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1000.PNG“야, 저 봐, 신천지 때문에 또 하루 사이 확진자가 100명이 넘어 나왔대. 아이 이상하다. 중국처럼 말 안 들으면 확 족쳐버리면 될 것을 한국정부는 왜 저리 무능하냐?”


“엄마, 한국은 민주주의국가라서 인권 때문에 중국처럼 강력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어요.”

“야, 야, 인권이고 뭐고 이 비상시국에 비상조치를 취해야지. 정부가 저렇게 물렁해서야 진짜 전쟁이 나면 어쩐다냐?”

“잘 대처해 나가겠지 뭐, 엄마가 걱정해서 해결될 일이 아닌데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어이구, 답답해서 어디 보겠니! 이 긴장한 사태에 여당인지, 야당인지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매일 쌈박질이나 하구, 참 기가 막혀. 내일부터 뉴스 안 볼란다.”

“엄마, 이게 민주주의이고, 민주주의는 본래 이렇게 시끄러운 법이예요.”

한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 모녀의 대화 내용이다.

다시는 뉴스 안 본다고 선포한 엄마는 이튿날 아침 눈 뜨자마자 TV를 켠다. 예전 같으면 매일 아침 기상하기 바쁘게 드라마를 보던 엄마가 요즘에는 매일 뉴스를 틀어놓는다. 뉴스 안 본다던 엄마를 딸이 놀려대면 ‘그래도 돌아가는 형세는 알아야지’ 하면서 코로나19에 관심이 크다. 사태가 사태인 것만큼 전 인류가 관심 갖는 코로나19에 엄마가 눈과 귀를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매일 한국이 제대로 대응 못한다는 볼멘소리를 한다. 처음에는 딸이 뭐라 하면 화기애애하게 대화하였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엄마는 신경질적으로 변해간다. 한국이 영 못 마땅하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재한조선족은 머리 한쪽에는 현재 벌어서 먹고 살아가는 고국 한국이 자리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나고 자라고 사회생활 해오던 고향 중국이 차지하고 있다. 마치 한국과 중국이 천평(天平) 양쪽에 올라 있는 것처럼 어느 한쪽의 무게가 커지면 다른 한쪽의 무게가 작아지고 때로는 양쪽의 무게가 비슷해질 경우가 있을 수 있겠으나 대개는 한쪽의 무게가 더 커질 때가 많다. 그것이 한국이 될 수도 있고 중국이 될 수도 있다.

딸은 올해 30대 중반이고 엄마는 60대 중반이다. 딸은 중국연변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에 유학 왔고 현재 한국에서 직장생활 하고 있다. 엄마는 중국 연변 시가지에서 태어났고 모택동 지시에 따라 시골에 가서 집체호 생활 경험이 있다. 딸이 사춘기에 들어설 쯤부터 엄마가 우리 땐 집체호에 가서 고생도 많이 했지만 문예선전대를 조직해 노래와 춤으로 얼마나 즐겁게 보냈는지에 대한 추억을 귀가 따갑도록 들려주었다. 지금도 노래방에 가면 그때 그 시절 노래를 아주 즐겁게 부르면서 흥이 나면 춤 솜씨까지 뽐낸다.

엄마가 한국에 와서 돈을 버느라 고생을 많이 했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주 건전하고 건강해 보였다. 그러던 엄마가 요즘에는 얼굴이 어두워졌다.

지난 한국생활 10여 년 동안 엄마의 심경에 도대체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엄마는 중국연변에서 직장 다니다가 구조조정에 의해 실직당하고 한국에 왔다. 엄마가 한국 올 때는 1990년대 말이다. 남한에 연고가 없어 수속이 어려워 가짜 공무초청장을 들고 왔다. 처음부터 불법신분으로 살아가느라 육체적인 고생보다 마음을 졸이며 정신적으로 고통이 더 심했다. 각박한 자본주의 한국은 엄마를 할아버지가 살던 고국에 찾아온 한핏줄로 대하지 않았다. 앞서 1992년 한중수교 이후 한국 유학 왔던 조선족 젊은이들이 겪었던 조선족정체성 문제를 엄마도 몸소 겪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빚지고 왔기 때문에 오로지 돈을 벌 일념으로 정체성 따위는 뒤로 하고 일에만 몰두했던 것이 그 당시 재한조선족들의 삶이었을 것이다.

2007년 3월 노무현 정부 말기 실시된 방문취업비자(H-2)에 의해 불법체류가 합법화 되었다. 엄마도 중국에서 어릴 때 떼어두고 왔던 딸애를 자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에 대해 많이 쌓였던 섭섭함도 점차 많이 사라지게 되었다. 중국과 한국이 축구하면 어디를 응원할 것이냐? 10여 년 전 한국인들이 재한조선족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궁금증이었다. 나아준 엄마의 편이냐? 키워준 엄마의 편을 들 거냐는 유치한 질문이었다. 당연히 엄마는 여느 조선족들처럼 처음엔 무조건 중국 편이었다. 단일민족, 단일국가로 살아온 한국인들의 머리로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진리만 알았지 키운 정이 낳은 정보다 더 크다는 또 하나의 진리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고 이를 계기로 한국인들이 조선족에 대한 편견이 섰고 조선족은 믿을만한 족속이 못 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원한 짱개’들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는 인식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 특히 2007년 방문취업비자 실시와 그 이듬해인 2008년부터 시행된 재외동포비자(F-4)에 의해 한국에 온 조선족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재한조선족은 한국사회로부터 차별을 당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사회가 조선족을 차별하는 원인이 처음에는 양반과 상놈(常奴) 문화 때문이라는 문제의식으로 접근했는데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 한국에 시집온 조선족여성의 남편인 한국인 배우자가 째지게 가난해도 아내를 욕할 때면 ‘거지같은 나라에서 왔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은 것이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한국인은 양반, 조선족을 못 사는 중국에서 왔다는 이유로 거지(상놈) 취급하는 행태가 바로 이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물론 지금도 이 요소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이것이 한국인이 조선족을 차별하는 근원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인이 조선족을 차별하는 근원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한국인이 조선족을 차별하는데 있어서 진보보다 보수진영이 더 심하다. 우리는 흔히 한국보수를 친일파, 있는 자, 가진 자 등등으로 낙인찍는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멋진 비유가 있다. 경상도에서는 만원을 태운 버스가 다음 정류소에서 손님이 더 오를 경우 자리를 내주면서 ‘함께 가야지’ 하고 나선 사람이 진보이고 ‘아이고 비좁아 죽겠는대 고만 태우고 빨랑 갑시다.’라고 불평을 부리는 사람은 보수라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말씀한 ‘사람이 사는 세상’이란 바로 서로 차별 없이 골고루 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자는 것이다. 즉 내가 불편하더라도 손님을 태우고 함께 가려는 사람은 진보이다. 반면에 다른 손님이 더 오르면 내가 차지했던 공간을 침해당하고 따라서 나는 그만큼 불편해지기 때문에 양보를 거절하는 사람은 보수이다. 남과 북의 관계를 말하자면 진보는 북한을 돕자는 원칙이고 보수는 퍼준다고 비판하고 비난한다. 퍼준다는 것은 나의 몫을 북한에 빼앗긴다는 의식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한국인과 외국인을 비유해 말하자면 전반 한국사회에서 돈을 버는 총량이 100이고 이 전부를 한국사람, 즉 내국인이 독점하고 있었는데 외국인이나 조선족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점차 이들 소수 집단이 10~30% 가져간다면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몫을 빼앗겼다고 생각되어 외국인이나 조선족을 미워하게 되고 따라서 어떻게 하나 밀어내려고 차별을 하는 것이다.

거의 20년 전의 일이긴 하나 대선 때 이회창 보수당 후보가 불법체류를 1%미만으로 줄이겠다는 공약을 내걸었었다. 얼마 전에 보수당 오너인 황교안 대표가 “세금을 안 내는 외국인에게 같은 임금을 줄 수 없이 응당 차별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사회적인 논란을 일으켰다. 보수는 늘 이렇게 외국인을 차별한다. 보수가 외국인을 차별하는 것은 한국뿐만의 일이 아니다. 세계리더를 자부하는 미국은 보수당이 집권하자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쌓고 난민에 대한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민사의 연구에 의하면 어느 나라든 보수는 외국인이나 이민에 대해 우호적인 나라가 없다고 한다.

보수도 문제이지만 대한민국은 현재까지 차별금지법이 없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외국인이나 조선족을 차별해도 법적 처벌이 불가능하다. 국가인권위원회라는 기구가 있긴 하지만 민원이 제기되면 권고조치를 내릴 뿐 법적 해결은 하지 못한다. 그래서 가해자들이 시정하면 좋고 듣지 않아도 어찌할 방법이 없어 외국인이나 조선족 차별을 법적으로 막을 장치가 없다. 일례로 관영매체인 KBS가 1년 넘게 조선족을 비하하는 <황해>라는 개그프로를 방송해도 법적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것이 조선족이 한국에서 차별당하는 객관적인 원인이라면 그럴만한 주관적인 이유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반성해야 한다.

조선족은 중국에서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중국문화가 몸에 배였고 생활관습문화도 배여서 한국생활에 적응이 어렵다. 예를 들어 직장에 근무하다가 그만두겠으면 사직서를 내고 절차를 밟고 사직해야 하는데 무조건 아무 말 없이 이튿날 근무하지 않는 것으로 사직을 무언으로 알리니 사장의 입장에서 환장할 노릇이다. 요즘에는 이런 사례가 적지만 10년 전까지만 해도 비일비재했다. 이외 쓰레기 처리, 무단횡단, 가래침을 아무데다 뱉기, 공공장소에서 떠들기 등 지금까지도 이런 공공질서의식 문제는 심각하다.

이번 코로나19 사태가 시작된 초기에 한국 언론들이 조선족 최대 밀집지역인 대림동을 취재하고 그곳을 더럽게 다루어 반발이 심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자면 대림동이나 가리봉동 혹은 조선족밀집지역 시장거리나 길 양쪽 늘어선 가게들에서 면식(面食)들이 덮는 장치가 없이 바람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어 정말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꼴불견이다. 해바라기 씨를 살 때면 한 줌씩 맛보는데 그 껍질을 바닥에 지저분하게 던져버려 진짜 환경이 더럽기로 말이 아니다. 우리는 늘 남이 우리를 비하한다고 불평만 부리지 말고 우리 자신이 뭘 잘못하고 있는지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한국인에게 비춰 보이면 좋을까 반성이 전혀 없다.

아무리 조선족이 한국에서 차별을 당해도 외국에서 왔으니 그러려니 하고 10여 년을 살다보면 한국사회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기 마련이다. 한국은 중국에 비해 전반 사회가 투명성이 높고, 공공기관이나 병원 등 서비스가 좋고, 치안이 좋고, 기후가 좋아 사람살기가 좋은 것은 사실이다. 민주주의정치가 시끄럽긴 하지만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편하게 살 수 있다.

쉽게 말해서 재한조선족은 한국생활에 두루 만족하면서 어영부영 살아가고 있었는데 요즘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이런 의식이 도망 가버렸다.

이런 변화가 생긴 계기는 코로나19 사태를 대응하는데 있어서 한국이 중국과의 대비에서 비롯되었던 것이고 또 일부 언론이 재한조선족을 더럽게 매도한 불상사도 있고 또한 총선을 앞두고 조선족을 매도하는 실체가 없는 유령인 ‘조선족게이트’니 ‘차이나게이트’니 황당무계한 일이 지난 3월 1일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1위에 오를 정도로 큰 이슈가 되어 조선족을 또 한 번 울렸다. 그건 그렇고 이번 코로나 사태 초기 만약 대리동이나 가리봉 및 중국인 밀집지역에서 확진자가 나왔다면 차별과 혐오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보수의 공격으로부터 막말로 ‘개박산’을 맞을 뻔했는데 다행히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다.

지구촌에서 최고 베스트셀러(<사피엔스>란 책이 무려 1천만 부나 팔렸음)를 자랑하는 유발 하라리는 지난 3월 20일 파이낸셜타임즈에 ‘코로나바이러스 이후의 세계’라는 제하의 칼럼을 기고해서 또 세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이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과 같은 위기상황에서 우리는 두 가지 힘들고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한다. 첫째는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와 시민적 역량강화 사이에서의 선택이다. 두 번째는 민족주의적 고립과 글로벌 연대 사이에서의 선택이다.” 유발 하라리는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대응하는 방식을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누었는데 중국과 이스라엘은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를 발동하였던데 비해 한국, 대만(중국 대북), 싱가포르 등은 시민적 역량강화를 발동하여 효과적으로 막아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중국과 이스라엘은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통제조치로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를 발동하여 전체 국민이 통일행동을 취하도록 만들고 이를 어기면 강력한 형사적 처벌을 내린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는 몇 사람 모여 마작을 놀아도, 음식점에 모여식사를 해도 형사적 처벌을 안겼다. 하다못해 사사로이 아파트 구역을 벗어나도 처벌을 안겼던 것이다. 이에 비해 한국은 수백, 수천이 되는 사람들이 붐비는 장소에서 예배활동을 해도 형사적인 처벌이 없다. 만약 한국은 일부 교회가 아니었다면 진짜 청정지역으로 분류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사례를 목격하는 재한조선족은 한국이 무능하게 보였던 것이다. 반면에 중국의 강력한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를 높이 평가하고 찬양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국정부의 코로나19 ‘물렁한 대응’에 대해 조선족들이 아무리 못 마땅하게 여겨도 전 세계에서 한국이 가장 잘 대응하고 있다는 칭찬 일색이다. 선진국이라고 자랑해오던 유럽나라들이 한국 배우기에 나섰고 세계 최강인 미국도 한국에 진단카드 제공을 요청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이 줄곧 배우기만 했던 독일이 요즘 한국한테서 배우는 반전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이라면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 떠는 일본도 요즘에는 한국칭찬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한국은 76일간 환자 추적·관리한 유일한 나라라고 빌 게이츠도 엄지로 칭찬했다.

한국이 뭘 잘해서 일약 ‘세계적인 스승’이 되었고 일약 스타덤에 오르고 있는가? 선진적인 건강의료보험제도, 선진적인 방역시스템, 정보의 투명성에 따른 관과 민의 정보의 공유, 시민의 협력정신 등 요소들이 세계적으로 높게 평가받고 있다. 이것을 유발 하라리는 ‘시민적 역량강화 시스템’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한국이 잘했다고 하지만 또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시민적인 역량강화 시스템이 좋다고 하지만 전시와 같은 비상시국을 대처하는데 있어서 중국의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에 비해 효율성이 어림없이 못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만약 중국이 이런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를 발동하지 않았더라면 그 큰 땅덩어리에 그 많은 인구를 가진 대국이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중국식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는 중국실제에 부합하는 비상시국 대응에는 ’딱‘이다. 이에 대해선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제기할 수가 없다.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평상시에도 테러방지 위해 국민에 대한 감시 시스템을 구축했는데 이번 코로나19 대응에 그 시스템을 그대로 옮겨 사용해서 중국과 같이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로 분류되고 있다.

물론 중국과 이스라엘처럼 코로나19 대응에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가 다른 나라에도 100% 다 맞는다든지, 혹은 한국, 대만, 싱가포르처럼 시민적인 역량강화 시스템이 다른 나라에도 모두 배울 모델이라는 주장은 적합하지 않다. 나라마다 각기 제 나름의 실제가 있기 때문에 천편일률적인 체제나 시스템을 함께 똑 같이 적용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코로나19가 지나간 이후의 시대에 인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세계는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가 아닌 시민적인 역량강화 시스템을 선택할 것을 호소한다. 나름의 일리가 있겠으나 이 호소도 천편일률적이고 지구촌의 어디서든 맞는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번 사태 이후 시민적인 역량강화 시스템이 한국국민 삶에 더 유리하거나 보탬이 된다면 마땅히 유발 하라리의 선택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유발 하라리의 두 번째 선택, 즉 협소한 민족주의보다 글로벌 연대 강화는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정말 십분 맞는 주장이다. 글로벌 리더를 자칭하던 미국은 트럼프 시대를 맞아 이기적인 국수주의체제로 변화하고 있어 국제리더를 포기한 상태에 처해 있다. 미국 때문에 현재 글로벌 연대가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류는 새롭게 글로벌 연대와 협력을 이뤄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인류는 공멸할 수도 있다.

한편 과거 아세아는 구미의 민주주의에 대해 맹신해온 것은 아닌지, 이 기회를 빌려 깊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와 선진국을 등식화로 인식했던 아세아의 사고가 얼마나 유치한 일인지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현대문명의 본산지인 미국의 경우 코로나19 초기 중국과 한국을 비웃고 때리고 공격하고 마치 자기네는 영원한 청정지역인양 거들먹거리다가 확진자가 30만이 넘어가는 거대 역풍을 맞고 있다. 민주주의 꽃인 아메리카가 이게 웬 말인가? 미국은 건강의료보험이 엉망이어서 정부가 검사비용을 부담하지 않아 400달러 되는 돈을 서민들이 벅차 검사를 외면하고 있어 사태가 더욱 심각해졌고, 방역시스템도 엉망이어서 진단카드조차 한국에 손을 내미는 신세이고, 마스크는 범죄자나 심한 결핵을 앓는 전염병 환자나 끼고 다니는 것으로 인식하는 문화가 있어 전염이 더욱 창궐해졌던 것이다. 어찌되었던 미국은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대응하는 것을 보면 과거 우리가 미국 하면 모든 것이 선진적일 것이라고 너무 맹신했다는 생각이 강열하게 느껴진다.

그럼 미국의 본가인 영국은? 그들과 거의 같은 종족인 백인 국가들인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 나라는 어떨까? 이들 나라들도 미국 처지와 별로 나은 바가 없이 도진개진이다. 이탈리아는 사태가 너무 심각해 중국처럼 강력한 조치(형사 발동)를 취하고 있다.

심각한 사태 앞에서는 장사가 따로 없다. 민주주의는 허울 좋은 개살구일 수 있다. 때문에 이탈리아는 전체주의 감시체제를 취할 수밖에 없다. 일본도 수도 동경을 봉쇄하느니 마느니 딜레마에 빠져 있다. 필리핀 대통령은 말을 듣지 않는 자에게 총을 쏴도 좋다는 어명을 내렸다. 역시 전체주의 감시체제가 최후의 처방이자 유일한 처방이 될 것이다.

우리가 상식처럼 알고 있던 지구상 선진국인 미국과 유럽나라들 및 일본의 사태가 심각해짐에 따라 한국이 가장 돋보이는 스타로 떠올라 갑자기 외교가 다망해졌다. 요즘 대한민국은 갑자기 지구촌의 ‘공자’가 되어 한국인들은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한국국민이라는 사실이 이렇게 자랑스럽게 느껴본 적이 이번이 처음입니다.”

요즘 한국인들의 정서를 나타내는 말이다. 재한조선족사회는 이와 같은 세상이 돌아가는 심원(深遠)하고 심오한 이치와는 거리가 멀게 한국과 중국 단순한 비교에 물젖어 있다. 요즘 엄마의 위챗이나 카카오톡방에는 온통 ‘인민전쟁 승리’ ‘봐라 대국은 대국이다’ ‘중국이 얼마나 통 큰 나라인가!’ ‘영웅의 도시 우한!’ ‘조국을 빛낸 우한 지원 영웅적인 의료일군들!’ 등등의 중국 찬양으로 가득 차 있다. 중국에서 나고 자랐고 중국에서 성인이 되어 한국에 왔기 때문에 재한조선족은 중국 찬양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천평 한쪽에 중국 찬양이 무게를 너무 눌러 다른 한쪽의 천평 그릇의 한국비하(비하까지는 아니더라도 못마땅함)가 허망 공중에 떠 있다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겨날까? 인간은 세 살 때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다. 또 독립적인 세계관이 형성되기 전에 받은 교육은 성인이 되어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 가령 성인이 된 후라도 강력한 이념과 사상교육 앞에는 장사가 따로 없다. 재한조선족이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대응하는 중국과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완전히 전체주의적인 일원화 교육을 받았던 영향이 다시 작동되어 이런 현상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엄마가 집체호 시절 불렀던 노래와 추었던 춤은 대개 이념과 사상이 짙은 ‘문예선전’이었다. 요즘 엄마를 바라보는 딸의 생각을 ‘우리 엄마는 집체호 시절로 돌아갔어요’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재한조선족은 부모의 품을 떠나 새로운 상대를 맞아 새롭게 생활하고 있다. 시집 간 딸이 친정에 대한 연민은 당연한 일이다. 친정 부모에 대한 미련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 또 잊어서는 절대 안 된다. 한편 새로운 대상을 만나 살면서 친정 부모의 장점만 생각하고 상대의 환경에 적응할 노력은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상대의 허물만 보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피곤할까! 피곤할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괴로울까! 이슬람 국가가 싫으면서도 하나님의 복음 전파라는 사명을 지닌 열혈 전도사라면 모를까, 절이 싫다면서 계속 버티는 중의 행위는 결국 자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산에 가면 산에 맞는 노래 부르고, 강에 가면 강에 맞는 노래를 부르라는 속담에 굳이 치우칠 필요가 없더라도 천평 양쪽에 한국과 중국의 무게가 비슷하게 올려놓고 지혜로운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다.
 
필자/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칼럼니스트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김정룡 칼럼] 코로나19와 흔들리는 재한조선족 정체성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