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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토] 제3회 대련시조선족전통김치문화축제
    [동포투데이] 지난 21일, 제3회 대련시조선족전통김치문화축제가 대련광대식품유한회사 정원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행사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소박하게 치러졌다. 흑룡강신문에 따르면 조선족의 전통과 민속을 주제로 펼쳐진 이번 축제는 광대식품 김명순 이사장과 대련조선족기업가협회 박만선 회장, 정만흥, 최영철, 장상기 등 명예회장들이 함께 대자연의 구름, 비, 바람, 천둥을 대표하는 북, 장고, 징, 꽹과리를 전체 참석자들과 함께 울리면서 축제 막을 올렸다. 축제는 신명나는 우리가락의 사물놀이와 함께 대련 동포사회 최초의 산천기원제가 펼쳐졌다. 이번 산천기원제는 장백산의 샘물로 만든 아리랑 술과 정성들여 차린 제물부터 시작하여 진상, 제관입장, 분향영신, 참신, 초헌, 독축, 아헌, 종헌, 리성, 사신, 축문소각, 제관퇴장, 철상까지 모든 차례를 엄격한 전통례법에 따라 진행했고 49명의 제관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제사에 임했으며 기업가협회 관계자들이 초헌, 아헌, 종헌관을 맡아 동포사회 미래에 대한 책임감을 과시했다. 이어서 수준급의 부채춤을 공연하면서 큰 공명을 끌어냈다. 그다음 행사로 김치독소망기원고사가 진행되었다. 변치 않는 김치맛을 대대로 이어가고 집안의 재앙을 털어버리며 평안이 깃들기를 기원하는 고사였다. 고사가 끝난 후 옛적의 동네잔치를 방불케 하는 흥겨운 마당놀이가 이어졌고 김장체험, 찰떡치기, 막걸리 만들기 체험, 엿과 고추장 만들기 등에 이어 공장안의 민속박물관 방문체험도 진행하면서 다채로운 행사가 마무리 되였다. 전반 행사를 기획하고 고사 진행을 맡은 김광철은 “고사문화를 봉건미신이나 귀신놀음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공자도 귀신은 무조건 멀리 하지 말고 공경하라 하였다. 하물며 우리 민족의 고사문화는 대자연에 대한 경외심, 생명에 대한 존중, 우주적인 일체감에서 비롯된 소박한 민간신앙이며 동양적 인문주의의 범주라고 생각한다. 인류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문제, 자원쟁탈, 역병 등 주요한 문제가 대자연에 대한 무차별한 개발과 생명에 대한 존중이 결핍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사진제공 : 흑룡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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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8
  • 연변, 폭력배 악세력 ‘보호우산’ 14명 조사처리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인대 상무위원회 원 당조서기, 주임 최헌이 최근 당적과 공직을 박탈당하고 사법기관에 이송 되었다고 중국 관영 인민망이 23일 보도했다. 조사결과 최헌은 용정시공안국 국장, 시위원회 상무위원, 정법위원회 서기, 시인대 상무위원회 주임을 담당하는 기간 장기적으로 팽수춘(彭守春)을 우두머리로 한 폭력배 악세력을 위해 ‘보호우산’역할을 맡아 폭력배 악세력이 장기적으로 법망을 피할 수 있게 도와줬다. 2018년 말, 연변주규율검사위원회 감찰위원회는 폭력배 악세력 단서를 조사하면서 ‘팽삼(彭三)’이라고 불리는 용정시 폭력배 악세력조직 두목 팽수춘이 2016년 불법감금, 고의상해, 불법채광 3가지 혐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집행유예 판결을 받은 사건을 발견했다. 이 관행을 위반한 판결을 깊이 파헤쳐보니 팽수춘 배후의 ‘보호우산’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가 바로 당시 용정시인대 상무위원회 당조서기이자 주임이었던 최헌이였다. 이후 연변주규율검사위원회 감찰위원회는 ‘1+1+N’ 모식을 취해 사건처리과에서 앞장서고 파견주재(파견한)기구에서 협조하며 현시규율검사위원회 감찰위원회가 참여한 ‘연합주관처리조’를 구성하여 밀접히 배합하고 협동작전하면서 최헌 다음으로 용정시인민법원 형사재판정 재판장 조향춘, 용정시공안국 당조성원, 부국장 김철남, 안민파출소 소장 장지명 등 일련의 ‘보호우산’을 파헤쳐냈다. 통계에 의하면 최헌과 관련된 폭력배 악세력 부패사건에서 총 14명의 ‘보호우산’을 조사 처리했다. 현재까지 연변주규율검사위원회 감찰위원회는 폭력배, 악세력 관련 문제단서 467건을 접수하고 261건을 입안하여 조사 처리했으며 231명을 처리하고 200명에게 당규율정무처분을 주고 23명을 조직처리하고 35명을 사법기관에 이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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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4
  • 우리민족 고유의 전통악기 퉁소
    [동포투데이] 최근 우리민족 고유의 전통악기 퉁소가 중국 관영 중앙방송을 통해 소개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다음은 방송에 소개된 내용이다. 15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 조선족 고유의 전통악기 퉁소(洞箫)는 아리랑, 가야금, 씨름 등과 나란히 국가급 무형문화재로 등재된 중국 조선족의 우수한 문화이다. 퉁소는 중국 조선족 이주 초기부터 새 중국 창건 초기까지 줄곧 최고의 인기를 자랑했던 우리민족의 대표적인 전통악기였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거나 퉁소가 유행되였던 지역 출신이 아닌 젊은 세대들은 퉁소를 정확히 감별해내는 것마저 어려운 실정이 되여버렸다. 전승인들은 이에 큰 안타까움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일도 있으니 퉁소문화 전승과 발전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단체와 애호가들이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퉁소를 국가급 무형문화재로까지 등재시켜 퉁소 문화의 맥을 굳건히 이어가고 있다. 퉁소의 기원은 최고로 1500년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수 있다. 백제 금동대향로 일각, 조각된 악사손에 쥔 악기가 학술계에서 퉁소로 추측되고 있다. 고고학자들이 소 악기를 다루는 화면이 그려진 4세기 중엽 고구려 벽화를 발견하면서 퉁소가 고구려시기 이전부터 제작되고 사용되였다는 설이 있게 되였다. 한편 “고려사 악지”의 기제에 따르면 퉁소는 서부아시아로부터 중국으로 전해지고 다시 조선반도로 건너간 한가지 중국악기인데 개량과 음악실천을 거쳐 점차 조선민족이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전통악기로 되였다는 설도 있다. 퉁소는 중국조선족들에게 있어 이주부터 정착까지의 역사를 가장 잘 구현해주고 가장 서민적인 악기로 간주되고 있다. 한편으로 퉁소는 가야금과 같은 악기보다 제작이 쉽고 수시로 연주가 가능하기 때문에 보급이 기타 전통악기보다 훨씬 더 빠르다. 또 퉁소 악곡에는 일제의 약탈에 못 이겨 피난길에 오르는 처참한 처지를 반영한 “애원소리”, 침략자들과 과감히 맞서 싸우는 민족의 기백을 담은 “시나위”, 기꺼운 풍년을 경축하는 “풍년가”등 민족역사의 여러 시기와 맞물리는 다양한 감정색채가 녹아있기 때문에 서민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퉁소는 조선반도에서는 주로 함경도와 경상도지역에서 널리 사용되고 국내에서는 주로 연변의 연길과 훈춘 두개 유파로 나눠 각자 활약상을 펼치고 있다. 훈춘지역은 유명한 퉁소마을 밀강향으로부터 명성을 떨친 제1대 퉁소연주가 한신권에 이어 김관순, 리길송, 현재는 제4대 전승인 리덕수까지 이어져내려왔고 연길은 흑룡강 목단강 지역에서 퉁소연주를 하다가 연길지역으로 이주해 현란한 연주기교로 이름을 알린 제1대 연주가 김창순으로부터 차례로 김창룡, 신룡춘, 장익선까지 이어져내려왔다. 1920년대, 연변의 왕청현에서 첫 농악대가 설립되고 반석, 교하, 서란, 그리고 외곽 집거지역에서도 잇따라 농악대가 무어져 군중성 문화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해방전후 명절을 맞거나 마을에 혼례, 환갑잔치 등 경사가 있을때면 제1대 퉁소애호가들이 그곳을 찾아 연주활동을 펼쳤다. 새 중국 창건 후부터 60년대 중반까지 퉁소문화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 시기 많은 퉁소연주가들이 속출하고 퉁소음악의 보급면도 한층 확장 되였으며 나아가 정부에서 주최한 중요 행사에서도 선을 보여 민족의 명함장 역할을 톡톡히 발휘했다. 연길지역 같은 경우 1951년 봄, 연길시문화관의 조직하에 김천석이 조직자를 맡고 허득범, 리룡관, 김일근 등 18명 퉁소애호가들로 구성된 연길시 “민간예술인팀”이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가 외국 래빈과 중앙 지도자들을 접대하는 무대에까지 오르며 각급 문예공연에서 수많은 영예를 따냈다. 또한 1955년, 안도현 퉁소연주가 리홍래는 연변민간예술인 대표 신분으로 북경 회인당을 찾아 국가 지도자 앞에서 퉁소공연을 펼치고 1957년에는 강기범을 대표로 한 민간악기 합주대가 북경에서 우수공연상을 받고 주은래, 주덕 등 국가지도자들의 회견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지난 세기 60년대 중엽부터 퉁소문화는 침체기에 들어갔다. 1998년, 퉁소연주가 김래억은 한동안 중단 되였던 퉁소연주활동을 전승하기 위해 전통음악가 김호남과 함께 20세기 50, 60년대 연길 “민간예술인단체”에서 활동하던 김창룡을 고문으로 삼고 15명 골간성원을 초빙해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산하에 “연길 퉁소애호가클럽”을 설립해 공식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새 천년을 맞이해 연길시 북산가두 판사처 문화소 소장 김철수는 박창득 연주가를 중심으로 “연길 퉁소애호가 클럽”을 설립했다. 클럽은 퉁소 45대를 구입하고 퉁소교재를 편찬하며 퉁소연주훈련반도 꾸려 30여명의 훌륭한 퉁소연주가를 양성했다. 일정한 규모를 갖추게 되자 클럽은 전통 방식에서 벗어나 퉁소연주에 북, 장고 반주, 60여명 안무팀을 배치해 공연 효과성을 높이기에 노력했다. 이들은 연길조선족민속관광박람회 개막식 등 대형행사에 참가하고 국가문화부, 국무원 로인사업시찰단, 국가민족사무위원회 판공청 등 단위의 초청으로 14차례 공연을 펼쳐 큰 호평을 받았다. 2008년, 연길시 문화관과 훈춘시 문화관이 공동 신청한 “조선족 퉁소음악”은 드디어 국가급 무형문화재로 등재되어 새 출발에 돛을 달게 되였다. 국가급 무형문화재로 성공적으로 등재되면서 퉁소 전승에는 일련의 기꺼운 변화들이 일어났다. 당면 국가의 대대적인 보호정책하에 연길시와 훈춘시 문화관은 각기 전승인 장익선, 리덕수와 손잡고 다양한 조치로 퉁소 전승과 발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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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1
  • 중국 조선족 지역별 무형문화재
    [동포투데이] 6월 13일, 중국 “문화자연유산의 날”이다.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중국은 2006년에 처음 문화유산의 날을 지정했다. 2017년부터 국무원의 비준을 거쳐 매년 6월 두번째 토요일을 문화자연유산의 날로 조정했다. 올해 문화자연유산의 날을 기념해 전국 각지는 문화관광부의 포치에 따라 3700여가지의 무형문화재 전시행사를 갖게 된다. 무형문화재란 노래, 춤, 전통공예, 생산기술 등 형체가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재를 가리키는바 실체가 있는 문화유산(조각, 미술, 골동품 등)과 달리 개체 혹은 군체의 전승인들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무형문화재를 보호하는 것은 한 민족의 삶의 역사와 문화를 후세에까지 보존, 계승, 발전시키는 중요한 사업이다. 세계적인 범위에서 볼때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무형문화재는 최고급별의 무형문화재이고 각 나라마다 국가급 무형문화재가 존재한다. 중국 무형문화재는 국가급, 성급, 시급, 현급 네개 등급으로 나뉜다. 무형문화재로 등록된 종목들은 중화인민공화국 무형문화유산법에 의해 문화전승장소와 관련 활동자금 등을 지원받고 국가의 보호를 받게 된다. 국가급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조선족의 무형문화재는 모두 24개이다. 그중 “중국조선족농악무”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였다. 현재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중국의 무형문화재는 총 40개이고 중국은 세계 1위의 무형문화재 보유국이다. 그중 조선족의 농악무는 중국을 대표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의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국가급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조선족 무형문화재 24개는 동북 3성에 집중되였다. 길림성 - 18개 (1)조선족퉁소음악 <朝鲜族洞箫音乐> 보호단위: 연길시문화관 (2)조선족퉁소음악 <朝鲜族洞箫音乐> 보호단위: 훈춘시문화관 (3)아리랑 <阿里郎> 보호단위: 연변문화예술연구센터(延边文化艺术研究中心) (4)가야금예술 <伽倻琴艺术> 보호단위: 연변문화예술연구센터(延边文化艺术研究中心) (5)조선족농악무(상모춤) <朝鲜族农乐舞(象帽舞)> 보호단위: 왕청현문화관(汪清县文化馆) (6)조선족학춤 <朝鲜族鹤舞> 보호단위: 안도현문화관(安图县文化馆) (7)조선족장고춤 <朝鲜族长鼓舞> 보호단위: 도문시문화관(图们市文化馆) (8)조선족삼로인<朝鲜族三老人> 보호단위: 화룡시문화관(和龙市文化馆 (9)판소리 <盘索里> 보호단위: 연변가무단(延边歌舞团) (10)조선족 그네, 널뛰기, <朝鲜族秋千, 跳板> 보호단위: 연길시청소년아마추어체육학교(延吉市青少年业余体育运动学校) (11)씨름 <摔跤(朝鲜族摔跤)> 보호단위: 연길시청소년아마추어체육학교(延吉市青少年业余体育运动学校) (12)민족악기제조기예 <民族乐器制作技艺(朝鲜族民族乐器制作技艺)> 보호단위: 연길시민족악기연구소(延吉市民族乐器研究所) (13)김치제조기예 <泡菜制作技艺(朝鲜族泡菜制作技艺)> 보호단위: 연길우의유한회사(延吉友谊有限公司) (14)추석 <中秋节(秋夕)> 보호단위: 연변문화예술연구센터(延边文化艺术研究中心) (15)조선족 회갑례 <朝鲜族花甲礼> 보호단위: 연변문화예술연구센터(延边文化艺术研究中心) (16)조선족전통혼례 <朝鲜族传统婚礼> 보호단위: 연변문화예술연구센터(延边文化艺术研究中心) (17)조선족복식 <朝鲜族服饰> 보호단위: 연변문화예술연구센터(延边文化艺术研究中心) (18)결혼풍속 조선족회혼례 <婚俗(朝鲜族回婚礼)> 보호단위: 연변문화예술연구센터(延边文化艺术研究中心) 료녕성 - 5개 (1)조선족농악무(걸립무) <朝鲜族农乐舞(乞粒舞)> 보호단위: 환인만족자치현문화관광발전서비스센터(桓仁满族自治县文化旅游发展服务中心) (2)조선족농악무 <朝鲜族农乐舞> 보호단위: 철령시조선족문화예술관(铁岭市朝鲜族文化艺术馆) (3)판소리 <盘索里> 보호단위: 철령시조선족문화예술관(铁岭市朝鲜族文化艺术馆) (4)추석 <中秋节(朝鲜族秋夕节)> 보호단위: 철령시조선족문화예술관(铁岭市朝鲜族文化艺术馆) (5)조선족회갑례 <朝鲜族花甲礼> 보호단위: 단동시무형문화유산보호센터(丹东市非物质文化遗产保护研究中心) 흑룡강성 - 1개 (1)조선족회갑례 <朝鲜族花甲礼> 보호단위: 목단강시조선민족예술관(牡丹江市朝鲜民族艺术馆) <중국조선어방송망(中国朝鲜语广播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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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14
  • 제16회 연변생태·된장문화축제 연길 민들레마을서
    [동포투데이] 제16회 연변생태문화축제 및 된장오덕문화절 행사가 6월 9일, 민들레마을(연길시 의란진 련화촌)에서 코로나19에 대비해 간소하게 치러졌다. 주최측에 따르면 코로나의 기세가 한풀 꺾이었다지만 방심은 금물, 이런 시점에서 된장축제는 시민들의 건강을 기원하고 뿌리 깊은 발전의 생존터전을 꿈꾸면서 더 정답고 짙은 문화의 유전자를 사람들 가슴마다에 심어주기 위한 데 취지를 두었다. 천혜의 땅, 장백산 아래 조선족자치주 연변은 말 그대로 생태자원과 생태문화의 보물고다. 연변생태문화축제는 전국적으로 최초의 생태문화축제이고 전 세계 조선민족의 유일한 전통 된장 문화제기도 하다. 중국조선민족사학회 정신철 회장은 축사에서 “우리 민족의 전통음식 가운데 된장처럼 독특한 것이 없다”며 “전통된장의 오덕문화가 바로 된장의 정수이다. 더불어 우리 민족도 된장처럼 다민족과 다원적 문화속에 휩쓸려 있으면서도 자기만은 잃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행사장은 축제의 열기가 가득 찼다. 34도의 고온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민들레마을에 모였다. 이번 행사는 연변생태문화협회에서 주최하고 연변된장술유한회사에서 후원했다. 주 : 오덕문화 ①원칙을 지켜 가지 고유의 맛을 잃지 않는 화이부동 고수본성의 단심문화②관용을 베풀어 상대의 맛을 인정해주는 구동존이 관대포용의 화심문화③ 화합을 도모하여 지나침을 억제시키는 동화렬성 화합공존의 선심문화④청렴함을 지향하여 잡맛을 제거하는 거성제유 청정렴결의 불심문화⑤절개를 지켜 변질함이 없는 항구불변 송백절개의 항심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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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11
  • 우리 민족 ‘김치박물관’ 닝보에 들어선다
    ⓒ연변일보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연변자치주 인재공작대와 닝보(寧波)낙동문화미디어유한회사가 공동으로 기획한 중국 연변조선족민속문화체험기지 대상을 저장(浙江)성 닝보시에 건설키로 본격 결정을 내렸다고 7일 현지 매체 연변일보가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해당 대상은 중국조선족 문화를 선양하고 ‘소비 부축’ 상품 및 봉사의 질을 제고하는 것을 핵심으로 삼아 중국조선족 문화의 정수를 널리 홍보하고 체험식 문화 활동의 새로운 브랜드를 구축하기 위한 데 그 목적을 두었다. 연변자치주 인재공작대는 해당 대상의 기획 및 건설기간에 우수한 조선족 교원 등 전문인재를 파견해 연변을 대표할 수 있는 중점 민속문화자원과 특색상품들을 선별한 후 닝보낙동문화미디어유한회사에 전문적인 문화지도를 제공함으로써 대상의 순조로운 건설을 지원하게 된다. 해당 대상은 닝보시 동전호 남송돌조각공원내에 ‘김치박물관’을 건설하고 연변김치의 역사 요해, 연변김치 현장 제작, 조선족 음식 맛보기, 조선족 민속복장 체험 등 4가지 주제로 나뉜 다. ‘김치박물관’은 연변김치를 주제로 닝보시에 건설되는 첫 박물관으로 향후 문화체험이라는 혁신적인 방식을 통해 연변의 민속 문화에 깃든 내포를 닝보시에 알리고 닝보시와 연변주의 공동발전 이념을 보여주는 교두보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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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08
  • 연변 무릉도원—만천성국가삼림공원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청현 만천성국가삼림공원은 풍경이 수려한 장백산(백두산) 동북부, 가야하 중류에 위치해있으며 중국 국가 3A급 풍경구이다. 풍경구는 백의선녀, 룡귀도를 중심으로 도합 8대 풍경구와 36개 명소로 나뉘어 있는데 ‘수면이 넓고 산이 그윽하며 설경이 아름답고 삼림이 수려한’특점이 있다. 만천성국가삼림공원은 레저, 생태, 민속 등이 일체화된 사계절 종합 관광풍경구이다. 이곳은 1년 사계절 경치가 아름답다. 봄에는 꽃이 만발하고 여름에는 푸른 산과 맑은 물, 녹음이 우거지고 가을에는 산과 들이 그림 같이 오색령롱하며 겨울에는 온 산이 얼음처럼 맑고 옥처럼 깨끗한 은빛으로 단장되여 북국의 경치를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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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06

사람들 검색결과

  • “결혼이주 여성도 한국인 ㅡ 이들 위한 대변도 필요해”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차홍숙 ㅡ 한글로 그녀의 이름은 차홍숙, 국제결혼으로 한국으로 나오기 전엔 중국말 발음으로 그녀의 이름은 처훙수(车红淑)이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영어로 부르면 'Hong Sook Cha(홍숙 차)' 불린다.뭐 율무차, 보리차가 있다더니 홍숙차도 있담? 이렇게 같은 사람의 이름이지만 여러 나라의 말로 부르면 달라진다. 그리고 불리기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표정도, 그 말투도 달라질 수 있다. 한 남자의 이름을 김영철이라고 하자. 이 이름은 중국에서도 같은 조선족끼리는 김영철이라고 불리지만 그 남자가 한국에 나오면 김영철이 아닌 진융저(JINYONGZHE)로 불렸었다. 이에 김영철이란 남자는 반발을 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 와서까지 중국발음으로 불리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 ㅡ 한국인의 시각에는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문명하고 가장 살기좋은 나라로 보여질지는 모르나 제3국에서 온 사람들의 시각 즉 제 3 자한테서는 한국에 대한 시각이 좀 다르다. 좀 이상한 나라인 것이다. 또 한국으로 오기 전에 보던 한국과 정작 한국땅을 밟은 후 실질적으로 보면 한국이 달라도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 3 국에서 온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 한국말인가 하면 또 세계에서 가장 거칠고도 쌍스러운 말이 한국말이다”라고 한다. 일리가 있다. 예를 들면 한국 서울이나 여느 대도시의 은행같은 곳에 가서 그런 곳의 직원들의 말씨를 들어보면 얼었던 마음도 다 녹아내릴 정도이다. 친절하고 예의스러우며 거기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차근차근 가르쳐주는 구체적인 봉사성…이러한 언행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두 번 세 번 다시 찾아오고 싶어지고 그 직원이 총각이라면 사위로 삼을 생각이 들고 미스라면 며느리로 맞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다. 반대로 한국의 노가다판이라고 하는 작업현장 즉 건설현장이나 바다에서 작업하는 어선현장 같은 곳에 가면 <개새끼>. <씹팔 놈>…벼라별 추한 말들이 다 오간다. 은행창구의 봉사성과 작업현장에서 오가는 말투, 너무나도 모순되는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한편 한국은 사회적 차별이 심한 나라이다. 상하 급 사이의 차별, 남녀 사이의 차별 그리고 내국인과 외국인과의 차별, 특히 이주 여성에 대한 차별 … 차홍숙 그녀는 이런 차별을 줄이고 없애기 위한 일에 몸을 던지고 싶었다. 이는 자신이 이주여성이어서 더욱 강했을지도 모른다. 1971년생인 차홍숙씨가 중국 헤이룽장성 치치할시(黑龙江省齐齐哈尔市)에서 국제결혼으로 한국땅을 밟은 것은 1997년이었다. 당시는 한국과 중국의 경제수준 차이가 엄청 크게 나던 시기였고 차홍숙씨를 비롯한 많은 중국 조선족 여성들이 한국 남성을 결혼의 선망대상으로 쳐다보던 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정작 한국으로 와서 보니 비교적 유족한 생활을 한다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그녀 스스로 깨달았다. 한국사회는 차별이 심했다. 심해도 너무 심했다. 중국출신 동포라고 기시하고 업신 보고 비웃고, 또한 이주여성이 낳은 자녀까지도 이런 불행을 당하군 했다. “결혼초기에는 한국과 중국은 사회와 문화가 서로 다르기에 웬간하면 참으면서 한국사회에 적응하려는 여성들이 많았어요. 헌데 서로 문화가 다른 차원이 아니라 너무 심하고 억지였어요. 한국에서 다문화가정들을 보면 폭언 폭행이 비일비재로 나타나고 있었지요. 돈 주고 사왔으니 폭행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한국인 남성들이 많았고 아니 이를 정당화하려고 했어요. 그러다보니 맞아서 얼굴에 멍이 든 여성, 갈비뼈가 부러져 병원으로 실려간 여성 등으로 많은 사건들이 터지고 만거죠.” 하다면 중국에서 남녀평등과 <절반 하늘(半边天)>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또 그 가치관으로 인생을 영위해오던 차홍숙한테 있어서 이러한 것들은 어디까지고 참고 넘어갈 것도, 그냥 보고 지나쳐 버릴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엔 순 자신만을 위해 적당히 참기도 하고 적당히 반발하기도 하였으며 또 적당히 타협하면서 이른바 <이주여성 인권찾기 운동>에 참여한 것도 사실이다. 헌데 이렇게 나서고 보니 주변에는 이렇게 당하며 살고 있는 결혼이주 여성이 너무도 많았다. ● 70대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한 30대의 베트남 여성은 결혼 후 수시로 언어폭행에 시달렸으며 수시로 생활비를 바쳐야 했고 지어는 여성의 동생한테도 생활비를 강요하는 일이 생겼다. 또 겨울에는 뜨거운 물도 못쓰게 했다… ● 2007년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캄보디아 출신 여성 쏙카(가명)는 결혼생활 3년부터 남편의 폭력에 시달렸다. 남편은 결혼 초부터 “밭에서 같이 일하려고 내가 돈 주고 널 데려왔다”며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다 그녀가 아이와 함께 캄보디아 친정에 다녀온 뒤부터 머리카락을 걸머지고 벽에 밀거나 손에 잡히는대로 물건을 던지는 등 폭력을 일삼았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가 울면서 말리자 남편은 밖에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티브이(TV) 볼륨을 크게 높혀 놓고 쏙카를 때리기까지 했다. … 한국인 남성ㅡ 위의 첫 번째 사례로 70대로서 30대 여성을 아내로 맞았으면 오히려 감지덕지 해야 할 일이지 그런 아내를 학대하고 생활비까지 내라고 억지 부리다니?!…그럼 한국 남성은 그렇게 대단한가? 요즘 세월에 한국인 남성이 중국 조선족 여성한테 장가들자고 해보라. 턱도 없는 소리처럼 들린다. 아마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부분적 한국인 남성들한테는 <삼척> 경향이 아주 농후하다고 한다. 강원도의 삼척이 아니라 이런 남성들한테는 <몰라도 아는 척>, <못나도 잘난 척>, <없어도 있는 척>이라는 <삼척>을 말한다. 자기가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한가?! 팔이 네 개가 달린 것도 아니고 하루 열끼씩 잘 먹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귀가 두 개이고 입이 하나인 건 많이 듣고 적게 말하라고 한 것이고 눈이란 살가죽이 모자라 박아넣은 장식품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조 이삭은 염글수록 머리를 숙인다고 했다. 다시 원 화제로 돌아와 이상 두 가지 사례는 전반 한국사회로 놓고 볼 때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으며 결코 남의 가정의 일로만 볼 것이 아니었다. 차홍숙씨는 자기가 아니더라도 그 누군가는 이런 차별과 편견으로 얼룩진 한국 사회의 현상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충동을 가지게 됐다. 현재 차홍숙씨는 서울시 관악구 찾봉사단(찾아가는 봉사단)원으로 활동,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다문화부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관악구을 다문화위원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찾봉사단은 주로 중국동포와 결혼이주여성으로 구성 지역사회에서 찾아가는 봉사를 실시하고 있다. 10년간의 다문화 봉사, 문화활동을 통해 차홍숙씨는 이주여성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의 고충과 상처를 알게 됐고 그녀 역시 이주여성으로 그들과 똑같은 불행을 겪은 여성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한편 차홍숙씨는 결혼이주 여성들도 자존, 자립, 자강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여기에는 자질향상에도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된다. “모르니까 당하는 거예요. 현재 60% 이상의 이주여성들은 한국어를 보고 쓰고 읽을 줄은 알지만 그 뜻을 몰라요. 예하면 알림장이 오면 읽지만 내용은 몰라요. 그러다보니 학교에서 통지서같은 것이 와도 자녀들의 준비물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거죠. 그러면 자녀가 학교에서 다른 애들한테 왕따당하거나 심지어 폭행당하기도 한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들한테 도움을 주려고 손을 내밀어도 잡아주지 않아요. 마음을 열지 않는거죠. 어찌보면 외국인이라서 소외되고 있다는 의식이 강한거죠. 즉 외국인이라서 가정에서도 차별받는데 사회에 나가서야 더 이를데 있냐 하는 것이죠.” 이렇게 언급한 차홍숙씨는 이주여성 즉 다문화 가정과의 1 대1의 맨토링(助言)하면서 1대 1로 그들과 대화하고 김치 등 반찬 만드는 방법같은 것을 가르쳐 주면서 끈질기게 손을 내밀면 그들도 언제가는 마음을 열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고민을 해보군 한단다. “1 : 1 멘토링은 폭언, 폭행과 고부갈등 및 자녀의 진로 해결 그리고 어려운 가정형편을 복지로 연결시켜 주는 주요한 <그린 통로>이죠. 자녀들의 진로문제 등 공지사항을 단톡방에 올리면 일부 한국인 남편들은 ‘이런데는 우린 안가도 돼, 이런데는 못사는 사람만 가는데야’하고 으스대는데 이건 아주 잘못된 생각이예요. 기실 자신도 최하층에서 겨우 버티며 살면서 말이죠. 일각에서는 다문화가정이란 호칭부터가 차별이라고 주장하는데 일리는 있지만 저의 관점은 달라요. 홍길동이면 어떻고 홍길남이면 어떻냐구요. 호칭이 바뀌지만 시선이 바뀌지 않고 인식이 개선되지 않으면 차별은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잖아요?!” 요즘들어 자주 이주여성이나 중국동포 출신 여성의 국회의원 비례대표 출마 등 정치참여가 아주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차홍숙씨이다. “앞으로 철저한 선별과 검증을 거쳐 진짜로 자격이 있는 이주여성 후보들이 많이 나와 단 한 분이라도 구의원, 시의원과 더 나아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동포나 이주민 여성들을 위해 많은 일을 했으면 하는 바램이지요. 우리 또한 스스로가 이미지 개선에 힘써야 해야죠. 공익행사, 봉사활동에도 자주 참가하고 베풀 줄도 알아야 한다고 봐요. 또한 동포라서 외국인이라서 깔본다는 등 소외된 감정과 차별과 무시를 받는다는 억울함이 있더라도 당당해야 합니다.” 이러면서 차홍숙씨는 각 국의 문화나 생활을 체험하고 서로가 이해하고 가까워질 수 있는 이주여성들의 시부모 혹은 친정 부모들로 주축이 된 경로당 설립과 그 활성화, 동포나 이주여성들만 끼리끼리 어울리지 말고 본토인들과도 잘 어울리고 서로 도우면서 살았으면 하는 등 이런저런 여러 가지 대안들을 내놓기도 했다. 일개의 결혼이주 여성으로부터 서울시 관악구 찾봉사단 단원,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다문화부 위원장으로 되기까지 처음부터 그 어떤 목적을 갖고 <욕심>을 부린 건 아닌 것 같다. 인생을 살다보면 이러저러한 뜻하지 않던 일에 자주 맞다들게 되고 그것을 타개하면서 사노라니 오늘까지에 이른 게 아닐까? 여하튼 차홍숙씨의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다음 부분적 한국인들에게 따끔한 말 몇 마디 하고 싶다. 이는 이 글의 주인공 차홍숙씨의 말이 아니다. 대한민국 ㅡ 역사가 깊고 찬란한 문화도 있다. 하지만 굴욕의 역사도 많다. 특히 근대에 와서 일본한테 36년간이나 짓밟히면서도, 아들딸들이 학도병이나 정신대에 끌려가도 그걸 막지 못하고 울기만 했던 조상들이다. 광복, 그것도 대한민국 자체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강대국들에 의해 이룩되었으며 그 댓가로 나라가 두 동강으로 토막 나기도 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중견으로 되고 있는 한국남성들은 떳떳해야 하지만 거들먹 거리지는 말아야 한다. 특히 적어도 힘없고 나약한 여성들한테 큰 소리 치지 말고 주먹을 휘두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 한국인? 그렇게 대단하고 우월한 것일가. 그제날의 굴욕의 역사는 그만 두고라도 오늘의 한국도 그렇게 행복한 나라가 아닌 것 같다. 집계에 따르면 2017년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OECD 31개 회원국 중 23위였고 청소년의 행복지수는 꼴지였으며 한국인의 자살률은 2003년 이래로 OECD 회원국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는 한국과 한국인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는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 사람들
    2020-06-06

오피니언 검색결과

  • [6.25전쟁 70주년 특별기획] 한반도 전쟁과 그것이 남긴 기나긴 여운
    ●철 민 한 많은 대동강아 변함없이 잘 있느냐 모란봉아 을밀대야 네 모양이 그립구나 철조망이 가로막혀 다시 만날 그 때까지 아ㅡ 소식을 물어본다 한 많은 대동강아 … 이 노래는 우리 민족 분단의 괴로움을 잘 반영한 노래이고 무려 70여 년간 불려 진 노래이기도 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한반도에는 전쟁이 터졌다. 외세와의 전쟁이 아닌 동족상잔의 유혈 전쟁이 터졌다. 적어도 전쟁 초기에는 내전이었다. <폭풍> - <진격> - <남조선 해방> - <조국통일> ㅡ 이는 당시 전쟁을 도발한 자들의 슬로건이었다. 즉 소위 <통일전쟁>이라는 것이다. 38선이 돌파되고 3일 만인 6월 28일에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이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서울의 중앙청 상공에는 남홍 색 인공기가 날렸다. 뒤이어 경기도 오산에서 미군 스미스 부대가 인민군에 의해 붕괴되면서 외세의 개입이 공식화 되었고 7월 20일에는 대전이 함락되었으며 8월 중순 경에는 전선이 낙동강에 이르게 되기도 했다. 그 다음에는 9월 15일의 인천상륙 작전, 10월 1일 국군의 38선 돌파와 10월 19일의 한국군 및 유엔군의 평양 점령과 같은 날, 중국군의 한국전 개입…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의 정전협정 조인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서는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계속됐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다. 그 와 중 전쟁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영화나 다뮤멘터리 및 소설 등 작품들도 많았다. 필자를 포함한 중국조선족들은 중국이나 북한에서 만든 작품의 영향을 당연히 많이 받기 마련이었다. <영웅아들딸>, <침략자를 타격>, <어젯날의 전쟁>, <1211고지 방위자들>, <남강마을 여성들>… 당시 나이 탓이었는지 필자는 그런 영화나 소설 등을 보면서 아주 재미있고도 감명 또한 깊었다. 아니, 나이 탓보다는 그 사회의 세뇌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해야 더 적절했다. 미 제국주의와 남조선 괴뢰반동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 조국통일을 염원하는 조선인민의 불요불굴의 투쟁정신… 그런가 하면 필자와 나이가 비슷한 한국의 친구들한테서 듣노라면 이들 역시 지난 한시기는 그랬다고 한다. 영화 <태백산맥>을 보면서 빨갱이들의 지독함에 치를 떨었고 다큐멘터리 <한국전쟁>을 보면서 김일성과 인민군의 무자비함에서 반공선전에 열을 올렸으며 영화 <빨간 마후라>를 보면서 대한민국 공군의 위상에 자호감에 도취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동무>와 <인민>이란 말만 들어도 빨갱이와 연관시키군 했던 한국의 어느 시대의 젊은이들이었다. 그럼 이 어찌 그냥 나이가 젊었던 탓이라고만 하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소위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자신이 참 유치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헌데 지금 냉철하게 분석해보면 반도의 남과 북이 모두 입으로는 전쟁을 원하지 않고 평화와 협력을 부르짖으면서도 실제상에서는 전쟁을 획책하고 있는 <호전세력> 이 확실히 있다는 생각이다. 얼마 전 남과 북에서는 전쟁으로 치 닿을 수 있는 일종의 <긴장시일>이 있었다. 남측에 있는 탈북단체들에서 보낸 대북삐라를 빌미로 북측에서는 개성에 있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고 비무장 지대에 확성기를 재설치하는 등 일련의 직접 혹은 간접적인 도발행위를 감행했다. 이런 행위를 감행한 북측의 실속은 잘 알바 없으나 일개의 남측의 <대북 삐라 날려 보내기 행위>에 그 댓가로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와 같은 엄청난 도발로 대응한다는 건 어떻게 해석해도 도발이지 대응이라고는 판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도 남측의 <대북 삐라 날려 보내기 행위>는 어디까지나 탈북자 단체를 중심으로 한 민간단체의 행위였지 정부 측 행위로는 볼 수 없는 마당에 북측의 <폭파> 행위는 공공연한 도발이었고 남북 정상이 애써 이룩해놓은 신뢰 프로세스에 대한 일방적인 파국임에 틀림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혹시 북측의 진짜 목적은 미국의 11월 대선을 겨냥한 행동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진짜 괴롭힌 것은 문재인 대통령을 포함한 진정 반도의 평화를 염원하는 남측 정부와 국민들이었다. 또한 모든 것이 북측의 계획된 <씨나리오>로 그냥 남측에 엄포나 놓자는 선에서 그치자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국의 11월 대선을 겨냥한 것이든, 엄포를 놓자는 것이든 간 반도의 안정과 북측 자체의 이익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것이다. 언젠가 한국의 유명한 철학가 도올 김용욱 선생이 김정은 위원장한테 “두 번 다시 문재인 같은 사람을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란 충고를 하는 것을 유튜브를 통해 본 기억이 난다. 이는 문재인과 김정은의 만남이 천재일우의 기회라는 말로 된다. 또한 하늘이 준 기회라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그도 그럴 것이 남측이 대통령이란 북측의 주석이나 위원장처럼 죽을 때까지 하는 것이 아니고 5년제라는 제약성이 있는 것이며 그것도 대통령이라 해서 다 문재인처럼 진정으로 평화, 협력과 통일을 염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으로 해석이 되기도 한다. 70년 전의 6.25 전쟁ㅡ 지금 와서 이 전쟁은 북측이 도발한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전쟁이란 잘못된 것이고 범죄인 것이다. 그리고 그 전쟁이 동족상잔의 내전이라고 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이렇다고 볼 때 6.25는 한반도의 통일은커녕 분단을 아주 고착시키는 역효과를 낳았으며 그것의 가장 큰 책임의 장본인은 김일성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잘못된 결과의 책임을 김일성과 북측에 몽땅 뒤집어씌우는 것 역시 그렇다. 왜냐하면 그 전쟁을 초래하게 만든 발원지가 곧바로 미국과 소련이 제멋대로 긋어 놓은 38선, 즉 국토의 분단이었던 것이다. 그럼 왜 국토가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는가? 그것은 조선민족(한민족)한테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민족이 그토록 갈망하던 광복 또한 어떻게 얻어졌던가? 그것은 스스로 우리 민족 자체의 힘과 노력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도 이념과 체제가 서로 다른 미국과 소련의 힘에 의해 38선 이남과 이북이 분단이 되었으며 작은 갈등으로부터 마찰을 빚다가 5년 뒤엔 끝내 전쟁의 시국에까지 치달아 올랐던 것이다. 남과 북의 6.25 전쟁, 절대적인 책임은 김일성과 북측의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남측이 잘한 것도 아니었다. 지난 세기 90년대 말이었던가 2000년대 초엽이었였던가 KBS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한국전쟁>에서는 6.25 전 남측에서도 <북진통일>을 부르짖었고 이른바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자>라는 등 허풍을 친 것도 사실이었다. 워낙 빈 양철통이 소리도 큰 법이다. 또한 통일정부 수립에는 노력도 하지 않고 남측만의 단독 정부를 먼저 세웠는가 하면 <빨갱이 숙청>이란 슬로건으로 숱한 민간양민들을 학살한 것도 북측으로 놓고 말하면 남침을 감행할 수 있는 빌미로 되었겠다는 분석이다. 남과 북의 6.25 전쟁,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설사 피하지 못하더라도 중도 타협만은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쟁 초기, 한국 측이 인민군한테 밀려 낙동강 이남까지 쫓겨갔을 때 이승만 정부가 이념에만 매달리지 말고 진정 민족을 생각했더라면 흰 기를 들 수도 있었고 유엔군은 항복한 정부를 위해 이 국토에서 싸울 빌미가 없을 가능성이 없었을 것이 아니었다. 반대로 한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상할 때 김일성 역시 진정 민족이라는 큰 국면을 생각했더라면 흰 기를 들지 못한다는 이유도 없었다. 투항, 항복 ㅡ 민족의 이익을 앞세우고 진정 통일국가를 원한다면 이것 역시 그렇게는 수치스로운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남과 북의 6.25 전쟁, 남북 삼천리에 폐허와 잿더미만 남았고 300만 명의 죽음과 1000만 명의 이산가족과 수많은 전쟁고아를 만든 전쟁, 하지만 이런 결고를 초래해 놓고도 남과 북 모두가 서로 전쟁의 승자라고 떠들썩하며 환호했다. 그래 누가 누구를 이겼단 말인가?! 수백만 명의 희생의 댓가를 내고도, 각 자 원했던 통일도 실현하지 못한 전쟁 ㅡ 당시 우리 민족은 이렇게 자고자대의 망상증에 걸린 민족이었다. 20살 미만까지는 필자 역시 우리 민족은 대단한 민족으로 인정했다. 머리가 총명하다는 유대민족과 게르만 민족도 따를 수 없고 꺽어질망정 휘어지지 않는다는 소화민족도 비길 수 없으며 장사에 이골이 텄다는 중화민족도 부러워 하는 민족이라고 자부해왔었다. 하긴 장끼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예술에서 끼가 많은 민족이고 스포츠나 다른 몇몇 분야에서도 강점이 많은 민족인 것만은 틀림없다. 헌데 우리 민족한테는 치명적인 열근성이 있다. 한국 건국대학에서 교수로 근무하는 필자의 한 친구는 “우리 민족은 1 대 1이라면 그 어느 민족한테도 뒤지지 않지만 10 대 10의 대결에서는 100%로 뒤진다”고 했다. 정말 적절한 비유인 것 같다. 어찌 보면 우리 민족은 싸움에 이골이 튼 것 같다. 필자가 자주 인용하지만 크게는 남과 북이 마라톤식 싸움을 계속하고 그 다음은 국회와 지역끼리 갈등이 크며 작게는 이웃끼리 친구끼리도 잘 싸운다. 술을 먹다가도 싸우고, 잘 어울리다가도 서로 등 돌리며 싸우고, 돈 때문에, 여자 때문에 싸우고 또 싸우고… 싸움이란 수치이며 비극이다. 그젯 날 6.25의 참상들을 보면 그야말로 끔찍했다. 하다면 이제 다시 전쟁이 붙으면 더 끔찍할 것으로 자기 자신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도 모르게 단명할 수도 있다는 것이 현대전의 법칙이다. 아무리 통일을 원한다지만 무력통일은 안되며 이른바 <흡수통일> 역시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이제 와서 6.25는 역사로 되었다. 누군가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은 지나간 6.25의 참상에서 과연 무엇을 깨닫고 있는가?! 6.25 사변의 70주년을 앞둔 이 시각 우리 민족의 미래를 생각하니 어쩐지 슬퍼지는 마음이다. ❉ 필자는 동포투데이 논설위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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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0-06-24
  • 고국도 모르고 모국도 모른다
    ●김희수 어느 조선족 사이트에서 “고국도 아니고 모국도 아니다”라는 어이없는 글을 보게 되였다. 아래 이 글의 내용을 요약한다. 두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알기 위해 한국의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봤다. 모국: 1. 자기가 태어난 나라. 흔히 외국에 나가있는 사람이 자기 나라를 가리킬 때에 쓰는 말. 2. 따로 떨어져 나간 나라에서 그 본국을 이르는 말. 고국: 주로 남의 나라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조상 때부터 살던 나라를 이르는 말. 사전 해석이 알려주듯이 현재 중국에서 중국 국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한국을 “모국”이라고 사용하는 건 옳지 않은 사용법이다. 한국이 일부 이민 1세의 모국이었겠지만 3대 4대에 걸치는 우리가 태어난 나라는 아니다. “고국”이라고 사용하는 건 더더욱 삼가해야 할 것 같다. 사전에 보면 “남의 나라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석을 하고 있다. 즉 한국을 “고국”이라고 하면 스스로 지금 살고 있는 나라를 “남의 나라”로 인정하는 셈이 된다.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만들고 있는 자세이다. 글은 사전해석을 근거로 조선족에게 한국은 고국도 아니고 모국도 아니라고 성급하게 판단하고 있다. 우선 바이두(百度) 백과의 해석을 보자. 모국: 문화상의 조국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다른 나라의 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조상이 세세대대로 살던 나라를 이르는 말이다. 상술한 해석에 따르면 중국조선족은 한국을 모국이라고 부를 수 있다. 화교들이 미국국적을 가졌든 유럽 국적을 가졌든 모두 중국을 자신의 조국, 모국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모국에 대한 《표준국어대사전》의 해석을 다시 보자. 모국: 주로 남의 나라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조상 때부터 살던 나라를 이르는 말. “고국도 아니고 모국도 아니다”라는 글의 작자는 이 해석을 근거로 “중국조선족은 중국국적을 가졌기에 남의 나라에 사는 사람이 아니다. 고로 조상 때부터 살던 나라 한국을 고국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데 상술한 사전해석에서 맨 앞에 “주로”란 말이 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러니까 “주로 남의 나라에 있는 사람이”지 이런 경우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중국국적을 가진 조선족도 “자신의 조상 때부터 살던 나라”인 조선이나 한국을 고국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조선이나 한국을 “모국”, “고국”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스스로 지금 살고 있는 중국을 “남의 나라”로 인정하는 셈이 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자신이 속한 민족에 대한 사랑의 표현일 뿐. 전 세계의 화교들은 자신이 어느 나라의 국적을 가졌든 간에 모두 중국을 자신의 조국, 모국이라고 부르고 자신을 염황 자손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고국도 아니고 모국도 아니다”라는 글의 작자는 조선족더러 우리의 조상이 세세대대로 살던 나라를 “모국”, ‘고국”이라고 부르지 말란다. 우리 민족더러 조상도 모르는 인간 망종으로 되라고 하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 오피니언
    • 칼럼
    2020-06-18
  • [특별기획] 장백산하 해란강반에 울려 퍼지는 '탈빈공략'의 새노래
    편집자의 말: 6월 3일, 중국 관영 매체인 신화통신은 탐방기 <장백산하의 새 노래 편 ㅡ 길림성 연변주 탈빈공략 관찰(长白山下唱新篇——吉林延边州脱贫攻坚观察)>를 큰 편폭으로 할애하여 실었다. 연변 조선족의 <탈빈공략> - 이는 오래 전부터 꿈꿔왔던 프로젝트였지만 잘 안되던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이다. 우선 환경적으로 그닥 부유하지 못한 북한이나 러시아와 인접되어 있다. 이런 나라들과의 무역에서는 상품가치 등가교환에서만 이익을 볼 뿐이지 큰 도움을 받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상 조선족에 한해서만은 큰 중시를 돌리지 않는다고 해도 큰 과언이 아니었다. 조선족이 <당의 말>을 너무나도 잘 들으니 말이다. 그제 날의 항일전쟁과 해방전쟁 시기에는 그 어느 민족에 비해도 공산당을 위해 목숨을 잘 바치는 민족이 조선족이었고 신 중국이 탄생한 후에도 <대약진>, <인민공사> 등 당의 총 노선을 가장 잘 관철한 민족이 조선족이었으며 <문화혁명> 시기에는 또 <계급투쟁>에 제일 앞장선 민족도 우리 조선족이었다. 어디 그 뿐이랴. 나라에 공량을 바칠 때에는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라도 그 임무를 초과 완성했었고 나라에서 <계획생육정책>을 제정하자 어느 여성이 임신했다고 하면 쫓아다니면서까지 낙태시키군 하던 우리 조선족이었다. 그래서 아주 영예롭게도 연변주는 거의 해마다 전국의 <모범자치주>로 되기도 했다. 그럼 아주 잘 살았는가? 글쎄다. 굶어죽었다는 사람이 없었으니 <번영하는 우리 연변>, <살기 좋은 조국 변강>이란 어구들이 기사를 통해, 노래를 통해 많이 나가기도 했다. 이렇게 <당의 말>을 너무나도 잘 들으니 나라에서 특별히 달래줄 필요도 없었을 것임은 불 보듯 번연했다. 연변에 대한 보도기사ㅡ 이전에 우린 그걸 잘 믿지를 아니했다. 수분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어느 아무깨 기자가 뭘 좀 받아먹고 허풍을 떨었구나 하고 말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 간은 보도기사를 믿어서가 아니라 연변 농촌 사람들의 말에서 이전에 비해 확실히 좋아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농촌의 주택건설이며 도로건설이며가 확실히 잘 되어있고 국가에서 연변농촌에도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나마 기쁘고 좋은 일이며 앞으로도 바라마지 않는 일이다. 현재 연변 조선족들한테는 산재되어 있는 문제들이 많다. 인구의 마이너스 성장 문제, 이로 인한 학교들의 폐교되는 문제, 노총각들이 장가가지 못하는 문제와 조선족들이 개변해야 될 음주문화 문제 등으로 수두룩하다. 단꺼번에 다 해결할 사항들도 아니다. 그럼 오늘 신화통신의 탐방기를 실으면서 연변의 애로사항들이 하나씩 풀리면서 더 좋은 앞날이 다가오기를 기대한다. ▲화룡시 <진달래> 민속촌 전경ⓒ신화통신 아래의 글은 신화통신의 탐방기 <장백산하 새 노래편 ㅡ 길림성 연변주 탈빈공략 관찰>이다. 봄 파종철이 지나자 장백산하 해란강반에는 나뭇잎들이 푸르고 꽃들이 만개하면서 생기로 차 넘친다. 50여년 전, 연변에서 태어난 노래 <붉은 해 변강을 비추네(红太阳照边疆)>는 전국인민들로 하여금 변강건설에 뛰어든 연변의 각민족 아들딸들의 앙양된 투지에서 감동을 받게 했다. 당의 18차 대표대회 이래 이곳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각민족 인민들은 지속적으로 분투하여 오늘날 모든 <빈곤현(贫困县)>들이 <빈곤모자>를 벗어던졌다. 전통 맛 여전하나 삶의 나날 날로 풍족해져 화룡시 동성진 동광촌은 포장이 된 마을길과 집집마다의 울안이 매우 깨끗했다. 조선족촌 박춘자 여성은 주방에서 작으마한 밥상을 들고 나왔다. 상위에는 배추김치, 된장과 소고기, 명태 등이 깨끗한 접시에 담겨져 있었다. "우리의 생활은 아직도 된장을 떠날 수 없어요. 하지만 삶의 나날은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났죠. 모든 것이 날로 풍족해지고 있는거죠." 박춘자 여성의 기억에 따르면 연변 조선족의 노동과 생활은 많은 변천을 겪어 왔다. 그것은 현재 연변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사진에서도 보아낼 수 있다. 가대기에 소를 메워 밭갈이를 하고 바지가랭이를 걷어 올리고 모내기를 하고 또한 낫을 들고 벼 가을을 하고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야말로 이 땅에 첫 보습 날을 박던 그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삶의 희노애락은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진달래 민속촌에서 촌민들이 휴식의 한때를 즐기는 장면ⓒ신화통신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인구는 214만명, 이 중 조선족은 36.3%를 차지하며 길림성 2대 특별 빈곤지구 중 하나였다. 연변의 8개 현,시 중 4개가 국가 부축 빈곤현이었으며 2012년 말에는 빈곤 발생율이 29%에 달하였다. 연변의 변화는 빈곤부축사업의 항목의 겨냥조치로부터 추진되었다. 왕청현 조원 소목이산업원(桃源小木耳产业园)의 넓고 밝은 직장 내에 들어서면 로봇이 물건을 나르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왕청현은 장백산 임구에 위치해 있어 역사적으로 <흑목이버섯 천담현(黑木耳千担县)>이란 명칭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날에는 주로 수 작업식 생산으로 이뤄졌기에 생산량이 적고 질 보장이 잘 되지 않았기에 훌륭한 자원으로 훌륭한 수입을 바꾸어 오지 못하였다. 최근년래 왕청현에서는 종식표준화 시범기지(种植标准化示范基地)를 하나하나씩 건립, 도합 45개의 기지로 점차 국내 흑목이버섯 고가시장으로 만들었으며 목이버섯을 상품화하여 북경, 상해와 광주에까지 판매, 촌민들의 연 평균 수입이 3000-4000위안씩 증가되게 하였다. 이 외 용정시 동성용진 용성촌에서는 당지 용두기업으로부터 빈곤부축항목의 혜택으로 촌민 유경의가 사육하는 연변황소 고기가 호텔에 납품, 황소고기 매 킬로그램 당 150위안에 달했고 안도현 합신향에서는 <삼림황금>으로 불리는 상황버섯이 온도가 맞춤한 비닐하우스 안에서 자라고 있었다. 이 상황버섯은 킬로그램당 600위안 내지 700위안으로 그 비닐하우스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용정시 삼합진 천불지산(天佛指山)은 해마다 송이 따는 계절만 되면 일본과 한국으로부터 많은 상인들이 찾아와 값은 크게 따지지 않고 적극 주문하고 있단다… ▲화룡시 남평진 유동촌의 조선족 주택들ⓒ신화통신 다시 화룡시 동성진 동광촌의 박춘자 여성한테로 돌아온다. 충분한 해빛을 받아 이슬 머금고 자라는 농가원의 야채들, 박춘자 여성은 문턱에 앉아 마당 내 비닐하우스에서 자라는 매 한포기의 야채를 바라보면서 손가락 꼽으며 뭔가를 계산하고 있는 듯 했다. 50여년 간 노래소리 울리고 호매한 발걸음은 계속돼 연변 시인 한윤호가 노랫말을 만들고 연변적 작곡가 김봉호가 선율을 만든 <붉은해 변강을 비추네>란 노래는 50여 년간 불리워 왔다. 그리고 이 노래속의 <강물을 끌어올려 산에 올리네>란 놀라운 일은 오늘날 화룡시 숭선진 상천촌에서 현실로 되고 있었다. 당년에 이곳의 촌민들은 <사이펀(倒虹吸)> 원리를 이용하여 두만강의 물을 60미터 높이에 있는 산위에 끌어올려 그 곳을 비옥한 논으로 되게 했다. 상천촌 당지부서기 박동섭에 따르면 지금 상천촌의 입쌀은 브랜드로 되어 높은 가격으로 내지에 팔리고 있다. 하지만 이 촌에서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전자상거래, 된장 가공과 향촌관광업의 발전을 탐색하고 있는 중이었다. ▲도문시 석현진 합흠 농민전업 합작사 농민들이 비닐하우스 안에서 작업하는 장면ⓒ신화통신 화룡시 남평진 유동촌에 가보면 85후의 청년 김호가 대졸 후 주동적으로 귀농, 촌민들을 이끌고 오미자 재배, 민속관광지 건설 등을 추진, 촌민들을 위해 농구장과 게이트볼 경기장(门球场)을 앉혔으며 집집마다 수세식 변기를 갖춘 화장실을 갖추게 했고 노인들로 하여금 매일 점심 때마다 노인들한테 영양식을 무료로 제공하군 했다. 그리고 왕청현 천교령진 천평촌에서는 뭔가를 해야겠다고 작심한 촌 당지부서기 윤학의는 자기의 아내를 촌으로 <초대>했다. 부부가 손잡고 탈빈 목표를 이룩하자는 심산이었다… 변강의 한 모퉁이에 위치해 있었지만 연변의 빈곤탈퇴 사업은 고군작전이 아니었다. 2016년 10월, 절강성의 녕파와 연변은 동서부 빈곤부축 협력을 갖기로 하고 22개 기업이 육속 연변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논공유(共享稻田)>란 명목으로 빈곤부축 항목을 제정, 연속 2년간 화룡시 1.4만 뙈기의 논에서 생산된 입쌀을 도맡아 인수하는 것으로 2000여명 빈곤인구의 수입증장에 크게 이바지했다. 2019년 4월, 연변의 화룡시, 용정시와 도문시가 <빈곤모자>를 벗었고 올 4월에는 안도현과 왕청현이 <빈곤모자>를 벗으면서 연변의 모든 시현들이 빈곤탈퇴에 성공, 2016년 이래 전 주적으로 304개의 빈곤촌이 <빈곤행열>에서 나왔고 2.9만호, 4.9만 명에 달하는 인구가 빈곤에서 벗어나면서 연변의 각민족 인민들은 새로운 출발을 할 기점에 설 수 있게 되었다. ▲남평진 유동촌 촌민이 집에서 벽에 장식품을 걸어놓는 장면ⓒ신화통신 피어난 꽃 특별히 붉고 <실크로드(丝路)> 천하로 통한다 빙설중에도 꽃은 피어나고 산비탈의 진달래는 더더욱 아름다워라. 이는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조선족 인민들의 무한한 추구를 뜻한다. 용-포 고속도로(용정으로부터 돈화시 대포자하진에 이르는 고속도로)의 한 중간 대교 아래에는 백년 역사를 갖고 있는 조선족 마을 ㅡ <진달래> 민속촌이 있다. 현재 이 마을은 <연변속의 민속촌>보다는 <중국속의 민속촌>으로 더욱 통한다. 이 마을에서는 떡볶이, 냉면과 장고춤, 가야금 등 조선족 특색 관광상품으로 지난해만 해도 국내외 관광객 40여만 명을 유치했다. 이 마을의 촌민 이월순 여성은 원래의 주택을 개조해 민박을 차렸는데 이로부터 나오는 수입은 그야말로 쏠쏠했다. “반평생 농사만 해오다가 오늘 와서 사장님(老板)으로 불리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죠.” ▲화룡시 숭선진 상천촌 촌민이 밭에서 트랙터로 작업하고 있는 장면ⓒ신화통신 화룡시에는 일명 <진달래실크로드(金达莱丝路)>란 전자상거래 플랫폼이 있으며 실체의 가게에는 상황버섯, 꿀, 목이버섯 등을 진열, 모두 조선족 특색의 <포장>을 하였다. 예하면 입쌀은 월병처럼 조선족 특색의 선물세트로 포장했고 쿠션(抱枕), 벼짚 수공업품 등에도 조선족 특색의 글발이 아주 선명하게 새겨 넣었다. 이는 북경에서 온 어느 한 작은 젊은 지원팀에서 모색해 낸 아이디어로 이들은 당지의 빈곤부축 특산으로 조선족 특색의 브랜드를 창출, 전자거래의 플랫폼을 통해 전국에 판매했다. 이렇게 하찮고 고생스럽게만 보이던 것이 빈곤부축의 아름다운 산업과 창업의 낙원으로 되었던 것이다. 연변에는 <진달래 실크로드>만 있은 것이 아니었다. 지난 5월 15일, 220개의 컨터이너에 옥수수를 실은 <바다실크로드 1호>가 청도항에 입항했다. 이는 <훈춘-자르비노(러시아)-청도> 항선의 첫 항행으로 <훈춘-자르비노-주산> 항선이 개통된 후에 있은 또 한 갈래의 국내 무역화물이 국경을 벗어나 운송하는 항선이었다. <항구를 빌어 바다로 나가는 새로운 아이디어>로 일찍 개방발전의 <제한적 구역>에 있던 연변으로 놓고 볼 때 이는 대해로 향하는 새로운 발걸음임에 틀림없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6-05
  • 천마는 빛을 가른다.
    ● 김경화(재중동포작가) 소천수편 오늘 아침, 나는 강가에 세수하러 나갔다가 녀자 하나를 만났슴다. 보라색치마에 기인 생머리의 날씬한 녀자의 뒤모습이라니. 녀자는 아리도록 하아얀 손으로 눈처럼 하얀 수건을 강물에 헹구는것이였슴다. 순간, 나는 마술에 걸린듯 선자리에서 한치도 움직일 수 없었슴다. 녀자, 나리꽃처럼 싱싱한, 꿈에서나 그리던듯한 그런 녀자가 내 앞에 생생히 살아 숨쉬는 것이였슴다. 꿈인가? 환각인가? 그때, 녀자가 돌아섰슴다. 나는 그만 숨이 따악 멎는 것만 같았슴다. 하이얀 얼굴에 가느다란 눈, 작은 얼굴에 오목조목 반듯한 이목구비의 녀자였슴다. 나이는 어림잡아 스물서넛? 까만 블라우스에 보라색치마의 녀자는 허리가 개미처럼 가늘었슴다. 《천수오빠 맞죠?》 어데서 흘러나왔을가. 맑은 샘물이 바위우에 잔잔히 부서지는듯한 맑고 명쾌한 구을음. 어데서 본듯한 얼굴의 녀자였슴다. 혹시 나는 꿈에 이 녀자를 봤을지도 모르겠슴다. 《저 정혜예요.》 허벅지를 가만히 꼬집었슴다. 아파났슴다. 《야 너, 정혜구나. 야 너 언제 이렇게 처녀가 다 된거니? 참 오래만이구나. 사범학교에 붙었다고 니네집에서 초두부하던 날 보고는 아마 처음이지? 야...》 나는 과장되게 야 하고 소리지르며 정혜의 어깨를 툭 쳤슴다. 두서없이 내뱉은 인사말이 나 스스로도 어이없어서 그랬는지두 모르겠슴다. 정혜의 어깨가 꿈틀했고, 나는 손을 오므려 주먹을 쥐였슴다. 《네. 4년만에 왔어요. 그럼 나중에 또 보죠.》 손을 마주 비비며 정혜가 고개를 까땍했슴다. 그래서 보니, 시린 강물에 정혜의 손은 빠알갛게 되여있지 않겠슴까. 《어. 그래. 나중에 보자.》 나는 아름답고 싱싱한 녀체가 내 앞을 지나쳐서 저멀리 점점이 사라질때까지 넋을 놓고 있었슴다. 가슴이, 웬지 까닥없이 가슴이 부풀어오르고, 꿀을 먹은듯 마음 한구석이 달착지근해났슴다. 벌렁벌렁 뜨거운 가마솥안에서 끓고있는 콩비지처럼 가슴이 작은 부품으로 가득 차 오르는 이 설레임, 먼가 달라질것 같고 좋은 일어날것 같은 기분, 얼마만임까 나는 괜히 신이 나서 푸덕푸덕 세수도 여느때보다 걸싸게 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까닥없이 돌멩이도 툭툭 차면서 꼭 철없는 개구쟁이가 되였슴다. 그러면서 아까 어깨를 너무 심하게 치지 않았나 하는 걱정도 했슴다. 정혜가 아프지 않았을가? 에익, 우둔한넘. 청산리 여기는 녀자가 금싸래기보다 더 귀한 존재임다. 개혁이요 개방이요 하는 바람이 시골에까지 불더니 녀자들이 잘 나가는 세상이 갑자기 돼버렸슴다. 누가 먼저 선코를 뗐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 둘, 떠나가는가싶더니 이제 마을에 젊은 녀자란 찾아볼 수 없슴다. 마을에 남은건 할머니들이나 나이 지숙한 아줌마들, 그리고 부우연 떠꺼머리총각들과 안해를 바깥세상에 내보낸 새시대 홀애비들뿐임다. 마을 어데를 가나 온통 가고 간다는 이야기들뿐임다. 누구도 이제 어데로 간다오. 우리도 빨리 어데 가야겠는데. 어데로 가려구? 글세 모르지. 가긴 아무데나 가야겠는데. 글세 어데루 갈지? 한숨과 신세타령뿐임다. 누구는 어떻게 목돈 벌고 누구는 한국에, 일본에 가서 몇년있더니 몇십만원 쥐고 와서 시내서 식당을 꾸리고 경리가 되고 그런 소리만 여기저기 란무함다. 이 황량한 시골, 그러나 나의 꿈은 결코 황량하지 않슴다. 나의 별명이 무엇임까. 백번 넘어지면 백한번 일어선다는 불사조 오뚜기 천수가 아님까? 여섯살때인가. 엄마는 마을로 다니는 트럭운전수랑 눈이 맞아서 야밤도주를 했슴다. 얼굴도, 뒤모습도 아무것도 기억에 없슴다. 냄새, 알싸한 살구씨같은 냄새만 코끝에 아직 쟁쟁하게 매달려있을뿐임다. 청산리 소만국의 아들로 태여난 죄로 하고싶은 공부도 못하고 초중을 중퇴하고 여기 청산리에서 소궁둥이를 두드리게 된 나임다. 그렇지만 나는 여느 농촌총각들과 다름다. 힘들어도 슬퍼도 묵묵히 혼자서 울고, 혼자서 모든걸 이겨내야 했던 나는 기인 어둠의 턴넬같은 세월속에 순금처럼 단단해진것임다. 나한테 이제 더 큰 시련이 무엇이겠슴까. 남은건 오직 오기뿐임다. 죽지 않으면 살기라는 악에 가까운 오기, 그것이 있는한 나는 결코 씩씩하게 앞을 향해 달리기만 하는 소천수일것임다. 명마는 앞만 보고 달린다는 말도 있지 않씀까? 작가, 작가가 될것임다. 이 시대의 별같은 존재로, 혜성처럼 반짝 떠올라서 적어도 연변문단을 놀래우고, 조선족문단을 뒤흔들것임다. 그리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녀자와 사랑할것임다. 8년째 제대로 된 결혼식한번없고, 아이울음소리 없는, 전 주 산아제한모범촌인 청산리에 획기적인 사변을 일으킬것임다. 웃마을 강아무개처럼 물건너녀자나 들이지는 않을것임다. 중간마을 최아무개처럼 아이 딸린 째보과부를 들이지도 않을것임다. 코방귀를 힝 뀌면서 연길로 간 미숙이나, 한국에 시집간 혜자나, 산동으로 간 금자같은 그런 머리에 든거 없고, 허영심만 잔뜩 차서 청산리총각들은 사람취급도 안하는 녀자애들이 눈자위가 휙휙 뒤집힐만한, 오뉴월 오이처럼 쭉 빠지고, 햇감자처럼 하얗고 부드러운 녀자를 한명 찾아서 이 천수의 녀자로 만들것임다. 작가가 되고, 그리고 이름을 날리고, 그렇게 되면 어느 모모한 잡지사에서 편집이나 기자로 초빙해줄지도 모르는것이 아님까? 동팔이 나하고는 짜개바지친구로 어릴때부터 단짝이였던 녀석임다. 하루살이, 오늘 하루 배불리 먹고 즐거우면 땡이라는것을 무슨 신조처럼 수호하고 사는 녀석임다. 녀석은 허구헌날 추렴이고 술임다. 다른건 제쳐놓고 기름개구리가 금값인 봄에도 얼음장 끄고 몇마리 붙잡았다 싶으면 그 길로 아궁이에 불을 때서 개구리탕을 하고 봉지술을 외상으로 가져다가 친구넘들을 불러모으는것임다. 늙은 엄마가 전기세 낼 돈이 없어 십원 꾸러 온 동네를 도는판인데 녀석은 그게 목구녕으로 잘도 넘어가나봄다. 아니꼬바서 녀석하구의 술자리는 절대 사양임다. 맨정신일때 만나면 따끔히 핀잔도 주지만 녀석은 머라는지 암까. 《야, 장가를 가거나 잘살기는 백번도 틀린 우리가 아니냐. 넌 뭘 믿고 그리 새파랗게 기가 살아있냐. 미친넘. 너나 나나 빤한 인생 아니냐구. 우리가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무슨 재미에 산다더냐.》 고래고래 소리지르는것임다. 《누가 너랑 같냐? 지랄하고.》 나는 녀석을 한대 패줄 조짐으로 눈을 부릅뜸다. 《어휴. 그래 제발 출세해다오. 친구야.》 녀석의 푸념질임다. 눈 크게 뜨고 기대해라 녀석 이제 이 소천수는 작가가 돼고 그리구 청산리에서 제일 이쁜 윤정혜의 팔을 끼고 활보할것이니. 《째애액, 꽤애액, 긁긁,》 나의 치륜같은 인생상념에 먹물을 뿌리고 비바람을 때리는 소리. 《망할넘의것,》 나는 마구 갈겨쓴 노트장을 손으로 한번 쓰윽 문지르고는 덮었슴다. 들미나무무늬로 된것인지를 손으로 문질러봐야 알수 있을정도로 카아맣게 그을은 옷장의 왼쪽구석에 노트를 깊숙히 집어넣고 부엌으로 가서 솥뚜껑을 열어젖혔슴다. 시큼털털한 돼지죽냄새가 코를 푸욱 찌름다. 《꿀꿀꿀 앙앙》 점심때가 훌쩍 지난때까지 배를 쫄쫄 굶다가 급기야 구유를 딛고 올라서서 괴성을 지르던 돼지들은 한바게쯔 골똑 담아서 훌쩍 쏟아주는 먹이에 너무 감격해서 이상한 신음까지 발하며 마구 탐닉함다. 늦가을날씨는 제법 쌀쌀함다. 할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로인독보조에 무슨 활동이 있다고 가시고, 지금은 이 푸른 10월의 뜨락에, 나 홀로 서있슴다. 그래, 잘 크거라. 혹시 니넘들이 이제 내 색시감한테 끼워줄 반지가 될지도 모를일이니. 갑자기, 마음속에 쓸쓸함이 썰물처럼 밀려옴다. 작가가 되겠다고 이를 앙다문지도, 2년이 훌쩍 넘었슴다. 여기저기 보내놓은 원고들은 전부가 물세태에 밀려간 제방뚝처럼 묘연함다. 쓸쓸함다, 외롭슴다. 실의감이 온몸을 엄습함다. 작가가, 작가가 아니면 어떻슴까. 그냥 신문한구석에 손바닥만하게 소천수 라는 내 이름 석자가 활자로 찍혀 나오기만 해도 좋겠슴다. 그리고, 쭉쭉빵빵이 아니면, 어떠슴까. 그냥 우둥퉁하고 거무틱틱해도 좋으니 제발 녀자를 하나 달라고 하나님께 여쭙고싶은 심정임다. 도시가 아니면 어떻슴까. 이 청산리에서 함께 봄이면 나물도 뜯고 겨울이면 낫자루부업도 같이 하고 그러면서 알콩달콩 살아갈 그런 녀자만 있으면, 정말 세상이 살맛 날것 같슴다. 자가용승용차에 양복입은 인생만 인생이겠슴까? 덜렁거리는 소수레에 나 하나만 사랑하는 안해를 싣고 이 풍요로운 청산리를 누비는 재미도 쏠쏠할게 아님까. 그러면, 더는 이 마음이 가을을 끝낸 저 벌판처럼 허전하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임다. 저 지겨운 소똥냄새도 싱그러울것 같슴다. 나에게도 녀자가 있었슴다. 천수야, 하고 눈웃음치며 옆구리를 쿡 찌르던 녀자, 작은 키를 감추느라 하이힐을 신고, 엉뎅이가 커서 걸을때면 우스꽝스럽게 뒤뚱거리던 녀자가 있었슴다. 황금자, 황금자가 있었슴다. 나보다 한살 어리고, 서너집 사이두고 살던 황금자가 있었슴다. 함께 소학교를 다니고, 중학교를 다니고, 함께 청산리에 돌아와서 소궁둥이를 따라붙어야 했던 황금자가 있었슴다. 그러나, 어느날부터인가, 내앞에서 금자는 자주 한숨을 쉬였고 신경질적으로 호미를 쥐여뿌리군 하였슴다. 나는 그런 금자를 새벽이슬처럼 소중히 사랑했었음다. 돼지풀도 뜯어다가 마당에 놓아주고, 버들치도 잡아다가 끓여먹으라고 주고, 개암이며 잣도 뜯어다주었슴다. 그러나, 금자는 간간히 시내에 드나들면서 싸구려화장품도 사다가 찍어바르고 로천시장에서 파는, 날나리 싸구려치마도 사입고 하더니, 어느날 쪽지 한장 달랑 남기고 증발해버렸슴다. 천수야, 넌 참 좋은 남자야. 그런데 난 청산리가 너무 싫어. 지겨워. 기음매는것도 지겹고 소울음소리도 지겹고 모든게 진저리나. 나 연길로 간다. 친척언니가 연길 어느 식당에서 출근하는데 복무원자리는 많으니 오라구 편지가 왔구나. 미안해, 천수야. 칙칙한 흙냄새뿐인 이 청산리에서 썩고싶지는 않구나. 행복해라. 안녕. 나는 으드득, 소리를 내며 쪽지를 갈기갈기 찢어서 방구석에 버렸다가 주어들고 앞내가로 달려가서 강물에 쓸쓸히 쓸쓸히 날렸슴다. 죽여버릴, 순이도 가고, 봉자도 가고 다 떠나가도 너만은 내곁에 남아주리라 했는데. 아니, 어쩌면 니가 이렇게 떠나갈것임을 나는 알고있었을지도 모른다. 알고있었기에 남아주리라 더욱 굳게 믿으라고 자신한테 강요한것인지도. 그리고, 그날저녁 나는 아버지가 마시는 배갈 한병을 그대로 굽내고 방구석에 뻗어버렸슴다. 우웩, 우엑, 쓰디쓴 열물이 올라왔다. 눈을 뜰수가 없었슴다. 그날밤, 할머니는 눈굽을 찍으며 밤이 가고 아침이 오도록 손자의 구토물을 닦아내야 했음다. 그리고, 그날 그 이후, 나는 황금자를 그 밤의 쓰디쓴 열물과 함께 깨긋이 씻어버렸슴다. 첫사랑이라고 첫사랑일수도 있는 그런 아릿한 마음의 추억을 어찌 그리 쉽사리 잊을수 있냐고 하겠지만 나는 그게 아님다. 지나간 감상에 젖어서 연연하는건 나의 인생관이 용납을 못하는 부분임다. 그렇게 억지로 망각의 강에 사형을 주고 처넣었던 황금자를 나는 기분좋게 떠올릴수 있었으니. 아침에 만난 정혜때문이였슴다. 황금자가 무엇이겠슴까. 저 한마리의 비둘기같이 상큼한 정혜에 비하면 그야말로 발가락틈새의 무엇에도 못미칠 미물이 아님까. 정혜는 마을에 눌러있었고 얼마후에는 책을 끼고 마을에 있는 소학교로 출퇴근하였슴다. 거의 페교직전인 학교라 교원이 달랑 두명으로 겨우 버티고있던차라 교장선생이 일본가기직전까지만이라도 애들을 가르쳐줄수 없겠냐고 정혜한테 제의를 해왔다는 소식도 함께 듣게 되였슴다. 정혜. 아주 어린 아이때부터 공부도 잘하고 얼마나 야무졌는 모름다. 박녀인과 일밖에 모르기로 소문난 아버지가 그런 정혜를 극진히 뒤바라지했고 화룡에서 초중을 다니더니 어느날 정혜는 마을의 자랑으로 사범학교에 철썩 붙었지 않슴까. 이제 4년세월을 거쳐서 다시 나타난 정혜는 완전 하야말쑥하고 쭈욱 빠진 도시아가씨가 된것임다. 괜히 꿀을 먹은듯 마음이 달착지근해남다. 농사일도 열심히 하고, 농한기에 채석장에 가서 돌도 캐겠슴다. 때갈나는 멋진 남자의 모습을 정혜한테 보여주어야겠슴다. 그날저녁, 내 일기장에 녀자이름 석자가 박혔슴다. 윤정혜 윤정혜편 가을, 하늘이 훌쩍 저만큼 높아진 계절, 창문밖으로 지나가는 바람이 제법 차갑게 얼굴을 스칩니다. 때국이 줄줄 흐르고 학년도 나이도 맞지 않는 애들, 교실벽은 언제 회칠한지 모를정도로 거무틱틱해서 더욱 마음이 산란합니다. 대학생이 길 가다가 벼락맞기보다 더 힘든 이 산골에서 사범학교로 갈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했던가요. 나는 오직 폼나는 교원이 되여 또 한번 청산리의 자랑거리가 될 야망으로 부풀었습니다. 그러나 사범학교문에 발을 디디던 그날, 나는 내가 내 머리우에 보이는 하늘만 파란줄 알았던 시골뜨기 개구리였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내가 가지고있던 옷중에서 제일 근사한 옷을 정성껏 다림질해입고 온 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가슴설레며 깃을 세운 다림질마저도 후회해야 했습니다. 꼿꼿이 깃을 세운 하얀 셔츠와 칼날같이 주름잡은 깜장바지가 나의 촌냄새를 더해준 격이 되였으니 말입니다. 등교 첫날, 그렇게 다림질을 반질반질하게 한 셔츠를 목단추까지 꼭꼭 잠그고 나타난 애는 나 하나뿐이였습니다. 눈물이 자칫 보일가봐 신발코를 잔뜩 세워 애매한 땅바닥만 문지르던 그 소녀를 나는 아직 잊지 못합니다. 공부를 잘하자, 그것만이 내가 할수 있는 최선이다. 그러나 공부에 대한 우월감은 수업시간외에는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 청산을 떠나 화룡에서 3년동안 중학교을 다니면서 그래도 어중간히 도시물을 먹었다고 생각했던 나였는데. 그게 아니였습니다. 나는 촌뜨기녀자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였습니다. 기숙사에서, 식당에서, 수업없는 시간에 나는 도처에서 작아지고 초라해져야 했습니다. 겉보기에는 그냥 꾸미지않은듯한 차림같으면서도 묘하게 풍기는 귀티같은것, 그런것땜에 당당해보이고 자신감으로 환해보이는것들. 나는 그런것들앞에 심하게 초라해지는 렬등감때문에 코를 높이 세우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런 렬등감은 점점 추워지는 날씨와 더불어 더욱 심해져만 갔습니다. 돈, 돈이다. 돈이 사람을 빛나게 하고 당당하게 하는것임을 알았습니다. 거의 11월이 다가도록 홑잠바를 입고 새파랗게 얼어다니면서 나는 돈의 중요성을 뼈속까지 감지하고있었던것입니다. 돈에 대한 절박감이 이렇게 사무친것은 처음이였죠. 성보옷상가, 서시장에서 싸구려옷을 살가 했지만 그 싸구려옷을 입고 애들앞에 나설바에는 차라리 홑잠바로 얼어다니는게 나을것 같은 내 자존심. 《이 옷 입어봐도 돼요?》 장사군아줌마는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마지못해 옷을 내주었습니다. 니 주제에 이런 비싼옷을 살수나 있겠니 하는 야유, 나는 알듯말듯한 아줌마의 웃음을 야유라고 생각했고 거의 오기로 돈을 꺼내뿌렸습니다. 기숙사에 오니 애들이 난리입니다. 《어머, 너 웬일이니. 셔츠에 잠바만 입고 다니더니, 니네집 농촌에 있다해서 어려운줄 알았더니 아닌가보네? 이거 브랜드인데. 와 이쁘다.》 《우리 아버지가 청산에서는 좀 이름있어. 목재장사를 하거든, 내가 워낙에 소박해서 엄마한테 핀잔만 듣지 머. 여기 올때 핸드폰 잃어버린거 아직 못샀는데 아까 보니 마땅한게 없어서 안샀다.》 《오, 너 그래서 폰이 없구나. 글세 요즘 폰없는 사람이 어디있나했지.》 나는 그날저녁, 처음으로 그애들과 같은 선우에 선 자호감을 느낄수 있었습다. 얼마 안지나 내 손에 핸드폰이 쥐여졌고 결국 그렇게 반년치 생활비를 한달반도 안되여 모두 써버리고말았습니다. 좋은 옷을 입고 애들과 어깨를 겨누며 어울려 다니고 핸드폰을 들고 다니고 그러나 마음은 한없이 초조했습니다. 돈은 바닥나고, 집에다가 더이상 손을 내밀수도 없고 손을 내밀어봐야 농촌에 이 겨울에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가정교사를 할가고도 했지만 애들앞에 아버지가 목재장사를 해서 부자라고 땅땅 소리친 내가 어찌 그것을 한단말입니까. 설사 한다해도 한시간에 십원되는 과외비로 무엇을 할수 있겠습니까. 두 얼굴, 두 얼굴을 가지고 살았던 4년입니다. 그 4년동안 내가 어떻게 열심히 공부하는 시골부자집딸과 짙은 화장과 용염한 웃음으로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삼배동아가씨의 두 얼굴로 살아왔는지 누구도 모를것입니다. 그것은 아마 무덤까지 갖고가야할 나만의 엄청난 비밀일것입니다. 청산리사람들에게 나는 공부잘하고 착하고 순수한 천사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찌 나의 하얀 피부에 슴배인 고급로션의 출처를 알것이며 나의 몸을 감싸고있는 브랜드의 아픔을 알것인지요. 졸업을 했지만 요즘 사범학교 졸업장들고 어데로 가겠습니까. 친구들은 더러는 든든한 뒤심덕분에 모두의 선망의 눈길을 받으며 교원이거나 방송국이거나에 취직을 했고, 더러는 연해도시로, 더러는 류학준비로 드바빴습니다. 그러나 나는 뒤문도 없지만 4년동안의 아픔으로 달구어진 이 도시에는 더이상 머물고싶지 않기도 하였습니다. 멀리멀리 해외로 류학을 가서 좀 더 나은 삶을 살고싶었습니다. 그러나 만만치 않은 류학비용을 농사일하면서 내 뒤바라지를 하느라고 집에 땡전한푼없이 된 부모님한테 내놓으라고 할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졸업만하면 동생의 뒤치닥거리까지 내가 다 맡을거라고 큰소리치던 나입니다. 나는 어쩔수없는 길 하나를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일본으로 류학을 떠나는 민정이한테 일본에 가게 되면 돈깨나 있는 남자를 소개해라고 부탁했습니다. 부모님이나 이 시골사람들이 사범학교를 무슨 하늘에 별마냥 크게 보지 요즘 그거 가지고 어데다 견주려는 그 자체가 얼마나 우둔하고 무모한것인지를 세상은 압니다. 마을사람들이나 부모들한테는 일본쪽 대학교에서 류학으로 모든 학비를 면제하고 데려가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부모님은 기뻐서 어쩔줄 몰라하고 마을사람들도 모두 부러워합니다. 민정이가 일본에 가서 정착하고 남자를 소개해오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듯하니 그동안 집에서 조용히 쉴참으로 고향에 온 나입니다. 솔직히 그동안 몸과 마음이 너무 지친 나입니다. 교장선생님이 애들을 가르쳐달라고 찾아왔습니다. 어차피 할일도 없는 터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교원이 하고싶었지 않았던가요? 나는 흔쾌히 대답했고 지금은 그렇게 되여 애들을 가르치고있습니다. 세수하러 나가는 길이나 출퇴근길에 항상 부딪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천수오빠. 새벽안개를 헤가르며 이백여리길을 달려 집으로 온 그 아침, 짐을 풀고, 강가에 세수하러 나갔다가 돌아서던 그때, 나는 우연찮게 천수오빠를 보게 된것입니다. 오빠는 헤벌쩍 나를 향해 웃고있었습니다. 참 불쌍하고 괜찮은 남자죠. 엄마도 없고 할머니와 아버지손에서 자랐다지만 이 시골에서도 기를 잃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남자입니다. 어느때는 금자언니와 쉬쉬한 소문도 있더니, 금자언니는 연길에서 노래방아가씨로 나간다던데 오빠는 그걸 알고있는것일가요? 어느새 떠꺼머리총각으로 부옇게 된 오빠를 보고 4년전과는 많이 겉늙고 초라해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새, 오빠가 많이 늙은걸가요. 아니면 내 눈이 변한걸가요. 천수오빠뿐아니라, 마을에 오빠네또래들을 둘러봐도 하나같이 구질구질한 농부의 모습입니다. 하긴 앞뒤가 산으로 꽉 막힌 이 골안, 젊은 녀자라고는 찾아볼수 없으니 그들에게 무슨 활력이 있겠습니까. 어제저녁에 천수오빠는 책 빌러 왔습니다. 잡히는대로 소설책 한권을 건네주니 오빠는 두통수를 긁적긁적하며 나가버립니다. 글을 쓴다고, 소설가지망생이라고 합니다. 혹시 오빠가 정말 소설을 써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초중중퇴한 청산리남자라고 소설가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글 한편이 술 한끼값도 안되는 이 시대임을 오빠는 과연 알고있는것일가요? 한때, 나도 작가가 되고싶었던 아름다운 소녀의 치기다분한 꿈이 있었습니다. 백일장에서 무슨 무슨 상이며도 안아왔고, 학교의 벽보란에 자주 내가 쓴 작문이 나붙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중학교시절부터 나에게 글짓기를 가르치던 h선생님, 서른다섯에 겨우 장가를 들어서 코딱지만한 세집에서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겨울이 오도록 새물나는 옷 한벌 안해에게 사주지 못하는 그 선생님을 보았을때 나는 까닭없는 회의를 느꼈습니다. 어느 양고기꼬치집에서 밤중까지 주방일을 하는 안해의 월급을 쪼개는 h선생님, 그 흔한 금반지 하나 못사주고 조촐하게 치르는 결혼식하며, 결혼한지 삼년만에 찾아온 아이의 흔적에 기쁨보다는 걱정으로 한숨쉬는 선생님, 그 선생님을 보면서 나는 글쓰기라는것에, 작가라는것에 회의를 느꼈습니다. 광고지를 보면 봤지 책을 안보는 이 시대가 아닙니까. 작가가 차닭알파는 아줌마보다도 못할수 있는 이 시대, 밉고 저주스럽지만 그러나 그 누가 이 시대를 거역할수 있겠습니까. 더러운 돈이고 머고 하지만 그러나 그건 없는자의 투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4년동안 두 얼굴의 생활을 하면서 내가 뼈저리게 느낀것입니다. 정승처럼 벌던 거지처럼 벌던 돈은 역시 돈이 아닐가요? 이 시대, 작가, 누가 감히 작가이려 하겠습니까. 그리고 누가 감히 작가의 안해이려 하겠습니까. 밤을 패며 눈을 집어뜯으며 어렵게 품은 글 한편으로 근사한 술 한잔 마실수 없는 이 시대에 작가가 되겠다고 덤비는 저 남자. 작가가 될테니, 폼나게 상도 받아올테니, 그때 니가 내 녀자친구가 되여줄래? 하고 짓꿎은 롱담을 던지는 저 남자. 철딱서니없다고 할가요. 세상을 모른다고 할가요. 저 어이없는 꿈에서 어서빨리 깨였으면 좋겠습니다. 차라리 도시에 가서 짐을 나르면... 저 마른 몸에 무슨 짐이나 나를수 있을지... 그러나, 아버지는 오빠가 채석장에 가서 뫼를 휘두르는 그 솜씨가 혀를 내두를 지경이라고 합니다. 어데서 그런 힘이 솟는지 쉬지 않고 메질을 서른개씩 한다는 남자. 남자는 후줄근하고 먼가 실의에 빠져있는 이 청산리 남자들과 분명 먼가 다른듯합니다. 패기도 있고 괜찮은 남자라고 여겨집니다.. 나를 향한 그 애모쁜 마음도 가엾도록 지극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선우에 설수 없는 사람임을 어찌하겠습니까. 나는 날마다 노트에 거꾸로 수자를 적어갑니다. 지금은 가을이고, 3월, 정확히 래년봄이면 민정이가 일본남자를 데리고 내앞에 나타날거라고 편지가 온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안녕. 청산은 영영 나한테서 안녕이라고밖에 할수 없는 그런것이 되여버릴것입니다. 앞뒤가 꽉 막히고, 인터넷접속도 되지 않는 청산리. 휴대전화도 아예 먹통입니다. 수업이라야 학년도 맞지 않고 나이도 맞지 않는 애들한테 상식적인 교재강의나 할뿐입니다. 가끔 노래도 배워줍니다. 선생이란 나와 늙은 교장선생님과 사모님 셋뿐이니 어쩔수 있겠습니까. 남자인 교장선생님이 지리과와 체육을 맡고 사모님이 수학과 력사를 가르치고 내가 한어와 조선어문, 음악을 맡았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체육시간이랍시고 정해놓은 시간이면 아예 자유시간으로 정해버렸습니다. 마음대로 뛰여놀아라. 하다못해 메뚜기를 잡아도 좋다 이것입니다. 나는, 음정박자 뒤틀린 오솔길이며, 별과 꽃과 선생님이며를 애들한테 배워주곤 했는데 시골애들이라 그런지 나의 뒤틀린 음정박자를 꼬집지는 않습니다. 수업이 없는 토요일과 일요일은 가끔 집에서 엄마 일도 거들고, 그렇지 않은 날에는 뒤산에 들꽃도 꺽어다 물병에 꽂으면서 시간을 달랩니다. 밭에 나가서 엄마와 아버지를 돕고싶지만 엄마가 무섭게 제지합니다. 니가 어떤 딸인데, 너는 호미자루를 쥐여서는 안된다. 이제, 큰일을 할 너인데... 머리가 머리가 아파옵니다. 나들이를 할때마다 마을총각들이 떼거지로 따가운 눈총을 보내지만 나는 그냥 무시해버립니다. 다들 내 뒤모습을 뚫어지게 눈주어보거나, 사람좋은 웃음을 던지긴 하지만. 소천수, 그 황당한 남자외에는 대놓고 사랑할가요를 웨치지는 않습니다. 녀자라곤 없는 화량한 마을에서 청춘을 허비하는 저들이 그저 가엽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각자의 주어진 운명임을 어찌하겠습니까. 문화생활이란 캔맥주병이나 구리쇠줄을 엮어서 만든 안테나로 줄이 쭉쭉 건너가게 나오는 텔레비죤프로가 고작입니다. 그것도 길림채널만 나옵니다. 118, 99, 95, ... 점점 줄어드는 수자의 크기에 간간히 희열을 느끼며 나는 지긋지긋한 이 청산리에서의 하루하루를 보내고있습니다. 동팔이편. 이넘의 구질구질한 촌구석을 벗어나, 미끈한 처녀들 다리라도 마음껏 구경할수 있는 도시에 가서 비까번쩍하게 살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것인가. 그러나, 어찌어찌하여 운명이 청산리에 던져진 몸들이니 별수 없다. 도시로 무작정 출입을 해보기도 했지만 도시에도 실업자가 넘쳐나고는것이다. 배운것도 없고 돈도 없고 재주도 없고 그렇다고 빽도 없는 촌넘들이 도시에서 발을 붙인다는게 어디 쉽겠는가. 기껏해야 짐을 나르는 일이거나 삼륜차부거나 양고기꼬치집에서 불을 나르거나 하는 일밖에 차려지지 않는다. 그것도 웬만해선 차려지지 않는다. 덩치도 웬만해야 하고 그리고 특별히 양고기꼬치집같은데는 스물대여섯넘었다하면 벌써 볼장 다 본것이다. 어렵사리 요행 일을 얻어서 하던 누구누구도 두달을 못넘기고 청산리로 돌아왔다. 일도 일이겠지만 그 얼마 안되는 월급으로는 변두리에 석탄불때는 단층집을 세맡고도 밥을 먹기도 힘든것이니. 시골을 떠날때 돈을 벌어서 장가도 가고, 도시에 집도 사고, 그렇게 아름다운 희망으로 부풀었던건 다 대낮에 도깨비꿈이다. 밥도 먹기 힘든데 언제 돈을 모아 집을 사고 장가를 가겠는가. 그리고, 때국이 흐르는 옷차림을 하고 꾀죄죄해서 짐을 나르고 삼륜차를 모는 도시의 최하층총각들한테 누가 련애라도 하자고 하겠는가. 행여 농촌에서 도시로 온 처녀애들이면 혹시나싶어서 기웃거려보지만 천만에. 그런 녀자애들일수록 눈이 뒤통수에 가 붙어서 인간자체보다는 입은 옷의 상표나, 타고다니는 차가 무엇인지를 바람난 아낙네가 무엇을 밝히듯 밝히는것이다. 외국으로 나가서 목돈이라도 쥐고오면 좋으련만 그게 쉬운게 아니다. 리자돈을 꿔가지고 달아다니다가 빚만 지고 나앉은게 한둘이 아니다. 혹간 운수가 좋아서 한국이나 일본에 가서 떵떵 돈을 버는 총각들도 있다. 그렇지만 그 좋은 운수가 아무에게나 차려지는가? 녀자라고 생겨먹은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잘 나가는 시대이다. 배살이 추욱 늘어진 아낙네건 울퉁불하게 생긴 처녀애건 모두 시내로 나갔다싶으면 환골탈태를 해서 나타나는 세월이다. 그리고 이 청산리총각들을 왼눈에도 안본다는듯 할기죽거리며 집식구들까지 모두 휘동해서 도시로 데리구나간다. 《아들 낳은 집은 한숨뿐이고 딸 낳은 집은 금빛이 번쩍인다.》 요즘 우리 청산리류행가이다. 농사군의 자식으로 태여난이상 농사나 곱도록이 지어야겠지만 우리가 열심히 기음매고 가을할 기분이 나겠는가? 모든것은 음양의 리치에 맞아야 잘 돌아가는 법인데 아주 음이 고갈되였으니... 아무리 농사가 돈이 안된다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고 부업도 짬짬이 하면 그런대루 돈은 된다. 한족들은 맨몸뚱이 하나만 달랑 끌구와서 거지처럼 자리를 붙이고 남의 삯일을 하더니 장가도 들고 애도 낳고 이제는 아주 이 청산리에 벽돌집을 짓고 오토바이 굴리며 떵떵거리며 산다. 마을의 소매점도 한족들이 꾸린다. 대신 매상고를 올려주는건 조선족청년들이다. 그렇지만 우리 탓만은 아니지 않는가? 세월이 그렇구 녀자도 없고, 희망도 비전도 없는데, 뭐하겠는가. 술이나 먹자. 물론 우리도 저 한족들처럼 지긋이 늘어져서 농사짓고 부업을 하고 그러면은 지금보다는 낫게 살수 있겠지만 저눔들처럼 살기는 싫다. 인생이 얼마라구 저렇게 살가. 돈을 벌려면 외국돈을, 뭉치돈을 벌어야지 언제 저런 소비돈을 한푼두푼 모으겠는가. 일년가도, 맥주상자 한번 들고다니지 않고, 개추렴 한번 안하고 일만 하고 하여간에 이상한 족속들이다. 술...그래도 술이 좋다. 알콜에 절으면 그 순간만이라도 우리는 캄캄한 기차굴같은 이 삶의 절망속을 벗어날수 있는게 아닌가. 이 청산리에 미친넘이 한명 있다. 소천수, 글쓰기가 무슨 길가에 마구 널려진 돌멩이를 주어모으는것인가? 작가라는게 어디 호박꼭지따듯 아무나 할수 있는건가 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초중도 제대로 못나온 저 친구는 자기는 세기를 놀래울 작가가 된다고 큰소리를 치는것이다. 가끔 술을 먹고 집에 들어박혀 먼가를 끄적거리다가는 우리한테 들키면 덴불에 놀랜듯 이불장안에 감추곤 한다. 소설을 써서 크게 이름을 날린다고 한다? 제 주제두 모르는 정신빠진 넘. 한때는 황금자하고 뛰뛰한 소문이 돌더니 금자가 도시로 가버리고나서 한때는 술에 빠니는가싶더니 이내 오뚜기처럼 발딱 일어서서 정신차리구 다닌다. 역시 오뚜기라는 별명에 무색하지 않은 천수다. 하두 거저 발딱발딱 일어서서 친구넘들이 지어준 별명이다. 천수아버지는 십년가도 누가 말을 시키지 않으면 아야 소리 한번 안내는 그런 사람이다. 친구들하고 잘 어울리지도 않는다. 어쩌다가 개추렴을 하거나 버들치라도 잡아서 술판을 벌리자고 찾으면 바쁘다고 손사래를 훼훼 내젓는다. 미친넘, 제가 그래봤자지. 지가 아무리 농사를 열심히 짓고 아무리 채석장에 가서 뼈가 부서지게 돌을 깨봐두 하루아침에 거렁뱅이가 벼락부자로 탈바꿈하랴? 처녀선생, 일본류학을 앞두고있는 청산리의 자랑거리~윤정혜, 그녀와 팔장을 끼고 활보할테니 기대하라고 큰소리를 쳐댄다. 아주 개구리가 기러기를 탐내는 꼴이다. 정혜가 누구인가. 우리같은 촌바우들하고는 달라도 너무 다른, 아니 비교조차 안되는 녀자다. 우리 마을에서는 참 드문 사범학교를 나온 지식인녀자. 게다가 얼마나 이쁜가. 갸름한 얼굴에 호수처럼 깊은 눈, 날씬한 몸매, 미인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산골녀자들에게는 보기 드문 박속처럼 하얀 피부가 너무 싱그러운 우리한테는 정말 그림에 떡일수밖에 없는 녀자다. 일본류학준비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떠나기전에 집에 와서 잠간 쉬는것이고, 페교직전인 학교에서 애들도 가르치니 참 고향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는것이다. 젊은 녀자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이 고장에서 정혜의 출현은 정말 거치른 들판에 부는 바람이라고 해야겠다. 청산리총각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정혜의 뒤모습이나, 사람을 감미롭게 하는 은은한 미소에 반하지 않은 이가 없다. 개추렴을 하거나, 이른저녁에 마을의 누구네 앞마당에 모여앉아서도 우리는 온통 정혜의 이야기에 몰입을 한다. 정혜의 살얼음우를 걸어가는듯한 상긋한 목소리며 아름다운 자태며에 입을 모은다. 그러다가 우리는 하나같이 실의에 빠져 멍청히 굳어버리는 것이다. 정혜, 그녀는 우리가 감히 넘볼수 있는 녀자가 아니라는, 그냥 바라보면서 한탄해야 하는 아름다운 무지개같은 존재라는것을 슬프게 깨닫는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슬프게 웨친다. 이제 얼마 안있으면 정혜는 떠나갈것이라고. 가끔 정혜한테 련애편지나 날려볼가? 하고 우리들중에 누군가가 싱거운 소리도 해보지만, 우리는 일제히 주제파악을 하라고 이마빡을 쥐여박아준다. 사람이 제 주제꼴은 알아야 되지 않는가? 그러나, 소천수 저 철없는 수송아지같은 넘아를 어찌하랴? 농사일만 해도 장난아닌데 전부 한족들뿐인 채석장에 끼여서 돌까지 캐고있다. 돈을 벌어서 커다란 보석반지를 산다고 한다. 그리고 그 반지를 정혜한테 끼워주고, 팔짱을 끼고 이 마을을 활보한다고 큰소리를 땅땅 치는것이다. 정혜가 일본류학을 떠난다는데, 그리고 너하고 정혜가 어떻게 한줄에 세울수 있는 공이냐고 누군가가 면박을 줬더니 당장 달려들어 드잡이라도 할 태세이다. 일본류학이 대순가고 한다. 보석반지를 사서 끼워주고 정혜랑 결혼한다고 한다. 그리고, 작가가 되고, 돈도 많이 벌어서 비까번쩍하게 정혜를 호강시켜준다고 한다. 웬 꿈이 저리도 야무지다냐 차라리 하늘에 별을 따오겠다고 하지. 그러나, 정혜에 대해 말할때 그 단호한 태도며 누구라도 정혜를 사랑하겟다고 하면 단박에라도 결단을 내고야 말듯한 저 비장한 얼굴을 좀 보라. 가을걷이도 다 끝났고, 이제 놀 일만 남았다. 그러나, 모든게 다 비여버린 황량한 들판이 웬지 더 쓸쓸하다. 날은 점점 추워진다. 땔나무를 하는것외에는 일이 없다. 우리는 집안에 들어박혀 트럼프를 치거나 마작을 굴리고 술을 마시면서 두더지처럼 동면하고있다. 땔나무는 1월에 들어서서 후딱 며칠간 하면 되는것이니. 하고 게으른 위안들을 해가면서 눅거리 봉지술로 속을 달랜다. 농사일이 지겹긴 하지만 어서 봄이 왔으면 좋겠다. 그래도, 봄이면 먼가 희망이 생길것 같고, 그리고 파릇파릇한 산등성이에 민들레꽃이라도 망울지겠으니 말이다. 이 겨울, 더욱더 마음이 무거워진다. 웃마을, 장일수네 뚱보안해가 돈벌러간다고 떠난것이 종무소식이 됐고, 홀아비 하나가 더 늘어났다. 가끔 우리는 순이나, 금이, 금자, 에 대해 이야기를 함다. 괜히 성깔은 드러워도 은근히 정이 가는 순이였는데, 그리고 금이는 이발도 얼마나 이뻤던가 하는것들을. 그리고, 그 옛날, 순이나, 금이나, 금자랑 어울려서 들놀이를 갔던 어느날의 아름다운 추억을, 말한다. 그리고, 학교시절에 가졌던 우리의 희망과 꿈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그럴때면 괜히 누구나 들뜨고 상기된 얼굴들이고 생기가 넘치기두 한다. 마치, 별볼일없이 늙어버린 어느 로인네가 당년에 풍운을 주름잡던 그 시절을 도도히 될수록 멋있게 이야기하며 자아도취에 빠져 행복해하듯 우리는 양념을 쳐가며 좀 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내놓고 거기에 즐거워하곤 하는것이다. 그러다가 우리는 결국 도로 힘이 풀어지고, 우리의 막막한 신세를 한탄하군 한다. 소천수는 느티나무도 쩍쩍 얼어터진다는 이 엄한에도 뫼를 메고 채석장으로 다니는것을 우리는 본다. 과연 어쩌자고 저리도 악착을 떠는것일까? 워낙 마른 몸은 아주 비쩍 뼈만 남은꼴이 되버렸고, 바람과 해볕에 그슬려서 새카맣게 광부같은 모습이다. 하기사 채석장일군이 광부보다 나으라는건 없다. 돈을 벌고, 탈퇴환골하고, 그리고 새봄이 오면 거창한 작품으로 우리를 깜짝 놀래게 한다는것이다. 그리고 기어이 정혜의 팔짱을 끼고 활보할 날이 올것이라고, 곧 올것이라고 한다. 가끔 만나는 천수는 아주 먹이를 앞에 놓은 야수처럼 눈까지 반짝반짝하고 커다란 희망으로 부풀어있다. 정혜가 과연 가당키나 한가? 저러다가 정혜가 어느날 증발하기라도 한다면 천수는 어찌될지 정말 걱정이다. 그대로 무너져버리거나 혹시 강물에 뛰여들것 같다. 승산없는 전쟁을 앞둔 철모르는 전사같은 저 무모한 놈을 어쩌면 좋은가? 겨울이 가고 드디여 봄이 왔다. 아직은 바람이 쌀쌀하지만, 버드나무에 물이 오르고 들판도 푸르러가는걸 보면 완연한 봄이다. 소천수 어떻게, 무엇이라고 말을 뗄가? 그의 무모한 열정과 거의 악에 가까운 치기에 대해서, 새봄이 오면 내놓는다고 하던 천수의 엄청난 작품에 대해서 이제 말해야 할것인데. 벌레들도 돌아눕는다는 립춘이 림박하던 날, 싱그러운 바람에 알싸한 향기가 풍겨나오던 그런 날이였다. 올해는 이 심산골안에도 먼가 획기적인 사변이 일어나서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해줄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그런 아름다운 희망으로 사람을 싱그럽게 하던 날이였다. 마을길목에서 이 새로운 봄의 기운에 우리모두 조금씩 들떠있었는데 채석장에서 돌을 캐던 한족눔 하나가 새까만 얼굴로 정신없이 마을로 뛰여들어오는것이다. 꼭 몽골등에에 쏘인 둥글소처럼 말이다. 《쵄쑤, 타 추썰라.》 우리는 종주먹을 부르쥐고 마을에서 북쪽으로 이리는 되게 떨어진곳에 있는 채석장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러나, 천수는 이미 없었다. 굴러내려온 엄청난 바위돌과, 여기저기 뿌려져있는 검붉은 피자욱과 웅성거리는 사람들뿐이였다. 그날도 정신없이 뫼질하던 천수는, 바로 머리꼭대기에서 밑의 돌을 무절제로 캐내는바람에 흔들리던 바위돌이 허망 내리꽃혔고 그래서 어쩔새없이 바위돌에 강타를 맞고 쓰러졌담다. 일하던 한족들이 달려왔을때에는 이미 입가에 검붉은 피가 흥건하더란다. 우리는 큰길로 달려나가 마구 차를 막았으나 한시간은 족히 걸려서야 요행 목재차에 오를수 있었다. 아, 천수, 이 미친 눔아. 그렇게 악을 쓰고 난리를 치더니 너 결국 이렇게 되는거니? 천수야. 제발 죽지만 말아다오. 그러나, 채석장에서 본 바위돌과 피자욱을 떠올리니 고개만 흔들어졌다. 《천수, 천수 어떻게 됐어유?》 시병원으로 마악 들어가던 우리는 입구에 멀거니 서있는 채석장에서 같이 일하던 쑈왕을 보았던것이다. 《쵄쑤, 쵄쑤 타...타...》 쑈왕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병원뜨락 한구석을 가리키는것이였다. 거기에는 한족일군들이며 마을의 남정네 몇명이 누우런 황토지빛갈의 가로놓인 주머니를 앞에 놓고 눈굽을 적시고있었다. 아. 아. 저게 천수란 말인가. 그 활기차서 날뛰던 우리의 친구 천수란 말인가. 소설가가 되고 부자가 되고 정혜를 자기 녀자로 만든다고 하던 천수란 말인가. 우리는 허망함에 정체모를 깊은 나락속으로 꺼져들어가고있었다. 오늘아침까지도 우리는 뫼를 메고 구리빛얼굴에 싱싱한 활기를 머금고 채석장으로 향하는 천수를 보았다. 그런데, 그 천수가 불과 몇시간만에 저렇게 누우런 주머니에 들어가있단 말인가. 야, 천수야. 누가 먼저 달려들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일제히 누런 봉투를 에워싸고 당장이라도 그속에서 웃으며 달려나올것 같은 우리의 불사조오뚜기천수를 주먹을 치며 부르짖었다. 그때, 새카만 얼굴이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진 천수 아버지가 정신없이 병원뜨락으로 달려오는것이였다. 산에 갔었는지 롱구화에는 흙이 덕지덕지 매달려있었다. 무작정 사람들틈을 헤집고 우리중 누군가의 어깨를 헤가르며 누런 봉투앞에 멈춰버린 천수 아버지의 두손이 허공에서 떨리고있었다. 그리고, 뚤렁뚤렁 떨어지는 커다란 눈물방울, 그렇게 천수아버지와 우리 친구들은 서로의 어깨들을 부여잡고 가슴을 치며 피눈물을 쏟고 또 쏟았다. 천수아버지가 한번만 천수의 얼굴을 더 보겠다고 마구 누런 봉투를 헤치려고 했지만 한족들이 막았다. 워낙에 얼굴이 험하게 망가져서 병원일군들에게 돈을 내고 렴섭을 부탁했다는것이다. 대체, 사람의 일이란. 천수가, 적어도 우리는 보석반지를 꺼내들고 정혜한테 사랑고백을 했다가 멋있게 걷어차였거나 어느날 갑자기 증발해버린 정혜를 두고 실의에 빠진 천수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술잔을 부딪쳐줄 준비를 하고있었는데 이게 머란 말인가. 천수의 유물을 정리하면서 우리는 또 한번 전률해야 했다. 옷장안 깊숙이 감춰졌던 노트 하나와 한뭉테기의 종이, 그것은 소설이 아니라 련애편지라고 해야 할, 아니 정혜에 대한 절절한 절규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리고 까만 비닐주머니에 악착스레 세겹네겹 감겨져있는것은 네자리수의 저금통장이였다. 천수의 노트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이제 한달만 더 고생하면 정혜한테 보석반지를 사줄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정혜한테 사랑한다고 온힘을 다해 말해볼것이다. 정혜가 거절할것이라는 생각같은건 하지 않겠다. 나는 정혜한테 고백하는 그 순간만을 영원히 간직할터이니. 시내백화점에서 파는 가장 이쁜 보석박힌 금반지는 1만 3000원, 이제 2000원만 모으면 된다. 힘내자, 소천수. 아, 아, 천수 머라고 더 말할수 있을가. 우리는 그저 거의 탈진상태에 빠져 내가 죽어야지 왜 천수를 죽이냐고 악을 쓰는 할머니와 묵묵히 눈물을 훔치는 천수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으스러지게 주먹을 쥐고 눈물을 삼키고 또 삼킬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리고 정혜가 갔다. 천수가 죽고나서 얼마뒤 정혜는 청산리에 올때처럼 보라빛치마에 까만 브라우스를 입고 트렁크를 들고 정혜를 데리러 온 까만 승용차에 앉아 떠나갔다. 일본으로 떠난다고 한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것이라고 한다. 정혜는 채석장이 있는 북쪽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입술을 깨물더니 돌아서서 차문을 열고 들어가는것이였다. 그리고 휘익휘익 까만 승용차는 멀어지는가싶더니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것이였다. 봄이 또다시 오고있었다.
    • 오피니언
    • 생활수기
    2020-06-05

포토뉴스 검색결과

  • [포토] 제3회 대련시조선족전통김치문화축제
    [동포투데이] 지난 21일, 제3회 대련시조선족전통김치문화축제가 대련광대식품유한회사 정원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행사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소박하게 치러졌다. 흑룡강신문에 따르면 조선족의 전통과 민속을 주제로 펼쳐진 이번 축제는 광대식품 김명순 이사장과 대련조선족기업가협회 박만선 회장, 정만흥, 최영철, 장상기 등 명예회장들이 함께 대자연의 구름, 비, 바람, 천둥을 대표하는 북, 장고, 징, 꽹과리를 전체 참석자들과 함께 울리면서 축제 막을 올렸다. 축제는 신명나는 우리가락의 사물놀이와 함께 대련 동포사회 최초의 산천기원제가 펼쳐졌다. 이번 산천기원제는 장백산의 샘물로 만든 아리랑 술과 정성들여 차린 제물부터 시작하여 진상, 제관입장, 분향영신, 참신, 초헌, 독축, 아헌, 종헌, 리성, 사신, 축문소각, 제관퇴장, 철상까지 모든 차례를 엄격한 전통례법에 따라 진행했고 49명의 제관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제사에 임했으며 기업가협회 관계자들이 초헌, 아헌, 종헌관을 맡아 동포사회 미래에 대한 책임감을 과시했다. 이어서 수준급의 부채춤을 공연하면서 큰 공명을 끌어냈다. 그다음 행사로 김치독소망기원고사가 진행되었다. 변치 않는 김치맛을 대대로 이어가고 집안의 재앙을 털어버리며 평안이 깃들기를 기원하는 고사였다. 고사가 끝난 후 옛적의 동네잔치를 방불케 하는 흥겨운 마당놀이가 이어졌고 김장체험, 찰떡치기, 막걸리 만들기 체험, 엿과 고추장 만들기 등에 이어 공장안의 민속박물관 방문체험도 진행하면서 다채로운 행사가 마무리 되였다. 전반 행사를 기획하고 고사 진행을 맡은 김광철은 “고사문화를 봉건미신이나 귀신놀음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공자도 귀신은 무조건 멀리 하지 말고 공경하라 하였다. 하물며 우리 민족의 고사문화는 대자연에 대한 경외심, 생명에 대한 존중, 우주적인 일체감에서 비롯된 소박한 민간신앙이며 동양적 인문주의의 범주라고 생각한다. 인류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문제, 자원쟁탈, 역병 등 주요한 문제가 대자연에 대한 무차별한 개발과 생명에 대한 존중이 결핍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사진제공 : 흑룡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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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외동포
    2020-06-28
  • 중국 조선족 지역별 무형문화재
    [동포투데이] 6월 13일, 중국 “문화자연유산의 날”이다.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중국은 2006년에 처음 문화유산의 날을 지정했다. 2017년부터 국무원의 비준을 거쳐 매년 6월 두번째 토요일을 문화자연유산의 날로 조정했다. 올해 문화자연유산의 날을 기념해 전국 각지는 문화관광부의 포치에 따라 3700여가지의 무형문화재 전시행사를 갖게 된다. 무형문화재란 노래, 춤, 전통공예, 생산기술 등 형체가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재를 가리키는바 실체가 있는 문화유산(조각, 미술, 골동품 등)과 달리 개체 혹은 군체의 전승인들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무형문화재를 보호하는 것은 한 민족의 삶의 역사와 문화를 후세에까지 보존, 계승, 발전시키는 중요한 사업이다. 세계적인 범위에서 볼때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무형문화재는 최고급별의 무형문화재이고 각 나라마다 국가급 무형문화재가 존재한다. 중국 무형문화재는 국가급, 성급, 시급, 현급 네개 등급으로 나뉜다. 무형문화재로 등록된 종목들은 중화인민공화국 무형문화유산법에 의해 문화전승장소와 관련 활동자금 등을 지원받고 국가의 보호를 받게 된다. 국가급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조선족의 무형문화재는 모두 24개이다. 그중 “중국조선족농악무”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였다. 현재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중국의 무형문화재는 총 40개이고 중국은 세계 1위의 무형문화재 보유국이다. 그중 조선족의 농악무는 중국을 대표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의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국가급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조선족 무형문화재 24개는 동북 3성에 집중되였다. 길림성 - 18개 (1)조선족퉁소음악 <朝鲜族洞箫音乐> 보호단위: 연길시문화관 (2)조선족퉁소음악 <朝鲜族洞箫音乐> 보호단위: 훈춘시문화관 (3)아리랑 <阿里郎> 보호단위: 연변문화예술연구센터(延边文化艺术研究中心) (4)가야금예술 <伽倻琴艺术> 보호단위: 연변문화예술연구센터(延边文化艺术研究中心) (5)조선족농악무(상모춤) <朝鲜族农乐舞(象帽舞)> 보호단위: 왕청현문화관(汪清县文化馆) (6)조선족학춤 <朝鲜族鹤舞> 보호단위: 안도현문화관(安图县文化馆) (7)조선족장고춤 <朝鲜族长鼓舞> 보호단위: 도문시문화관(图们市文化馆) (8)조선족삼로인<朝鲜族三老人> 보호단위: 화룡시문화관(和龙市文化馆 (9)판소리 <盘索里> 보호단위: 연변가무단(延边歌舞团) (10)조선족 그네, 널뛰기, <朝鲜族秋千, 跳板> 보호단위: 연길시청소년아마추어체육학교(延吉市青少年业余体育运动学校) (11)씨름 <摔跤(朝鲜族摔跤)> 보호단위: 연길시청소년아마추어체육학교(延吉市青少年业余体育运动学校) (12)민족악기제조기예 <民族乐器制作技艺(朝鲜族民族乐器制作技艺)> 보호단위: 연길시민족악기연구소(延吉市民族乐器研究所) (13)김치제조기예 <泡菜制作技艺(朝鲜族泡菜制作技艺)> 보호단위: 연길우의유한회사(延吉友谊有限公司) (14)추석 <中秋节(秋夕)> 보호단위: 연변문화예술연구센터(延边文化艺术研究中心) (15)조선족 회갑례 <朝鲜族花甲礼> 보호단위: 연변문화예술연구센터(延边文化艺术研究中心) (16)조선족전통혼례 <朝鲜族传统婚礼> 보호단위: 연변문화예술연구센터(延边文化艺术研究中心) (17)조선족복식 <朝鲜族服饰> 보호단위: 연변문화예술연구센터(延边文化艺术研究中心) (18)결혼풍속 조선족회혼례 <婚俗(朝鲜族回婚礼)> 보호단위: 연변문화예술연구센터(延边文化艺术研究中心) 료녕성 - 5개 (1)조선족농악무(걸립무) <朝鲜族农乐舞(乞粒舞)> 보호단위: 환인만족자치현문화관광발전서비스센터(桓仁满族自治县文化旅游发展服务中心) (2)조선족농악무 <朝鲜族农乐舞> 보호단위: 철령시조선족문화예술관(铁岭市朝鲜族文化艺术馆) (3)판소리 <盘索里> 보호단위: 철령시조선족문화예술관(铁岭市朝鲜族文化艺术馆) (4)추석 <中秋节(朝鲜族秋夕节)> 보호단위: 철령시조선족문화예술관(铁岭市朝鲜族文化艺术馆) (5)조선족회갑례 <朝鲜族花甲礼> 보호단위: 단동시무형문화유산보호센터(丹东市非物质文化遗产保护研究中心) 흑룡강성 - 1개 (1)조선족회갑례 <朝鲜族花甲礼> 보호단위: 목단강시조선민족예술관(牡丹江市朝鲜民族艺术馆) <중국조선어방송망(中国朝鲜语广播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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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14
  • [특별기획] 장백산하 해란강반에 울려 퍼지는 '탈빈공략'의 새노래
    편집자의 말: 6월 3일, 중국 관영 매체인 신화통신은 탐방기 <장백산하의 새 노래 편 ㅡ 길림성 연변주 탈빈공략 관찰(长白山下唱新篇——吉林延边州脱贫攻坚观察)>를 큰 편폭으로 할애하여 실었다. 연변 조선족의 <탈빈공략> - 이는 오래 전부터 꿈꿔왔던 프로젝트였지만 잘 안되던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이다. 우선 환경적으로 그닥 부유하지 못한 북한이나 러시아와 인접되어 있다. 이런 나라들과의 무역에서는 상품가치 등가교환에서만 이익을 볼 뿐이지 큰 도움을 받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상 조선족에 한해서만은 큰 중시를 돌리지 않는다고 해도 큰 과언이 아니었다. 조선족이 <당의 말>을 너무나도 잘 들으니 말이다. 그제 날의 항일전쟁과 해방전쟁 시기에는 그 어느 민족에 비해도 공산당을 위해 목숨을 잘 바치는 민족이 조선족이었고 신 중국이 탄생한 후에도 <대약진>, <인민공사> 등 당의 총 노선을 가장 잘 관철한 민족이 조선족이었으며 <문화혁명> 시기에는 또 <계급투쟁>에 제일 앞장선 민족도 우리 조선족이었다. 어디 그 뿐이랴. 나라에 공량을 바칠 때에는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라도 그 임무를 초과 완성했었고 나라에서 <계획생육정책>을 제정하자 어느 여성이 임신했다고 하면 쫓아다니면서까지 낙태시키군 하던 우리 조선족이었다. 그래서 아주 영예롭게도 연변주는 거의 해마다 전국의 <모범자치주>로 되기도 했다. 그럼 아주 잘 살았는가? 글쎄다. 굶어죽었다는 사람이 없었으니 <번영하는 우리 연변>, <살기 좋은 조국 변강>이란 어구들이 기사를 통해, 노래를 통해 많이 나가기도 했다. 이렇게 <당의 말>을 너무나도 잘 들으니 나라에서 특별히 달래줄 필요도 없었을 것임은 불 보듯 번연했다. 연변에 대한 보도기사ㅡ 이전에 우린 그걸 잘 믿지를 아니했다. 수분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어느 아무깨 기자가 뭘 좀 받아먹고 허풍을 떨었구나 하고 말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 간은 보도기사를 믿어서가 아니라 연변 농촌 사람들의 말에서 이전에 비해 확실히 좋아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농촌의 주택건설이며 도로건설이며가 확실히 잘 되어있고 국가에서 연변농촌에도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나마 기쁘고 좋은 일이며 앞으로도 바라마지 않는 일이다. 현재 연변 조선족들한테는 산재되어 있는 문제들이 많다. 인구의 마이너스 성장 문제, 이로 인한 학교들의 폐교되는 문제, 노총각들이 장가가지 못하는 문제와 조선족들이 개변해야 될 음주문화 문제 등으로 수두룩하다. 단꺼번에 다 해결할 사항들도 아니다. 그럼 오늘 신화통신의 탐방기를 실으면서 연변의 애로사항들이 하나씩 풀리면서 더 좋은 앞날이 다가오기를 기대한다. ▲화룡시 <진달래> 민속촌 전경ⓒ신화통신 아래의 글은 신화통신의 탐방기 <장백산하 새 노래편 ㅡ 길림성 연변주 탈빈공략 관찰>이다. 봄 파종철이 지나자 장백산하 해란강반에는 나뭇잎들이 푸르고 꽃들이 만개하면서 생기로 차 넘친다. 50여년 전, 연변에서 태어난 노래 <붉은 해 변강을 비추네(红太阳照边疆)>는 전국인민들로 하여금 변강건설에 뛰어든 연변의 각민족 아들딸들의 앙양된 투지에서 감동을 받게 했다. 당의 18차 대표대회 이래 이곳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각민족 인민들은 지속적으로 분투하여 오늘날 모든 <빈곤현(贫困县)>들이 <빈곤모자>를 벗어던졌다. 전통 맛 여전하나 삶의 나날 날로 풍족해져 화룡시 동성진 동광촌은 포장이 된 마을길과 집집마다의 울안이 매우 깨끗했다. 조선족촌 박춘자 여성은 주방에서 작으마한 밥상을 들고 나왔다. 상위에는 배추김치, 된장과 소고기, 명태 등이 깨끗한 접시에 담겨져 있었다. "우리의 생활은 아직도 된장을 떠날 수 없어요. 하지만 삶의 나날은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났죠. 모든 것이 날로 풍족해지고 있는거죠." 박춘자 여성의 기억에 따르면 연변 조선족의 노동과 생활은 많은 변천을 겪어 왔다. 그것은 현재 연변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사진에서도 보아낼 수 있다. 가대기에 소를 메워 밭갈이를 하고 바지가랭이를 걷어 올리고 모내기를 하고 또한 낫을 들고 벼 가을을 하고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야말로 이 땅에 첫 보습 날을 박던 그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삶의 희노애락은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진달래 민속촌에서 촌민들이 휴식의 한때를 즐기는 장면ⓒ신화통신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인구는 214만명, 이 중 조선족은 36.3%를 차지하며 길림성 2대 특별 빈곤지구 중 하나였다. 연변의 8개 현,시 중 4개가 국가 부축 빈곤현이었으며 2012년 말에는 빈곤 발생율이 29%에 달하였다. 연변의 변화는 빈곤부축사업의 항목의 겨냥조치로부터 추진되었다. 왕청현 조원 소목이산업원(桃源小木耳产业园)의 넓고 밝은 직장 내에 들어서면 로봇이 물건을 나르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왕청현은 장백산 임구에 위치해 있어 역사적으로 <흑목이버섯 천담현(黑木耳千担县)>이란 명칭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날에는 주로 수 작업식 생산으로 이뤄졌기에 생산량이 적고 질 보장이 잘 되지 않았기에 훌륭한 자원으로 훌륭한 수입을 바꾸어 오지 못하였다. 최근년래 왕청현에서는 종식표준화 시범기지(种植标准化示范基地)를 하나하나씩 건립, 도합 45개의 기지로 점차 국내 흑목이버섯 고가시장으로 만들었으며 목이버섯을 상품화하여 북경, 상해와 광주에까지 판매, 촌민들의 연 평균 수입이 3000-4000위안씩 증가되게 하였다. 이 외 용정시 동성용진 용성촌에서는 당지 용두기업으로부터 빈곤부축항목의 혜택으로 촌민 유경의가 사육하는 연변황소 고기가 호텔에 납품, 황소고기 매 킬로그램 당 150위안에 달했고 안도현 합신향에서는 <삼림황금>으로 불리는 상황버섯이 온도가 맞춤한 비닐하우스 안에서 자라고 있었다. 이 상황버섯은 킬로그램당 600위안 내지 700위안으로 그 비닐하우스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용정시 삼합진 천불지산(天佛指山)은 해마다 송이 따는 계절만 되면 일본과 한국으로부터 많은 상인들이 찾아와 값은 크게 따지지 않고 적극 주문하고 있단다… ▲화룡시 남평진 유동촌의 조선족 주택들ⓒ신화통신 다시 화룡시 동성진 동광촌의 박춘자 여성한테로 돌아온다. 충분한 해빛을 받아 이슬 머금고 자라는 농가원의 야채들, 박춘자 여성은 문턱에 앉아 마당 내 비닐하우스에서 자라는 매 한포기의 야채를 바라보면서 손가락 꼽으며 뭔가를 계산하고 있는 듯 했다. 50여년 간 노래소리 울리고 호매한 발걸음은 계속돼 연변 시인 한윤호가 노랫말을 만들고 연변적 작곡가 김봉호가 선율을 만든 <붉은해 변강을 비추네>란 노래는 50여 년간 불리워 왔다. 그리고 이 노래속의 <강물을 끌어올려 산에 올리네>란 놀라운 일은 오늘날 화룡시 숭선진 상천촌에서 현실로 되고 있었다. 당년에 이곳의 촌민들은 <사이펀(倒虹吸)> 원리를 이용하여 두만강의 물을 60미터 높이에 있는 산위에 끌어올려 그 곳을 비옥한 논으로 되게 했다. 상천촌 당지부서기 박동섭에 따르면 지금 상천촌의 입쌀은 브랜드로 되어 높은 가격으로 내지에 팔리고 있다. 하지만 이 촌에서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전자상거래, 된장 가공과 향촌관광업의 발전을 탐색하고 있는 중이었다. ▲도문시 석현진 합흠 농민전업 합작사 농민들이 비닐하우스 안에서 작업하는 장면ⓒ신화통신 화룡시 남평진 유동촌에 가보면 85후의 청년 김호가 대졸 후 주동적으로 귀농, 촌민들을 이끌고 오미자 재배, 민속관광지 건설 등을 추진, 촌민들을 위해 농구장과 게이트볼 경기장(门球场)을 앉혔으며 집집마다 수세식 변기를 갖춘 화장실을 갖추게 했고 노인들로 하여금 매일 점심 때마다 노인들한테 영양식을 무료로 제공하군 했다. 그리고 왕청현 천교령진 천평촌에서는 뭔가를 해야겠다고 작심한 촌 당지부서기 윤학의는 자기의 아내를 촌으로 <초대>했다. 부부가 손잡고 탈빈 목표를 이룩하자는 심산이었다… 변강의 한 모퉁이에 위치해 있었지만 연변의 빈곤탈퇴 사업은 고군작전이 아니었다. 2016년 10월, 절강성의 녕파와 연변은 동서부 빈곤부축 협력을 갖기로 하고 22개 기업이 육속 연변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논공유(共享稻田)>란 명목으로 빈곤부축 항목을 제정, 연속 2년간 화룡시 1.4만 뙈기의 논에서 생산된 입쌀을 도맡아 인수하는 것으로 2000여명 빈곤인구의 수입증장에 크게 이바지했다. 2019년 4월, 연변의 화룡시, 용정시와 도문시가 <빈곤모자>를 벗었고 올 4월에는 안도현과 왕청현이 <빈곤모자>를 벗으면서 연변의 모든 시현들이 빈곤탈퇴에 성공, 2016년 이래 전 주적으로 304개의 빈곤촌이 <빈곤행열>에서 나왔고 2.9만호, 4.9만 명에 달하는 인구가 빈곤에서 벗어나면서 연변의 각민족 인민들은 새로운 출발을 할 기점에 설 수 있게 되었다. ▲남평진 유동촌 촌민이 집에서 벽에 장식품을 걸어놓는 장면ⓒ신화통신 피어난 꽃 특별히 붉고 <실크로드(丝路)> 천하로 통한다 빙설중에도 꽃은 피어나고 산비탈의 진달래는 더더욱 아름다워라. 이는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조선족 인민들의 무한한 추구를 뜻한다. 용-포 고속도로(용정으로부터 돈화시 대포자하진에 이르는 고속도로)의 한 중간 대교 아래에는 백년 역사를 갖고 있는 조선족 마을 ㅡ <진달래> 민속촌이 있다. 현재 이 마을은 <연변속의 민속촌>보다는 <중국속의 민속촌>으로 더욱 통한다. 이 마을에서는 떡볶이, 냉면과 장고춤, 가야금 등 조선족 특색 관광상품으로 지난해만 해도 국내외 관광객 40여만 명을 유치했다. 이 마을의 촌민 이월순 여성은 원래의 주택을 개조해 민박을 차렸는데 이로부터 나오는 수입은 그야말로 쏠쏠했다. “반평생 농사만 해오다가 오늘 와서 사장님(老板)으로 불리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죠.” ▲화룡시 숭선진 상천촌 촌민이 밭에서 트랙터로 작업하고 있는 장면ⓒ신화통신 화룡시에는 일명 <진달래실크로드(金达莱丝路)>란 전자상거래 플랫폼이 있으며 실체의 가게에는 상황버섯, 꿀, 목이버섯 등을 진열, 모두 조선족 특색의 <포장>을 하였다. 예하면 입쌀은 월병처럼 조선족 특색의 선물세트로 포장했고 쿠션(抱枕), 벼짚 수공업품 등에도 조선족 특색의 글발이 아주 선명하게 새겨 넣었다. 이는 북경에서 온 어느 한 작은 젊은 지원팀에서 모색해 낸 아이디어로 이들은 당지의 빈곤부축 특산으로 조선족 특색의 브랜드를 창출, 전자거래의 플랫폼을 통해 전국에 판매했다. 이렇게 하찮고 고생스럽게만 보이던 것이 빈곤부축의 아름다운 산업과 창업의 낙원으로 되었던 것이다. 연변에는 <진달래 실크로드>만 있은 것이 아니었다. 지난 5월 15일, 220개의 컨터이너에 옥수수를 실은 <바다실크로드 1호>가 청도항에 입항했다. 이는 <훈춘-자르비노(러시아)-청도> 항선의 첫 항행으로 <훈춘-자르비노-주산> 항선이 개통된 후에 있은 또 한 갈래의 국내 무역화물이 국경을 벗어나 운송하는 항선이었다. <항구를 빌어 바다로 나가는 새로운 아이디어>로 일찍 개방발전의 <제한적 구역>에 있던 연변으로 놓고 볼 때 이는 대해로 향하는 새로운 발걸음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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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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