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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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장학량(张学良)이라 하면 민국시기 국민당 장령 중 가장 센세이숀을 일으켰던 특대 뉴스인물의 한 사람이었다. 특히 그가 일으킨 <서안사변(西安事变)>은 민국사상의 가장 규모가 큰 군사병변으로, 이는 오늘까지도 자주 사람들의 화제로 되고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장학량의 사생활을 서술한 한글기사는 별반 없는 것으로 안다.
 
하다면 오늘은 <장학량과 그 신변의 여인들>이란 제목으로 민국시기 장학량과 점감색채가 짙었던 여인들 중 그 몇 명만 선택해 조명해 보련다.
   
장학량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젊은 시절 그와 사귀었던 여인은 많았다. 거기에 <하룻밤 로맨스>에 그친 여인수는 헤아릴 수도 없었다고 한다. 그의 회고대로라면 적어도 한 개 패(排- 약 100명 정도)가 된다고 하니 말그대로 <풍류 소우솨이(少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장학량한테 있어서 진정 그를 사랑했고 시중들었던 <부인>은 3명이뿐이었다.

장학량의 첫 번째 여인은 우봉지(于凤至)었다. 그녀는 길림의 한 부유한 실업가의 딸로서 장학량보다 몇 살 위었으며 일찍 11살 때 장학량과 혼인을 맺었다. 이는 완전히 일대 정치혼인으로 한 가정은 돈이 많았고, 다른 한 가정은 큰 권력을 갖고 있었다. 이런 종류의 결합은 당시의 전통으로 말하면 순리정장(顺理成章- 이치에 맞고 조리가 있다는 사자성어)한 일이었다.

비록 부모가 정해준 봉건식 혼인이었고 장학량이 늘 <누님>이라고 불렀던 우봉지었지만 당시 두 남녀는 아주 끈끈하게 서로 사랑했었고 늘 함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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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 장학량의 첫 부인 우봉지

학생시절 우봉지는 우수생으로 아주 단정하고도 지식면이 넓었기에 당시 봉천군벌이던 장작림(张作霖) 역시 며느리감으로 우봉지를 아주 귀여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장학량과의 혼인후 그녀는 장씨 가문의 일련의 일들을 거의 도맡아 처리하였으며 가정에서의 지위도 매우 높았다. 아울러 몇 살 연하인 장학량에 대한 우봉지의 사랑은 아주 진지했고 또한 깊었다.

훗날 <서안사변>으로 장학량이 장개석에 의해 연금되자 우봉지는 유선암(乳腺癌) 치료를 이유로 미국으로 향발, 그 뒤 줄곧 미국에 체류하면서 주식 및 부동산 투기로 많은 돈을 벌었다. 이는 장학량이 자유를 되찾으면 미국으로 데려와 함께 행복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1940년, 남경에서 장학량과 작별한 우봉지는 더 이상 장학량의 모습을 볼 수 없었고 그 작별은 영별로 되고 말았다.

결국 우봉지는 봉건혼인과 정치풍랑의 희생품이 된 셈이었다.

장학량한테 있어서 첫 부인 우봉지와 마지막 부인 <조우쓰 쇼제(赵四小姐)> 사이에 끼어든 여인은 곡서옥(谷瑞玉)이었다.

장학량과 곡서옥 여인은 1922년 제1차 봉직전쟁(奉直战争- 장작림과 오패부 사이에 벌어진 전쟁) 기간에 서로 알게 되었다.

이 여인의 배역은 현재 TV 드라마 <소우솨이(少帅)>에서 가끔씩 등장하군 했지만 이는 근근히 <요리중의 양념>일뿐이었다.
 
사실 곡서옥은 장학량의 <종군부인(从军夫人) 로 불릴만큼 다년간 장학량과 부부동거를 해온 여인으로 둘은 천진에서 혼례를 치른 적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젊은 시절 장학량이 마약에 인이 박힌 적이 있었는데 그가 마약증상이 발작할 때마다 곡서옥이 마약일종인 모르핀(吗啡)을 조금씩 공급해주어 통증이 가시게 했다는 설도 있다. 결과 장학량은 마약중독에 빠져 오랫동안 모르핀과 떨어질 수가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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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 장학량의 두번째이자 마지막 부인이었던 조우쓰 쇼제

<조우쓰 쇼제(赵四小姐) -그녀의 이름은 조일획(赵一荻)이었고 장학량의 만년과 함께 해준 여인었다.

1912년 홍콩에서 태어난 조우쓰 쇼제는 자매 중 4녀가 되어 이런 명칭이 달리게 되었고 부친 조경화(赵庆华)는 절강성 난계(兰溪) 사람으로 북양정부시기의 교통부 차장을 지녔던 관료였다. 그리고 조우쓰 쇼제 자신 역시 작가 겸 장학량의 비서로 있던 중 둘은 운명의 최후까지 함께 하는 인생반려가 된 셈이었다.


조우쓰 쇼제는 72년간 장학량의 시중을 들었던 여인이었다.


만년에 장학량이“만약 장개석에 의해 연금되지 않았더라면 조우쓰 쇼제가 긍정코 나의 마지막 여인으로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하다싶이 그 72년간 그녀는 장학량의 난잡한 사생활에 대해 많이 듣고 느끼고 지어 목격까지도 했을 수 있었건만 줄곧 눈감아 주지 않았으며, 적어도 밖에서는 떠들어대지 않았다. 그리고 묵묵히 장학량의 마지막까지 동고동락해주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녀가 <남존여비> 봉건사상이 농후해서도 아니었다. 그녀는 필경 문명을 부르짖는 현대여성이었다. 하지만 왜서였을까? 그렇다면 조우쓰 쇼제가 겉과 속이 다른 <남자의 세계>에 대해 너무도 투명하게 통찰해서였을까? 아니면 <호색한(色汉)이었던 장학량의 행위가 오히려 <귀여워서였을 것>일까? 아무튼 이는 일종의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조일획 - 아니 <조우쓰 쇼제>는 후일 대만에서 <좋은 뉴스(好消息)>, <새 생명(新生命)>, <진정한 자유(真自由)>, <대사명(大使命)> 등 저작을 펼쳐낸 중국현대사에서 신비한 색채가 짙고도 대단한 여인이라고 할 수 있다.

장학량으로 놓고 말하면 우봉지, 곡서옥과 조우쓰 쇼제 외에도 인상에 짙은 여성 몇 명이 또 있었다.
 
그 대표적인 여인이라면 첫째로 이종형수(表嫂)였다. 장학량이 어찌어찌하여 이 이종형수와 잠자리를 함께 했는가는 잘 알 수가 없어도 그녀는 매우 표독스러운 여인이었다고 한다. 당시 뒤 골목 사회에서는 모두 그녀를 <연장(连长)>이라고 호칭, 이는 그녀가 한 개 연대가 되는 남자와 함께 침대생활을 했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원체 양가 여인(良家妇女)이 아니었다. 장학량의 이종형과 결혼하기 전에는 사창가에 몸을 담구었었고 결혼 뒤에도 여전히 사교계의 한떨기 <꽃>이었다. 그리고 이종형이 군무로 아주 적게 귀가하다보니 그녀한테는 당연히 한 개 연대에 맞먹는 남자가 생겼고 그 중에는 장학량도 포함되었던 것이다.
 
다음 장학량이 상해에서 사귄 여인은 이름도 모를 유부녀였다. 하루는 장학량이 그 유부녀를 차에 앉히고 그녀의 저택으로 바래주었으며 마침 그녀의 남편이 없었다.
 
이어 둘이 한창 운우지정을 나누었고, 미구하여 그녀가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사실 나의 혼인에 이름을 올린 남자는 내 남편이 아니예요. 나의 진정한 남편은 형부였어요.”
 
그 유부녀의 이 말에 장학량은 깜짝 놀라 삽시에 모든 흥분이 사라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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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 장학량과 우봉지의 만년

그리고 이런 일화도 있다. 한시기 장학량은 자신이 잘 아는 국민당 고위층 한 장교의 부인과 자주 만나 운우지정을 나누군 했었다. 당시 그녀의 남편도 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나 부인한테 단지 “<쇼류즈(小六子)-장학량의 애명>를 조심하우다. 믿을 수 없는 인간이우다” 라고 조언했을 뿐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한번은 그 국민당 장교가 부인을 거쳐 장학량의 도움을 받게 되었으며, 일이 성사되자 장학량한테 찾아가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자 장학량의 대답 역시 아주 걸작이었다고 한다.


“고마워할 것까진 없수다. 자네도 큰 대가를 치렀는데 뭘…”


뒤이어 둘은 동시에 한바탕 웃기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냥 전해진 설화로서 그 진실여하는 증명할 수가 없다.

 
장학량이 일생동안 못 잊어 하던 여인은 한명 또 있었다. 이는 그가 생전에 줄곧 인정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인정할 수도 없던 여인- 바로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宋美龄)이었다. 하지만 어느 장소에서인가 장학량은 무의식간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은 뉴욕에 있다”라고 내뱉었다. 하다면 그 당시 장학량이 잘 아는 사람 중 뉴욕에 있는 이는 바로 송미령뿐이었다.
 
그리고 장학량의 사인서신거래 중 가장 많이 거래를 한 여인이 바로 송미령이었다. 무려 100여통의 편지가 장학량으로부터 송미령한테로 날아갔던 것이다.
 
일찍 1925년, <오주참안(五卅惨案)>으로 장학량이 상해에 피신해있을 때부터 송미령은 이 젊고 영준한 <쇼우류즈(小六子)>한테 눈도장을 찍었었다고 한다. 당시 이들 남녀는 늘 유창한 영어로 대화, 이는 쩍하면 <량시피(娘希匹)>란 막말을 내뱉는 장개석과의 대화와는 180도가 다른 무드이기도 했다. 그리고 후일 <서안사변>으로 장학량이 연금되었을 때 장개석은 몇 번 장학량을 죽이려고도 했으나 송미령의 보호로 끝내 성사하지 못하였다.
 
다른 한편 일찍 1930연대 초, 장학량이 유럽고찰시 이탈리아 무솔리니(Mussolini)의 딸 에다 무솔리니(Mussolini,Edda) 또한 장학량한테 흠뻑 반했다는 것이 장학량 만년의 회고였다. 그러나 당시 두 남녀는 아무런 관계도 발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장학량은 외국인 여성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 에다 무솔리니는 줄곧 장학량한테 집착했으며 이는 장학량을 무척 골치 아프게 하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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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량(张学良)과 그 신변의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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