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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성탄절(圣诞节) 쇨가 말가?
    성탄절, 크리스마스가 곧 다가온다. 상가들에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지고 산타클로스와 루돌프 사슴, 크리스마스트리 등 성탄절 이미지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서양 명절인 성탄절, 과연 우리는 성탄절과 같은 서양 명절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이처럼 서양 명절에 열중하고 광환하는 것일가? 우선 곧 다가오는 성탄절을 보기로 하자. 성탄절을 비롯해 핼러윈(万圣节) 크리스마스이브(平安夜) 등 크리스마스 축제의 날들은 우리가 보기에 매우 화끈하게 잘 쇠는 것 같지만 본질적인 의미에서 보면 표면적이고 형식적인 명절 쇠기에 불과하다. 이러한 서양 명절의 문화적인 함의를 우리는 죄다 말살하고 있으며 명절의 인문 역사를 이탈한 것은 물론 정신적인 핵심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서양 명절 쇠기는 단지 모여서 먹고 마시는 것에 불과하며 이미 엄중하게 오락화되고 텅 빈 의미의 명절이 됐다. 이 같은 서양 명절들은 일부 상가들의 판촉과 판매수익을 위한 선전물이고 매개일 뿐이다. 이러할진대 이러한 서양 명절을 쇠나 안 쇠나 또 무슨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한 개 명절이라고 하면 형식과 내용 두 개 면의 요소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더욱 중요한 것은 명절의 생성배경은 특정한 역사와 전통, 정치, 문화 등 다양한 요소들에 기인해야 한다. 그러나 크리스마스와 같은 서양 명절은 우리에게 있어 역사적인 전통은 물론 문화적인 함의도 없으며 우리가 쇠는 그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핼러윈날이나 성탄절과 같은 서양 명절은 우리가 쇼핑으로 광환하는 명절이 되어서는 안 되며 젊은이들이 모여서 먹고 마시고 노는 이유나 원인의 날이 되어서는 더욱 안 될 천주교나 기독교 등 종교적인 명절일 뿐이다. 지금에 이르러 대부분 서양 명절들은 원래의 의미들이 무의식적으로 곡해된 채 광환적인 모임과 먹고 마시고 노는 파티의 대명사로 전락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주 흥미롭고 다채롭다고 생각하면서 이러한 서양 명절들을 경축하고 즐길 때 우리들의 문화도 서서히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명절은 민족문화의 보귀한 정신적 유산이다. 모든 민족은 모두 자체민족이 전통, 계승하고 있는 명절이 있는 바 이는 민족 응집력의 엄연한 유지체계이다. 만약 한 민족의 대부분 사람이 다른 한 민족의 명절에 열중해 있고 숭상한다면 두말할 것 없이 그 민족의 문화적인 침습은 이미 엄중하게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은 우리 특유의 전통명절이나 전통문화에 대해 무관심하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볼 바이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한 말이 있다. 우리들의 매 하나의 전통명절에는 모두 그 의미와 역사가 깃들어 있고 우리들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끈끈한 인연의 줄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민족의 명절이 없는 민족과 자기 민족의 문화가 없는 민족은 희망이 없는 민족이 아닐 수 없다. 조국의 미래와 민족의 아름다운 내일은 우리 함께 창조해 나가야 한다. 지난해 1월 25일, 중공 중앙 판공청과 국무원 판공청에서는 《중화우수전통문화전승발전프로젝트를 실시할 데 관한 의견》을 반포하고 중국전통명절진흥프로젝트를 실시하는 것으로 춘절, 원소절, 청명, 단오, 칠석, 추석, 중양절 등 중국전통문화 명절의 내재적 함의를 풍부히 할 것을 요구했다. 안상근 편역
    • 뉴스
    2018-12-22
  • 태권도의 뿌리, 전통무예 수박 북한에 남아 있었다!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태권도는 근대 한국의 스포츠무술로 해외에 널리 보급 된 대표적인 한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태권도의 원류 내지 뿌리라고 주장하던 한국의 문화재76호 택견이 거짓임이 증언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 북한 나진 태권도성지 설립자 대담 중 시범 중국 연변대학교 체육학과 주최로 열린 한,중 국제무예학술회(16년 9월 3일)에서 문화재 택견의 역사왜곡과 계보 날조 및 일본 가라데를 흉내 내 문화재 지정을 받은 사실이 확인 되었고 더욱 중요시할 것은 북한의 태권도 원류로 알려진 전통무예 수박의 몸쓰기 및 기술이 발굴된 것이다. 수박은 고려시기 무사들의 전유물 이었을 뿐 아니라 조선시대 경제육전에서는 왕을 호위하던 갑사를 뽑는 시험과목이기도 했던 우리 한민족의 고유무예인데 83년 문화재로 지정되며 택견이 역사가 짧다보니 수박의 역사를 작의적으로 왜곡해서 택견=수박이라는 등식을 일반에 호도해서 수박의 정체성이 확립되지 못 한 바 있다. 태권도는 근대 한국의 스포츠무술로써 해외에 널리 보급 된 대표적인 한류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태권도의 원류 내지 뿌리라고 주장하던 한국의 문화재76호 택견이 거짓임이 증언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그러나, 금번에 중국 연변대학교 주최의 학술회에서 문헌 및 증언등, 녹취록을 근거로 문화재76호 택견이 고려 수박과는 전혀 무관한 조선후기 서울지역에서 행해졌던 민속임이 밝혀졌고 전통무예 수박의 경우 근대까지도 북한에 전해져 왔고 북한 태권도의 원류로써 명맥을 잇고 있음이 확인 된 것이다. 한국의 국기원, 세계태권도연맹등은 이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올림픽을 선점하고 정부지원으로 북한의 국제태권도연맹(이하 북한 태권도)를 압도하고 있다하나 역사가 없이, 실질적인 수박의 기예가 접목되지 않은체 태권도의 역사를 수박에서 찾는 것은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일에 지나지 않는 어리석은 일이다. 한시라도 바삐 국기원 및 태권도 관련 연구소는 이 사실을 중시하고 북한에 최근까지 전해져 온 수박을 찾고 태권도에 접목해야만 태권도의 역사를 우리 전통문화로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문화재76호로 지정되어 있는 택견이 문화재 지정당시 태권도 역사만들기 일환으로 급조되어 검정조차 없이 지정되어 많은 문제를 안고 있으나 상기한 북한 태권도의 원류인 수박은 한국과 북한 및 중국 연변에도 그 자취를 남기고 있어 지금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태권도의 뿌리, 수박을 발굴, 전승 해 갈 수 있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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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9-18
  • 중국, 한 중년 남성의 아름다운 뒷모습
    ▲사람을 구한 한 남성이 뒷모습만 남기고 조용히 떠났다. ▲ 한 남자아이가 시민에 의해 강에서 구출되었다. 아이를 구한 한 남성(노란색으로 표기한 사람) 역시 물 속에서 걸어나왔다. ▲아이를 구하고 물 속에서 나온 남성의 옷, 이어폰, 핸드폰..손 쓸 사이도 없이 모두 물에 젖어버렸다. [동포투데이] 지난 18일 오후, 화창한 날씨에 많은 사람들이 중국 중경(重庆) 쟈링강(嘉陵江) 베이베이(北碚) 부둣가에 나와 옷을 빨거나 물놀이를 즐겼다. 오후 4시 경, 한 어린 아이가 갑자기 물에 빠지면서 강 가운데로 흘러갔다. 이 때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하고 검은색 옷에 이어폰을 끼고 걷고 있던 50대 남성이 사람들 사이로 달려나왔다. 목격자에 따르면, 그 남성은 옷, 신발도 벗지 않고 핸드폰은 물론 하고 있던 이어폰도 그대로 착용하고 물속에 뛰어들어 남자아이를 구했다고 한다. 갑자기 일어난 사고에 남성이 어디에서 왔는 지, 이름이 무엇인 지 그 누구도 알 지 못했다. 그는 "얼른 아이를 집에 데리고 가서 옷부터 갈아 입혀라, 감기 안 걸리게 조심해야 한다. 사람 생명이 걸린 문제에 핸드폰이 대수냐" 라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자리를 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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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26
  • 재한 중국조선족 한·중 경제성장에 크게 기여
    조선족들은 지난 20여 년간 상대적으로 일손이 부족한 건설현장, 공장, 식당 등지에서 궂은일을 도맡으며 한국경제에 적지 않게 이바지했다. 하지만 한국 내 중국조선족의 수자가 급격히 증가하고 진출범위 또한 넓어지면서 이제는 이들이 한국내 노동시장에 끼치는 영향을 가볍게 볼수만은 없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연변일보] 중국조선족들은 지난 20여 년간 상대적으로 일손이 부족한 건설현장, 공장, 식당 등지에서 궂은일을 도맡으며 한국경제에 적지 않게 이바지했다. 하지만 한국 내 중국조선족의 수자가 급격히 증가하고 진출범위 또한 넓어지면서 이제는 이들이 한국내 노동시장에 끼치는 영향을 가볍게 볼수만은 없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외국인 불법고용 근절하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시위에 나선 전국건설노조 조합원들과 공사장 관계자들 사이에 거친 몸싸움이 벌어졌다. 건설로동자들이 시위에 나선 것은 외국인 불법고용 탓에 한국인 일자리의 씨가 마르고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한국전국건설노조 경기지부장 임차진은 “수도권 현장에는 동포를 중심으로 한 외국인이 많게는 90%까지 차지한다”고 하며 “일자리를 심각하게 잠식당하는 상황에 한국로동자들이 살 방법이 없다”고 호소했다. 고용허가제는 한국인 일자리 보호차원에서 외국인고용한도를 정하고있지만 건설현장에서 이 규정은 사문화된지 오래다. 예컨대 공사금액이 1000억원(한화)짜리 아빠트공사현장에서는 중국조선족을 포함해 400명까지만 외국인을 쓸수 있지만 이를 지키는 현장이 거의 없다고 업계관계자들은 입을 모았다. 한국전국건설노조 서울지부장 김창년은 “배당량을 지키기는커녕 불법체류자도 감독하지 않아 정부에 대해 부글부글 끓는 심정”이라고 하며 “내가 대한민국 국민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인과 조선족근로자 사이에 잔뜩 감정의 골이 팬 가운데 건설현장에서는 물리적충돌도 다반사이다. 지난 1월 21일에 한국 대전 유성구의 한 아빠트공사장에서는 사소한 말다툼이 생긴 끝에 중국조선족근로자 10여 명과 한국인근로자 2명이 충돌하는 일이 벌어졌다. 중국관광객이 늘고 한중간의 경제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중국조선족들의 활동영역은 건설업, 제조업, 농어업외에도 봉사업으로 빠르게 확장되고있다. 한국 서울시내 모 백화점은 씀씀이가 큰 중국인관광객이 몰리자 면세점은 물론 의류매대, 식당 등지까지 중국어를 구사할수 있는 중국조선족들을 대거 고용했다. 하지만 막상 중국어를 전공한 한국인들은 중국조선족들이 관련 분야에 활발하게 진출하는 것이 반가울리 없었다. 한국이주동포개발연구원 원장 곽재석은 “과거 우리가 3D업종 인력부족시기에 중국조선족을 써먹고는 지금 경제가 어려워지니 이들에게 화살을 돌리는 식이라면 곤난하다”고 하며 “중국과 교류가 더욱 활발해지고 통일을 대비하는 시점에서 중국조선족을 더욱 잘 활용하는 방안을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성장 둔화기에는 특히 일자리잠식우려 등이 제기되면서 이주민에 대한 반감이 커지기 쉽지만 이주민증가가 일자리감소로 이어진다는 통념은 잘못된 것이라는 연구결과도 눈길을 끈다. 한국에 거주하는 중국국적의 조선족은 방문취업비자제도도입 등 입국문호확대정책에 힘입어 2007년에 32만 8000명에서 지난해 12월말까지 경기도 안양시 인구와 맞먹는 60만 7000명으로 늘어났다. 불과 6년만에 30만명이 한국로동시장에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는데 따른 충격파를 적절히 완화하지 못한 책임이 정부에 있다는 것이 노동계의 입장이다. 한국정부는 내국인고용시장보호를 위해 방문취업비자를 지닌 중국조선족들의 건설현장취업 한도를 두는가 하면 재외동포(F-4)비자를 가진이는 단순노무직에 취업하지 못하게 했지만 실제 노동시장에서 이런 규정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일예로 건설업에서 일할수 있는 자격증인 건설업취업증명을 소지한 중국조선족은 현재 3만 1243명이다. 그러나 실제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중국조선족은 최소 이의 두배, 세배에 달할 것으로 업계는 추산한다. 제조업, 봉사업에서도 중국조선족 고용은 외국인근로자에 준하는 절차를 밟아야 하고 한국인 대비 고용비률도 제한을 받지만 이를 지키지 않는 사업장이 많다. 시장의 수요공급원칙에 따르면 제조업, 건설업 등 선호도가 낮은 산업분야에서 인력공급이 부족해지면 임금이 올라가는 것이 정상인데 이주노동자를 활용함으로써 노임상승을 억제한다는 것이다. 국제이주기구 이민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최서리는 “문제의 핵심은 한국인 일자리를 외국인이 빼앗는다는 것이 아니라 외국인의 불완전한 사회적지위때문에 노동력가치가 평가절하되고 결국 노무시장구조를 외곡하는 상황에 이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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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14
  • 조선족 동포를 위한 배려인가? 지원단 명분 쌓기?
    10월부터는 기술교육 대상자는 무조건 서울행 의무? 한국 법무부의 조선족동포 정책개선 제도로 올해 4월부터는 누구나 자유롭게 한국을 왕래 방문할 수 있는 C-3-8 (3년 복수비자)비자제도가 신설 되었다. 또한 근래 1년에 2번씩 시행하던 추첨제도가 올해 상반기에는 과거 추첨 당첨자들의 한국 입국인원이 많지 않아 과거 기술교육에 당첨된 대상자는 비자신청 시기가 지났더라도 추가로 비자접수를 받아주기로 하는 등 한국정부의 조선족동포에 대한 비자문호 개방이 연일 확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허나 신규정책 발표 후 피해아닌 피해를 보고 있는 동포들의 수가 적지 않으며 현실성에 뒤떨어진 정책발표가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실정이다. 우선 3년복수비자 시행이후 4월이전 한국에서 국가자격증 시험에 합격한 대상자의 경우 기존에는 중국에 귀국 후 자격증 원본을 제출하면 한국에 출국 후 F4비자로 변경할 수 있는 비자를 영사관에서 제공하여 주었지만 이제는 C-3-8 비자를 받아 야지만 한국에 출국할 수 있게되어 인터넷으로 선착순 접수를 받아주던 C-3-8제도 때문에 제때에 소식을 접하지 못하여 인터넷 접수를 하지 못한 대상자들은 어렵게 학원비를 내고 공부를 하여 획득한 자격증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서 중국 체류기간만 늘어나고 있어 한숨을 짓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아무런 조건없이 누구에게도 형평성 있게 진행되던 추첨시기를 기다리던 사람들에게는 올해 상반기 추첨이 취소됨에 따라 비용 들이지 않고서 안전하게 한국에 나가 합법적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게 되어 낙심을 하고 있다. 한국 정부에서는 추첨을 통하여 방문취업과 기술교육 두가지의 방식으로 추첨대상자를 선별 하였지만 6주간의 교육을 시간적 금전적 손해를 감수하며 받아야 하는 기술교육 대상자는 선발자에 비하여 입국자의 수가 현저히 적기에 한국정부 입장에서는 추첨을 추가로 하는 것 보다는 기존의 기술교육 당첨자에게 추가로 기회를 한번더 제공하겠다는 시행안을 발표한 것이다. 조선족동포들이 기술교육에 당첨되고서도 한국행을 마다하는 이유는 개인의 사유도 있겠지만 한국 출국 후 6주간이나 학원비와 식비.생활비를 감수하면서 까지 취업비자를 받는것이 불필요 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렇듯 기술교육 추첨 대상자가 한국행을 꺼리는 이유라는 점을 한국 정부는 간과하고 있지 못하는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조선족 동포들 사이에서는 3일교육만 받은후 취업을 할 수 있는 방문취업제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6주교육을 받아야 하는 기술교육을 유지하려는 한국 정부의 입장에 조선족 동포들을 돈 벌이로만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적지가 않다. 더구나 기술교육 대상자가 부족함에 c-3-8 당첨자중 2천명을 선별하여 추가로 기술교육 기회를 준다고 하지만 이러한 정책들이 우리 동포들에게 어떠한 시선으로 받아들일지 미지수다. 이번 c-3-8 대상자중 기술교육 당첨된 2천명은 한국 도착 후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동포교육지원단을 직접 찾아가서 사전 교육을 받은후 동포교육지원단 내에서 학원을 선택하고 학원비를 납부 하여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이거는 또 무슨 날벼락 같은 이야기인지? 한국에 이미 전 가족이 대구에서 생활하고 있는 연길에 거주하는 최모(32세)씨는 대구와 가까운 부산으로 한국에 입국하여 대구에서 교육을 받은 후 일자리를 찾으면 좋을련만 대구의 동포교육지원단 지정 학원으로 바로 등록은 하지 못하고 동포교육지원단의 정책때문에 서울로 직접 다녀와야 하는 번거로움과 당일 치기가 어려운 만큼 1박2일은 하여야 할 터인데 숙박이며 식비를 자비로 지출하여야 하고 한국 지리도 모른는 탓에 가족이나 지인이 함께가야 할 터이니 동행자는 회사에 청가를 내어야 하는 실정이라며 이렇게 동포들이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번거로운 정책을 한국 정부는 왜 만들어 내는지 모르겠다며 불만을 토로하였다. 한국 정부(지원단)입장에서야 그간 중국과 한국에서 동포들에게 피해를 주는 브로커들이 많아 동포교육지원단에서 모든절차를 한번에 처리할 수 있게되어 피해를 줄이는 결과가 되었으니 좋은 제도라 할지 모르지만, 동포교육지원단이 서울 여의도 한곳에만 있는 실정을 감안해보면 서울,경기지역을 제외한 지방에서만큼은 해당 지역에서 자유롭게 학원을 선택해서 교육을 받을수있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것이다. 2000년대 들어 한국에 진출하는 조선족들은 이제 제2세대들 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 90년대에 진출하였던 1세대들이야 홀로 돈을 버는것만이 목적이다 보니 불법체류 등 한국 법규를 위반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한국 정부의 배려로 인한 새로운 정책변화로 인해서 이제는 전 가족이 한국에서 체류할 수 있는 만큼 안정적인 장기 체류 조선족 동포가 늘어나고 있는 실정임을 감안하여 기술산업 분야에서 힘들더라도 전문 직업인이 되고싶은 대상자에게 자유로운 선택권리를 줘서 불합리적인 기술교육이 아닌 동포분들을 위한 합리적이고 현실성있는 제도를 운영하여 무엇이 진정 동포를 위한 정책인지를 한국정부는 심사숙고 해주시길 바란다. 출국 비자 전문가 정승철 본부장 2014년 8월29일 흑룡강 신문(한국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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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05
  • 中, 건국초기 모택동보다 봉급이 많았던 사람들
    중화인민공화국이 창립되던 당시 모택동(毛澤東)은 중공중앙 주석 겸 국가주석을 모두 맡게 되어 말 그대로 중국의 제1임자였다. 또한 나라 창립 말고 기타 모든 방면의 공로같은 것을 보아도 모택동이 중국에서 봉급이 가장 높아야 함이 마땅했다. 하지만 새 중국의 창립초기와 지난 세기 50년대 중반까지 중국에서 모택동보다 봉급이 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1~2명이 아니고 여러명이 되었다고 한다. 그제날 우리는 건국초기 모택동이 받은 봉급이 500위안인 것으로 들어왔으나 그것이 아니었다. 1956년 제1차 중국의 로임개혁 이전까지 모택동이 받은 봉급은 408위안이었다고 한다. 당시 모택동보다 봉급이 더 높은 사람 중 한 분이 바로 엽기손 선생이었다. 1898년 상해에서 태어난 엽기손 선생은 1918년 북경 청화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향발, 1920년 미국 시카코대학에서 리학 학사 학위를 받았고 1923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4년 귀국 후 엽기손 선생은 선후로 국립동남대학(지금의 남경대학) 부교수, 청화대학 교수, 청화대학 물리학부 주임 및 리학원 원장으로 있었다. 엽기손 선생은 중국의 탁월한 물리학가이며 교육가이며 중국물리학계의 제1대 종사(宗师)였다. 그는 중국과학원 학부위원으로, 중국과학계의 개척자로 중국물리학회의 창시인 중 일원이었다. 그는 또 중국물리학회 제1기, 제2기 부회장이었고 1936년부터는 회장직을 역임해왔으며 청화대학 100년 사상의 “4대 철인(四大哲人)”으로 불리기도 했다. “4대 철인 중” 기타 3명은 각각 번광단(潘光旦), 진인각(陈寅恪), 매이기(梅贻琦)었다. 1956년까지 엽기손 선생이 받는 봉급은 360위안이었다. 이러면 408위안을 받는 모택동보다 48위안이 적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한테는 별도로 나오는 고정수입이 있었다. 바로 중국과학원 학부위원으로 발급되는 월수당 100위안이 있었다. 그것까지 합치면 460위안으로 모택동보다 52위안이 더 많은 셈으로 되었다. 당시 엽기손 선생보다 봉급이 몇배 더 높은 사람도 있었다. 그는 국가공무원이 아니고 과학가도 아닌 사람이었다. 바로 저명한 바로 저명한 희곡대가 매란방으로 그가 매달 받는 봉급은 2000위안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건국초기 중국에서 봉급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은 매란방이라 할 수 있었다. 매란방은 한국전쟁당시 중국군에 비행기를 헌납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 외 중국에서 모택동보다 봉급을 더 받은 사람으로는 매란방과 더불어 민국시기 중국내 3대 희곡대가로 알려진 마연량(马连良) 선생이었다. 당시 마연량 선생의 봉급은 매란방 선생보다 200위안이 적은 1800위안이었다. 지난 세기 50년대 초기 중국과학원 수·리·화 학부의 비서였던 호선생의 추억에 따르면 그 당시 청화대학에서 화식비 8위안만 내면 매일 육류와 생선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배안에 기름이 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엽기손 선생같은 고수입자들은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엽기손 선생은 수입의 대부분을 학생접대와 빈곤친인척 돕기에 썼으며 그저 약간의 저금이 있었을뿐이었다고 한다. 당시 엽기손 선생의 저택은 주위에 흐르는 물이 있어 마치 섬도같은 느낌을 주어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곳에 있었다. 그 때는 지금처럼 팩시나 전자메일같은 것이 없어 매번 비서인 호선생이 자료나 우편물 등을 엽기손 선생댁에 전달해주군 했는데 그럴 때마다 엽기손 선생은 그를 붙들어 놓고는 한끼 배불리 먹이고야 돌려보내군 했다고 한다. 특히 그 뒤의 60년대 초기 중국 전체가 기아에 허덕일 때 엽기손 선생네 댁에 가면 사과 4알씩 가지군 했는데 호선생한테는 그 때의 일들이 아직까지도 즐거운 회억으로 남아있었다. 호선생에 따르면 당시 정협위원들은 정협의 내부상점에서 매달 한번씩 사과나 육류 등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편역
    • 뉴스
    2014-08-04
  • 조선족ㆍ한국인 관계, 더 멀리 바라보자!
    ■ 준 이 조선족과 한국인은 서로 다른 의식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고, 중한수교 후 너무 발 빠르게 상호 이익적인 이해관계로 발전하면서 나타나는 피면 할 수 없는 정상적인 모순과 갈등이 존재한다. 그것은 비록 과거에는 같은 민족으로 함께 살아왔던 사람들이지만, 결국 여러 원인으로 갈라져 서로 다른 위치, 환경에서 성장해 왔던 사람들이고, 국적도 다르고, 일정한 문화 차이도 있는 사람들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이 마주 앉으면 왜 모순이 없고 충돌없겠는가?비록 대한민국은 현재 민주주의, 자본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이지만 오랫동안 봉건적 존비문화, 유교문화가 사회 곳곳에 슴배여 있고, 20세기에는 박정희가 이끈 산업화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낙후했던 나라 중 하나에서 눈부시게 성장한 나라로 발전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크고 작은 ‘우리’ 문화와 함께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의 서열의식과 불신이 상당히 강하고 깊게 슴배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기에다 남북분단까지 겹쳐 이데올로기의 첨예한 갈등으로 상당히 극단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이 짙다. 그에 비하면 조선족은 중국으로 이주해 사회주의체제에서 살아오면서 비록 한국인만큼의 경쟁의식이나 홀로서기, 효률성 등은 미미하지만, 인간과 인간관계에서 상호존중, 평등의식에 비교적 익숙하고, 편하게 살아왔던 사람들이다. 실제 이 같은 차이를 가지고 있더라도 서로 이익적으로 가깝게 관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저 제멋에 살면 그뿐이겠지만, 중국의 개혁개방과 함께 중한수교 이후 조선족과 한국인은 이미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돼 서로의 차이를 쉽게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더욱이 같은 민족이라는 관계가 양쪽 모두에게 감정적으로 작용해 서로 차이에 대한 이해, 존중, 배려와 같은 심리적인 타협의 정점에 이르기보다는 되려 섭섭함, 실망, 원망, 분노, 배타적인 감정을 치닫게 하는 작용을 했다고 보인다. 또한, 불필요한 체제, 민감한 정치문제, 역사문제, 하다못해 ‘한국인? 중국인?’ 같은 조선족의 정체성 문제까지 조선족과 한국인의 관계는 더욱더 충돌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예전엔 남도 아닌 같은 민족인 사람들이 그 누구보다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고, 배려해 줄 수 있는 관계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이 점이 곧 맹목적인 민족에 대한 오산 또는 착각이었다고 생각한다. 되려 조선족과 한국인은 ‘같은 민족’이라는 거기에만 매달리다 보니 서로의 차이에 대한 이해와 존중에서 본의 아니게 걸림돌이 되는 듯싶다. 우리가 같은 민족이 아니라면 어쩌면 서로의 차이에 집착하지도 않거니와, 쉽게 이해하고, 그 차이에 대하여 인정하기도 쉬울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조선족과 한국인의 만남에 있어 모순과 충돌은 하나의 과정이고, 현재는 과도기다. 비록 오프든ㆍ온라인이든 조선족과 한국인들이 참 시끌벅적하지만, 결국 현재 조선족과 한국인의 눈높이는 더욱더 가까워졌고 멀어져 가는 것은 아니다. 중한관계도 점점 밀접해지고 있고, 한국인과 조선족의 이익상에서도 점점 상호 수요의 관계로 발전하고 있다. 그런데 그 자체를 심적으로 인정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 즉 마음의 문제다. 지금 중국에 사는 조선족은 잘 모르겠지만, 한국에 오랫동안 관계하며 일하는 재한조선족들은 거의 한국사람이 다 된 거나 마찬가지로 한국사회에 비교적 잘 적응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같은 현상이 중국에 별로 이롭지 않아도 한국에 이로울 수도 있다. 헌데 한국은 이 같은 사람들을 아직 넓은 아량으로 품어줄 그릇에 못 미친다. 되려 고국에서 자국인들이 싫어하는 천한 일을 하는 사람들, 돈벌이에만 눈이 어두운 사람, 일부 법을 어기는 몰지각한 조선족들의 행태를 가지고 전반 조선족의 이미지로 언론이 너무 과중하게 다룰 때도 잦다. 이 때문에 점점 한국에 익숙해지고 있는 조선족들의 마음을 한국으로 기울지 못하게 한다. 그렇다고 병적으로 보일 정도로 많은 조선족이 지나치게 한국에 의존하는 것도 문제고, 지나친 조선족의 한국행으로 상식에 어긋나고, 법을 위반하는 조선족도 함께 끼워 한국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현상도 존재하지만, 거시적인 의미에서 볼 때 재한조선족은 한국에 해보다는 득이 더 많으므로 조선족에 향한 한국 문은 여태 닫히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무튼, 같은 값에 중국에 사는 조선족들의 마음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현재 오랫동안 한국에서 거주하는 조선족들은 나름 그곳이 익숙해져 살아가고 있으니 한국은 조선족들의 마음을 감싸 안아줄 필요도 있다. 그것이 한국에 이익이라면 이익일 터. 물론 필자는 재한조선족이 아닌 중국에서 사는 조선족으로 한국보다는 중국에 이익상으로 더 가깝고 감정적으로도 더 깊지만, 순리가 그렇다는 것이다. 글을 맺으면서 우리 민족은 ‘한 치가 아닌 멀리 내다보는’ 습관을 키웠으면 하는 바람을 전하는 바다. 필자의 그 바람 속에는 당연히 조선족도 다를 게 없음을 덧붙인다. <연변통보>
    • 뉴스
    2014-06-13
  • 자유로운 고국방문과 "뉴 코리안드림"시대
    일전 한국 법무부가 발표한 "외국국적동포정책 개선사항 안내"를 보면 "만 60세 미만인 외국국적동포에 대하여 3년간 유효한 단기방문(C-3, 90일)복수사증을 발급하여 자유로운 한국방문을 허용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담고있다. 이는 한마디로 무릇 조선족이라면 다 한국을 쉽게 갈수 있다는 의미다. 한피줄을 가진 우리 민족한테 이보다 반가운 소식은 없을것이다. 이날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려왔고 또 이날을 위해 우리가 치른 대가도 만만치 않다. 80년대말부터 이어진 조선족의 고국행은 약보따리행렬로부터 시작하여 불법취업의 딱지까지 붙으면서도 고집스레 이어졌고 악덕브로커한테 수억원을 사기까지 당하면서도 끊기지 않았다. 새로운 리산가족의 량산이 조선족의 인구가 격감되고 농촌사회가 황페화되고 학교가 줄줄이 문을 닫는것으로 이어지고 지어 후세대를 구하라는 민족지성인들의 호소에도 불구, 이런 현상은 좀체로 누그러들줄 몰랐다. 이러한 과정에 발생한 "페스카마호사건"은 약 반세기 분단의 아픔속에서 서로간 다른 이데올로기와 이질화된 문화에 따른 민족간 갈등과 반목을 여실하게 표출했다. 다행히 무연고동포의 한국 방문과 취업을 허용하는 방문취업제도는 "해볕정책"처럼 조선족사회에 한오리의 희망과 기쁨을 안겨주었고 조선족을 더는 불법취업이 아니라 당당한 한국경제발전의 하나의 력군으로 등장시켰다. 부단한 조선족의 고국방문정책 개선과 재한조선족의 처우 개선 등으로 하여 현재 재한조선족수는 30~40만명에 달하고있으며 이들은 신속하게 한국내 여러 조선족밀집구역을 형성하고있다. 이런 시대흐름과 글로벌화에 맟추어 이번에 발표된 한국의 중국조선족 입국문호 개방정책은 중국조선족사회발전사로 볼 때 한낱 리정표와 같은 사건이라 할수 있다. 이 사건은 중한수교 20여년간의 괄목한 성과를 바탕으로, 국내 조선족사회성원들의 한결같은 요구와 강한 의지의 표명, 재한조선족사회의 부단한 노력과 호소하에 비로소 이뤄낸것이다. 또한 조선족민원인들의 애로사항을 누구보다 잘 리해하고 그 개선책을 끈질게 추구해온 관련 령사들의 로고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조선족사회는 이번 동포정책 개선을 시점으로 하여 새로운 시대에 진입하고있다. 오로지 중국내 가정의 생계에 보탬으로 집을 마련하고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한국의 악렬한 3D 로동환경속에서 악착스레 일한 단계를 "코리안드림"현상으로 본다면 일정한 부의 축적과 함께 한국내 경제기반을 마련하고 또 한국내 젊은계층의 조선족 경제인, 박사 등 새로운 엘리트들이 배출되여 한국에서의 직접 성공을 겨냥하면서 조선족사회는 새로운 발전단계 즉 "뉴 코리안드림"시대에 진입하고있다고 할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족의 자유로운 고국방문 허용은 조선족사회에서 "뉴 코리안드림"시대를 여는 전격적인 신호탄이 되여야 한다. 따라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아 조선족사회 구성원 모두가 더욱 성숙되고 리지적인 사고로 새로운 비전을 가질 때라고 본다. 한국의 중국조선족 입국문호 개방정책에 대해 조선족사회는 반기면서도 한편으로 조선족사회 공동화(空洞化)에 대한 우려를 떨쳐버리지 못한다. 과거 여러가지 조건 제한으로 한국행을 하려는 사람들이 한국에 가지 못하였는데 이번에 그 규제가 단번에 풀리면서 맹목적인 한국행으로 인한 여러가지 페단의 출현, 더우기 조선족인재의 류실을 초래해 조선족사회 전반에 마이나스영향을 주지 않을가 은근히 두려움도 앞선다. 다른 한편 이번 개선정책에 불법체류자와 위명려권자의 사면이 포함되지 않았고 또 취업규제가 풀리지 않았기에 자칫하면 조선족들의 자유로운 한국행이 불법체류로 이어질수 있다. 또한 F-4 비자의 단순직 취업도 제한되여있는 실정을 고려하면 한국내 불법취업에 대한 단속도 한결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30여년에 걸친 이주의 력사가 축적되여 드디여 맞이한 "뉴 크리안드림"시대는 과거의 락후되고 페쇄적인것을 지양하고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사고를 지향하여 중한 량국에 기여하는 길을 함께 열어가는 시대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요녕신문 석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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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25
  • 간첩사건 증거조작, 조선족사회에 미칠 ‘후폭풍’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증거 조작 의혹과 관련해, 그 위조된 증거를 조작하는데 탈북자-조선족이 개입했음이 사실로 밝혀진 후 미칠 ‘후폭풍’에 대해서 필자는 조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한국 측 후폭풍 국정원에서 요구하는 증거도 중국에서 위조하여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에 근거해 한국의 출입국 관련 기관에서 그동안 조선족들이 귀화 및 영주권신청에 필요한 중국 측의 인증자료를 위조하였을 가능성을 참작해, 이러한 서류들을 재조사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다.사실상 그동안 국제결혼, 귀화, 영주권 등에 필요한 서류들 가운데 위조공문이 심심찮게 발견되곤 했고 또 중국에서 그와 같은 서류들을 전문으로 해주는 브로커들이 일종의 업으로 생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존의 서류에 대한 재조사는 물론 새롭게 중국 측 공문의 진위를 판별하는 절차가 덧설치 되어 까다로워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물론 한국에서 그 진위판별이 가지는 가치와 진위판별에 들 원가를 계산해서 결정할 터.그전에 이미 학력증명은 까다로운 절차로 진위를 가리다 못해 아예 가장 확실한, 중국 고등교육학력시스템에서 발급하는 것만 인정해주는 시스템으로 바뀌기도 했다. 아예 지방의 인증은 다 믿을 수 없으니 외교인증서를 가져오라고 하면 조선족은 피곤해진다.둘째, 중국 측 후폭풍 이 점은 생각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심각하다. 자살극을 벌인 증인의 신분이 너무 복잡하고 기구하다는 데 그 원인이 있다. 탈북자이면서 조선족, 이 신분은 너무 복잡한 개념이다. 그 개념이 성립하는 건 필자의 경험상 다음과 같은 경우다. 가) 북한국적자로 중국에 장기거주하는 자로서 통상 우리가 ‘조교’라고 칭하는 사람들이다. 이 부류에 대하여 중국정부는 80년대부터 몇 차례에 걸쳐 중국국적을 부여한 바 있다. 중국국적을 취득하였지만, 북한에서는 여전히 재중교포로 인정돼 이 부류가 중국국적을 부여받은 후 북한에 가서 장기체류하다가 중국을 거쳐 한국에 입국하여 ‘탈북자’라고 자처하여 탈북자 인정을 받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만약 그렇다면 조선족사회에 대한 중국 공안당국의 호적 재조사는 기본상 가능성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나) 탈북자로서 중국에서 국적을 부여받은 사례는 필자가 알기에는 합법적인 것이 없다. 불법월경자에 대하여 중국에서 국적을 부여할 리가 없다. 정상적인 경로로 중국국적을 부여받았을 리 없고 불법적인 경로로 신분세탁을 하여 중국호적을 가지고 중국여권을 발급받은 탈북자가 한국에 입국하여 ‘탈북자’로 인정받은 사례는 필자도 알고 있다. 직접 두 건을 경험하기도 했다. 하나는 연변에서 신분세탁을 하는 데 성공한 사례, 또 하나는 산동위해에서 성공한 사례.만약 이것이라면 조선족사회는 참 골치 아파진다. 조선족의 호적에 대한 전면적인 재심사가 일어날 것이고, 공안국 호적 관련 경찰들이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연변에서 한국입국자격이 정지돼 타인의 신분을 이용해 신분을 세탁하고 한국에 입국한 사례가 많아서 몇 년 전부터 연변 공안에서 본인 신분 되찾기 캠페인을 진행 중인데, 이 같은 탈북자의 신분세탁까지 공안에서 자행됐다면…. 이번 사건으로 중국 공안당국에 알려지면 연변 공안호적관리부처는 그야말로 핵폭탄급 재앙이 떨어진다. <연변통보 順頌>
    • 뉴스
    2014-03-10
  • 조교(朝僑)의 ‘분류’
    재중 북한(조선)국적자인 조교들은 그 ‘구성도 다양’하다. 무슨 정치 면모로 그가 노동당 당원인가 하는 구성이 아니라, 그 ‘발생 년대에 따라 다양하고 그 다양성에 따라 중국정부에서 중국국적 부여도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초의 조교라는 개념은 중국 ‘국민당이 동북을 접수하면서 등장’했다. 국민당은 재만 조선인들에게 중국국적을 부여를 거부하면서 재만 조선인을 ‘조교’ 또는 ‘한교’로 분류했고, 재산권을 인정해 주지 않았고 자산을 몰수하거나 압류했다. 여기서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인데,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에서 살벌한 화교정책을 펼쳤던 것이 이에 대한 보복이 아니었나 싶다. 아무튼, 조교의 분류를 살펴보자.첫째, 그러다가 중공이 점차 국민당 점령구를 하나씩 회복하면서 토지개혁을 시행했는데, 중공은 재만 조선인에게 세 가지 출로를 제시―—중국국적을 원하면 중국국적자로 인정하고 그 절차도 간단해 심지어 그냥 토지개혁을 할 때 “중국인으로 살겠다”고 하면 농토를 주고 중국인으로 인정. 다른 하나는 원적지로 귀환도 돕고, 또 다른 하나는 중국인으로 살겠다는 것을 거부하면 조선교포로 살되 농토는 분배하지 않는 조건(이 부류가 첫 패의 조교다).둘째, 중공이 집권하고 나름의 민족정책을 수립해 공식적으로 재만 조선인에게 중국국적을 부여한 후 정식으로 ‘중국 조선족’이라는 개념을 확립할 때, 일부는 조국에 가서 조국건설을 하겠다고 중국호적을 반환하고 조선에 간 ‘조선족’도 있었다. 또 1958년도에 중국인민지원군이 공식적으로 철수하면서 조선에서 결혼한 지원군 장병들이 조선부녀자들과 함께 귀국했는데 그 부녀자들과 조선에서 낳은 자식이 조교가 된 경우도 있고, 조선건설에 나갔다가 되돌아온 ‘조선족’도 있는데 이 같은 조선족은 중국국적자로 다시 입적하지 못하고 그냥 조교신분이었다는 것. 이 부류가 중국에 돌아오는 사례는 내가 알기에는 1975년도까지 계속됐다. 심지어 지원군 장병과 조선부녀자가 결혼해서 조선에서 조선국적자로 살다가 문화대혁명 기간에 중국에 친척방문을 왔다가 눌러앉은 사례도 있는데 이런 사례 중 남자 쪽은 원 국적과 호적을 회복하고 부녀자와 조선에서 출생한 자식은 조교가 됐다(이 부류가 둘째 부류다).셋째, 둘째 부류와 기본상 동일시간대에 귀국한 사례 중, 문화대혁명 기간에 두만강을 도강한 부류도 있다. 아주 희소하지만, 중국으로 돌아와 조교로 산 사람이 있다. 지방정부에서 튼튼한 인맥을 찾아서 원래 호적을 회복한 사람도 간혹 있다. 재중 조교가 중국에 최고로 많을 때는 그 인원수가 십만 명을 밑돌았다. 그 수가 급격하게 감소한 것은 등소평의 농촌개혁 때였다. 나의 외숙모가 조교였는데, 그 부모가 중국국적을 거부해서 조교로 분류됐다가 조국건설을 한다고 조선에 나가서 모두 사망하고 외숙모는 홀로 남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외삼촌에게 시집왔다. 외할머니에게 얼마나 구박을 받았는지 모른다. 땅도 없고, 호적도 없고. 조선에 친척이라도 남아 있어 문화대혁명 시기에 좀 도움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옹토호도거리를 하면서 ‘외국국적자는 농토를 도급하지 않는다’는 정책 때문에 연변에서는 조직적으로 조교 가운데 자원에 따라서 중국국적을 부여하는 캠페인이 몇 번 있었다. 그래서 외숙모가 그걸 신청하여 됐는데 내 기억으로는 그 국적부여 조건으로 중국에 20년 이상 상주하고 등등 왔다 갔다 하면서 부산을 떤 기록만 없으면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당시 우리 일본어 선생님, 우리 이웃집 아줌마와 그 자녀들이 신청했는데 두어 달 지나서 입적됐다고 호적을 올리고 그랬던 것 같다. 이 같은 조직적인 입적 시에는 중국국적 부여에 필수인 조선대사관에 ‘조선국적 포기각서’를 제출하고 ‘조선국적 말소 확인서’를 받아오는 절차도 생략하였다. 아마 중국정부에서 조선정부에 압력을 행사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우리가 그렇게 해주겠으니 그리 알고 있으라!’ 하면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것인지? 그리고 개별적으로 중국국적 신청은 계속하고 있다. 일정한 요건을 갖추면 입적이 된다. 어느 사이트의 한 연변 누리꾼도 와이프가 조교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자식들의 진로 때문에 입적을 깊이 고민하는 글을 게재한 적이 있는 그 글을 본 적도 있다. 그 누리꾼도 말하면 현실에서 다 알만한 사람이다. 2010년도에 그 집을 방문하니, 와이프는 이미 국적을 중국으로 바꿨다<연변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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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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