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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장장 1세기에 거친 ‘항공모함의 꿈’ ③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2011년 중국의 첫 항공모함이 건조대에서 출해, 성공적으로항행 시험 진행했다. 2012년 9월 25일, <요녕 함(辽宁舰)>으로 명명된 중국의 첫 항공모함이 정식으로 해군에 교부, 항공모함이 없는 중국해군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2017년 12월 17일, 중앙군위의 비준을 거쳐 중국의 첫 국산항공모함이 <중국인민해방군 해군 산동함(山东舰)>으로 명명, 해남성 삼아(三亚)에 있는 모 군항에서 해군에 교부되었으며 자국산 항공모함이 없던 역사에 커다란 종지부를 찍었다. 중국에 있어서 항공모함의 꿈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다. 1928년부터 항공모함의 건조를 계획하고 있었으니 거의 1세기 전부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산둥함.ⓒ인터넷 중국은 1985년부터 퇴역한 항공모함에 대해 학습하고 연구하기 시작, 항공모함의 설계에 대해 어느 정도 계시를 받았다. 1987년 3월, 당시 해군 사령원으로 갓 부임된 유화청 상장은 군위 지도일꾼들한테 해군 장비규획을 회보할 때 두 가지 계획에 대해 설명했다. 즉 항공모함과 핵잠수함으로 장원한 관점으로 볼 때 이는 국방건설에 있어서 유리하며 반드시 보유해야 할 장비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 지난 세기 90연대 초 소련이 해체되면서 국제 정세에는 급격한 변화가 생겼다. 이와 더불어 우크라이나에서 건조되면서 이미 70%가 완성되었던 <바랴그(Varyag)>호 항공모함 건조작업도 중단되었다. 그리고 소련이 해체되면서 재산분할시 <바랴그>호 미 완공 항공모함은 인적 및 지리적 원인으로 우크라이나의 소유로 되었다. 헌데 당시 우크라이나의 경제사정으로 <바랴그>호를 계속 건조할 여력이 없었으며 1992년 1월 작업이 중단되면서 중도폐철로 될 가능성이 컸다. 1993년 당시의 러시아 총리 체르노멜킨과 러시아 해군 사령 그루모프가 우크라이나 총리 쿠치마의 안내 하에 흑해의 조선소를 찾아와 <바랴그>호의 건조를 마무리할 것에 대해, <바랴그>호를 다시 러시아에 넘길 가능성 등을 두고 연구와 협의를 진행했다. 하지만 양 측은 적절한 절충안을 만들어 내지 못한 채 그냥 굳바이 하고 말았다. 그 뒤 1995년 이미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이 된 쿠치마는 <바랴그>호의 운명을 흑해 조선소에 넘겨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던 차 1995년 12월 쿠치마는 중국 북경을 방문하게 되었고 방문기간 양측은 우크라이나의 미 완성 항공모함 <바랴그>호를 중국조선소에 넘겨줄 의안을 두고 담판을 진행했다. 1997년 홍콩 주재 대륙 자본기구 창율그룹(创律集团) 총재 조리이며 홍콩 중문대학 졸업생인 요백량(姚柏良) 등이 우크라이나로 향발해 우크라이나 측과 <바랴그>호를 구입할 데 관해 협상하게 되었다. 1998년 4월, 마카오 창율 관광오락 회사(Agencia Turisticae Diversoes Chong LotLimitada-홍콩 창율그룹의 계열회사)가 입찰을 통해 2000만 달러(실제 도합 1억 달러 투입)의 대가로 <바랴그>호를 구입, 명목은 <바랴그>로 하여금 대형 해상종합 관광시설로 개조한다는 것이었으며 거기에는 디스코 청, 여관과 도박장 등 시설을 앉히기로 했다. 홍콩 창율그룹에서는 <바랴그>호 인수임무를 당시 홍콩의 유명상인이었던 서증평(徐增平1952년 생)한테 맡겼다. 서증평은 일종 도박에 가까운 큰 결심을 내렸다. 1998년 1월 27일, 서증평은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 도착한 후 다시 니콜라이 흑해 조선소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조선소에 도착한 서증평은 조선소 책임자의 안내 하에 <바랴그> 호에 올라 함선 전체를 고찰하였다. 당시의 <바랴그>호는 참신하고도 완전한 함체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주 정밀한 결구의 구조는 서증평으로 하여금 이 항공모함에 대한 인수의욕이 더욱 솟구치게 했다. 1999년 7월 홍콩 창율 회사에서는 견인선과 예인선(拖船)을 임대하여 <바랴그>를 밀어갖고 중국으로 가기로 하였다. 헌데 배가 니콜라이 조선소를 떠나자 국외의 일부 세력들이 저애하기 시작, <바랴그>호는 다시 흑해로 돌아왔고 한동안 조선소에 머물러 있으면서 출항할 수 없었다… 2001년에 이르러 <바랴그>호는 중국 외교부의 각고한 노력으로 중국으로 올 수 있는 일루의 희망이 보이었다. 그 해 8월 25일, 터키 국가안전위원회는 마침내 <바랴그>호가 터키 해협을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중국으로 오는 뱃길은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우선 <바랴그>호는 자체 동력이 아닌 다른 견인선과 예인선에 의해 움직이었기에 애로가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항해 과정 <바랴그>호와 기타 견인선과 예인선을 이은 로프(缆绳)가 끊어지는 일이 자주 생겼고 해상 폭풍을 만나는 등 일련의 좌절을 겪으면서 항행을 계속했다. 2001년 12월 11일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에돌아 인도양에 들어섰고 2002년 2월 5일에는 말라카 해협을 통과했으며 2월 12일에는 드디어 남 중국해로 들어섰다… …… 2002년 3월 3일, 천신만고 끝에 <바랴그>호는 마침내 중국의 항구도시 – 대련에 도착했다. 아침 5시경, <바랴그>호는 6척의 견인선과 예인선에 의해 대련 외항을 떠나 서서히 내항으로 들어왔고 오전 9시경 내항에 도착했으며 12시경 안전하게 대련 내항의 서구 4호 산적화물 부두에 정박, 약 4개월(123일)에 거쳐 장장 1만 5200마일을 마라톤식 항행해온 셈이었다. 6 위에서 언급했지만 새 중국의 항공모함 건조에 대한 도전은 1985년부터 본격 개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 도전은 맹목적인 것이 절대 아니었다. 적어도 1950연대의 <위성>을 쏴 올리고 5년에 영국을 능가하고 10년에 미국을 따라잡는다고 허풍을 치던 때와는 근본 달랐다. 간절했지만 조급해 하지 않았고 욕심도 컸지만 과학적이고도 현실적이었다. 중국은 퇴역했거나 퇴역을 앞둔 항공모함을 구매해서는 그것을 모체로 삼아 학습하고 연구했으며 그 기초 상 자체 개발에 모를 박았다. 한 발자국씩 국산 항공모함을 건조 생산하는 길을 더듬었던 것이다. 그 퇴역한 항공모함들로는 다음과 같다. <키예프(KievAircraftcarrier)>호 - <킹예프>호는 구소련의 항공모함으로 1970년에 건조, 이 항공모함은 비록 그 어떤 전역에도 참가해 보지 못했지만 복역기간 인도와 북한, 알제리 등 나라를 방문하였고 구소련의 <수정의 이상(水晶理想)>, <국가 명함장>으로 불렸으며 구소련 해군의 상징이기도 했다. 2008년 8월, 이 항공모함이 경매에 붙여지자 미국, 중국과 인도 등 9개의 매입신청 국가 중 중국이 입찰에 성공했다. 그 뒤 <키예프>호는 중국의 산해관 선박공업 유한회사로 인도되어 원상복구가 되었고 군사잔해로부터 평화 및 생태의 상징으로 되었으며 현재 천진 국제 여행낙원 항에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이면서 많은 관광객들을 끌고 있다. <민스크(Minsk)>호- 이 항공모함은 구소련 니콜라예프 조선소에서 건조, <키예프>호와 동급의 중형 항공모함으로 배수량이 4만 2000톤에 달하며 항공모함 및 순양함 2가지 기능을 모두 갖고 있었다. 이 항공모함은 12월 28일부터 건조하기 시작해 1975년 9월 30일 진수했으며 1978년 9월 27일 완공되었다. 소속은 구소련 태평양 함대였다. 이 항공모함은 1999년 8월 중국에 매각, 광주 문충 조선소에 인양되어 대규모 봉폐식 수리와 개조를 거쳐 2000년 5월 심천 대붕만 주제공원에 정박되어 관광객들의 참관용으로 되었다. <멜버른(mélbərn)> 호 – 이 항공모함은 원래 영국에서 건조한 <준엄>급 항공모함으로 1949년 1월 오스트레일리아에 매각되었으나 1956년 3월 5일에야 비로서 영국의 포츠머스 항에서 오스트레일리아로 향발했으며 이 해 5월 14일 오스트레일리아 함대의 사령관이 승선한 기함(旗舰)으로 명명되었다. 이 항공모함은 1969년 6월 3일, 미국 해군 <프랭크 E. 에반스(DD-754)>호와 충돌했고 1982년 1월 30일 퇴역하였다. 1984년 <멜버른>호 항공모함은 전부의 설비가 몽땅 철거되어 말 그대로 <빈껍데기>만 남았으며 1985년 고물로 되어 중국의 한 <금속 폐물 상>한테 팔렸다. 중국에 매입된 후 이 항공모함은 남해의 한 군사기지에서 부분적으로 분해 개조되었다. 이 중 승강장, 증기 이젝터(蒸汽弹射器)와 주 비행 갑판은 그대로 보류되었으며 중국은 이를 이용하여 준항공모함 함재 항공병 시험을 하군 하였다. … 이상에서 언급하다 싶이 중국은 <키예프>호, <민스크>와 <멜버른>호 등 이미 퇴역하였거나 퇴역을 앞둔 항공모함들을 매입하면서 두 가지로 활용하였다. 하나는 그 기본구조와 내부 시설 등에 대해 학습하고 연구하였으며 또한 군사연습용으로도 활용하였다. 둘째는 이런 항공모함을 최종 민간에 개방하여 관광용으로 되게 하기도 했다. 중국의 이런 과정은 결국 중국도 작전에 투입될 수 있는 항공모함을 갖추기 위해서였고 더우기는 최종 자국산 항공모함을 건조하기 위해서였다. 그 첫 보조로 중국의 첫 항공모함의 플랫폼은 바로 우크라이나에서 매입한 <바랴그>호였다. 배수량이 6만 7000톤이고 총 길이가 306미터에 달하는 이 항공모함은 2005년부터 대련 조선소에서 개조를 개시, 2011년 8월 진수에 성공했으며 몇 차례의 시험항행 후 2012년 9월 25일에 <요녕함>으로 명명되어 해방군 해군에 교부되었다. 다음 중국의 첫 자국산 항공모함의 건조는 비교적 순탄대로라고 할 수 있었다. 이미 몇 척의 낡은 항공모함의 구조와 성능에 대해 많이 장악하고 또한 <바랴그>호를 성공적으로 개조한 경험이 누적되었으며 자국산 항공모함을 기어코 자체의 기술과 힘으로 건조한다는 수많은 과학자들과 근로자들의 신념이 그 건조를 앞당기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결과 2013년에 착공한 첫 자국산 항공모함의 건조는 5년 미만 시일의 작업을 거쳐 2017년 4월 26일 진수에 성공했으며 2019년 12월 17일, 습근평 등 중앙 지도일꾼들이 참가한 가운데 <산동함(山东舰)>으로 명명되어 해군에 교부되었다. 장장 1세기의 파란만장한 풍운을 거쳐 중국 <항공모함의 꿈>은 실현되었고 중국 해군의 항공모함의 시대가 열렸다. 그것은 그 어떤 해상 강대국과도 힘겨루기를 할 수 있다는 뜻을 의미한다. 그 상대가 항공모함 11척을 보유한 미국과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항공모함 규모에서 미국과는 비교도 안 되지만 중국 해안에서의 항공모함 해전에서는 대등한 실력을 과시할 수가 있으며 또한 중국은 태평양을 건너 미국 본토를 칠 실력도 안 되거니와 그럴 뜻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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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23
  • 中 장장 1세기에 거친 ‘항공모함의 꿈’ 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2011년 중국의 첫 항공모함이 건조대에서 출해, 성공적으로항행 시험 진행했다. 2012년 9월 25일, <요녕 함(辽宁舰)>으로 명명된 중국의 첫 항공모함이 정식으로 해군에 교부, 항공모함이 없는 중국해군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2017년 12월 17일, 중앙군위의 비준을 거쳐 중국의 첫 국산항공모함이 <중국인민해방군 해군 산동함(山东舰)>으로 명명, 해남성 삼아(三亚)에 있는 모 군항에서 해군에 교부되었으며 자국산 항공모함이 없던 역사에 커다란 종지부를 찍었다. 중국에 있어서 항공모함의 꿈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다. 1928년부터 항공모함의 건조를 계획하고 있었으니 거의 1세기 전부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요녕함.ⓒ인터넷 3 항일 전쟁이 승리하자 진소관은 웅심 가득히 항공모함의 건조에 투신할 준비를 하였다. 헌데 그 시각, 중국의 대지에는 국공내전의 어두운 구름이 두껍게 내리 드리워졌다. 그 시기 장개석의 머릿속에는 오직 어떻게 하면 공산당을 숙청하고 나라 전체를 자기의 손아귀에 넣는가 하는 것뿐이었으며 해군건설 같은 건 완전히 머릿속에서 포기한 상태였다. 1946년 6월, 장개석 군대가 모택동이 영도하고 있는 공산당의 해방구로 진공을 개시함에 따라 중국에서는 전면적인 국공내전이 발발했고 국민당 해군 역시 그 내전에 휘말려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전 초기 국민당은 이른바 전국의 각 전장에서 <승승장구>했다. 이러자 내전을 우려했던 진소관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속타산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국민당이 승리하여 전국이 일원화의 계획 권에 들면 항공모함의 건조도 더욱 순리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쟁의 대세는 장개석과 진소관이 바라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이 됐다. 공산당의 유백승과 등소평이 이끄는 유-등 대군이 대별산으로 진군함에 따라 장개석은 해방구에 대한 전면 진공을 중점진공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고 임표의 동북인민해방군이 요심 전역에서 대승하여 전반 동북을 적색화시키자 진소관은 이른바 장개석에 대한 환상을 의심하기 시작했으며 요심전역에 이은 회해 전역과 평진 전역에서도 국민당 군이 괴멸에 가깝도록 얻어터지자 진소관은 자기의 <항공모함의 꿈>을 기본상 포기하였다. 1949년 11월, 대륙에서 패한 국민당 군을 따라 대만으로 떠나는 진소관은 일종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환멸에 싸여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여태껏 충성을 다하며 장개석을 믿고 따랐던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과 고통이었다. 이것으로 진소관과 국민당의 <항공모함의 꿈>은 국민당 군의 전면 패전으로 한 단락 막을 내렸다. … 4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 공화국이 창립된 후 얼마 안 되어 모택동은 높이 서서 멀리 보는 안광으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반드시 조선공업을 크게 벌여 대량의 선박을 건조해야 하며 ‘해상철길’도 구축하여 강대한 해상 전투역량을 건설해야 한다.” 모택동의 이 말에서 당시의 정무총리 주은래는 인차 항공모함을 머릿속에 떠올렸다고 한다. 1973년 10월 25일, 외국손님을 회견할 때 주은래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었다. “우리 중국의 남사군도와 서사군도가 남부 베트남이 점령하고 있다. 우리한테 항공모함이 없으니 우리의 해군들이 더 이상 총칼을 갖고 결사전을 벌일 수도 없는 일이다. 나는 한평생 군사와 정치를 해왔으나 오늘까지도 우리 중국의 항공모함을 보지 못했다. 중국산 항공모함을 볼 수 없다는 건 그야말로 평생의 유감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 장시기 이래 중국해군 역대의 지도군인들은 자국산 항공모함의 발전을 두고 크나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초대 중국해군 사령원이었던 소경광(萧劲光) 대장은 일찍 자기 기고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 중국해군은 항공모함을 수요한다. 한 함대가 먼 바다에서 활동할 때 항공모함이 없으면 곧 제공권을 잃게 된다. 제공권이 없으면 곧 먼 바다 작전의 승리를 보장할 수 없다… 또한 해군 사령원을 맡은 적이 있었던 전 중국 군사위원회 부주석 유화청 상장 역시 진작 항공모함에 대해 그 욕망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그는 수차 “만약 해군에 항공모함이 있다면 작전 질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 전 방위적인 작전 능력이 크게 향상될 것으로 보며 군대의 위력과 국가의 위력에도 큰 변화가 생기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1970연대부터 중국인민 해방군은 항공모함에 대한 연구를 시작, 항공모함에 대한 의식이 대대적으로 높아졌다. 당시 중국은 이미 유엔에서의 합법적 지위를 회복했고 또한 유엔의 5개 이사국의 하나로 되었다. 헌데 유엔의 5개 이사국 중 유독 중국만이 항공모함이 없었다. 이는 대국으로서 또한 국제적으로 영향력이 막강한 중국으로 볼 때 일종 커다란 수치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중국 외 4개의 이사국들은 모두 항공모함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 중 <항공모함 대국>인 미국은 이미 11척의 항공모함을 갖고 있었다. 이는 세계 항공모함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셈이었다. 이 외 구소련은 배수량이 6.75톤에 달하는 대형 항공모함을 보유, 영국은 2척의 <엘리자베스 여왕>호 급의 신 일대 항공모함 건조를 계획하고 있었으며 프랑스 역시 배수량 4만 톤에 달하는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호 중형 핵 동력 항공모함을 갖고 있었다. 또한 중 소 국가 역시 분분히 구매 하거나 자체로 항공모함 건조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 중 중국 주변의 인도는 견정 불이하게 <3척의 항공모함 전략>을 관철, 2척을 구매와 개량 외 자체로 국산인 <바이크란트(Vikrant)>호를 건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다음에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5-23
  • 中 장장 1세기에 거친 ‘항공모함의 꿈’ ①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2011년 중국의 첫 항공모함이 건조대에서 출해, 성공적으로항행 시험 진행했다. 2012년 9월 25일, <요녕 함(辽宁舰)>으로 명명된 중국의 첫 항공모함이 정식으로 해군에 교부, 항공모함이 없는 중국해군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2017년 12월 17일, 중앙군위의 비준을 거쳐 중국의 첫 국산항공모함이 <중국인민해방군 해군 산동함(山东舰)>으로 명명, 해남성 삼아(三亚)에 있는 모 군항에서 해군에 교부되었으며 자국산 항공모함이 없던 역사에 커다란 종지부를 찍었다. 중국에 있어서 항공모함의 꿈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다. 1928년부터 항공모함의 건조를 계획하고 있었으니 거의 1세기 전부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일본 항공모함.ⓒ인터넷 1 중국인들이 항공모함의 꿈을 꾼 것은 그닥 늦은 편이 아니었다. 세계 패권을 장악하려면 바다로 진출해야 하고 바다로 진출하려면 강대한 해군과 함정이 있어야 하며 이러자면 반드시 항공모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시 중국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영국과 스페인이 세계 각 대륙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강대한 해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다면 중국이 다른 대륙으로 진출하기는커녕 자주 얻어터지는 것은 바로 강대한 해군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민국정부는 깨닫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찍 1928년 당시 국민당 해군 서장(署长)이었던 진소관(陈绍宽)은 자기의 군사저서에서 처음으로 항공모함을 건조할 계획을 서술하였다. 이는 영국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전통식(全通式) 비행갑판이 있는 <헤르메스(Hermes)>호가 건조된 지 근근히 10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 뒤 진소관은 자기의 <항공모함 건조안>을 국민당 중앙에 건의, 1929년 8월 14일, 국민당 제2기 5중 전회에서 통과된 <군사정리안(整理军事案)>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었다. “오국(吾国-우리나라라는 뜻)은 해안선이 길고 판도 또한 크지만 현재 해군의 실력은 미약하고…. 향 후 국방계획 중 반드시 실사구시하면서 해군을 발전시켜야 하는바… 국방계획을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2일 후 상해 강남 조선소에서 건조한 포함 <함녕(咸宁)>호 갑판에는 해군 병사들이 기립자세로 늘어선 가운데 장개석 위원장의 연설이 있었다. “국가의 권리를 되찾기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강대한 해군을 건설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중화민국으로 하여금 세계에서 일류로 가는 해군을 가지게 해야 합니다. 이는 전적으로 여러 사병들한테 달려 있습니다. 예견하건대 우리는 15년 내에 배수량 60만 톤에 달하는 전함을 가진 해군력을 확보하여 세계 일류의 해군을 건설해야 할 것입니다.” … 1930년 중화민국 해군부에서는 항공모함, 장가순양함, 잠수정 등을 건조할데 관한 6년 계획서를 제출했다. 그 구체적 계획으로는 다음과 같다. 항공모함 1척, 장갑순양함 2척, 순양함 2척, 대중소형 구축함 28척, 대중소형 잠수정 24척 … 이 외 각종 포함, 소해정(扫雷艇), 잠수모함, 어뢰정, 운수함 등 도합 106척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당시 내전이 끊임없이 발발하고 정부의 재정이 극히 어려운 사정 등으로 이 <신기루>같은 함정건조계획은 근본적으로 실행에 옮길 가능성이 없었다. 국민정부의 해군전략사상 구축 및 구체발전 책략은 자꾸만 미루면서 최종 방안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1932년 1월 진소관이 해군부 부장으로 된 후에야 중앙 해군은 비로서 비교적 안정적인 발전시기에 들어섰다. 2 전 국민당 육군 및 해군의 1급 상장이었던 진소관은 중국 전구를 4개의 대전구로 나뉘고 20척의 항공모함을 건조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1937년 7월 7일, <노구교 사변>의 발발로 중국이 전면 항전단계에 진입하자 진소관은 부득불 잠시 그 계획을 접고 현유의 함정으로 항일전에 투입할 준비를 포치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중국 해군의 항일전은 주로 장강 중하류에 집중되었으며 가장 치열한 전투는 강음(江阴)에서 있었다. 1937년 8월 상순, 일본함대가 강을 따라 서쪽으로 올라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하여 국민정부는 적지 않은 선박을 강에 침몰시켜 강음에 봉쇄선을 구축하였다. 이러자 일본군은 이 봉쇄선을 돌파하기 위하여 항공모함 <호쇼(Hōshō)>호에 있던 비행기를 출격하여 대규모로 되는 폭격을 감행, 봉쇄선에서 방어하던 국민당 해군 제1함대는 거의 모두가 폭격으로 침몰되었다. 그 뒤 일본의 항공모함은 경상적으로 중국의 영해로 출몰하면서 육에서의 행동과 배합하군 했다. 강음해전 중 일본군의 공중우세는 진소관으로 하여금 항공모함의 작용을 더욱 중시하게 했다. 강음해전은 1937년 8월 16일, 강음대전의 개시와 더불어 12월 1일 강음에서의 철퇴(강음 포대 12월 3일 함락)에 이르기까지 도합 108일간 진행되었다. 강음해전은 항일전쟁 중에서의 보기 드문 육해공 3군 입체작전이었으며 항일전쟁기간의 유일한 해군전역이었다. 오랫동안 중국의 해안에서 위풍을 떨치던 함대는 일부는 산동의 연태에서 침몰되었고 주력의 전부는 강음에서 복멸되었다. 이는 중일 갑오전쟁이래의 가장 중대한 손실이었다. 강음 보위전에서 일본군은 도합 4척의 항공모함을 출격하여 당시 중국해군의 거의 모든 주력 전함을 격침시켰고 강음요새를 초토화시켰으며 당시의 중국해군부대로 하여금 거의 재기불능에 가깝게 만들었다. 1943년 11월, 진소관은 해군부를 대표하여 재차 해군건설 계획을 제출, 이 계획 중에서 그는 이미 몇 척의 항공모함에는 더 이상 만족하지 않고 몇 개의 항공모함 군을 제조할 야망으로 차 있었다. 당시 그는 중국 연해를 4개의 해군 역할 구역으로 획분, 제 1 구역은 요녕의 안동(지금의 단동)으로부터 산동반도의 성산도(成山头)에 이르고 제 2 구역은 성산도로부터 장강 하구까지에 이르렀으며 제 3 구역으로부터 광동의 산두(汕头)까지, 제 4 구역은 산두로부터 중국 – 베트남 변경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다음 매 해군 구역마다 1개 지대의 해안방선 함대를 창립, 항공모함 5척씩 4개 해군 구역에 도합 20척의 항공모함을 두기로 하였으며 매 한척의 제조 원가는 18억 원에 달했다. 이 계획서를 보고 당시 장개석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으나 진소관은 “이 돈은 아낄 필요가 없다”고 역점을 찍어 강조하였다. 당시 전시상태에 처한 중국의 상황으로 놓고 볼 때 이 계획은 현실적 가능성이 거의 없는 <탁상공론>이나 다름이 없었다. 진소관 역시 이 점에 대해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먼저 장개석한테 주의력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도 매우 뜻깊다고 인정했다. 1945년 8월, 항일 전쟁이 곧 승리하게 될 무렵이 되자 진소관은 진짜로 행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당시의 군정 부장 진성(陈诚), 전서청(铨叙厅-주관 인사의 청) 청장 전탁륜(钱卓伦) 등을 설복하여 <해군 분담방위 계획(海军分防计划)>을 제정, 이 계획은 몇 년 전의 계획을 수정한 것으로 원래 20척으로 계획했던 항공모함을 12척으로 적게 계획한 것이었다. 이는 더욱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방안을 접수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진소관의 해석에 따르면 이 12척의 항공모함 역시 1차적으로 건조하는 것이 아니고 그 기한을 30년으로 하였다. 첫 10년 계획으로 1만 톤짜리와 8000 톤 짜리 항공모함 각각 1척씩 건조, 매 1척의 건조원가는 각각 6280만 달러였다.(다음에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5-23
  • 별거가 별거더냐
    ● 별이 짐은 아내에게 금시계를 팔아 머리핀을, 델라는 남편에게 금발머리를 팔아 시계 줄을 준비했다는 오헨리의 소설 “크리스마스”가 떠오른다. 서로를 위해 자신의 소중한 물건까지도 잃을 수 있는 가난한 부부의 감동적이고 절묘한 예감의 사랑처럼 이제 다시 이런 사람 만날 수 없듯이 재혼도 서로 진지하게 대한다면 사랑이 하나처럼 뜨겁고 어쩌면 바보를 만드는 영혼을 만날지도 모른다. 한국 모 회사에 취직한지 1년쯤 되는 로찐(老金)의 사연이다. 그는 초담배도 아껴 피우고 조선족 동료들의 술추렴에도 참석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그러자 같은 동료들은 늘 뒤에서 수군수군 그를 비꼬곤 했다.«돈 너무 아껴서 좁쌀 톱으로 켤 사람»이라는 둥, «제 털 뽑아 제 구멍 막을 사람»이라는 둥. 하지만 로찐은 묵묵부답, 자기 일만 열심히 할 뿐이었다. 남들한테서 소외감을 느낄 때 그는 핸드폰을 열고 아내의 영상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국제통화를 통해 외로움을 달래군 했다. 그라고 왜 힘든 일을 하면서 친구들과 술자리도 같이 하면서 피로를 풀고싶지 않겠는가? 타향살이 고국에서 같은 동포들한테까지 이질감을 느낄 정도로 행동하는 로찐은 바로 아내와의 약속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내는 5년전 재혼녀이다.정규적인 직장이 있고 집 한채가 있는 마음 착한 여자가 남은 여생을 달랑 가진 것이란 건장한 40대 체구밖에 없고 빚까지 가득 걸머진 그에게 바치기로 약속하니 로찐은 이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날듯이 기뻤고 그녀를 위해 머든 하겠다고 맘을 먹었다. 그러다가 바로 2년전 아내는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로찐은 허리를 크게 다친 아내의 똥오줌을 받아내고 하루 세끼 음식을 해서 날라다주는 등의 지극정성을 보였고 아내 역시 빨리 완쾌되어 한달만에 퇴원하게 되었다. 로찐에게도 한국 갈 기회가 생겼다.그래서 어느 하루 아내를 앉혀놓고 말을 꺼냈다. «내 지금 돈을 벌지 못해 이 꼴이 되었는데 정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한국에 가서 돈벌고 싶소. 당신이 좀 기꺼이 날 한국에 보내주구려.» 간절한 남편의 눈빛에 아내는 «마음만 변치 않으면 되요.» 하고 대답하며 4만원(인민폐)의 돈뭉치를 꺼내 놓았다. 교통사고 보상으로 받은 돈으로 로찐이 전에 친척,친구들한테 진 묵은 빚들을 청산하라는 것이다. 로찐은 아내의 지극한 사랑에 감격돼 울컥하면서 «내 돈을 벌기 시작하면 꼭 이 돈부터 갚겠오.»라고 말하니 아내는 “부부간에 무슨 돈을 따지는 가요. 그저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하루빨리 이루고 돌아오길 기다릴게요.” 하면서 로찐을 살풋이 안아주며 등을 다독여준다.로찐은 «그 돈이 어떻게 돈인데...» 하면서 울먹거렸고 아내의 돈을 꼭 갚겠다고 약속했다. 지난해초 F-4비자로 한국에 나오게 된 로찐은 아내와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죽기내기로 일하면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서울 한바퀴 돌면서 구경하고 싶었지만 꾸욱 참았고 친척.친구들과도 만나 술 나누면서 회포를 누리고 싶었지만 역시 꾸욱 참았다.월급 나오면 곧바로 은행에 달려가 아내에게 송금했다. 이렇게 열달동안 일하면서 끝내 아내에게 빚진 돈을 몽땅 갚을 수 있게 됐다. 그러던 어느날 아내한테서 먼저 전화가 왔다. «집이 철거이주를 하게 되었는데 호주인 당신이 있어야 일이 해결될 수 있지 않을가요?» 어쩔 수 없이 로찐은 말미를 맡고 연길에 날아 왔다.집에 가보니 철거이주는 무슨. 그냥 남편이 너무 그립고 보고싶어 또 고생하는 남편이 하루라도 더 쉴 수 있도록 아내가 아름다운 거짓말을 한 것이다. 재혼이지만 그들의 사랑은 참으로 우리들의 가슴을 울린다.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뒤에서 재혼 부부들에 대해 숙덕공론을 한다. 서로 멀리 떨어져 가정을 지킬 수 있을 지 여부는 시간이 결정해준다며 로찐에 대해 2년,3년 지나면 분명 뭔가가 달라질 것이라고 헛가래를 뗀다. 그도 그럴것이 부부중 한쪽만 한국 가면 그 가정은 십중 팔구 파탄되고 만다는 것이다. 화룡에서 온 전씨는 한국에 온지 2년만에 중국 남편과 이혼하고 대학 간 아들애한테 학비와 생활비를 부쳐주기 위해 힘든 일을 가리지 않고 이악스레 일해 돈을 모았다. 드디어 아들애가 학교를 졸업하고 자립할 수 있게 되자 지인의 소개로 같은 동포 남자를 만나 로후를 기탁하기로 맘먹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손버릇이 나빠 쩍하면 때리고 가장기물을 부시고 내던졌다.또다시 감히 이혼할 엄두도 못내던 전씨는 능력 없지만 착했던 전 남편과 아들애 셋의 오붓했던 생활이 점점 그리워날뿐이었다. 중국에서 가짜 이혼을 한 주씨, 한국으로 오기 위한 편법으로 이혼을 한 것이지만 결국 진짜 이혼이 되고 말았다.국적을 따기 위해 긴긴 세월 한국 남자와 동거생활을 해야 했고 중국에 남아 생활하던 남편도 인정과 육정이 그리워 다른 여자를 찾았더 것이다. 중국에서 실제로 이혼을 하고 한국 남자를 얻어 국적도 얻은 후 문화적 차이로 이혼을 다시 한 여자도 있다. 극적으로 원 남편과 자식들도 한국에 불러들여 가정이 원상복귀된듯 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남편이 아내와의 잠자리를 불결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편한테 더 이상 여자로서의 사랑을 받을 수 없게 되자 결국 다시 헤어지고 말았다. 연해도시로, 한국으로, 일본으로 각자 남편이 취직생활을 떠난 40대 후반부터의 세 자매가 있다. 한 자매가 무도장 출입을 시작하면서 딴 남자를 사귀게 되자 덩달아 다른 두 자매도 딴 남자를 만나 보게 되었다. 이러면 안 된다고 제지를 해야 할 언니나 자매들이 날이 가면서 서로를 이해한다는 식이 되고 말았다. 일도 없이 먹고 놀자니 쉽지 않고 혼자 쭈욱 지내자니 고독하고 살림하면서도 남자의 손길이 그리웠기때문이다.. 별거하는 시간이 길수록 부부간의 반목의 틈새도 커진다. 별거가 진짜 별것이 아닌 것으로 되어버린 세상이 오고 말았다. 한국에서는 최근들어 여성 직장인들도 갈수록 늘어나면서 주말, 월말부부가 늘어난다고 한다. 부부간에 대화할 공간이 줄어들면서 은근히 다른 이성한테 기대고 싶은 갈망이 생긴다고 한다. 그래서 서로 대방에게 말못할 비밀을 한두개쯤 갖고 있는 것은 보통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일주일 1개월도 아닌 1년, 지어는 몇년씩 서로 얼굴도 못보고 살야야 한다.한국에 오게 되면 처음에는 일만 하고 가족에 충실해 전화도 자주 하고 월급만 받으면 송금도 꼭꼭 한다. 그러나 점차 한국생활에 적응되고 돈도 꽤 많이 벌어놓았다면 한번쯤 딴 짓거리 하고 싶은 맘이 들 것이다.결국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식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 조선족을 주인공으로 한 한국영화 “황해”의 영상 화면들이 문뜩 떠오른다. 영화 내용이 어떻든 한국에 떠나버린 자기 아내를 찾기 위하여 결국 자기 생명까지도 불사하게 되는 한국행. 아내가 딴 남자를 봐두었다는 소문을 듣지만 않았어도 아무리 가난해도 자기 목숨만을 내걸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주인공이 황해에서 밀항해 돌아오는 길에 바다에 빠져죽는 참극을 초래하는 영화는 주제와 상관없이 추상적이 아닌 현실이다. 한국으로 돈 벌러 간 우리 조선족 가정, 끝없는 별거 때문에 수많은 가족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통계에 따르면 지금까지 9만명에 이르는 중국인이 국적을 신청했다고 한다. 단연 조선족이 대다수를 점한다. 한국인과 혼인을 하고 2년을 넘긴 자. 한국에서 5년이상 거주한 자라면 국적을 신청할 수 있다고 한다.또한 노무현 ‘참여정부’시절 수천명의 조선족들이 국적회복 신청을 받아달라며 집단 단식농성까지 벌린적이 있었다. 우리 조선족들이 그토록 영주권과 국적신청에 집착하고 열을 올리는 것은 뭣때문일가?물론 모국에 대한 애착만이 아닐 것이다. 더 오래 한국에 머물면서 돈을 벌기 위한데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국에 더 오래 남았을수록 중국에 남아있는 가족 안녕과 생활 리듬이 깨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사코 한국행에 오르는 우리는 너무 처절하고 외롭고 쓸쓸하다. 붉은 볼 따오기처럼 부부라는 낱말에 충실하고 짝을 잃으면 자살을 불사하는 것과 달리 우리에겐 사랑이 별것이 아니고 별거가 별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돈 벌러 기를 쓰고 남쪽으로 날아갔다가도 가족과 자기 살던 고장으로 가끔 되돌아오기도 한다. 가족과 해외로 오가는 우리는 철새가 아닌가. 터키의 비레지크 지역에는 붉은 볼 따오기 새가 살고 있다. 이 새의 피부와 부리는 붉은 색이며 햇빛을 받으면 다른 몸 부위는 청동 빛을 띤 초록색과 보랏빛이 감도는 깃털로 덮여져있다. 이 새는 철새로 우리에게 익숙히 알려진 제비처럼 8월, 9월이면 과동을 준비해 따뜻한 지역을 찾아 날아가고 2월,3월이면 다시 제 지역으로 돌아온다. 특히 놀라운 따오기의 특징은 한번 짝이 되면 평생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이 새는 짝이 죽으면 깊은 슬픔에 잠기는 가 하면 먹이를 먹지 않아 굶어죽거나 절벽에서 뛰어내려 죽는 일도 일어난다고 한다. 하여 이곳 주민들은 봄의 전령사로 이동했던 따오기가 돌아오면 북을 치고 축제행사를 벌여 따오기새를 반겼다. 그런데 농업용 살충제가 도입되는 등 환경 변화로 돌아오는 붉은볼 따오기새 수는 점점 적어져 최근에는 몇 마리수가 안되었다. 하여 그 곳에는 그에 따른 사육장이 개발되어 새들이 이동하는 시기에 커다란 새장 안에 가두어 사육하고 돌아올 시기면 풀어 주었다. 이런 방법으로 몇 년 동안 철새의 개체 수를 억제해보았지만 그 다음해 풀어놓은 붉은볼 따오기는 또다시 환절기가 되자 떠나고 돌아오지 않았다. 과학자들과 정부당국의 고심에도 불구하고 붉은볼따오기의 이주본능은 계속된 것이다. 붉은볼 따오기의 이주본능처럼 우리도 철새가 되었다. 살기 좋은 지역으로 이주하는 본능.명절이나 기회가 되여야 가족과 고향이 있는 곳으로 귀가하려는 의지. 하지만 이 철새는 원조처럼 일편단심의 사랑을 지향하고 있다. 사랑을 위하여 자신의 한 몸도 벼랑에 부딪쳐 목숨을 끊는 용기가 필요한 새. 평생 다른 짝을 찾지 않는 새. 그래서 그곳 주민들의 길조로 사랑과 환영을 받는 새, 우리는 이런 새가 될 수 없을가. 새로 가정을 이루었다고 해도 그 소중한 가족의 참의미를 알고 지켜낼 수 있다면 우리는 별거도 기꺼운 그리움이다. 별거가 별것이 아닌 아주 특별한 별거로 우리는 정말 못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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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8
  • "발리"와 "발이"
    ●김경화(재중동포작가)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애가 급기야 발리(<발>: 발이의 중국식 꼬부랑혀 발음)????를 입 밖에 토해낸 것은 지난 4월말경의 어느 아침, 유치원에 가려고 자기 스스로 신을 신다가 말고서였다. 나는 한참이나 멍해있을 수밖에 없었다. 설마 했는데… 남편과 나는 둘 다 출근족이다 보니 애가 일곱 달 되던 때부터 남의 손에 맡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친정 쪽에도 시집 쪽에도, 단 하루도 애를 봐줄 수 있는 사람조차` 없다보니, 물론 친할머니, 외할머니 다 계시지만 연세도 있고 사정상 애를 맡길 수 없는 상황이라 그동안 보모 손에서 전탁으로 전전긍긍하면서 그야말로 전쟁을 치르듯 살아왔던 우리. 애를 제대로 봐줄 수 있는 보모만 구했더라도… 여러 가지로 마땅치 않아 골머리를 앓으면서 지내오다가 아들애가 스무 개월 되던 지난해 11월, 끝내 참지 못하고 탁아소(어린이집)를 알아봤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생겼다. 우리가 사는 구역이 한족(중국인)들만 모여 사는 집거구역이라 조선족탁아소를 찾을 수가 없었다. 시내 공중버스를 이용해 애를 데려가고 데려올 수 있는 그런 곳도 샅샅이 돌아보았지만 한족탁아소뿐이였다. 그러던 중 우리 집과 가까운 곳에 규모가 잡히고 환경도 괜찮은 유치원을 발견했는데 마침 탁아소까지 곁들어 있어 마음이 끌렸다. 한족유치원이긴 했지만 조선족반도 있었고, 탁아소에도 한족선생님 두 명에 조선족선생님 한 분이 계셔서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시간상 더 돌아볼 여유도 없어 아들애를 그 유치원에 붙이기로 결정했다. 한창 말을 번지기 시작하던 때라 혹 꼬부랑 한족(중국)말부터 배우지 않을까 내심 우려도 했지만 조선족 선생님이 계시니 괜찮을 거다, 그리고 한족말 배워서 나쁠 것도 없지 않은가. 중국에서 살고 있는 한 한족 말을 능숙하게 하는 것도 어쩌면 낭패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애를 유치원에 데려가고 데려오고 하는 일을 나보다 시간적 여유가 더 많은 남편한테 떠맡겼다. 그냥 별 탈 없이 유치원과 집 사이를 잘 오가는 아들애를 보면서 소반부터 조선족반으로 옮기면 된다고 간단하게 생각했고 .마마(엄마), 빠바(아빠), 나이나이(할머니)와 츠판(밥 먹어) 정도의 한족 말을 구사하는 것은 그저 좋게만 받아들였다. 주변에서도 중국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구사하는 아들애를 보고 어린 것이 대단하다며 칭찬할 때면 솔직히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었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내가 방심하고 조금씩 으쓱해하고 있는 사이에 아들애의 혀는 어느새 중국 특유의 꼬부랑혀로 변해가고 있었고 언제부터인가는 한족말만 해대고 조선말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조선말은 시켜봐야 겨우 한두 마디 하는 정도였고 일상용어가 완전히 한족말로 바뀌운 것이다. 몇 마디 말을 더 시켜봤더니 그전에는 잘만 하던 "오리"도 어느새 "올리"로 꼬부라져 있었고 대신 한족 말은 아주 정확하고도 또렷하게 발음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조선말은 하기 싫어 짜증을 부리기도 했다. 나보다 유치원사정에 더 밝은 남편이 어느 날인가 아들애네 탁아소에 조선족애가 두 명뿐이라 선생님들이 거의 조선말을 안 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나름대로 중국 땅에 살지라도 자기 민족의 뿌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다니던 내가 어쩌다가 아들애를 혀꼬부랑이로 만들었단 말인가! 중국에 사는 조선족, 이중성을 띤 민족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떡하다보니 우리는 고국을 앞뒤에 두고 타국을 조국이라 부르면서 살게 된 것이다. 다행이라면, 중국에서 살고는 있지만 자기 민족의 언어와 풍속습관, 문화를 잊지 않고 지키고 발전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가 중국에서 한족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면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에 조선족인구가 점점 줄어들고 있어 2,3십 년 후에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없어질 지도 모른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또한 우리 민족교육이 위기에 처한 것도 타민족에 비해 현저하게 낮은 조선족 인구 출생률 문제도 있겠지만 더 큰 문제는 많은 학부모들이 자식을 한족학교에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어려서부터 중국어를 배우면 물론 좋은 점은 많다. 중국어를 능란하게 구사하고 중국인들 속에서 그들과 어울려 그들의 문화를 배우고 생활해 가면 중국이라는 이 거대한 땅덩어리에서 생존해나가기에는 많이 유리할 것이다. 이는 자식을 한족학교에 보내는 부모님들의 공통된 생각이기도 하다. 자기 자식을 중국에서 좀 더 편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그들에 대해 왈가왈부 말썽들이 많았지만 내 자식을 위한 부모의 마음 그것을 누가 감히 뭐라고 할 것인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중한 수교 이후로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점점 커가는 양국 간 경제무역 거래로 인해 중국 내지에 한국어에 능통한 인재 수요가 급증했고 중국인들 속에서 한국어 학습 붐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어 학습 붐은 여기 조선족 집거지인 연변에도 세차게 불어치고 있다. 연변대학 한국어학부는 응시하는 수험생이 너무 많아 고시에서 어지간한 높은 점수를 맞지 못하면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또한 갈수록 많은 한족들이 자기 자식을 조선족 학교에 보내고 있다. 그런데 내가 아들애를 한족 유치원에 보냈다는 큰 실수를 저지르다니. 김치와 토장국으로 식단을 차리고 빨래를 푹 삶아 짱짱 빨래 방치소리까지 곁들여야만 직성이 풀려하는 내가 아니던가. 조선족은 참 알뜰하다, 이런 식의 칭찬을 중국인들한테서 들을 때면 가슴 한구석이 뿌듯했던 내가 아니었던가. 어디 가서나 가장 자랑스러웠던 그 한마디― 저는 조선족입니다, 바로 그거였는데. 한류열풍이 중국대륙을 강타했을 때 인터넷상에선 한국과 조선족은 어떤 사이냐고 묻는 중국인들이 많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고. 현재 중국에 살고 있지만 그들과 똑같은 조선민족이라고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며 설명해주곤 했다. 중국을 항상 앞서가는 한국이 우리의 고국이고 한국인들과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 큰 자랑이었다. 그런데 나는 어느새 아들애를 허울만 조선족인 우리말도 할 줄 모르는 중국애로 키워가고 있었다. "발리", 그것은 누가 들어봐도 중국인이 우리말을 하는 그런 모습인 것이다. 먼 훗날, 아들애가 어느 날 "엄마, 엄마는 왜 날 자기 민족의 언어도 제대로 구사 못하는 놈으로 만들었어요? " 하고 물어온다면 과연 나는 무엇이라 대답해야 되는 것일가? 그리고 어느 날, 중국인들이 왜 당신 아들애는 자기 민족의 언어도 제대로 구사 못하는가고, 과연 조선족이 맞긴 맞냐고 한다면 그 역시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나 스스로 만들어낸 숙제 앞에 나는 기분이 착잡해져만 갔다. 아들애가 민족어를 잊어가고 있는 것에 대해 절대 그대로 놔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들애를 민족어도 구사할 줄 모르는 반쪽짜리 조선족으로 만드는 죄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아들애도 나처럼 우리 민족에 대한 긍지감을 안고 살아가게 하고 싶었다. 단군의 피와 살을 이어받은 몸으로서 내 민족의 전통과 언어, 문화를 지키고 빛뿌리며 거기에 타민족의 언어까지도 잘 구사할 수 있는 사람, 그것이 바로 우리 민족의 후예다운 모습이고 이 시대가 바라는 인재가 아니겠는가. 이제라도 나는 아들애를 "발리"가 아닌 "발이"를 정확하게 구사할 줄 아는 진정한 조선족으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 민족을 사랑하고, 그래서 내 민족의 언어, 문화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빛뿌려갈줄 아는 그런 인간으로 말이다. 지금 아들애는 집과는 거리가 좀 멀리 떨어진 조선족유치원에 다니고 있다.. "발리사건"이 있고 나서 불달린 마음으로 유치원을 옮겨버린 것이다. 거리가 멀다고는 하지만 통근차가 아침저녁으로 다녀서 큰 불편은 없고, 무엇보다 교령이 십년이상 되는 아들애 담임 선생님이 참 맘에 들었다. 아들애도 처음엔 그동안 한족유치원을 다녀서인지 첨엔 생활이나 언어 등 면에서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더니 한 달이 지나니 새로운 환경에 점점 적응되고 다른 애들하고 잘 어울려 놀기 시작했다. 우리말 노래도 배우고 춤도 배우고, 단어도 하나하나 익혀가는 모습이 대견스럽기만 하다. 따라서 "올리(오리)", "발리(발)" 등 중국식 꼬부랑발음을 하던 혀도 많이 펴진 듯 했다. 이제 발을 "발리"가 아닌 "발이"로 옳게 발음할 수 있는 아들애, 오리를 "올리"가 아닌"오리"로 옳게 발음할 수 있는 아들애. "곰 세 마리", "반딧불" 등 우리말 노래도 제대로 다 부르고 만두가 아닌 토장국에 김치를 좋아하며 어른들을 만나면 구십 도로 허리를 굽히면서 «안녕하세요? 잘 가세요,» 등 인사도 제법 잘한다. 이제 나는 아들애한테 우리 말 우리글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사랑하는 그런 민족의 자긍심을 가르쳐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전통과 역사를 가르칠 것이다. 단군할아버지가 누구이며 훈민정음을 만들어낸 세종대왕이 누구인지를 가르쳐줄 것이다. 그래서 먼 훗날 아들애가 성인이 되고난 후 중국이거나 한국만이 아닌 세계 그 어느 곳에 가서더라도 우리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안고 우리 민족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게. 오늘도 나는 아들애에게 "발이"를 해보라고 한다. "발이, 발이". "발리"가 아닌 "발이, 발이". 그리고 나는 아들애한테 이렇게 속삭인다. 이제 너는 그 두 발(발리가 아닌 발이)로 중국이라는 이 땅덩어리 위에서, 더 나아가 세계의 중심에 서서 자신만의 세상을 그러안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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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6
  • 여성주의시각으로부터 본 연변지역 조선족 여성 항일운동
    ●방미화 중국조선족은 항일전쟁과정에서 가장 먼저 반일혁명에 참가한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이다. 통계자료에 따르면 연변지역 총 항일열사 중 조선족이 무려 3,204명을 차지하며 그 가운데서도 조선족 여성 항일열사는 338명에 달하여 조선족열사의 10.54%를 차지한다('중국공산당연변역사대사', 2002). 현재까지 조선족 항일전사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남성전사에게 집중되었다. 설사 조선족 항일 여전사에 대한 자료라 해도 그들의 항일에서의 공헌을 높이 평가하는 공헌사, 보충사의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항일활동 속에서의 결혼, 출산, 자녀양육 등을 둘러싼 그들의 처우에 대한 여성학적인 해석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에 필자는 본고에서 여성주의시각으로부터 출발하여 연변지역 조선족 항일 여전사들의 항일활동에 내포된 여성해방의 함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연변지역 조선족 항일 여전사들은 대부분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열악한 경제적 환경 속에서 어릴 적 부모를 도와 농사를 짓거나 가무를 담당함으로써 힘들었던 노동생활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결혼 이후에도 힘들게 항일운동 농사짓고 각종 생업에 종사하면서 생계를 유지해나갔다. 그들은 혁명에 참가하기 이전 자신들을 둘러싼 가부장적 문화와 가정 안팎에서 여성들의 희생만 요구받는 현실 때문에 고달픈 인생을 살아갔다. 그러던 것이, 그들에게 의식전환의 계기가 찾아오게 된다. 바로 당시 연변지역에서의 민족주의계열의 여성계몽운동, 공산주의 계열에서의 남녀평등과 여성해방 사상 전파 등 사상적 배경 하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가난한 처지를 불공평한 사회적 현실로 자각하면서 그러한 가난은 일제 침략, 지주와 자본가의 착취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한다. 이 뿐만 아니라, 봉건적 남존여비사상에 얽매인 전통가정의 속박에서 벗어나 글을 배우고 사회에 눈을 떠야만 진정한 남녀평등을 실현할 수 있다고 인식하게 된다. 이와 같이 그들은 의식의 변화 및 감정의 풍파 등의 경험 속에서 부모, 형제, 남편, 친인척, 야학, 학교, 혁명지사, 진보적 서적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혁명에 참가하게 된다. 조선족 여성 항일열사 중에는 전장에서 직접 전투에 참가하여 전사한 여성들도 있는가 하면, 작식대, 재봉대, 의료대에서 활동함으로써 전투력을 재생산하는 임무를 완수한 여성들도 있다. 항일연군 제2군의 최희숙 등 8명의 재봉대원들은은 한 달 동안 600건 군복을 만들어내라는 긴급통지를 받고 엄동설한을 무릅쓰고 삼림 속에 들어가 낡은 재봉기로 낮과 밤을 이어가며 끝내 한 달이 되기 전에 600건의 군복을 재봉하였고, 작식대 리신금 여전사 역시 한차례 습격에서 부상을 입었지만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전우들이 한주일 굶은 상태에서 행군할 힘을 없다는 것을 알고 자신도 한주일이나 먹지 못했지만, 전우들을 위해 정신을 차리고 사처로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구함으로써 전우들로 하여금 행군을 지속하도록 하였다(《연변녀성운동사》,1991). 특히 직접 전투에 참가한 조선족 항일 여전사들은 전장에서 남성전사 못지 않은 용맹함과 전투능력을 보이면서 전우를 엄호하기 위해, 당의 비밀을 엄수하기 위해, 적들을 소멸하기 위해 끝까지 싸웠다. 투쟁중 일본군 앞에서 당의 비밀을 엄수하기 위해 혀를 깨문 여전사들이 있는가 하면, 열 손톱을 입으로 물어뜯은 전사도 있고, 일본군에 의해 두 눈알이 빠져도 끝까지 투항하지 않은 여전사도 있다. 이처럼 그들의 항일에서의 행동은 대단히 용맹하고 헌신적 이였다. 때문에 현재까지 여러 자료와 회억록 등에서도 그들의 헌신정신과 용맹함에 대해 높이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항일전장에서의 그들의 처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직면하고 또한 감당해야 할 고난과 고통에 대해 한번 짚어보도록 하자. 전장에서 그들은 신체적 조건의 취약함을 극복해야 함은 더 말할 나위도 없고, 생리적 고충, 생육의 고통도 극복해야 했다. 여성들에게 있어 전장에서의 가장 큰 고통은 달거리 임신과 해산 이였다. 달거리 때는 그렇다 치더라도, 임신하면 대개 작식대와 재봉대에 배치되는데, 임신해서도 그들은 대원들의 식량을 장만하고 해진 옷을 깁는 등 일에 종사하면서 쉴 새 없이 보내기가 일쑤다. 해산시의 조건도 말이 아니었다. 옥중 해산한 여전사가 몇몇 있는가 하면 해산시에 먹을 것이 하나도 없고 젖도 나오지 않아 아이를 낳자마자 5일 만에 잃은 여전사도 있다. 이러한 견정한 혁명정신으로 인한 친육의 상실 뒤에 오는 고통은 그들 스스로 감내해야 하는 슬픔과 고통이었다. 또한 가정과 자식을 포기해야 하는 고통도 견뎌내야 했다. 여전사들은 항일을 위해 전장에 나간 뒤, 대개 1년 내지 2년에 한번 남편과 상봉하거나 더욱 긴 경우도 있으며, 자식을 키울 수가 없어 다른 집에 보내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조선족 여전사들의 항일활동에 내포된 여성의 의미는 또한 무엇일가. 먼저, 여전사들은 확실히 항일운동을 통해 가정으로부터 사회로 진출했으며, 가정주부로부터 사회혁명가로의 신분전환을 실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항일운동에 참가하면서 그들은 남성과 똑같은 전사로서의 사회적 신분을 부여받음으로써 가정주부로부터 사회혁명가로의 역할 전환을 부분적으로 실현하였다. 그들은 전장에서 남성들과 똑같이 전투에 참가하면서 여러 가지 칭호와 명예를 가지게 되였다. 다음으로, 항일근거지에서 조선족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 되였다. 정치적으로 그들은 각급 당정기관의 중요한 직위 예하면, 부녀위원, 소비에트정부의 회장, 현아동국 국장, 부국장 등에 임용되어 정치방면에서 평등한 권리를 부여받음으로써 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실현하였다. 경제방면에서도 남자와 똑같이 땅을 분배받음으로써 경제적 독립권을 향유하게 되였으며, 교육방면에서도 중점적으로 여성간부를 양성하는 원칙에 의해 평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부여받았다. 이와 같이 그들은 조선족 여성 지도자들이였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아내, 어머니, 며느리, 전사, 부녀회원 등 다중 역할을 동시에 행사하는 행위주체였다. 요컨대, 여전사들의 평등을 실현하려는 의지에서 우리는 해방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항일운동에 참가함으로써 해방을 실현하고자 하는 견강한 의지, 전쟁과정에서 들이닥친 모든 고난을 감내하고 이겨내는 또한 목숨도 아끼지 않는 헌신정신과 희생정신 등에서 우리는 그들의 평등과 해방을 실현하려는 철같이 강한 의지를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조선족 여전사들과 같이 빛을 보려는 의지, 그 의지만이 우리를 해방으로 이끌고, 미지의 세계, 창조적인 세계로 이끄는 통로이자 희망으로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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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6
  • 무협소설 대가 김용이 짓궂게 추구했던 스타 여배우 하몽(夏梦)
    ▲스타 여배우 하몽 2018년 11월 16일, 중국 국내의 모 TV방송국의 아나운서가 자신의 워이버(微博)에 한 가지 메시지를 게재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 이 내 마음속의 샛별 같은 존재였던 하몽(夏梦), 하몽이 떠나가고 있다. 마치 하늘 높이 날아가는 제비마냥 손을 흔들면서 떠나가고 있다… 이는 하몽의 사망 소식을 알린 최초의 정보 출처로 추측된다. 그 뒤 많은 매스컴들도 앞다투어 하몽의 사망 소식을 보도, 사망 당시 하몽의 연령은 83세였다. 혹시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하몽의 이름에 대해 좀 낯설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지긋한 세대들한테 있어서, 더군다나 홍콩의 초기 영화에 대해 좀 알거나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은 하몽이 한 시기 홍콩영화의 대표 배우였으며 일찍 스크린의 <여신>이었고 <절세의 미인>이었으며 <동방의 오드리 ‧ 헴번>이란 칭호를 받은 여성 스타였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흥미가 있는 것은 연예사업에서 그녀의 개인 업적과 비교할 때 사람들이 가장 화제에 올린 것은 당시 유명한 무협소설가 김용(金庸)이 하몽한테 반하여 그녀를 열애했고 하몽 또한 지혜롭게 김용의 애정공세를 거절한 이왕지사였다. 오늘 와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애석해하면서 하몽은 응당 김용과 함께 있어야 했다고 인정, <재능 있는 남자에 아름다운 여인의 배합>이라고 했다. 반면에 많은 사람들은 하몽이 김용의 열애를 거절한 것은 그녀가 자신의 생애에서 결정한 많은 일들 중 가장 지혜롭게 처사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 하몽과 영화계 동료들 한 여름 밤의 꿈 하몽의 원명은 양몽(杨濛)이며 1933년 상해 태생이다. 조상이 살던 곳은 강소 소주로 하몽은 철두철미한 <강남 여자>였다. 당시 하몽의 양친 부모는 희곡을 즐겼으며 남들로부터 <예술가정>으로 불리게도 되었다. 양몽 또한 부모님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연극표현에 대해 짙은 취미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1947 년에 어린 양몽은 가족을 따라 홍콩으로 이주하여 홍콩의 마리노(玛丽诺) 여자학교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양몽은 여가에 영화를 보지 않으면 노래하고 춤추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으며 이는 그녀로 하여금 학교 내에서 매우 활약적인 문예골간으로 되게 했다. 1950 년 원앙안(袁仰安)라는 감독이 한부의 영화를 만들려고 딸한테 같은 반 친구들한테서 누가 연기에 적합한가를 물었다. 이러자 원앙안의 딸인 원모매(毛妹)는 같은 반급에 있는 양몽의 이쁜 외모와 연기력을 아버지에게 추천하였다. 원앙안은 양몽을 장성 영화회사에 초청, 쉑스피어의 <한 여름 밤의 꿈>에서 받은 영감을 얻은 양몽은 <하몽>이란 예명을 가지게 되었다. 그 때로부터 스크린에는 한 쌍의 봉의 눈에 오관이 우아함과 아울러 고전미녀의 기질이 농후한 하명이란 이름이 등장하게 되었다. 장성영화회사에 입사한 후 하몽은 자기의 출중한 외모와 독특한 연기력에 의해 대뜸 영화계의 톱스타로 등극하였다. 하몽이 처음으로 찍은 영화는 이평정(李萍倩)이 감독을 맡았고 남자 배우 한비가 주역을 맡은 <금혼기(禁婚记)>였다. 이 영화에서 하몽은 한 소녀의 역을 맡았다. 영화에서 하몽은 어딘가 나이에 맞지 않는 여인의 역을 맡았지만 그녀의 연기력은 너무나도 출중하여 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금혼기>가 방영된 후 영화는 관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따라서 하몽 역시 빠르게 유명해졌다. 이러자 장성영화회사는 <쇠는 단김에 뺀다>고 하몽을 적극 키웠으며 뒤이어 그녀는 <말썽 많은 어머니(娘惹)>, <도회지 교향곡(都会交响曲)>, <백일몽(白日梦)>, <얼해화(孽海花)>와 <자매곡> 등 영화에 육속 출연하기도 했다. 한편 하몽이 출연한 영화들은 기본상 성공하였으며 그녀와 석혜(石慧), 진사사(陈思思) 등 <장성회사의 3공주> 중 하몽은 당연히 <제 1번 대 공주>로서의 손색이 없었다. 지난 세기 50∼60연대는 홍콩영화가 발걸음을 뗀지 얼마 안 되었고 배우들의 명성 또한 지금처럼 열광적인 숭배 대상으로 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몽만은 달랐다. 그녀의 명성은 이미 홍콩을 벗어나 대륙과 싱가폴 등 지역을 휩쓸었다. 많은 잡지와 신문 등 간행물들은 앞 다투어 그녀를 표지인물로 선정해 독자들의 눈길을 끌기도 했다. 하몽은 18살에 첫 영화에 출연했고 35살에 영화계와 작별을 고하였다. 그 17년간의 배우 생애에서 하몽은 도합 38부의 영화에 출연, 당시 그 시대의 영화에는 경극이나 월극 등 희곡 유형의 작품을 빼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어떠한 장르로 된 작품의 매우 다양한 형상 부각에서 하몽은 모두 아주 노련하게 소화해 냈다. 때로는 우아하고 단정한 대 가정의 규수로, 때로는 화려하고 요염한 궁정소녀로 그리고 활발하고 사랑스러운 처녀거나 타락한 정감 여인 혹은 불행한 애상소녀 등 모든 다각적 인물을 훌륭하게 부각하여 관중들에게 다각적인 형상을 안겨주었다. 당시 많은 팬들과 심지어 감독들조차 하몽의 놀라운 아름다움에 탄복해 마지않았지만 그녀는 개인적인 외모는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며 모든 영화의 출연에 참여할 때 그녀는 맡은 배역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연기에 대한 자신의 일종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즉 배우는 단지 외모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야 한다고 인정했다. 마치도 동교(董桥)가 말한 것처럼 하몽은 배우였지 스타가 아닐 수도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자태를 뽐내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에서의 그 모습은 인간의 희로애락과 환상같은 것에 늘 빠져있는 것이었다. ▲ 하몽과 남편 임보성 아름답고도 지적인 인생 유명인, 특히 여성유명인에 대해 편견이 있는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몽 역시 종종 얼굴로 <점수를 따는 사람>으로 간주될 때가 많았다. 연예 권 산업에서는 당시의 시대가 지금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여성 스타의 사생활은 종종 대중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몽은 자신의 미모로 얼마든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도고하지만 견식이 짧은 사람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몽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총명하고도 지혜가 많은 여성이었다. 이는 아마도 그녀가 문화가정의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양호한 교육을 받았었기 때문이리라. 이렇듯 하몽은 유명해지기 전부터 아주 높은 자질을 갖고 있었으며 우아했으며 아주 친절하게 사람을 대하기도 했다. 그리고 독특하고 용모가 출중했지만 거기에 남들이 감탄할 만한 지혜로 자아관리를 하기도 했다. 하몽은 18 ~ 19 세의 나이로 유명해졌으나 명예에 빠져 자아를 잃지 않았으며 겸손하고 배우는 자세를 유지하면서 부단히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21 세에 하몽은 가장 황금의 나이에 이미 스타가 되어 상인 임보성(林葆诚)과 결혼했다. 많은 사람들의 안광에는 하몽과 임보성의 결혼은 일종 경솔하게 <부호와의 결합 행위>로 여겨졌지만 실제로 그녀와 임보성의 결혼은 애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즉 단순한 미모 그리고 명성 혹은 재부에 의한 결혼이 아닌 감정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한편 임보성을 놓고 볼 때 멋지게 생긴 <외관형>의 인물은 아닌 것이 사실이었다. 지어는 <상인>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늘 재벌 티가 나고 조폭하며 수양이 없는 사람으로 여겨지기가 쉽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하몽이 사랑한 이 남자는 위에서 언급한 재벌 티가 나는 것도 아니었고 조폭스러운 사람도 아니었으며 수양이 모자란 것도 아니었다. 몇 년 후 사람들은 하몽이 일찍 이 남자를 선택한 것이 정확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임보성은 상해 세인트 존슨 대학을 졸업한 뒤 인차 방직업에 종사했다. 하긴 임보성은 상업에 종사한 건 사실이었지만 한편으로 그는 예술에 농후한 취미를 갖고 있었다. 그와 하몽의 만남은 매우 우연적이었다. 영화 촬영에 취미가 있는 그는 영화 <자매곡(姊妹曲)> 촬영현장에 가게 되었고 교묘하게도 당시 현장 연출은 교사의 역을 맡을 배우 한 명이 없어 수소문을 하던 끝에 임보성을 보자 대뜸 흥정을 걸어왔으며 그는 한마디로 동의, 그 때 임보성이 그토록 쉽게 대답한데는 그 때 촬영하던 영화의 여주인공이 하몽이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임보성은 오래 전부터 하몽에 대해 추구하고 있던 터였다. 그 때의 그 짧은 촬영현장을 통해 임보성과 하몽은 서로 알게 되었고 얼마 안 되어 아주 사이가 좋은 관계로 되었다. 당시 임보성으로 하여금 특히 즐겁게 한 것은 바로 그 촬영현장에서 하몽을 보게 된 것었다. 임보성의 눈에는 하몽은 천사처럼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녀는 그 어떤 스타 배우같은 틀거지가 없었으며 그 어떤 사람한테나 항상 예의가 있게 대하였다. 이는 임보성의 마음속에 깊은 인상을 남기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임보성은 하몽한테 열렬한 애정공세를 들이댔으며 최종 둘은 서로 손잡고 혼인이란 이 성스러운 전당에 들어가기까지에 이르렀다. 당시 이들의 혼인을 두고 이런저런 루머가 많았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 남녀를 두고 <썩 어울리지 않다> 라고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하몽이 임보성을 선택한 것은 임보성의 재산이 탐나서였다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든 간에 이러한 평가도 이지적인 사람들은 별로 가타부타 평가를 하지 않았다. 행복한가 행복하지 못한가 하는 것은 하몽 자신이 가장 잘 알 것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하긴 임보성이 하몽한테 먹고 입는 것에 아무런 걱정이 없는 물질적 조건을 제공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가 그녀한테 제공한 것으로는 생명에 대한 보호와 사업에 대한 거대한 도움이었다. 1967년 하몽은 정식으로 영화계에서 퇴출한다고 대외에 선포했다. 이는 많은 관중들로 놓고 말하면 아주 돌연적인 것이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하몽과 같은 스타급의 여배우가 영화계에서 퇴출하는 것은 결코 <명지한 선택>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환경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하몽은 일개 지혜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며 그녀의 남편 역시 아주 이성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시 중국대륙은 <문화대혁명 운동>이 열화처럼 진행되고 있던 시대로 허다한 연예권 인사들이 큰 충격 속에서 숨을 죽이고 살던 시대였다. 시대가 시대였던만큼 당시 하몽은 시국에 대한 판단을 통하여 또한 신변의 동료들이 겪는 희로애락을 통하여 결단성 있게 영화계 퇴출을 선언했던 것이다. 임보성과 하몽은 세절적인 검토를 거친 후 다음의 일을 결정, 우선 임보성은 공항과의 관계를 통하여 짧은 시일 내에 하몽의 캐나다행 수속을 해주었다. 이렇게 그는 아내의 결정을 지지해주었고 아울러 그녀를 위해 가장 적합한 보장을 해 줌으로서 하몽의 영화계 퇴출이 순리롭고도 조용하게 마무리되게 하였다. 하몽은 캐나다에서 한동안 체류하다가 다시 홍콩으로 돌아와 자신이 애호하는 사업에 투신하게 되었다. 그 사업인즉 한 방면으로는 계속 영화 영역에서 자기의 사업을 펼치는 것, 청조영화회사를 설립하여 선후로 <노해에 투신(投奔怒海)>, <유수와도 같은 세월(似水年华)>, <자고로 영웅은 소년에서 나온다(自古英雄出少年)> 등 3부의 영화를 만들어냈다. 영화 제작인으로 된 하몽은 눈길을 사회에 돌리고 줄거리를 찾군 하였다. 당시 베트남이 한창 전쟁 중이라 수많은 전쟁난민들이 홍콩으로 몰려들었다. 이러자 그녀는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하는 한부의 영화를 제작하려고 연출 허안화(许鞍华)를 찾았다. 몇 년이 지난 후 허안화는 하몽과의 합작당시를 회고하면서 <하몽 여사한테 감사를 드린다. 그녀는 나로 하여금 일생동안에서 가장 훌륭한 1부의 영화를 찍게 했다> 라고 했다. 다른 한 방면으로 하몽은 각종 문화와 관계되는 활동에 참가, 무릇 그것이 정치적 속성을 가진 문화교류이든, 아니면 순수한 예술성을 지닌 문화활동이든 간을 막론하고 아주 열정적으로 그 사업에 투신하였고 그녀 나이 81세가 될 때까지 멈추지를 아니했다. ▲ 하몽과 무협소설 대가 김용 김용의 애정공세 거절한 건 현명한 처사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지만 매번 하몽을 머릿속에 떠올릴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아주 흥미진진하게 무협소설로 하나의 시대를 풍미했던 대가 김용이 당년에 그녀를 추구하다가 거절을 당했던 지나간 치정사에 대해 말하기 마련이다. 이 일을 말하자면 아마도 지난 세기 50연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시기 김용은 꽤나 이름 있는 소설가였다. 그 때 그는 하몽을 몹시 좋아했다. 그는 스크린에 나오는 하몽을 두고 일종 연민의 정을 느끼다 못해 한 시기 밥맛을 잃을 지경이었고 필을 잡았으나 글을 쓸 수 없을 정도였다. 상사병이라면 아마도 <중증>으로 진단받아야 할 정도였다… 하몽과의 만날 기회를 만들기 위해 그는 이름을 임환(林欢)으로 고치고 하몽이 소속되어 있는 장성 영화회사(电影公司)에 입사, 전문 이 회사에 씨나리오를 제공하는 작가로 되었다. 목적은 분명 하몽과 매일 같이 근거리에서 접촉하기 위해서였다. 하몽을 추구해도 일반적인 정도가 아니었다. 여기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장성영화회사에 씨나리오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전문 하몽을 위한 씨나리오 <왕 호랑이의 부녀자 강탈기(王老虎抢亲)>를 만들기도 했다. 이 영화의 슈제트는 아주 일반적인 것이었지만 하몽의 마음을 열기 위한 김용의 노력은 이루다 형언할 수 없었다. 이 밖에 김용은 또 하몽과 식사를 약속했고 낭만에 넘치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으며 지어는 하몽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표달하기 위해 자신의 필로 묘사해낸 <독수리 사냥 영웅전기(射雕英雄传)>에서 나오는 총명하고 영리한 여 협객 황용(黄蓉)과 <신조협려(神雕侠侣)>에서 나오는 쇼룽녀(小龙女)를 하몽으로 간주하고 자신의 모든 정감을 쏟군 하였다. 그리고 하몽의 미모에 대한 김용의 한마디 <명언>이 있었는데 이 <명언>은 한동안 광범위하게 유행될 정도였다. 그 말인즉 “서시(西施)가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지만 그 누구도 그녀를 직접 본적이 없다. 나의 생각엔 서시가 만약 하몽만큼의 미모였다면 그야말로 명불허전(名不虚传)인 것이다”란 <명언>이었다. 김용은 여느 소설가들과는 달리 애정 공략에 들어서는 아주 용감한 편이었다. 그는 자주 하몽의 앞에서 자기의 애심을 직설적으로 고백했으나 뜻밖으로 돌아온 건 하몽의 예의가 바른 거절이었다. 당시 이미 임보성의 여인으로 된 하몽은 아래와 같은 한 마디의 말로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제가 출가하지 않았을 때 우리 상봉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뿐이죠(恨不相逢未嫁时).” 이 간단한 한 구절은 김용의 재능에 대한 흠상과 그의 인품에 대한 인정과 더불어 자기의 혼인을 고수하려는 하몽의 원칙도 담겨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하몽은 이미 임보성과 결혼한 상황이었으며 남편에 대한 그녀의 애정 역시 진지했는가 하면 결혼생활 또한 비교적 원만한 편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하몽은 김용의 구애에 대해 오직 <거절>이란 두 글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두고 당시 허다한 사람들은 김용의 구애에 대한 하몽의 거절에 아쉬워하였다. 특히 김용의 재능에 탄복해 마지 않던 독자들은 모두 하몽과 같은 미인이 김용이란 <재간둥이>와 결합하면 <천재와 미인의 만남>으로 가장 이상적이라 여겼다. 심지어 적지 않은 사람들은 김용의 낭만적인 정감과 의리적인 기질은 하몽한테 더욱 큰 행복을 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적어도 일개 <상인>이 주는 행복보다는 격식 상, 차원 상 풍부하고도 고상할 것이라고 여겼었다. 하지만 만약 현실적인 안광으로 하몽의 이런 결정을 가늠해 보면 그녀가 김용의 구애를 거절한 것은 아주 현명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가 있었다. 우선 가장 기본적인 물질적 조건으로 놓고 볼 때 임보성의 재부는 김용의 실력에 비해 현저하게 더 많았다. 이는 결코 재부가 많을수록 더욱 행복하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배경으로 놓고 볼 때 하몽과 같은 직업에서는 충족한 재부가 있으면 그녀로 하여금 원하는 인생을 만들 수 있는 보장으로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여 배우한테 있어서 단지 연기로 일생을 보낼 수만은 없는 것, 더군다나 자기의 인생에 대해 생각이 있고 책임지는 여 배우라고 할 때 배우라는 이 직업은 영원한 <장구지책>으로 될 수 없는 것이었다. 하몽은 35세의 나이에 일종 시국의 원인으로 영화계를 잠시 떠나 캐나다로 이민 갔다가 다시 홍콩으로 돌아와 자기의 사업을 창립, 매 한발자국씩 내 디딜 때마다 일정한 재부의 받침이 있어야 했다. 이는 어찌 보면 김용도 제공할 수 있는 것이었으나 어쨌든 임보성의 경제력에는 미칠 수 없다는 것은 불보듯 뻔했다. 다음으로 하몽 개인의 사업으로 놓고 말하면 남편 임보성의 지지야말로 그녀로 하여금 더욱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하몽 그녀는 자기가 하고 싶은 사업, 즉 자기의 영화회사를 창립하고 제작인이 될 수 있었으며 자기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었다. 김용은 자기의 사업이 있었고 하몽과 함께 영화업에 투신할 수도 있었으며 또한 합작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영화회사를 만들자면 거기에 수요되는 자금과 자원 등은 일반적인 재력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비록 김용 선생의 작품 및 그가 거둔 성과에 대해 매우 흠모하고 그가 독자들한테 선물한 무협지의 장면들에 대해 경탄해마지 않지만 개인감정의 처사에 있어서 그는 결코 완벽하지 못했다. 김용은 일생에서 도합 3명의 부인을 맞았었다. 일찍 하몽을 추구할 때 김용은 이미 결혼한 몸으로 첫 번째 부인 두야분(杜冶芬) 여사와 함께 가정을 이루고 있을 때였다. 당시 김용과 부인은 홍콩에 자리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은지라 김용은 사업의 성공을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바삐 보냈고 가정을 돌볼 겨를이 없었기에 부부 사이의 감정파열을 초래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이런저런 말이 많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제3자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 다만 한 가지 유의할 점이라면 바로 그 당시 김용이 한창 하몽을 추구하고 있었을 때였다. 모종 뜻에서 보면 그것은 그닥 떳떳하지 못하였다. 또한 그 뒤에 있은 정감생활에서 김용은 부부 관계 및 혼인 방면에서의 처사가 그닥 잘하지 못했었다. 김용이 두 번째 부인은 사업 형으로 그에 대한 적지 않은 도움을 준 여인이었다. 그런데 김용은 제 3의 여인과 사귀자 두 번째 부인한테 냉담하지기 시작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실제상 두 번째의 부인과 이혼하게 되자 그녀에 대한 김용의 태도는 아주 무자비했으며 이는 큰 아들의 자살까지 초래했다. 후에 김용은 큰 아들의 자살을 두고 심한 자책감을 느끼는 듯 했으나 그렇다고 실제적으로 큰 책임적 대가를 바친 건 아니었다. 본 글은 결코 김용 자신의 도덕을 평가하자는 것이 아니다. 서두 결말이 어떻게 되었든 간 모든 것은 그의 인간적 권리이다. 다만 한 예술대가인 김용이 감정 처사에 존재하는 부분적인 <이해하기 어려운 행위>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고 또한 그의 부분적 풍류적인 정감세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어찌보면 한 여성의 일생 행복을 놓고 볼 때 김용은 너무나도 급급히 자기의 <행복과 쾌감>만을 추구한 것 같았으며 반대로 하몽은 안정적인 인생을 추구하는 경향을 가진 여인이었다. 다른 한편 재능을 갖고 있는 사람의 연애사를 담론하면 흔히 낭만적이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운 사람을 사랑하여 결혼에 올인하면 그만큼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현대적 개념으로 고민해 보아도 하몽이 김용의 구해를 거절한 것은 여전히 현명한 처사로 봐야 할 것 같다. 여러 해가 지난 후 여전히 사람들이 하몽한테 김용에 대해 담론하면 그녀는 길게 말하지 않고 그저 간단하게 “나와 김용에 대해서 말하자면 기실 말하지 않는 것이 서로에게 더욱 유리할 것 같다”라고 잘라 버리군 했다. 그녀는 자기한테 말 재주가 없기에 극력 말을 적게 한다고 했다. 기실 그 한마디 말의 배후에는 그녀 인생의 지혜ㅡ 그녀의 말을 빈다면 이야기를 엮는 것은 모두 다른 사람들의 일이었고 그녀가 선택한 것은 열심히 일하고 착실하게 가정을 챙기는 것이었다. 적지 않은 여성들은 진짜 애정을 대함에 있어서 허영에 들떠 있지만 그래도 더욱 많은 여성들은 행복하고도 안정적인 인생을 살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며 하몽은 그만큼 현명한 선택을 했기에 그녀의 혼인과 애정사에는 별로 큰 풍파가 없었다고 할 수 있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5-12
  • 북경의 고궁 왜 변소가 없을까?
    ▲북경고궁ⓒ바이두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중국의 북경을 놓고 말하면 역사가 긴 고도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고도라고 하면 가장 대표적인 것이 또한 고궁이라 할 수 있다. 고궁은 자금성이라고도 하며 명 • 청(明清) 두 개의 조대를 경과하면서 그 역사를 견증했고 지금은 세계에서 저명한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자료에 따르면 고궁에는 도합 90여개의 뜨락이 있고 980개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는가 하면 8707개의 크고 작은 방이 있다. 고궁에 가본 사람들은 모두 알겠지만 고궁은 필경 황제가 머물던 곳으로 그 면적이 웬만한 작은 도시 같았고 거주하는 사람도 많아 거주인이 가장 많을 때는 수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만약 고궁에 변소를 짓는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변소는 얼마나 있어야 했을까? 고대의 황제 가족은 체면을 아주 중시했으며 아울러 풍수에 대해서도 아주 중시했다고 한다. 하다면 변소는 필경 배설을 목적으로 하는 장소였다. 고대인들의 눈에는 배설물은 모두 불결한 잡물로 여겼으며 변소가 있으면 구린내가 하늘을 뒤덮어 황궁의 풍경을 어지럽히고 풍수자리에도 액을 초래한다고 여겼다. 변소가 없는 고궁, 그래서 당시 고궁의 귀족들은 모두 변기를 사용(고대의 많은 도시들에서도 역시 그렇게 했음)했다고 한다. 중국 고대에는 일종 우아한 명칭이 있었는데 그것인즉 <야향(夜香)>이란 명칭이었고 바로 변기안의 배설물을 가르키는 것이었다. 예하면 밤에 어느 귀족이 변기내에 <야향>을 배설하면 다음 날 아침 전문 시중군이 그 <야향>을 가져다 처리하군 했다고 한다. 웬만한 귀족들이 괜찮은 변기를 사용했다면 황제가 사용하는 변기는 보는 이마다 탄복케 할 정도로 정교롭고도 다양하게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런 변기 또한 장방형으로 된 것이 있는가 하면 타원형으로 된 것도 있었고 나무로 만든 것, 석(锡)이나 자기(瓷)로 만든 것도 있었으며 특히 황제가 사용하는 변기는 용변 후 깨끗하게 청리해야 하고 또한 변기 내에 화판 혹은 향료 등을 넣기도 했다고 한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5-12
  • 가희 등려군의 파란만장한 생애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타이완 여가수 덩리쥔(등려군 邓丽君)은 1953년 1월 29일, 타이완 윈린현 바오충향 텐샹촌(台湾省云林县褒忠乡田洋村)에서 출생, 부친 덩쑤우(邓枢)는 일찍 광저우 황푸군관학교 제14기 졸업생이었고 어머니는 산둥 타이안(泰安)시 둥핑(东平)현 사람이다. 1949년 국민당이 타이완으로 철퇴한 뒤 덩리쥔은 가정의 넷째(위로 3명의 오빠가 있었음)로 태어났다. 덩리쥔의 이름의 유래를 보면 부친 덩쑤우가 어느 한 전우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지은 것으로 원래의 이름은 아름다운 대나무란 뜻으로 덩리쥔(邓丽筠)이라 지어졌으나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냥 덩리쥔(邓丽君)이라 불렀기에 그냥 그 것이 호적에까지 등록됙 되었다. 덩리쥔이 영문이름은 테레사 텅(Teresa Teng)으로 이는 그리스어로 수확의 뜻을 나타내며 저명한 수녀 테레사와 동명이었다. 위로 오빠만 셋이 있다가 덩리쥔이 여자애로 태어나자 부모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특히 덩리쥔은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했는바 어머니는 그 어디를 가나 딸을 데리고 다니며 자랑했다. 또한 덩리쥔의 어머니는 당시 영화와 연극을 구경하기 좋아했다. 그래서일까? 항상 어머니와 함께 이런 문화를 접하다보니 덩리쥔은 어릴적부터 중국 전통음악에 대해 익숙하게 되었고 그것을 사랑하고 또한 그것을 전공할 수 있는 토대도 닦을 수 있게 되었다. 1963년 리한샹(李翰祥) 감독이 만든 영화 “양산백과 축영태”가 타이완에서 상영되면서 한시기 타이완에서는 중국의 5대 희곡 중의 하나인 황메이시(黄梅戏) 음악창법이 널리 유행되었고 당시 중화방송국에서는 황메이시음악 콩쿠르가 개최되기도 했다. 그러자 덩리쥔은 은사의 제의에 따라 이 콩쿠르에 참가, 모든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우승보좌에 올랐다. 이 때로부터 덩리쥔은 타이완 가요계에 정식으로 입문, 이것을 계기로 덩리준한테는 이러한 기회가 날이 갈수록 많아졌다. 1966년, 덩리쥔은 학업이냐 아니면 음악이냐 이 2가지 중 한가지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부친 역시 학교와 협의를 달성할 수 없었다. 최종 덩리쥔은 학교에서 중퇴하고 금마상 레코트 회사에서 펼친 가요콩쿠르에 나서서 우승을 따냈으며 그 때로부터 학교와 영영 고별을 선고, 14살 나잉 우주레코트회사에 취직하면서 프로가수의 인생에 들어섰다. 덩리쥔은 노래에서만 천부적인 재능을 보인 것이 아니었다. 1969년 덩리쥔은 어린 나이에 “고마워요 사장님”이란 영화에 출연, 영화에는 많은 노래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덩리쥔은 이 과정을 거의 완벽하게 소화해내어 영화배우로서의 인생에 들어설 수도 있었다. 하지만 덩리쥔은 영화배우에는 거의 관심이없었다. 1970년, 17세에 난 덩리쥔은 홍콩 공업전시회에서 주최한 “백화유 자선바자회 가요콩쿠르”에서 우승보좌에 올라 사상 가장 나어린 “백화유 자선여황후”로 되었다. 이어 그녀는 자신의 두번째 영화 “가요팬아가씨”에 출연해 대 성공을 거두었으며 동시 가요열창사업에서도 첫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면서 덩리쥔은 중국 홍콩과 마카오 등지를 발판으로 동남아의 화교시장에도 진출하게 되었다. 한편 오우양페이페이(欧阳菲菲)는 덩리쥔으로 하여금 일본에서 음악생애를 펼치도록 간접적으로 도와준 사람이었다. 1973년, 오우양페이페이와 홍콩가수 천메이링(陈美龄)이 일본에서 각각 레코트 대상을 획득하면서 일본 폴리도르 레코드(폴리도르 레코드) 회사에서는 동남아 지구의 가수들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홍콩, 마카오와 타이완 지구에 사람을 파견해 고찰, 결과 홍콩의 정둥한(郑东汉)이란 사람으로부터 이상적인 여가수를 소개받았다. 그 출중한 여가수가 바로 덩리준으로 당시 그녀는 “오직 그대밖에 없어”란 노래로 일본 전문가들의 마음을 움직이었다. 1971년 3월 25일, 덩리쥔은 홍콩스타 쩡소우츄우(郑少秋)와 함께 타이완, 홍콩과 마카오 등지를 드나들면서 활약, 당시 쩡소우츄우는 이미 3차례나 결혼한 몸이었지만 홍콩연예계에서는 여전히 인기가 높았으며 거기에 덩리쥔까지 합세하자 이들의 몸값은 급상승했다. 당시 덩리쥔으로 말하면 나어린 가수에 불과했지만 이미 홍콩의 여풍레코드회사와 년 20만 홍콩달러로 계약을 맺은지라 연예인들 모두가 덩리쥔과 합작하기를 원했다. 거기에는 홍콩 일류의 사회자 썬덴샤(沈殿霞)도 있었다. 1978년 덩리쥔은 싱가폴, 말레이시아, 베트남, 태국 등 동남아국가들을 순회하면서 자신의 공연사업무대를 개척, 덩씨가문으로 말하면 일대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현재의 미감으로 말하면 덩리쥔은 그 무슨 대단한 미녀에는 속하지 못하겠지만 당시 그녀는 타이완의 “대중의 애인(大众情人)”인 쑤챵(萧蔷)한테 조금도 짝지지 않는 가요계의 제일 미녀였다. 1979년 덩리쥔이 한창 자신의 사업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을 때 뜻밖에서 가짜여권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당시 덩리쥔한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지어 당시 많은 매스컴들에서는 덩리쥔을 공격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당시 덩리쥔은 타이완을 비롯한 홍콩, 마카오와 기타 동남아 지구에서 활동하기 매우 불편했다. 그녀는 부득불 자기의 활동무대를 다른 지역으로 선택, 단연히 미국행 유학으로 일본어, 영어와 생물, 수학 등을 배웠다. 그러다가 1979년 4월 캐나다의 밴큐버에서 개인콘서트를 개최, 이는 그녀가 처음으로 아메리카 지역에서 개최한 개인콘서트였다. 1981년 덩리쥔은 5장 레코드상을 혼자서 받으면서 레코트 제작사상의 기록을 창조했다. 그녀가 바로 방송국에서 주최한 시상식에서 상을 받을 때 일종 희극성적인 장면이 연출되었다. 당시 방송국에서는 청룽(成龙)으로 하여금 귀빈이 되어 덩리쥔에게 상을 발급하기로 하였다. 이 날 오후 갓 미국으로부터 홍콩에 도착한 덩리쥔은 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 내속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였다. 당시 방송국의 한 일군이 레코드판을 든 청룽을 무대로 올리 밀었는데 무대로 올라온 청룽을 보자 덩리쥔은 너무도 뜻밖이라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1982년 1월 8일부터 11일까지 홍콩 이레사 체육관에서는 5차례에 달하는 개인콘서트를 마련, 매차마다 초만원을 이루었다. 이어 보우리진 녹음출판사(宝丽金录制出版)가 주최한 그 개인콘서트가 열렸으며 타아완 TV방송은 “천언만어(千言万语)”특집으로 덩리쥔의 개인콘서트를 녹화하였다. 이해 5월 덩리쥔은 고전특집 녹화계획에 들어갔고, 10월에는 린자샹(林子祥) 및 탄융린(谭咏麟)과 합작하여 홍콩에서 TV특집을 촬영했으며, 12월에는 홍콩에서 자선야회를 가지기도 하면서 개인사업의 고봉기에 들어서기도 했다. 1983년 덩리쥔은 초청으로 미국 라스베가스의 시저스팰리스 궁전에서 개인콘서트를 개최, 이 궁전에서 공연한 첫 중국인으로 되었다. 그 때 “바람과 서리는 나와 동반(风霜伴我行)”이란 노래로 무대에 오른 덩리쥔은 이어 “잘 있으라 나의 사랑(再见我的爱人)”, “첨밀밀(甜蜜蜜)” 등 노래로 사람들을 취하게 만들었으며 공연은 생각밖으로 대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공연은 3차나 재차 막을 올렸고 원래 1100석을 차지하던 관중수는 1500석에 이르기도 했다. 이로부터 덩리쥔은 국제스타의 반열에 서게 되었다. 이 해 덩리쥔은 홍콩 홍감체육관에서 6차례의 콘서트를 가지고 자신의 가수생애 15주년을 기념, 이 콘서트의 제목은 “10억인의 박수갈채”로 번마다 초만원이었으며 티켓값도 최고로 치달아올랐다. 지난 2010년 미국CNN(인터내셔넬)에서는 지난 50년간의 세계유명 음악인 20명을 평선, 이 중에는 짱궈룽(张国荣)과 덩리쥔이 화인 가수로 선정되었다 덩리쥔의 일생은 대체적으로 60% 이상이 공개된 정감세계에서 헤맨 인생으로 이 중 저명한 영화스타 청룽과의 한단락 정감유희가 많은 사람들의 흥미와 오락권의 대사로 남아있다. 청룽과 덩리쥔은 최종 각종 원인으로 가정을 이룰 수 없었으며 이로 하여 외계의 많은 사람들은 애석해 하기도 했다. 그리고 덩리쥔은 친샹린(秦祥林)과의 애정은 매우 진지했었다. 하지만 친샹린의 아내로 된 것 또한 덩리쥔이 아니라 린칭샤(林青霞)였다. 과거의 애정사에 대한 매스컴의 취재를 받들 때면 덩리쥔은 허다한 사랑은 각골명심할만한 사랑으로 감정투자가 많았다고 한다. 덩리쥔은 늘 “애정이 많은 것이 조금도 두렵지 않다”고 한다. 이것은 사랑의 신이 자신한테서 물러갈 때마다 있게 되는 덩리쥔의 일가견이었다. 덩리쥔의 첫 사랑은 그녀 나이 18세 때 찾아왔다. 상대는 말레이시사 화교청년이며 기업가인 린쩐파(林振发)였고 나이는 덩리쥔보다 8살 이상이었다. 당시 두 남녀는 혼인과 가정에까지 담론이 오갔으며 많은 사람들은 이제 얼마 안있어 덩리쥔이 린씨네 며느리로 될 것으로 화제에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후 린쩐파는 돌연히 심장병이 발작했다. 소식을 들은 덩리쥔은 인차 당시 린쩐파가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싱가폴로 날아갔으나 싱가폴 공항에서 덩리쥔은 자기의 애인이 이미 숨을 거둔 것을 보아야 했다. 그 때 린쩐파의 나이는 30여세에 불과했다… 그 뒤 덩리쥔은 늘 스캔들이 뒤따라고 있는 주젠(朱坚)이란 상인과 사귀었다. 전하는데 따르면 주젠은 당시 오락권내에서 상당한 배경이 있었으며 싱가폴 어느 한 나이트클럽의 보스였다. 그는 일찍 덩리쥔한테 많은 도움을 주던 사람이기도 했다. 덩리쥔은 주젠한테도 진심을 보이면서 그한테 일생을 의탁하려고 했었다. 1972년 6월의 어느 날, 주젠은 홍콩에서 공연생활을 하고 있는 덩리쥔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를 만나러 홍콩으로 가게 된다고 했다. 하지만 주젠이 탑승한 비행기가 베트남상공에서 실종되었고 홍콩 공항에서 주젠을 애타게 기다리던 덩리쥔은 사람도 보지 못하고 주젠과 사별해야 했다. 덩리쥔과 지난 세기 70연대 타이완의 영화스타 친샹린(秦祥林)과의 애정은 “오케이”와 “노오”사이를 배회하기를 거듭했다. 당시 덩리쥔이 친샹린과 함께 유럽여행을 간 후 아버지는 이들의 동행을 부인하면서 그냥 우연하게 둘 다 유럽행을 했을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덩리쥔을 관심하는 모든 사람들은 줄곧 추궁하던 끝에 덩리쥔과 친샹린이 로스앤젤레스에서 함찍 찍은 사진을 발견하고 공개했다. 이에 대해 덩리쥔은 후에도 승인하지는 않았다. 이는 아마도 친샹린과 린칭샤의 혼인때문이라는 추측도 있었다. 1979년 9월, 덩리쥔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샌프랜시스코로 날아가 청룽이 주연한 영화 “킬러호한(杀手壕)”을 보게 도었다. 당시 미국의 많은 신문들에서는 청룽이 덩리쥔을 끌어 안고 있는 사진을 게재, 둘은 매우 행복해보였다. 당시 청룽은 쿵후스타였고 가요계에서도 일정한 성과가 있었다. 여기에는 덩리쥔의 공로도 한몫 있는 것으로 당시 미국시절 덩리쥔이 청룽한테 노래실력을 키워주었다고 한다. 그 뒤 중국 CCTV의 “예술인생”중 청룽은 덩리쥔과의 한단락 애정사를 회억하면서 몹시 가책에 시달리는 얼굴을 보이었다. 청룽은 당시 애정의 소중함을 몰랐다면서 후회, “이제와 생각해보니 잘못되었다. 당초에 그녀를 진심으로 아껴주어야 했다”고 밝혔다. 한편 궈쿵청(郭孔丞)과의 애정사는 덩리쥔한테 가장 가슴 아픈 상처로 남기도 했다. 우선 싱가폴에서 우연히 만났다가 애정이 불타올랐고 그 뒤 궈쿵청이 자기의 샹글리라호텔에서 덩리쥔을 초청해 그녀한테 구혼했었으며 결혼에 대한 담론이 오가기도 했다. 덩리쥔의 동생 덩창시(邓长禧)에 따르면 궈쿵청이 덩리쥔을 데리고 집으로 가자 곽가 가정의 직원들이 둘러싸고 사인성세를 들이대기도 했다. 그 뒤 덩리쥔은 궈쿵청의 조부모를 만나서야 가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 궈쿵청의 조부모는 덩리쥔한테 3가지 조건을 제출했다고 한다. 즉 하나는 과거의 역사를 말끔히 교대하고 궈씨 가문에 시집온 후에는 즉시 연예권에서 퇴출하며 오락권 친구들과의 교제를 끊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덩리쥔은 이 3가지 조건에는 자기를 기시하는 내용이 들어있다고 인정, 접수할 수가 없어 퇴혼을 제출했다고 한다. 그 뒤 얼마 안있어 궈씨 가문에서는 샹글리라 호텔에서 성대한 결혼연을 베풀었다. 단 당시의 결혼식의 주인공은 덩리쥔이 아니라 1명의 일본여인이었다. 80년대 후기에 들어 덩리쥔은 점차 무대와 고별하고 반은퇴의 생활을 시작했다. 1990년 덩리쥔은 프랑스 파리로 이민하여 정착, 당시에서 자기보다 10여살 아래인 폴로를 알게 되었다. 폴로는 촬영애호자였다. 당시 덩리쥔은 그와의 결혼이 목적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혼인은 애정의 정착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냥 애정의 과정을 체험하려는 생각뿐이었다. 덩리쥔은 파리에 정착한지 얼마 안되어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당시 호흡도 질병으로 죽었다는 등 그녀의 사망을 놓고 논란이 많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녀의 죽음을 두고 새로운 의문설이 제기되었다. 덩리쥔이 죽은 뒤의 사진이 공개되면서 그녀의 목에 손자국이 역력히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타살로 추측된다는 견해이기도 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5-10
  • [김정룡 칼럼] 재한조선족은 원숭이에게 감투 꼴
    ●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진나라 서울 함양으로 치달아 들어간 항우는 이전에 유방에게 항복한 진왕 영(瓔)을 죽이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 불은 석 달을 두고 탔다고 한다. 항우는 시황제의 무덤도 파헤쳤으며 진나라의 재물들을 모두 거둬 갔다. 부녀자들도 모두 붙잡아 갈 만큼 항우의 군사는 갖은 잔학한 짓을 다하고는 함양을 떠났다. 그때 한생(韓生)이란 사람이 항우에게 말했다. “진나라 땅은 지리가 좋고 땅도 길어서 이곳에 도읍을 정하면 천하의 패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항우는 잿더미가 된 진나라 궁궐들이 보기에도 싫었을 뿐 아니라 고향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한생의 말을 듣지 않았다. “사람이 부귀하게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밤에 비단 옷인지 누가 보고 알아 줄 것이냐.” 한생은 기어이 고향으로 가려는 항우를 보고 ‘초나라 사람들은 원숭이가 감투를 쓴 꼴이다.’고 했다가 항우의 노염을 사서 잡혀 죽었다. 항우에 대한 이야기는 중국역사상 굉장한 비중을 차지해왔다. 따라서 이 고사가 후세에 전해지면서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 스스로 자신을 과대 포장하는 행위를 빗대 ‘원숭이에게 감투 꼴’이란 속담으로 전해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 속담을 우리 현실에 적용시켜보면 재한조선족사회 상황에 신통하게 하모니가 되어 있다. 10년 전의 일이다. 00한국 분이 필자에게 왈, “한국에 온 조선족 분들이 평균 수준이 굉장히 높네요.” “무슨 말씀인지?” “저마다 선생(교사) 했다는 분들이 엄청 많네요.” “아~, 그래요.” 뻥이다. 뻥도 보통 뻥이 아니라 한심한 강냉이 뻥 튀기 식의 뻥이다. 10년 전에 한국에 온 조선족 중에 교사했던 사람이 있었지만 극히 소수였다. 00단체장의 우스운 이야기다. 자신은 조선글, 조선말 잘 못한다고 하는 사람이 연길에서 00중학교에서 선생 했다고 자랑한다. “그 학교가 조선족중학교인데”라고 말했더니 “아, 잘못 말했는데 xx중학교요.” “그 학교도 조선족학교인데요.” 얼굴이 원숭이의 궁둥이가 되어 머뭇거린다. 선생 해 본 적이 없는 단체장이 자신이 있어 보이기 위해 선생 했다고 뻥 친다. 조선족사회 리더라고 하는 단체장이 이 정도로 뻥 치고 있으니 일반 구성원들이야. 또 법원이나 검찰원에서 일반 직원으로 심부름이나 하던 조선족이 한국에 와서 자신은 중국에서 판사 혹은 검사였다고 뻥친다. 왜냐? 한국에서는 판사나 검사가 최고 엘리트로 대접받기 때문에 자신을 최고 엘리트로 포장하는 것이다. 예전에도 언급했듯이 재일조선족사회와 재한조선족사회 최대 구분이 바로 전자는 유학생 주류로 형성된 것인데 비해 후자는 노무일군을 주류로 형성된 것이다. 더욱이 한국에 온 조선족은 머리 쓸 필요 없이 팔다리가 멀쩡하면 모두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85만이나 밀려 온 것이다. 한국은 민주주의국가이다. 민간단체 설립이 굉장히 쉽다.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슬쩍슬쩍 한두 마디 변경해서 정관이나 만들고 회원 명단만 작성하면 되고 활동 내역도 어지간히 만들어 넣으면 00협회란 법적 등록이 가능하다. 재한조선족사회 00협회 이름으로 된 단체가 한 때 가장 많을 때 60여 개나 있었다. 개혁개방 직후 80년대 연길에 실체나 실속 없는 피빠아오꿍쓰(皮包公司, 허수아비회사)가 너무 많아 당시에 ‘무슨 놈의 꿍쓰(회사)가 변소간보다 더 많다.’는 말이 유행되었다. 재한조선족사회 단체들이 똑 마치 그때 피빠아오꿍쓰(皮包公司, 허수아비회사)를 신통하게 닮았다. 구체적인 일은 하는 것이 전혀 없이 일단 단체장이라는 감투만 쓰면 능력은 없어도 자신이 큰 벼슬을 한 것처럼 개폼을 잡는다. 능력이 있을 수가 없다. 이들 ‘회장님’들은 중국에 있을 때 아무 것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이고 더욱이 단체장 가운데 대학문을 나온 사람이 거푸 한두 명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것이 재한조선족단체와 재일조선족단체의 큰 차이다. “저희들은 한국에서 여러 가지 형사처벌을 받았지만 여전히 재한조선족사회 리더로 활동하고 있어요.” 한국00사법기관 동포 관련 간담회에서 나온 조선족 단체장의 발언이다. 한국공무원들이 재한조선족사회를 어떻게 바라볼까? 정말 창피하다. 창피한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국은 외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국가이고 동포밀집지역 관공서와 서울시청 등에서 다문화(이럴 때면 조선족도 다문화에 포함시킨다.) 관련 간담회가 많다. 뻥인지, 진짜인지는 모르겠으나 중국에서 선생 했다거나 언론 관련 기관에 종사했다거나 혹은 자신을 지식인이라 폼 잡는 사람들이 회의에서 하는 발언들을 들고 있노라면 한국어가 서툰 것은 허물도 아니다. 회의 주제도 파악하지 못하고 아무 관련이 없는 말을 길게 늘여놓고 게다가 목소리도 크고 악센트도 세서 동네망신이다. 참다못한 사회자께서 마이크를 놓으라고 제지한다. 단체장들은 스스로 재한조선족사회를 대표한다고 자랑한다. 문제는 대표라는 사람들이 이 수준이니 한국공무원들이 이쪽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겠는가? “중국에 있었을 때 같으면 함께 같은 밥상에 마주 않지도 못했을 ‘빈 깡통’들이 한국에 와서 회장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꼴을 정말 못 봐주겠다.” 조선족출신 00공무원의 말씀이다. 재한조선족사회에 정말 불가사의한 이상한 현상이 한 가지 있다. 중국에서 경찰한테 감히 대들지 못하던 조선족들이 이상하게 한국에 와서 한국경찰한테 협조하지 않을뿐더러 경찰을 무시하고 을러멘다. “사건 현장에 출동할 때면 둘이 갈 일을 넷이 가고 넷이 갈 것을 여덟이나 갑니다. 동포들이 군중영웅심리가 강해 사건과 관련이 없는 지나가던 동포들이 경찰공무집행을 방해하고 있어 많이 출동해야 합니다.” 동포밀집지역 경찰공무원의 고충이 담긴 고백이다. 왜, 이럴까? 중국에서 돈고생 하다가 한국에 와서 얼마간 돈을 벌었으니 세상이 녹두 알만해 보이고 자신이 영웅이나 된 것처럼 행세한다. 이런 조선족이 굉장히 많다. 일하기 싫어 입에 풀칠도 곤란한 동포들이 한군데 모여 빈둥대면서도 트럼프부터 김정은에 이르기까지 중국정치부터 일본우익에 이르기까지 세상사를 논하는데 한다하는 정치논객들을 뺨 칠 정도다. 서로 제 말이 옳다고 우겨대는 목소리는 온 동네를 시끌벅적하게 만든다. 이 광경을 목격하고 있노라면 진짜 원숭이에게 감투 꼴이란 말이 실감난다. 한국사회가 재한조선족사회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데는 이유가 충분히 있다 . ‘모든 일은 남을 탓하지 말고 스스로 반성하자.’ 이것이 필자의 일관된 신조이다. 언제 가면 재한조선족사회가 지적으로 변화되어 한국사회로부터 환영받는 집단으로 거듭날까? 지금으로서는 막연해 보인다. 참고로 모든 단체장이 다 그런 것처럼 이 글을 오해할 수 있는데 일부 조선족단체장들은 훌륭한 일을 많이 해서 한국정부로부터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다. 따라서 다수의 재한조선족은 묵묵히 열심히 착실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점 밝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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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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