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상하이 최대 폭력조직 靑幇(청방)보스- 두월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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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최대 폭력조직 靑幇(청방)보스- 두월생

기사입력 2018.02.10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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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두월생은 옛 상하이의 <중국의 갱스터 보스(黑帮老大)>, <중국의 제1호 방주(第一帮主)>로 불려온 인물이다.
 
두월생(杜月笙)은 식민지 및 반식민지 중국의 시대가 낳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아편에 손을 대고 타인에 대한 구타와 살인을 일삼는 건달패 두목이었을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는 장개석의 반혁명 행동에도 적극 가담하였는가 하면 항전기간에는 팔로군을 적극 후원하기도 했으며 개인생활 또한 심월영(沈月英), 진귁영(陈帼英), 선페호(孙佩豪), 요옥란(姚玉兰)와 맹소동(孟小冬) 등 5명의 댁을 두는 봉건적인 퇴폐생활을 즐기기도 하였다.
 
실로 찬반 시비가 엇갈리는 인물이었다.
 
본문은 당시 옛 상해탄의 이모저모를 통해 시대와 두월생이란 인물을 조명해보기로 했다.
 
두월생은 1888년 강소성 천사청(지금의 상해 포동신구) 고교남(高桥南)의 두씨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4살에 생모가 돌아가 선후로 계모와 숙부 상경국(商庆国)의 슬하에서 자라게 된다.
 
이러한 가정환경은 두월생으로 하여금 어릴 적부터 자존심과 독립성이 강하게 만들었으며 당시 청방(青帮)으로 불리는 깡패집단의 보스로 있는 진세창(陈世昌)을 극히 숭배하면서 장차 어떤 조직의 우두머리로 되는 야먕을 갖게 하기도 했다.
 
14살이 되던 해 두월생은 진세창 주위의 인물들과 접근하던 끝에 드디어 청방의 상해보스인 황금영 공관으로 들어가 보스의 신임을 얻게 되었으며 얼마 안 되어 상해 프랑스조계지 도박장인 <공흥클럽(公兴俱乐部)>의 경영을 맡게 되면서 일당들과 함께 군벌들과 결탁, 아편밀매에 손을 댄다.
 
아편에 손을 대면서 두월생은 점점 더 거칠고도 흉악하게 변했으며 무자비하고도 악행수단이 다양한 깡패두목으로 탈바꿈하였다.
 
1927년 7월, 두월생은 이른바 <3흠회사(三鑫公司)를 설립, 프랑스 조계의 마약거래처를 농단하였으며 경악할 정도로 자신의 세력을 확장시켜갔다. 그리고 상해의 깡패 총 두목이었던 황금영, 장소림 등과 더불어 중화공진회(中华共进会)의 발족에까지 이른다.
 
바로 그 시기 장개석이 손중산의 <삼민주의>을 배반, 1927년 상해에서 반혁명 정변을 일으켰고 이에 동조한 두월생은 당시 상해시 노동운동의 영수(领袖)였던 왕수화(汪寿华)을 생매장하는 악행을 저질렀으며 이어 한무리의 건달들을 시켜 노동자규찰대를 습격하고 공산당 및 진보적 대중들을 대대적으로 살해했다. 이는 장개석의 지지를 얻었으며 얼마 안 있어 두월생은 국민혁명군 육해공군 총사령부의 고문 및 군사위원회 소장참의와 행정원 참의로 되었다. 비록 이름뿐인 직함이었지만 이는 그가 기타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데 있어서 커다란 작용을 한다.
 
1929년 두월생은 당시 상해 프랑스조계지 최고 시정 지도기구였던 공동국(公董局)의 중국인 이사장(华董)으로 된다. 이는 중국인으로서는 프랑스조계지의 위치였다.
 
권력과 재산이 돈독해지자 두월생은 중회은행(中汇银行)을 차리고 상해의 금융업에 손을 뻩이었으며 서인육(徐新六), 진광포(陈光甫), 당수민(唐寿民) 등 금융계의 저명인사들과 결맹관계를 이루기도 했다.
 
한편 이 시기 두월생은 사회와 민중을 위해 일련의 유익한 일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25년 5월 15일, 일본인이 상해에 세운 면사공장에 아동공 학대사건이 발생, 이러자 국민당 농공부 부장 마초준(马超俊)은 상해에 있는 국민당 요인들과 상론하여 그 달 30일 상해구묘지(九亩地)에서 민중대회를 열고 일본인 공장주에게 항의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집회의 안전을 위해 두월생한테 경비를 요청하자 두월생은 그 어떤 보수와 대가에 대한 요구도 없이 부하들을 파견하여 집회에 참가한 국민당 요원 및 모든 민중들의 안전을 보호하고 회장의 질서를 잘 유지하여 장개석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26년 장시기 동안의 파업 등으로 상해는 <죽음의 도시>로 10여만명의 노동자들이 엄중한 생활고로 역겨운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이때에도 두월생은 거금을 내놓아 노동자들의 생활고를 해결하는 사업에 쓰게 했고 또한 공상계의 동료들을 동원하여 모금활동에 용약 참가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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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두월생은 중국적십자회 부회장직에 다년간 몸담고 있으면서 일련의 자선사업에도 열심히 투신, 많은 병원과 학교를 세웠다. 예하면 상해 대중직업학교(강소과학기술대학 전신)은 두월생이 세운 대표적인 학교로서 그 자신이 사재를 털어 많은 후원을 하기도 했다. 또한 상해시 항일후원회에 참가, 주석단 성원 겸 모금위원회 주임을 맡으면서 선후로 150만여원을 모금하여 전선에 보내주었고 전선에서 급히 수요하는 통신기재, 장갑보호차량 등을 팔로군 장령들에게 지원했으며 팔로군 대표 반한년(潘汉年)의 요구에 의해 1000개에 달하는 수입제 방독면구를 팔로군에 보내주어 사용하게 했다.
 
두월생은 항일을 위한 일련의 군사적 작전에도 손을 댄 적이 있었다. 상해가 일본군한테 점령당한 후 장개석은 장강을 거슬러 서쪽으로 침입하는 일본군의 대규모 작전을 막기 위해 장강봉쇄 계획을 제출하자 두월생은 자기의 윤선회사에서 몇 척의 선박을 출동시켜 장강에 폭침시키는 것으로 장강봉쇄계획에 도움을 주었고 이어 기타 윤선회사들에서도 적극 호응하여 장강항로를 막아 일본군의 진공을 지연시키는데 일조하였다.
 
1937년 상해가 함락되었다. 그 뒤 함께 손잡고 일하자는 일본군의 요청을 거절한 두월생은 그 이듬해 봄 중국적십자총회 이사진을 홍콩으로 전이시키고 자신이 직접 판사처를 설치하고 사업을 주최하면서 해외의 후원물자를 접수하는 동시에 기타 구국활동에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기도 했다.
 
홍콩에 거주하는 동안, 두월생은 자신의 방회를 이용하여 계속 항일구국사업에 정진, 그가 장악하고 있는 상해적후사업 통일위원회는 각종 방법으로 상해 경제계의 거두들인 우흡경(虞洽卿) 등이 안전하게 상해를 떠나 중경에 도착할 수 있도록 알선해주었고 자신은 물론 고종무(高宗武), 도희성(陶希圣) 등 인사들까지 매국역적 왕정위(汪精卫)와 결렬할수 있도록 기획하기도 했다.
 
1940년 두월생은 홍콩에서 인민행동위원회를 조직, 실제상 중국방회(中国帮会)의 용두(龙头)로 군림한다.
 
1942년, 태평양 전쟁이 폭발하자 두월생은 중경으로 전이하여 항사총사(恒社总社)를 건립하면서 대 후방에서의 세력을 발전시켜 나갔으며 선후로 중화무역신탁회사(中华贸易信托公司), 통제회사(通济公司) 등 경제실체를 만들어 일본군 점령지구와의 물자무역에 성공하기도 했다. 그 외 중경에서 규모가 큰 병원을 설립, 이는 당시 가장 선진적인 전시 후방병원으로 이 병원의 탄생은 여러 언론계의 절찬을 받았었다.
 
한편, 일생을 반 문맹으로 살아온 두월생이었건만 자녀의 교육만은 고도로 중시하였으며 상해 프랑스조계지 선종로(善钟路)에 중학교를 한 개 소를 세우고 자신이 직접 이사장을 맡았았다. 뿐만 아니라 <포동 두씨장서루(浦东杜氏藏书楼)>를 세워 공산당이 출판한 진보적인 서적 <서행만기(西行漫记)>, <노신전집(鲁迅全集)> 등 서적까지 장서로 구입해 열람용으로 진열했다.
 
항일전쟁이 승리한 후 상해로 돌아온 두월생은 재 부활을 꿈꾸면서 많은 사업에 서두르면서 적지 않게 가업 및 사회사업을 복구하였으나 그런 세월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1948년 봄, 두월생은 남경정부가 소집한 국민당 <헌법실행(行宪)> 대회에서 장개석이 재차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도록 적극 밀어주었다.
 
한편 이 시기 당시 장개석은 엄중한 재정위기를 만회하기 위하여 장경국을 상해에 보내 개혁을 강행, 금원권을 발행하여 민간에서 유통되고 있는 외화 및 금은 장신구를 일률로 금원권으로 바꾸도록 요구했다. 하지만 두월생의 아들 두유병(杜维屏)이 이런 개혁을 따라주지 않아 장경국에 의해 체포되었고 후에 유기형 6개월로 판결받았다. 이는 두월생한테 큰 충격을 주었다.
 
1949년 4월, 장개석은 두월생을 단독으로 만나 자기와 함께 대만으로 가 줄 것을 희망했고 공산당 또한 비밀경로를 통해 두월생을 만나 그로 하여금 상해에 남아 줄 것을 희망했다. 하지만 두월생은 장개석의 요구대로 대만으로 가지도 않았고, 상해에 남지도 않았으며 그가 선택한 것은 당시 영국행정권에 있는 홍콩을 선택했다.
 
1951년 8월 16일, 두월생은 홍콩에서 병으로 사망, 63세란 그닥 길지 않은 일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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