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로그인을 하시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받으실 수 있습니다.

[중국 외교 인물열전⑨] 근대 중국 법치와 외교의 설계자, 왕충후이

  • 김준하 기자
  • 입력 2026.06.28 19:15
  • 댓글 0
  • 글자크기설정

 

1000045308.jpg

 

[인터내셔널포커스] 근대 중국 외교와 법학의 역사를 논할 때 왕충후이(王宠惠·1881~1958)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법학자이자 외교관, 정치가였으며, 중국 최초의 근대식 대학 졸업장을 받은 인물이다. 중화민국 외교총장과 사법총장, 국무총리 대리, 사법원장, 외교부장 등을 두루 역임했고, 국제연맹 상설국제사법재판소(PCIJ) 재판관으로 활동한 최초의 중국인이기도 하다. 또한 1945년 유엔헌장 중국어본의 최종 수정과 윤문을 맡으며 전후 국제질서 수립에도 참여했다.


1881년 홍콩에서 태어난 왕충후이는 어려서부터 중국 전통교육과 서양식 교육을 함께 받았다. 북양대학 법과에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 위루(裕禄)로부터 '흠자 제1호 고빙(考凭)'을 받았다. 이는 오늘날까지 중국 최초의 대학 졸업증으로 전해진다. 이후 일본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예일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유럽에서는 국제법과 비교법을 연구하며 국제적 명성을 쌓았다.


1907년 그가 독일 민법전을 영어로 번역한 것은 세계 법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 번역본은 당시 가장 권위 있는 영문판으로 인정받아 영미권 대학의 교재와 법원 참고자료로 널리 활용됐다. 뛰어난 외국어 능력과 비교법 연구는 훗날 그의 외교 활동에서 강력한 무기가 됐다.


신해혁명 이후 그는 손문(쑨원)을 도와 중화민국 임시정부 외교총장을 맡았으며, 남북화의에도 참여했다. 1912년 네덜란드령 동인도 수라바야에서 화교들이 국기를 게양하다 희생된 '수라바야 사건'에서는 네덜란드 정부를 상대로 강력한 외교 교섭을 벌여 체포자 석방과 배상, 재발 방지 약속을 이끌어냈다. 이는 청나라 말기의 소극적 외교와는 다른 새로운 공화국 외교의 상징적 사례로 평가된다.


왕충후이는 정치인인 동시에 중국 헌정사상의 선구자였다. <헌법추의>, <헌법위언>, <비교헌법> 등을 통해 성문헌법 제정, 국민 기본권 보장, 사법 독립, 위헌법률 심사제도 도입 등을 주장했다. 그는 헌법은 특정 개인이나 정권이 아닌 국가의 장래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권력도 헌법 아래 있어야 한다는 근대 입헌주의 원칙을 일관되게 설파했다.


1921년 워싱턴회의에서는 중국 대표로 참가해 영토 보전과 주권 존중, 치외법권 폐지를 주장했고, 1926년 법권회의에서는 외국인의 치외법권 철폐와 사법주권 회복을 위해 열강과 치열한 협상을 벌였다. 즉각적인 성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중국의 사법 개혁과 불평등조약 개정의 필요성을 국제사회에 각인시키며 훗날 국권 회복의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다.


1928년 국민정부 출범 후 초대 사법원장을 맡은 그는 형법·민법·국민정부조직법 제정을 주도했다. 특히 현대 형법의 핵심인 죄형법정주의와 신법 우선 원칙, 남녀 및 신분 평등, 노동자의 권리 보장 등을 형법에 반영하며 중국 형사법의 현대화를 이끌었다. 또한 법관 양성제도를 정비하고 최고법원 체계를 구축하는 등 근대 사법제도의 기틀을 마련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외교부장으로서 국제사회에 일본의 침략을 알리고 중국에 대한 지원을 호소했다. 미국 라디오 연설과 국제연맹, 9개국 조약회의 등을 통해 일본의 침략성을 적극 알렸으며, 중국 외교의 기본 원칙을 '국내에서는 자립을, 국제적으로는 평화국가와의 연대를 추구한다'는 전략으로 정립했다.


1943년 카이로회담에서는 장제스 대표단의 핵심 참모로 참가해 정치·법률 문제를 담당했고,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는 송자원, 구웨이쥔 등과 함께 중국 대표단으로 참석했다. 그는 유엔헌장 중국어본을 최종 수정·윤문해 공식본 완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중국은 창설 회원국이자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국제질서의 핵심 국가가 됐다.


1949년 이후 대만으로 건너간 왕충후이는 계속 사법 분야 최고 책임자를 맡아 헌정과 법치 발전에 힘썼다. 1956년에는 중화민국 헌법의 공식 영문 번역을 직접 완성했고, 평생 모은 수천 권의 법률 서적을 대학에 기증하는 등 후학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1958년 폐암으로 별세했지만, 그는 중국 근대 법학과 국제법, 외교사의 흐름을 바꾼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왕충후이의 삶은 단순한 정치인의 경력을 넘어선다. 그는 법률을 국권 회복의 무기로 삼았고, 외교를 통해 국제사회를 설득했으며, 헌법과 사법제도를 통해 근대 국가의 틀을 설계했다. 오늘날에도 그는 '법으로 국가를 세우고 국제법으로 주권을 지키려 했던 근대 중국 최고의 법학자 외교관'으로 기억되고 있다.

ⓒ 인터내셔널포커스 & dspdaily.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

BEST 뉴스

추천뉴스

  • 하루 22개 초등학교가 사라진다…중국 교육, 저출산이 바꾸는 미래
  • 극우, 이제는 단호히 맞설 때

포토뉴스

more +

해당 기사 메일 보내기

[중국 외교 인물열전⑨] 근대 중국 법치와 외교의 설계자, 왕충후이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