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캡처.JPG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송경령(宋庆龄-1893 년 1월 27일-1981년 5월 29일) 여사는 20세기 중국에서 가장 걸출한 여성위인으로 공인받고 있다. 송경령은 일찍 소녀시절에 중국 민주혁명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손중산을 숭배했으며 이어 손중산 선생을 따라 혁명에 투신, 근 70년간의 혁명생애동안 견정불이하고 굴할 줄 몰랐고 시종일관 중국의 노고대중 편에 서서 그들을 지지성원하고 대변하여 왔다.


한편, 부녀아동의 위생보건 및 문화교육 등 복지사업발전에도 솔선수범했고 중국의 완전통일과 세계평화, 일류의 진보사업을 추진함에 있어서도 정력을 몰붓었으며 마멸할 수 없는 기여를 하여 중국인민 및 해외 화교들의 친절한 애대와 다함없는 존경을 받아왔다.


1893년 송경령은 상해의 한 목사 겸 실업가 가정의 차녀로 태어났다. 당시 송경령의 부친 송요여(宋耀如)는 중국 신민주주의 혁명의 선구자 손중산의 친구이자 동지었으며 역시 송경령의 첫 계몽선생이기도 했다.


송경령은 일찍 7살에 상해 중서여숙(中西女塾)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학업에 들어갔고 1907년 15살 나이에 여동생이며 후일 중화민국 대통령 장개석의 부인으로 된 송미령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간다.


미국에 도착한 송경령은 먼저 뉴저지 주 스미트 성에 있는 한 사립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다가 이듬해 조지아 주 메이컨(Macon)시 위엄 반다르(Majesty bandareu) 여자학교 문학부에 입학한다. 이 시기 송경령은 총명하고 공부재질이 뛰어났으며 성정이 활약적이어서 학교에 많은 활동에도 적극 참가하였다.


이 때 송경령은 중국의 신해혁명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신해혁명은 <20세 초 중국의 가장 위대한 대 사변>이라고 목청껏 환호했으며 더욱 집요하게 중국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면서 민주혁명투쟁에 투신하였다.


1913년, 문학학사 학위를 받으며 대학을 졸업한 귀국을 결심, 도중에 일본에 들린 송경령은일찍부터 숭배해오던 손중산 선생을 만났으며 귀국 뒤 얼마 안 있어 손중산의 비서로 된다. 그리고 그 뒤에 있은 공동한 혁명투쟁 중에서 맺어진 깊은 우정과 감정은 애정으로 승화되었다.


하지만 가정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우선 당시 손중산의 나이가 송경령보다 27살이나 많았고 그 무슨 재벌도 아니었으며 더군다나 혁명가와의 결혼생활은 앞날의 풍파를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가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송경령은 갖은 경로를 통해 상해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1915년 10월 25일 도쿄에서 손중산 선생과 결혼, 스스로 안온하고도 우월하며 또한 권세가도가 있는 가정생활을 멀리하고 손중산과 함께 망명생활을 해야 하는 어려운 인생을 선택하였고 손중산이 영도하는 중국민주혁명을 적극 지지하고 또한 그 혁명에 뛰어들었다.


1922년 새벽, 진형명이 손중산을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반군은 당시 손중산과 손경령이 거처하는 통수부를 포격, 이 위급한 관두에 손중산은 부하들을 시켜 송경령더러 먼저 통수부를 떠다도록 하였다. 하지만 송경령은 “중국에 이 송경령이 없어서는 되지만 당신이 없으면 절대 안돼요”라고 하면서 포성이 울부짖고 화약냄새가 지독한 그 생사의 고비에서도 마지막 손중산이 안전하게 철거할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그 뒤에도 송경령은 손중산과 함께 이러한 위험고비를 여러번 겪으면서 혁명가 아내로서의 본분을 철저하게 지켰다.

 
20100315151117-1194146261.jpg
▲ 송경령과 손문
 
한편 손중산과 송경령은 상해에서 이대소(李大钊) 등 중국공산당 대표 및 레닌이 파견한 특사를 여러 번 만나 그들과 교류하면서 경험교훈을 총화하면서 국공합작을 모색, 국민당 개조(改组)에 착수하였고 1924년 1월 20일 공산당원들이 참가한 가운데 광주에서 개최된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손중산이 제정한 <연러(联俄), 연공(联共), 부조공농(扶助农工)> 이 3대 정책을 통과시켰으며 제1차 국공합작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1925년 3월 12일, 손중산이 병으로 북경에서 서거하였다.


손중산의 서거로 형언할 수 없는 비통에 잠긴 송경령이었지만 인차 이지를 찾고 일어나 손중산의 유지를 받들어 그가 제정한 3대 정책을 이어나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여전히 공산당과 긴밀히 합작하면서 북벌을 지지하고 성원, 북벌군이 무한을 점령하고 수도를 무한으로 옮기자 송경령은 선견인원들과 함께 가장 먼저 무한에 도착하였다.

1927년, 대혁명이 고조를 이루던 그 시기, 국민당내의 우파세력들이 손중산의 원칙과 3대 정책을 배반하고 <녕한합류(宁汉合流)> 결성해 공산당원과 기타 애국적인 진보인사들을 대량적으로 살해하자 송경령은 분개에 넘쳐 <손중산의 원칙과 정책에 대한 위반행위에 항의한다>란 성명을 발표하고 그 <녕한합류>와 결렬하면서 <잠시 은퇴>한다고 선고하였다.

그 뒤 송경령은 손중산의 유지를 받들어 보다 새로운 혁명의 길을 탐색하기 위하여 소련을 방문, 소련에서 스탈린과 기타 소련지도자들을 만나 보았으며 카리닌 부부와 깊은 우정을 맺기도 하였다.

소련에서 돌아온 뒤 송경령에 대한 국민당의 감시가 강화되자 그는 어느 한차례에 있은 담화에서 남경에 정착하라는 당국의 건의를 거절, “나의 생활은 남경에 간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다”, “당신들이 나의 입을 막으려면 총살하거나 감금시키는 것이다”라고 못 박았다.

국민당 당국의 감시속에서도 송경령은 일련의 중요한 국제반제활동에 적극 참가, 1927년 12월과 1927년 8월에 거쳐 두 번 국제반제동맹 명예주석으로 당선되었고 후에는 세계 반파쇼 위원회 주요 지도자로 선출되기도 했다.
 
<9.18> 사변 후 송경령은 장개석의 <외적을 물리치는 욕망 앞서 국내를 안정시킨다(欲攘外,必先安内)>는 부저항 정책을폭로하는 한편 1932년, 일본군의 상해침략에 저항하는 19로군의 애국정신을 높이 평가하였으며 여러 번 장개석을 찾아가 부저항주의 노선을 고집하는 장개석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12.jpg
▲ 송경령과 모택동

1932년 12월, 송경령은 채원배(蔡元培), 노신(鲁迅) 등과 손잡고 <중국민권보장동맹>을 결성하여 광범위한 사회활동과 각종 형식의 투쟁 및 경로를 통해 허덕형(许德珩). 나등현(罗登贤), 등중하(邓中夏), 추도분(邹韬奋), 진갱(陈赓), 요승지(廖承志)와 정령(丁玲) 그리고 구국회의 <칠군자(七君子)> 등 많은 혁명가와 애국적인 진보인사들이 감옥에서 석방되게 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가장 대표적인 좌익작가 노신 선생을 매우 관심하면서“당신의 생명은 당신 개인 것보다도 중국과 중국혁명에 속하는 것으로서 중국과 중국혁명을 위하여 당신은 살아야 합니다. 이는 중국과 중국혁명이 당신을 수요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늘 타이르곤 했다고 한다.

<서안사변(西安事变)>이 발생되자 이 사변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적극 주장한 송경령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장개석을 총살하거나 다른 극단적인 방법으로 사건을 종말 지었더라면긍정코 더욱 수습하기 어려운 내전을 초래할 수도 있었으며 이렇게 되면 오히려 일본군의 대륙침략에 부채질을 해주는 셈으로 되기 때문이었다.

결과 중국공산당과 송경령 및 동북군 장학량 장군 등의 노력으로 서안사변은 평화적으로 마무리되었고 제2차 국공합작도 성사되었다.

한편 항일전쟁의 승리를 위해 송경령은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우선 1938년 홍콩에서 <중국보위동맹(保卫中国同盟)>을 결성, 각종 방법과 경로를 통해 해외 화교와 국제사회에 중국의 항전에 대해 선전하는 동시에 해외 애국적인 화교와 국제의 벗들을 통해 많은 자금과 약품, 의료기재와 기타 물자들을 모아서는 전선을 지원, 허다한 물자들은 송경령이 직접 알심 들여 배치해 항일전장에 보내진 것들이었다. 또한 많은 국제인사들이 송경령을 통해 공산당이 영도하는 항일근거지에 가 사업하고 고찰할 수도 있게 했다. 그 중에는 저명한 <서행만기(西行漫记)> 써낸 미국기자 스노가 있었는가 하면 캐나다의 유명한 외과의사 노로돔 베츈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중국의 항일전쟁이 승리한 후, 송경령은 원 <중국보위동맹>을 <중국복리기금회>로 개칭, 사업의 기본 기점을 부유위생, 문화교육과 사회복리 등 구제사업에 두었다. 그 시기 국공내전이 일어났고 사회질서도 매우 어지러웠다. 하지만 상해에 있는 송경령은 갖은 방법으로 각종 물자와 약품 등을 해방구에 보내주는 것으로 새 중국의 탄생을 위해 탁월한 기여를 하였으며 1949년 9월 북평에서 있은 제1차 전국정치협상회의에서 중앙인민 정부 부주석으로 당선되었고 1952년에는 아시아 및 태평양 평화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부록: 송경령 여사 대사기

1893년 1월 27일, 상해에서 출생.

1907년 미국으로 유학.

1915년 10월 25일, 일본 도쿄에서 손중산과 결혼.

1922년 8월 23일, 손중산과 함께 공산당원 이대소 등을 만나 국공합작 탐색.

1924년 6월 16일, 광주에서 황포군관학교 개교식에 참가.

1925년 3월 12일, 손중산이 북경에서 병으로 서거.

1926년 1월, 광주에서 열린 국민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손중산의 3대 정책에 관련해 대회 연설, 국민당 중앙 집행위원으로 당선.

1927년 2월, 무한에서 부녀정치훈련반 개설.

1927년 7월 14일, <손중산의 원칙과 정책을 위반한 행위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국민당 당국과 결렬.

1927년 12월, 벨기에에서 개최된 국제반제동맹대회에서 명예주석으로 당선.

1932년 1월, 하향응(何香凝) 등과 함께 항일구국 상병들을 위해 <국민상병병원>을 건립.

1932년 12월, 채원배, 노신 등과 함께 상해에서 <중국민권동맹> 결성.

1932년 9월 30일, 상해에서 <제국주의 전쟁을 반대하는 세계위원회> 극동대회를 주최, <중국의 자유와 반전쟁 투쟁>이란 제목으로 연설.

1932년 4월 20일, 하향응 등 1779명과 연명으로 <중국인민 대일작전 기본강령> 발표.

1936년 12월, <서안사변>을 평화적으로 해결할데 관한 담화문 발표.

1937년 7월, 상해에서 주은래, 박고(博古)와 임백거(林伯渠) 등을 만나 공동항일에 관한 공산당의 주장을 옹호.

1938년 6월 14일, 해외인사들을 초청하여 홍콩에서 <중국보위동맹> 결성.

1943년 9월 18일, <해외에 있는 중국인 벗들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발표.

1944년 3월 12일, 미국에서 있은 손중산 서거 기념대회에서 <손중산 선생과 중국의 민주>란 제목으로 강연.

1945년 9월, 중경 상청사(上清寺)에 있는 장치중(张治中) 장군의 거처에서 모택동을 만남.

1946년 7월 23일, 상해에서 <국민당에 대한 미국정부의 지원을 제지하는 미국인민들을 옹호한다>라는 제목으로 성명 발표.

1947년 9월 16일, 국민당 당국의 <선거참가요청> 거절.

1949년 1월, 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 창립, 명예주석으로 당선.
 
1949년 7월 1일, <중국공산당에 경의를 드린다>란 글을 발표, 같은 달 7일에는 <제국주의는 물러가라!>란 제목으로 된 담화 발표.

1949년 9월, 초청을 받고 북경에서 중국인민 정치협상회의 제1기 전체 회의에 참가, 회의에서 중앙인민정부 부주석에 당선.

1949년 10월 1일, 중국의 개국대전에 참가.

생략

1981년 5월 29일, 북경에서 서거

* 주 : 송경령 여사의 건국 후 대사기를 생략한 것은 민국시기의 생활을 주로 언급하기 위한 것임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20세기 중국의 가장 걸출한 여성 위인- 송경령(宋庆龄)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