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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세월 저편에 두고 온 열두 살의 고향

  • 허훈 기자
  • 입력 2026.10.12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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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에서 스무 해, 마음속에 남은 중평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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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집 앞에는 해탕나무와 살구나무가 있었고, 뒤뜰에는 앵두나무와 자두나무가 자랐다. 수십 년이 지났건만 어느 자리에 무슨 나무가 있었는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열두 살에 떠나온 집인데도 그렇다.


내 고향 중평촌은 중국 연변 안도현 석문진에서 약 6km 떨어진 작은 농촌마을이다. 산 아래로 논밭이 펼쳐지고 마을 뒤에는 저수지가, 앞에는 강이 흐르던 곳이다. 우리가 살던 집은 초가집이었다.


중평소학교에 다니던 나는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친구들과 학교 앞 숲으로 달려가곤 했다. 나무 사이를 헤집으며 새 둥지를 찾기도 하고, 운동장에서 윗학년 형님들이 축구하는 모습을 넋 놓고 구경하기도 했다.


여름이면 저수지에서 헤엄을 치고 강에서 물고기를 잡았다. 물속을 들여다보며 고기가 숨어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니다 보면 어느새 해가 기울었다. 겨울이라고 다를 게 없었다. 강이 얼면 썰매를 탔고 눈이 쌓이면 뒷산으로 올라가 스키를 탔다. 손발이 꽁꽁 얼어도 조금만 더 놀겠다며 집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병철이, 신남이, 용길이, 창걸이, 태산이. 그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이다. 만나기만 하면 무슨 장난을 칠까 궁리하던 녀석들이었다.


남의 집 울바자를 넘어 오이와 토마토를 따 먹는 일도 있었다. 살구가 익을 때면 남의 집 나무에도 슬그머니 손을 뻗었다. 주인에게 들킬세라 조마조마하면서도 그 짓을 되풀이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참 철없는 아이들이었다.


명절이 다가오면 마을은 한층 떠들썩해졌다. 집집마다 음식을 장만하고 아이들은 떼를 지어 돌아다니며 폭죽을 터뜨렸다. 누구네 집에 돌잔치나 결혼식이 있으면 온 동네가 모였다. 청년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떡메로 떡을 치는 동안 사람들은 음식을 나눠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때는 한 집의 기쁜 일이 마을 사람들 모두의 기쁜 일이었다.


겨울을 나려면 산에서 나무를 베어 와 장작을 패야 했다. 그렇게 마련한 땔감으로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짓고 방도 덥혔다. 마당에서 들리던 장작 패는 소리, 아궁이에서 나무가 타던 냄새까지 고향집의 기억에 남아 있다.


어린 시절 또 하나의 큰 즐거움은 영화 구경이었다. 마을에서 노천영화를 상영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그날은 아침부터 마음이 들떴다. 날이 어두워지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저마다 쪽걸상을 들고 모여들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 볶은 옥수수나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며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영사기 불빛이 화면을 밝히면 여기저기서 들리던 이야기 소리도 차츰 잦아들었다.


중국 영화 '반짝이는 붉은별'과 북한 영화 '꽃파는 처녀', '금희와 은희의 운명'이 지금도 기억난다. 당시에는 북한 영화도 자주 상영했다.


우리 마을에 영화가 걸리지 않는 날이면 십여 리 떨어진 다른 마을까지 밤길을 걸어갔다. 영화를 보고 다시 어두운 길을 걸어 돌아오면서도 힘든 줄 몰랐다. 영화 한 편이 그만큼 좋았다.


때로는 석문진 차조구역까지 십여 리를 걸어가 열차를 타고 안도현성으로 향했다. 영화도 보고 서점에서 그림책도 사기 위해서였다. 시골에서는 그림책 한 권 구하기가 쉽지 않던 시절이라 서점에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다.


그림책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아버지는 직접 책을 만들어주시기도 했다. 신문에 실린 사진을 하나하나 오려 백지에 붙이고, 그것을 모아 노트처럼 묶어주셨다. 어린 내게는 서점에서 사 온 책만큼이나 소중했다. 그때는 그저 그림이 많아 좋아했는데, 세월이 흐르고 보니 사진을 오리고 붙이던 아버지의 손길이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


어머니는 마을 위생소에서 간호사로 일하셨다. 환자가 생기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집집마다 찾아다니셨다. 한밤중에도 누군가 아프다는 소식이 들리면 주사통을 챙겨 나서셨다. 어린 시절에는 그저 익숙했던 모습인데,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도 참 고단하셨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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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는 여든이 넘으신 증조할머니도 함께 사셨다. 증조할머니에게는 일제에 맞서 싸우다 세상을 떠난 딸이 있었다. 나에게 고모할머니가 되는 항일투사 허성숙이다.


증조할머니는 뒷마당 텃밭에서 김을 매시다가 문득 딸의 이름을 부르며 우시곤 했다.


“성숙아, 왜 나만 남겨두고 떠나갔느냐.”


어린 나는 왜 증조할머니가 그토록 서럽게 우시는지 다 알지 못했다. 다만 김을 매시던 손을 멈추고 딸의 이름을 부르시던 모습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허성숙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항일투사라는 말보다 증조할머니의 울음소리가 먼저 생각난다. 세상에는 항일투사로 남은 사람이지만, 증조할머니에게는 평생 보고 싶어 하던 딸이었다.


그렇게 산과 강을 누비며 지내던 중평촌에서의 생활도 열두 살이 되던 해 끝이 났다. 우리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게 된 것이다.


차조구역에서 열차를 타고 떠나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정든 고향이 점점 멀어진다고 생각하니 자꾸 눈물이 흘렀다. 어린 마음에도 다시는 예전처럼 친구들과 뛰어놀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용정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고, 스물세 살에는 연길로 옮겼다. 그러다 훗날 한국으로 건너왔고, 이곳에서 살아온 지도 어느덧 스무 해가 되었다.


한국에서도 가끔 고향 친구들을 만난다. 저마다 살아온 세월은 다르지만 얼굴을 마주하면 금세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누구네 집 울바자를 넘었던 이야기며 영화를 보러 밤길을 걷던 이야기까지, 한번 시작하면 끝이 없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도 하나둘 곁을 떠났다. 신남이와 용길이, 창걸이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이제 병철이와 태산이만 남아 있다.

 

내 기억 속 먼저 떠난 세 친구는 여전히 학교 앞 숲을 뛰어다니고 강에서 물장난을 치던 그때 모습 그대로다. 세월은 흘렀어도 그 친구들만큼은 내 기억 속에서 나이를 먹지 않는다. 

 

듣기로는 지금의 중평촌도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초가집 대신 벽돌집과 기와집이 들어서고, 흙길은 포장도로로 바뀌었다. 마을 근처에는 고속도로까지 생겼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옛집이 궁금해진다. 집 앞의 해탕나무와 살구나무는 아직 있을까. 뒤뜰의 앵두나무와 자두나무는 어떻게 되었을까. 학교 앞 숲과 여름마다 헤엄치던 저수지는 예전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까.


언젠가 다시 중평촌에 가게 된다면 옛집 터부터 찾아보고 싶다. 친구들과 뛰어놀던 마을길을 걷고, 증조할머니가 김을 매시던 뒷마당에도 한동안 서 있고 싶다.


열두 살에 차조구역에서 열차를 타고 고향을 떠난 뒤 용정과 연길을 거쳐 한국까지 왔다. 그사이 수십 년이 흘렀지만, 차창 밖으로 멀어지는 고향을 바라보며 울던 아이는 아직 내 마음속에 있다.


열두 해를 살았을 뿐인데, 중평촌은 내 평생의 고향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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