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내셔널포커스] 중국 근대 외교사의 대표 인물 가운데 한 명인 루정샹(陆征祥)은 오랫동안 ‘21개조 요구’ 협상 책임자로 기억돼 왔다. 한때는 굴욕 외교의 상징처럼 비판받았지만, 최근 중국 학계와 역사 분야에서는 그를 단순한 친일 인사가 아닌 시대적 한계 속에서 외교 현장을 떠맡았던 비극적 외교관으로 재평가하려는 움직임도 이어지고 있다.
루정샹의 삶은 청나라 말기와 중화민국 초기의 격변기를 그대로 압축해 놓은 듯하다. 그는 외교 제도 개혁과 인재 양성에 힘쓴 개혁형 관료였지만, 일본의 ‘21개조 요구’ 협상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휘말리며 평생 무거운 정치적 부담을 안고 살아야 했다.
1915년 일본은 중국 정부를 상대로 이른바 ‘21개조 요구’를 제시하며 정치·경제적 영향력 확대를 시도했다. 당시 위안스카이(袁世凯) 정부는 긴급 협상단을 꾸렸지만, 기존 외교 라인의 협상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해 루정샹을 외교총장으로 기용했다.
당시 중국은 군사력과 재정 모두 열세였고, 내부적으로도 정치 혼란과 군벌 갈등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일본과 정면 충돌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루정샹은 협상 과정에서 일부 조항 축소와 유예를 시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원안 가운데 일부는 최종 합의에서 제외되거나 보류됐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중국 사회에서는 굴욕적 협상을 막아내지 못했다는 비판이 거세게 제기됐다. 루정샹 역시 이후 큰 정신적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훗날 “약소국에는 공의도 없고 외교도 없다(弱国无公义,弱国无外交)”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당시 국제 질서 속 중국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표현으로 자주 인용된다.
루정샹은 원래 학자형 외교관으로 평가받았다. 상하이 광방언관과 동문관에서 수학했으며, 특히 러시아어에 능통했다. 이후 청나라 주러시아 공사관에서 통역 업무를 맡으며 외교 경력을 시작했다.
이 시기 그는 벨기에 출신 여성 베르트(Berthe Bovy)를 만나 결혼했다. 당시 외교공관 내부 반대가 있었지만 그는 이를 무릅쓰고 1899년 혼인했다. 이후 줄곧 외교 분야에서 활동하며 청말과 민국 초기 외교 체계 개편에 관여했다.
귀국 후 그는 외교총장으로 발탁돼 기존 청나라 외무 체계를 현대식 외교부 구조로 정비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특히 연줄 중심 인사 관행을 줄이고 외국어·외교 실무 능력을 중시하는 전문 인사 제도 도입에 힘썼다.
그는 외교관과 영사 선발 기준을 새롭게 정비했고, 외교 전문성이 부족한 인물의 임명을 제한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권문세가와 정치권 인사들의 반발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당시 외교부 조직 분위기를 크게 바꾸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육성한 젊은 외교관들 가운데 상당수는 훗날 중국 외교 현장의 핵심 인물로 성장했다. 중국 외교 현대화의 초기 기반을 마련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21개조 요구’ 협상 이후 그의 삶은 크게 달라졌다. 중국 안팎에서 비판이 이어졌고, 결국 그는 스위스 공사직을 맡아 유럽으로 떠났다.
이후 그의 삶에는 또 다른 전환점이 찾아왔다. 아내 베르트가 1926년 스위스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루정샹은 곧바로 공직에서 물러났고, 이듬해 벨기에 브뤼셀 인근의 성 안드레아 수도원에 들어갔다. 이후 종신서원을 거쳐 정식 수도사가 됐고, 나중에는 사제 서품도 받았다.
수도원 생활을 시작한 뒤에도 그는 중국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중일전쟁 시기에는 유럽 각지에서 강연과 기고 활동을 이어가며 중국의 항전 상황을 알렸고, 일본 상품 불매를 호소하기도 했다.
그는 ‘목란(木兰)’이라는 필명으로 쓴 글에서 “중국은 세계 문명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면서 유럽 사회의 관심과 지원을 촉구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벨기에를 점령하자 루정샹이 머물던 수도원 역시 영향을 받았다. 수도사들이 수도원 밖으로 쫓겨나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지역 주민들을 돕고 종교 활동을 이어갔다.
나치 점령 시기 그는 벨기에 각지를 돌며 주민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전해진다. 1944년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에는 벨기에 해방이 머지않았다는 소식을 주민들에게 전하며 사기를 북돋웠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전쟁 이후 교황청은 그의 신앙 활동과 전시 행적을 높이 평가해 성 안드레아 수도원 명예원장 직을 부여했다.
1949년 병세가 악화됐을 당시 수도원 관계자가 “중국이 당신 마음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고 말하자, 루정샹은 손가락 세 개를 들어 보였다고 한다. 상대가 “중국이 당신 마음의 4분의 3을 차지하고 있다는 뜻인가”라고 묻자 그는 미소를 지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78세로 생을 마감했다.
루정샹의 삶은 중국 근대 외교사의 복잡한 단면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외교 개혁과 인재 양성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시대적 한계 속에서 굴욕적 협상의 책임까지 떠안아야 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다. 최근 중국 내에서는 그를 단순한 협상 책임자가 아니라 혼란한 국제 정세 속에서 외교 현실을 감당했던 인물로 바라보려는 시각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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