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내셔널포커스] 1925년 중국의 스발바르조약 가입 절차를 파리에서 담당했던 외교관 천루(陈箓·1877~1939). 훗날 중국의 북극 과학활동을 뒷받침하는 국제법적 기반이 된 외교문서에 그의 이름이 남아 있다. 그러나 14년 뒤 그의 운명은 전혀 달라졌다. 일본이 난징에 세운 친일 괴뢰정권의 외교부장에 참여한 그는 중국에서 ‘한간(汉奸)’으로 지목됐고 1939년 상하이 자택에서 암살됐다.
천루는 청말부터 외교무대에서 활동한 전문 외교관이었다. 프랑스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청나라 관료를 거쳐 중화민국 출범 후 외교부 정무사장과 외교차장 등을 지냈다. 멕시코 주재 공사를 거쳐 1920년부터 프랑스 주재 공사로 활동했다.
그의 외교관 경력에서 훗날 뜻밖의 의미를 갖게 된 사건이 1925년 일어났다. 중국이 1920년 파리에서 체결된 ‘스피츠베르겐군도조약’, 오늘날의 스발바르조약에 가입했다.
조약은 북극 스발바르제도에 대한 노르웨이의 주권을 인정하는 대신 당사국 국민에게 일정한 조건 아래 어업과 광업·상업 등의 활동에서 동등한 권리를 보장했다. 당시 중국은 군벌 간 대립이 계속됐고 관세 자주권과 불평등조약 개정 같은 현안도 산적해 있었다. 북극은 현실적인 관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베이징 정부는 조약 가입을 결정했고 천루는 주프랑스 공사로서 1925년 7월 1일 파리에서 관련 절차를 처리했다. 이후 중국이 전쟁과 정치적 격변에 휩싸이면서 이 조약은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천루의 삶도 크게 바뀌었다. 국민정부 수립 이후 외교 일선에서 물러난 그는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8년 일본이 난징에 세운 ‘중화민국 유신정부’에 참여해 외교부장을 맡았다. 이 선택으로 그는 중국에서 일본에 협력한 ‘한간’으로 비판받았다.
국민정부 정보기관 군통은 천루를 제거 대상으로 삼았다. 1939년 2월 상하이 위위안루(愚园路) 자택으로 돌아온 천루를 상대로 암살작전이 벌어졌고, 군통 상하이 조직의 류거칭(刘戈青) 등이 자택에 침입해 총격을 가했다. 천루는 현장에서 숨졌다. 향년 61세였다.
그가 숨진 뒤 반세기가 넘어서면서 스발바르조약은 다시 주목받았다. 1991년 중국과학원 연구원 가오덩이(高登义)는 스발바르 일대를 탐사하던 중 중국이 1925년부터 조약 당사국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후 중국의 북극 연구가 확대됐고 2004년 7월 28일 스발바르제도 니올레순에 중국 최초의 북극과학기지인 황허기지(黄河站)가 문을 열었다.
천루가 파리에서 가입 절차를 처리한 지 79년 만이었다.
다만 1925년의 조약 가입을 천루 개인의 선견지명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가입은 베이징 정부와 외교당국이 결정했고 천루는 주프랑스 공사로서 실무 절차를 수행했다. 스발바르조약 역시 중국에 북극 전체에 대한 특별한 권리를 부여하지 않는다.
천루의 생애에는 중국 근현대사의 역설이 겹쳐 있다. 청말부터 국제무대에서 활동한 외교관은 훗날 중국의 북극 연구에 활용된 조약 가입 절차를 담당했지만, 말년에는 일본의 괴뢰정권에 참여해 ‘한간’이라는 오명을 남기고 암살됐다.
외교문서는 79년 뒤 북극에서 다시 가치를 인정받았지만, 그 문서에 이름을 남긴 외교관은 중국 현대사에서 전혀 다른 평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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