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중국 조선족축구원로 시리즈(2) “장장 60여년 축구와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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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조선족축구원로 시리즈(2) “장장 60여년 축구와 더불어

중국 조선족축구원로 시리즈(2) 축구원로 박만복 선생편
기사입력 2014.03.17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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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투데이 연변리포터 김철균


“나의 일생은 축구의 일생이다. 인생의 청춘기에 들어서서 축구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오늘 이 때까지 이르게 됐다.”


이는 중국 조선족축구계의 박만복 원로가 늘 입버릇처럼 외우는 얘기이다. 그도 그럴 것이 축구와 더불어 장장 60여년간 고집스레 한우물만을 파 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럼 박만복 원로의 축구생애를 단계로 정리해 본다면 대체적으로 네개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단계 : 선수로 뛰던 나날

 

dspdaily_com_20140317_215728.jpg왕청현 태생인 박만복원로가 전업 축구선수생활을 시작하기 전인 1953년 3월, 그는 과외축구팀에 불과한 연변 축구팀의 주장으로 전국 11개 성, 시 청년축구경기에 참가, 당시 연변팀은 그 경기에서 준우승을 따내 공화국 창건 이래 처음으로 중국에 연변이란 조선족집거지구가 있고 축구도 아주 잘한다는 이미지를 전국 각지에 심어 주었다.

 

그후 박만복은 중앙체육훈련반 축구팀에 선발됐고 뒤따라 인차 24명(조선족 7명)으로 구성된 제1기 중국 청년축구 유학대표단과 함께 헝가리로 향발, 유학시절에 중국 청년팀의 이름으로 루마니아, 폴란드, 동부 독일, 체코슬로바키아, 알바니아 등 나라 축구팀과 자주 평가전을 치르군 했다. 특히 1955년 폴란드 수도 바르샤와에서 열린 제5회 세계청년연환절 개막식 축구경기에서 박만복을 포함한 중국청년팀 수비라인은 그 탄탄한 수비력으로 하여 “깨뜨릴 수 없는 만리장성”이란 별호를 갖게 됐는데 그 중앙수비가 바로 박만복이었다.


또한 유학시기 박만복은 헝가리국가팀 감독으로부터 중국청년팀의 “로켓”으로 불리우게 됐고 귀국 후에는 북경팀의 선수로 뛰면서 1957년 전국축구갑급리그 우승과 1959년 제1회 전국운동회 축구경기 3등을 하는데 마멸할 수 없는 기여를 했다.


그리하여 1957년 중국에서 처음으로 건장제를 실시할 때 중국축구계의 17명 동료들과 함께 건장칭호를 받게 됐다.

 

두번째 단계 : 축구팀 사령탑 잡던 나날


1959년 박만복 원로는 어느 한 경기에서 다리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선수대오에서 물러나게 됐다.


그뒤 북경팀의 감독조리로 2 - 3년간 있으면서 일정한 경험을 쌓자 팀의 사령탑을 잡을 야망이 생겼고 따라서 우리 민족이 집거해 사는 연변의 축구부터 춰세워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하여 북경의 우월한 대우, 훈련시설, 개인발전전도 등을 그대로 뿌리치고 연변으로 달려왔는데 그 때가 바로 1962년 8월경이었다.


길림성축구팀의 사령탑을 잡은 박만복은 길림성팀 선수들이 속도가 빠르고 완강하고 체력이 왕성하지만 기전술이 차한 페단에 근거하여 유럽식기전술을 팀에 주입, 그 기전술을 당분간 받아물지 못한 팀이 1963년 전국축구갑급리그에서 강급해 을급으로 내려가는 불운을 지니긴 했으나 그 뒤 반복적으로 기전술응용을 교정한 결과 1964년에 인차 을급리그 2등으로 갑급에 올라왔고 바로 올라온 그 해인 1965년엔 끝내 중국조선족축구력사에서 휘황찬란한 전국축구갑그리그의 우승이란 전과를 올리었다.


또한 그해에 박만복 감독은 허경수, 정종섭, 당봉상, 김정식, 이두근, 유명복 등 6명 선수를 국가팀에 수송해 냈을뿐만 아니라 지운봉, 정지승, 동경춘 등 10여명의 건장도 육성해냈다. 그것은 박만복 원로의 감독생애에서 가장 눈부신 전성기었다.


그뒤 1971년 문화혁명의 가장 거센 폭풍우가 지나가자 박만복 원로는 재차 길림성 청년 3팀을 조직, 이 팀은  1973년 전국축구청년연맹전에서 4등이란 영예를 지니게 됐으며 그 시기에 염승필, 이승범, 전석기, 우근화 등 많은 우수한 선수들을 육성해냈다. 감독생애를 거치면서 박만복 원로는 도합 100여명의 우수한 선수와 10여명의 건장을 육성, 이는 중국축구 특히 우리 민족의 축구발전사에 있어서 거룩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세번째단계 : 축구친목회 회장사업 맡던 나날


20세기 80연대에 이르러 중국축구의 발전템포가 빨라짐에 따라 조선족축구는 그 보급과 발전의 위기를 초래했다. 이에 박만복 원로는 조선족축구로 하여금 연변을 벗어나 동북 3성 및 전국에 보급해야 할 사명감을 안고 중국조선족축구친목회를 구상, 그 것이 바로 후에 국가민족사무위원회와 국가체육운동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국가민정부에 등록된 국가1급체육사회단체(국내 55개 소수민족 중 유일한 체육단체)인  중국 동북조선족축구친목회이다. 친목회가 설립된 후 박만복 원로는 직접 그 회장직을 맡고 많은 사업을 했다.


우선 동북3성 각 지구에 친목회사업위원회를 설치하고 회원들을 적극 발전시키는 기초상에서 200여차에 달하는 축구지도원 및 심판원 양성반을 조직하여 조선족축구발전의 템포를 다그쳤으며 근 10만명에 달하는 조선족 청장년과 소년아동들을 축구운동에 참여하게 했다. 한편 중국조선족 근 100년사에 있어본 적이 없는 중국 전국조선족축구운동회를 5차에 거쳐 조직했으며 매차례의 경기 때마다 한국축구연합회의 여러개 팀을 초청하여 경험교류를 하군 했다. 지금 동북조선족 축구친목회에는 20여개의 분회와 1000여명에 달하는 회원이 있는바 10년간 걸어온 그 자취마다에는 창시인의 한분이신 박만복 전임회장의 노고가 역역히 슴배어 있다.


 dspdaily_com_20140317_215904.jpg


네번째단계 : 축구계에서 은퇴한 뒤


지금 박만복 원로는 고래희를 훨씬 넘긴 몸이다. 하지만 여전히 축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박만복 원로는 여전히 연변축구를 관심하고 있다.


은퇴 뒤 한시기 박만복 원로는 연길시에 장백축구학교를 세워놓고 축구후비력육성에 여생의 정력을 쏟다붓기도 했다. 당시 그 목적은 각종 원인으로 기회를 놓쳐 체육학교같은 곳에 가지 못한 축구인재를 받아들이고 키워주는 것, 그러한 취지로 세운 학교이기에 박만복 원로는 돈벌이보다는 축구인재발견에 모를 박았으며 그 학교는 당시 상급 해당부문의 비준을 거쳐 정식으로 직업고중행열에 들어서기도 했다.


한편 박만복 원로는 지금도 현재의 연변팀을 몹시 관심하면서 경기장을 자주 찾는가 하면 구단내에 존재하는 문제점도 지적하고있으며 또한 가끔씩 매스컴에 축구에 관련된 글도 써서 발표하군 한다.


중국축구 및 조선족축구의 발전을 위해 사심없이 일해온 중국축구계의 원로이며 도사이신 박만복 원로 – 그이가 걸어온 발자취마다에는 그렇게도 자랑찬 긍지로 주렁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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