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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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림파 진지는 일본군이 점령하려는 주요 공격목표였다. 중국군 제11사 31퇀 3영은 영용하게 저격하여 이 날 황혼무렵까지 일본군의 연속되는 5차의 공격을 물리쳤다.

한편 우측의 9련 진지는 적한테 점령당하고 좌측의 8련 진지 역시 일본군한테 내주면서 연장이 전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중기관총과 박격포로 무장한 제7련은 완강하게 진지를 고수, 맹열한 화력을 집중하여 적의 진공을 물리쳤으며 진지의 앞에는 일본군 시체가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하지만 7련 관병들의 상망과 기타의 손실도 컸다.

이튿날 새벽, 일본군은 삼면으로 협공하면서 7련 고지를 진공해 왔으나 여전히 영용한 7련의 관병들에 의해 격퇴되었다. 일본군은 육군으로서는 중국군 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게 되자 오전 9시경, 비행기 5대를 출동시켜 중국군 7련 고지를 무차별하게 폭격, 주위의 삼림이 불타고 구축해 놓은 여러개의 토치카도 폭격에 의해 날려갔으며 2패의 패장과 박격포 포수들도 모두 전사하였다. 또한 중기관총패는 전사자가 과반수를 초과했고 기술병종의 관병들은 생존자가 몇명 되지 않았다.

3일째 되던 날, 일본군은 비행기의 지원하에 계속 중국군 제7련이 지키는 고지를 공격, 중국군의 엄페물과 기타 공사는 파괴되어 페허로 되었으나 7련의 장병들은 완강하게 전투를 견지하였으며 4일째 되던 날 즉 5월 31일, 제7련이 남림파에서 철거할 때 전 련은 고작 70여명밖에 살아남지 않았으며 전체 관병의 상망자가 4분의 3에 달하였다.

5월 29일, 다른 한 갈래의 일본군 39사단의 주력은 여가파를 경과해 점심무렵, 조가댐에 진입, 다시 두갈래로 나뉘어 중국군 11사가 지키는 우장파와 주가평을 향해 진공하였다. 우장파는 산세가 험준하고 숲이 무성했으며 주가평은 협곡이 깊고 봉우리들이 첩첩하였다. 제11사의 관병들은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저항했다. 중국군은 수량상 배가 되는 일본군의 진공에 대적, 진지가 있는 곳의 주봉인 대송령에서는 수차에 거치는 육박전까지 벌어졌으며 일본군은 대포와 비행기로 중국군 진지를 초토화로 만들었으나 번번마다 고지점령에는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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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동시에 일본군 제3사단의 일부는 도자하를 가로 질러 중국군 18군 임시 34사가 지키는 교변남과 천대관 일대의 고지를 향해 맹렬히 공격, 천대관은 이 일대에서 중국군이 지키는 가장 높은 고지였다.

이날 일본군은 점심하를 따라 천대관의 뒤면으로부터 중국군을 향해 공격, 천대관을 탈환하려고 하였으나 점심하에 들어서자마자 중국군의 저격을 받으면서 일격에 300여명의 시체를 남기고는 다시 공격목표를 왕가댐으로 돌렸다. 하지만 일본군은 왕가댐에서도 중국군의 강한 저격벽에 부딪치면서 아무런 진전도 가져오지 못했다.

그 뒤 일본군 제3사단에 증원부대가 도착하면서 중국군 천대관의 부대는 대부대와의 연락이 끊기었다. 천대관을 사수하는 34사 1패의 전사들은 굴하지 않고 진지를 사수하면서 일본군과 박투, 일본군은 수차의 공격에도 산봉우리를 점령하지 못하자 비행기까지 동원되어 고지를 페허로 만들었으며 중국군 용사들은 일본군과 육박전을 벌이던 끝에 모두가 장렬하게 희생되었다.  

천대관을 점령한 일본군은 깊고 좁은 협곡에 들어섰으나 용가암 진지를 지키는 중국군의 포격을 받아 많은 상망자를 내고 퇴각하였다. 뒤이어 일본군은 비행기의 지원하에 협곡을 강행돌파한 뒤 다시 중국군 11사의 2선 진지를 향해 맹공격을 해왔다.

석패요새전역은 매우 간고했다. 일방은 반드시 공략해야만 하는 일본군 입장이었고 일방은 반드시 필사적으로 지켜내야 하는 중국군 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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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이 석패요새의 외곽진지들에 진입한 후 이 일대의 험산준령들은 매일 평균 9대 이상의 일본군 비행기들이 덮쳐들어 폭격했고 중국군과 일본군의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벌어졌으며 비명과 아우성으로 골짜기를 진감했다.

5월 30일, 일본군은 재차 중국군의 석패요새를 향해 공격을 강행, 비행기의 엄호하에 어느 작으마한 공간만 있어도 일본군은 그 공간을 이용해 공격의 발판으로 만들군 하였다. 

당시 조가댐 부근의 크고 작은 산에서는 3시간 가량 총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 헌데 그것은 쌍방이 정전한것이 아니라 적아쌍방간 육박전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당시 삼각암과 사방만을 공격하는 일본군은 1000여명에 달하였는데 그들은 고지를 쟁탈하기 위해 최루가스탄을 사용하면서 올라왔고 중국군은 이런 최루탄을 막아내는 설비가 없었기에 그저 일본군과 육박전을 벌이는 수밖에 없었으며 희생이 막대하였다.

이 두 고지에서의 전투는 당시 가장 치렬한 전투었다. 일본군은 매 1미터를 전진할 때마다 막대한 대가를 치렀는바 당시의 정경을 보면 해나 달마저 초연에 가리어 원 색갈을 잃을 지경이었으며 중국군 진지앞에 쌓인 일본군 시체는 쌓이고 쌓이어 금자탑 모양을 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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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과 배합작전하고 석패를 보위하기 위하여 중국군 공군과 미공군의 전투기들도 빈번히 출동하여 전장 혹은 전장 부근의 일본군을 향해 공격하였는가 하면 일본군의 증원부대를 소멸하고 보급선을 차단하기도 했다. 

5월 29일, 중국군 공군은 이창현성을 폭격하여 일본군 30여명을 살상, 30일에는 이창현 동쪽에 있는 일본군 비행장을 폭격하여 일본군 전투기 1대를 파괴하기도 했다.

5월 31일, 석패전역의 마지막 시각, 중국 공군은 지면부대와의 연합작전으로 일본군 전투기 6대를 격추하였으며 일본군의 함대가 육군과 협동작전하려던 계획을 철저히 파탄시키었다.

당시 적아간이 모두 일체의 대가를 가리지 않고 석패의 전연진지에서 치렬한 전투를 할 때 전구 총사령 진성 상장은 호련 사단장한테 전화로 “석패보위전이 파악이 있는가”라고 묻자 호련은 “성공파악은 없으나 사수의 결심은 있다”라고 대답하는 것으로 자신의 영웅기개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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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석패보위전의 가장 관건적인 전투에서는 승리의 천평이 몇번 일본군쪽으로 기울어질번 하기도 했지만 적아쌍방이 서로 어울려 육박전을 벌일 때에는 일본군의 현대화장비가 전혀 우세가 없었으며 쌍방이 바친 대가는 거의 1 : 1로 대등하였다.

특히 어느 한 전투에서는 적아간 거의 총을 쏠 수 없는 정도에 이르게 되자 수천명씩 서로 엉켜 육박전을 벌였는데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백병전(白刃战)이 바로 석패보위전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최근 어느 한 매체는 당시 백병전에서 전사한 소년병들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당시 중국 농민가정의 자식들은 보편적으로 영양이 좋지 않아 16~17세가 되어도 키가 총창만큼도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들 소년병들은 자기의 키보다 더 큰 총창을 들고 결사전을 벌이었다. 만약 당시의 소년병들이 살아있다면 지금은 모두 80여세가 되는 노인으로 되어 자기 집 정원에서 차물을 마시거나 손자손녀를 안고 안온한 생활을 만끽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다른 중국사람들로 하여금 이러한 향수를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기의 보귀한 생명을 바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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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3시간에 달하는 백병전이 있은 날의 오후, 수많은 용사들이 흘린 선혈이 장강 남안의 토지를 붉게 물들이었다. 이 날 1500여명에 달하는 용사들은 중국의 강토에 쓰러진채 조용히 잠들었고 총성이 없는 3시간의 백병전끝에 중국군은 끝내 고지를 지켜냈고 패하여 퇴각한 건 일본군이었다.

한편 일본군은 거듭되는 공격에도 석패를 공략하지 못했고 입은 손실도 막중함과 동시에 “무적황군”의 기세도 완전히 상실하였다.
5월 31일의 밤이 되자 전쟁터의 총포성이 돌연히 멈추었고 일본군을 분분히 머리를 돌려 동쪽으로 퇴각하였다.

석패보위전은 중국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그 전역에서 중국군은 도합 7000여명의 일본군을 살상, 많은 무기를 포함한 대량의 군수품을 노획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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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패보위전은 1939년 3월 장강방어전의 총성과 함께 시작되었고 1943년 6월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에 거쳐 진행되어 왔으며 최종 중국군의 승리로 종지부를 찍었다.

그 5년간 중국군은 도합 15만명의 병력을 투입했고 일본군도 10만여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전쟁에서 일본군은 2만 5718명이 살상되고 비행기 45대, 자동차 75대, 선박 122척을 손실보았으며 중국군은 사상자 1만여명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소련의 스탈린그라드전역과 마찬가지로 중국판 “스탈린그라드전역”의 승리는 당시 중일 양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환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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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판 “스탈린그라드 전역” – 석패보위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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