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2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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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근혜 한국 력사상 첫 녀성대통령으로 당선
    박근혜 한국 력사상 첫 녀성대통령으로 당선 서울 12월 20일발 신화통신: 한국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20일 새벽 공포한 결과에 의하면 한국 새누리당 대통령후선인 박근혜가 19일 거행한 한국 제18기 대통령선거에서 미약한 우세로 민주통일당 후선인 문재인을 이기고 한국 다음 임기 대통령으로 당선되였으며 한국 력사상 첫 녀성대통령으로 되였다.한국 중앙 선서관리위원회는 당지 시간으로 20일 새벽 5시에 최종통계결과를 공포했다. 박근혜와 문재인은 각기 51.6%와 48%의 득표률을 획득했는데 박근혜는 1577.3100만장의 선거표를 획득하고 문재인은 1469.2609만장의 선거표를 획득해 량자의 선거표 차이는 108.0491만장이다. 이번기 대선의 득표률은 75.8%에 달해 17기 대선의 63%와 16기 대선의 70.8%를 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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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12-21
  • 연변아줌마는 별로예요!
    연변아줌마는 별로예요! 줄곧 한국행을 꿈 꿔왔던 나에게 기회를 준것은 2007년에 시행된 무연고동포 방문취업제시험제도였다.10년만에 친정아버지를 인천공항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때문이다. 그래도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가끔씩 화상채팅으로 아버지의 모습을 뵙기도 했고 목소리도 듣긴 했었지만 당시 공항에서 우리 부녀의 만남은 이산가족상봉 그 자체였다. 그해 한국에 첫 발을 들여놓은 나는 공항리무진을 타고 당시 아버지가 살고 계셨던 서울의 한 단칸세방에 행장을 풀고그 다음날 동네 파출사무실에 등록을 한후 본격적인 한국생활을 시작했다. 첨에 내가 시작한 일은 ____. 그땐 아무것도 할줄 몰랐으니 가는 집마다 바닥쓸고 유리닦고 손님이 가면 상치우고 짬짬이 컵 씻고 하는 일은 다 나한테로 돌아왔다. 하루종일 손님들의 심부름에 홀언니들의 뒤치닥거리에 몸은 고달프고 녹초가 되였지만 주머니에 들어있는 5만5천원이란 돈을 생각하면 웃음집이 흔들거렸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마냥 가볍기만 했다. 매일 이렇게만 벌면 몇년후에 떼부자가 될것만 같은 생각에 어떤 달에는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한적도 있다. 내가 한국에 온 목적이 돈을 벌려는 것이어서 일이 힘든건 그래도 괜찮았다. 하지만 같은 중국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지역이 다르다고 무시하는건 도저히 참을래야 참을수가 없었다.한번은 어느 보쌈집에 일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일찍 출근해 바닥청소 거의 마감하고 있는데 홀직원인듯한 예쁘장한 아가씨가한들거리면서 출근한다. «안녕하세요?»하면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그 아가씨는 옷 갈아입으러 들어갔다.보아하니 스물대여섯 돼 보였다. 근데 옷 갈아입고 나온 그 아가씨가 소주뿌려가면서 테이블을 닦고 있는 나에게로 다가와서 하는 말이 «아줌마도 중국에서 오셨죠? 중국 어디에서 오셨어요?» 였다.말투 들어보니 나처럼 중국에서 온 아가씨인듯 하여 무척 반가웠다. «나는 연변에서 왔는데 아가씨는 어디서 왔어요?»당시 삼십대 후반이였던 나보다 훨씬 어린 여자애였지만 그래도 초면인지라 예의상 존댓말을 썼다.근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예쁜 얼굴에 실망의 빛이 어리면서 얼굴표정이 딱 굳어지더니 «아, 그래요? 전 연변사람이 별루예요.»라고 하면서 몸을 홱하니 돌려서 가버리는것이였다. 순간 나는 너무나 당황하여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그냥 넘어가야 하나? 아니면 어린애한테 뭐라고 지적해줘야 하나? 하고 갈등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초간...나의 자존심은 뿔부터 난 못된 송아지를 용서할수 없었다.나는 일하고 있는그 아가씨에게 다가가서 손으로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얘, 연변사람인 내가 너한테 피해를 준 일 있니?»«아니요, 없어요.»«그렇다면 무엇때문에 연변사람이 별루라는거니?»아가씨는 당연한걸 물어본다는듯이 «우리 동네에서는 연변사람은 몽땅 사기꾼이라고 소문이 자자해요. 그래서 나도 연변사람 싫어해요.»라고 또박또박 당당하게 말하는것이였다.«헉! 어린것이! 이마에 피도 안 마른것이?!» 된방망이에 뒤통수 맞은 기분이라고 해야할까? 당해보지 못한 사람은 그때 기분을 상상도 못할것이다. «얘, 그 이쁜 얼굴로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는게 아니다. 그러면 너네 동네사람들은 연변사람이 아닌 너처럼 다 그렇게 할말 못할 말 못가리고 툭툭 내뱉니?» 이렇게 말한후에도 나는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어찌 다른사람이 팥을 콩이라 한다고 너도 같이 따라서 콩이야 하고 말하니? 나이도 어린게 이렇게 이상지하 모르면 못 써! 우리 엄마도 연변사람이지만 자식교육 이렇게 시켜서 내보내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연달아 쏘아붙이고는 돌아서서 내 할일만 했다. 시간이 좀 지나고 «욱ㅡ»했던 기분이 좀 가라앉으니 «아, 내가 나이 어린애한테 너무 심하게 했나?»라는 자책감도 없지 않아 기분이 찜찜했다. 아침부터 이런 일이 있었는지라 그 아가씨와 나는 일에 관한 말을 빼고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고, 둘다 뿌루퉁한 기분으로 하루 일을 마무리했다. 그날 나는 그 아가씨한테 연변사람에 대한 인식을 바꿔주려고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더욱 열심히 뛰여다니다보니 결국에 녹아나는건 내 몸뚱아리뿐이였다. 그 후에도 나는 일다니면서 연변 아줌마 신분때문에 같은 중국조선족끼리 무시당하고 따돌림당한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어떤 연변언니들은 누가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면 그냥 길림에서 왔다고 조언하기도 한다. 나는 연변에서 태여났고 해란강옥토벌에서 나는 쌀을 먹고 자랐는데 무엇때문에 내가 연변사람이라는 사실을 숨겨야 하는가! 연변지역의 조선족들이 관내 조선족들보다 먼저 코리안드림의 물결에 합류한 것도 아니다. 터놓고 말해 1990년초반 한국에 연고 있어 실현한 코리안드림 얼마나 될가. 근데 한국에서의 조선족 이미지가 나빠진 것을 같은 조선족끼리 연변사람들한테만 그 책임을 돌리려하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고 이해할래야 할 수 없었다. 한국으로 보내준다며 사기 등 온갖 몹쓸 짓을 한 불법브로커들이 살판쳤던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런 브로커들이 다 연변사람인것도 아니지 않는가! 한국 본토박이도 있고 관내 조선족들가운데도 이런 브로커가 있다. 연변사람일지라도 그들은 수십만 연변조선족가운데 한낱 소수점에 불과한 존재이다. 우리 조선족은 지구촌 세계각지에서 모래알처럼 흩어져서 살지만 마음만은 하나로 융합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살고 있는 지역이 다르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서로간에 얼굴붉히고 배척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조선족이 글로벌경제시대로 진출하고 있는 지금 조선족은 단결 화합하여 타향에서의 생활을 잘 마무리하고 자신들의 아름다운 락원을 꾸려가야 한다.나에게서 호된 소리를 들었던 그 아가씨가 그날 이후로 연변사람에 대한 생각이 좀 바뀌였을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앞으로라도 «나는 연변에서 왔어요!»라고 떳떳하게 말할것이다.김 송 화 (중국조선족대모임 응모작품)
    • 문학살롱
    2012-12-17
  • 자존심을 붙안고 몸부림치던 나날에
    자존심을 붙안고 몸부림치던 나날에 김 미 선 1992년 5월 12일, 나는 남들처럼 빚을 내서 한 보따리 되는 중국약을 사 가지고 희망의 꿈에 한껏 부풀어 천진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푸른 물결이 끝도 없이 무연히 펼쳐있는 바다도 처음 보았고 커다란 물고기 세마리가 곡예를 하듯이 공중에 솟구치는 것도 처음 보았다. 드디어 우물안의 개구리가 세상 구경 나왔다고 해야 할가? 내가 산 배표는 3등선실인데 노란 장판을 깔아놓은 넓은 방에서 사람들이 기쁨에 들떠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야단법석이다. 지금도 눈에 선한것은 선실에서 본 한국영화 “장군의 아들”이였는데 너무 재미있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한국영화를 접했다. 우리와 같은 글,같은 말을 쓰고 있다는 것 자체에 친밀감이 들었다. 인천부두에 도착했지만 아직 새벽이라 해관 사무원들이 출근하지 않아 우리는 계속 배우에서 멀거니 몇시간을 더 보낸후 한국땅을 밟게 되었다. 나는 본래 별 걱정 없는 직장생활을 했었다.그럭저럭 먹고살기는 괜찮았으나 그냥 저축이 없이 빠듯한 생활에 환멸을 느끼던 차 “직장에 적을 두고 나와 창업할 수 있다” 정책이 나왔다. 고민끝에 나는 직장에서 나와 자영업으로 돈을 벌기로 했다. 그해가 바로 1987년이었다. 식당도 해보고 멀리 관내에 가서 쵸콜렛 등 식품을 구입해 식품상점에 되넘겨 팔기도 하다가 침직기계 몇대를 사놓고 집에서 침직품 생산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직장인들의 월급이 고작 인민폐 70원좌우였으나 유행에 맞는 털실세타 하나를 연구개발하면 하루에 300원이상 벌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한국행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한국에 와서 먼저 간 곳은 서울 전철역이었다.한보따리나 되는 약을 당장 팔야야 하기 때문이다. 젊은 아줌마들이 앞에 약들을 널어 놓고 앉아 있었다. 약장사하는 중국동포들이 적게 쳐도 이백명정도는 되었다.나도 자리를 찾아 앉아 그들처럼 약들을 차려놓고 앉으면 되는판이다.가방을 든채 몇번이나 돌고 돌았지만 손바닥만한 체면때문에 풍덩 물앉아 약을 팔 수 있는 마음의 준비는 도저히 없었다. 결국 약가방을 메고 다시 돌아왔고 생각끝에 일자리나 얻어 돈을 벌자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노원구의 한 음식점에 취직을 하였다. 한달 월급이 한화로 45만원이였다. 가지고간 약들은 후에 친구에게 헐값에 팔아넘겼다. 삼계탕을 하는 작은 음식점이라서 주인장과 내가 주방에서 일하고 그 안주인되는 이쁘장한 아줌마는 안방에서 화장하고 항상 어디론가 나갔다가 저녁에야 들어오군 했다. 그래서 나는 주방일 이외에 집청소도 도맡아야 했다. 그 집에 딱 한달 있었는데 거짓말보태 눈물 한동이는 흘렸을 것이다. 두고온 자식과 부모생각에 눈물이 났지만 더욱 화나는 것은 안주인의 횡포였다. 지금에 와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었지만 급별과 신분에 관계없이 평등했던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살아왔던 나로서는 안주인한테 말을 들을 때마다 억울하고 분해서 구석진 곳에 숨어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내가 받은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으면 열흘동안이나 배변을 보지 못하였을까?! 그것이 속에서 독이 되어 죽은 사람도 있다 하던데. 한달동안의 월급을 손에 쥐고 나는 가방을 챙겨 그 집을 나오려고 했다. 그러자 안주인이 나를 신고해 중국에 붙잡혀 가게 만들겠다고 방방 떨었다. 그날 나는 누구에게 선물하려고 두었던 비싼 다이어트약 4곽을 몽땅 주고 그집을 나올 수가 있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의정부에 있는 음식점이었다. 거기서 한 일년을 하니 일부 단골 손님들이 나를 보고“ 어~ 이 아줌마 많이 세련됐네.”하고 말하는것을 가끔 들었다.그 말을 들으면서 한국 온후 일년간은 시골 암탉을 시내 장에 갔다 놓은 꼴을 보여줬을것이란 생각을 하면서 푸후~ 하고 웃음이 나가기도 하였다. 불법체류하는 조선족 티를 내지 않자면 한국말을 빨리 배워야 했고 주인의 잔소리를 안듣자면 온 신경을 다 모아 일을 빈틈없이 깔끔하게 해야만 했다. 한국 음식점에서 일하는 목적이 두가지였는데 돈을 버는것이 하나이지만 그보다 중요한것은 번 돈을 가지고 고향에 돌아가서 근사한 음식점 하나 차릴 목적에 한식 만드는 기술을 배우려는 생각도 있었다. 한번은 회사내 식당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그 사장이 가까이에 있는 또 다른 식당도 운영하고 있었다. 내가 일하는 식당은 아침 40명, 점심 100명, 저녁에 40명에 밤 12시에 20여명이 식사하였다.사모님이 점심에 와서 잠간 거들어주고 오후에 가고 나면 나 혼자서 했는데 일하는 것보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그래도 혼신을 다해 일했더니 가끔식 돌아보고 가던 사장님이 회사 노조에서 내가 하는 음식이 입에 맞는다고 칭찬하더라고 알려주면서 월급 십만원을 올려주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후 식당일에 지겨움을 느낀 나는 안산에 있는 시화공단의 한 작은 회사에취직했다. 강철로 만든 각종 출입문, 간판, 매대, 또 용처를 알 수 물건들을 주문을 받아서 뼁끼 칠을 하는 공장이였다. 공장에는 또 한국에 온지 한달도 채 안되는, 김철이라고 부르는 흑룡강에서 온 조선족 남자가 있었다.처음에 그는 공장의 류수작업이 습관이 안된 모양이었다. 중국에서 한가하게 일하던 습관때문에 휴식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작업대 뒤에 가서 혼자 담배를 피우고 나올 때면 류수작업에 차질이 빚어지군 했다. . 그러던 어느 날. 일은 터졌다. 회전하는 줄에 닦아 놓은 물건들을 걸어야 하는데 물건이 또 미처 따라가지 못했다. 바로 이때 «야, 이 씨팔 놈아. 다른 사람들 일하는게 안 보여? 너만 피곤하냐. 너 같은 놈하고 일하다가 내가 스트레스 받아 못 산다. …..» 깜짝 놀라서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니 평소 물불을 가리지 않고 싸움질을 잘하는 최씨성의 한국남자가 담배를 피우고 나오는 김철을 향해 삿대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철이가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여는데 그 소리가 나오기 바쁘게 최씨가 김철이의 뺨을 철썩하고 후려친다. 김철이의 뺨은 순식간에 붉게 달아 올랐다. «또 싸움이야, 그만두지 못해!» 언제 들어 왔는지 사무실에 있던 장과장이 최씨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그 광경을 보는 나의 마음속에는 뭔가 부글부글 끓어 번지고 있었다. 남들이 일하는 시간에 혼자서 담배를 피운 김철의 잘못도 있지만중국동포라고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 최씨가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최씨가 마음 먹고 나를 무시하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그의 달라진 어투나 행동에서 감지할 수 있었다. 한 두번은 참을수 있으나 중국동포를 사람취급 하지 않는 그의 언행을 보면서 나의 마음은 독으로 번져지고 있었다. (기회를 보자. 네가 입이 열이라도 할말이 없을때까지 기다리자.) 얼마 안 가서 그 기회가 오고야 말았다. 최씨가 무거운 쇠문짝을 받쳤던 스츠로프를 돌아서 일하는 나를 향해 걷어찼다. 스츠로프는 나에게 맞쳐왔고 그것이 아프지는 않지만 나는 그 기회를 놓칠수가 없었다.홱 돌아서는 찰나에 최씨가 곁에 있는 친구에게 입을 비쭉이면서 너털웃음을 웃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빽 소리 질렀다.«이것을 왜 나한테 걷어차는거예요?!»«왜? 내가 차고 싶으면 차는거지 그게 어떻단 말인데?» 최씨는 의기양양해서 소리쳤다.«이런것을 함부로 차 저한테 맞혔으면 사과를 해야 하는거 아닙니까? 그러고도 웃어대는 저의가 무엇이예요?» 내가 소리 질렀다. 공장은 기계소리 때문에 거리가 좀만 떨어져도 들리지 않기에 혼신을 다 해 소리 칠 수밖에 없었고 나는 독을 품고 있는 상태였다. «야. 이 씨팔년아. 내가 웃고 싶으면 웃지. 너 때문에 내가 참아야 되는거니? 안 그래 .» 여전히 희죽거리는 그한테 나는 별렀던 포탄을 터뜨렸다. «야, 너 부모가 있니? 너같은것도 아들이 있다고 밖에 나가 남들하고 말하겠지?!»이것이 내가 터뜨린 첫 번째 폭탄이였다.«이 미친 년이 부모는 왜 욕 보이는거니?» 최씨는 그래도 효자일수는 있었다. 길길이 날뛰면서 나한테 때릴듯이 다가 왔다. 나의 고사포가 울리기 시작하였다. «야, 너 학교라는데 다녀 봤니? 너 부모 교육이라는걸 받아 봤니? 인피쓰면 다 사람인줄로 아는데. 천만에! 분명히 알아 둬! 너보다 못한 사람은 이세상에 없어, 중국에서 살면서 소수민족이지만 너처럼 우리를 무시하는 사람은 종래로 못 봤어. 이 개보다 못한 물건짝아! 대한민국에 너 같은 야만인이 있다는 것이 내가 다 창피스럽다. ……………» 또박또박, 높은 톤으로 내뱉는 나의 목소리에 공장은 가동을 뭠췄고 언제 들어 왔는지 사무실의 장과장을 비롯한 공장안의 모든 사람들이 소리를 죽이고 빙둘러 서 있었다. 나한테 다가왔던 최씨가 슬금슬금 자기 자리를 가고 있었지만 나는 따라가면서 계속 고사포를 쏘아댔다. 말을 마친 나는 그자리에서 로동복을 벗어 버리고 숙사로 들어가 나의 물건들을 챙겼다. 그리고 곧장 사무실로 들어갔다. 밖에서 금방 들어온 사장님이 장과장한테서 방금 벌어진 일을 회보받고 있었다. «사장님,저 인제 일을 그만 두겠습니다.»«아줌마 그러지마요. 아줌마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물러서는거예요?아줌마가 가면 아줌마가 잘못했다고 승인하는것밖에 안 되잖아요.»«저 불법체류이기 때문에 저 사람이 고발하면 잡혀가요. 그러니 다른 일자리를 찾으렵니다. 그 동안 관심해 주어서 고마웠어요.»그러자 사장님은 나를 자리에 앉혀주며 최씨가 신고 못하게 조치를 취할 것이라면서 안심하고 일하라고 다독여주었다.나는 다시 공장으로 돌아 갔다. 이튿날부터 나를 보는 사람들의 눈길이 변한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최씨의 친구인 고씨와 리씨도 “아줌마 중국에서 변호사한거 아니야?!” 하고 우스개를 했고 우리는 함께 통쾌하게 웃을 수가 있었다. 한국에 갔다왔기 때문에 우물안의 개구리였던 내가 너무나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돈도 많이 벌었다. 서로 다른 체제에서 살아왔던 거리감때문에 많은 오해도 있었지만 피는 물보다 진한 친정집 같은 감정은 그 누구도 무마할 수가 없다. 내가 흘렸던 눈물과 내가 힘들어 했던 그 나날들이 내가 보다 성숙된 인간으로 성장하는 과정의 주춧돌이었다. 吉林省 延吉市 金 美 善(중국조선족대모임 한국생활수기 응모작품)
    • 문학살롱
    2012-12-17
  • 나의 유학생활은 열정으로
    2001년 3월20일,김포공항에 내리면서 한국을 처음으로 체험하게 되었다.할아버지 고향이 전라남도 나주시 봉황면이다. 어릴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 곁에서 자란 장자로서 소년 시절부터 “남조선”에 대해 생소하지는 않았다. 할아버지는 중국 연길에 계실적 매일 저녁 주무시기전엔 라디오를 틀고 KBS방송을 듣군 했다. 1910년대 쪽박차고 중국에 이주했지만 고국에 대한 그리움은 잊지 못한채 한국 뉴스를 즐겨 듣고 한국에 있는 친척을 찾는 프로그램도 빼놓지 않고 듣곤 했다. 이런 할아버지 영향을 받아서인지 한국이 낯설고 머나먼 나라로 생각되지 않았고 한번쯤은 가보았으면 원이 없겠다는 생각도 했다. 1999년,나는 연변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연변1중에서 영어교사로 2년 지냈다. 우연한 기회에 경희대 정보통신대학원 진용옥원장님을 알게 되었다. 정보통신 분야에서 유명한 학자이시다. 그때 당시 중국 현지 언론을 통하여 정보통신 분야에서 한국이 선진국이라는 뉴스를 많이 접하였다. 정보통신 공부를 하여 벤처기업을 설립하자는 꿈을 가지고 나는 성스러운 교사 직업을 그만 두고 한국 유학의 길을 선택하였다. 연변1중은 조선족고등학교에서 최고의 명문고등학교라 대우도 아주 좋았다. 그런 좋은 직장을 그만두는 나를 친척, 친구들이 다시 한번 잘 고려하라며 만류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나의 결정을 꺾을 수가 없었다. 북경에서 비자 승인을 받고 한국으로 떠났다. 15명의 연변 청년들이 경희대정보통신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나의 비자가 늦게 승인받은 바람에 그들과 떨어져 역시 비자땜에 출발이 늦어진 한 형님과 함께 동행하게 됐다. 김포공항에서 경희대학교 수원캠퍼스로 버스를 잡았다. 제일 처음으로 인상 깊게 본 것은 차창밖으로 보이는 까치 둥지이다. 정말이지 까치 둥지가 상상이외로 아주 많았다. 우리 속담에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찾아온다는 말이 있다. 나무위의 까치둥지는 나의 고향에서 볼 수 없는 풍경들이었다. 정보통신대학원 멀티미디어학과 전공을 선택한 나는 학부때 관련 지식을 공부하지 못했기에 선수과목 수업을 들어야 했다. 처음에는 교수님이 무엇을 얘기 하는지 알아 들을 수 없었다. 모르지만 듣고 또 듣고 용어사전 찾아가며 공부했다. 방학에도 다른 유학생들은 한과목을 선택하여 계절 수업을 들었지만 나는 두 개 과목을 선택하여 들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몇달간의 시간이 흐르자 제법 기초 용어를 대강 알아듣기 시작했다. 생활비도 문제다. 15명 조선족 유학생 친구들은 생활비와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했다. 주유소에서 시간당 2,500원 아르바이트생을 구한다는 주유소의 모집공고가 들어왔다. 한국 학생들도 방학에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 한다는 것을 들었다. 나도 중국 연변대학교를 다니면서 두달간 방도문회사에서 아르바이트 한적 있었다. 80키로그램이나 되는 문짝을 옮기고 설치하고 꽤나 힘들었지만 일반 근로자들의 생활을 체험하기 좋은 기회였다. 주유소에서 주는 돈은 적지만 생활비를 얼마간 충당할 수 있고 여건이 좋은 아르바이트 기회가 언제 생길지 모르니 일단 시작하고 보자는 마음에 주유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낮에는 공부하고 저녁9시부터 새벽 두시까지 주유소에서 일을 하였다. 방학 때는 오전에만 수업이 있어 그 나머지 시간은 주유소에서 열심히 일을 하였다. 주유소에서 두달 가까이 지내다가 벼룩시장에 나온 식당 홀서빙 광고를 보게 되었다. 일은 수업 끝난 후부터 저녁 11시까지여서 수업에 영향을 주지 않았고 주유소의 아르바이트 급여보다 두배 가까이 받는다. 아직도 처음 면접때 일을 생각하면 재미 있었다. 일라인 스케티트를 타고 식당앞에서 멈추고 신발을 바꿔 신고 식당으로 들어섰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식당 주인이 나를 보더니 무척 반가워 하였다. 자신도 일본 유학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주파수 대가 거의 같았는지 모르겠지만 식당일 시작하기 전부터 나한테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하였다. 가게 사장이 일라인을 타면 위험하니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하였다. 웬 떡이냐라고 생각했다. 처음 면접 본 풋내기 유학생한테 이런 선물을 하다니. 참으로 감사했다. 그 생고기집은 테이블 여섯개 밖에 안되는 작은 식당이지만 고기도 최상급이고 소스도 일본에서 개발한 소스를 직접 사용하기에 저녁이면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 이때면 가게 사장, 주방장, 그리고 홀서빙하는 나를 포함하여 세명은 바로 전쟁이다. 야채, 수저, 밑반찬, 숯불목탄 세팅부터 남은 그릇 주방까지 나르기가 나의 몫이다. 이것도 열정이 없으면 안된다. 열정을 가지고 내가 맡은 업무를 착실히 수행해 나갔다. 일년후,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에서 인턴 연구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이 우리학교에 전해졌다. 같이 온 조선족 유학생들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연구원에 보냈다. 행운스럽게도 유일하게 내가 선정되었다. 나중에 듣고 보니 영어를 전공한 것이 큰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사실 정보통신에 대한 이론 지식은 학교에서 그나마 공부하였으나 이 분야에서 눈을 뜬 건 사실 연구원에서 한중 통역을 하면서 시작하였다. 근무하는 기간 여러 연구원들과 일을 같이 하고 생활도 하면서 한국을 요해했고 많은 국제회의에 참석하면서 정보통신 첨단 기술 발전추세도 파악했다. 해외 정보 사업실에서 근무하는 동안 국제정음정보처리회의 (2002,심양)에서 “동북아과학기술정보교류 방안”을 제목으로 하는 논문을 발표하였고 중국 Computer Network Information Center와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과의 네트워크 관련 교류를 추진하였고 슈퍼컴퓨터, 디지털도서관, 인체영상 분야의 통역을 진행했다. 2002년 12월 16일에는 중국문헌정보센터와 한국과학기술연구원과의 자원공유 교류 통역을 수행하였다. 중국에서 정보통신 관련한 분야의 용어를 접촉하지 못해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모르면 배우자.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다. 나는 열정으로 모든 것을 압도하였다. 전문용어가 무슨 뜻인지 모르면 중국 정보통신관련 연구원들과 물어보고 또한 번역한 결과를 한국 연구원들에게 의사전달이 맞는지 확인하였다. 과학기술 통역은 어떻게 보면 연구원들에게 하나하나 배우는 과정이었다. 그 때 당시 배움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면 지금의 발전된 모습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에 있으면서 한중 엘리트들과의 접촉가운데 정보통신관련 많은 새로운 것을 배웠고 또한 이러한 것들은 나의 소중한 경험으로 되었다.. 저자 곽용호
    • 문학살롱
    2012-12-17
  • 한국생활수기 모음집을 발간하며
    중한수교 20주년을 맞이하는 임진년 2012년도 저물어가는 시점입니다. 또한 중국조선족대모임 설립 10주년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이 시점에서 <중국조선족대모임>이 년초부터 추진해왔던 재한중국조선족의 한국생활 수기모음집을 한권의 책으로 묶어 출간하게 되어 여간 기쁘지 않습니다. 이 책에 수록된 수기모음집은 중국조선족이 한중수교로 모국이면서도 이국타향인 한국에 와서 생활하는 갖가지 체험담을 진솔한 이야기로 풀어 담은 소중한 이주생활기록들이라고 생각합니다. 29편의 주옥같은 글들은 조선족 개인의 이야기이지만, 분명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라 생각합니다. 현재 한국에서 생활하는 중국조선족이 50만명을 넘어서고 있다고 합니다. 과거 20년의 발자취를 뒤돌아볼 때 우리 중국조선족은 좀더 잘 살아보자는 목표를 갖고 기대에 부풀어 한국에 왔지만 문화차이가 많이 나는 낯선 땅에 와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 과정에 좌절도 있었고 안타까운 사연들도 많았고, 눈물겨운 일들도 많았던 것같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좌절에 머무르지 않고 시련을 잘 극복하고 이만큼 성숙한 조선족으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중국조선족도 생각이 깊고, 문장을 통하여 감동을 줄 수 있는 문화인임을 보여주는 것이 한국사회에서 중국조선족의 이미지를 높이는 소중한 일이라 생각하고 한국생활 수기를 공모하게 되었고, 책으로 내게 된 것입니다. 중국조선족대모임을 사랑해주시고 소중한 시간을 내어 글을 써주신 분들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책을 내어 선물을 드릴 수 있는 일뿐입니다. 또한 저의 바람을 잘 이해해주시고 기꺼이 책을 내는데 도움을 주신 밍밍(mingming)무료국제전화 임직원님들께 진심어린 감사를 드립니다. 아무쪼록 여기에 실린 한국생활수기가 널리널리 퍼져 많은 분들에게 읽혀지게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한국에 와서 열심히 생활하는 조선족의 삶이 진주알처럼 빛나고 조선족의 이미지 향상 뿐만 아니라 조선족과 한국인 간의 같은 피를 나눈 형제들로서 서로 이해하고 가까워지게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2년 12월 13일 신림동 사무실에서 중국조선족대모임 대표 허을진
    • 문학살롱
    2012-12-17
  • 2013 기술교육 및 방문취업 전산추첨 당첨자 명단 알림
    2012. 12. 14.(금) 법무부에서 실시한 2013년 기술교육 및 방문취업 전산추첨 당첨자 명단을 붙임과 같이 공지합니다. 조회요령과 사증발급신청 시기 및 주의사항은 붙임 첨부화일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3년 기술교육 당첨자 명단☞ 13년 방문취업 당첨자 명단
    • 외국인· 출입국
    2012-12-15
  • 中 댜오위다오 처음 항공기 투입
    중국 국가해양국 항공기가 13일 오전 댜오위다오 상공에 진입했다. (출처: 신화넷) 중국 국가해양국 항공기가 13일 오전 댜오위다오 상공에 진입했다. (출처: 신화넷) 13일 오전 중국 국가해양국 항공기가 댜오위다오(釣魚島) 상공에 도착해 순찰 작전을 개시했다. 이에 맞서 일본항공자위대는 F-15 전투기와 E2C 조기경보기를 긴급 발진시켜 맞섰다. 해외 언론들은 중국이 처음으로 항공기를 댜오위다오 순찰에 투입했다고 분분히 보도했다. 특히 AP통신은 중국의 행동은 "흔치 않은 일"이라고 직접 밝히기까지 했다. AP통신은 13일 오전 중국 항공기가 댜오위다오 상공에 나타난 후 일본은 4대의 F-15 전투기를 동원해 해당 지역에 이르렀지만 "더이상의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고 일본 방위성 관원이 밝혔다고 전했다. 로이터통신은 일본이 동원한 F-15 전투기가 8대에 이른다고 일본 방위성 관원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미국 CNN방송은 13일 중일간 영유권 분쟁이 있는 댜오위다오 상공에 중국 항공기가 나타난 것을 발견하자 일본은 전투기를 긴급 발진시켜 맞섰다고 보도했다. 이는 양국이 댜오위다오 영유권 분쟁에 "처음" 전투기를 투입시킨 것이라고 방송은 전했다. 중국 국가해양국은 13일 "오늘 오전 해양감시용의 B-3837 항공기가 댜오위다오 상공에 도착했으며 해양감시선 4척과 편대를 이뤄 댜오위다오 상공과 해양을 처음으로 입체적으로 순찰했다"고 밝혔다. 해양국은 중국 항공기와 선박이 무선으로 "일본 측은 중국 영해에서 즉각 물러나라"고 요구했다고 확인했다. 중국 외교부 훙레이(洪磊)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중국 해양감시 항공기가 댜오위다오 공역에서 비행한 것은 전적으로 정상적인 활동"이라고 강조했다. 일본 자위대의 지상 레이더는 중국 항공기를 포착하는데 실패했으며, 해상보안청의 순시선이 처음 확인한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CCTV.com 한국어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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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12-15
  • 中 매체, '북 로켓 발사' 비중 있게 다뤄
    ▲ [자료사진] 출처: 신화넷중국의 주요 언론과 방송들은 12일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 소식을 긴급 보도했다. 신화통신, 중국신문, 중앙 CCTV 등 여러 매체를 비롯한 주요 포털사이트 뉴스에서도 북한의 로켓 발사 소식을 비중 있게 다뤘다. 한편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오전 11시 23분 "운반로켓 '은하 3호'를 이용한 '광명성 3호' 2호기 발사가 성공했으며 위성이 예정된 궤도에 진입했다"고 밝혔다.이번 북한의 장거리 로켓은 일본의 오키나와 상공을 통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차주성 기자연변통보 2012-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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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12-13
  • 中 민족대학 제5회 한글날 기념공연 “대장금”
    11월 29일 저녁 7시, 중앙민족대학교 조문학부 “옹달샘”문학사가 한글날을 기념하기 위해 기획, 연출한 연극-“대장금”이 중앙민족대학교 대강당에서 화려한 막을 올렸다. 연기자들의 호연과 우리 민족 특유의 분위기가 돋보였던 공연은 교내외에서 몰려온 천여명 관중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2008년부터 매년마다 한글창제를 기념하기 위해 진행되는 “옹달샘” 문학사의 대형연극은 제1회 “훈민정음”, 제2회 “복사꽃이 피었네”, 제3회 “신흥부뎐”, 제4회 “춘향연”에 이어 올해 제5회째를 맞게 되였다. 이번 연극은 조선조 의녀 장금이 남존녀비의 봉건적체제하에서 집념과 의지로 궁중 최고의 료리사와 조선 최고의 의녀가 된 성공담 및 장금과 민정호의 사랑이야기를 담은 “대장금”은 한국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여 중국에서도 방영된바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스토리다. 이날 연극은 드라마를 바탕으로 새로운 형식과 최근 류행하는 개그요소까지 가미시켜 관객들에게 친근하지만 진부하지 않아 신선한 재미와 감동을 선물하였다. 또 연극 도중에 극에 알맞는 조선족 전통음식과 전통놀이도 소개되여 우리 민족의 특색을 널리 알렸다. 조문학부 강용택 학부장은 이날 공연과 관련해 우리 말과 우리 글, 나아가 우리 얼을 지키기 위해 여러가지 유익한 활동을 조직하고 있는 “옹달샘” 문학사에 아낌없는 격려를 보냈다. 한시간 남짓이 진행된 공연은 전체 출연자들의 멋진 합동무대로 두달동안의 준비려정에 원만한 끝을 맺었다. 이번 공연은 그 재미와 감동과 더불어 569년 력사의 한글창제를 기념하고 있다는데서 의의가 크다. “옹달샘”문학사는 1995년 중앙민족대학교 조문학부 학생들에 의해 창립된 17년 력사의 장수 동아리로서 우리 말과 우리 글을 지키고, 나아가 우리 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지키는것을 취지로 하고있다. 정기적인 문학잡지 출간, 한글날 특별공연, 글짓기 경연, 시랑송 경연, 문학세미나 개최, 문화체험 등 다양한 행사를 펼치는것을 주요 활동으로 하고있는 “옹달샘”문학사는 연변대학교 “종소리”문학사와 함께 민족문학과 민족문화를 지키는데서 대학생단체로서의 선두적 역할을 하고있다(중앙민족대학교 조문학부 기자단 황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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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시아
    2012-12-06
  • 허예나 신곡“가슴아픈 너의 한마디” 발표
    음악쇼프로그램 “천상의 목소리”를 통해 중국음악계에 데뷔한 조선족가수 허예나가 신곡 “가슴아픈 너의 한마디(等你一句话)”로 일주일내 조회수 백만을 넘기고 각 음원사이트 앞자리를 차지하고있다.“가슴아픈 너의 한마디”를 통해 허예나는 진실한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했고 부드럽고 괴롭고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보여주었으며 뛰여난 고음발성능력과 폭발력을 과시했다.“가슴아픈 너의 한마디”는 대만의 유명 제작인 진수남이 대만의 작사가 진악영과 대륙의 신예창작인 문영추와의 합작으로 제작했다. 현재 “가슴아픈 너의 한마디”의 MV는 제작중에 있는바 진금합감독이 연출을 맡는다(허국화기자). 래원: 연변일보
    • 연예·방송
    2012-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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