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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족, 고국이 있어 동화되지 않는가
    ●김희수(중국) 고국(한국과 조선)이 있어 중국 조선족은 동화되지 않는다고 낙관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 그럴까? 사실 중국 조선족은 지금 경제, 문화, 언어, 문자, 풍속 습관 등에서 주류 민족에 서서히 동화되여가고 있다. 농촌에서는 이농현상으로 농촌 경제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땅을 지키지 못하면서 우리 삶의 터전을 잃어가고 있다. 도시에서도 조선족의 민영경제는 매우 취약하다. 물론 대도시에는 비교적 큰 조선족 기업도 있지만 전국적으로 굴지의 기업이 없다. 더구나 연변에는 조선족 사회의 견고한 토대로 될 중대형 기업이 별로 없다. 조선족 대부분은 외국 돈벌이에 의거하고 있는 실정이다. 조선족 경제의 취약한 상태는 경제동화를 보여주고 있으며 조선족의 취업, 교육, 과학기술, 문화 등에 영향을 주고 있다. 과거에는 우리 민족이 문화 수준이 높고 민족의식이 강했기에 우리 민족의 문화, 언어, 문자, 풍속 습관을 지키고 중국 땅에서 우수한 민족으로 당당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개혁개방 후 중국 조선족 사회는 급변하면서 인구이동, 인구감소로 민족교육체계가 붕괴되고 민족문화가 상실되어가고 있다. 동화를 막는데 가장 중요한 조선족 학교도 줄어들고 있다. 농촌학교는 물론 도시학교도 하나둘씩 폐교되고 있다. 조선족 공동체를 이루는데 가장 중요한 인구도 급감세를 보이고 있다. 우리 말과 글보다 한족 말과 글을 더 잘하는 아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조선족 신문, 잡지도 하나둘씩 줄어들고 있다. 이렇게 조선족 사회가 동화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지만 현재 중국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세대만큼은 동화되지 않는다. 우리 세대는 동화되지 않지만 다음 세대 혹은 그다음 세대에 가서는 주류 민족에 동회 될 수 있다. 우리 조선족에게 고국이 있어 동화되지 않는다고 낙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말 그럴까? 앞으로 우리의 아들이거나 손자, 증손자가 학부모가 된다고 하자. 그리고 그때에 가서 중국 조선족 인구가 줄고 줄어 자치주가 없어지고 조선족 학교도 폐교되고 우리 말로 된 방송, 텔레비전 방송도 없어지고 우리글로 된 신문 잡지도 자취를 감춘다고 하자. 이런 상황에서 미래의 아이들이 학교도 없는 우리글을 배우려고 하겠는가? 신문 잡지도 없는 우리글을 사용하려고 하겠는가? 그때 가서 우리글은 완전히 외국어(한국, 조선)로 된다. 우리의 아이들은 외국어를 배운데 해도 고 국어보다 영어를 먼저 선택할 것이다. 고국이 있어 동화되지 않는다고 낙관하는 사람들은 또 그때 가서 조선족들이 한국이나 조선으로 이민 가서 살면 되지 않겠는가고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전체 조선족들이 모두 고국(남북통일이 된다고 해도)으로 가서 산다는 것은 현실적이 못된다. 그때 가서 고국으로 가서 사는 조선족들이 많아질 수는 있지만 중국에 남아서 사는 조선족들도 적이 않을 것이다. 비록 우리에게 고국이 있다고 하지만 앞으로도 중국 땅에 계속 남아서 사는 조선족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중국 땅에 조선족이 존재하는 한 조선족은 고국이 있다고 해도 언젠가는 만족처럼 동화될 것이다. 중국에 살면서 중국 말을 하고 중국어를 써도 자신이 조선족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면 되지 않겠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미 경제, 문화, 언어, 문자, 풍속 습관 등에서 완전히 동화된 상태에서 관념도 점점 희박해지면서 결국에는 동화되고 말 것이다. 만주족의 경우를 놓고 보아도 그렇다. 지금 만주족은 말로는 만주족이지 한족이나 다름없다. 이제는 200여 년 동안 중국을 통치한 과거를 자랑하면서 “나는 만주족이다”라고 하는 만주족은 없다. 대부분 만주족은 자신이 만주족이란 관념도 상실하고 있다. 동화는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우리는 지금 자기의 민족학교를 갖고 있고 자기의 자치주를 갖고 있고 자기의 방송, 신문, 잡지를 갖고 있어서 동화되지 않고 조선족으로 떳떳이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앞집 처녀 믿다가 장가 못 가듯이 고국만 믿고 동회 위기에 철저히 대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완전히 동화될 수 있다. 그때 가서 “중국 조선족”이라고 말할 사람, 불러줄 사람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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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05
  • [6.25전쟁 70주년 특별기획] 한반도 전쟁과 그것이 남긴 기나긴 여운
    ●철 민 한 많은 대동강아 변함없이 잘 있느냐 모란봉아 을밀대야 네 모양이 그립구나 철조망이 가로막혀 다시 만날 그 때까지 아ㅡ 소식을 물어본다 한 많은 대동강아 … 이 노래는 우리 민족 분단의 괴로움을 잘 반영한 노래이고 무려 70여 년간 불려 진 노래이기도 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한반도에는 전쟁이 터졌다. 외세와의 전쟁이 아닌 동족상잔의 유혈 전쟁이 터졌다. 적어도 전쟁 초기에는 내전이었다. <폭풍> - <진격> - <남조선 해방> - <조국통일> ㅡ 이는 당시 전쟁을 도발한 자들의 슬로건이었다. 즉 소위 <통일전쟁>이라는 것이다. 38선이 돌파되고 3일 만인 6월 28일에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이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서울의 중앙청 상공에는 남홍 색 인공기가 날렸다. 뒤이어 경기도 오산에서 미군 스미스 부대가 인민군에 의해 붕괴되면서 외세의 개입이 공식화 되었고 7월 20일에는 대전이 함락되었으며 8월 중순 경에는 전선이 낙동강에 이르게 되기도 했다. 그 다음에는 9월 15일의 인천상륙 작전, 10월 1일 국군의 38선 돌파와 10월 19일의 한국군 및 유엔군의 평양 점령과 같은 날, 중국군의 한국전 개입…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의 정전협정 조인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서는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계속됐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다. 그 와 중 전쟁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영화나 다뮤멘터리 및 소설 등 작품들도 많았다. 필자를 포함한 중국조선족들은 중국이나 북한에서 만든 작품의 영향을 당연히 많이 받기 마련이었다. <영웅아들딸>, <침략자를 타격>, <어젯날의 전쟁>, <1211고지 방위자들>, <남강마을 여성들>… 당시 나이 탓이었는지 필자는 그런 영화나 소설 등을 보면서 아주 재미있고도 감명 또한 깊었다. 아니, 나이 탓보다는 그 사회의 세뇌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해야 더 적절했다. 미 제국주의와 남조선 괴뢰반동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 조국통일을 염원하는 조선인민의 불요불굴의 투쟁정신… 그런가 하면 필자와 나이가 비슷한 한국의 친구들한테서 듣노라면 이들 역시 지난 한시기는 그랬다고 한다. 영화 <태백산맥>을 보면서 빨갱이들의 지독함에 치를 떨었고 다큐멘터리 <한국전쟁>을 보면서 김일성과 인민군의 무자비함에서 반공선전에 열을 올렸으며 영화 <빨간 마후라>를 보면서 대한민국 공군의 위상에 자호감에 도취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동무>와 <인민>이란 말만 들어도 빨갱이와 연관시키군 했던 한국의 어느 시대의 젊은이들이었다. 그럼 이 어찌 그냥 나이가 젊었던 탓이라고만 하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소위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자신이 참 유치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헌데 지금 냉철하게 분석해보면 반도의 남과 북이 모두 입으로는 전쟁을 원하지 않고 평화와 협력을 부르짖으면서도 실제상에서는 전쟁을 획책하고 있는 <호전세력> 이 확실히 있다는 생각이다. 얼마 전 남과 북에서는 전쟁으로 치 닿을 수 있는 일종의 <긴장시일>이 있었다. 남측에 있는 탈북단체들에서 보낸 대북삐라를 빌미로 북측에서는 개성에 있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고 비무장 지대에 확성기를 재설치하는 등 일련의 직접 혹은 간접적인 도발행위를 감행했다. 이런 행위를 감행한 북측의 실속은 잘 알바 없으나 일개의 남측의 <대북 삐라 날려 보내기 행위>에 그 댓가로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와 같은 엄청난 도발로 대응한다는 건 어떻게 해석해도 도발이지 대응이라고는 판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도 남측의 <대북 삐라 날려 보내기 행위>는 어디까지나 탈북자 단체를 중심으로 한 민간단체의 행위였지 정부 측 행위로는 볼 수 없는 마당에 북측의 <폭파> 행위는 공공연한 도발이었고 남북 정상이 애써 이룩해놓은 신뢰 프로세스에 대한 일방적인 파국임에 틀림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혹시 북측의 진짜 목적은 미국의 11월 대선을 겨냥한 행동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진짜 괴롭힌 것은 문재인 대통령을 포함한 진정 반도의 평화를 염원하는 남측 정부와 국민들이었다. 또한 모든 것이 북측의 계획된 <씨나리오>로 그냥 남측에 엄포나 놓자는 선에서 그치자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국의 11월 대선을 겨냥한 것이든, 엄포를 놓자는 것이든 간 반도의 안정과 북측 자체의 이익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것이다. 언젠가 한국의 유명한 철학가 도올 김용욱 선생이 김정은 위원장한테 “두 번 다시 문재인 같은 사람을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란 충고를 하는 것을 유튜브를 통해 본 기억이 난다. 이는 문재인과 김정은의 만남이 천재일우의 기회라는 말로 된다. 또한 하늘이 준 기회라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그도 그럴 것이 남측이 대통령이란 북측의 주석이나 위원장처럼 죽을 때까지 하는 것이 아니고 5년제라는 제약성이 있는 것이며 그것도 대통령이라 해서 다 문재인처럼 진정으로 평화, 협력과 통일을 염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으로 해석이 되기도 한다. 70년 전의 6.25 전쟁ㅡ 지금 와서 이 전쟁은 북측이 도발한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전쟁이란 잘못된 것이고 범죄인 것이다. 그리고 그 전쟁이 동족상잔의 내전이라고 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이렇다고 볼 때 6.25는 한반도의 통일은커녕 분단을 아주 고착시키는 역효과를 낳았으며 그것의 가장 큰 책임의 장본인은 김일성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잘못된 결과의 책임을 김일성과 북측에 몽땅 뒤집어씌우는 것 역시 그렇다. 왜냐하면 그 전쟁을 초래하게 만든 발원지가 곧바로 미국과 소련이 제멋대로 긋어 놓은 38선, 즉 국토의 분단이었던 것이다. 그럼 왜 국토가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는가? 그것은 조선민족(한민족)한테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민족이 그토록 갈망하던 광복 또한 어떻게 얻어졌던가? 그것은 스스로 우리 민족 자체의 힘과 노력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도 이념과 체제가 서로 다른 미국과 소련의 힘에 의해 38선 이남과 이북이 분단이 되었으며 작은 갈등으로부터 마찰을 빚다가 5년 뒤엔 끝내 전쟁의 시국에까지 치달아 올랐던 것이다. 남과 북의 6.25 전쟁, 절대적인 책임은 김일성과 북측의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남측이 잘한 것도 아니었다. 지난 세기 90년대 말이었던가 2000년대 초엽이었였던가 KBS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한국전쟁>에서는 6.25 전 남측에서도 <북진통일>을 부르짖었고 이른바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자>라는 등 허풍을 친 것도 사실이었다. 워낙 빈 양철통이 소리도 큰 법이다. 또한 통일정부 수립에는 노력도 하지 않고 남측만의 단독 정부를 먼저 세웠는가 하면 <빨갱이 숙청>이란 슬로건으로 숱한 민간양민들을 학살한 것도 북측으로 놓고 말하면 남침을 감행할 수 있는 빌미로 되었겠다는 분석이다. 남과 북의 6.25 전쟁,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설사 피하지 못하더라도 중도 타협만은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쟁 초기, 한국 측이 인민군한테 밀려 낙동강 이남까지 쫓겨갔을 때 이승만 정부가 이념에만 매달리지 말고 진정 민족을 생각했더라면 흰 기를 들 수도 있었고 유엔군은 항복한 정부를 위해 이 국토에서 싸울 빌미가 없을 가능성이 없었을 것이 아니었다. 반대로 한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상할 때 김일성 역시 진정 민족이라는 큰 국면을 생각했더라면 흰 기를 들지 못한다는 이유도 없었다. 투항, 항복 ㅡ 민족의 이익을 앞세우고 진정 통일국가를 원한다면 이것 역시 그렇게는 수치스로운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남과 북의 6.25 전쟁, 남북 삼천리에 폐허와 잿더미만 남았고 300만 명의 죽음과 1000만 명의 이산가족과 수많은 전쟁고아를 만든 전쟁, 하지만 이런 결고를 초래해 놓고도 남과 북 모두가 서로 전쟁의 승자라고 떠들썩하며 환호했다. 그래 누가 누구를 이겼단 말인가?! 수백만 명의 희생의 댓가를 내고도, 각 자 원했던 통일도 실현하지 못한 전쟁 ㅡ 당시 우리 민족은 이렇게 자고자대의 망상증에 걸린 민족이었다. 20살 미만까지는 필자 역시 우리 민족은 대단한 민족으로 인정했다. 머리가 총명하다는 유대민족과 게르만 민족도 따를 수 없고 꺽어질망정 휘어지지 않는다는 소화민족도 비길 수 없으며 장사에 이골이 텄다는 중화민족도 부러워 하는 민족이라고 자부해왔었다. 하긴 장끼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예술에서 끼가 많은 민족이고 스포츠나 다른 몇몇 분야에서도 강점이 많은 민족인 것만은 틀림없다. 헌데 우리 민족한테는 치명적인 열근성이 있다. 한국 건국대학에서 교수로 근무하는 필자의 한 친구는 “우리 민족은 1 대 1이라면 그 어느 민족한테도 뒤지지 않지만 10 대 10의 대결에서는 100%로 뒤진다”고 했다. 정말 적절한 비유인 것 같다. 어찌 보면 우리 민족은 싸움에 이골이 튼 것 같다. 필자가 자주 인용하지만 크게는 남과 북이 마라톤식 싸움을 계속하고 그 다음은 국회와 지역끼리 갈등이 크며 작게는 이웃끼리 친구끼리도 잘 싸운다. 술을 먹다가도 싸우고, 잘 어울리다가도 서로 등 돌리며 싸우고, 돈 때문에, 여자 때문에 싸우고 또 싸우고… 싸움이란 수치이며 비극이다. 그젯 날 6.25의 참상들을 보면 그야말로 끔찍했다. 하다면 이제 다시 전쟁이 붙으면 더 끔찍할 것으로 자기 자신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도 모르게 단명할 수도 있다는 것이 현대전의 법칙이다. 아무리 통일을 원한다지만 무력통일은 안되며 이른바 <흡수통일> 역시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이제 와서 6.25는 역사로 되었다. 누군가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은 지나간 6.25의 참상에서 과연 무엇을 깨닫고 있는가?! 6.25 사변의 70주년을 앞둔 이 시각 우리 민족의 미래를 생각하니 어쩐지 슬퍼지는 마음이다. ❉ 필자는 동포투데이 논설위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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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4
  • [김정룡 칼럼] 귀 빠진 날과 미역국
    ●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중국어가 영어에 비해 표현력이 4.5배란다. 하긴 한문자체가 이 세상에서 유일한 뜻글자(표의자, 表意字)이기에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중국을 이웃한 우리 말 어휘 중 75%가 한자어라고 하니 한문 신세를 단단히 지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한자어를 제외한 순수 우리 낱말들은 삶의 정서를 표현하는 기능이 너무 풍부해서 세상에서 으뜸이라 나는 생각한다. ‘맛’, ‘멋’, ‘판’ 우리민족 삶의 정서를 대표하는 낱말을 타언어로 번역해보라. 의역은 가능하나 직역은 영 안 된다. 억지로 의역할 수 있어도 본래의 ‘멋’과 ‘맛’을 전혀 살리지 못한다. 우리말 의성의태어는 더욱 기가 막히게 맛깔 난다. 더해서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에는 없는 말들이 우리에겐 많다. 사람이 죽으면 ‘돌아갔다’는 말, 한 인간이 세상에 나온 생일을 ‘귀 빠진 날’이라고 하는 말, 우리 선조들의 기막힌 창의성에 의해 생겨난 우리만의 언어들이다. 우리만의 언어들은 나름대로 선조들의 삶의 정서가 깊이 배어 있어 그 유래를 추적하다보면 재미있기도 하고 보람도 느끼게 된다. ‘귀 빠진 날’에서 귀는 머리 양쪽에 달고 다니는 그 귀이다. 왜 인간이 태어남을 귀가 빠졌다고 말할까? 궁금하지 않는가. 요즘 인터넷이 발달해서 책을 읽지 않고도 컴퓨터만 만지작거리면 웬만한 지식정보는 다 얻을 수 있다. ‘귀 빠진 날’이란 말의 뜻도 네이버 선생한테 물으면 똑똑하게 대답해준다. 그런데 이러한 ‘지식정보’를 접하는 순간 나의 옛 기억을 소환해내어 그때 그 시절 추억에 잠시 아련히 잠겨본다. 나는 헤는 나이로 18세에 고중(고등학교)을 졸업하고 시골에서 농사일에 종사했다. 당시는 대학입시가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유일한 길이 곧 시골농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운이 좋게 농부가 된 지 8개월 만에 시골위생소(시골보건소)에 취직했다. 일단 호미자루를 벗었으니 시골사람치고는 크게 출세하여 신분상승한 셈이었다. 더 운이 좋은 것은 위생소에 취직하자마자 6개월 만에 용정현병원에 가서 ‘용정현 제4기 맨발의사 강습반’을 다니고 맨발의사(赤脚醫生) 면허증을 취득했던 것이다. 당시는 최연소 맨발의사 기록이었다. 그때부터 이 세상 다른 총각들이 경험해보지 못하는 일들이 나의 인생길에 펼쳐진다. 에둘러 말할 것 없이 나는 이마에 피도 채 마르지 않은 19세부터 아이 낳는 현장을 쌔빠지게 다녔다. 한창 이성에 대해 몹시 싱숭생숭할 나이에 그런 장소를 다녔으니 그때 있었던 일들이 지금도 영화필름처럼 생생하게 나의 머리에서 맴돌고 있다. 그저 그냥 맴도는 정도가 아니라 집요하게 추억을 소환하여 뇌리에서 재생하게 만들고 있다. 인간은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애를 낳지 못하는 지구상 유일한 동물이다. 그래서 아이를 낳으려면 산파가 반드시 필요하다. 물론 출산을 돕는 코끼리 같은 짐승이 없는 것은 아니다. 새끼라도 덩치가 커서 누군가 받아주지 않으면 맨땅에 떨어져 죽을 수도 있다. 그래서 늙은 코끼리들이 산모를 둘러싸고 상아로 아이를 받아준다. 그렇지만 분만을 집적 돕는 것은 아니니 그 코끼리들을 산파라고 부르지 않는다. 인간은 직립 보행하는 바람에 골반은 자꾸 작아지고 머리통은 반대로 커졌다. 원숭이나 북극곰처럼 네발로 다니는 짐승들은 넓은 산도(産道) 덕분에 2분이면 분만이 끝나는데 인간은 하루, 길면 며칠씩 산통을 겪어야 한다. 또 다른 포유동물들은 탯줄이 있지만 출생한 뒤에는 그냥 없어진다. 소와 말은 새끼가 나올 때 체중이 무거워 자연히 탯줄이 끊기고 개나 고양이는 어미가 씹어서 자른다. 그런데도 탯줄은 말라서 떨어지고 배꼽은 남지 않는다. 인간만이 배꼽이 있는데 역시 산파가 탯줄을 끊어줘야 올바로 정착된다. 산파의 역할은 이렇게 아이를 받아내고 탯줄을 끊어 배꼽을 올바르게 정착시키는 것이다. 옥황상제로부터 명주실 세 묶음과 은가위를 하사받았다는 삼신할머니가 우리민족의 최초의 산파이자 영원한 산파이다. 그런데 인간이 모여 사는 데는 아이를 낳기 마련이고 그 신생아들을 받아내고 탯줄을 끊어줄 산파들이 있어야 하는데 모택동의 의료노선에 의해 당시 중국 시골마다 산파가 있었다. 산파가 따로 있는데 왜 젊은 총각이 아이 낳는 장소에 나타날까? 시골 산파들은 산모가 순산으로 낳으면 그냥 받아주고 탯줄을 끊으면 그만이지만 만일 경우 순산이 아니고 난산에 부딪히면 곤경에 처하게 되며 해결책이 없다. 예하면 아이 낳는 도중 정신을 잃는 쇼크가 온다거나 지나치게 기진맥진하여 힘을 쓰지 못한다거나 하면 혈관 주사도 놓을 줄 모르는 시골산파의 능력으로는 구급이 안 된다. 그래서 이 맨발의사 총각을 불러 대기시켜 놓거나 미리 부르기 민망해서 사전대기는 못하고 갑자기 급한 사정이 생겨야 부르곤 하였는데 아무튼 아이 낳는데 수없이 많이 다녔다. “귀가 보인다. 좀 더, 좀 더.” “자아~ 이 고비만 넘기면 되니까 힘을 모았다가 한꺼번에 해결 보자고.” 아이 낳는 장소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태아는 엄마의 배와 헤어질 때 먼저 머리부터 내민다. 머리카락이 보이고 그 다음 이마가 보인다. 이마가 다 나온 다음에는 귀가 보인다. 그런데 귀는 머리 양 옆에 따로 붙어 있어서 나올 때면 애먹는다. 일단 귀가 다 나오면 나머지는 쉽게 마무리 된다. 그러니까 아이를 낳는데 있어서 관건은 귀가 빠져나오는 것이다. 우리민족이 생일을 ‘귀가 빠진 날’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이렇게 아이 생산 시의 관건적인 생리적인 현상을 뜻하는 함의를 지니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엄마가 나를 낳을 때 가장 심하게 겪었던 산통을 표현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자신의 생일을 ‘귀 빠진 날’이라고 말하는 것은 대부분 남자들이다. 아마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여자들은 생일을 쇠지 않아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이 말은 남자들이 많이 하는 것만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엄마가 겪은 산통을 잊지 못해 ‘귀 빠진 날’이라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자를 가장 천시하고 압박한 집단이 바로 이 땅의 조선남자들이었다. 우리민족의 남자들의 삶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삶이었다. 요즘 우연하게 한국 그때 그 시절 자료를 접하게 되었는데 경부고속도로가 뚫려 자동차를 타고 시속 100킬로미터 넘는 스피드로 달리던 1970년대 중후반만 하더라도 한국 산모의 75.1%가 자기 집에서 분만했다고 한다. 그것도 거의 반수가 의사나 산파의 도움 없이 나 홀로 숨죽이며 출산했다. 도움을 받는다 해도 조산부와 시어머니, 친정어머니가 반반이었다. 같은 시기 중국에서도 도시에 시집 간 여성조차도 시골 시집이나 친정집에 와서 분만하다 보니 시골에서 아이 낳는 수가 엄청 많아 이 총각도 빈번하게 다녔던 것 같다. 지금은 집에서 조산소로 조산소로부터 병원으로 변화되고 자연분만이 아닌 제왕절개가 급증하고 있다. 마취하고 배를 갈라 아이를 들어내니 산모는 태아가 귀가 빠지는 산통을 모른다. 이렇게 탄생된 아이들은 장차 자신의 생일을 ‘귀가 빠진 날’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지 않을까. 하여튼 나는 좀 기괴한 인간이라 별거 다 ‘시비’를 걸고 있다. 한편 우리민족 여성들은 아이 낳으면 무조건 미역국을 먹는 풍습이 있다. 또 사람마다 자신의 생일이 돌아오면 그날 아침 미역국을 먹는다. 같은 문화권인 이웃 나라 중국과 일본에는 이런 풍습이 없다. 중국 사람과 일본 사람 앞에서 ‘저런 인간을 낳고도 그 어미가 미역국을 먹었겠지.’라고 말하면 무슨 의미인지 몰라 머리를 갸우뚱할 것이다. “고려 사람들은 고래가 새끼를 낳은 뒤 미역을 뜯어 먹어 산후의 상처를 낫게 하는 것을 보고 산모에게 미역을 먹인다.” 당나라 서견이 <초학기>에 나오는 구절이다. 근대 실학자 이규경도 다음과 이야기를 기록에 남겼다. “어떤 사람이 물에 들어갔다가 이제 막 새끼를 낳은 고래에게 먹혔다. 고래의 뱃속을 보니 미역이 가득 붙어 있었고 장부의 악혈이 모두 물이 되어 있었다. 고래 뱃속에서 겨우 빠져나온 그는 미역이 산후조리에 좋다는 점을 알았다. 이것이 세간에 전해지면서 효력이 처음으로 알려졌다. 명나라 이시진의 <본초강목>에 미역의 약효를 알리는 대목이 있다. “신라 미역, 고려미역이 안팎 종기를 낫게 하는 신비한 약제로 사용된 적이 있다.” 과학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출산 후 상처를 아물게 할 뿐만 아니라 몸 안의 피를 맑게 해주는 효험이 있다고 한다. 거기에 자궁수축과 지혈까지 도와주고 출산 시에 유혈(流血)한 산모에게 피를 공급한다. 그 뿐만 아니라 갑상선 호르몬을 보충해주는 역할까지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역국 먹는 풍습이 삼국 시대부터 오늘까지 천여 년을 이어져 내려온 셈이다. 의학적으로 우리민족이 미역국을 먹는 풍습의 유래가 설명되었다 쳐도 아직도 완전한 설명이라기에는 뭔가 조금 부족한 느낌이 든다. 속설에 의하면 태아는 양수 속에 사는데 양수는 바다의 맛과 같이 찝찔한 맛이 난다. 바다에서 자라는 미역이 바로 양수의 맛처럼 찝찔하다. 미역의 사촌인 김도 마찬가지, 그 맛이 찝찔하다. 그러고 보니 바다에서 나는 낙지도 명태도, 갈치도 등등의 해산물도 모두 양수의 맛과 비슷하게 찝찔한 맛이 난다. 한국에 처음 오는 외국아이들에게 김을 주면 아주 맛나게 잘 먹는다. 나의 손자 녀석도 김을 주면 아주 잘 먹던 기억이 있다. 한국 최고 석학으로 꼽히는 이어령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김은 태아 때의 생명기억으로 그것을 먹음으로써 그 아이는 지금 태내의 세계, 바다로 가는 것이다. 바다에서 온 생명의 습성과 가장 가까운 것이 바로 한국인이다.” 우리민족이 산모가 미역국 먹고 아이들이 김을 즐겨 먹는 이유가 이어령 선생의 이 말로 설명이 다 된 것 같다.
    • 오피니언
    • 칼럼
    2020-06-21
  • 속담으로 본 우리의 민족적 특성
    ●권진홍 “한국에는 멀리 내다보는 속담이 없어. 중국에서는 ‘나무를 기르는 데는 십년이 필요하고, 인재를 육성하는 데는 백년이 필요하다(十年树木,百年树人)’라고 하잖아? 한국 속담에는 이렇게 멀리 내다보고 계획하는 속담이 어디 있냐?” 얼마 전에 가족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중 오빠가 나한테 한 말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이 말이 나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이 말만은 유독 머리에 박혔다. 내가 한국어를 가르치는 사람이여서인지 아니면 또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말은 우리말에 무한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나에게 정말 크게 다가왔다. 말 듣는 순간 머릿속 채널을 부지런히 돌려보았지만 반박할 만한 속담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그날이 지나고도 이 말은 여전히 귀전에서 맴돌았고 속담들을 좀 찾아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학생들과 함께 네이버사전에 들어있는 한국의 ‘표준국어대사전’, ‘고려대한국어대사전’, ‘우리말샘’에 수록된 속담들을 다 추출해냈다. 어마어마한 양이였다. 학생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혼자서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다음은 속담들을 하나하나 보기 시작했다. 워낙 방대한 양이라 보는 데만 해도 엄청난 시간이 필요했다. 절반 정도를 봤는데도 내심 기대했던 속담은 없었다. 실망감이 들기도 하고 왜 이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가 오빠의 그 한마디를 듣고 속담에 이렇게 집착하는 것은 속담은 여느 말들과는 달리 한 민족의 역사, 풍습, 민속, 지혜 등을 담은 정신적 유산이기 때문이다. 백과사전(1998)에서는 속담에 대해 옛날부터 말로 내려온 교훈이나 비유의 뜻을 담은 짤막한 말로 민중의 지혜가 응축된 민간 격언, 이언, 속언이라고 정의하였고,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서는 오랜 세월을 거쳐 삶에서 얻은 경험과 교훈이나 어떠한 가치에 대한 견해를 간결하고도 형상적인 언어 형식으로 표현한 말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또 어떤 학자는 속담을 어떤 종류의 교훈, 기지, 상상, 경계, 비유, 풍자 또는 모든 관찰 경험에 도움이 되는 지식을 표현하는 말로서 인간 생활에 관한 진리를 말할 목적으로 쓰이는 말이라고 기술하였다. 이처럼 속담은 인간이 집단적 사회생활을 해 오는 과정에서 개인적 또는 집단적 사유 및 공감을 통해 수렵된 세상사 및 인간 삶에 대한 지식이며 신념체계라고 볼 수 있다.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이 속담에 내포된 심리적 특성을 “한 국가의 기질과 정신은 속담에 의해 발견된다”라고 하였듯이 속담에는 민족의 마음이 반영되고 민중의 꿈과 슬기가 새겨져있다. 민족의 특성, 슬기, 정신을 언어화한 것이 속담이기 때문에 나는 더욱더 기대하는 속담을 찾아내고 싶었다. 그런데 속담을 토대로 한국 사람들의 성격을 분석한 심리학자의 연구결과는 언어중시, 체면지향, 목전실리, 피해의식 네 가지로 정리되여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공짜는 양잿물도 마다 아니한다’, ‘나중에 꿀 한 식기 먹기보다 당장 엿 한 가락이 낫다’, ‘내일의 천자보다 오늘의 재상’ 등 속담처럼 목전실리 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우리 속담에 멀리 내다보면서 장기 계획을 하는 속담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속담은 어느 짧은 시간 내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면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이는 우리 민족 전체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 민족은 왜 목전실리를 중시하고, 이런 목전실리를 중시하는 심리는 어떻게 형성되고 계속 이어졌을 가 하는 사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속담은 역사성, 문화성, 사회성을 갖는 만큼 이러한 속담들이 많이 형성 된 것에는 우리 민족의 고유 문화, 종교와 갈라놓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우리 민족의 고유의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가를 들여다보았다. 보통 우리는 민족 고유의 종교가 없다고들 한다. 종교만큼 한 집단의 의식과 문화에 영향을 많이 끼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진정 우리는 토착종교가 없었을까? 아니면 우리의 토착종교는 완전 사라져버린 걸가? 대부분의 민족이 나름의 원시종교가 있듯이 우리 민족도 토착 종교가 있었다. 샤머니즘, 무교/무속(巫教/巫俗)이 바로 우리 민족의 토착 종교였다. 다만 우리 민족 대부분은 그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미신이라면서 저속하게 여긴다. 우리 민족 대부분의 심리 깊은 곳에는 무속적 특징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것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면 대체 무속이란 어떤 것일까? 무속은 신령이 실재하여 샤먼이라는 주술자에게 붙어 신에게 소속되고, 신으로서 행동하여 악마와 요정을 쫓고, 인간에게 복지를 가져다준다는 원시적인 민간신앙이다. 샤머니즘은 북아시아,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와 남•북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등지에 분포된 하나의 원초적 종교였다. 무속은 수천 년이란 시간을 연속해오는 과정에 박해와 수난을 당하면서도 지금까지 지속되여오는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으며 오랜 시간 동안 우리의 언어, 풍습 제도 등에 영향을 끼쳐왔다. 우리 민족의 흥, 노래, 춤, 술문화 등은 바로 무속의 제의 형식인 굿에서 발전하여 온 것이다. 무당의 무가, 신무 등이 오늘날의 우리의 가요, 춤으로 발전하는 밑거름이 되여준 것이다. 우리 민족의 이 원시종교는 언제부터일가? 우리 민족의 기원을 알리는 신화에 ‘단군신화’가 있다. 천제의 아들 환인이 웅녀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 단군왕검이 우리 민족의 시조라는 신화이다. 그런데 ‘단군’이라는 명칭은 하늘을 뜻하는 알타이어 ‘텡그리(Tengri)’의 음에서 유래한 것이며, ‘왕검’의 ‘검’은 신령을 뜻하는 ‘캄(Kam)’의 음역을 따서 한자로 표시한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다. 즉 우리 민족 무속의 역사성을 단군신화에서부터 찾는 것이다. 무속이 문헌상에 나타난 것은 삼국시대인데 신라 2대왕 남해차차웅은 왕호이자 무칭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처럼 고대사에 있어서 무당은 부족 내지는 부족 련맹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였다. 신라시대에는 불교를 수용하면서 고대 신앙이 불교와 혼합하여 창조적인 형태로 전개 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화랑도이다. 그러다가 신라의 쇠퇴기에 사회가 불안해지자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인 성격의 무속이 개인의 안전과 축복을 찾는 무격신앙으로 발전되였다. 고려시대에 들어서서 유학자들이 서서히 많아지면서 무당들이 억압을 받기 시작하였다. 공자가 괴력난신(怪力亂神)을 극력 꺼렸기 때문에 유학자들에게 무속이 곱게 보일리 없었다. 하지만 고려 때에도 무속은 생활면에서 광범위하게 적용 되였고. 개인이 발병을 해도, 국가의 행사에도 무당을 불러 굿을 하고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귀족의 딸 가운데에도 무당이 된 경우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유학, 그중에서도 성리학이 국시가 되면서 무속은 전례 없는 압박을 당하고 무당들은 천민계급으로 강등되고 도성 출입이 금지되었다. 유교를 숭상하는 량반들은 무속을 빈천한 것으로 폄하하면서 멀리했다. 그렇다고 무속이 도성에서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나라에는 성수청, 활인서 등의 무청이 있었고 사제무가 기우제, 산천신제, 성황제 등을 도맡아서 하였다. 그리고 유교적 고상함으로 표방하고 있는 양반들도 정작 가문에 불행한 일들이 생기거나 하면 부인들에게 못이기는 것처럼 하면서 야밤중에 무당들을 불러다 제사를 지내고 굿을 하곤 하였다. 그래서 공식적으로는 무당들이 다 도성에서 쫓겨났지만 도성 속의 무당에 대한 수요는 줄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민족의 무속은 오늘까지 이어져왔다. 조선조 500여 년 동안의 억압과 핍박하에서도 요절하지 않고 지속되여올 수 있었던 것은 존재의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민중들이 믿고 신앙하고 위기 때마다 민중들을 지탱해주는 힘의 원천으로 되였기 때문에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할 수 있었다. 우리 민족 문화의 핵이 무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무속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바로 현세중심, 현실중심, 실용주의, 인간중심이라고 한다. 이햇님(1997)은 무속의 성격을 이렇게 요약하였다. 첫째, 자연주의적이고 현세 중심적이다. 무속에는 초지상적인 가치나 형이상학이 없고 오직 자연 질서에 따른 생자필멸사상(生者必灭思想)과 현세에서의 가족 내지 부락 공동체의 구복(求福)과 제재(除灾)를 위한 현세 중심적 가치관과 도구적 신관이 있을 뿐이다. 민족의식•국가의식•역사의식 같은 자연적 공간을 초월하는 넓은 의미의 공동체 의식은 대단히 희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족•혈연•부락 등 일차적 집단이라 할 수 있는 좁이 의미의 공동체 의식은 비록 범위는 좁을지라도 의식의 강도는 높다. 둘째, 평화적이고 인간중심적이다. 무속에서는 선•악 같은 양극적 가치들 사이의 갈등이나 대립보다는 평화나 화해를 추구한다. 셋째, 현실 중심적이고 실용주의적이다. 무속에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긍정하고 그 현실에 적응하면서 최대한의 이익을 찾는다. 현세적 이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면 무엇이건 실용적으로 이용한다. 우리 민족 문화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무속의 특징을 보면 왜 우리 속담들에 현실 중심적이고 실리적인 속담들이 많은지 자연 이해가 된다. 그리고 또 왜 장기성을 나타내고 큰 그림을 그리는 속담이 없는지도 이해가 된다. 혈연, 마을공동체의 리익은 중시하면서 그 범위를 벗어난 민족의식, 국가의식이 결핍하였던 문화원류가 그 원인이 아닐가 싶다. ‘산 개가 죽은 정승보다 낫다’는 속담처럼 철저하게 즉 ‘지금’, ‘이곳’을 중시하는 현재 중심적 사고, 인간과 신의 관계에서 신도 인간의 삶을 부러워하고 인간의 조종을 받는 현세중심, 인간중심의 세계관에서 비롯되였을 것이다. 무속이 심한 박해와 핍박을 받으면서도 수천 년을 존속되여올 수 있었던 것은 그 나름대로의 존재의 이유가 있고 끈질긴 생명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전문 무속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서 무속 자체에 대해 왈가왈부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글을 쓰면서, 사고를 하면서 느낀 점이 피해의식을 나타내는 속담이 많을 정도로 우리 민족이 피해의식의 심리가 강한 것은 자기 부정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흔히 우리 민족을 ‘한’의 민족이라고 한다. 강국들 사이에 끼여있는 지역적 특성에서 ‘한’이 맺혀 피해의식이 많아졌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많은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문화의 핵인 무속에서도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고려, 조선, 일제시대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무속에 대한 부정과 폄하, 핍박으로 하여 점차 무속을 저속한 것으로, 미신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 원초적인 종교를 부정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부정하기 전에 이미 형성된 우리의 무의식 깊은 곳에는 무속 의식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고, 핍박받을수록, 부정할수록 그에 대한 의지는 오히려 더 단단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것을 우리의 문화의 핵이라고 하는 것을 당당하게 인정하지 못할 뿐더러 부정하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생각하면서 겉으로는 불교적으로, 유교적으로 기독교적으로 포장하면서 살아왔다. 자기에 대한 강한 부정은 내심 속 자리하고 있는 덩어리와 충돌하면서 한이 생기고 피해의식이 생길 수 밖에 없게 된다. 피해의식이 생길수록 이해관계에 민감해지고, 이해관계에 민감해질수록 미래를 지향한 장기적 계획보다는 단기적 즉각 만족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자기 부정이라는 것도 우리 민족의 원초적 심리인지도 모르겠다. 민족의 시조 단군을 탄생시킨 웅녀는 곰이라는 자신을 부정하면서 인간이 되려고 하였고, 일련의 시련을 거쳐 녀자가 되였고, 환인과 혼인하여 단군 왕검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다른 종교들처럼 신에게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의 초자연적 능력을 조종하여 인간의 행복을 만들어주고, 신도 인간세계를 부러워하는 인간중심의식, 민족•국가의식보다 더 강한 혈연의식, 그 범위를 더 좁혀보면 강한 자기애라고 할 수 있겠다. 강한 자기애와 강한 자기부정, 서로 반대되고 상충되는 이 두 의식이 강렬하게 부딪치면 어떤 심리가 만들어질까? 그러면서 어떤 특징이 보여질가? 세상을 비추기도 하고 담기도 하는 말의 일부인 속담으로부터 민족의 성격을 보았고, 심리를 보았고, 그 원류로 생각되는 것에 거슬러 올라가 보면서 우리 문화의 핵을 짚어보고 그것이 집단심리형성의 원인이 아닐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리고 나의 좁은 식견으로서는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 새로운 과제도 남겨본다.
    • 오피니언
    • 칼럼
    2020-06-21
  • 고국도 모르고 모국도 모른다
    ●김희수 어느 조선족 사이트에서 “고국도 아니고 모국도 아니다”라는 어이없는 글을 보게 되였다. 아래 이 글의 내용을 요약한다. 두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알기 위해 한국의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봤다. 모국: 1. 자기가 태어난 나라. 흔히 외국에 나가있는 사람이 자기 나라를 가리킬 때에 쓰는 말. 2. 따로 떨어져 나간 나라에서 그 본국을 이르는 말. 고국: 주로 남의 나라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조상 때부터 살던 나라를 이르는 말. 사전 해석이 알려주듯이 현재 중국에서 중국 국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한국을 “모국”이라고 사용하는 건 옳지 않은 사용법이다. 한국이 일부 이민 1세의 모국이었겠지만 3대 4대에 걸치는 우리가 태어난 나라는 아니다. “고국”이라고 사용하는 건 더더욱 삼가해야 할 것 같다. 사전에 보면 “남의 나라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석을 하고 있다. 즉 한국을 “고국”이라고 하면 스스로 지금 살고 있는 나라를 “남의 나라”로 인정하는 셈이 된다.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만들고 있는 자세이다. 글은 사전해석을 근거로 조선족에게 한국은 고국도 아니고 모국도 아니라고 성급하게 판단하고 있다. 우선 바이두(百度) 백과의 해석을 보자. 모국: 문화상의 조국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다른 나라의 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조상이 세세대대로 살던 나라를 이르는 말이다. 상술한 해석에 따르면 중국조선족은 한국을 모국이라고 부를 수 있다. 화교들이 미국국적을 가졌든 유럽 국적을 가졌든 모두 중국을 자신의 조국, 모국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모국에 대한 《표준국어대사전》의 해석을 다시 보자. 모국: 주로 남의 나라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조상 때부터 살던 나라를 이르는 말. “고국도 아니고 모국도 아니다”라는 글의 작자는 이 해석을 근거로 “중국조선족은 중국국적을 가졌기에 남의 나라에 사는 사람이 아니다. 고로 조상 때부터 살던 나라 한국을 고국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데 상술한 사전해석에서 맨 앞에 “주로”란 말이 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러니까 “주로 남의 나라에 있는 사람이”지 이런 경우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중국국적을 가진 조선족도 “자신의 조상 때부터 살던 나라”인 조선이나 한국을 고국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조선이나 한국을 “모국”, “고국”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스스로 지금 살고 있는 중국을 “남의 나라”로 인정하는 셈이 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자신이 속한 민족에 대한 사랑의 표현일 뿐. 전 세계의 화교들은 자신이 어느 나라의 국적을 가졌든 간에 모두 중국을 자신의 조국, 모국이라고 부르고 자신을 염황 자손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고국도 아니고 모국도 아니다”라는 글의 작자는 조선족더러 우리의 조상이 세세대대로 살던 나라를 “모국”, ‘고국”이라고 부르지 말란다. 우리 민족더러 조상도 모르는 인간 망종으로 되라고 하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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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18
  • “불법체류자 단상”
    ●김도균(한국이민재단 이사장) 한국에는 불법체류자로 불리는 외국인이 약 40만 명에 달한다. 우리 경제 규모에 그정도는 용인된다는 목소리도 있지만 진짜 문제는 합법대비 불법의 비중(20%)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하기야 국내 불법체류 외국인보다 해외에서 불법체류중인 우리 국민이 더 많고 일정한 수준의 불법체류자는 사회나 경제구조상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지만, 정부가 자체적 으로 관리하거나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 이미 불법이 불법을 양산하는 고착화ㆍ조직화의 단계에 진입했다는 것은 향후 이민정책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법무부(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정책을 시행했지만 백약이 무효다. 지금 시행중인 자진신고 제도만 해도 그렇다. 이달 말로 종료되는 자진신고 제도를 불체자 감소를 위한 선순환 대책이라고 하는데 출발이 잘못되었다. 지금 시행중인 자진신고제도는 불법체류자가 자진출국하면 범칙금을 면제 해주고, 일정기간 후 다시 단기 방문비자(90일,취업불가)를 발급해 재입국을 보장해 준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이렇게 불법을 합법으로 선순환 한다는 것인데 이민정책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것은 '선순환'이 아니고 '악순환'이라는 것을 다안다. 불법체류자가 출국하고 나면 그자리를 또 다른 불법체류자로 대체할 수 밖에 없고 단기비자로 재입국한 외국인은 취업이 불가하므로 다시 불법체류자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현장에서는 극단적으로 불법체류자 고향방문 정책이라고 비웃는 소리도 나온다. 당장은 늘어나는 불체자가 일시적으로 감소하는 착시현상은 보이지만 풍선효과와 돌려막기식 정책으로 악순환이 반복될 뿐이고, 현재 정책이 다음 정책에게 빚을 떠넘기게 되고 정책의 신뢰성만 해치게 된다. 불법체류자 대책중 하책은 단속이고 중책은 출국유도와 입국차단이고 상책은 시장조절이다. 법무부는 줄곧 하책과 중책만 번갈아 가며 시행해 왔는데 지금은 시장기능을 조절하는 상책을 검토하고 시행해야 한다. 이달이면 불법체류자 자진신고도 끝나니 이후에 발생할 불법체류자 증가는 시간 문제이다. 이들 중 농어촌 근로, 간병인, 외식업 등 노동시장 테스트가 이루어지고 국민 공감대가 이루어진 부분은 과감히 합법 체류의 길을 넓히고 유학생, 이민자 가족, 동포들의 취업과 체류에 특례를 확대해야 한다. 그리고 일단 합법의 길을 선택하고 성실한 체류자로 검증된 인재는 과감히 영주권까지 갈수 있는 사다리를 만들어 주어야 불법으로 전락하지 않는다. 반면 국민 일자리 잠식분야인 건설업과 퇴폐업소 등에 대해서는 엄격한 법집행(고용주는 형사처벌, 외국인은 영구 입국금지)으로 유입을 확실히 차단하여 국민이 공감하는 이민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코로나 이후 이민정책의 대전환이 요구되며 이제 전문가가 나서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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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07
  • 조선족 생활세계와 젠더 질서의 변화 가능성
    ●최선향 (장강사범학원) 젠더(gender)는 생물학적 성차(性别差异)가 아닌 사회적인 성별(社会性别)을 나타내는 용어로서 여성성(女性气质,女人味)과 남성성(男性气质,男人味)은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본다. 1970년대 이후 여성주의학자들에 의해 쓰이기 시작한 젠더라는 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시대가 바뀌고 사회가 발전하면 여성성, 남성성의 내용도 달라지고 성역할 규범이라든가 성별분업(性别分工)에도 변화가 따른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지난 9월 학술회의 차로 연길에 다녀왔는데 10여년 만에 가 본 연길은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중 제일 반가운 변화가 주말 연길공원에서 본 아기를 안고 공원을 돌던 젊은 아빠의 모습과 중학생으로 보이는 쌍둥이 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공원을 산책하던 다정한 아빠의 모습이었다. 아이와 함께 산책 나온 아빠들을 보며 홀연 10년 전 조선족 여성 노인들의 노후생활을 연구하기 위해 만났던 한 할머니의 남편이 해 주신 이야기가 떠올랐다. 연변 화룡 출신의 그분은 퇴직간부였는데 젊은 시절 화룡에 살 때 아내를 돕고 싶어도 주위 사람들이 비웃을가 봐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하셨다. 물을 길어도 날이 어둡기를 기다려 남들이 안 볼 때 가서 길어왔다고 하셨다. 그러고 보니 세상이 많이 바뀐 것 같다. 한금옥 선생의 <도시 조선족 맞벌이가정 주부들의 가정지위에 대한 조사>라는 논문을 보면 1990년대초 조선족 가정의 가사분담에서 남편의 참여는 아주 저조하였다. 조복희 등 학자들의 논문 <연변지역 조선족의 가족생활 및 육아방식의 실태조사>를 보면 1990년대초 연변조선족 가정의 육아분담 조사에서 남편은 거의 안 한다고 답한 비례가 40.5%나 된다.(이화, 2019: 43, 45) 하지만 개혁개방 이후 도시화, 지구화를 배경으로 한 이주의 물결 속에서 조선족의 생활세계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주의 여성화와 엄마의 부재라는 전에 없던 현상들이 나타나면서 가사에 별로 손을 대지도 않던 조선족 남성들이 아내가 한국이나 외지에 일하러 가고 홀로 집에 남게 된 것이다. 그들이 홀로 가사일과 아이를 돌봐야 하는 상황이 많아지며 연변 소품(小品)에도 가정 살림을 맡아하는 남자들의 모습이 담겨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에는 많은 낯설음과 심리적 갈등, 콤플렉스 등 여러 가지 감정들이 교착되였을 것이다. 몇 년 전 추석에 남편의 고중 동창네 가족이 우리 집에 놀러 왔었는데 그 친구의 변화를 보고 많이 놀랐다. 예전에 본 그는 한국기업에서 한창 잘 나가던 시기라 사람이 성격이 활달하고 자신감 있어보였다. 그런데 중년에 들어서며 직장을 잃고 거의 3년 동안 집에서 놀아서(그의 말을 빌린다면) 그런지 사람이 기가 많이 죽고 많이 소침해 있었다. 남편이 왜 이리 많이 변했는가고 묻자 그 친구는 “너도 집에서 한 3년 있어봐. 이렇게 돼.”라고 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그런것 같다. 남자가 젊은 나이에 일하지 않고 집에서 ‘놀기’만 한다는 것은 보통 상식적으로 리해가 안 가는 일이다. 실은 남자들도 집에 있으면서 ‘놀기’만 하는 게 아닌 데 말이다. 그의 아내 말을 들어 보면 남편이 직장 생활을 안하는 대신 집에서 집안일도 많이 하고 애도 많이 돌보며 직장생활을 하는 자신을 많이 돕는다고 했다. 우리는 주변에 애를 돌보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전업주부로 있으며 가정과 아이들을 돌보는 여성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녀들은 그처럼 그 정도까지는 기죽지 않는다. 왜 그럴가?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이지만, 여기에는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성별분업이라는 이데올로기가 한몫해서다. 우리는 남자가 할 일, 여자가 할 일을 따로따로 구분해 놓은 남여의 성별분업에 많이 익숙해져 있다. 가사일과 자녀양육은 먼저 여성과 연결시키는 대신 남성들은 바깥일을 잘 해야 하고,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사람으로 인식해 왔다. 보통 돈을 벌어 오는 일차적인 책임은 남편이 짊어져야 한다고 여긴다. 남편이 그런 책임을 잘 못 질 경우 부실한 남자, 못난 남편으로 평가 받는다. 남편은 생계를 책임지는 대신 집안일은 안 해도 되고 못해도 된다. 반대로 집안일은 잘하지만 돈을 못 벌거나 많이 못 버는 남자는 좀 모자란 남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여가생활에서도 남자와 여자는 취미가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예전에 아는 지인 부부가 부부싸움을 많이 했는데 들어보면 아내는 남편이 매일 드라마나 본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남자라면 뉴스나 큰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왜 드라마만 보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 아내 되는 사람이 아주 여성적이지도 않은 데 말이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하는 만큼 성역할 분담을 잘 못해서 불만을 가질 때가 많다. 여성은 돈을 잘 벌고 능력이 있어도 집안 살림을 잘 못하거나 자녀양육에 신경을 많이 못 쓸 경우 가족과 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못 할 때가 많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일수록 자신의 녀성스러움, 즉 현모양처의 이미지를 더 굳히려고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다. 이렇게 성별분업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할 때가 많다. 그런 의식에서 벗어나야 남자든 여자든, 직장일이든 가사일이든, 자녀 양육이든 편하게 할 수 있는 데 말이다. 지금까지 조선족의 발전을 논함에 있어 경제나 사회, 교육 등 공적 영역에 관한 언급이 주를 이루고 생활세계에 관한 언급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독일의 철학자 하버마스에 의하면 사회는 크게 체계와 생활세계로 나눌 수 있다. 체계는 권력, 돈과 같은 매개체를 통해 도구적 이성과 목적합리적 행위가 작동하는 세계이고, 생활세계는 가치, 규범, 상징적 상호작용 등 의사소통적 행위가 작동하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심영희,1999:90) 공적 령역에 관한 연구와 거시적인 안목, 거대담론도 중요하지만 사적 영역, 생활세계, 조선족의 일상에 관한 미시적인 접근도 필요하다. 일상이란 반복되고 체화 되여(생각, 사상, 이론 따위가 몸에 배여서 자기 것이 됨.)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것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일상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자질구레한 일과들의 공간인 동시에 인간의 사적이고 내면적인 삶과 닿아있는 중요한 영역이다. 일상생활은 흔히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국가나 민족, 사회의 구조도 따지고 보면 개개인의 반복적인 일상생활에 의해 유지된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족들이 일상적인 생활세계 안에서 일상적인 활동을 어떻게 꾸려가는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활동은 상황에 구속받음과 동시에 상황 자체의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실천적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족은 지금까지 시대와 사회의 발전과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해왔다. 오늘날 지구화라는 현실에도 빠르게 적응하며 새로운 생활패턴을 만들어가고 있다. 가족구성원들이 서로 다른 나라, 지역에 흩어져 살며 초국적 가족이 늘어나고 있는 오늘, 새로운 현실에 더욱 잘 적응하려면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남겨져내려온 전통적 습관과 문화를 새 시대에 걸맞게 바꾸어나가야 할 것이다. 특히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스며들어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기존의 젠더 규범과 젠더 질서의 변화가 요구된다. 일상생활 속에서, 가정에서 남녀가 보다 평등하고 민주적인 관계를 만들어가야 보다 행복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려나갈 수 있으며, 가족구성원 누구나 자신의 가치를 실현해가며 보다 발전된 모습으로, 보다 충실하고 성장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그러한 실천과 노력들이 이어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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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31
  • "발리"와 "발이"
    ●김경화(재중동포작가)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애가 급기야 발리(<발>: 발이의 중국식 꼬부랑혀 발음)????를 입 밖에 토해낸 것은 지난 4월말경의 어느 아침, 유치원에 가려고 자기 스스로 신을 신다가 말고서였다. 나는 한참이나 멍해있을 수밖에 없었다. 설마 했는데… 남편과 나는 둘 다 출근족이다 보니 애가 일곱 달 되던 때부터 남의 손에 맡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친정 쪽에도 시집 쪽에도, 단 하루도 애를 봐줄 수 있는 사람조차` 없다보니, 물론 친할머니, 외할머니 다 계시지만 연세도 있고 사정상 애를 맡길 수 없는 상황이라 그동안 보모 손에서 전탁으로 전전긍긍하면서 그야말로 전쟁을 치르듯 살아왔던 우리. 애를 제대로 봐줄 수 있는 보모만 구했더라도… 여러 가지로 마땅치 않아 골머리를 앓으면서 지내오다가 아들애가 스무 개월 되던 지난해 11월, 끝내 참지 못하고 탁아소(어린이집)를 알아봤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생겼다. 우리가 사는 구역이 한족(중국인)들만 모여 사는 집거구역이라 조선족탁아소를 찾을 수가 없었다. 시내 공중버스를 이용해 애를 데려가고 데려올 수 있는 그런 곳도 샅샅이 돌아보았지만 한족탁아소뿐이였다. 그러던 중 우리 집과 가까운 곳에 규모가 잡히고 환경도 괜찮은 유치원을 발견했는데 마침 탁아소까지 곁들어 있어 마음이 끌렸다. 한족유치원이긴 했지만 조선족반도 있었고, 탁아소에도 한족선생님 두 명에 조선족선생님 한 분이 계셔서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시간상 더 돌아볼 여유도 없어 아들애를 그 유치원에 붙이기로 결정했다. 한창 말을 번지기 시작하던 때라 혹 꼬부랑 한족(중국)말부터 배우지 않을까 내심 우려도 했지만 조선족 선생님이 계시니 괜찮을 거다, 그리고 한족말 배워서 나쁠 것도 없지 않은가. 중국에서 살고 있는 한 한족 말을 능숙하게 하는 것도 어쩌면 낭패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애를 유치원에 데려가고 데려오고 하는 일을 나보다 시간적 여유가 더 많은 남편한테 떠맡겼다. 그냥 별 탈 없이 유치원과 집 사이를 잘 오가는 아들애를 보면서 소반부터 조선족반으로 옮기면 된다고 간단하게 생각했고 .마마(엄마), 빠바(아빠), 나이나이(할머니)와 츠판(밥 먹어) 정도의 한족 말을 구사하는 것은 그저 좋게만 받아들였다. 주변에서도 중국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구사하는 아들애를 보고 어린 것이 대단하다며 칭찬할 때면 솔직히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었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내가 방심하고 조금씩 으쓱해하고 있는 사이에 아들애의 혀는 어느새 중국 특유의 꼬부랑혀로 변해가고 있었고 언제부터인가는 한족말만 해대고 조선말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조선말은 시켜봐야 겨우 한두 마디 하는 정도였고 일상용어가 완전히 한족말로 바뀌운 것이다. 몇 마디 말을 더 시켜봤더니 그전에는 잘만 하던 "오리"도 어느새 "올리"로 꼬부라져 있었고 대신 한족 말은 아주 정확하고도 또렷하게 발음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조선말은 하기 싫어 짜증을 부리기도 했다. 나보다 유치원사정에 더 밝은 남편이 어느 날인가 아들애네 탁아소에 조선족애가 두 명뿐이라 선생님들이 거의 조선말을 안 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나름대로 중국 땅에 살지라도 자기 민족의 뿌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다니던 내가 어쩌다가 아들애를 혀꼬부랑이로 만들었단 말인가! 중국에 사는 조선족, 이중성을 띤 민족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떡하다보니 우리는 고국을 앞뒤에 두고 타국을 조국이라 부르면서 살게 된 것이다. 다행이라면, 중국에서 살고는 있지만 자기 민족의 언어와 풍속습관, 문화를 잊지 않고 지키고 발전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가 중국에서 한족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면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에 조선족인구가 점점 줄어들고 있어 2,3십 년 후에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없어질 지도 모른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또한 우리 민족교육이 위기에 처한 것도 타민족에 비해 현저하게 낮은 조선족 인구 출생률 문제도 있겠지만 더 큰 문제는 많은 학부모들이 자식을 한족학교에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어려서부터 중국어를 배우면 물론 좋은 점은 많다. 중국어를 능란하게 구사하고 중국인들 속에서 그들과 어울려 그들의 문화를 배우고 생활해 가면 중국이라는 이 거대한 땅덩어리에서 생존해나가기에는 많이 유리할 것이다. 이는 자식을 한족학교에 보내는 부모님들의 공통된 생각이기도 하다. 자기 자식을 중국에서 좀 더 편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그들에 대해 왈가왈부 말썽들이 많았지만 내 자식을 위한 부모의 마음 그것을 누가 감히 뭐라고 할 것인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중한 수교 이후로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점점 커가는 양국 간 경제무역 거래로 인해 중국 내지에 한국어에 능통한 인재 수요가 급증했고 중국인들 속에서 한국어 학습 붐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어 학습 붐은 여기 조선족 집거지인 연변에도 세차게 불어치고 있다. 연변대학 한국어학부는 응시하는 수험생이 너무 많아 고시에서 어지간한 높은 점수를 맞지 못하면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또한 갈수록 많은 한족들이 자기 자식을 조선족 학교에 보내고 있다. 그런데 내가 아들애를 한족 유치원에 보냈다는 큰 실수를 저지르다니. 김치와 토장국으로 식단을 차리고 빨래를 푹 삶아 짱짱 빨래 방치소리까지 곁들여야만 직성이 풀려하는 내가 아니던가. 조선족은 참 알뜰하다, 이런 식의 칭찬을 중국인들한테서 들을 때면 가슴 한구석이 뿌듯했던 내가 아니었던가. 어디 가서나 가장 자랑스러웠던 그 한마디― 저는 조선족입니다, 바로 그거였는데. 한류열풍이 중국대륙을 강타했을 때 인터넷상에선 한국과 조선족은 어떤 사이냐고 묻는 중국인들이 많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고. 현재 중국에 살고 있지만 그들과 똑같은 조선민족이라고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며 설명해주곤 했다. 중국을 항상 앞서가는 한국이 우리의 고국이고 한국인들과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 큰 자랑이었다. 그런데 나는 어느새 아들애를 허울만 조선족인 우리말도 할 줄 모르는 중국애로 키워가고 있었다. "발리", 그것은 누가 들어봐도 중국인이 우리말을 하는 그런 모습인 것이다. 먼 훗날, 아들애가 어느 날 "엄마, 엄마는 왜 날 자기 민족의 언어도 제대로 구사 못하는 놈으로 만들었어요? " 하고 물어온다면 과연 나는 무엇이라 대답해야 되는 것일가? 그리고 어느 날, 중국인들이 왜 당신 아들애는 자기 민족의 언어도 제대로 구사 못하는가고, 과연 조선족이 맞긴 맞냐고 한다면 그 역시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나 스스로 만들어낸 숙제 앞에 나는 기분이 착잡해져만 갔다. 아들애가 민족어를 잊어가고 있는 것에 대해 절대 그대로 놔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들애를 민족어도 구사할 줄 모르는 반쪽짜리 조선족으로 만드는 죄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아들애도 나처럼 우리 민족에 대한 긍지감을 안고 살아가게 하고 싶었다. 단군의 피와 살을 이어받은 몸으로서 내 민족의 전통과 언어, 문화를 지키고 빛뿌리며 거기에 타민족의 언어까지도 잘 구사할 수 있는 사람, 그것이 바로 우리 민족의 후예다운 모습이고 이 시대가 바라는 인재가 아니겠는가. 이제라도 나는 아들애를 "발리"가 아닌 "발이"를 정확하게 구사할 줄 아는 진정한 조선족으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 민족을 사랑하고, 그래서 내 민족의 언어, 문화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빛뿌려갈줄 아는 그런 인간으로 말이다. 지금 아들애는 집과는 거리가 좀 멀리 떨어진 조선족유치원에 다니고 있다.. "발리사건"이 있고 나서 불달린 마음으로 유치원을 옮겨버린 것이다. 거리가 멀다고는 하지만 통근차가 아침저녁으로 다녀서 큰 불편은 없고, 무엇보다 교령이 십년이상 되는 아들애 담임 선생님이 참 맘에 들었다. 아들애도 처음엔 그동안 한족유치원을 다녀서인지 첨엔 생활이나 언어 등 면에서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더니 한 달이 지나니 새로운 환경에 점점 적응되고 다른 애들하고 잘 어울려 놀기 시작했다. 우리말 노래도 배우고 춤도 배우고, 단어도 하나하나 익혀가는 모습이 대견스럽기만 하다. 따라서 "올리(오리)", "발리(발)" 등 중국식 꼬부랑발음을 하던 혀도 많이 펴진 듯 했다. 이제 발을 "발리"가 아닌 "발이"로 옳게 발음할 수 있는 아들애, 오리를 "올리"가 아닌"오리"로 옳게 발음할 수 있는 아들애. "곰 세 마리", "반딧불" 등 우리말 노래도 제대로 다 부르고 만두가 아닌 토장국에 김치를 좋아하며 어른들을 만나면 구십 도로 허리를 굽히면서 «안녕하세요? 잘 가세요,» 등 인사도 제법 잘한다. 이제 나는 아들애한테 우리 말 우리글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사랑하는 그런 민족의 자긍심을 가르쳐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전통과 역사를 가르칠 것이다. 단군할아버지가 누구이며 훈민정음을 만들어낸 세종대왕이 누구인지를 가르쳐줄 것이다. 그래서 먼 훗날 아들애가 성인이 되고난 후 중국이거나 한국만이 아닌 세계 그 어느 곳에 가서더라도 우리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안고 우리 민족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게. 오늘도 나는 아들애에게 "발이"를 해보라고 한다. "발이, 발이". "발리"가 아닌 "발이, 발이". 그리고 나는 아들애한테 이렇게 속삭인다. 이제 너는 그 두 발(발리가 아닌 발이)로 중국이라는 이 땅덩어리 위에서, 더 나아가 세계의 중심에 서서 자신만의 세상을 그러안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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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6
  • 여성주의시각으로부터 본 연변지역 조선족 여성 항일운동
    ●방미화 중국조선족은 항일전쟁과정에서 가장 먼저 반일혁명에 참가한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이다. 통계자료에 따르면 연변지역 총 항일열사 중 조선족이 무려 3,204명을 차지하며 그 가운데서도 조선족 여성 항일열사는 338명에 달하여 조선족열사의 10.54%를 차지한다('중국공산당연변역사대사', 2002). 현재까지 조선족 항일전사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남성전사에게 집중되었다. 설사 조선족 항일 여전사에 대한 자료라 해도 그들의 항일에서의 공헌을 높이 평가하는 공헌사, 보충사의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항일활동 속에서의 결혼, 출산, 자녀양육 등을 둘러싼 그들의 처우에 대한 여성학적인 해석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에 필자는 본고에서 여성주의시각으로부터 출발하여 연변지역 조선족 항일 여전사들의 항일활동에 내포된 여성해방의 함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연변지역 조선족 항일 여전사들은 대부분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열악한 경제적 환경 속에서 어릴 적 부모를 도와 농사를 짓거나 가무를 담당함으로써 힘들었던 노동생활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결혼 이후에도 힘들게 항일운동 농사짓고 각종 생업에 종사하면서 생계를 유지해나갔다. 그들은 혁명에 참가하기 이전 자신들을 둘러싼 가부장적 문화와 가정 안팎에서 여성들의 희생만 요구받는 현실 때문에 고달픈 인생을 살아갔다. 그러던 것이, 그들에게 의식전환의 계기가 찾아오게 된다. 바로 당시 연변지역에서의 민족주의계열의 여성계몽운동, 공산주의 계열에서의 남녀평등과 여성해방 사상 전파 등 사상적 배경 하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가난한 처지를 불공평한 사회적 현실로 자각하면서 그러한 가난은 일제 침략, 지주와 자본가의 착취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한다. 이 뿐만 아니라, 봉건적 남존여비사상에 얽매인 전통가정의 속박에서 벗어나 글을 배우고 사회에 눈을 떠야만 진정한 남녀평등을 실현할 수 있다고 인식하게 된다. 이와 같이 그들은 의식의 변화 및 감정의 풍파 등의 경험 속에서 부모, 형제, 남편, 친인척, 야학, 학교, 혁명지사, 진보적 서적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혁명에 참가하게 된다. 조선족 여성 항일열사 중에는 전장에서 직접 전투에 참가하여 전사한 여성들도 있는가 하면, 작식대, 재봉대, 의료대에서 활동함으로써 전투력을 재생산하는 임무를 완수한 여성들도 있다. 항일연군 제2군의 최희숙 등 8명의 재봉대원들은은 한 달 동안 600건 군복을 만들어내라는 긴급통지를 받고 엄동설한을 무릅쓰고 삼림 속에 들어가 낡은 재봉기로 낮과 밤을 이어가며 끝내 한 달이 되기 전에 600건의 군복을 재봉하였고, 작식대 리신금 여전사 역시 한차례 습격에서 부상을 입었지만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전우들이 한주일 굶은 상태에서 행군할 힘을 없다는 것을 알고 자신도 한주일이나 먹지 못했지만, 전우들을 위해 정신을 차리고 사처로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구함으로써 전우들로 하여금 행군을 지속하도록 하였다(《연변녀성운동사》,1991). 특히 직접 전투에 참가한 조선족 항일 여전사들은 전장에서 남성전사 못지 않은 용맹함과 전투능력을 보이면서 전우를 엄호하기 위해, 당의 비밀을 엄수하기 위해, 적들을 소멸하기 위해 끝까지 싸웠다. 투쟁중 일본군 앞에서 당의 비밀을 엄수하기 위해 혀를 깨문 여전사들이 있는가 하면, 열 손톱을 입으로 물어뜯은 전사도 있고, 일본군에 의해 두 눈알이 빠져도 끝까지 투항하지 않은 여전사도 있다. 이처럼 그들의 항일에서의 행동은 대단히 용맹하고 헌신적 이였다. 때문에 현재까지 여러 자료와 회억록 등에서도 그들의 헌신정신과 용맹함에 대해 높이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항일전장에서의 그들의 처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직면하고 또한 감당해야 할 고난과 고통에 대해 한번 짚어보도록 하자. 전장에서 그들은 신체적 조건의 취약함을 극복해야 함은 더 말할 나위도 없고, 생리적 고충, 생육의 고통도 극복해야 했다. 여성들에게 있어 전장에서의 가장 큰 고통은 달거리 임신과 해산 이였다. 달거리 때는 그렇다 치더라도, 임신하면 대개 작식대와 재봉대에 배치되는데, 임신해서도 그들은 대원들의 식량을 장만하고 해진 옷을 깁는 등 일에 종사하면서 쉴 새 없이 보내기가 일쑤다. 해산시의 조건도 말이 아니었다. 옥중 해산한 여전사가 몇몇 있는가 하면 해산시에 먹을 것이 하나도 없고 젖도 나오지 않아 아이를 낳자마자 5일 만에 잃은 여전사도 있다. 이러한 견정한 혁명정신으로 인한 친육의 상실 뒤에 오는 고통은 그들 스스로 감내해야 하는 슬픔과 고통이었다. 또한 가정과 자식을 포기해야 하는 고통도 견뎌내야 했다. 여전사들은 항일을 위해 전장에 나간 뒤, 대개 1년 내지 2년에 한번 남편과 상봉하거나 더욱 긴 경우도 있으며, 자식을 키울 수가 없어 다른 집에 보내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조선족 여전사들의 항일활동에 내포된 여성의 의미는 또한 무엇일가. 먼저, 여전사들은 확실히 항일운동을 통해 가정으로부터 사회로 진출했으며, 가정주부로부터 사회혁명가로의 신분전환을 실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항일운동에 참가하면서 그들은 남성과 똑같은 전사로서의 사회적 신분을 부여받음으로써 가정주부로부터 사회혁명가로의 역할 전환을 부분적으로 실현하였다. 그들은 전장에서 남성들과 똑같이 전투에 참가하면서 여러 가지 칭호와 명예를 가지게 되였다. 다음으로, 항일근거지에서 조선족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 되였다. 정치적으로 그들은 각급 당정기관의 중요한 직위 예하면, 부녀위원, 소비에트정부의 회장, 현아동국 국장, 부국장 등에 임용되어 정치방면에서 평등한 권리를 부여받음으로써 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실현하였다. 경제방면에서도 남자와 똑같이 땅을 분배받음으로써 경제적 독립권을 향유하게 되였으며, 교육방면에서도 중점적으로 여성간부를 양성하는 원칙에 의해 평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부여받았다. 이와 같이 그들은 조선족 여성 지도자들이였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아내, 어머니, 며느리, 전사, 부녀회원 등 다중 역할을 동시에 행사하는 행위주체였다. 요컨대, 여전사들의 평등을 실현하려는 의지에서 우리는 해방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항일운동에 참가함으로써 해방을 실현하고자 하는 견강한 의지, 전쟁과정에서 들이닥친 모든 고난을 감내하고 이겨내는 또한 목숨도 아끼지 않는 헌신정신과 희생정신 등에서 우리는 그들의 평등과 해방을 실현하려는 철같이 강한 의지를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조선족 여전사들과 같이 빛을 보려는 의지, 그 의지만이 우리를 해방으로 이끌고, 미지의 세계, 창조적인 세계로 이끄는 통로이자 희망으로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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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6
  • [김정룡 칼럼] 재한조선족은 원숭이에게 감투 꼴
    ●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진나라 서울 함양으로 치달아 들어간 항우는 이전에 유방에게 항복한 진왕 영(瓔)을 죽이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 불은 석 달을 두고 탔다고 한다. 항우는 시황제의 무덤도 파헤쳤으며 진나라의 재물들을 모두 거둬 갔다. 부녀자들도 모두 붙잡아 갈 만큼 항우의 군사는 갖은 잔학한 짓을 다하고는 함양을 떠났다. 그때 한생(韓生)이란 사람이 항우에게 말했다. “진나라 땅은 지리가 좋고 땅도 길어서 이곳에 도읍을 정하면 천하의 패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항우는 잿더미가 된 진나라 궁궐들이 보기에도 싫었을 뿐 아니라 고향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한생의 말을 듣지 않았다. “사람이 부귀하게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밤에 비단 옷인지 누가 보고 알아 줄 것이냐.” 한생은 기어이 고향으로 가려는 항우를 보고 ‘초나라 사람들은 원숭이가 감투를 쓴 꼴이다.’고 했다가 항우의 노염을 사서 잡혀 죽었다. 항우에 대한 이야기는 중국역사상 굉장한 비중을 차지해왔다. 따라서 이 고사가 후세에 전해지면서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 스스로 자신을 과대 포장하는 행위를 빗대 ‘원숭이에게 감투 꼴’이란 속담으로 전해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 속담을 우리 현실에 적용시켜보면 재한조선족사회 상황에 신통하게 하모니가 되어 있다. 10년 전의 일이다. 00한국 분이 필자에게 왈, “한국에 온 조선족 분들이 평균 수준이 굉장히 높네요.” “무슨 말씀인지?” “저마다 선생(교사) 했다는 분들이 엄청 많네요.” “아~, 그래요.” 뻥이다. 뻥도 보통 뻥이 아니라 한심한 강냉이 뻥 튀기 식의 뻥이다. 10년 전에 한국에 온 조선족 중에 교사했던 사람이 있었지만 극히 소수였다. 00단체장의 우스운 이야기다. 자신은 조선글, 조선말 잘 못한다고 하는 사람이 연길에서 00중학교에서 선생 했다고 자랑한다. “그 학교가 조선족중학교인데”라고 말했더니 “아, 잘못 말했는데 xx중학교요.” “그 학교도 조선족학교인데요.” 얼굴이 원숭이의 궁둥이가 되어 머뭇거린다. 선생 해 본 적이 없는 단체장이 자신이 있어 보이기 위해 선생 했다고 뻥 친다. 조선족사회 리더라고 하는 단체장이 이 정도로 뻥 치고 있으니 일반 구성원들이야. 또 법원이나 검찰원에서 일반 직원으로 심부름이나 하던 조선족이 한국에 와서 자신은 중국에서 판사 혹은 검사였다고 뻥친다. 왜냐? 한국에서는 판사나 검사가 최고 엘리트로 대접받기 때문에 자신을 최고 엘리트로 포장하는 것이다. 예전에도 언급했듯이 재일조선족사회와 재한조선족사회 최대 구분이 바로 전자는 유학생 주류로 형성된 것인데 비해 후자는 노무일군을 주류로 형성된 것이다. 더욱이 한국에 온 조선족은 머리 쓸 필요 없이 팔다리가 멀쩡하면 모두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85만이나 밀려 온 것이다. 한국은 민주주의국가이다. 민간단체 설립이 굉장히 쉽다.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슬쩍슬쩍 한두 마디 변경해서 정관이나 만들고 회원 명단만 작성하면 되고 활동 내역도 어지간히 만들어 넣으면 00협회란 법적 등록이 가능하다. 재한조선족사회 00협회 이름으로 된 단체가 한 때 가장 많을 때 60여 개나 있었다. 개혁개방 직후 80년대 연길에 실체나 실속 없는 피빠아오꿍쓰(皮包公司, 허수아비회사)가 너무 많아 당시에 ‘무슨 놈의 꿍쓰(회사)가 변소간보다 더 많다.’는 말이 유행되었다. 재한조선족사회 단체들이 똑 마치 그때 피빠아오꿍쓰(皮包公司, 허수아비회사)를 신통하게 닮았다. 구체적인 일은 하는 것이 전혀 없이 일단 단체장이라는 감투만 쓰면 능력은 없어도 자신이 큰 벼슬을 한 것처럼 개폼을 잡는다. 능력이 있을 수가 없다. 이들 ‘회장님’들은 중국에 있을 때 아무 것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이고 더욱이 단체장 가운데 대학문을 나온 사람이 거푸 한두 명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것이 재한조선족단체와 재일조선족단체의 큰 차이다. “저희들은 한국에서 여러 가지 형사처벌을 받았지만 여전히 재한조선족사회 리더로 활동하고 있어요.” 한국00사법기관 동포 관련 간담회에서 나온 조선족 단체장의 발언이다. 한국공무원들이 재한조선족사회를 어떻게 바라볼까? 정말 창피하다. 창피한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국은 외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국가이고 동포밀집지역 관공서와 서울시청 등에서 다문화(이럴 때면 조선족도 다문화에 포함시킨다.) 관련 간담회가 많다. 뻥인지, 진짜인지는 모르겠으나 중국에서 선생 했다거나 언론 관련 기관에 종사했다거나 혹은 자신을 지식인이라 폼 잡는 사람들이 회의에서 하는 발언들을 들고 있노라면 한국어가 서툰 것은 허물도 아니다. 회의 주제도 파악하지 못하고 아무 관련이 없는 말을 길게 늘여놓고 게다가 목소리도 크고 악센트도 세서 동네망신이다. 참다못한 사회자께서 마이크를 놓으라고 제지한다. 단체장들은 스스로 재한조선족사회를 대표한다고 자랑한다. 문제는 대표라는 사람들이 이 수준이니 한국공무원들이 이쪽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겠는가? “중국에 있었을 때 같으면 함께 같은 밥상에 마주 않지도 못했을 ‘빈 깡통’들이 한국에 와서 회장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꼴을 정말 못 봐주겠다.” 조선족출신 00공무원의 말씀이다. 재한조선족사회에 정말 불가사의한 이상한 현상이 한 가지 있다. 중국에서 경찰한테 감히 대들지 못하던 조선족들이 이상하게 한국에 와서 한국경찰한테 협조하지 않을뿐더러 경찰을 무시하고 을러멘다. “사건 현장에 출동할 때면 둘이 갈 일을 넷이 가고 넷이 갈 것을 여덟이나 갑니다. 동포들이 군중영웅심리가 강해 사건과 관련이 없는 지나가던 동포들이 경찰공무집행을 방해하고 있어 많이 출동해야 합니다.” 동포밀집지역 경찰공무원의 고충이 담긴 고백이다. 왜, 이럴까? 중국에서 돈고생 하다가 한국에 와서 얼마간 돈을 벌었으니 세상이 녹두 알만해 보이고 자신이 영웅이나 된 것처럼 행세한다. 이런 조선족이 굉장히 많다. 일하기 싫어 입에 풀칠도 곤란한 동포들이 한군데 모여 빈둥대면서도 트럼프부터 김정은에 이르기까지 중국정치부터 일본우익에 이르기까지 세상사를 논하는데 한다하는 정치논객들을 뺨 칠 정도다. 서로 제 말이 옳다고 우겨대는 목소리는 온 동네를 시끌벅적하게 만든다. 이 광경을 목격하고 있노라면 진짜 원숭이에게 감투 꼴이란 말이 실감난다. 한국사회가 재한조선족사회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데는 이유가 충분히 있다 . ‘모든 일은 남을 탓하지 말고 스스로 반성하자.’ 이것이 필자의 일관된 신조이다. 언제 가면 재한조선족사회가 지적으로 변화되어 한국사회로부터 환영받는 집단으로 거듭날까? 지금으로서는 막연해 보인다. 참고로 모든 단체장이 다 그런 것처럼 이 글을 오해할 수 있는데 일부 조선족단체장들은 훌륭한 일을 많이 해서 한국정부로부터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다. 따라서 다수의 재한조선족은 묵묵히 열심히 착실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점 밝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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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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