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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지' 재해석⑩ 바보스런 의인(義人)의 아이콘 장홍
    ●김정룡(다(多)가치 포럼 위원장) 자고로 인간 세상에는 배신하는 자가 있는가하면 의리를 지키는 자도 있기 마련이다. 삼국시대(정확하게 말하자면 후한 말기)에는 천하가 대혼란에 빠져 난세의 영웅들이 여기저기서 뛰쳐나오고 서로의 이익을 위해 적군도 아군도 없는 이합집산이 대세를 이뤘다. 하지만 언제나 그럴 듯 난세에도 이익보다 의리를 우선하는, 우선할 뿐만 아니라 목숨처럼 여기는 강호의 사내도 있었다. “소인은 이(利)를 쫓지만 군자는 의(義)를 추구한다.” 위대한 공자님의 말씀이다. 삼국시대 강호의 장수 중에 무예가 가장 뛰어난 여포는 이(利)를 지나치게 쫓는 바람에 배신의 아이콘이 되었고, 이와 반대로 관우는 의리를 지켜 조조마저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런데 소설 <삼국연의>는 있지도 않은 유비 삼형제의 ‘도원결의’를 지어냈고 이 삼형제의 충과 의를 영웅화 하는데 중점을 둔 결과 수많은 진짜 영웅들의 진실이 묻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소설 <삼국연의>를 읽어 본 독자들께서는 아마 장홍(臧洪)이란 인물이 기억 속에 없을 것이다. 역사에서는 장홍이 관우보다 훨씬 100배 더 의리를 지킨 강호의 사나이였지만 나관중은 유비 삼형제를 내세우기 위해 장홍을 물밑으로 밀어낸 결과 후세 사람들은 장홍이란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필자가 장홍에게 눈길을 돌린 이유는 진수의 <삼국지> 때문이다.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여포와 장홍을 한 챕터에 묶어놓았다. 여포와 장홍의 이 챕터는 <삼국지> 위서(1) 앞부분에 위치해 있어 비중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한 챕터에 묶어 다뤄진 여포와 장홍은 서로 완전히 반대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즉 여포는 배신의 아이콘인데 비해 장홍은 의리의 아이콘이다. 이 극과 극에 있는 두 인물을 한데 묶어 기록한 것은 아마 비교를 위함이었을 것이다. 장홍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나? 장홍의 아버지 장민(臧旻)은 흉노중랑장, 중산과 태원(지금의 山西省 太原)의 태수를 지냈는데 부임지마다 명성을 떨쳤다. 진수의 <삼국지>에 의하면 장홍은 체격과 용모가 위풍당당했다고 한다. 그는 예의에 밝아 효렴(孝廉)으로 추천되어 낭(郎, 요즘 말로 하면 공무원 시험 합격자))이 되었고 성과가 뛰어나 얼마 후 즉구현(卽丘縣)의 장이 되었다. 영제 말년에 세상이 어지러워 장홍은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광릉 태수 장초가 그를 불러 공조로 삼았다. 장홍은 대가 바르고 아주 정의적인 사내였다. 동탁이 황제를 살해하고 나라를 위기에 빠뜨리고 획책하니 장홍은 장초에게 말했다. “명공은 대대로 천자의 은혜를 입었고 형제도 큰 군(郡)을 다스리는 관리입니다. 현재 황실은 위기에 처했는데 적신(賊臣)은 아직 제거되지 않았으니 이는 진실로 천하에서 정의롭고 열렬한 선비들이 목숨을 바쳐 황은에 보답해야 할 시기입니다. 지금 경계가 아직 온전하고 관리와 백성도 풍족하니 만일 징을 치고 북을 울려 병사를 모으면 2만 명은 소집할 수 있습니다. 이들을 이용해 국가의 적을 주살하고 천하를 위하여 바른 행동을 선도한다면 이는 정의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것입니다.” 장초는 장홍의 말이 전적으로 옳다고 여겨 함께 서쪽으로 향하여 형 장막이 있는 진류에 도착했다. 장막은 의협기질이 있어 일찍부터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그는 집안의 재산을 아까워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위급한 사람을 구해 주어 많은 재사들이 그에게 의탁했으며, 한때 조조·원소 등과도 가까이 지냈다. 이렇듯 장막과 장홍은 기질적으로 통하는 것이 많았다. 장막은 즉시 장홍을 불러 만나 대화를 나누어보고는 매우 특별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를 연주 자사 유대와 예주 자사 공서(孔緖)에게 소개하니 모두 장홍과 친하게 지냈다. 독자들은 아마 소설 <삼국연의>에서 유비 삼형제가 도원결의를 맺을 때 소를 제물로 바치고 그 피를 나눠 마시는 것으로 맹세를 다짐하는 의식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대사회에서 여럿이 모여 일을 도모할 때 변치 말자는 맹세를 이런 식으로 거행했다. 장홍과 친하게 된 여러 사람들이 모여 일을 도모하려고 장홍을 맹주로 추대하였고 추대 받은 장홍은 곧 제단에 올라 쟁반에 부어놓은 피를 마시며 맹세하였다. 속설에 의하면 맹약의식 때 마시는 피는 얼룩소의 피였다고 한다. 장홍의 맹세는 거창하고 굳셌다. “한나라 황실은 불행하게도 기강이 법통을 잃었으며 역적 같은 신하 동탁이 이 기회를 틈 타 나라를 어지럽혀 그 화가 제왕에게까지 미쳤고 그 잔혹함은 백성에게까지 흘렀으니 국가가 파괴되고 천하가 전복될까 크게 두렵습니다. 연주 자사 유대, 예주자사 공주, 진류 태수 장막, 동군 태수 교모, 광릉 태수 장초 등은 의로운 군대를 규합해 모두 국가의 어려움을 구할 것입니다. 무릇 우리는 함께 맹세하고 마음을 일치시켜 협력함으로써 신하로서 충성과 절개를 바칠 것이며 목을 베일지라도 절대로 두 마음을 품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 맹약을 어기는 사람이 있으면 그의 목숨을 빼앗고 자손도 모두 없앨 것입니다. 하늘의 신과 땅의 신이여! 황실과 선조의 신령이여! 모두 함께 이들을 살펴주십시오!” 장홍의 말에는 격정의 기운이 흘렀고 눈물이 좌우로 흘러내렸다. 그의 말을 들은 자라면 비록 일개 병졸이나 잡부라 할지라도 감정이 격앙되지 않은 자가 없었으며 다들 목숨을 바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대오는 전진하지 못하고 식량이 다 떨어지자 다들 해산했다. <성경>에 이르기를,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에 창대하리라!” 장홍과 의기투합했던 이 대오는 시작은 거창했으나 나중에 너무 미약해서 흩어지고 말았다. 장초는 발이 넓었다. 장홍을 원소에게 보내 유우를 천자로 옹립하는 일을 도모하게 했다. 그러나 공손찬의 방해로 성사되지 못했다. 하지만 원소는 장홍을 인재로 보고 활용하기로 했다. 청주 자사 초화(焦和)가 죽자 장홍을 청주에 남아 다스리게 했다. 장홍은 원소의 믿음에 보답했다. 청주 재임 2년간 도적들이 모두 달아났다. 원소는 그의 재능에 감탄하여 동군 태수로 옮기고 동무양을 다스리게 했다. 장홍과 원소 사이의 ‘밀월’ 관계에 금이 가게 한 것은 조조였다. 조조가 옹구에서 장초를 포위하자 장초가 말했다. “오직 장홍을 믿을 뿐이니 분명 그가 와서 나를 구해줄 것이다.” 당시 조조와 원소의 관계는 한창 좋을 때어서 주변 사람들이 장홍이 오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자 장초가 말했다. “자원(장홍의 자)은 천하의 정의로운 선비이므로 끝까지 근본을 배반하지 않겠지만 단지 원소가 막아서 이곳에 도달하지 못할까 두렵네요.” 장초의 소식을 들은 장홍은 과연 맨발로 뛰쳐나와 통곡했고 군대를 이끌고 원소에게 가서 장초를 구하러 가기를 원했지만 원소는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장초는 결국 조조한테 멸족 당했다. 이 일을 계기로 장홍은 원소에게 원한을 품고 절교하기에 이르렀다. 원소는 군대를 일으켜 장홍을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 해를 넘기도록 함락에 실패하여 원소는 장홍과 같은 고향 친구인 진림으로 하여금 편지를 써서 저항과 항복 경우의 이해득실을 알려주었으며 은덕과 도의로 장홍을 꾸짖었다. 서신을 받은 장홍은 죽을지언정 투항할 의사가 꼬물만치도 없다는 답장을 보냈다. 장홍의 태도가 완강하게 나오자 원소는 병력을 증가하여 거센 공격을 감행했다. 시간이 하도 많이 흘러 성안의 양식이 다 떨어졌고 바깥의 구원도 받지 못하자 장홍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음을 알고 관리와 병사들을 불러 모으고 솔직하게 말했다. “원씨(원소)는 도의가 없고 알을 도모할 때 원칙도 없으며 또 군장(장초)을 구하지도 않았소. 나 장홍은 대의를 위해 하는 수 없이 죽으나 여러 분은 아무 관련도 없이 공연히 이런 화를 만나게 되었음을 유념하시오! 성이 함락되기 전에 처자를 데리고 탈출하시오.” 장군, 관리, 병사, 백성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명공께서는 원소와 본래 원한이 없었으며 지금은 우리 군수와의 인연 때문에 스스로 이런 파멸과 곤궁에 이르렀는데 저희가 어떻게 차마 명공을 버리고 떠날 수 있겠습니까?” 먹을 것이 다 떨어져 처음에는 다들 쥐를 잡아 죽순을 삶아서 먹었으나 나중에는 더는 먹을 게 없었다. 주부(主簿)가 내주(內廚)를 열어 쌀 서 말을 꺼내 와서 절반을 나눠 죽을 끓이고 장홍에게 조금씩 먹이려 하니 장홍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것을 나 혼자 먹으면 어찌하겠는가?” 장홍은 죽을 모두에게 나눠 먹이고 그의 애첩까지 죽여 장사(將士)들을 먹였다. 장사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얼굴을 쳐들고 바라볼 수도 없었다. 결국 남녀 모두 7천~8천 명이 서로 베고 죽었으며 성을 떠나거나 배신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당시는 애첩을 잡아 부하들에게 먹인 것이 살인죄는 고사하고 미담으로 찬사를 받을 일이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성이 함락되자 원소는 장홍을 사로잡았는데 워낙 장홍을 좋아하다보니 살려주기로 하고 사면하여 활용하려고 했다. 그런데도 장홍은 기어코 항복하지 않자 결국 죽이고 말았다. 이 때 장홍의 고향사람이자 열렬 팬인 진용(陳容)이 나서 말했다.“장군은 큰일을 일으켜 천하를 위하여 포악한 사람을 제거하려 한다면서 오히려 충성스럽고 정의로운 사람을 먼저 죽이니 어찌 하늘의 뜻에 부합하겠소? 장홍이 군사를 일으킨 것은 군장(장초)을 위한 것인데 어째서 그를 죽이는 것이오?” 원소는 결국 진용도 죽이고 말았다. 그 장소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탄식했다.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충성스런 선비를 둘씩이나 죽이는가?” 원소는 그릇이 작기 때문에 결국 큰일을 도모하지 못하고 조조에게 패해 생을 마감했다. 후세 사람들은 장홍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평가를 내렸을까? 중국 고사성어에 이런 말이 있다. 군자는 ‘능굴능신(能屈能申)’ 할 줄 알아야 한다. 뜻인즉 굽혀야 할 때는 굽히고 펴야 할 때는 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이런 말이 있다. 군자는 ‘감당할 줄도 알아야 하고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拿得起, 放得下).’ 아무리 의리를 중히 여기는 관우도 조조에게 잡혀 있을 때 공을 세우는 조건으로 떠나는 길을 선택하여 후일을 도모하기로 했다. 이런 행위를 두고 ‘능굴능신’이라 하고 감당할 줄도 내려놓을 줄도 아는 군자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장홍은 굳이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애첩까지 죽이고 그를 따르던 7~8천 명의 목숨까지 잃게 한 것이 과연 현명한 처사인가, 새삼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장홍은 의리의 사내임에는 틀림없지만 앞에 ‘바보스런’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바보스런 의인의 아이콘’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주고 싶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10-28
  • 국가의 결심, 인민의 호응과 단결 - 코로나 19 전승의 촉매제⑨
    ▲사진은 4월 18일, 헤이룽장성 수분하 시(黑龙江绥芬河市) 도시입구에서 사업일꾼들이 정보검증을 하고 있는 장면이다. (전번 계속)2020년은 중국에서 빈곤탈퇴 공략 결전의 해였고 초요사회를 전면 건설하는 결승의 해이기도 했다. 그러나 돌연적으로 기습해온 코로나 19는 중국의 경제사회발전에 전대미문의 충격을 갖다 주었다. 그럼 어떻게 통일적으로 코로나 19를 예방 통제하는 것과 경제사회 발전을 잘해 내는가 하는 것은 하나의 난제로 되는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코로나 19 예방 통제의 관건 적 시각, 중국공산당 중앙은 인민을 중심으로 하는 과단한 포치를 강행 ㅡ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의료진, 가장 선진적인 설비와 가장 긴급 수요 되는 자원을 집중하여 전심전력으로 제 1선을 지원했다. 전국이 동원되고 전민이 참여, 연합방지 연합통제로 집단 예방, 집단 퇴치하여 가장 엄밀한 예방통제 시스템을 구축했다. 광범한 인민 대중들은 총체를 인식, 전반 국면을 관심하면서 자각적으로 코로나 19와의 예방통제란 대 국면에 배합하여 전염병 예방통제의 강대한 저변의 역량으로 되었다. 경제사회란 하나의 순환시스템으로 장기간 정지상태에 머물 수는 없는 것이다. 해답의 관건은 시간과 추세의 상황에 따라 정확하고도 명중률이 높게 책략을 실행하는 것이었다. 2월 3일, 코로나 19 예방통제가 가장 힘든 시기, 시진핑 총서기는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주최하면서 “코로나 19가 특별히 엄중한 지구에서는 정력을 집중하여 예방통제사업을 잘 해야 하고 기타 지구에서는 예방통제사업을 잘하는 동시에 개혁발전과 안정 등 각항 사업을 잘 해야 하는바 특히 전면적인 초요사회를 건설하는 사업과 관련된 중점 임무를 적극 완성해야 하며 절대 늦추거나 기다린다는 사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라고 지적했다. 후베이 보위 전과 우한 보위 전(湖北保卫战、武汉保卫战)에서 하나 또 하나의 보루가 공략되면서 코로나 19의 만연추세는 초보적으로 억제되기 시작했다. 2월 21일, 시진핑 총 서기는 재차 중앙 정치국회의를 주최, 코로나 19 예방통제와 상응하는 경제사회 운행시스템을 건립할 것을 요구, 명확한 코로나 19 만연 상황에 따라 구역을 획분 하는 표준을 제정하도록 하였다. 당일, 중국 국가발전개혁 위는 중국의 마스크 단일 생산량이 연속 쾌속 증장, 일반 마스크와 N95 마스크 생산량이 모두 1억 개 라인을 돌파했다고 선포하였다.2월 23일, 베이징의 인민대회당 동쪽 대청- 당일, 참가자가 17만 명에 달하는 방대한 규모의 TV 전화 회의가 열렸으며 시진핑 총 서기는 현 급에 이르기까지의 코로나 19 예방통제 책략에 대하여 세절 적으로 언급했다. “코로나 19의 저 위험지구에서는 하루 속히 예방통제책략을 외지유입 방지에 돌리고 생산과 생활 질서를 전면 회복해야 하고 중 위험지구에서는 예방통제형세에 따라 질서 있게 일터회귀와 생산회복을 해야 하며 고 위험지구에서는 계속 정력을 집중하여 코로나 19의 예방통제사업을 철저히 잘 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중화민족은 수많은 좌절을 겪어왔지만 종래로 굴복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좌절 속에서 더욱 용감해졌다.” 시진핑 총 서기의 연설을 지축을 울리는 듯 박력이 있었다. 이어 “점 대 점 원스톱(点对点、一站式)” 형식으로 된 직통수송 봉사로 농민 공 일터복귀, 대졸생의 취업, 재정세수와 금융, 사회보험 정책의 중소기업 지지하기 그리고 중대 외자항목 낙착하기 등에 대해 시진핑은 구체적으로 포치했다. 봄 파종 철이 다가오자 시진핑은 전문 춘계 농업생산사업에 대해 포치하면서 위험과 도전에 직면할수록 더욱 농업을 안정시키고 식량과 중요 부식품의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3월 2일, 충칭 시 위베이 구의 어느 한 기업에서 의료용 N95 마스크 포장 직장에서 작업하고 있는 장면이다. 3월 6일, 중국공산당 제 18차 당 대회 이래 규모가 가장 큰 빈곤탈퇴 공략회의가 TV 전화 회의 형식으로 열렸고 시진핑 총 서기가 드디어 돌격명령을 내렸다. “2020년까지 현행 표준으로 된 농촌빈곤인구가 전부 빈곤에서 벗어나는 것은 당 중앙이 전국인민들에게 정중하게 승낙한 언약이다. 우리는 반드시 기한 내에 이 승낙을 실현해야 하며 여기에는 그 어떤 후퇴거나 유연성이 있어서는 안 된다.” 위험과 도전이 클수록 견정불이하게 자기의 일을 잘해야 한다.    코로나 19의 발생 후 일부 국가에서는 중국에 있는 자국교민들을 철수하고 중국과의 국제항공편을 중단했으며 중국의 선박에 대해 관제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환절은 주동적으로 변혁을 꾀하고 포위망을 뚫고 자구책을 강구해야 했다. 이는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전 지국적인 공급 고리와 산업 고리의 안정을 위해서도 거대한 기여를 해야 했다. 3월 9일, 미중무역 전국위원회는 다국적 회사들을 향해 일터복귀와 생산회복 커뮤니케이션 핫라인(沟通热线) 긴급구조를 요청, 세계 최대의 원심 과급기(涡轮增压器) 제조기업인 게렛 회사가 생산중지 위험에 직면, 중국 텐진 우칭(天津武清)의 한 핵심부분품 공급 상의 생산회복이 10%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러자 3월 11일, 중국 국가 발전개혁 위는 즉시 조정하여 우칭 구 구장으로 하여금 기업을 찾아가 현장 조정회의를 소집하여 해결방안을 모색하도록 하여 직원 5000여 명이 일터에 나서게 했으며 생산회복이 70%에 도달, 원심 과급기 및 소속 자동차 기업의 산업 고리가 생산중지에 이르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2월 하순, 여러 갈래의 국제 항공편이 운행을 회복했고 3월 말까지 중국 - 유럽행 화물차가 1941호가 운행을 재개, 그 전달에 비해 15% 증장했고 4월 14일까지 중국 전국적으로 규모 이상 공업기업의 평균 가동률이 99%에 도달했으며 4월분 규모이상 공업생산 증가 데이터와 수출량은 마이너스로부터 플러스로 전환되었다…… 코로나 19 대응 형세가 적극 호전되자 시진핑 총 서기의 발걸음은 저장(浙江), 산시(陕西), 산시(山西) 등지로 돌려져 지역 특정에 알맞게 일터복귀와 생산회복, 빈곤탈퇴 공략 전 그리고 생태환경 보호 상황 등을 고찰하기에 이르렀다…… 3월 29일 오후, 저장 닝보 저우산 항 촨산항구(宁波舟山港穿山港区) 부두에는 봄비가 보슬보슬 내렸다. 시진핑 총 서기는 우산을 든 채 멀리 바라보았다. 눈앞의 광활한 수역은 1년 간 드나드는 대형 상업운수선이 4.2만 척으로 명실에 부합되는 ‘골든 수로(黄金水道)’였다. 코로나 19가 발생 이래 닝보 저우산 항은 거의 그 운행을 멈춘 적이 없었다. 3월 1일부터 26일까지 화물 토출 량(货吐量)과 컨터이너 토출 량은 각각 지난해 동 시기의 95%와 99%가 되었다. 시진핑 총 서기는 비 내리기 전에 창문을 수선해야 하듯이 경외 코로나 19 사태를 주시해야 하고 코로나 19의 예방 통제 사업을 틀어쥐는 동시에 각국들에서 코로나 19 때문에 각항 제한조치가 화물항운에 갖다 주는 영향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코로나 19가 많은 나라에서 만연할 때 중국의 지도자들은 여러 차례에 거쳐 세계의 공급 고리와 세계경제의 안정을 수호할 데 관해 견정한 입장을 표하였다. “중국은 계속하여 적극적인 재정정책과 온건한 화폐정책을 실시하여 견정불이하게 개혁개방을 확대하고 시장 진입을 풀어줌과 동시에 지속적으로 상업경영의 환경을 최적화하여 수입과 대외투자를 적극 확대하는 것으로 세계경제의 안정을 위해 기여를 할 것이다.” 이는 3월 26일, 온라인으로 거행된 20개 국 그룹 지도 인들이 참가한 코로나 19 대응 특별 정상회의에서 한 시진핑 총 서기의 승낙이었다. 4월 17일, 중국은 제 1분기의 경제데이터를 공개했다.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1분기 중국경제는 6.8% 하강되었다. 하지만 3월에 들어서는 주요 경제지표의 하강 폭이 현저하게 좁아졌으며 경제가 한창 소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일, 시진핑 총 서기는 자신이 주최한 중앙 정치국회의에서 목전의 경제발전은 전대미문의 도전에 직면했다고 하면서 반드시 애로, 위험과 불확실성에 대해 충분히 미리 예특하고 긴박감을 절실히 감안하면서 경제사회 발전의 각항 사업을 잘 틀어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위성영상을 보면 지난 4월 초, 중국의 야간 등불 밝음도는 2월 초에 비해 200%에 접근, 명멸하는 야간의 등불은 소생하는 야간소비의 상징이었고 연장작업을 하는 제조업 직장의 조명이었다…… 위성의 위치추적 시스템에 따르면 3월 9일 성과 성 사이를 잇는 화물운수 라인은 2월 9일의 300%에 달했고 갈래 갈래의 강력한 곡선은 ‘원료공급이 충족하고 산품출고가 막힘이 없음’을 그려내기도 했다…… 4월 22일, 중국의 베이징, 광둥의 후이저우(广东惠州), 미국의 댈러스의 양국 세 개 곳에서는 5G 영상 방식으로 총 투자 100억 달러에 달하는 엑슨 모빌 후이저우 에틸렌 항목이 착공되었음을 선포하였다. 이는 미국기업이 중국에서 독자적으로 건설하는 중대 석유화학 항목이었다. 통일적으로 코로나 19 예방 통제와 경제사회 발전을 효과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중국은 세계경제를 위해 동력에너지와 따뜻한 색채를 주입하였던 것이다.(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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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28
  • 한국 재계의 거목 ‘故 이건희 회장’을 기리며
    ●이치수(사단법인 세계언론협회 회장)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5일 향년 78세로 타계했다. 2014년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져 투병해온 지 6년 만이다. 고 이건희 회장은 32년간 삼성(三星)을 사명에 걸맞게 가전과 모바일, 반도체 부문에서 글로벌 1위로 올리며 세 개의 별을 만들었다. 2006년 글로벌 TV 시장을 장악했던 일본 소니를 제치고 1위로 앞섰고, 미국 애플의 막강한 기세마저 꺾은 채 스마트폰 시장 1위를 차지했다. 이어 메모리 반도체 부문까지 ‘삼성’의 이름을 전 세계에 각인시킨 채 20여개 품목에서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으로 우뚝 솟았다. 삼성그룹의 초석을 다진 이병철 회장에 이어 46세에 그룹을 승계한 이 회장은 혁신과 성공을 강조하며 저력을 발휘해 왔다. 삼성전자 임원들에게 ‘바꾸려면 철저히 바꿔야 한다. 극단적으로 말해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어록을 남길 만큼 기업의 이미지를 결정하는 품질과 디자인의 가치, 인재를 중심으로 한 경영가치를 강조했다. 특히 2002년 6월 인재 전략 사장단 워크숍에서 이 회장은 "200∼300년 전에는 10만∼20만 명이 군주와 왕족을 먹여 살렸지만 21세기는 탁월한 한 명의 천재가 10만∼20만 명의 직원을 먹여 살린다"라고 했다. 이 회장의 이러한 경영철학은 국내•외 임직원 50만 명을 거느린 삼성으로 사세를 확장하며 전 세계에 맹위를 떨치는 기업으로 가시화시켰다. 이 회장은 1987년 1조원이던 삼성의 시가총액을 2012년에는 390조 원대로 성장시켜 총 자산 500조 원으로 일구어냈다. 그야말로 짧은 기간 동안 기업을 초일류로 탈바꿈해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다. 삼성을 통해 한국을 고부가가치 첨단산업의 산업구조를 가진 기지로 변모시킨 이 회장이지만 사업 과정에서 불거진 정경유착 논란과 무노조 경영 등은 과오로 남았다. 이 회장은 삼성비자금 사전과 관련해 특검 조사 이후 배임 등의 혐의로 기소되어 2008년 경영일선의 퇴진과 전략기획실 해체 등을 선언했다. 이후 대통령의 단독 사면을 받고 2010년 경영일선에 복귀해 다시 한 번 대한민국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삼성의 재도약이 이어진다. 삼성 성공의 신화에 따르는 공과는 이제 이재용 부회장이 짊어질 시대적 사명이 되었다. 사실상 이 회장이 와병상태로 지낸 6년 동안 이 부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선대의 사업을 도맡아 추진했다. 할아버지 이병철 회장과 아버지 이 회장의 업적과 과제를 이어받는다는 건 단순한 부회장으로서 전면에 나서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일이다. 특히 이 부회장은 코로나19 펜데믹으로 불어닥친 전 세계적인 경제 불황 속에서 이 모든 불확실성을 해결해야 한다. 이 부회장은 2016년 국내 인수합병(M&A) 최대 금액인 9조원을 투입해 미국의 자동차 전자장비(전장) 전문기업 '하만'을 인수했다. 2018년에는 '180조원 투자 4만 명 채용'을 목표로 AI•5G•바이오•전장부품 사업을 미래 성장사업으로 보고 투자에 나섰다. 지난해에는 '2030년 시스템반도체 세계 1위'의 비전을 발표하며 133조원을 투자를 선언했고, 차세대 프리미엄 TV 시장의 기술력 강화를 위해 세계 최초로 'QD(퀀텀닷, 양자점 물질) 디스플레이' 투자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올해에는 삼성전자와 삼성디스플레이 사업을 위해 네덜란드와 베트남 등 출장업무를 이어가며 경영 과제를 발 빠르게 해결해나가고 있다. 이 부회장이 해결해야 할 중요 당면과제가 있다. 그의 앞날에는 2016년부터 약 4년간 매달려온 사법리스크가 여전히 존재한다. 이 부회장은 삼성물산-제일모직 불공정 합병과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부정을 주도한 혐의로 지난 22일 기소되어 재판 과정을 앞두고 있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과 관련된 파기환송심은 오는 26일 재판이 재개된다. 코로나 19 팬데믹과 미•중 무역전쟁 영향으로 경제 성장의 불확실성이 매우 커진 상황이다. 이때 대한민국 경제의 축을 견인하는 삼성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는 매우 클 수밖에 없다. 글로벌 지각변동 속에서 이 부회장의 경영공백은 세계 반도체산업을 주도하는 삼성의 행보를 늦추고 향후 몇 년간 떠안아야 할 사법적 리스크는 거액의 투자와 인수합병 추진 과제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 재판과정은 법리 검토를 최우선으로 삼되 합리적인 판단이 신속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더불어 삼성의 초고속 성장으로 미처 강화하지 못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경영의 투명성은 반드시 모든 국민의 눈높이에 맞게끔 정비해야 한다. 나라가 부강해지는 것은 상생과 합리적인 경영 철학을 실천하는 기업이 늘어날수록 실현되고 더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로 창사 82주년이 되기까지 삼성을 있게 한 고 이건희 회장의 유익한 가치를 우리 사회가 조명하고 널리 알려 발전해 나갈 수 있는 미래의 토양이 되기를 바란다. 삼가 조의(弔意)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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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20-10-26
  • 한국전쟁 70주년, 숫자로 되돌아보는 6·25
    ●철 민 금년 10월 25일은 중국군의 압록강을 넘어 한국전에 뛰어든 지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일전,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70년 전 중국군이 한국전에 참가하게 될 당시의 미국과 중국의 경제적 대비, 미군과 중국군 사이의 역량 대비를 하면서 쌍방 간의 현저한 역량 적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군이 압록강을 넘어 한국전에 뛰어들었고 또한 미군을 38선 부근까지 밀고 내려간 원인과 요소 등을 분석하면서 이를 통해 현재 제멋대로 거들먹거리며 중국을 비방하는 미국에 뭔가를 암시했다. 그럼 아래에 한국전 당시 미군과 중국군 사이의 역량 대비를 살펴본 다음 필자의 일가견을 피로해보기로 하자. 1950년 한국전이 발발하자 미군은 며칠 내로 참전했고 중국군 즉 중국인민지원군은 그 해 10월 19일부터 압록강을 넘어서기 시작했으며 10월 25일부터 정식으로 미군 및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과 교전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은 철두철미한 세계 제1의 강대국이었고 중국은 건국된 지 만 1년밖에 안 되었으며 거기에 폐허 속에서 갓 일떠서기 시작한 공화국에 불과했다. 그래서일까? 이 전쟁은 전 세계 모든 군사전문가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당시 미국과 중국, 미군과 중국군의 역량 대비를 보면 너무나도 현저했다. 국민생산 총액(GDP) 15 : 1 1949년 미국은 제2차 공업혁명을 완수하면서 국민생산ㅊ총액이 약 2700억 달라가 되었지만 갓 건국된 중국의 국민생산 총액은 180억 좌우밖에 되지 않았다. 강철 생산량 146 : 1 1950년 미국의 강철 생산량은 8772만 톤이었고 공업 총 생산치는 서방세계의 50% 이상을 차지했지만 1950년 중국의 강철 생산량은 61만 톤으로 미국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안 되었다. 알곡생산 대비 1.4 : 1 미국과 중국의 인당 알곡생산 대비는 5 : 1 이었다. 1949년 미국의 알곡 생산량은 1억 5740만 톤으로 인당 평균 생산량은 약 1000킬로그램에 달했지만 1949년 중국의 알곡 생산량은 1억 1318만 톤으로 인당 알곡 생산량은 약 208 킬로그램 정도에 불과했다. 군사력 대비 공군 비행기 대 수 대비 3.6 대 : 1 한국전쟁 당시 미군은 가장 최신식인 분사식 전투기 F - 86을 사용했으며 경상적으로 전투에 투입된 전투기 대수는 1100대에 달했다. 하지만 중국군은 참전 초기 공군은 공백이었고 후에 소련의 지원으로 무장한 작전 기 역시 300대 미만이었다. 해군 대비 100 : 0 2차 대전 후 미군은 항공모함과 항공모함 호위함 근 100척을 갖고 있었고 항공모함을 호위하는 편대가 20여 개가 있었지만 당시 중국군은 배수량이 1만 톤을 초과하는 군함은 1척도 없었고 한국전에 참가한 해군함정은 더욱 없었다. 기계화 부대 대비, 1000 : 0 한국전쟁 당시 미군은 1000여 대의 탱크를 투입하고 지면부대 전부가 기계화 혹은 오토바이 부대였으나 중국군 초기 입조한 6갈래 부대는 1대의 탱크도 없었고 후기에 와서야 기계화 부대 영이던 국면이 결속되었다. 보병 무기 대비 한국전 당시 미군은 말 그대로 ‘발톱까지 무장’한 부대로 주요 보병 무기로는 갤런트 M 1 반자동 소총 등으로 모두 2차 대전 시기의 중, 경무기 걸작으로 성능이 우수하고 믿음직했으며 아울러 공급도 아주 충족하였다. 하지만 당시 중국군의 주요 무기 내원은 여전히 전쟁에서 노획하는 것, 수량 상 중국군은 매 군단 급에 70밀리 이상의 포가 190문으로 미군 1개 사단의 50%밖에 되지 않았다. 복장 대비 한국전에서 중국군과 접전 당시 미군은 보온 성능이 좋은 방한모에다 양털 내의와 바지를 착용했으며 겉옷 또한 두꺼운 외투 같은 것을 입었는가 하면 갓 연구개발에 성공한 방탄조끼까지 껴입은 상태였다. 하지만 중국군은 선두 부대는 창졸하게 압록강을 넘은 남방 부대이다 보니 방한장비가 엄청나게 부족, 입은 옷들이 얇은 탓에 장진호 전투 중에서 대량의 동상자 및 동사자가 출현했으며 보급이 정상화된 후에도 중국군의 옷 장비는 면 상의와 면 하의가 위주로 된 차림이었다. 식물 보급의 대비 한국전에 참가한 미군의 식품은 신선한 육류와 야채 그리고 초콜릿, 과자, 코카콜라 등이었다. 미군은 육류, 계란 ‧ 우유 류가 공급이 충족하였고 거기에 담배, 사탕 등도 정기적으로 공급되었다. 반면에 중국군의 주요 식품은 볶은 미시 가루, 볶은 콩 혹은 콩 등이었고 그마저도 공급이 두절될 때가 많았으며 도한 눈으로 물을 대신하고 들나물로 기아를 달랠 때도 있었다. 군사적으로 볼 때 사람들은 늘 중국군은 ‘좁쌀에 보총’으로 무장한 군대로서 실제상에서는 그 ‘좁쌀’도 공급이 충족하지 못할 때가 많았고 그 ‘소총’ 또한 부동한 연대의 부동한 유형으로 구성된 것들이었다. 그럼 ‘자기들밖에 없노라’고 뽐내는 미국과 가난하기를 ‘백지밖에 없는 중국’ ㅡ 그렇다면 중국군은 어떻게 되어 감히 출병하여 조선을 도와 미국과 싸울 수 있었을까? 그것은 사악과 귀신을 믿지 않는 대국의 기개였고 조국의 안전을 위해 이웃 국가를 지원하는 애국주의 정신의 표현이었고 평화와 정의를 위하는 국제주의 정신이었으며 영용 완강하고 승리를 위해 싸우는 혁명영웅주의 정신과 애로와 난관에 굴하지 않는 충천한 혁명 낙관주의 정신이었다. 위대한 항 미 원조의 정신은 반드시 중국인민과 중화민족을 격려하여 일체의 간난신고를 극복하고 일체의 강대한 적도 전승할 수 있다는 자신심을 심어주고 있었다고 중국은 자평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70년 전 한국전쟁의 승패를 두고 많은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전쟁 당사자들인 남과 북은 서로 자기네들이 승리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중국 또한 미국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주장이며 이에 미국은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이는 이기지 못했다는 것을 묵인하는 셈으로 해석된다. 왜냐하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시 유엔군 측 수석대표 해리슨 장군은 “미군이 승리하지 못한 협정에 조인해 보기는 처음”이라고 말한 것이 충분히 미국 측의 주장을 대변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럼 당시 어느 측이 승리하고 어느 측이 패했는가?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쟁 초기, 즉 1950년 6월 25일부터 9월 초까지는 한국군과 유엔군이 인민군한테 패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지리상 38선에서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갔으니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수가 없으며 그 뒤 유엔군과 한국군에 의해 인민군이 38선을 내주고 압록강까지 쫓겼을 때를 보면 인민군이 미군(유엔군)과 한국군에게 패했다고 할 수 있는 것 또한 충분한 사실적 근거이다. 그렇다면 그럼 중국군은 미군과 맞다들어 패했는가 아니면 승리했는가? 이를 두고 많은 군사전문가들은 “승자도 패자도 없다”라고 분석했다. 일리가 없는 건 아니다. 한국전 총체를 볼 때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보면 중국군은 압록강으로부터 미군을 내밀기 시작하여 한 달 여 만에는 경기도 평택 즉 38선을 넘어 37도선 부근까지 쳐 내려갔다. 그리고 1951년 3월 유엔군의 재 반격으로 후퇴하기는 했으나 전선은 38선 부근으로 거의 고착상태로 되어버렸다. 하긴 1953년 정전협정에 이르기까지 이 전선에서는 밀고 밀리는 시소게임(拉锯战)은 자주 있었으나 그 대치적 위치는 큰 변동이 없었다. 그러니 “승자도 패자도 없다”는 군사전문가들의 분석이나 “미군과는 승리한 전쟁”이라는 중국의 주장 모두가 일리가 있으며 틀리지는 않았다는 일가견이다. 그리고 이기고 지고 하는 설전보다는 ‘좁쌀에 보총’인 중국군이 세계 최강대국인 미군과 감히 싸울 수 있었다는 것이 중요하며 또한 승리했다기보다는 패하지 않았다는 것이 중국한테 있어서는 승리한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분석이다. 다음, 한국전을 통해 한반도 남북과 미국, 중국과 소련 등 각 측이 얻어진 것과 잃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 즉 이익을 본 측과 손해를 본 측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우선 전쟁의 당사자인 남과 북을 놓고 말해보자. 1950연대의 한국전에서 한반도 남과 북은 잃은 것은 엄청 많으나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북 3000천리에 잿더미만 남았고 1000여만 명의 이산가족과 300여만 명의 희생자 그리고 수많은 미망인과 고아가 생겼다. 얻고자 하던 통일은 이루지 못하고 분단의 골은 더욱 깊어져만 갔으며 남과 북은 서로가 상대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날카로워지기만 했다. 또한 그 전쟁은 동서방의 힘을 겨루는 전쟁터를 한반도가 제공한 셈으로 됐으며 그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측은 남과 북이었으나 서로가 이겼다면서 자축하는 분위기였다. 특히 북에서는 이른바 7월 27일을 전승의 날로 규정하면서 ‘전승 절’ 기념행사를 해마다 대대적으로 거행하고 있는 양상이다. 참으로 가소롭고 어이가 없으며 심지어 불쌍하다는 감까지 든다. 이어서 미국과 중국이다. 이 전쟁에서 미국이나 중국 모두가 막대한 대가를 치렀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을 볼 때 쏟아붓은 달러도 막대했지만 정치와 외교 적으로는 꼬물만큼의 이득도 없었다. 그리고 그 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처음으로 ‘이기지 못한 전쟁’을 치르기 시작, 이어서 20여 년 뒤엔 베트남 전에서도 전쟁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베트남에서 철수하는 ‘제1의 강대국’ 답지 못한 양상을 출연했다. 그리고 한국전에서 중국 역시 막대한 대가를 치렀지만 장진호에서 ‘승전만을 거듭했다’는 미 해병사를 만신창으로 되게 만들었다. 그것은 상대가 한국군도 다른 유엔군도 아닌 미 해병사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었으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한국전을 계기로 세계의 많은 군사전문가들은 중국의 군사력을 재평가하기 시작했고 중국은 공산진영의 새로운 리더로 자리매김을 하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이 외 소련을 볼 때 많은 전쟁 물자를 지원했지만 다른 대가는 거의 없는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소련은 미국의 역향력이 유럽 쪽에 지나치게 집중되는 걸 와해시키는 것과 동서방의 군사균형을 이루게 하는 목적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었다. 전쟁은 그 어떤 나라도 바라는 것이 아니다. 한반도 남과 북이 그런가 하면 미국이나 중국도 마찬가지라고 판단된다. 전쟁을 치르고 상대를 무너뜨리자면 자신 역시 어느 정도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쟁은 가끔씩 일어난다. 그리고 세계의 많은 전쟁은 미국과 연관되고 있다. 미국이 직접 참여하지 않으면 전쟁을 일으키도록 다른 나라들을 꼬드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최근 들어 미국은 또 이것저것 트집을 잡으며 중국을 헐뜯고 있다. 코로나19 때문에 중국을 비방하고 또한 이른바 인권, 환경 등을 두고도 중국에 모든 죄명을 들씌우고 있다. 이 외에도 이른바 ‘미국 우선주의’를 떠들면서 일방주의를 주장하면서 모든 나라 특히는 중국을 배척하고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객관적 요인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미국은 잘못 판단하는 것 같다. 세계의 모순과 갈등을 전쟁으로 해결하는 시대는 이미 지난 지 오래된다. 그리고 미국은 중국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즉 중국의 왕의 외교부장이 언급하다 싶이 중국은 100여 년 전의 중국이 아닌 것이다. 미국은 판단착오를 잘 범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맥아더가 중국을 아주 우습게 보는 판단착오를 범했다면 현재 미국의 정계 인물들인 트럼프, 폼페이오 등이 한심한 판단 착오를 범하고 있는 것 같다. 미국이 계속 판단 적 착오를 고집한다면 70년 전의 장진호만이 아닌 더 많고 더 가혹한 장진호가 열 개, 스무 개 아니, 백 개도 나타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는 지금 강대해진 중국이 거만한 아메리카에 보내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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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25
  • '삼국지' 재해석⑨ 배신의 아이콘 여포
    ●김정룡(다(多)가치 포럼 위원장) 난세의 장수는 용(勇), 지(智), 덕(德) 등 세 가지 기질을 갖추어야 훌륭한 장수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세 가지를 다 갖춘 장수는 삼국시대에 조조나 유비 밖에 없을 만큼 매우 드물다. 삼국정립 전 수많은 강호의 장수 중에 무예가 가장 뛰어난 장수는 여포이다. 여포는 무예가 가장 뛰어난데다 인물 또한 잘 생기기로 요명했다. 힘이 세기로 정평이 나 있는 관우나 장비는 키꼴이 장대한데다 얼굴이 구운 수수떡처럼 검붉어 힘이 펄펄 넘쳐나 보인다. 동탁도 무예가 뛰어나기로 유명한데 얼굴형이 사나워 사람을 겁나게 한다. 이들에 비하면 여포는 키도 장수치고는 큰 편이 아니고 얼굴이 미남형인데다 피부색 또한 희어서 여성들이 좋아할 이상형이다. 보통 이런 생김새를 갖고 태어난 사내들은 힘이 부족해서 유명한 싸움꾼이 될 수가 없지만 여포만은 예외였다. 여포는 활쏘기와 말 타기에 능숙했고 남보다 힘이 세서 자신을 비장(飛將, 한 무제 때 명장 李廣은 궁술과 마술에 뛰어나 당시 흉노들은 그를 ‘비장군(飛將軍)’이라 부르고 두려워했다. 여포는 자신을 이광에 비유한 것)이라 불렀다. 진수의 <삼국지> 여포전에 의하면 하진이 죽고 동탁이 궁에 도착했을 때 정원(丁原)이 실세였다. 동탁은 정원을 죽이고 그의 군사를 손에 넣으려고 했는데 정원에게는 천하제일 싸움꾼인 여포가 있어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정원이 병주에서 벼슬할 때 여포를 출세시켜 여포에게는 정원이 인생의 은인이었다. 소설 <삼국연의>에서는 정원과 여포는 부자관계를 맺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정원은 여포의 양아버지가 되고 여포는 정원의 양아들이 된 셈이다. 이 정도로 가까운 관계이니 동탁이 정원을 숙청하는데 있어서 여포가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포는 싸움에는 뛰어나지만 머리가 모자라 지혜롭지 못해 지장도 아니고, 덕이 부족해서 덕장도 되지 못한 용장일 뿐이었다. 이것이 그의 인생을 결정하는 주요 포인트로 작용했다. 무슨 말이냐면 동탁 진영에서 당대 최고의 전마(戰馬)인 적토마를 여포에게 주고 금은보화를 얹어 주는 조건으로 정원을 죽이게 했는데 눈앞의 하찮은 이익에 넘어가 그만 자신의 양아버지를 죽이고 동탁에게로 귀의한다. 포악무도하기로 끝이 없는 동탁은 황제를 갈아치우는 바람에 천하의 미움과 원한을 사게 되었고 물불 가리지 않고 무고한 백성마저 무리로 살해하는 바람에 전국적으로 반동탁연맹이 생겨났고 조정에서 사도 왕윤이 동탁을 살해하는 기획을 세운다. 소설 <삼국연의>에서는 동탁을 죽인 일등공신이 미녀 초선이라는 스토리를 그럴듯하게 그려냈다. 소설에 의하면 초선은 사도 왕윤의 양녀다. 즉 왕윤이 좋아한 기녀의 사생아인데 어미가 일찍 죽자 왕윤이 양녀로 키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명문가문에 입양된 초선은 어릴 때부터 공부도 하고 비파를 타고 춤과 노래는 물론이고 시까지 지을 만큼 지적으로 성장한 처녀였다. 초선의 용모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후대의 중국인은 초선을 역대 4대 미녀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 4대 미녀들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당시에는 사진이라는 존재가 없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가 없지만 그녀들을 비유한 전설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춘추시대 월나라의 서시(西施)를 본 물고기들이 수영하는 걸 잊고 강바닥에 가라앉았다고 한다. 한나라의 왕소군(王昭君)을 본 기러기들이 날갯짓을 멈춰 떨어졌다고 하고, 당나라 양귀비가 꽃을 만지자 꽃마저 부끄러워 잎을 말고 감추었다고 한다. 초선에 대한 일화도 이 세 미녀에 뒤지지 않는다. 하루는 초선이 화원에서 달을 보고 있는데 구름 한 조각이 달을 가렸다고 한다. 이 모습을 지켜본 아버지 왕윤이 찬탄을 금치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달조차도 초선을 보니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는구나. 과연 폐월(閉月)이로다.” 이 4대 미녀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가 현재 중국인의 입에 자주 회자되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서시, 왕소군, 양귀비는 역사인물인데 비해 초선은 역사인물이 아니고 문학이 각색해낸 상상속의 인물이다. 역사에 존재하지도 않은 초선을 4대 미녀 반열에 올려놓았으니 나관중이란 작가가 얼마나 위대한지 새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당대에 있어서 잘 생기고 무예가 가장 뛰어난 사내에게 여러모로 걸 맞는 상대 여성을 그려내려면 천하제일 미녀였던 것은 이해가 충분히 가는 일이다. 나관중의 <삼국연의>가 고전 소설 중에 가장 많이 읽힌 이유가 강호의 영웅들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잘 그려낸 것이 크게 한 몫을 했던 것이고 금상첨화로 초선이라는 미녀를 등장시킨 것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던 것이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포인트로 작용했던 것이다. 사서에 의하면 여포가 동탁을 죽인 것은 초선 때문이 아니고 동탁이 여포에게 안방 문을 지키게 할 만큼 신임했는데 그만 동탁의 여인을 건드려 불륜을 저지른 것이 들통 날까 두려워 전전긍긍 하고 있었다. 게다가 동탁은 여포를 믿으면서도 기분이 안 좋을 때 쩍하면 창을 여포에게 마구 던져 생명의 위험을 느낄 정도로 불안해 왕윤을 찾아 고충을 털어놓아 왕윤은 때가 왔다고 속으로 쾌자를 부르고 여포를 설득하기에 나섰다. 여포도 언제 불행이 닥칠지 몰라 왕윤과 사손서의 동탁 죽이기 기획과 의기투합이 되어 행동에 나섰던 것이다. 사실 왕윤이 여포에게 동탁을 살해하라는 주문을 했을 때 처음에는 여포가 많이 망설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포가 양아버지 정원을 죽이고 나서 동탁과 또 부자관계를 맺었기 때문이었다. “나와 그는 부자 관계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왕윤이 말했다. “당신은 성이 여씨(呂氏, 중국인은 남의 성 뒤에 氏를 붙이지 않는다. 이 대화는 한국 작가들의 버전에 등장한 것임을 밝혀둔다)이니 동탁과는 본래 골육이 아니지 않소. 그대는 언제 죽을지 몰라 근심하면서 무슨 부자 관계를 말하시오.” 여포는 이 말을 듣고 드디어 일을 도모할 것을 허락하고 칼을 들어 동탁을 찔러 죽였다. 여포는 인생에서 두 번이나 양아버지를 죽였다. 배신도 이런 배신이 천하에 또 있을까? 배신의 아이콘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살아가야 했다. 동탁을 죽이고 나서 세상이 여포의 천하였다면 그나마 괜찮았을 건데 동탁이 죽고 40여 일만에 궁에서 쫓겨나 유랑 길에 오르는 불행을 맞게 되었다. 여포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원술이었다. 그런데 원술은 받아주지 않았다. 여포는 할 수 없이 황하 북쪽에 있는 원술의 형 원소를 찾아간다. 여포는 원소를 도와 상산(常山)에 있는 장연을 공격했고 적토마를 갖고 있는 여포가 전장에서 얼마나 뛰어났는지 쉽게 상대를 격파했다. 승리 후 원소에게 군대를 늘려 줄 것을 요구하고 게다가 여포의 장수와 병사들이 약탈을 일삼자 원소도 여포를 두려워 기피했다. 눈치를 챈 여포가 원소를 떠나려 하자 원소가 후일이 두려워 자객을 보내 암살하려고 했는데 성공하지 못해 여포는 달아나 장양(張楊)과 합세했다. 원소는 병사들에게 여포를 추격하도록 명령했으나 다들 여포를 두려워하며 감히 가까이 다가가려는 자가 없었다. 흥평 원년(194)에 여포는 유비를 찾아가서 유비를 동생으로 삼기로 하는데 유비는 여포의 말이 일관성이 없어 겉으로는 받아주는 척하고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유비가 동쪽으로 가서 원술을 공격할 때 여포는 하비성을 습격하여 취했다. 유비는 돌아와서 할 수 없이 여포에게 귀의했다. 싸움에서 밀린 원술은 여포와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여포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여 사돈이 되고 싶어 했지만 여포는 과거에 받아주지 않은 복수를 하려고 거절했다. 조조는 여포를 어떻게 보았을까? 진등이 조조를 만났을 때 “여포 장군을 대하기를 마치 호랑이를 기르듯 해야 합니다. 호랑이는 고기를 먹어 배가 불러야지 배부르지 않으면 사람을 물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자 조조는 말하기를 “그대가 말한 것과 같지 않소. 비유하자면 매를 기르는 것과 같소. 굶주리면 솜씨를 발휘할 것이고 배부르면 날아가 버릴 것이오.” 난세에는 적도 아군도 임시적인 것으로서 그때그때 이익에 따라 이합집산이 이뤄진다. 어제 원수와 손을 잡을 수도 있고 오늘 동지가 내일 배신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건안 3년(198) 여포는 다시 원술과 힘을 합쳐 모반했다. 고순을 파견해 소패에 있는 유비를 공격하여 쳐부수었다. 조조는 하우돈을 보내어 유비를 구하도록 했으나 고순에게 패했다. 원술이 칭제를 자처하고 나서자 조조는 원솔을 공격한다. 그때 조조는 여포를 끌어들여 힘을 함께 하고자 하자 유비 삼형제는 게거품 물고 반대한다. 조조가 겨우 설득해서야 여포와의 협력, 즉 ‘적과의 동침’이 이뤄진다. 여포는 싸움에는 이골이 나 있으나 궁을 떠난 지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리 잡지 못해 여기저기 몸을 의탁하며 살았다. 아울러 머리가 모자라고 덕이 부족해 어디가도 환영을 받지 못했다. 건안 3년(198) 결국 조조가 직접 여포 정벌에 나섰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상책이다.’ <손자병법>에 있는 전략전술이다. 조조는 여포가 있는 성 아래 이르러 여포에게 편지를 보내 싸움과 항복의 이해득실을 설명해주었다. 여포가 투항하려고 하자 진궁 등은 자신들이 지은 죄가 깊음을 생각하여 그의 계획을 가로막았다. 여포가 싸움을 하려면 병력이 모자라 사람을 보내 원술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원술은 스스로 기병 1천 명을 이끌고 전쟁에 나섰다. 하지만 곧 패배하여 돌아가 성을 지키고 감히 나와서 싸우려 하지 않았으므로 원술 역시 여포를 구하지 않았다. 여포는 비록 날래고 용감했지만 계책이 없고 의심과 질투가 많아 부하를 통제할 수 없었으므로 단지 몇몇 장수만 믿었다. 그러나 장수들마저 저마다 의견이 달라 서로 믿지 않았으므로 싸울 때마다 대부분 크게 패배했다. 조조는 참호를 파고 포위한 지 석 달 만에 상하 간에 마음이 벌어져 장수 몇 명이 조조에게 투항했다. 여포는 직속 부하들과 함께 백문루(白門樓)에 올랐다. 군대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여포는 하는 수 없이 내려와 투항했다. 포승줄이 너무 단단하게 조여져 여포가 말했다. “너무 꽉 조이게 하지 말고 조금 느슨하게 묶으면 안 되겠소.” 이에 조조가 말했다. “큰 호랑이를 묶었으니 부득이 꽉 조여야 하지 않겠는가.” 여포는 마지막으로 요청했다. “명공(조조)께서 근심거리로 여기던 것 중에서 나 여포보다 더 지나친 것은 없었소. 이제 내가 항복했으니 천하에 근심거리가 될 만한 것은 없소. 명공이 보병을 거느리고 나 여포로 하여금 기병을 거느리게 한다면 천하를 쉽게 평정할 수 있을 것이오.” 이 때 곁에 있던 유비가 말했다. “명공께서는 이 자가 정건양(정원)과 동태사(동탁)를 섬기는 것을 보지 않았습니까?” 뜻인즉 여포는 양아버지 둘씩이나 죽인 인간인데 언젠가 명공(조조)을 배신할지 모를 일인데 살려두다니요. 말이 됩니까? 이 말을 들은 조조는 즉시 여포를 죽이라는 명을 내렸다. 잘생긴데다 무예가 뛰어나 세상의 주목을 받던 여포는 용장의 기질은 충분했지만 지장의 기질도 덕장의 기질도 갖추지 못해 천하를 누비며 달리고 달렸으나 아무 성과도 이루지 못하고 씁쓸하게 역사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10-21
  • 국가의 결심, 인민의 호응과 단결 - 코로나 19 전승의 촉매제⑧
    ▲4월 24일, 우한에 있는 화중 과학기술 대학 퉁지의과대학 부속 세허병원(同济医学院附属协和医院) 서원이다. 사진은 의무일꾼들이 핵산검사 결과 음성으로 돌아선 코로나 19 환자를 간호하고 있는 장면이다.ⓒ신화사 (전번 계속)후베이, 우한이 전국의 코로나 19 저격 대응의 주 전장이었고 단계성 승리를 이룩했지만 코로나 19의 잠재적 위협은 여전히 존재했으며 전국 곳곳이 직면한 전염병 예방 통제의 형세는 여전히 낙관할 수 없었다. 3월 27일, 1명의 무증상 감염자가 경외로부터 입국함에 따라 헤이룽장 성 수이펀허시(黑龙江省绥芬河市)의 고요를 깨뜨렸으며 수이펀허는 점차 전국의 ‘대외유입 예방’의 화이라이트(焦点)로 되었다. 각 지의 전문가와 의무일꾼들은 긴급 지원에 나섰고 방역물자 또한 신속히 조달되었으며 후베이에서 귀환했던 백의전사들이 재차 출정, 핵산검사실험실이 신속히 건립되고…이렇게 수이펀허 통상구를 통해 입경한 코로나 19 환자들은 적시적인 구급 치료를 받게 되었고 변경 선에는 한 갈래의 생명 수호선이 구축되었다. 5월 6일, 0시부터 수이펀허시 전염병 위험 등급은 하향 조정되었고 생산과 생활은 점차 그 질서를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폭풍우는 전진의 앞길을 막을 수 없었고 정확하고도 강력한 예방 통제의 대응조치는 코로나 19를 전승할 수 있었다. 수이펀허 외 수도 베이징(北京)의 급작스런 코로나 19 촉발 또한 인심 당황하게 했다. 6월 11일, 중국의 수도 베이징 신파디(新发地)에서 코로나 19가 집중 발생, 이에 베이징 시는 제 1의 시간대에 즉시 전시상태에 진입하면서 한 차례의 ‘반드시 이겨야 하고 져서는 안 되는 전쟁(只能赢不能输)’을 개시했다. 이 전쟁은 ‘물을 등지고 펼치는 싸움(背水之战)’이라 몹시 간고하고도 관건적인 전역이라 우한과 후베이에 이어 규모가 큰 코로나 19와의 한판 승부였다. 베이징의 의료진과 각 사회구역의 책임일꾼들은 단 시일 내에 코로나 19를 효과성 있게 박멸하여 당 중앙과 수도인민들을 지킨다는 사명감으로 신속하게 호응하여 강력하고도 정확하게, 높은 효율 그리고 과학적인 예방과 통제로 26일이란 짧은 기간의 간고한 노력을 통하여 7월 6일 베이징 본지의 코로나 19 사례가 ‘0 증장’으로 되게 만들었다. 7월 19일, 베이징시 정부 해당책임자는 코로나 19 예방 통제 보도 브리핑에서 “2020년 7월 20일 0시부터 베이징 시 공공위생 돌발사태 비상대응 급별을 2급에서 3급으로 하향 조정한다”라고 선포했다. 이로써 한 차례 근 40일간에 거친 베이징시의 코로나 19와의 전쟁은 단계성 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중국 국내의 코로나 19 예방 통제 형세는 여전히 준엄하고도 복잡하였다. 베이징에서 공공위생 돌발사태 비상대응 급별을 2급에서 3급으로 하향 조정한다고 선포하던 당일, 7월 19일, 신장 위그르자치구(新疆维吾尔自治区) 코로나 19 예방 통제 사업 지휘부에서는 연구 끝에 우룸치시(乌鲁木齐市)의 텐산구(天山区)와 사이바커구(沙依巴克区)를 고 위험 지역으로, 우룸치 경제기술개발구, 고신기술 산업개발구, 수이머거우구(水磨沟区)를 중등 위험지역으로 했으며 기타 현(시와 구)를 저 위험구역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7월 22일 새벽, 랴아오닝성 다렌시(辽宁省大连市)에서 1건의 코로나 19 본토사례가 발견, 30분 후 확진사례가 출현한 다련 카이양(大连凯洋) 세계 해산물주식 유한회사 직원과 가족들이 원 지점에서 격리되었고 기업은 전면 봉쇄되었다. 한 쪽은 동쪽이고 다른 한 쪽은 서쪽이었으며 하나는 연해지구였고 다른 하나는 내륙지구였다. 신장과 다렌의 갑자기 들이닥친 코로나 19의 출현에 직면하여 중국은 대응의 경험이 더욱 풍부해졌고 더욱 파악이 있게 됐다. 중국의 다렌과 신장에서는 과학적으로 위험등급을 확정하고 ‘관할 통제권(管控圈)’을 엄하게 틀어쥐는 한편 전면적인 핵산검사를 추진, 이는 일장 바이러스와의 밀고 당기는 ‘조우전’이었다. 드디어 25일이 지난 후인 지난 8월 16일, 다렌 전역이 저 위험지구로 하향 조정되면서 경제와 사회질서가 전면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그리고 같은 희소식이 신장으로부터 전해오기도 했다. 국무원 코로나 19 대응 연합방지, 연합통제 기제의 해당 규정과 신장의 코로나 19 확산형세에 따라 자치구 코로나 19 예방 통제 사업지휘부에서는 8월 29일 0시를 기점으로 우룸치 텐산구, 사이바커구의 위험등급을 고 위험 지구로부터 저 위험 지구로 조정했고 우룸치 경제기술 개발구, 우룸치 고신기술 산업개발 그리고 수이머거우구의 위험 등급을 중등 위험 지구로부터 저 위험지구로 하향 조정하였다. 이렇듯 코로나 19와 대응 전쟁을 펼치는 위대한 실천 중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인민은 한 차례 또 한 차례의 초인간적인 용기와 지혜를 과시하여 한 차례 또 한 차례의 승리를 거두었으며 ‘인민이 첫째이고 생명이 첫째’란 이념을 철저히 이행하였다. 서기 2020년 9월, 우한의 2800여개 소의 중소학교와 유치원이 개학을 맞았고 백만의 학생들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던 교당으로 회귀하였다. 중국 대륙 중부의 이 대 도시는 사통 발달한 9개성의 교통요도로서의 본색도 되찾아왔다. 하지만 2020년의 이 도시와 이 국가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기억을 세상에 남겼다. 시계바늘은 다시 경자 년 춘제로 되돌아가 보기로 한다. 1월 26일, 바로 음력 정월 초이튿날, 만가정의 식구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나날, 바로 장수 옌청(江苏盐城)에서 춘제를 보내던 왠촨워이(袁传伟)은 우한을 지원하라는 한 건의 ‘전선지원 주문서’를 받아 쥐게 되었다. 그가 밤도와 수저우(苏州)에 있는 회사로 돌아갔을 때 그의 수하에는 단 1명의 직원도 없었다. 왠촨워이는 이전에 익혀두었던 기술을 바탕으로 생산라인을 가동했다… 10 후, 왠촨워이의 신근한 노동으로 이 회사에서는 생산된 100세트에 달하는 소독설비가 우한의 제 1선으로 보내 질 수 있었다. 이렇듯 코로나 19 저격전은 실제상에서는 후근 보장전쟁이기도 했다. 당 중앙의 통일적인 인솔 하에 여러 부문에서는 신속하게 연합행동을 개시, 전국이 ‘하나의 바둑판’처럼 되어 각 방면의 자원이 전력으로 공급 조달되었다. 하루 속히 생산을 회복하기 위하여 중점 기업들은 임시생산 관리 제도를 건립하여 기업의 원료, 직원과 물류 문제를 도와주었고 기업의 확대생산의 우려를 해소시키기 위해 국가임시 수납제도(收储制度)를 건립하여 많이 생산한 중점 의료방호물자 기업에 대해서는 정부가 나서서 구입수납을 대리해 주었으며 이런 중점 기업에 대해서는 세수(税收)와 금융의 지지를 주기도 했다. 그리고 단 시일 내 일선의 구급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국가에서는 통일적으로 산품조달을 배치, 엄격한 규정에 따라 의료용 방호복 등을 조달하게 했다… 생산기업들은 단시일 내에 만부하 생산에 돌입했다. 중국 항공공업그룹, 중국석유화학 공사, 비야디 자동차……수천 개 소의 기업들의 계선을 뛰어넘으며 완전히 다른 제품의 생산에 들어가기도 했다. 2월 29일에 이르러 중국의 마스크 단일 생산량은 1억 1600개에 도달, 2월 1일의 12배에 달했으며 4월 5일, 중국의 1차성 방호복 단일 생산량은 150만 건 이상에 달했으며 의료용 95 마스크의 단일 생산량 역시 340만 건에 달해 기본상 국내의 수요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우한 ‘봉쇄’후, 900만 명에 달하는 주민들이 자가 격리에 들어가면서 매일 5400톤의 식량, 4000톤의 야채와 1200톤의 육류를 소모했다. 이에 중앙에서는 통일적으로 생활물자를 보장하기로 결정, 1월 27일부터 5월 30일까지 전국에서 후베이 지구로 운송된 방역물자 및 생활물자는 누적으로 173톤을 초과, 석탄과 연료 등 생산물자는 근 395만 톤에 달했다. 중외 역사상 큰 전염병과 재해 등은 흔히 사회질서를 교란시켰고 혼란한 사회질서 또한 전염병 방지 및 재해 방지에서의 설상가상으로 되었다. 코로나 19란 대 고험에 직면하여 중국의 생활필수품, 의료물자, 전력, 수돗물 등 기본공급은 총체적으로 안정했고 국계민생(国计民生)과 관련되는 중점항목은 질서 있게 운행되고 있었으며 14억 인구의 기본민생은 효과적으로 보장되고 경제사회의 발전은 안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잠정 건(暂停键)’으로 잠시 나라를 지탱하고 있던 대국은 미구하여 기세 드높은 생산라인을 가동, 막힘이 없는 물류동맥을 유지했으며 크나큰 재난 중 역행에 나선 것은 의사, 간호사와 수많은 화물차 운전기사 그리고 사회구역 사업자, 자원봉사자, 배달원, 청결공과 건축 노동자 등이었다…… “나는 그들의 몸에서 자기의 가정과 자기의 사회구역, 심지어 전 세계 아주 먼 곳의 질병침해에도 관심을 갖고 있는 일종 거대한 책임감을 분명 보아냈다. 또한 남한테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몇 주간 자가 격리에 들어간 사람들도 분명 코로나 19 사태 속에서 나타난 영웅들이었다.” 이는 중국 - 세계위생조직 코로나 19 연합전문가 고찰 팀의 외국 측 팀장 브루스 엘워드가 감격에 젖어 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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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0-10-19
  • '삼국지' 재해석⑧ 대세를 읽지 못하고 수성만 하다가 자멸한 유표
    ●김정룡(다(多)가치 포럼 위원장) <후한서>에서는 원술과 유표를 묶어 하나의 열전으로 구성했고, 유언, 원술, 여포를 합하여 하나의 열전으로 만들었다.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동탁, 원소, 원술, 유표를 하나의 챕터로 묶어놓고 다음과 같이 평을 달았다. “동탁은 사람이 흉악하고 잔인하며 포악하고 비정했으니 문자로 기록한 이래 같은 자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원술은 사치스럽고 방자하며 음탕했으므로 생을 다할 때까지 영화를 지킬 수 없었던 것은 자업자득이다. 원소와 유표는 모두 위엄과 무용이 있었고 도량과 식견이 있었기에 당시 이름을 떨쳤다. 유표는 한수 남쪽을 지배하고 원소는 황하 북쪽에 세력을 구축했으나 그들은 모두 겉으로는 관대했지만 속으로는 질시했고 모략을 좋아하고 결단력이 없었으며 인재가 있어도 등용하지 않았고 좋은 말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적자를 내쫓고 서자를 세웠고 예의를 버리고 편애를 숭상했으니 후계자의 대에 이르러 거꾸러지고 넘어지는 고통을 당하고 사직이 엎어졌어도 결코 불행한 것이 아니다.” 소설 <삼국연의>에서는 유표가 영향력이 있는 중요한 인물로 다뤄지지 않았다. 이에 비해 사서에서의 유표는 비중이 꽤 컸고 영향력도 괜찮은 인물이어서 필자는 진수의 <삼국지> 배열 순서에 따라 이번 편에서 유표를 다루기로 했다. <후한서>에 따르면 유표는 노공왕(魯恭王)의 후예였고 키가 8척(184센티미터) 남짓하고 모습이 온화하고 훤칠했으며 장검(張儉) 등의 사람들과 함께 ‘팔고(八顧, 덕행이 있어 남들을 선도하는 여덟 명의 명사)라고 불렸다. 유표가 황실의 후손이라는 것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유비의 황실후손 주장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심을 받은 것과 질적으로 달랐다. 유표는 후한 말기 환관들의 눈에 나 지식인을 탄압한 ‘당고의 화’를 입어 환관집단의 추적을 물리치고 도망하여 목숨을 부지했다. 헌제 초평 원년(190) 장사태수였던 손견이 형주자사 왕예를 죽이자 조정에서는 유표에게 이 직무를 맡겼다. 그러나 원술이 그의 부임을 가로막았고 ‘종적(宗賊)’이 성행하여 직무수행이 매우 어려웠다. 그런 긴박한 상황에서 유표는 인복이 있었는데 그를 도와 준 사람은 괴월과 채모였다. 채모는 비첩(婢妾)이 수백 명이고 별장을 오십여 채나 소유한 대부호였다. 채모는 후일 유표와 동서 사이가 되고 제갈량의 처에게는 이모부가 된다. 괴월은 지혜가 뛰어나고 계략이 많아 조조가 가장 좋아한 형주의 사인(士人)이었다. <후한서> 유표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건안 13년(208) 유종(유표의 차남)이 투항하자 조조는 형주를 차지했는데 이때 그는 순욱에게 편지를 써서 ‘형주를 얻은 것이 기쁜 게 아니라 이도(異度, 괴월의 자)를 얻은 것이 기쁠 뿐이오.” 이는 조조가 얼마나 인재에 목말라 있었는가 하는 좋은 증거이다. 만약 괴월이 없었다면 유표의 형주자사 직무수행이 이뤄지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었을 만큼 상황이 급박했다. 과연 괴월의 계책은 무엇이었을까? “평화로운 상황을 다스리는 사람은 인의를 우선하고 혼란한 상황을 다스리는 사람은 권모를 우선합니다. 군사(軍事)는 그 숫자의 많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적재적소의 인물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형주를 다스리는 데에는 반드시 도덕적인 감화와 무력적인 위협이 필요합니다. 공의 적은 원술과 종적들 아닙니까? 원술의 특징은 대체로 탐욕스럽고 포악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먼저 종적을 멸한 후에 원술을 막아야 합니다. 구체적인 방법은 무도한 자들을 주살하고 그 인재들에게는 등용의 길을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공이 위엄과 덕행을 행하면 모든 사람들이 귀순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남으로는 강릉(江陵)에 근거하고 북으로는 양양을 지킨다면 형주 8군은 격문만 돌려도 평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원술이 공격해온다 해도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유포는 괴월의 이 계책을 받아들여 괴월로 하여금 종적 두목 15명을 불러들인 다음 그들을 모두 참수하고 그들의 군대를 습격했다. 결과 강남(후난성과 후베이성에 해당함)을 모두 평정했다. 유표도 양양에 주둔할 수 있게 되었다. 원술은 손견과 손잡고 유표를 습격하자 황조가 유표를 구원했고 손견은 황조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때부터 원술은 형주 접근을 포기하고 말았다. 양대 주적을 제거한 유표는 훌륭한 정치를 펼쳐 동네방네 소문난 훌륭한 주목(州牧)으로 거듭났다. 땅이 사방 천리에 달하고 병사 10만을 거느렸으며 영토 내에는 만 리가 숙청되었고 모든 사람이 기뻐하며 복종하였으니 실로 명실상부한 ‘독립적인 왕국’이었다. 중원의 선비들이 이를 보고 다투어 형주로 피난을 왔고 유표에게 의탁한 학사들이 모두 1천여 명에 달했으며 유표도 그들을 위로하고 재물로 도와 모두가 구제될 수 있었다. 동시에 그는 학교를 세우고 유학을 진흥시켰으며 형주를 난세 속의 ‘왕도 정치가 시행되는 지상 낙원’이라 불리는 곳으로 만들었다. 유표가 역사에서 중시 받는 이유는 형주라는 곳의 중요성도 한몫 하고 있었다. 형주는 익주와 함께 100개 현을 갖고 있는 규모가 가장 큰 주(州)였고 유비의 세력과 강동의 손씨 세력 및 조조마저 탐내고 있었던 곳이다. 당시 삼대 전투 중 하나인 관도대전도 결국 원소와 조조가 형주를 차지하려고 벌였던 전쟁이었다. 관도대전에서 원소는 사람을 보내 유표에게 원조를 요청했는데 유표는 원소의 청을 허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출병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조조를 도와주지도 않았다. 후일 조조가 오환을 정벌할 때 유비가 그에게 허현(조조의 근거지)을 습격하자고 권유했지만 그는 역이 요지부동이었다. 결과적으로 좋은 기회를 모두 날려 보내게 되었다. 과도대전에서 산에 앉아 호랑이들이 싸우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는 유표에 대해 답답함을 느낀 부하 한숭(韓嵩)과 유선(劉先)이 그에게 말했다. “호걸들이 함께 다투어 두 영웅이 서로 대치하고 있으니 천하의 무게중심은 장군에게 있습니다. 장군이 만약 성과를 내시고자 한다면 그들 지친 틈을 타는 것이 좋을 겁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면 그중 한쪽을 선택하십시오. 현재 장군께서는 십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편안히 앉아서 관망하고 계십니다. 지지해야 할 사람을 보고서도 돕지 않고 강화를 권하지도 않는다면 결국 양쪽의 원한이 모두 장군에게로 집중될 것입니다.” 괴월마저 이 두 사람의 말에 동조하고 나서자 유표는 한숭을 조조 진영에 보내 정탐하고 상황판단하라고 부탁했다. 조조 진영에 다녀온 한숭은 조조의 위엄과 덕을 자세하게 말하자 유표는 그를 배신자로 낙인찍고 죽이려고 한바탕 조사에 착수했다. 결국 아무 단서도 찾지 못하자 체면 유지차원에서 한숭을 감옥에 처넣었다. 역사학자 진수는 이 사건을 두고 “유표의 외모는 온화하고 품위 있어 보이지만 속마음은 시기심이 많아 일처리가 대체로 이런 식이다.”고 기록했다. 유표는 시기심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큰 뜻도 없었다. 진수의 <삼국지> 곽가전에 의하면 곽가는 “유표는 앉아서 반말이나 해대는 자에 불과합니다.”고 말했다. 조조는 “내가 여포를 공격할 때 유표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으니 그는 관도대전에서 원소를 구원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만을 지키는 놈이다.” 한숭은 얻기 힘든 인재였다. 이런 인재를 적재적소에 쓰지 못하였으니 유표는 실로 이 면에 있어서 유비나 조조에 견줄 바가 못 되는 속 좁은 인간이었다. 여기서 <후한서>에 기록된 한숭이 유표에게 올린 진실하고도 멋진 간언을 감상해보자. “저의 어리석은 견해에 따르면 조공의 영명함으로 볼 때 앞으로 반드시 천하에서 뜻을 이룰 것입니다. 장군이 만약 조조에게 의탁할 생각이시라면 저를 중원에 파견하여 사신으로 가게 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만약 마음속에 주저하는 바가 있다면 적합하지 않습니다. 폐하는 제가 일단 경사(京師)로 들어갔기 때문에 아마도 저에게 말단 관직이라도 내릴 것입니다. 제가 사양하고 사양하지 않고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사양하지 못하게 된다면 이때부터 저는 천자의 신하가 되어 장군에게는 옛 관리가 됩니다. 천자에게 있을 때에는 천자를 위하게 될 것이며 더 이상 장군을 위해서는 죽을 수 없을 테니 청컨대 장군께서는 심사숙고하십시오.” 한숭을 이렇게 냉대했을 뿐만 아니라 유표는 인재등용에 문제가 많았다. 유표는 유비가 찾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먼 거리까지 나가 마중하였으며 상빈의 예로 대접했고 군대까지 나눠주었다. 그러나 유표는 유비를 항상 경계했고 중용하지 않았다. 뒤늦게 유비가 위협이 되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연회를 베풀어 유비를 죽이려고 했는데 유비는 소피보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밖에 나가서 그 걸음으로 도망가 버렸다(홍문연을 연상). 곽가는 유표가 유비를 대한 태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자신도 유비를 막기에 재주가 부족함을 알기 때문에 유비에게 중임을 맡기면 통제할 수 없을까 염려할 것이고 또 가벼운 임무를 맡기면 유비가 그를 위해 일하지 않을 것입니다.” 유표는 또 그에게 귀의한 1천여 명의 지식인들의 안전을 보장해주고 의식주를 제공했을 뿐 적당히 알맞게 인재로 등용시키지도 않았다. 유표는 후사처리에도 문제가 심각했다. 여기서 말하는 후사처리는 계승자 선정을 뜻한다. 유표에게는 유기와 유종이란 두 아들이 있었다. 둘 다 정실의 소생이다. 그런데 유표의 후처인 채부인은 친정 쪽의 조카딸을 유종에게 시집보냈기 때문에 유종이 후계자가 되기를 바랐고 실제로 유표를 설득하여 일을 성사시켰다. 진시황제부터 시작해 적자가 아닌 서자를 후계자로 세워 성공한 사례가 매우 드물다. 장남은 집안의 전통과 대통을 이으려는 야망이 큰 반면에 차남부터는 대세에 따르는 경향이 있다. 조조가 형주를 공격해오던 건안 13년(208) 유표는 병들어 죽었다. 장남인 유기는 조조를 대항하는 항조파(抗曹派)인데 비해 차남인 유종은 후계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조에게 투항해 가문에 먹칠하는 항조파(降曹派)였다. 유표가 일궈놓은 강산을 후계자가 조조에게 바쳐버렸다. 이로서 유표의 강산은 역사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유표는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큰 뜻이 없고 넓은 흉금과 도량도 없었다. “조그마한 땅 한 뙈기 지키며 부인과 아이들 그리고 집 한 채 정도를 소유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너무 지나친 평가기이긴 하나 결과적으로 유표는 보수적인 인물임에는 틀림없었다. 하지만 한 때 형주를 천하 난세 속에서도 지상낙원으로 만든 그의 공로는 마멸할 수 없이 역사에 길이 남아 내려오고 있다. ‘삼국지 강의(品三國)’로 유명해진 이중턘은 유표의 생애에 대해 이렇게 요약했다. “난세에 태어나지 않고 치세에 태어났다면 훌륭한 관리였을 것이다. 유표는 실로 불행한 행운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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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13
  • 국가의 결심, 인민의 호응과 단결 - 코로나 19 전승의 촉매제⑦
    ▲ 4월 12일, 베이징 세허(协和)병원 의료진 성원들이 우한 퉁지병원 의무일꾼들과 함께 코로나 19 환자 1명을 우한 퉁지병원 중파신청원구(中法新城院区) ICU(중환자 실)로 이송하는 장면으로 이송 도중 ECMO(인공막폐) 치료를 계속 하고 있다.ⓒ신화사 (전번 계속) ‘환자가 빈 침대 기다리기’가 마침내 ‘빈 침대 환자 기다리기’로 !   2월 17일까지 코로나 19 환자는 발병으로부터 확진에 이르기까지 전국 평균 소모시간은 4.95일까지 짧아졌다. 그리고 우한의 중증환자 비율은 초기의 38%로부터 18%로 내려갔다. 이는 환자가 인산인해를 이루도록 모여들던 우한의 조기현상이 점차 완화되었음을 설명했다. 치유 율을 높이고 사망 율을 하강시키며 최종 코로나 19를 전승하자면 관건은 과학기술에 의거해야 했다. 3월 2일, 시진핑 총 서기는 전문 군사의학연구원, 칭화대학(清华大学) 의학원을 찾아 코로나 19 예방 통제 과학연구 공략 사업을 고찰하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현재 코로나 19를 이기자면 인민전쟁, 총체 전과 저격 전 그리고 간고한 노력의 대가를 수요한다. 그러나 이런 국면을 맞을수록 우리는 과학에서 답안과 방법을 찾는 것을 견지해야 한다.” 그리고 코로나 19에 대응하는 관건시기인 3월 10일, 시진핑 총 서기는 전문 후베이(湖北)와 우한을 찾아와 코로나 19 예방 통제 사업을 고찰하면서 코로나 19 예방 통제를 계속 당전의 가장 큰 대사와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삼고서 마비되지 말고 늦추지 말아야 하며 긴밀하고도 세절 적으로 틀어쥐어야 한다면서 기어코 후베이 보위전과 우한 보위 전에서 승리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약 사용은 군사를 사용하는 것과 같고 의사를 채용하는 것 또한 장군을 채용하는 것과 같다. 진료방안은 임상의사의 치료에 달린 것이며 또한 국가 첨단 의료진한테 있어서 하나의 질병에 관한 이해이기도 하다. 의료진은 점차 코로나 19 위급중증환자의 사인은 단지 폐부의 문제만이 아니라 많은 기관의 쇠약에 따른 것이며 전통적 통기(通气), 지어는 ECMO(체외막 산소공급) 등 수단 역시 환자의 쇠약속도를 저지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렇게 몹시 고난의 모색 중 조기 삽입호스와 부와식(俯卧式) 통풍기기 등 두 가지 구급치료 경험이 수면위로 떠올랐으며 이는 곧바로 환자의 상태 전환에 관건적인 작용을 했다. “관건은 호스를 삽입하는 시기이다.” 중증 전문가들은 한 침에 피는 보는 격으로 ‘호스를 삽입 후 다시 뽑아내기가 어렵’기에 호스 삽입을 근심하는 우려를 없애야 한다고 인정했다. 우한 퉁지병원 중파신성 병원 구(武汉同济医院中法新城院区)에서는 20명으로 구성된 ‘호스삽입 돌격대’을 조직, 동시에 ‘특전 첨도 련(尖刀连)’도 신속히 조직, 여기에는 심장보호 팀, 신장보호 팀, 간장보호 팀, 두뇌 보호팀 등이 포함되었으며 상하이(上海), 칭다오(青岛) 등지에서 온 17개 의료진이 협동작전으로 중증환자들을 구급하기로 했다. 생명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아끼지 않았다. 5월 말까지 중국에서 코로나 19 중증환자 1명이 쓴 치료비용은 평균 15만 위안을 초과, 특히 소수의 위 중증환자의 치료비용은 수십 만 위안 심지어 100만 위안을 초과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으며 그 모두가 의료보험 규정에 따라 처리되었다. 결코 희망이 있어 견지한 것이 아니고 아울러 견지했기에 비로소 희망도 있게 되었다. 중국은 가장 정예한 의료자원을 가장 수요 하는 지방에 집중했으며 중증치료는 ‘일인 일책(一人一策)’의 방침을 실시했다. 결과 지난 5월 말까지 중국에서는 도합 3000여명에 달하는 80 이상의 코로나 19 환자를 성공적으로 완치, 위로는 100세가 넘는 노인으로부터 아래로는 갓 태어난 유아에 이르기까지 완치율은 94%에 달했다. “중대한 전염병 앞에서 우리는 처음부터 인민의 생명안전과 신체건강을 첫 자리에 놓아야 한다고 선명하게 제출했습니다. 우리는 전국 범위에서 가장 우수한 의사, 가장 선진적인 설비, 가장 급히 수요되는 자원을 집중해서는 전력으로 코로나 19 치료에 투입했으며 구급치료 비용은 전부 국가에서 부담했습니다. 인민이 첫 번째이고 생명이 첫 번째였기에 인민의 생명안전과 신체건강을 위해서는 모든 대가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는 지난 5월 22일, 중국의 ‘양회(两会)’ 기간, 시진핑 총 서기가 네이멍구(内蒙古) 대표단의 심의에 참가했을 때 한 발언이다. 한편 이렇듯 코로나 19와의 사투를 벌이는 기간, 장쉐칭(江学庆), 류즈밍(刘智明), 리원량(李文亮), 샤스스(夏思思), 펑인화(彭银华) 등 이들이 생명으로 사명을 이행, 큰 사랑으로 푸른 생명을 보우했으며 많은 의무일꾼, 간부 직원과 사회구역 사업자들이 공직을 수행하다가 순직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들의 이름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중국은 지난 1월 16일에 제 1판의 코로나 19 국가진료 방안이 출범해서부터 50일 기간 동안 그 진료방안이 제 7판까지로 업그레이드가 되었으며 코로나 19 중증환자의 진료방안에 대해서는 3 차례에 거쳐 수정했다. 그리고 무증상 감염자의 전파가능성, 완치 자 회복기간의 혈장치료 등 일련의 새로운 발견에 대해서는 모두 적시 적으로 새로운 수정판에 기입하는 것으로 코로나 19 구급치료 수준을 부단히 개선하였다. 우한은 세계에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4월 8일, 우한은 마침내 ‘봉쇄가 해제’ 되었다. 코로나 19의 기승 중에 사망한 매 한명의 생명은 가정의 비애일 뿐만 아니라 전반 도시가 명기해야 할 아픔이었다. 정보의 공개 투명도와 데이터의 정확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코로나 19 확산 초기 수용치료 능력의 부족으로 인한 환자가 집에서 사망하여 정보등록이 되지 않은 등 원인으로 4월 17일, 우한 시에서는 정정 후의 코로나 19 확진사례와 사망사례를 공포, 이 중 확진사례는 확인 뒤 325건이 증가했고 사망사례는 확인 뒤 1290건이 증가되었다. 당일, 세계위생조직은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 19 확진사례와 사망사례를 정정한 것은 원래 통계했던 데이터의 기초 상 반복해서 통계한 것으로  그 어떤 누락된 확진사례거나 사망사례의 기록도 없다고 표했다. 그리고 코로나 19의 확산진전에 따라 기타 나라에서도 코로나 19 데이터를 정정하는 상황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으며 이런 데이터 정정은 합리한 것이라 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4월 24일, 후베이의 중증 및 위 중증 환자의 0기록을 실현, 4월 26일, 우한에서 병원 투병중인 코로나 19 환자의 0기록을 실현! 이는 생명이 모든 것보다 귀중하다는 것을 보여준 76일이었고 영웅적 우한인민들이 간고하고도 어렵게 써 온 역사의 한 막이었다. 1800여 시간 ㅡ 용감한 중국인민은 인류문명사상에서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될 세계를 경악하게 한 장거를 창조했던 것이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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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09
  • '삼국지' 재해석⑦ 푼수도 모르고 황제를 참칭한 원술(袁述)
    ●김정룡(다(多)가치 포럼 위원장) 후한 말기 기원 220년 전, 그러니까 3국 정립이 이뤄지기 전에 동탁은 황제를 지마음대로 폐위시키고 새로운 황제를 세우는 이른바 ‘황제폐립’이란 패악무도한 짓을 저질렀고, 원소는 유주목 유우를 황제로 옹립하고 자신이 천하를 호령하려는 ‘망명정부’를 세우려고 했다가 좌절되었고, 다음에는 원술이 아예 자신을 스스로 황제를 자칭하고 나섰다. 이 세 인물의 행위를 정리하자면 동탁은 ‘황제 폐립’을, 원소는 ‘황제 별립(別立, 另立)’을, 원술은 ‘황제 자립(自立)’에 나섰던 것이다. 당시 황위(皇位)를 건드리는 것은 최대 난신적자로 취급받기 때문에 이 세 인물에 대한 평가는 지극히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역사학자 진수는 <삼국지>에서 이 세 사람을 비슷한 행위를 저질렀다는 맥락에 의해 한 챕터에 묶어놓았다. 원술은 원소의 동생이다. 둘 다 같은 아버지 원봉의 아들이다. 그런데 이 형제를 친형제라 하기도 하고 사촌 형제라 말하기도 한다. 어느 것이 맞는지 여전히 논쟁 중에 있다. 분명한 것은 원소는 첩의 자식으로서 ‘서출(庶出)’이고 원술은 정실의 자식으로서 ‘적출(嫡出)’이라는 것이다. 전통시대에 있어서 적자(嫡子)와 서자(庶子)의 지위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심했다. 조선시대 양반가문의 자식일지라도 과거시험 응시자격을 적자에게만 부여하고 서자는 배제시켰다. 서자 가운데 재능이 뛰어난 인물이 있었는데 그들은 출세의 길이 막혀 반란이나 혁명을 일으키는 두목으로 변신했던 것이다. 홍길동, 장길산, 최제우 등 모두 이 부류에 속한다. 한편 적자는 서자보다 타고난 자질이 좋고 인물도 낫다는 인식이 보편적이었다. 하지만 원소와 원술의 경우는 정반대였다. 원소는 인물이 잘 생기기로 유명했고 정계에서 명망도 원술보다 훨씬 높아 인기가 매우 좋았다. 원술은 이에 불복하여 이를 갈고 형과 죽기내기로 싸워서 누가 나은지 승부를 보려고 했다. 원술이 원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든지 <후한서> 원술전에 의하면 세상은 원소의 편에 서는 호걸들이 더 많았다고 한다. 이에 화가 난 원술은 욕을 퍼부어댔다. “더러운 놈들, 나를 안 따르고 거꾸로 우리 원씨 집안의 종놈을 따르다니!” 또한 원술은 공손찬에게 편지를 써서 원소는 원씨 집안의 씨앗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원소는 원술에게 크게 격노하게 되었다. 원술이 원소를 이렇듯 경멸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원술이 정말 원소보다 나은 점이 있었을까? 이 형제는 서로 피장파장이요, 도진개진이었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원술을 ‘도량이 좁고 모략만 좋아한 탕아’라고 요약했다. 사실 이 두 형제는 출신이 고귀해서 콧대가 높았고 오만했으며 고집이 세기로 유명했다. 이 면에 있어서 원술이 원소보다 더 어리석었고 더 멍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술은 원소의 행위에 대해 얕잡아 보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원소가 유우를 황제로 옹립하려고 원술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원술은 편지를 보고 콧방귀를 꼈다. “첩에게 난 자식은 역시 싹수가 노랗다더니 뜬금없이 이런 멍청한 생각이나 하는구나. 따로 황제를 세운다고? 남을 세우느니 차라리 제가 황제로 서지! 우리 유서 깊은 원씨 집안이야 일찍부터 사세삼공의 가문이라 네가 황제를 옹립한 공을 세워도 기껏해야 사세삼공에서 오세삼공으로 바뀌는 정도인데 무슨 대단한 게 있다고?” 원술은 동탁이나 원소와 달리 자신이 황제가 되는 방법을 택했다. 나름대로 황제가 되려는 논리도 그럴듯했다. 한나라는 이미 관 속에 들어갈 날이 멀지 않았고 유씨도 이미 서산에 지는 해이므로 반드시 다른 사람이 대신 나서야 한다. 유씨를 대신할 자격은 누구보다 원씨에 있다. 원씨 집안은 사세삼공의 오래된 집안이며 필적한 만한 다른 집안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따라서 원씨 가문 사람 중에서도 가장 자격이 있는 사람은 원술 자신이라는 것이다. 자신은 적출이고 원소는 서출이기 때문에 첩의 자식이 황제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원술은 황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은근히 뜸을 들여 봤다. 원소와 조조 연합군에게 패한 원술은 양주 자사 진온(陳溫)을 죽이고 양주를 지배했을 때 같은 삼공 집안의 자식인 진규(陳珪)에게 편지를 보냈다. “옛날에 진(秦)나라가 통치를 잘못하여 천하의 모든 영웅이 다투어 그 정권을 빼앗으려 했으나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사람이 마침내 천명을 받아 정권을 잡았소. 지금 세상일은 혼란스럽고 또한 와해되는 형국이니 진실로 영웅호걸들이 일어나야 할 때요. 나와 그대는 오랜 친구지간이니 설마 나를 돕지 않겠소? 만일 내가 큰일을 성공시킨다면 그대가 실로 내 심려(心膂, 가슴과 등뼈로서 임금을 보좌하는 중신을 의미함)가 될 것이오.” 진규는 답장에 이렇게 썼다. “옛날 진나라 말기에는 내키는 대로 폭력을 휘두르고 제멋대로 굴어 포악함이 천하에 넘쳐 그 해악이 백성에게 미쳤소. 낮은 위치에 있는 백성이 살아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진나라는 붕괴된 것이오. 지금은 비록 말세이지만 멸망한 진나라처럼 가혹한 폭정은 존재하지 않소. 조조 장군이 명민하고 무용이 있으면서 시대의 요청에 순응해 과거의 법과 형벌을 되살리는 한편 흉하고 사특한 세력을 쳐서 평정하고 천하를 안정시키려 하니 진실로 그렇게 될 것이오. 그대가 천하 영웅들과 힘을 합치고 마음을 같이 하여 한나라 왕실을 돕는다지만 법규도 없는 계략을 몰래 세워 직접 화를 실험하는 모습을 보니 어찌 애통하지 않으리! 만일 그대가 길을 잃었다가 돌아올 줄 안다면 오히려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오. 나는 그대의 옛 친구이기 때문에 그대에게 진실한 마음을 털어놓는 것이오. 비록 듣기 좋은 말은 아니지만 육친의 애정이 들어 있소. 내가 사사로움을 쫓아 그대에게 아부하기를 바란다면 나는 죽음에 처하더라도 할 수 있소.” 원술은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되려는 꿈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흥평 2년(195) 겨울 천자가 이각과 곽사에게 추격당한 끝에 조양에서 패하자 원술은 부하를 소집하여 말했다. “지금 유씨는 쇄미하고 천하라는 솥은 들끓고 있소. 우리 가문은 4대가 모두 삼공을 지냈으며 백성이 귀의하고자 하는 바이오. 나는 하늘의 뜻에 순응하여 민심을 받아들이려고 하는데 여러 분의 생각은 어떠하오?” 다들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데 주부 염상(閻象)이 진언했다. “옛날 주나라는 후직에서부터 문왕에 이르기까지 인덕을 쌓아 공을 세우고 셋으로 나뉜 천하 중 둘을 다스리면서도 은나라를 섬기고 그 명에 복종했습니다. 공께서 대대로 번영했다고는 하나 주나라처럼 번성한 적은 없으며 한나라 왕실이 비록 쇠약하다고는 하나 은나라 주왕처럼 폭정을 일삼지는 않았습니다.” 원술은 침묵한 채 매우 불쾌해 했다. 원술은 하내 사람 장형(張炯)의 부명(符命, 하늘이 제왕에 될 만한 사람에게 내리는 상서로운 징조)을 이용하여 결국 스스로 황제를 참칭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원술은 한 개 지방을 차지하고 있었고 전국적인 세력도 턱 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스스로 황제가 되는 일에 그토록 목을 맬 정도에 이르렀을까? 남달리 무언가 그만이 갖고 있는 비밀무기가 있지 않았을까? 맞다. 원술은 천하에 둘도 없는 강력한 비밀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일까? 바로 황제의 옥새다. 저런, 황제의 옥새가 어떻게 원술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을까? 이 비밀을 알려면 반동탁연대 투쟁을 돌아봐야 한다. 관동연합군 맹주 원소와 조조 그리고 강동의 호랑이 손견이 연합을 맺어 작전을 짰다. 손견은 수도 낙양에 진입하고, 조조는 장안으로 도망가고 있는 동탁 무리를 추격하고, 원소는 후방에서 군량미와 군수물자 공급을 맡기로 했다. 그런데 이 셋은 한마음이 아니라 서로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 원소는 두 갈래 진영의 군수물자 공급을 하지 않았다. 조조가 동탁과의 싸움에서 패해 역사무대에서 사라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후방 지원을 잃은 조조는 장안 입성을 이루지 못했고 중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손견도 조조가 망하기를 바랐고 조조도 손견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렇게 서로 다른 계산을 하고 있는 동상이몽이었다. 낙양에 입성한 손견은 너무 당황해서 할 말을 잃었다. 동탁이 휘황찬란하던 궁전에 불을 질러 잿더미로 만들었고 능묘들을 파헤쳐 보물을 약탈해갔다. 불에 탄 궁정 폐허에서 목이 말라 우물의 물을 길어 올려 마시려고 했던 찰나 두 눈이 황소 눈이 되었다. 두레박에 노란 황금색 보자기가 건져졌고 그것을 풀어보니 옥새가 들어 있었다. 큰 꿈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온 손견은 전쟁 중에 유표의 부하 황조의 손에 죽는다. 후계자 손책은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그까짓 옥새에 목을 매지 않고 원술에게 군대를 빌리는 조건으로 넘겨준다. 이 스토리는 소설 <삼국연의>에 등장한다. 소설은 소설이다. 문학적인 표현일 뿐 역사사실이 아니다. <후한서>에 의하면 손견은 원술의 부하였고 원술은 손견의 부인 손에서 옥새를 강제로 빼앗아 갔다. 소설이든 역사사실이든 아무튼 옥새가 원술의 손에 있었고 그는 그것을 무기로 스스로 황제를 참칭했다.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가짜 황제였다. 당연히 온통 천하의 반대에 부딪혔다. 원술과 가장 관계가 좋았던 손책마저 편지를 보내 절교를 선언했다. 가짜 황제든 진짜 황제든 황제를 칭했으면 정치를 잘해야 하는데 원술은 그런 재목이 아니었다. <후한서>에 의하면 “향락과 사치가 점점 심해져 수백 명의 후궁들은 모두 수놓은 비단 옷을 입는데 사졸들은 헐벗고 굶주려서 장강과 회수 사이의 지역은 사람의 자취가 끊기고 백성들이 서로를 잡아먹었다.”고 한다. 또 자신은 산해진미를 매일 먹으면서 수하 병사들은 차례로 얼려 죽이고 굶겨 죽였다. 원술의 칭제에 가장 분노한 사람은 조조였다. 조조는 직접 원술 징벌에 나섰다. 원술은 조조의 상대가 아니었다. 사면초가에 빠진 원술은 2년간 버티다 건안 4년(199) 여름 도망갈 길이 없어 결국 자신이 황제노릇을 더 이상 해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전국옥새를 원소에게 넘겨주었다. 원씨 형제가 그토록 물고 뜯고 죽고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던 원수 사이였는데 관건적인 시각에는 역시 피는 물보다 진했다. 조조는 원술을 말려 죽이는 작전을 취했다. 유비를 보내 하비(下邳, 원술의 근거지)에서 퇴로를 차단했다. 원술은 할 수 없이 회남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병이 들어 죽었다. 진수의 <삼국지>에 의하면 한때 황제를 참칭했던 원술의 말로는 꿀물 한 모금, 보리밥 한 끼도 제대로 구하지 못할 만큼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10-07
  • 국가의 결심, 인민의 호응과 단결 - 코로나 19 전승의 촉매제⑥
    (전번 계속) 한편으로는 병동을 개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환자를 접수하여 치료했다. 우한의 몇몇 종합병원들에서는 일반 병동에 칸막이를 하고 밀봉하는 방법으로 지정 병원으로 만들어 코로나 19 환자들을 집중 접수하기 시작했다. ‘도시봉쇄’와 더불어 ‘베이징 쇼탕산(北京小汤山)’ 모델이 우한에 재 출현했다. 군민의 협동작전으로 환자를 집중 접수하고 치료 - 훠선산(火神山), 레이선산(雷神山)이란 2개소의 전염병전문병원이 10여 일만에 준공되어 2500개의 침대를 제공하였다. 억만의 중국인들은 이 시간과 공간이 극 도록 압축된 전쟁터를 견증하였다. 최고봉 시 4만 여명에 달하는 건설 자들이 주야로 악전고투, 수천 대에 달하는 굴삭기, 불도저들이 쉼 없이 움직이며 밤을 밝혔다. 또한 강 유력한 의료지원 행동이 대 규모로 집중되면서 우한과 후베이 성 의료자원이 몹시 결핍한 엄중 재해구의 곤경과 압력을 해소시켜 주었다. 하지만 이 코로나 19와의 싸움은 그것으로 끝이 보이지 않았으며 형세는 오랫동안 바이러스와의 대치상태에 처해 있었다. ▲3월 2일, 우한시 장안구 사회구역 자원봉사자들이 사회구역 내 기초생활 수급 가정에 일용품을 전달해 주고 있다.ⓒ신화사 2월 2일, 우한의 코로나 19 누적 확진사례는 5142건이었고 2월 3일에는 누적 확진사례가 6384건, 2월 4일에는 누적 확진사례가 8351건, 2월 10일에는 누적 확진사례가 1만 8454건…… 확진사례 증장의 곡선은 거의 한 갈래 수직선을 이루었다. 이렇듯 나라 전체가 만중일심으로 코로나 19에 대응하는 관건시기인 2월 3일, 중국 공산당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긴급회의를 소집, 다음 단계의 코로나 19 예방 통제 사업에 대해 연구하였다. 회의에서 시진핑 총 서기는 시간과 달리기 경주를 하고 마귀와 겨루기를 하는 것으로 코로나 19의 만연추세를 견결히 억제하여야 하며 이번 전염병 예방 통제 저격 전에서 견결히 승리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우한의 모든 통로를 봉쇄하여 2월 중순이 되었을 때 2개의 관건적인 조치가 시종 전반 국면을 유력하게 받쳐 주었다. 하나는 전국의 중증치료 의무역량이 자체로 구급설비를 갖고 와 전반 적으로 우한의 병동들을 접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환자를 집중하고 전문가를 집중하고 자원으로 집중하고 치료를 집중하는 즉 ‘4가지 집중’의 원칙으로 우세한 병력을 주 전장에 집중한 것이었다. 코로나 19 저격 전에서 이기자면 중점을 ‘예방’에 두어야 했다.    2월 10일 오후, 시진핑 총 서기가 베이징 시 차오양 구 안화리 사회구역(北京市朝阳区安华里社区)을 찾았을 때 그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옷소매를 롤업(卷袖子)했으며 체온을 체크하고 사회구역 주민위원회에서 힘있게 걸으면서 ‘전민 전역(疫)’을 호소했다. “코로나 19에 대한 예방 통제 사업은 한 차례의 인민전쟁입니다. 대중을 믿고 대중을 발동하면서 사회구역 전염병 예방 통제 사업 중의 ‘저격 작용’을 충분히 발휘시켜야 합니다.” 코로나 19 방역과 의료구급 이 두 개의 ‘전역’을 총괄 계획하였다. 연합방지 연합통제 진지를 구축하고 군중들의 방역과 군중들의 통제 시스템을 구축했으며 전례 없는 대 규모 격리조치를 취하여 전국적인 자원을 집중하여 구급치료를 전개하였다. ‘야전병원’격인 방창병원은 평화시기의 대 규모 구원행동을 창조적으로 응용해 이 생명보위 전의 ‘기병’으로 되었다. 한편 코로나 19에 대한 요해가 점차 깊어짐에 따라 의료일꾼들은 감염자 중에 경증환자의 비례가 약 80%이고 수량이 방대한 경증환자가 곧 바이러스 확산의 ‘수도꼭지’이며 또한 중증 ‘언색호(堰塞湖)’의 근원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큰 공간을 이용하고 침대수가 많은 ‘방창병원’은 우리 이 국가가 관건시기에 내놓은 관건적인 거동이며 중국이 내놓은 중대한 공공위생 조치었다.” 이는 중국 공정 원 부 원장인 왕천(王辰)의 말이다. 하루가 좀 넘는 시간의 품을 들여 개조한 우한 시 회의전시 센터의 장한 방창병원(江汉方舱医院)은 2월 5일 저녁 10시에 선참으로 사용하기 시작, 1500여장의 침대가 일차적으로 각 사회구역에서 호송해온 환자들에게 개방되었고 첫 진 3개소의 방창병원 중 다른 2개소 역시 뒷 따라 재빨리 사용에 교부되었다. 엄동의 계절, 비록 남방지구라지만 우한에는 비와 눈이 교차하며 내렸다. 하루 사이에 수천 장에 달하는 침대를 마련한다는 것은 말이 쉽지 그 내막에는 수많은 간부와 의료일꾼들의 시간과 박투하는 정신과 노력이 깃들어 있었다. 우한의 여러 대형병원의 책임자들이 방창병원을 전면 접수 관리하기 시작, 방화용 전용망부터 하루 세끼의 영양배합에 이르기까지, 도서열람실부터 전문 경찰역량을 배치하여 치안순라를 하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질서가 정연하고도 모든 순서가 명백했다. 2월 28일에 이르러 16개의 방창병원에서 접수 치료하는 환자 수는 1만 2000명, 우한의 환자 매 4명 중 1명은 방창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으며 이런 방창병원들은 최종적으로 ‘0 감염, 0 사망과 0 재발(零感染、零死亡、零回头)’을 실현하였다. “방창병원은 중국이 성공적으로 코로나 19를 대응한 극히 중요한 창신 거동 중의 하나이다.” 이렇게 언급한 영국간물 ‘랜스(lance;lancet)’의 주필 리처드 호턴은 또 이는 세계의 기타 나라들에서도 따라 배울만한 중요한 경험이라고 평가했다. 2월 16일, 우한에서는 재차 예정 3일에 달하는 집중적인 융단 식 대 조사를 전개, 내막을 철저히 파악하고 바이러스의 확산을 견결히 억제했으며 감염자에 대해 단 1명의 누락도 없이 수용 치료 하였다. 전 시 421만 호의 주민가정들에 대해 2 라운드에 거쳐 융단 식 조사를 통하여 우한 시에서는 도합 9037명의 확진 및 의심 환자 그리고 대량의 밀 접촉자들을 발견, ‘접수할 건 마땅히 접수하고 치료할 건 마땅히 치료 한다’는 시진핑 총 서기의 명령을 100%로 수행하였다. 한편 36개의 질병 통제 방역 팀이 우한에 재집결, 전국적으로 3개의 이동 P3 실험실을 옮겨와 조사와 접수 치료에 영향을 주는 ‘애로’ 환절을 해결하여 핵산검사 능력을 지속적으로 승화하도록 했다. 이로써 우한에서는 ‘급과 유형에 따라 접수 치료하고 경증과 중증의 병원 배치가 순리로운 구급 시스템’이 형성, 예하면 호텔과 합작하여 집중 격리 장소로 정하여 밀 접촉자를 격리했고 방창병원에서는 경증 확진환자와 의심환자를 접수하였으며 훠선산(火神山), 레이선산(雷神山)과 퉁지(同济) 등 대형종합병원에서는 중증환자를 접수 치료하기 시작, 개방된 침대 수는 9000여 장이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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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0-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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