를 굳혔던 김염이었다. … 이러한 김염이었으니 진의한테 있어서 우상이나 다름이 없었으며 그녀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그것이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기실 진의가 김염을 알게 된 것은 1941년 김염의 생일연회에서였다. 당시 진의한테 있어서 김염은 우상같은 인물이었으나 둘 다 가정이 있는 상황이어서 진의는 김염에 대해 별다른 감정같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일본이 패망하고 김염과 진의가 선후로 상해로 다시 왔을 때는 이미 둘 다 가정이 없는 상황이었다.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여기에는 이런 짤막한 스토리도 있었다. 당시 김염과 진의는 영화 <망망한 대해(海茫茫)>를 함께 촬영하면서 함께 있을 기회가 많았다. 그리고 홀아비로 된 김염은 자주 진의 집에 가서 진의의 어머니와 언니 등과 함께 마작도 두고 한담도 하고 음식도 얻어 먹 군 했다. 그럴 때마다 진의보다도 진의 어머니가 김염을 더 반겨 맞 군 했으며 맛나는 것을 감췄다가는 김염이 올 때마다 내놓군 했다. 그러고는 김염의 눈치를 보아가면서 “내 딸이 자네를 좋아하는 것 같아. 자네 생각은 어때?”라고 하면서 김염의 속마음을 떠보기도 했다. 이러자 진의는 “엄마, 난 결혼하지 않을 거야”라고 하군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진의는 혼자서 전 가정의 11명 식구들의 호구를 책임져야 했다. 그러니 결혼보다는 일심전력으로 영화나 희곡에 출연하여 돈을 버는 것이었다. 하지만 진의 역시 여인이었으며 더군다나 사랑을 알고 사랑을 갈망하는 젊은 여인이었다. 거기에 김염같은 대 스타가 나타났으니 흔들리고 설레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시기, 진의는 홍콩에 가서 자주 연예활동을 하군 했다. 그러면 홍콩의 거리에는 김염도 나타 나군 했다. 하긴 김염의 영화계 동료들이 홍콩에 많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김염의 진정한 홍콩행 목적은 진의와 함께 있고 싶어한다는 것을 그의 동료들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김염의 옛 동료 오조광(吴祖光)이 불쑥 진의 앞에 나타나더니 “당신들은 왜 아직도 결혼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 뒤부터 오조광은 더욱 열성스레 앞뒤를 뛰어다니며 동료들을 선동, 나중에는 문예계의 거장 곽말약까지 설복하여 두 사람 결혼의 증명인으로 나서게 했다. 이렇게 1947년 25세의 진의와 37세의 김염은 결혼에 올인하였고 곽말약 선생을 청해 결혼 증명인을 맡게 했다.<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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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0-08-07
  • 용이 살던 마을 와룡동
    ●김호림 창동학교는 8.15광복을 맞은 후 다시 와룡동에 부활한다. 이때 마을 사람들은 서쪽 산비탈의 옛 터를 버리고 마을 북쪽의 평지에 따로 학교 건물을 세웠다. 김동욱옹은 어릴 때 새로 지은 이 창동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그때 그가 학교를 내놓고 또 과외처럼 즐겨 다니던 곳이 있었다. 그와 또래들은 예배를 보는 날이면 학교 북쪽에 있는 교회당으로 반달음을 놓았다. “전 씨 성의 집사가 우리 아이들을 모여 놓고 재미있는 옛말을 들려줬지요.” 교회의 전 집사는 조선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으로 일본 전함을 물리치던 이야기 등을 구수하게 풀어놓았다고 한다. 서적이 금처럼 귀하고 별다른 문화생활이 없었던 시골에서 정말 하늘에서 들려오는 복음과 같았다. 조선인 이민들의 최초의 민족계몽운동과 반일운동은 이처럼 신앙공동체를 통해 구현되였던 것이다. 간도에서 선교활동은 조선인 간민들의 대량 이주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캐나다 장로회는 북간도에 선교사와 전도자를 파송, 1906년 광제암교회를 설립하였다. 뒤미처 용정의 기독교인이 간도의 조선인 전도를 위해 멀리 함경도 원산까지 가 기독교 서적을 구입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도가 본격 시작되었다고 한다. 1907년 남감리회는 이화춘과 이응현, 캐나다 장로회는 김문삼을 간도에 파송한다. 이화춘은 와룡동교회, 이응현은 모아산 교회를 설립하며 장로회는 용정교회를 설립하였다. 모아산은 와룡동 골짜기에서 바로 정남쪽 방향으로 보이는 둥그런 산이다. 1915년경 간도에 36개 교회가 개척되며 또 교회의 주도로 많은 학교가 세워진다. 간도 지역 최초의 민족운동 단체인 “연변 교민회”(훗날 국민 회로 개칭)는 기독 인사들에 의해 세워졌다. 국민회를 통한 기독인들의 반일운동은 군자금 모금, 독립군 양성 등으로 이어졌다. 바로 창동 학교에 국민회의 외곽단체인 간도 대한 청년회 본부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학교의 많은 교원과 학생, 졸업생들은 철혈 광복단에 참가하여 희생적으로 싸웠다. 1920년 용정 선바위 부근에서 조선은행권 15만 원을 탈취한 “15만 원 탈취사건”의 골간 임국정, 최봉석, 한상호 등 반일 지사들은 모두 와룡동 출신이다. 와룡동에서 교세는 연변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8.15광복 후 내리막길을 걸으며 미구에 철거의 파국을 맞는다. 그러나 김신숙(1938년 출생) 노인이 와룡동으로 시집을 오던 1956년에만 해도 와룡동 교회의 건물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때 김신숙 노인은 바로 와룡동 교회의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의 목사가 그들의 결혼 주례를 선 것은 아니었다. “그때 교회는 이름뿐 이였지요. 벌써 예배를 보지 않고 있었습니다.” 수십평 크기의 교회건물은 사람 하나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 김신숙 노인의 시집은 마침 길 건너 바로 서쪽에 있는 이 널찍한 교회당을 예식장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우리 일행이 발길을 멈춘 곳은 와룡동의 제일 북쪽이었다. 거기에는 고층건물의 휴양소가 땅을 박차고 일어서고 있었다. 이 휴양소 앞마당의 동쪽 귀퉁이가 바로 교회당 옛 터였다. 옛 터에는 시공현장의 철근과 나무쪼각따위가 지저분하게 널려있었다. 와룡동의 분신이나 다름없었던 와룡동교회는 그렇게 역사의 흔적을 서서히 지워가고 있었다. 지난 세기 80년대까지 민흥촌의 직속 마을이였던 과수마을도 어느덧 집단기억에서 소실되고 있었다. 과수마을은 일명 5대 마을로 서쪽의 고개 너머 산등성이에 있었는데 예전에 동쪽의 와룡동과 짝을 맞춰 와호동(卧虎洞)이라고 불렸다는 속설이 있다. 이쯤 하면 누군가는 대뜸 와룡동과 와호동을 두고 좌청용이요, 우백호요 하면서 풍수설을 들먹거리겠지만 실은 이 지명이 용과 호랑이가 서로 싸운다는 용호상박(龙虎相搏)의 기세를 은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옛날 와룡동 마을에 영웅호걸이 많이 배출되였다는 것이다. 옛날의 샘물은 와룡동의 동쪽 골짜기에서 예나 제나 변함없이 퐁퐁 솟아나고 있었다. 그러나 샘물을 마시던 용은 단지 지명에 화석으로 외롭게 남아있을 뿐이였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8-06
  • [이슈 분석]체육강국 중국, 왜 축구만 약한가?
    ●리병천 올림픽 등 국제체육대회의 모든 종목에서 메달을 석권하고 있는 중국이지만 왜 유독 축구에서만 세계적으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일가? 정말로 팬들의 씁쓸한 우스개처럼 메시가 될 인물이 시골에서 밭을 갈고 있기 때문일가. 중국축구가 아직도 부진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진지하게 분석해본다. ◆중국, ‘체육강국’으로 우뚝 서다 2008년, 북경올림픽에서 중국은 성공적 올림픽 개최와 세계 최강 미국을 꺾고 종합 1위를 달성하는 등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올림픽 역대 종합순위를 살펴보면 각국의 국력과 세계 질서의 변화가 고스란히 반영되어있다. 1940년대 이전에 프랑스, 영국, 독일이 각각 한차례씩 종합 1위를 차지한 적이 있고 1948년 이후 대회부터는 미국과 소련이 종합 1위를 양분했으며 소련 붕괴 이후 1996년 이후는 미국이 종합 1위를 독차지하고 있다. 메달수가 국력을 직접 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2008년 당시 중국은 금메달수에서 51대36으로 미국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종합 1위를 차지했고 종합 1위의 이 막강한 상징성은 중화민족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작동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금메달 4개 차이로 종합 2위를 하면서부터 2008년 북경올림픽에서는 종합 1위를 차지해 이미 세계의 강자가 됐음을 보여줬다. 비록 중국은 2012년 런던올림픽과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서는 2, 3위를 기록, 종합 1위는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세계적 체육강국임은 증명됐다. 당대 스포츠에서나 국제질서에서 미국의 독주에 유일하게 도전장을 내고 있는 중국이다. ◆왜 축구에서만 유독 두각을 드러내지 못할가? 지난 7월, 국제축구연맹이 발표한 세계축구 랭킹에서 중국은 세계 76위, 아세아 9위를 기록했다. 일본, 한국, 이란 등 전통 강호들은 물론 카타르, 이라크 등 나라들에도 밀리고 있다. 2022 카타르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에서 중국은 2승, 1무, 1패를 기록, 필리핀과 승점은 7점으로 같지만 골 득실에 앞서 간신히 조 2위를 유지, 수리아(4승, 승점 12점)와는 어느덧 승점 5점 차로 벌어지며 최종예선 진출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지난해 11월 U-19팀은 26년 만에 아시아축구연맹 U-19 챔피언십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근래 중국축구가 각 대회에서 보인 성적은 그야말로 암울, 그 자체이다. 올림픽 등 국제체육대회의 모든 종목에서 메달을 석권하고 있는 중국이지만 왜 유독 축구에서만 지금까지도 제자리 걸음, 아니 후퇴를 하고 있을가? ◆‘한 자녀 정책’의 부작용 중국은 1980년대부터 정책적으로 인구억제를 실시했다. 바로 ‘한 자녀 정책’이다. 축구가 조직력의 스포츠이기 때문에 개인 기량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탁구나 체조 등에서 중국이 세계 최정상을 달리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11명이 하나로 묶여 움직여야 하기에 누구 한명의 기량으로 승부를 뒤집기가 쉽지 않다. 또 80년대 이후 출생한 자녀들에 대해 부모들은 투자는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프로선수가 돼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축구에 대한 인식하에 부모들이 하나밖에 없는 자식에게 축구를 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또 한 자녀 가정이 늘어남에 따라 개인주의 성향이 짙어지게 됐고 축구와 같이 조직력을 요소로 하는 종목에서 약세를 보이고 있다. ◆젊은 선수들의 프로의식 부재 중국 프로축구리그는 자금적인 면으로만 볼 때 세계 5대 리그중 하나라고까지 할 수 있다. 최근 몇년간 거액의 투입을 해오며 외국인 용병들에게 엄청난 돈을 투자해 그 지명도를 높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 토종 선수들의 실력은 리그 수준과는 왼전히 동떨어져 있다. 젊은 선수들이 외국 리그에 대한 도전에는 눈을 돌리지 않고 국내에 안주한 것 역시 높은 년봉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굳이 험한 길을 가지 않아도 엄청난 년봉이 보장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중국축구의 자국내 인기와 대우는 좋아졌지만 자국 선수들의 성장에는 오히려 독으로 작용한 측면도 있다. 한국이나 일본이 최근 몇년간 무수한 자국 유망주들을 유럽무대로 진출시켜 급격한 기량 향상을 일궈낸 것과 달리, 중국 선수들의 해외 진출은 무뢰(에스파뇰) 등 일부를 제외하면 극히 드물고 성공 사례도 부족하다. 과거 사우디아라비아나 카타르 같은 부유한 중동팀들이 겪었던 문제처럼 현재의 중국 프로 선수들은 높은 몸값과 스타대우를 받고 있는 자국리그에서의 성공에 안주하는 경향이 강하다. 중국 선수들 특유의 개인주의 성향도 팀플레이와 높은 전술 이해도를 요구하는 현대축구의 기준과 맞지 않는다는 평가이다.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를 개선하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중국축구가 아시아에서조차 경쟁력을 가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런 문제점들을 감지한 중국축구협회는 최근 거품 빼기에 나섰다. 슈퍼리그에 년봉 상한제를 도입해 국내선수 년봉 상한을 1200만 위안으로 규정했다. ◆공격형 용병들 국내선수 발전 공간 점령 근래 중국 프로축구에 세계적인 공격수들이 몰려들면서 국내 공격수들이 설자리가 없게 됐다. 이는 그대로 축구 유망주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최근 슈퍼리그, 갑급리그 각 팀들을 살펴보면 공격수들은 전부 이름값 비싼 용병들을 쓰고 있다. 국가팀 역시 전방에 엘케손 등을 귀화시켰다. 때문에 젊은 유망주들도 공격수보다는 미드필더나 수비수가 되기 위해 훈련한다. 엄청난 재부를 상징하는 프로 무대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공격수보다는 수비수가 가능성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젊은 선수들이 국내에서 공격수로서는 프로 무대의 경쟁을 이겨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헐크, 자하비 등 세계급 용병들보다 잘할 수 없다면 그냥 미드필더나 수비수가 되는 게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다. 세계적인 공격수들이 계속 중국으로 모여들고 있는 상황이 끝나지 않는다면 아마도 중국축구의 공격수 부재는 앞으로도 더 심해질 것이다. 어쩜 메시와 같이 천성적 공격수 자질을 갖춘 국내 유망주가 이미 헐크와 자하비 등 세계급 공격수들 때문에 수비수가 돼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체계적으로 축구팀 만들기 위한 인내심 결핍 세계의 그 어느 프로리그든 경쟁은 치열하다. 하지만 중국리그에서의 경쟁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더 심각하다. 국내 구단들은 감독을 기다려주는 인내심이 없다. 대기업이 축구를 좌지우지하다 보니 인내심이 극히 부족하고 성적에 따라 감독을 갈아치우는 게 전통이다. 이런 상황에서 감독들이 전술실험을 할 수도 없고 새로운 선수에게 기회를 줄 수도 없다. 이름값 비싼 용병들을 최전방에 배치해놓고 그들의 능력을 믿으면서 나머지 선수들은 안정적인 수비를 하는 것 뿐이다. 때문에 국가팀에서도 자유롭게 실험하고 도전하는 분위기가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중국은 세계가 공인하는 스포츠 강국이다. 인구 14억의 거대한 인적자원을 배경으로 다양한 스포츠 분야에서 초강세를 보여왔다. 때문에 왜 축구에서 만큼은 ‘중국산’이 전혀 통하지 않는지, 중국축구협회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중국축구는 언젠가는 국력처럼 세계적 최강이 될 것임을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주어진 숙제가 너무도 많아 보인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8-06
  • [연재] '삼국지' 재해석①
    ●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지(志)는 역사를 의미한다. 전국지(全國志)는 전국의 역사이고 지방지(地方志)는 지방의 역사이다. 중국에는 각 지방마다 모두 자체의 역사를 기록한 지(志)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삼국시대 역사를 기록한 책을 <삼국지>라 부르는데 <삼국지>는 본래 진(晉)의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진수(陳壽)가 지은 사서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명나라 소설가 나관중의 삼국시대 펼쳐진 이야기를 소설화한 <삼국연의>도 <삼국지>라 부른다. 물론 <삼국연의>가 <삼국지통속연의(三国志通俗演义)>의 줄임말인데 ‘삼국지’에 통속연의를 붙인 것은 사서가 아니라 진수의 <삼국지>를 참조하여 이야기 식으로 풀어서 문학적 장르로 창작한 소설이다. 때문에 나관중의 <삼국연의>를 <삼국지>라 부르면 진수의 사서인 <삼국지>와 혼동되고 한란이 조성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나관중의 <삼국연의>를 <삼국지>라 부르는 것이 너무 일반화되고 너무 보편화 되었기 때문에 본문에서도 나관중의 <삼국연의>를 <삼국지>라 칭한다는 것을 미리 밝혀두는 바이다. <삼국지>의 저자 나관중은 중국 원말·명초의 소설가 겸 극작가로서 강담(講談)의 이야기책을 기초로 해 구어체 장편소설을 지은 선구자이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및 시내암(施耐庵)과의 공저인 <수호지(水滸誌)>의 2대 걸작을 비롯하여 <수당연의(隋唐演義)>, <잔당오대사연의(殘唐五代史演義)>, <평요전(平妖傳)> 등의 작품이 있다. 나관중의 이 여러 작품 중에서 <삼국연의>가 후세에 가장 많이 알려졌고 가장 유명해졌다. <삼국연의>는 오승은의 <서유기>, 시내암의 <수호전>, 조설근의 <홍루몽>과 함께 중국 4대 명작(역사소설)으로 꼽히며 연대서열을 따지자면 단연 가장 선배 격이다. 현재 중국에는 이 4대 명작을 연구하고 밥 먹고 사는 학자가 1만여 명에 이른다. 그만큼 이 4대 명작이 역사적 가치가 크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편 이 4대 명작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에 끊임없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어려운가? 아무리 대단한 석학이라도 <홍루몽>을 다 알고 읽는 학자가 없다는 말이 있다. 물론 기타 3대 명작의 난의도가 <홍루몽>에는 못 미치지만 역시 다 알고 읽는 학자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3대 명작 가운데서 가장 어려운 것이 <홍루몽>이라면 가장 대중에게 많이 읽힌 것은 <삼국지>이다. <삼국지>는 중국에서는 물론이고 이웃나라 한국과 일본에서도 가장 많이 읽힌 소설이다. 이 두 나라에서는 <삼국지>가 가장 많이 읽혔을 뿐만 아니라 만화로 개작하고 게임소재로 사용하여 벌어들인 돈이 한국에서는 연간 수 천 억, 일본은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조(兆)에 이른다고 한다. 이렇듯 유명한 소설에 대해 그 내용을 품평하기 전에 이 소설이 탄생된 배경부터 살펴보는 것이 자못 의미가 크다고 생각되어 중국문학사를 한 번 여행해 보기로 하자. 문자의 기능은 일차적으로 기록이다. 다시 말하자면 문자가 생겨난 것은 기록을 남기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예를 들어 농사를 지었는데 얼마 수확했고 얼마 먹어야 하고 얼마 남겨서 재생산에 사용해야 하는지, 농사는 사계절의 변화뿐만 아니라 수시로 일어나는 천재지변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에 기억에만 의존하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문자로 기록해 놓으면 앞으로 시행착오를 덜 겪고 더 나은 삶을 지향하고 누릴 수 있었다. 이렇게 농경의 발전에 필요했던 문자는 잠차 인간의 삶에 여유가 생기면서 문화적인 삶에 사용되기 시작한다. 인간의 문화적인 삶을 표현하는 문학작품은 대체로 시, 수필, 에세이, 소설 등 장르가 있는데 이 가운데서 시가 가장 ‘선배’였다. 왜냐하면 시는 노래가사이기 때문이다. 시는 최초로 제사 시 주술사(呪術詞)였고, 남녀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노랫말이었다. 중국 최초 문학작품은 <시경>이며 그 작품들은 다수가 사랑 타령을 콧노래로 흥얼거리는 노래가사였다. 시에 비해 소설은 가장 늦게 세상의 빛을 본 막내였다. 시와 소설의 ‘나이’ 격차는 무려 3천여 년이나 되니 소설은 시에 비해 까마아득한 후배이다. 소설이란 장르의 탄생을 알려면 먼저 문화 전성기라 불리는 당나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중국에는 본래 종교가 없었다. 굳이 외래 종교와 어깨를 겨루기 위해 억지로 종교라는 라별을 붙이자면 유교와 도교를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종교’는 미래의 삶, 즉 사후세계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다. 그래서 신앙이 부족했던 중국인에게 삶의 ‘활기’를 불어넣은 외래종교가 바로 불교였다. 불교가 중국 문을 두드린 것은 후한시기였으니 지금으로부터 1800여 년이 된다. 위·진남북조시기에 탄압받다가 당나라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는다. 당 태종 때에 삼장법사가 서천(인도)에 가서 불경을 구해 와 중국에서의 불교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한다. 중국역사에서 유일한 여황이었던 무측천은 불교에 심취해 전국에 가축도살금지령까지 내릴 만큼 독실한 불교도였다. 여황은 자신이 불교를 좋아하다 보니 전국에 불교를 대중화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불교의 경전은 매우 어렵다. 스님들의 염불은 그들만이 알아먹을 뿐 일반 민중은 이해불가다. 그래서 불교를 대중화하려면 불교계가 일대 변혁을 일으켜야 한다. 불교를 대중화하는 그 변혁이 우리말로 말하면 바로 ‘야단법석’이다. ‘야(野)’는 도시 변두리 빈 공터이고, ‘단(壇)’은 제단 단이며 공연무대이고, ‘법(法)’은 불교를 뜻하고, ‘석(席)’은 불법을 전파하는 자리이다. 야외에 공연무대를 설치하여 불경을 강연하는 것이 바로 ‘야단법석’이다. 본래 산속의 절간에서 염불하던 스님들이 민중 속에 들어가 ‘연예인’이 되는 것이다. 즉 어려운 불경을 낫 놓고 ‘ㄱ’자도 모르는 민중에게 이야기 식으로 풀어서 귀에 쏙쏙 들어오게 강연하는 것이 바로 ‘야단법석’이었다. 그런데 이 ‘야단법석’이 중국에서는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일반용어가 되지 못한데 비해 한반도에서는 자주 쓰는 일반 어휘로 자리매김 되어왔다. 어찌 된 영문일까? 원효 스님의 덕분이다. 우리말 ‘야단법석’은 시끌벅적 떠든다는 의미이다. 어떻게 떠들었나? 경직되어 있던 스님들이 무대에 올라 ‘연예인’이 되어 재미있게 강연하고 스님의 강연이 끝나면 갑돌이 갑순이 모두 ‘각설이’ 되어 무대에 올라 노래와 춤을 맘껏 즐기고 무대 아래에서는 줄넘기, 줄다리기, 제기차기, 연 띄우기, 투호놀이, 패놀이 등 오락을 즐기고 심지어 여성들이 모여서 어떻게 하면 잠자리 잘할 수 있고 어떻게 하면 아이를 잘 밸 수 있는지에 대한 ‘음담패설’을 맘껏 나누는 자리였다. 이렇듯 한바탕 터놓고 떠들었던 것이다. 이 떠드는 장소에서는 계급이 없고 남녀 차별도 없는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신라 원효 스님이 바로 방방곡곡 촌락을 돌아다니며 ‘야단법석’을 벌려 불교를 전파하고 대중화하는데 지대한 기여를 했던 이유로 우리말 ‘야단법석’이 상용어로 자리매김 되었던 것이다. 도올 김용옥 교수는 당나라 때 이 ‘야단법석’을 동양식 그리스 광장민주주의로 비유할 만큼 높게 평가하고 있다. 스님들의 ‘야단법석’ 강연에 의해 강창문학(講唱文學) 이란 장르가 생겨났고, ‘송사(宋詞)’가 발달했고, ‘원곡(元曲)’이 발달하였으며, 명나라에 이르러 새로운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소설(小說)을 천자문 식으로 풀이하면 ‘작은 말’이다. 작다는 의미로 ‘잔’이라고 하는데 소설은 잔말, 잔소리이다. 여기서 말하는 잔소리는 누구를 꾸짖거나 흉을 보는 말이 아니라 잔잔하고 작은 말이라는 뜻이다. 중국에는 수천 년 동안 장터에서 이야기하고 돈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는 이야기꾼들이 있었으며 가문대대로 계승해온 집안도 있었다. 이 이야기꾼들의 말이 곧 ‘잔소리’이고 이 ‘잔소리’를 집대성한 것이 곧 소설이다. 역사소설 <삼국지>는 명나라 나관중이라는 글쟁이가 진(晋)의 진수가 집필한 <삼국지>와 배송지의 <삼국지주(三国志註)>에 수록된 야사와 잡기를 근거로 쓴 소설이며 최초 판본은 1522년에 판각한 가정본(嘉靖本)으로, 원래 이름은 <삼국지통속연의(三国志通俗演义)>라 하여 모두 24권 240칙(則)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이에 더해서 나관중은 1천7백여 년 동안 장터의 이야기꾼들이 대대로 전해온 이야기(잔소리)를 근거로 지었다는 것이 매우 설득력 있다. 삼국시대 때 있었던 일들을 1천7백 년 동안 전해오려면 한 사람이 30년 말할 수 있다고 치면 60여 대를 거쳐야 하는데 60여 대를 거치노라면 이야기들이 어떤 대목은 줄어들었고 어떤 대목은 뻥튀기처럼 부풀려지기 마련이고 재미 위주로 없던 스토리를 지어내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접하는 나관중의 <삼국지>는 본래 있었던 역사사실과는 거리가 십만 팔천 리나 된다. 그리고 좋게 말하면 문학적인 상상력이 뛰어난 나관중, 나쁘게 말하면 구라가 뛰어난 나관중이라는 글쟁이에 의해 탄생된 문학작품이다. 그런데 아무리 상상의 결과로 지어내는 소설이긴 하나 역사소설이라면 그래도 역사사실에 기초하는 것이 맞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겠으나 사실이 2~3할이라면 나머지 7~8할은 상상에 의해 지어진다. 예를 들어 중국역사에서 4대 미인 중 하나로 꼽히는 초선이란 인물도 미안한 일이지만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다. 유비가 제갈 공명을 모시는 삼고초려도 사실이 아니다. 유비야말로 다섯 번이나 주인을 배반한 간신이지만 그를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했고 조조는 진짜 괜찮은 인물이었으나 나관중은 그를 형편없는 인간으로 묘사했다. 관운은 무식한 무장일 뿐이었는데 후세 사람들은 그를 신으로 받든다. 한국사극드라마 <미실>에서 미실이 선덕여왕과 권력투쟁을 벌이는 스토리가 있는데 전혀 역사사실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미실이란 인물이 실제로 존재했으나 법흥왕의 색신(色臣)으로부터 진평왕에 이르는 3대를 거쳐 궁중에서 위세를 부렸던 것은 사실이지만 선덕여왕과 나이 차는 80여 년이 된다. 미실이 살아 있을 때 선덕여왕은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다. 드라마 <미실> 뿐만 아니라 한국사극은 다수가 사서나 왕조실록에 기록된 한두 줄의 대목을 근거로 고무줄 늘리듯 늘려 지어내는 것이다. 이런 맥락과 비슷하게 한국 시중에 돌아다니는 <삼국지>는 이문열의 <삼국지>, 황석영의 <삼국지>를 비롯해 요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 설민석의 <삼국지>에 이르기까지 여러 버전이 많아 나관중의 원작에 비해 수없이 개작되고 있다. <삼국지>가 본래 어려운데다 여러 버전이 있어 더욱 혼란스러울 것 같아 <삼국지>를 재해석하는 작업을 하기로 맘먹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8-04
  • [연재] 진의(秦怡)-눈물겨운 김염(金焰)과의 결혼생활①
    [동포투데이] 진의(秦怡 친이)ㅡ그녀는 중국대륙의 유명한 영화배우이다. 영사막에 나오는 그녀는 다정다감하면서도 용감무쌍한 기질을 보여주는 동방여성의 형상을 잘 부각하면서 많은 관중들의 심금을 사로잡군 하였다. 봉건전통이 각별히 심한 가정에서 태어난 진의는 여성이라는 본분을 지키면서도 쉽게 자아감정에 빠져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모순적인 여성이기도 하다. 자아감정에 쉽게 빠져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여성 진의ㅡ 바로 그것이 그녀로서는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었으며 그것은 두 번 다 그녀의 혼인으로 하여금 엉망진창으로 되게 했다. 1922년 1월 상해의 전통적인 봉건 대 가정에서 태어난 진의는 어려서부터 다정다감했으며 특히 문예를 즐겼고 성격 또한 활달했다. 진의의 천부적인 재능은 그녀가 상해 중화직업학교에 다닐 때 나타났다. 당시 진의는 연극 <당신의 채찍을 놓으시오(放下你的鞭子)>에 출연, 14세의 앳된 소녀였지만 극 장면마다 관객들의 심정을 사로잡군 했다. 1938년 상해 중화직업학교를 졸업한 진의는 무한으로 달려가 항일선전활동에 참가, 그때 그녀의 나이는 고작 16살이었다. 당시 진의가 무한으로 간 것은 신여성으로 항일구국 의식이 강한 면도 있었겠지만 각종 전통적인 예의범절로 모든 자녀를 구속하는 가정이 싫어진 면도 있었다. 그해 진의는 무한에 있는 중국영화촬영소에 들어가 실습배우가 되었고 그 이듬해 그녀의 첫 영화 <훌륭한 남편(好丈夫)>에 출연하면서 영화배우로서의 스타트를 뗐다. 바로 그때 천진난만한 소녀 진의한테는 한 남자의 그림자가 슬며시 다가왔다. 바로 당시 중국 연극계에서 꽤나 명성을 날리던 진천국(陈天国)이었다. 진천국은 진의한테 지꿎게 달라붙었다. 1939년의 어느 날, 진의의 손목을 잡고 산속으로 들어간 진천국은 정식으로 무릎을 꿇고 그녀한테 프로포즈를 하였다. 그 당시 진의는 선배로서의 진천국한테 어느 정도 호감이 있었지만 이성으로서의 남편감으로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진의는 너무 어렸던 것이다. 헌데 착한 진의는 진천국한테 확실하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특히 진천국이 자기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절벽에서 뛰어내리겠다고 하자 진의한테 남아있던 마지막 한 가닥 방어선도 모래성처럼 붕괴되고 말았다… 지금 와서 보면 연극쟁이인 진천국의 그 거동은 일종 <쇼>에 불과했고 진의 또한 그런 것을 간파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린 나이였다. 진천국의 본성은 결혼하자마자 곧바로 나타났다. 그는 늘 술을 마시고 집에 와서는 행패를 부렸고 심지어 진의한테 발로 차고 주먹을 내휘두르기까지 했다. 1944년 8월, 딸 비항(斐姮)이 태어난 뒤 어린 것은 자꾸 앓았고 지어 당시 항일전쟁 시기라 딸애한테 먹일 우유 같은 부식을 얻을 길 없었으며 기타 부양비용도 큰 걱정거리였다. 헌데 진천국은 돈만 생기면 술을 마셨으며 지어 어린 딸을 남한테 주자고까지 을러 메군 했다. 이에 진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1945년 일본의 패망전야에 진의와 진천국은 결국 이혼하고 말았다. 딸 비항은 물론 진의가 책임지고 부양하기로 했다.<다음에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8-03
  • 미국의 대(對)홍콩 제재는 국제법 어기는 엄중 행위
    ● 세르게이 사나코예프(러시아) 최근 미국은 중국이 반포한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 국가안전수호법(中华人民共和国香港特别行政区维护国家安全法)>을 빌미로 우선은 홍콩에 대한 무역 우대 정책을 취소하고 수출허가 면제를 잠시 중단하였으며 이어 또 소위 <홍콩자치법안> 조인설법 등으로 제재를 실시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상술한 미국의 행위는 중국내정에 대한 조폭한 간섭이며 국제법과 국제관계 기본준칙을 엄중하게 위반하는 행위로 되고 있다. 미국은 또 <인권>, <민주>란 명의로 반 중국세력의 과격폭력범죄 행위를 미화하면서 홍콩 국가안전법 입법을 터무니없이 질책하면서 홍콩 주민들의 권리와 자유를 파괴하고 있다. 이는 전형적인 흑백전도이다. 홍콩에서 소수의 반 중국 분자들이 외부세력과 결탁하여 부단히 폭력 활동 차원을 높이면서 홍콩주민들의 정상적인 사업과 생활을 엄중하게 방해하는 한편 중국의 국가안전에 현실적인 위해를 조성하고 있다. 중국이 홍콩국가안전법을 실시 추진하는 것은 국가의 주권과 영토의 완정을 수호하고 홍콩 사회의 정상질서를 유지하며 홍콩 주민들의 인신안전과 합법적 권익을 보장함에 있어서 유리하다. 미국이 중국이 추진하고 실행하고 있는 홍콩국가안전법을 빌미로 홍콩에 제재를 하는 것은 홍콩주민의 안전과 복지에는 근본 관심이 없고 머릿속에 가득 찬 것은 자국의 이익과 패권뿐이라는 것을 표명하며 이른바 <인권>과 <자유>를 떠드는 것은 미국 측이 타국의 내정을 간섭하기 위한 포장품에 불과한 것이다. 홍콩국가안전법을 제정 실행하는 것은 완전히 중국의 내정에 속하며 다른 국가들에서는 간섭할 권리가 없는 것이다. 국가의 안전을 수호하는 것은 역대로 중앙정부의 사항이고 권리인 것이며 모든 나라마다 다 그렇게 하고 있다. 세계 각국의 일들을 보면 중앙정부의 입법기구가 국가의 안전입법을 함에 있어서 모두 결정적인 주도 작용을 하고 있다. 홍콩국가안전법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법의 출범은 국가의 분열, 국가정권에 대한 전복활동, 테러활동의 조직과 실행, 외국 및 경외세력과 결탁하여 국가의 안전을 해치는 범죄행위를 제지하거나 징벌하는 것으로 국가의 주권, 통일과 영토완정을 수호하고 홍콩의 장기적인 번영과 안정을 수호하는 것이었다. 홍콩국가안전법은 <일국양제(一国两制ㅡ한 나라 두가지 제도)> 방침에 완전히 부합되는 것이다. 중국이 홍콩국가안전법을 제정 실행하는 것은 곧바로 매우 안정적인 행동이다. 중국정부는 1997년에 홍콩에 대한 주권행사를 회복하였으며 <일국양제>는 홍콩발전의 가장 큰 우세였다. <일국양제>의 성공적인 실천은 홍콩의 독특한 발전우세로서 홍콩주민들의 복지를 증진시키기도 했다. 다 년래 필자는 경상적으로 홍콩에 다녀왔으며 이 도시를 매우 사랑하고 있다. 중국으로 반환된 이래 홍콩에서는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으며 인프라 시설이 더욱 개선, 특히 교통운수 시설안 빅토리아항구를 관통하는 해저터널을 포함한 홍콩, 저우하이(珠海)와 마카오 등 세 도시를 잇는 홍콩-저우하이-마카오 대교 등이 가장 좋은 사례이다. 그리고 홍콩의 상업, 금융업과 서비스업 등이 발랄한 발전을 가져왔다. 조국의 내륙과 멀지 않은 등 유리한 주위 환경과 개방자유의 상업운영 환경 그리고 안정된 사회질서 등으로 홍콩은 많은 대형적인 다국 회사들의 투자 지역으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미국이 홍콩을 제재하는 것은 본질상에서는 타인한테 손해를 주고 자신도 해를 입는 행위임에 분명하다. 통계상 데이터를 보면 중국의 <일국양제> 정책으로 하여 미국은 대단한 수익자로 되었었다. 미국은 홍콩과의 경제무역 왕래 중에서 매우 큰 이득을 보았으며 2010년부터 2019년간의 10년 사이 미국은 대 홍콩 화물무역에서 3100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 현재 약 1300개의 미국기업이 홍콩에서 기업경영을 하고 있는 상황, 본지 기업이 내지시장으로 진입하는 것과 등등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한다. 미국은 중국을 제압하는 것으로 현재 흔들리며 땅에 추락하고 있는 자국의 세계패권을 유지하려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다 년래 미국은 <세계경찰>로 있으면서 서방 주도의 가치체계를 주도해 왔으며 부동한 가치이념의 국가에 대해서는 걸핏하면 제재를 실시해왔고 아울러 시종 일련의 숭고한 어조로 자신을 감추어왔다. 구두 상에서 이들은 국제법과 국제규칙을 선양하였지만 실제상에서는 패권주의와 강권정치를 강행해 왔다. 국제규칙에 대해 미국은 경상적으로 입맛에 맞으면 이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포기하군 했다. 최근 들어 미국은 더욱 창궐하게 많은 국제조직과 다변협에서 퇴출하면서 일찍 이행을 승낙했던 의무를 거절하고 있다. 현 단계에 있어서 미국은 국제규칙을 준수함과 아울러 마땅히 해야 할 국제적 의무를 이행해야 할 것이다. 이는 미국정부가 반드시 정시해야 할 문제이다. (작자는 러시아 싱크탱크 <러시아 중국분석 센터 사무장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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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0-07-28
  • 한 농예인의 동상 그리고
    ●김 혁 찜통더위에 꺼둘린 7월 22일, 용정시 로투구진 용진촌 소기마을에서 최창호 선생 조각상 설립식이 조촐하게 펼쳐졌다. 허물어져가던 ‘사과배선조나무기념비’가 보수되었고 최창호 선생의 100년 고택도 다시 손길이 닿아 초옥의 운치를 보이는 가운데 그 고택의 뒤쪽 언덕배기에 ‘사과배의 선구자’로 정평되는 농예인 최창호 선생의 한백옥 흉상(胸像)이 건립되었다. ▲22일 오전 용정시 로투구진 용진촌에서 최창호선생의 조각상 (낙성) 및 사과배 종나무(宗树) 기념비 확장공정 준공식을 가졌다. 최창호는 1897년 조선의 함경북도 경성군 주남면 용정동에서 살고 있는 가난한 선비 최병일의 아들로 태어났다. 20세기 초, 일제의 탄압에 조선 리씨 왕조의 운명이 다해가자 최병일은 일가식솔을 거느리고 중국으로 이주, 1916년에 드디어 다다른 곳이 바로 그 지형이 버치 모양을 닮은 형국이여서 ‘작은 버치골’로 불리는 용정 로투구진 소기(小箕)촌이였다. 최 씨 일가는 화전을 일구어 첫해 농사를 지었고 지세 높고 양지바른 곳에 8칸 초가집을 지었다. 최창호네 집 뒤편에는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언덕이 있었다. 최창호는 그 언덕에 살구, 오얏, 배, 복숭아, 찔광이와 돌배나무를 서렬열로 심었다. 그로부터 소기골에 처음으로 과수원이 들어서게 되였다. 1921년에 최창호는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가져온 여섯 대의 배나무 가지를 김치움에 넣어 잘 보관하였다가 이듬해 봄이 되자 배나무 가지를 돌배나무에 접지하였다. 짚으로 싸고 삼으로 동여서 겨울나기를 시켰다. 그렇게 6년째 되던 해의 봄 3그루의 과일나무 가지에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 세 그루의 과일나무가 연변에서 생성된 사과배의 단초(端初)를 열어놓았다. 이로부터 사과배는 연변은 물론 동북지역과 내몽골, 화북지역에 널리 전파되었고 아시아에서 가장 큰 사과배기지인 연변과수농장 만무과원이 용정에 조성되었다. 사과배는 국내외에 소문 높은 브랜드상품으로 자리매김했고 사과배산업은 연변 농업경제의 중요한 기둥 산업으로 간주되었다. 한 농예인이 접목의 힘으로 거칠고 바람 세찬 이 땅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주렁지게 한 새로운 품종이 바로 사과배이다. 150여년의 이민 정착 역사를 경유해온 조선족이 황무지를 눈물로 개척하면서 만들어 낸 지역 특산물로서의 사과배에는 조선족의 피와 땀, 애환이 담겨있다. 이렇듯 이민 민족인 조선족은 중국 문화의 가지를 자기 민족 문화의 뿌리에 접목시켜 새로운 문화를 창출시켰다. 때문에 학계에서는 중국 조선족을 사과배에 곧잘 비유한다. 사과배는 어찌 보면 자체의 특유의 생존 이념을 키워온 조선족 문화를 형상화한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백년 세월을 경유해오면서 사과배는 중국 조선족의 개척정신과 창조정신의 상징물로 부각 되였고 사과배선조나무는 연변의 중요한 역사, 경제, 문화 유산으로, 소중한 향토교재로 각광받게 되였다. 이에 용정시정부에서는 지난 1987년 최창호 선생의 호흡이 서린 소기촌에 ‘사과배선조나무기념비’를 세웠고 1998년에는 연변주정부와 용정시정부에서 ‘사과배소개기념비’를 세웠으며 오늘에는 드디어 그 사과배의 ‘산파’인 최창호 선생의 기념석상을 세우게 된 것이다. 이로써 조선족 문화의 발상지 용정지역에는 모아산 기슭에 과수원을 건설할 구상을 무르익혀 오늘의 만무과수원을 일구어낸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임 주장 주덕해, 연변의 첫 반일시위운동의 선두에 섰던 조선족 화가 한낙연, 조선족 교육의 일번지 명동학교의 창시자 김약연, 겨레가 애대하는 민족시인 윤동주 등 명사, 명류들의 기념 동상이 들어서게 되였다. 이러한 동상들은 지역사회의 역사와 정체성을 우렷이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기념물들은 지역사회의 둘도 없는 랜드 마크가 될 것이다. 이는 단순히 돌을 쫏고 나무를 깎아 형상 하나를 세우는 행위가 아니다. 선대 혹은 당대 사람들이 이룩한 업적을 기려 정성껏 세운 동상은 역사를 기억하려는 지성인들의 정열과 민족심의 발현이다. 현실을 직시하면서 민족의 정체성을 새롭게 살리고 글로벌 시대 세계로 가는 조선족으로서의 자긍심을 높이는 일이다. 명예와 공훈에 걸맞은 기념비, 동상을 적지에 건립하는 일은 이곳을 찾는 시민, 타지의 관객들에게 지역사와 현대사의 산 교육의 장으로 될 것이다. 민족역사의 보존, 전승, 특히 지역사회의 위상에 걸맞은 기념물의 건립은 역사관, 민족관, 국가관을 제대로 정립하게 해주며 우리의 미래를 굳건히 다지는 찬란한 기념비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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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27
  • 아리랑 고개의 정자바위
    ●김호림 알고 보면 정암촌이라는 이름은 과연 이 마을에 딱 들어맞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정자 바위는 멀리부터 마을의 비석처럼 시야에 안겨온다. 이 바위는 3미터가량의 거리를 두고 동, 서 두 쪽으로 나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바위 사이에 나무가 뉘여져 다리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두 바위를 드나드는 경우를 두고 견우와 직녀의 상봉이라는 말고 가 생겨날 정도이다. 정자 바위는 옛날 군사들이 전망대로 사용하던 곳이다. 정자 바위가 있는 산등성이를 타고 옛 성벽이 울타리처럼 골짜기를 빙 둘러싸고 있다. 산에는 일찍 고구려 때 축성하고 사용하던 천 년 전의 성곽이 있다. 이 성곽에는 온돌 유적이 있는 게 자못 특이하다. 오랜 옛날부터 백의 겨레의 선조들이 이곳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정자 바위 아래의 석두하 기슭에 늘 돼지머리 등 제물을 차려놓고 산신령에게 제를 지냈다고 한다. 옛 고향의 따스한 추억과 인연을 상기시키는 이 민속은 어찌 보면 타향살이의 서러움을 달래는 일종의 의식과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충청도 마을은 함경도 문화권인 연변에서 이 정자 바위처럼 유표했다. 공교롭게 함경도 마을은 바로 남쪽으로 몇 리 되는 곳에 있었다. 일명 석두촌(石头村)으로 부근을 흘러 지나는 석두하 때문에 지은 이름이다. 만주국 강덕(康德) 원년(1934) 함경북도에서 백여 가구의 농부들이 집단 이주하여 이 마을을 세웠다고 한다. 마을은 조선 총독부에서 관리했다고 해서 시초에는 “총독부 부락”이라고 불렸으며 1936년 집단부락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남도 충청도 이민의 집단부락은 북쪽에, 북도 함경도 이민의 집단부락은 남쪽에 위치하면서 남도와 북도는 이 고장에서 서로 자리바꿈을 하고 있는 것이다. 1948년, 정암촌에서 20여 가구가 따로 나와 석두촌의 북쪽에 밭을 일궜다. 이곳에는 소나무가 많다고 해서 솔밭자라고 불렸다. 이 마을은 나중에 소실되고 송전툰(松田屯)이라고 쓴 석물만 외롭게 길가에 남았다. 송전툰은 솔밭자를 중국어로 뜻을 옮겨 쓴 것이다. 아예 송두리째 소실된 마을도 있었다. 번신령(翻身岭)은 벌떡 자빠졌다는 속설 때문에 불리는 지명인데 정암촌에서 왕청으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북쪽 약 3리부터 시작되는 골짜기이다. 세 부락이 있었고 한때 소학교까지 있었지만 지난 세기 60년대 전부 골짜기 밖으로 철거 되였다고 한다. 정암촌도 미구에 새마을 건설을 하면서 남쪽방향으로 약간 자리를 옮긴다. 그래도 정자 바위를 그냥 뒤에 업고 있어서 마을 지명의 근원은 버리지 않은 셈이다. “충청도 사람들은 지역 우월감이 정말 대단해요.” 심범극옹은 마을의 텃세를 말하면서 연신 혀를 내둘렀다. “이전에는 함경도 사람이라고 하면 마을에 받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7년 경상도 출신의 심범극옹 가족이 정암촌에 이삿짐을 풀 수 있게 된 것은 그 누구의 의지를 따른 게 아니라 전적으로 정부적인 행위였다. 정암촌은 8.15광복 전까지 북쪽 왕청현 춘방구(春芳区)에 속했으며 훗날 동쪽 훈춘현의 관할에 들어가게 되였다. 이때 이 지역에는 아홉 개의 부락이 있었는데 부락마다 훈춘에서 이주하는 세 가구의 이민을 통일적으로 받게 되였다. 심범극옹의 가족은 마침 이 충청도 마을에 배정을 받았던 것이다. 수십 년이 지난 후 심범극옹은 이 충청도 마을의 토박이로 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충청도가 아닌 “경상도”의 그림자를 떨어뜨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충청도 사람들은 심범극옹에게 예나 제나 “그 사람들”로 통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흥겨울 때는 노래를 했지요. 노래를 참 잘 불렀습니다.” 충청도 사람들의 1번 노래는 “청주 아리랑"이었다고 한다. 심범극옹은 인터뷰 도중에 요청에 따라 노래 한가락을 멋지게 뽑았다. 그는 적어도 노랫가락을 건드려지게 넘기는 이때만은 어김없는 충청도 사람이었다.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세. 울 너머 담 너머 임 숨겨두고 난들난들 호박잎이 날 속였네. (이하 후렴)” 지금도 노인들은 보름 같은 명절 때면 삼삼오오 모여 “청주 아리랑”을 부른다고 한다. 힘든 아리랑고개를 넘으면서 고향에 대한 향수는 그렇게 쉽게 지울 수 없었던 모양이다. 정작 노래의 발원지인 충청도에서 이 “청주 아리랑”은 이미 실전되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청주 아리랑”은 이역의 새 마을 정암촌에 정착하였고 또 정암촌의 이미지로 되고 있다. 구경 이 노래가 이민들의 70년 이주생활에서 어떻게 변형되었고 또 어떻게 본고장의 기억에서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충청도 사람들의 운명과 생활의 상징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데는 아무런 온난의 여지가 없다. 중 한두 교전에는 학자들이 와서 남도 방언과 민속을 연구하기도 했다. 학자들의 이런 발길은 날이 갈수록 뜸해지고 있었다. 정암촌은 더는 충청도 사람들만 살고 있는 고도(孤岛)가 아니었다. 지리적으로 함경도와 가깝고 또 함경도 출신의 사람들이 인근에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물결에 잠겨 예전처럼 외롭지 않았지만 남도 충청도의 이름은 북쪽 골짜기의 옛 산성처럼 어느덧 기억 속에서 색이 바래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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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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