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18(월)
 

 

●김정룡(다(多)가치 포럼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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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역사에 선비정신이라는 것이 있다. 선비 정신은 시대적 사명감과 책임 의식으로 대변되는 정신이다. 또한 선비 정신은 청렴과 청빈을 우선 가치로 삼으면서 일상생활에서 검약과 절제를 미덕으로 삼은 정신이다. 선비는 시류에 영합하는 것을 비루하게 여겼고, 역사의식에서 시시비비(是是非非)의 춘추(春秋) 정신을 신봉했다.


관계나 사회 부조리를 목격하고도 눈을 감고 모르는 척 하면 선비정신이 아니다. 그 부조리를 저지른 사람이 고관대작이거나 심지어 왕이라 할지라도 모르는 체 하면 안 된다. 죽을 각오로 바로잡도록 청을 올려 간언해야 한다. 정의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는 것이 바로 선비정신이다.


삼국시대에 투철한 선비정신의 대표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포훈(鮑勛)이다.


포훈은 한나라의 사예교위를 지낸 포선(鮑宣)의 9대손이다. 포훈의 아버지 포신은 영제 때 기도위로 임명되었다. 포신은 조조와 함께 동탁토벌 전투에서 사망했다. 조조는 너무 비통한 나머지 포신의 모습을 만들어 나무에 걸어놓고 추모할 정도였다.


포훈은 조조가 가장 아끼던 전우(戰友)의 아들이기 때문에 각별히 관심하고 배려했다. 건안 22년(217) 태자를 세우고 포훈을 중서자(中庶子)에 임명했다. 중서자는 태자의 시중 겸 고문이다. 태자와 가장 친밀해야 하므로 대부분 덕행이 뛰어난 자 중에서 임명된다. 얼마 후 포훈은 지방으로 나가서 위군서부도위(魏郡西部都尉)가 되었다. 태자비인 곽 부인의 동생이 곡주현(曲周縣)의 관리가 되었는데 관의 베를 훔쳤으므로 법률에 따라 목을 베어 시장에 버렸다. 당시 조조는 초현에 있었고 태자만 업성에 있었다. 태자는 처남을 구하려고 여러 차례 친히 편지를 써서 사면해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포훈은 감히 독단적으로 석방하지 않고 사실대로 상세하게 보고했다. 포훈은 이전에 동궁에 있을 때에도 공정한 태도를 고수하며 굽히지 않아 태자는 당연히 좋아할 리가 없었다. 맘속으로 벼르고 있던 차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 포훈은 태자의 눈엣가시였다. 어떻게 하나 포훈을 내쫓으려고 하던 와중에 마침 군의 경계 지역에 배치했다가 휴가 중인 병사로 기한을 어긴 자가 있었으므로 은밀히 중위에게 명하여 상주하고 포훈을 면직시켰으나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시어사로 임명했다.


연강 원년(220) 세상이 좁다 하고 주름 잡던 조조가 세상을 떠나자 태자 조비가 즉위했으며 포훈은 부마도위의 신분으로 시중을 겸했다.


조비는 단순히 아버지 조조의 뒤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해보지 못한 황위에 올랐다. 위왕이 아니라 위황(魏皇)이다. 아버지를 뛰어넘었으니 얼마나 신났겠는가? 역대로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면 황궁을 넓히거나 누각을 멋지게 짓고 동산을 꾸미는 일에 정력을 쏟는 일이 자주 있었다. 조비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를 가만히 지켜 볼 포훈이 아니다.


“현재 급박한 것은 오직 군사와 농경뿐이니 백성에게 관대하고 은혜롭게 대하십시오. 누각과 정자, 그리고 동산을 짓고 꾸미는 일은 응당 뒤로 미루어야 합니다.”


조비가 태자 때부터 사냥을 몹시 좋아했다. 최염이 간언하여 한 때 절제하긴 했지만 고질적인 취미를 버릴 수가 없었다. 황제가 되었으니 더 폼 나게 사냥에 나섰다. 조비가 수렵하러 궁궐을 나가려고 할 때 포훈은 수레를 멈추게 하고 상서해 말했다.


“신이 듣건대 오제와 삼왕은 근본을 밝혀 교화를 세우지 않은 적이 없고 효로서 천하를 다스렸다고 했습니다. 폐하의 어짊과 성스러운 덕과 백성을 측은해하는 마음은 고대의 빛났던 선왕과 똑 같습니다. 신은 폐하께서 당연히 전대 명왕의 자취를 계승하여 만 대로 하여금 폐하를 준칙으로 삼을 수 있게 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어찌 폐하께서는 복상기일 중에 말을 달려 수렵을 하십니까? 신이 죽음을 각오하고 이 말을 하니 폐하께서는 신의 마음을 살펴주십시오.”


조비는 더는 태자 신분이 아니다. 태자시절에는 관료들의 간언을 받아들여 수렵용 물건들을 폐기하면서까지 절제하였지만 지금은 황제다. 하늘 아래 가장 높은 신분이니 신하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만무하다. ‘유아독존, 독왕독래(唯我獨尊, 獨往獨來)’하는 천자다. 조비는 즉시 상소문을 찢어버리고 제 갈 길을 떠났다.


가는 도중에 조비는 불편한 심기를 달래보려고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려 수행하는 신하에게 물었다.


“수렵하는 즐거움은 음악과 비교하면 어떻소?”


조비의 비위를 맞추는데 이골 난 시중 유엽이 대답했다.


“수렵하는 것이 음악보다 낮습니다.”


이 볼썽사나운 꼴을 그냥 지나쳐 버릴 포훈이 아니었다.


“무릇 음악이란 위로는 신명(神明)에 통하고 아래로는 인리(人理)를 조화롭게 하고 정치를 융성하게 하며 교화를 실행하여 온 지역이 평안하게 다스려지게 합니다. 풍속을 바꾸는 데는 음악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하물며 사냥을 하여 황상의 화려한 수레 덮개를 들녘에 드러내어 생육(生育)의 지극한 이치를 상하게 하고 바람으로 머리 빗고 비로 목욕하면서 계절에 상관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옛날 노 은공은 당(棠)으로 가서 고기잡이하는 것만 보았는데도 <춘추>에서는 이 일을 풍자했습니다. 비록 폐하께서 수렵을 중요한 일로 생각하신다 하더라도 어리석은 신하는 이렇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포훈은 조비에게 이와 관련하여 또 상주문을 올렸다.


“유엽은 간사하고 아첨하며 충직하지 않습니다. 그는 폐하께 과분하고 농담하는 말에 영합합니다. 옛날 양구거(梁丘據)는 천대(遄臺)에서 아첨하는 말을 했는데 유엽이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청컨대 담당 관리가 죄를 논하여 조정을 일신하게 해주십시오.”


조비는 너무 화가 나서 수렵 가던 걸음을 멈추고 말머리를 궁궐로 돌렸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즉시 포훈을 우중랑장(右中郞將)으로 좌천시켰다.


황초 4년(223) 상서령 진군과 복야 사마의는 함께 포훈을 궁정(宮正)으로 추천했는데 궁정은 즉 어사중승이다. 조비는 여러 신하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부득이 그를 기용했는데 모든 관료를 엄하게 다스리자 두려워하고 숙연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유비가 죽은 후 촉한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된 제갈량은 북벌에 힘을 쏟았고 조비는 오나라 정벌에 정력을 기울였다.


조비의 이 계획에 포훈이 또 태클을 걸고 나섰다.


“왕의 군대가 자주 정벌하러 나갔지만 승리하지 못한 것은 대체로 오와 촉 두 나라가 입술과 이처럼 서로 의지하고 산과 물의 험난함에 기대어 공격하여 얻기 어려운 지형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오나라를 정벌할 때 용주(龍舟)가 표류하여 오나라 군사가 있는 남쪽 해안에 떨어지매 폐하의 육체는 위험에 처했고 신하들은 간담이 부서질 지경이었습니다. 이때 종묘는 거의 기울어 엎어지려고 했으니 이 일은 백 대의 교훈이 될 것입니다. 지금 또다시 병사를 수고롭게 하여 먼 곳에 있는 적을 습격한다면 하루에 천금을 소비하게 되어 나라 안의 재물은 고갈될 것이고 교활한 도적으로 하여금 우리 군대를 농락하도록 하게 될 것이므로 신이 사사로이 이 일을 생각해보건대 불가하다고 봅니다.”


조비는 사사건건 태클을 거는 포훈 때문에 요즘 말대로 하면 스트레스가 쌓일 대로 싸여왔다. 참는데도 한계가 생겼다. 치서집법(治書執法, 엄격한 법리를 적용하여 관원의 불법행위를 탄핵함)으로 좌천시키고 조서를 내렸다.


“포훈은 사슴을 말이라 하고 있으니 체포하여 정위(廷尉, 황제의 명에 따라 진행하는 특별 재판)에 넘기도록 하라.”


정위는 법에 따라 논의하여 판결을 내렸다.


“징역 5년이다.”


이에 삼관(三官)이 반박했다.


“법률에 따르면 벌금 두 근(斤)이면 족합니다.”


여러 신하들이 포훈을 두둔하자 이에 조비는 단단히 화가 났다.


“포훈은 살려줄 여지가 없거늘 너희들은 감히 그에게 관용을 베풀려 하고 있다. 삼관 이하 담당 관원을 체포하여 자간(刺姦, 군대의 동태를 감시하고 반역자가 생기면 보고하는 관직)으로 넘기고 쥐 열 마리와 같은 동굴에 있도록 하라.”


태위 종요, 사도 화흠, 대장군 진군, 시중 신비, 상서 위진, 수연위(守延尉) 고유 등 당시 한다하는 고관대작들이 함께 함께 표를 올렸다.


“포훈의 아버지 포신은 태조를 위해 공을 세웠습니다.”


포훈의 죄를 사면해줄 것을 청했다. 그러나 조비는 받아들이지 않고 포훈을 처형했다.


포훈은 내적으로 수양하며 청렴하고 베풀었기에 죽는 날 집에는 재산이 없었다. 20일이 지나 조비 또한 붕어했다. 많은 사람이 포훈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한탄했다.


조조의 진영에는 포훈과 같이 청렴하고 대가 바른 선비정신을 가진 신하가 많았다. 사마지(司馬芝)란 선비가 있었다. 그는 곧은 태도로 황후의 청탁에도 굴하지 않는 선비정신을 발휘했다.


사마지는 젊어서 서생이 되었고 전란을 피해 형주로 갔는데 노양산(魯陽山)에서 도적을 만났다. 함께 가던 사람들은 모두 노약자를 버리고 달아났는데 사마지만은 혼자 앉아서 노모를 지켰다. 도적이 다가와서 사마지에게 칼을 들이댔다. 사마지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제 어머니는 늙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은 오직 당신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도적이 말했다.


“이 사람은 효자다. 이 자를 죽이는 것은 의롭지 못하다.”


당시는 사회적으로 아무리 도적떼들 지라도 효만은 중히 여겼던 모양이다. 사마지는 화를 면하고 작은 수레에 어머니를 태우고 갔다. 사마지는 남방에서 10여 년을 살았는데 직접 밭을 갈며 지조를 지켰다. 조조가 형주를 평정하고 사마지를 제남군 관현의 장으로 임명했다.


사마지는 이르는 곳마다 법과 원칙 및 질서를 철저하게 지켜 승승장구했다. 그가 대리정(大理正, 황제의 명에 따라 진행하는 특별 재판을 다룬다. 정위정이라고도 함)으로 있을 때 관부의 베와 비단을 훔쳐 변소에 갖다놓은 자가 있었다. 관리들은 여공을 의심하여 붙잡아 옥에 가두었다. 사마지가 말했다.


“무릇 죄인에게 벌을 줄 때 과실이 있다면 그 과실은 가혹하게 함에 있습니다. 지금 장물을 먼저 획득한 후에 그녀를 심문하십시오. 그녀가 만일 견디지 못하면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게 될 것입니다.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정서로는 재판을 할 수 없습니다. 간명하여 쉽게 따르게 하는 것이 대인의 교화입니다. 죄를 지은 자를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평범한 시대의 통치일 뿐입니다. 지금 의심받은 자를 용서함으로써 쉽게 따르게 하는 의로움을 융성하게 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습니까?”


조조는 그의 건의를 따랐다.


조예가 즉위한 후 사마지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내렸다. 오래지 않아 특진 조홍의 유모 당(當)과 임분공주의 시녀가 함께 무간산(無澗山)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다가 옥에 갇혔다. 변 태후가 황문을 사마지의 관소로 보내 뜻을 전했지만 그는 보고하지 않은 채 불시에 낙양의 옥리에게 칙명을 내려 심리하도록 하고는 상소하였는데 조예는 사마지의 손을 들어주었다.


사마지는 천성이 밝고 정직했지만 품행을 바르게 하려고 애쓰지는 않았다. 빈객과 의논할 경우 그의 생각에 수긍할 수 없으면 곧 정면에서 그 사람의 단점을 지적하지만 물러난 후에는 비난하지 않았다. 관직에 있을 때 세상을 떠났는데 집에는 남아 있는 재산이 없었다.


<삼국지> 저자 진수는 사마지를 이렇게 평가했다.


“위나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남윤을 지낸 사람 중 사마지에 미치는 자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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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재해석⑮ 직언을 고집하다 조비의 미움을 받아 죽은 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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