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07-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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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혼이주 여성도 한국인 ㅡ 이들 위한 대변도 필요해”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차홍숙 ㅡ 한글로 그녀의 이름은 차홍숙, 국제결혼으로 한국으로 나오기 전엔 중국말 발음으로 그녀의 이름은 처훙수(车红淑)이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영어로 부르면 'Hong Sook Cha(홍숙 차)' 불린다.뭐 율무차, 보리차가 있다더니 홍숙차도 있담? 이렇게 같은 사람의 이름이지만 여러 나라의 말로 부르면 달라진다. 그리고 불리기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표정도, 그 말투도 달라질 수 있다. 한 남자의 이름을 김영철이라고 하자. 이 이름은 중국에서도 같은 조선족끼리는 김영철이라고 불리지만 그 남자가 한국에 나오면 김영철이 아닌 진융저(JINYONGZHE)로 불렸었다. 이에 김영철이란 남자는 반발을 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 와서까지 중국발음으로 불리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 ㅡ 한국인의 시각에는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문명하고 가장 살기좋은 나라로 보여질지는 모르나 제3국에서 온 사람들의 시각 즉 제 3 자한테서는 한국에 대한 시각이 좀 다르다. 좀 이상한 나라인 것이다. 또 한국으로 오기 전에 보던 한국과 정작 한국땅을 밟은 후 실질적으로 보면 한국이 달라도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 3 국에서 온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 한국말인가 하면 또 세계에서 가장 거칠고도 쌍스러운 말이 한국말이다”라고 한다. 일리가 있다. 예를 들면 한국 서울이나 여느 대도시의 은행같은 곳에 가서 그런 곳의 직원들의 말씨를 들어보면 얼었던 마음도 다 녹아내릴 정도이다. 친절하고 예의스러우며 거기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차근차근 가르쳐주는 구체적인 봉사성…이러한 언행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두 번 세 번 다시 찾아오고 싶어지고 그 직원이 총각이라면 사위로 삼을 생각이 들고 미스라면 며느리로 맞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다. 반대로 한국의 노가다판이라고 하는 작업현장 즉 건설현장이나 바다에서 작업하는 어선현장 같은 곳에 가면 <개새끼>. <씹팔 놈>…벼라별 추한 말들이 다 오간다. 은행창구의 봉사성과 작업현장에서 오가는 말투, 너무나도 모순되는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한편 한국은 사회적 차별이 심한 나라이다. 상하 급 사이의 차별, 남녀 사이의 차별 그리고 내국인과 외국인과의 차별, 특히 이주 여성에 대한 차별 … 차홍숙 그녀는 이런 차별을 줄이고 없애기 위한 일에 몸을 던지고 싶었다. 이는 자신이 이주여성이어서 더욱 강했을지도 모른다. 1971년생인 차홍숙씨가 중국 헤이룽장성 치치할시(黑龙江省齐齐哈尔市)에서 국제결혼으로 한국땅을 밟은 것은 1997년이었다. 당시는 한국과 중국의 경제수준 차이가 엄청 크게 나던 시기였고 차홍숙씨를 비롯한 많은 중국 조선족 여성들이 한국 남성을 결혼의 선망대상으로 쳐다보던 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정작 한국으로 와서 보니 비교적 유족한 생활을 한다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그녀 스스로 깨달았다. 한국사회는 차별이 심했다. 심해도 너무 심했다. 중국출신 동포라고 기시하고 업신 보고 비웃고, 또한 이주여성이 낳은 자녀까지도 이런 불행을 당하군 했다. “결혼초기에는 한국과 중국은 사회와 문화가 서로 다르기에 웬간하면 참으면서 한국사회에 적응하려는 여성들이 많았어요. 헌데 서로 문화가 다른 차원이 아니라 너무 심하고 억지였어요. 한국에서 다문화가정들을 보면 폭언 폭행이 비일비재로 나타나고 있었지요. 돈 주고 사왔으니 폭행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한국인 남성들이 많았고 아니 이를 정당화하려고 했어요. 그러다보니 맞아서 얼굴에 멍이 든 여성, 갈비뼈가 부러져 병원으로 실려간 여성 등으로 많은 사건들이 터지고 만거죠.” 하다면 중국에서 남녀평등과 <절반 하늘(半边天)>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또 그 가치관으로 인생을 영위해오던 차홍숙한테 있어서 이러한 것들은 어디까지고 참고 넘어갈 것도, 그냥 보고 지나쳐 버릴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엔 순 자신만을 위해 적당히 참기도 하고 적당히 반발하기도 하였으며 또 적당히 타협하면서 이른바 <이주여성 인권찾기 운동>에 참여한 것도 사실이다. 헌데 이렇게 나서고 보니 주변에는 이렇게 당하며 살고 있는 결혼이주 여성이 너무도 많았다. ● 70대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한 30대의 베트남 여성은 결혼 후 수시로 언어폭행에 시달렸으며 수시로 생활비를 바쳐야 했고 지어는 여성의 동생한테도 생활비를 강요하는 일이 생겼다. 또 겨울에는 뜨거운 물도 못쓰게 했다… ● 2007년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캄보디아 출신 여성 쏙카(가명)는 결혼생활 3년부터 남편의 폭력에 시달렸다. 남편은 결혼 초부터 “밭에서 같이 일하려고 내가 돈 주고 널 데려왔다”며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다 그녀가 아이와 함께 캄보디아 친정에 다녀온 뒤부터 머리카락을 걸머지고 벽에 밀거나 손에 잡히는대로 물건을 던지는 등 폭력을 일삼았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가 울면서 말리자 남편은 밖에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티브이(TV) 볼륨을 크게 높혀 놓고 쏙카를 때리기까지 했다. … 한국인 남성ㅡ 위의 첫 번째 사례로 70대로서 30대 여성을 아내로 맞았으면 오히려 감지덕지 해야 할 일이지 그런 아내를 학대하고 생활비까지 내라고 억지 부리다니?!…그럼 한국 남성은 그렇게 대단한가? 요즘 세월에 한국인 남성이 중국 조선족 여성한테 장가들자고 해보라. 턱도 없는 소리처럼 들린다. 아마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부분적 한국인 남성들한테는 <삼척> 경향이 아주 농후하다고 한다. 강원도의 삼척이 아니라 이런 남성들한테는 <몰라도 아는 척>, <못나도 잘난 척>, <없어도 있는 척>이라는 <삼척>을 말한다. 자기가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한가?! 팔이 네 개가 달린 것도 아니고 하루 열끼씩 잘 먹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귀가 두 개이고 입이 하나인 건 많이 듣고 적게 말하라고 한 것이고 눈이란 살가죽이 모자라 박아넣은 장식품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조 이삭은 염글수록 머리를 숙인다고 했다. 다시 원 화제로 돌아와 이상 두 가지 사례는 전반 한국사회로 놓고 볼 때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으며 결코 남의 가정의 일로만 볼 것이 아니었다. 차홍숙씨는 자기가 아니더라도 그 누군가는 이런 차별과 편견으로 얼룩진 한국 사회의 현상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충동을 가지게 됐다. 현재 차홍숙씨는 서울시 관악구 찾봉사단(찾아가는 봉사단)원으로 활동,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다문화부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관악구을 다문화위원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찾봉사단은 주로 중국동포와 결혼이주여성으로 구성 지역사회에서 찾아가는 봉사를 실시하고 있다. 10년간의 다문화 봉사, 문화활동을 통해 차홍숙씨는 이주여성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의 고충과 상처를 알게 됐고 그녀 역시 이주여성으로 그들과 똑같은 불행을 겪은 여성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한편 차홍숙씨는 결혼이주 여성들도 자존, 자립, 자강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여기에는 자질향상에도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된다. “모르니까 당하는 거예요. 현재 60% 이상의 이주여성들은 한국어를 보고 쓰고 읽을 줄은 알지만 그 뜻을 몰라요. 예하면 알림장이 오면 읽지만 내용은 몰라요. 그러다보니 학교에서 통지서같은 것이 와도 자녀들의 준비물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거죠. 그러면 자녀가 학교에서 다른 애들한테 왕따당하거나 심지어 폭행당하기도 한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들한테 도움을 주려고 손을 내밀어도 잡아주지 않아요. 마음을 열지 않는거죠. 어찌보면 외국인이라서 소외되고 있다는 의식이 강한거죠. 즉 외국인이라서 가정에서도 차별받는데 사회에 나가서야 더 이를데 있냐 하는 것이죠.” 이렇게 언급한 차홍숙씨는 이주여성 즉 다문화 가정과의 1 대1의 맨토링(助言)하면서 1대 1로 그들과 대화하고 김치 등 반찬 만드는 방법같은 것을 가르쳐 주면서 끈질기게 손을 내밀면 그들도 언제가는 마음을 열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고민을 해보군 한단다. “1 : 1 멘토링은 폭언, 폭행과 고부갈등 및 자녀의 진로 해결 그리고 어려운 가정형편을 복지로 연결시켜 주는 주요한 <그린 통로>이죠. 자녀들의 진로문제 등 공지사항을 단톡방에 올리면 일부 한국인 남편들은 ‘이런데는 우린 안가도 돼, 이런데는 못사는 사람만 가는데야’하고 으스대는데 이건 아주 잘못된 생각이예요. 기실 자신도 최하층에서 겨우 버티며 살면서 말이죠. 일각에서는 다문화가정이란 호칭부터가 차별이라고 주장하는데 일리는 있지만 저의 관점은 달라요. 홍길동이면 어떻고 홍길남이면 어떻냐구요. 호칭이 바뀌지만 시선이 바뀌지 않고 인식이 개선되지 않으면 차별은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잖아요?!” 요즘들어 자주 이주여성이나 중국동포 출신 여성의 국회의원 비례대표 출마 등 정치참여가 아주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차홍숙씨이다. “앞으로 철저한 선별과 검증을 거쳐 진짜로 자격이 있는 이주여성 후보들이 많이 나와 단 한 분이라도 구의원, 시의원과 더 나아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동포나 이주민 여성들을 위해 많은 일을 했으면 하는 바램이지요. 우리 또한 스스로가 이미지 개선에 힘써야 해야죠. 공익행사, 봉사활동에도 자주 참가하고 베풀 줄도 알아야 한다고 봐요. 또한 동포라서 외국인이라서 깔본다는 등 소외된 감정과 차별과 무시를 받는다는 억울함이 있더라도 당당해야 합니다.” 이러면서 차홍숙씨는 각 국의 문화나 생활을 체험하고 서로가 이해하고 가까워질 수 있는 이주여성들의 시부모 혹은 친정 부모들로 주축이 된 경로당 설립과 그 활성화, 동포나 이주여성들만 끼리끼리 어울리지 말고 본토인들과도 잘 어울리고 서로 도우면서 살았으면 하는 등 이런저런 여러 가지 대안들을 내놓기도 했다. 일개의 결혼이주 여성으로부터 서울시 관악구 찾봉사단 단원,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다문화부 위원장으로 되기까지 처음부터 그 어떤 목적을 갖고 <욕심>을 부린 건 아닌 것 같다. 인생을 살다보면 이러저러한 뜻하지 않던 일에 자주 맞다들게 되고 그것을 타개하면서 사노라니 오늘까지에 이른 게 아닐까? 여하튼 차홍숙씨의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다음 부분적 한국인들에게 따끔한 말 몇 마디 하고 싶다. 이는 이 글의 주인공 차홍숙씨의 말이 아니다. 대한민국 ㅡ 역사가 깊고 찬란한 문화도 있다. 하지만 굴욕의 역사도 많다. 특히 근대에 와서 일본한테 36년간이나 짓밟히면서도, 아들딸들이 학도병이나 정신대에 끌려가도 그걸 막지 못하고 울기만 했던 조상들이다. 광복, 그것도 대한민국 자체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강대국들에 의해 이룩되었으며 그 댓가로 나라가 두 동강으로 토막 나기도 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중견으로 되고 있는 한국남성들은 떳떳해야 하지만 거들먹 거리지는 말아야 한다. 특히 적어도 힘없고 나약한 여성들한테 큰 소리 치지 말고 주먹을 휘두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 한국인? 그렇게 대단하고 우월한 것일가. 그제날의 굴욕의 역사는 그만 두고라도 오늘의 한국도 그렇게 행복한 나라가 아닌 것 같다. 집계에 따르면 2017년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OECD 31개 회원국 중 23위였고 청소년의 행복지수는 꼴지였으며 한국인의 자살률은 2003년 이래로 OECD 회원국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는 한국과 한국인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는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 사람들
    2020-06-06

오피니언 검색결과

  • [김정룡 칼럼] 귀 빠진 날과 미역국
    ●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중국어가 영어에 비해 표현력이 4.5배란다. 하긴 한문자체가 이 세상에서 유일한 뜻글자(표의자, 表意字)이기에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중국을 이웃한 우리 말 어휘 중 75%가 한자어라고 하니 한문 신세를 단단히 지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한자어를 제외한 순수 우리 낱말들은 삶의 정서를 표현하는 기능이 너무 풍부해서 세상에서 으뜸이라 나는 생각한다. ‘맛’, ‘멋’, ‘판’ 우리민족 삶의 정서를 대표하는 낱말을 타언어로 번역해보라. 의역은 가능하나 직역은 영 안 된다. 억지로 의역할 수 있어도 본래의 ‘멋’과 ‘맛’을 전혀 살리지 못한다. 우리말 의성의태어는 더욱 기가 막히게 맛깔 난다. 더해서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에는 없는 말들이 우리에겐 많다. 사람이 죽으면 ‘돌아갔다’는 말, 한 인간이 세상에 나온 생일을 ‘귀 빠진 날’이라고 하는 말, 우리 선조들의 기막힌 창의성에 의해 생겨난 우리만의 언어들이다. 우리만의 언어들은 나름대로 선조들의 삶의 정서가 깊이 배어 있어 그 유래를 추적하다보면 재미있기도 하고 보람도 느끼게 된다. ‘귀 빠진 날’에서 귀는 머리 양쪽에 달고 다니는 그 귀이다. 왜 인간이 태어남을 귀가 빠졌다고 말할까? 궁금하지 않는가. 요즘 인터넷이 발달해서 책을 읽지 않고도 컴퓨터만 만지작거리면 웬만한 지식정보는 다 얻을 수 있다. ‘귀 빠진 날’이란 말의 뜻도 네이버 선생한테 물으면 똑똑하게 대답해준다. 그런데 이러한 ‘지식정보’를 접하는 순간 나의 옛 기억을 소환해내어 그때 그 시절 추억에 잠시 아련히 잠겨본다. 나는 헤는 나이로 18세에 고중(고등학교)을 졸업하고 시골에서 농사일에 종사했다. 당시는 대학입시가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유일한 길이 곧 시골농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운이 좋게 농부가 된 지 8개월 만에 시골위생소(시골보건소)에 취직했다. 일단 호미자루를 벗었으니 시골사람치고는 크게 출세하여 신분상승한 셈이었다. 더 운이 좋은 것은 위생소에 취직하자마자 6개월 만에 용정현병원에 가서 ‘용정현 제4기 맨발의사 강습반’을 다니고 맨발의사(赤脚醫生) 면허증을 취득했던 것이다. 당시는 최연소 맨발의사 기록이었다. 그때부터 이 세상 다른 총각들이 경험해보지 못하는 일들이 나의 인생길에 펼쳐진다. 에둘러 말할 것 없이 나는 이마에 피도 채 마르지 않은 19세부터 아이 낳는 현장을 쌔빠지게 다녔다. 한창 이성에 대해 몹시 싱숭생숭할 나이에 그런 장소를 다녔으니 그때 있었던 일들이 지금도 영화필름처럼 생생하게 나의 머리에서 맴돌고 있다. 그저 그냥 맴도는 정도가 아니라 집요하게 추억을 소환하여 뇌리에서 재생하게 만들고 있다. 인간은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애를 낳지 못하는 지구상 유일한 동물이다. 그래서 아이를 낳으려면 산파가 반드시 필요하다. 물론 출산을 돕는 코끼리 같은 짐승이 없는 것은 아니다. 새끼라도 덩치가 커서 누군가 받아주지 않으면 맨땅에 떨어져 죽을 수도 있다. 그래서 늙은 코끼리들이 산모를 둘러싸고 상아로 아이를 받아준다. 그렇지만 분만을 집적 돕는 것은 아니니 그 코끼리들을 산파라고 부르지 않는다. 인간은 직립 보행하는 바람에 골반은 자꾸 작아지고 머리통은 반대로 커졌다. 원숭이나 북극곰처럼 네발로 다니는 짐승들은 넓은 산도(産道) 덕분에 2분이면 분만이 끝나는데 인간은 하루, 길면 며칠씩 산통을 겪어야 한다. 또 다른 포유동물들은 탯줄이 있지만 출생한 뒤에는 그냥 없어진다. 소와 말은 새끼가 나올 때 체중이 무거워 자연히 탯줄이 끊기고 개나 고양이는 어미가 씹어서 자른다. 그런데도 탯줄은 말라서 떨어지고 배꼽은 남지 않는다. 인간만이 배꼽이 있는데 역시 산파가 탯줄을 끊어줘야 올바로 정착된다. 산파의 역할은 이렇게 아이를 받아내고 탯줄을 끊어 배꼽을 올바르게 정착시키는 것이다. 옥황상제로부터 명주실 세 묶음과 은가위를 하사받았다는 삼신할머니가 우리민족의 최초의 산파이자 영원한 산파이다. 그런데 인간이 모여 사는 데는 아이를 낳기 마련이고 그 신생아들을 받아내고 탯줄을 끊어줄 산파들이 있어야 하는데 모택동의 의료노선에 의해 당시 중국 시골마다 산파가 있었다. 산파가 따로 있는데 왜 젊은 총각이 아이 낳는 장소에 나타날까? 시골 산파들은 산모가 순산으로 낳으면 그냥 받아주고 탯줄을 끊으면 그만이지만 만일 경우 순산이 아니고 난산에 부딪히면 곤경에 처하게 되며 해결책이 없다. 예하면 아이 낳는 도중 정신을 잃는 쇼크가 온다거나 지나치게 기진맥진하여 힘을 쓰지 못한다거나 하면 혈관 주사도 놓을 줄 모르는 시골산파의 능력으로는 구급이 안 된다. 그래서 이 맨발의사 총각을 불러 대기시켜 놓거나 미리 부르기 민망해서 사전대기는 못하고 갑자기 급한 사정이 생겨야 부르곤 하였는데 아무튼 아이 낳는데 수없이 많이 다녔다. “귀가 보인다. 좀 더, 좀 더.” “자아~ 이 고비만 넘기면 되니까 힘을 모았다가 한꺼번에 해결 보자고.” 아이 낳는 장소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태아는 엄마의 배와 헤어질 때 먼저 머리부터 내민다. 머리카락이 보이고 그 다음 이마가 보인다. 이마가 다 나온 다음에는 귀가 보인다. 그런데 귀는 머리 양 옆에 따로 붙어 있어서 나올 때면 애먹는다. 일단 귀가 다 나오면 나머지는 쉽게 마무리 된다. 그러니까 아이를 낳는데 있어서 관건은 귀가 빠져나오는 것이다. 우리민족이 생일을 ‘귀가 빠진 날’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이렇게 아이 생산 시의 관건적인 생리적인 현상을 뜻하는 함의를 지니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엄마가 나를 낳을 때 가장 심하게 겪었던 산통을 표현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자신의 생일을 ‘귀 빠진 날’이라고 말하는 것은 대부분 남자들이다. 아마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여자들은 생일을 쇠지 않아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이 말은 남자들이 많이 하는 것만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엄마가 겪은 산통을 잊지 못해 ‘귀 빠진 날’이라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자를 가장 천시하고 압박한 집단이 바로 이 땅의 조선남자들이었다. 우리민족의 남자들의 삶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삶이었다. 요즘 우연하게 한국 그때 그 시절 자료를 접하게 되었는데 경부고속도로가 뚫려 자동차를 타고 시속 100킬로미터 넘는 스피드로 달리던 1970년대 중후반만 하더라도 한국 산모의 75.1%가 자기 집에서 분만했다고 한다. 그것도 거의 반수가 의사나 산파의 도움 없이 나 홀로 숨죽이며 출산했다. 도움을 받는다 해도 조산부와 시어머니, 친정어머니가 반반이었다. 같은 시기 중국에서도 도시에 시집 간 여성조차도 시골 시집이나 친정집에 와서 분만하다 보니 시골에서 아이 낳는 수가 엄청 많아 이 총각도 빈번하게 다녔던 것 같다. 지금은 집에서 조산소로 조산소로부터 병원으로 변화되고 자연분만이 아닌 제왕절개가 급증하고 있다. 마취하고 배를 갈라 아이를 들어내니 산모는 태아가 귀가 빠지는 산통을 모른다. 이렇게 탄생된 아이들은 장차 자신의 생일을 ‘귀가 빠진 날’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지 않을까. 하여튼 나는 좀 기괴한 인간이라 별거 다 ‘시비’를 걸고 있다. 한편 우리민족 여성들은 아이 낳으면 무조건 미역국을 먹는 풍습이 있다. 또 사람마다 자신의 생일이 돌아오면 그날 아침 미역국을 먹는다. 같은 문화권인 이웃 나라 중국과 일본에는 이런 풍습이 없다. 중국 사람과 일본 사람 앞에서 ‘저런 인간을 낳고도 그 어미가 미역국을 먹었겠지.’라고 말하면 무슨 의미인지 몰라 머리를 갸우뚱할 것이다. “고려 사람들은 고래가 새끼를 낳은 뒤 미역을 뜯어 먹어 산후의 상처를 낫게 하는 것을 보고 산모에게 미역을 먹인다.” 당나라 서견이 <초학기>에 나오는 구절이다. 근대 실학자 이규경도 다음과 이야기를 기록에 남겼다. “어떤 사람이 물에 들어갔다가 이제 막 새끼를 낳은 고래에게 먹혔다. 고래의 뱃속을 보니 미역이 가득 붙어 있었고 장부의 악혈이 모두 물이 되어 있었다. 고래 뱃속에서 겨우 빠져나온 그는 미역이 산후조리에 좋다는 점을 알았다. 이것이 세간에 전해지면서 효력이 처음으로 알려졌다. 명나라 이시진의 <본초강목>에 미역의 약효를 알리는 대목이 있다. “신라 미역, 고려미역이 안팎 종기를 낫게 하는 신비한 약제로 사용된 적이 있다.” 과학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출산 후 상처를 아물게 할 뿐만 아니라 몸 안의 피를 맑게 해주는 효험이 있다고 한다. 거기에 자궁수축과 지혈까지 도와주고 출산 시에 유혈(流血)한 산모에게 피를 공급한다. 그 뿐만 아니라 갑상선 호르몬을 보충해주는 역할까지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역국 먹는 풍습이 삼국 시대부터 오늘까지 천여 년을 이어져 내려온 셈이다. 의학적으로 우리민족이 미역국을 먹는 풍습의 유래가 설명되었다 쳐도 아직도 완전한 설명이라기에는 뭔가 조금 부족한 느낌이 든다. 속설에 의하면 태아는 양수 속에 사는데 양수는 바다의 맛과 같이 찝찔한 맛이 난다. 바다에서 자라는 미역이 바로 양수의 맛처럼 찝찔하다. 미역의 사촌인 김도 마찬가지, 그 맛이 찝찔하다. 그러고 보니 바다에서 나는 낙지도 명태도, 갈치도 등등의 해산물도 모두 양수의 맛과 비슷하게 찝찔한 맛이 난다. 한국에 처음 오는 외국아이들에게 김을 주면 아주 맛나게 잘 먹는다. 나의 손자 녀석도 김을 주면 아주 잘 먹던 기억이 있다. 한국 최고 석학으로 꼽히는 이어령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김은 태아 때의 생명기억으로 그것을 먹음으로써 그 아이는 지금 태내의 세계, 바다로 가는 것이다. 바다에서 온 생명의 습성과 가장 가까운 것이 바로 한국인이다.” 우리민족이 산모가 미역국 먹고 아이들이 김을 즐겨 먹는 이유가 이어령 선생의 이 말로 설명이 다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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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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