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허성운 칼럼] 연길서역과 연천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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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운 칼럼] 연길서역과 연천대교

기사입력 2019.12.18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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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허성운

고속철도가 뚫리면서 연길서부지역은 교통도로망이 새롭게 구축되어가고 있다. 이와 동시에 연천대교 연천북로 연천남로 등 새로운 도로명과 다리이름들이 하나둘 표기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명칭은 본래 이 고장에 깃들어있는 역사와 전설을 품어야 마땅하나 이런 연원을 전혀 따져보지도 않고 한자로 두리뭉실하게 이름을 붙이는 폐단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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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서역 고속철도역은 인민공사시절 광석10대가 위치한 구역으로서 최초에는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이주한 이들이 많아 아래깡동 사람들이 모여 사는 오래(함경도 방언 마을)라는 지명으로 광동이라고 불러오다가 마을 산기슭 흙이 적색을 띠었기에 행정문서에는 적암평이라는 땅이름으로 새겨있으며 민간에서는 동네가 둔덕 위에 자리 잡았다고 닭이덕대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와서 많은 사람들은 1919년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조선독립을 선언한 서울 독립 선언서는 잘 기억하고 있지만 이와 별도로 적암평과 인근 왜랑동 소완자 사람들이 주축으로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발표한 일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지금의 연천대교는 조양천으로부터 흘러내려오던 부르하통하 물줄기가 강 건너편 소완자쪽에서 중데기(일명 절당데기)쪽에로 물곬을 틀어 크게 휘돌아 흐르는 곳에 세워졌다. 그 시기 적암평에서 부르하통하를 바라보면 거대한 물줄기가 아름다운 호형으로 그리어 있고 나루터가 자리하여 재비가 오가는 푸른 강물 위에 버들방천이 비낀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래 동안 타향에서 향수병에 젖어있는 이들이 어쩌다 고향을 찾아 연길서역에 발길을 들여놓을 때 낯설어 보이는 건물 앞에서도 옛 고향 추억을 더듬어 정서적 공감을 이끌어내는 마중물 같은 땅이름과 고장역사를 적은 기념시설이 연길 서역에 갖추어 있어야 마땅하다.

연천대교 남쪽 소영진 인평촌은 오늘날에 와서 부근의 신풍촌 그리고 문화촌을 아울러 부르는 지명이다. 얼핏 보면 유교문화를 지향하는 명칭으로 바라 볼 수도 있으나 사실은 일본 쇼와천황 히로히토(裕仁)의 인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원래 소완자로 불러왔던 땅이름을 일본인들이 들어오면서 인평으로 바꿔어 표기하였다. 인평 서쪽 동불사 로투구 일대를 유서촌(裕庶)으로 새기고 동쪽 마을이름을 메이지천황 이름을 따서 명신(일본어 메이지)촌으로 적기 시작하였다. 신풍촌은 원래 땅 밑바닥이 매우 물렁물렁하여 빠지면 나오기 어려운 진펄이여서 사득촌이라고 불렸고 지세가 낮고 습지가 많은 한랭한 곳이었다. 벼 재배에서 이름난 최죽송과 마을 촌민들은 늪지대를 석탄재로 메꾸고 둔덕을 깎아내리며 논밭을 일궈냈다. 당시 중국대지에 널리 알려지었던 “남진북최”란 말은 벼 재배에서 남방에는 강소성의 진영강이 있고 북방에는 길림성의 최죽송이 있다는 뜻이다. 오늘날 강소성에 가보면 진영강의 동상이 세워지어 있는데 연변에는 최죽송 동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지금에 와서 연길시인민체육장은 소완자 인평에 들어앉아 있지만 원래는 연길시인민공원에 자리하여 있었다. 그 옛날 고목들이 울울창창하게 들어서고 비석거리 도가집 국시장 터들이 있어 선인들의 삶의 문화가 오롯이 피어났던 동산인데  일본인들이 들어서면서 긴자를 세우고 공원을 앉히며 수도탱크시설을 설치하여 본래의 모습이 말끔히 지워졌다. 해방 후 연변의 각종 크고 작은 행사를 맞으며 수많은 사람들과 가족들이 찾던 매력적인 공간으로 부상한 명소인데 오늘날에 와서는 이런 역사 기록 한줄 남긴 기념시설물조차 세워지지 않고 있다. 일찍 최초의 간도 벼재배 실험전과 연길수원지가 자리한 웅뎅개 마을은 한때 소시장이 흥성하였고 아바이아매 시라지국 음식점들이 피아노 건반처럼 촘촘히 들어앉았던 곳이었는데 고층빌딩들이 스카이라인을 장식한 오늘날에 와서는 웅뎅개 마을이라는 기념시설물과 골목이름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역사를 품었던 장소들이 이처럼 너무나 빠른 속도로 바뀌고 사라지여 이제는 연길이 우리에게도 생소한 도시로 변해가고 있다. 민족 특색이 있는 도시로 건설하자는 표어는 곳곳에 나부끼고 있으나 타지방에서 수입한 설계도에 따라 건축물을 찍어내듯 늘려가고 허다한 아파트 빌딩 명칭은 건설업체 이름 그대로 달아 걸고 있으며 도로와 골목간판에는 민속과 역사를 품은 곱씹어 볼만한 명칭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현대감각을 자랑하는 화려한 시설과 달리 우리가 발굴 발전시킨 문화 유적과 유적지 보존, 기념시설 조성은 아직도 말 그대로 제자리걸음이다. 그 사이 오랜 세월을 두고 우리 땅을 묵묵히 일궈왔던 선인들의 진실 된 역사와 그들의 발자취는 하나둘 지워지고 줄어들고 있으며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사는 탈고향 현상은 늘어나고 민족 공동체의식 감정적 유대관계 자아 동질성을 잃어가고 있다.

이제는 이 땅에 짧게는 70년 길게는 150여 년이라는 긴 세월이 내려앉는다. 수천만 사람들의 인생도 그만큼 차곡차곡 이 땅에 쌓였다. 마땅히 되살려야 할 기록. 역사에 대한 기억은 과거가 아닌 현실적으로 지금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우리앞에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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