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한국생활수기] 나의 주방 보조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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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생활수기] 나의 주방 보조 생애

기사입력 2014.11.30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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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봉순

한국정부의 무연고동포방문취업제가 탄생하면서 나에게도 “행운”이 떨어졌다. 2008년 3월 9일, 나는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오매에도 그리던 한국땅에 들어섰다. 외조카의 집에 머무르면서 외국인 등록증과 취업교육을 받고 나니 3월은 훌쩍 지나가버렸다.

취직을 하자고 교차로 벼룩시장을 뒤져보니 모텔청소 일이 그래도 내 적성에 맞을 듯 했다. 그런데 대부분 모텔에서 경험자만 요구하거나 나이를 제한,아니면 외국인을 채용하지 않는다면서 조선족을 거부하는 바람에 할수 없이 나를 받아줄 수 있는 곳이라면 그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고 닥치는대로 하고싶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처음 취직한 곳이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의 한 구내식당이였다. 이 곳은 편벽한 곳이라 버스정류소와도 멀리 떨어졌고 이 식당에서 식사하는 고정 인원이외오가는 사람 하나 볼 수 없었다. 내가 자는 곳은 주방 옆 칸이었는데 습한데다 냉장고 소음이 요란히 들려 처음에는 잠도 잘 수 없었다. 여기서 나는 주방보조로서 사모님과 둘이서 매일 240인분의 식사를 준비해야 하였다.중국에 있을 때는 출근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남편과 둘이 먹는 끼니도 대충 해먹다 보니 주방 일 솜씨는 매우 서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 겸손히 배우고 열심히 하리라고 다졌다.

일하는 첫날 아침, 사모님은 쌀은 창고에 있고 밑반찬은 여기 있고 된장은 저기 있고 냉장고엔 무엇이 있고 하면서 염불하듯 쭉 소개하는데 사모님이 가리키는 주방 옆간을 보니 거기에는 커다란 냉장고 6개가 어마어마하게 서있었고 옆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는 크고 작은 통과 박스들이 줄줄이 놓여있었다. 사모님은 맨 먼저 점심밥을 할 쌀을 씻으라면서 큰 소래 3개에다 쌀을 쏟아 부었다, 나는 물을 붓고 두 팔에 힘을 주어 쌀을 문지르며 씻기 시작했다.

내가 하는 것을 본 사모님은 못마땅한듯 나를 한 켠으로 밀어내더니 밥주걱으로 쌀을 몇 번 휘젓더니 물을 찌워내고는 그렇게 둬 번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일도 많고 쌀도 많은데 단 둘이 먹는 밥을 하듯이 할 순 없다. 한가지를 배운 셈이다. 그런데 쌀을 다 씻기도 전에 옆칸에 가서 가지., 미나리 감자를 가져다 다듬고 껍질을 벗겨 씻어 썰어놓으란다. 금방 가지 미나리를 다듬질했는데 또 가스 불에 나물 데울 물을 얹어놓으란다.나는 물을 가득 담은 알루미늄 솥을 가스불우에 놓고 솥뚜껑을 덮고 하던 일을 계속 하려는데 사모님은 “물 끓이는데 솥뚜껑은 왜 덮냐? 어디서 그렇게 하는걸 보았냐? 누가 그렇게 하라더냐.” .하며 연신 나무람했다.

물을 빨리 끓이려고 뚜껑 덮었는데 그것도 잘못인가? 내키지 않았지만 뚜껑을 열어놓고 하던 일을 또 하려는데 이번엔 옆칸에 가 김치를 가져다 썰란다. 지금까지 벌려 놓은 것만으로도 정신 못 차리겠는데 또 김치까지 가져다 벌려 놓아? 나는 대답해놓고 하던 일을 해치우고 김치를 썰려고 일손을 다그치는데 “김치 가져다 썰라는데 뭘 해? 내 말 못 들었어?” 하고 꽥 소리 지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던 일을 다 하고 썰면 안 되냐고 한마디 여쭸더니 “금방 온 사람이 뭘 안다고 그래? 하라는 대로 그냥 하라.” 며 내 말을 들을 생각 하지 않았다 나는 사모님 뜻대로 김치를 가져다 썰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김치를 한창 썰고 있는데 또. 이걸 제자리에 놓아라 저걸 원래 자리로 가져가라 하고 연신 분부하신다. 처음부터 모든 물건의 제자리를 다 알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지체되면 사모님은 “빨리, 뭘 해?” 하고 소리를 지르며 “먼저 하던 아줌마는 무엇이나 빨리 했는데 아줌마는 왜 그리 굼떠”하고 푸념한다. 사모님의 잔소리를 들으며 무조건 복종하고 무조건 빨리 하기 훈련부터 했다.

순서 없이 이일 저일 다 해보면서 한참 바삐 돌아 치니 어느덧 점심 때가 되여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모님은 손님에게 밥을 떠 주면서 꼭 “맛있게 드세요.” 라고 말하란다. (200여 번이나?), 귀찮았지만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십여분 지나니 빈 그릇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다 모아 퐁퐁 물에 씻고 세척기로 한번 더 씻은 후 제자리로 날라갔다. 손님이 다 간 뒤에야 우리는 점심을 먹었는데 입맛도 맞지 않고 주인들과 같이 먹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설거지를 끝내니 두시반. 딱 반시간만 쉬고 또 저녁 준비를 해야 한단다, 오후에도 바쁜 가운데 잔소리는 끝없었다. 저녁 8 시에야 하루 일이 끝났는데 팔다리가 나른하고 허리가 시큰했다

이튿날 점심엔 고구마튀김을 하니 먼저 고구마를 씻어 손가락만큼 크기로 썰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곳의 칼 또한 집에서 쓰던 칼과는 달리 길고 끝이 뾰족해 쓰기에 불편해 보였고 큼직한 고구마들도 썰기 힘든 딱딱한 품종 들이었다. 고구마를 다 씻은 후 울며 겨자 먹기로 칼을 들었다. 처음 몇개는 그런대로 썰었지만 결국은 사고를 치고야 말았다. 고구마를 썬다고 힘주었던 칼이 빗나가면서 면 바로 왼손 식지로 깊숙이 건너갔다. 흠칫하며 손을 뺐는데 손가락에서는 벌써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를 목격한 사모님은 “칼질도 어찌 그렇게 서투냐”고 또 핀잔이었다. 나는 미리 준비했던 밴드로 지혈 처치를 간단히 하고 하던 일을 계속 했다. 그러나 피는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나왔다. 잠시 후에 장갑 속이 너무 끈적끈적하고 불편해서 장갑을 벗고 보니 손목까지 피가 묻어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손을 바라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손이 아프기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자본주의사회의 냉혹함과 무정함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래도 돈 벌러 온 이상 모든 것을 참고 견디자며 이를 악물고 일에 달라붙었다. 그렇지만 몸은 내 의지를 따라주지 않았다. 이튿날부터 손가락이 쿡쿡 쏘기 시작했다. 그런 손에 큰 고무장갑을 끼고 일하려니 손은 더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럴수록 사모님의 꾸지람은 더 모질고 심해졌고 나 또한 모든 감각기관이 고장 난 듯 일을 더 엉망으로 해나갔다.

1, 사모님이 옆칸에 가서 된장을 가져오라는데 몇 번을 둘러보고도 찾지 못해 빈손으로 돌아왔는데 사실은 아주 잘 보이는 곳에 있었다.

2, 마요네즈 (듣지 않던 단어) 가지러 창고까지 가서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무엇을 가져오라 했던지 그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가져오지 못했다. 역시 잘 보이는 곳에 있었는데.

3, 냉장고에 있는 마늘을 가져오라 해서 6개의 냉장고를 다 열고 찾아보고서도 마늘이 없어 못 가져왔다. 나는 통마늘이거나 껍질 벗긴 알 마늘인 줄 알았는데 결국은 다진 마늘봉지를 말한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사모님은 “한글 모르냐? 눈은 어디 두었냐?” 라며 야단친다.

4. 바가지를 가져오라 하는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어 또 그대로 왔다, (나는 집에서 심은 그런 바가지만 어디 있는가 살폈다.) 그런데 사모님이 가지고 온 것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작은 대야였다. 한국에서 그런 것을 바가지라 하는 줄 누가 알았나? 너무 민망해 몸 둘 바를 몰라 하는데 사모님은 또 사정없이 “바보야? 머저리야? 바가지도 몰라?” 하고 연방 내쏘는 것이었다.

5. 또 한번은 일하다가 x문 열라 하기에 보니 창문은 열려있었다. 그래서 나는 닫으라는 말을 열라는 말로 잘못 들었나 싶어 달려가 창문을 닫았다.. 그랬더니 사모님은 “열라는 문은 안 열고 열어놓은 창문은 왜 닫아? 왜 점점 더 멍청해지는 거야!”하고 많은 손님들앞에서 또 한바탕 꾸짖었다.”

자신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은 잘 알지만 사모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날카롭게 가슴을 찔렀다. 며칠 동안 하루 14시간을 그냥 이런 꾸짖음속에서 일을 했다. 어떤 때는 정말 쥐 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며 열심히 일하려 하였지만 이런 수모를 받으며 일을 계속 하려니 자존심이 더 이상 허락하질 않았다.

6일째 되던 날, 꾸지람과 잔소리를 견디다 못해 끝내 “내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여기서 나갈테니 다른 사람을 구하세요”라고 한마디 했다. 뜻밖에도 이 말을 듣는 순간 사모님은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하던 꾸중을 뚝 멈추는 것이었다. 한참 동안 말없더니 “안 할 것이면 일찍 말하지, 구인광고는 어제 취소 했는데 …” 하고 제법 부드러워진 어투로 원망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실 나도 여기서 오래 할 예산이었으나 내가 일을 너무 못해 사모님께 미안해서 더 있을 수 없어요. 그러나 다른 사람 구할 때까지는 열심히 할게요.” 했다. 이 말을 뱉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듯 했다. 사모님도 더는 말이 없었다. 그래도 그때쯤은 웬만큼 적응된 셈이어서 나도 눈치를 보아가며 스스로 일을 찾아 했다. 이날은 처음으로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일한 하루였다.

이튿날 사모님은 내가 사모님께 미안해서 가련다는 말에서 내 인품을 보아냈다며 가지 말고 계속 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한주일만에 사모님한테서 처음 들은 기분좋은 말이었다. 이날부터는 저도 모르게 사모님에 대한 거부감도 없어진 듯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주방 일을 하는 외에 틈을 타서 여기저기 청소도 했다. 며칠 만에 찬장과 냉장고, 세척기와 솥벽의 타일까지 어데라 없이 오래 묵은 기름때를 죽 벗겨놓았다. 여기저기를 다 살펴보던 사모님은 흐뭇해하며 내가 전에 있던 아줌마보다 깔끔하게 일한다고 하였다. 처음 듣는 칭찬이었다. 그 후부터는 꾸중과 잔소리가 많이 뜸해졌고 나에 대한 말투가 퍽 부드러워졌다.. 가끔 내가 실수해도 예전처럼 핀잔을 주는 것이 아니라 유머를 섞어가면서 잘못을 지적해주고 때때로 칭찬도 해주었다.그러면서 여기서 계속 일해라면서 월급도 올려주겠다고 했다.그러나 이미 내뱉은 말인지라 사절했지만 내 기분은 많이 좋아져 가끔씩은 일하면서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흘러 나오군 했다..

이렇게 며칠 지나고 14일 째 되는 날 저녁 연변에서 온 아줌마가 면접을 와 합의가 되여 나의 주방보조 생애는 끝났다. 떠날 때 사모님은 금방 정들었는데 가는 것이 서운하다며 옷견지며 화장품을 선물로 주는 것이었다. 나도 서운했다. 그래도 일하는 동안 나쁜 인상만 남기고 가는 것이 아니란 점에 위안이 갔다.

나의 첫 취직 기간은 비록 짧았지만 한국사회를 요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줬고  다음의 취직을 위해 양호한 기초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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