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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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1.82미터 되는 훤칠한 키, 일찍 복싱에 유능하였다는 투박하고 큰 손과 허리보다 더 긴 두 다리…이는 1965년 길림성축구팀이 전국축구 1부리그인 갑급축구무대에서 우승보좌에 오를 당시 골키퍼로 소문났던 박장수 건장의 생전모습이였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골키퍼가 절반 축구팀이란 말은 여전하다. 그만큼 골키퍼 위치가 중요했다는 얘기다. 골키퍼로 되자면 우선 고생스러운 것과 욕을 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장시기의 목표를 내걸고 자신심을 키워야 한다.”

여느 축구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박장수 원로 역시 어릴 적부터 운동을 즐겼었다. 그는 축구, 롱구, 배구, 핸드볼, 복싱 등 운동을 닥치는대로 했다. 그중 그래도 가장 장끼가 있는 종목이라면 복싱과 핸드볼이었다.

1959년 그가 연길에 와서 어느 한 핸드볼경기에 참가했을 때 그걸 지켜보던 길림성축구팀의 박상복 감독이 그가 보기 드문 골키퍼감이라고 점찍었다. 그 때는 조직의 배치라면 무조건 복종해야 했던 때였다. 하여 그 때까지만도 꼴키퍼에 대해 그닥 흥미가 없었던 박장수였건만 조직의 배치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원점 즉 영으로부터 축구 골키퍼의 생애를 시작했지만 열심히 훈련했다. 그의 말마따나 앞의 선수들은 경기 때 힘들고 골키퍼는 훈련이 힘들다는 말이 맞는듯 싶었다. 달빛아래에서의 개별훈련과 유명한 국가팀 골키퍼인 장진수밑에서의 고강도훈련, 워낙 운동을 즐겼었고 또한 핸드볼선수였던지라 그의 꼴키퍼 재능은 재빨리 제고되었다.

박장수는 무서움을 모르는 선수였다. 1962년에 있은 한차례의 경기 때 그는 상대방 선수와의 충돌에서 머리에 타박상을 입고 40여분간이나 쇼크상태에서 헤맸었다. 당시 많은 축구팬들은 그의 건강과 길림성팀의 수비선 때문에 몹시 걱정을 했다. 하지만 상한지 6일만에 경기장에 재출전, 독종이란 별명까지 붙게 됐다.  

이렇듯 이악스럽게 달라붙은 결과 길림성팀은 오래동안 공격선이 강하고 수비선이 약하던 국면을 돌려세우게 됐다. 특히 1965년 을급팀에서 갓 올라온 길림성팀이 전국축구갑급리그에 참가했을 때 박장수는 비범한 실력을 과시, 그가 4 – 5미터씩 날아 오르며 공에 덮친다 하면 호랑이를 방불케 했고 아무리 출중한 상대방의 스트라이커라 해도 하도 기세가 당당한 길림성팀의 골키퍼앞에서 주눅이 들어 슈팅도 제대로 못할 때가 많았다.

길림성팀이 우승하던 그해에 박장수는 실점골 8개밖에 허락하지 않아 전국축구계가 놀라게 했으며 동경춘, 정지승, 당봉상, 정종섭 등과 함께 건장칭호를 수여받게 됐다.

그 뒤 문화혁명 등 사연으로 골키퍼 생애를 마쳤고 후비력양성도 별반 하지 못했지만 그는 여전히 기층에 뿌리박고 많은 사업을 하면서 연변축구 특히는 지난 세기 90연대의 원 오동팀축구에 관심을 보이군 했다. 당시 원 오동팀에서 자체 골키퍼를 제대로 양성해 내지 못한 원인에 대해 박장수 원로는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1950연대와 1960연대에 비해 애로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 때의 길림성팀은 전국 4강중의 하나였지만 이 몇년래의 오동팀은 한해 건너 갑A보존 때문에 전전긍긍한 팀이라 시름놓고 자체의 골키퍼를 단련시킬 겨를이 없다. 골키퍼 양성이란 힘든 노릇이다. 합격된 골키퍼로 되자면 판단, 반응, 의식 등이 빨라야 할뿐더러 항상 타박상을 입을 위험이 뒤따른다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또한 경기시간의 수십배에 해당되는 훈련이 타선수들에 비해 곱절 힘들며 성숙기에 이르기까지 5-6년의 세월을 잡아먹기에 골키퍼를 원하는 선수가 적을 수밖에 없다.”

골키퍼 양성에 있어서의 박장수 원로의 주장 역시 명확했다.

“우선 소학교부터 목적성 있게 골키퍼양성에 모를 박고 알심들여 훈련시키는 한편 각종 경기에 자주 참전시켜 경기경험을 쌓게 해야 하며 조급성으로 나타나는 단기행위를 극복해야 한다. 골키퍼를 원하는 선수는 훈련시 지도의 훈련방법이 100%가 정확할 수는 없기에 부단히 자아 특점에 맞는 훈련방법과 훈련기술을 개발하기에 노력해야 하며 경기시에는 강한 기질을 보이는 것으로 상대방한테 만만치 않다는 느낌을 줘야 한다.”

그외에도 경기장에서의 골키퍼의 임전지휘 능력, 경우에 따르는 출격 또는 문전고수, 페널티킥을 당했을 때 상대방에서 슈팅하는 선수에 대한 심리파악 등은 모두 그 개성과 참고적 가치가 있었다.

평소에 박장수 원로는 후에 죽은 뒤에도 연변축구가 전국우승을 하는 것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던 박원로는 몇해전 지병으로 저 세상으로 갔다. 하다면 저 멀리 하늘 나라에서 박장수 원로가 현재의 연변팀 축구를 지켜보고 있으리라 믿어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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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조선족 축구원로 시리즈 (7) “골키퍼는 절반 축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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