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김 혁 (재中동포 소설가)
 
 

남풍은 쓸쓸하게 불어오고
꾀꼬리 구슬피 우옵니다.
달아래 꽃들은 모두 꿈에 젖는데
오직 달맞이꽃만이 향기를 뿜네요.
 

1984-1.jpg

주옥같은 노래로 억만 중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가수 등려군의 대표작 “야래향” 의 한곡조이다.
 
밤에만 조용히 향기를 뿜는 달맞이 꽃처럼 애타는 마음을 절절하게 표현한 등려군의 “야래향”은 마카오, 일본,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여러 나라에서 베스트 가요로 떠올랐고 수많은 가수들이 이 노래를 번안해 불렀다. 한국에서도 트로트 가수 주현미가 불렀고, 국민녀동생 문근영도 영화의 한 대목에서 이 노래를 열창하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이 노래의 원창자는 등려군이 아니다.
 
맨 처음 이 노래를 세상에 선 보인 사람은 리향란이란 이름의 가수이다. 그리고 그는 이름자와는 달리 중국인이나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다. 그의 본명은 야마구치 요시코. 
 
요시코의 부모는 로일전쟁후 중국 동북으로 이주, 1920년 요시코가 태여났다. 요시코는 당시 중국과 일본,  로씨야인들이 모여 살고 있던 만주에서 일본어 중국어 로씨야어등 다국 언어를 자연스레 익혔다. 그후 아버지의 중국친구인 퇴역장군 리계춘이 야마구치 요시꼬를 양녀로 삼았고 향란(李香兰)이라는 중국이름을 붙여줬다고한다.
 
야마구치 요시코는 소녀 시절 폐병을 치료하려고 성악을 배웠는데 1933년 봉천(奉天, 지금의 심양시)방송국이 중국인청중을 끌기 위해 기획한 프로- “만주 신가곡”에 발탁되여전문가수가 되였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친구가 지어준 이름인 리향란이라는 이름을 예명을 썼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위만주국을 세운 일본은 “만주국수도” 신경(新京, 지금의 장춘)에 만주영화협회를 설립, 음악영화를 기획했는데 중국녀배우 대역을찾지 못해 골치를 앓던 차에 우연히 신경방송국이 방송하는 “만주신가곡”을 듣고 리향란이라는 인물을 기용하려 마음먹었다. 섹시하고 이국적인 용모와 뛰여난 가창력. 여기에 중국어와 일본어를 모두 구사하는 능력을 인정받아 배우로도 활동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이후 리향란은 수많은 영화에 등장하면서 영화의 주제곡으로 “야래향” “소주야곡(苏州夜曲)” 등을 불렸다. 일석에서는 이 “야래향”을 민족적 울분이 함축된 노래라고 본다.
 
이후 셜리 야마구치라는 이름으로 할리우드까지 진출한 야마구치 요시코는 미군 장병들과 사랑에 빠진, 동양에서 온 신비한 녀인을 연기했다. 순종적이고 사랑스러운 녀인으로 분한 리향란은 대중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했고 중국과 일본 나아가 할리우드에서까지 사랑받을수 있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중국정부는 친일, 친미 행위를 한 반역자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리향란 역시 처벌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일본 제국주의를 미화시킨 영화를 통해 사람들을 선동한 죄로 법정에 서게 된 리향란은 결국 사형을 선고 받았다. 리향란이 사형 당할 위기에 처하자 그의 부모가  가까스로 호적등본을 찾아내 일본인임을 립증했고 그녀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하지만 그후 리향란은 중국에서 추방됐고 중국에서는 그의 영화와 노래가 금지됐다. 따라서 “야래향”이라는 노래도 40여년간 사라지게 된것이다.
 
지난해 일본에서는 많은 배우들이 유명을 달리했는데 그중에는 야마구치 요시코도 들어 있었다. 야마구치 요시코는 지난 가을, 도꾜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향년 94세.
 
중국에서 강제 추방당한뒤 리향란은 일본으로 돌아와 야마구치 요시코라는 본명으로 배우 활동을 재개했다.
 
유명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추문”을 비롯한 여러 영화에 출연하며 인기를 얻었고 미국 영화와 뮤지컬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동안 일본계 미국인 조각가와 결혼했다가 헤여지고 다시 일본인 외교관과 결혼하면서 영화계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팬들의 부름에 떠밀려 TV 토크쇼 진행자로 복귀했고 국민적 인기를 배경으로 근 20년동안 자민당 참의원을 지냈다. 국회의원 시절 환경성 정무차관까지 지내기도 했다.
 
연예계 생활 은퇴 후에는 윁남전과 중동전쟁 등에 현장 취재기자로 뛰여다녔고 당시 베일에 쌓여있던 북한의 김일성 수상을 사상최초로 단독 인터뷰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김일성은 언론 로출을 꺼리는 인물이지만 리향란의 팬이라 결국 인터뷰를 수락했다는 후문이다.
 
야마구치 요시코는 만년에 자서전 “李香蘭私の半生”을 펴냈다. 그 자서전을1990년 중국에서 번역출판했는데 자서전에서 그녀는 “리향란으로 출연했던 영화를 다시 보니 정말 부끄럽다”며 선전영화에 출연했던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일본 제국주의 스타”라는 타이틀을 멍에처럼 짊어지고 살아야 했던 야마구치 요시코는 그후로도 두 권의 자서전과 인터뷰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과거 행각을 반성했다. 또 “아시아녀성기금” 부리사장을 지내며 전쟁 피해자와 종군 위안부에 대해 사죄하고 배상할것을 일본정부에 촉구하는 활동에 적극 참여 했다. 2005년에는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도 반대해 나섰다.
 
력사의 증인 한명이 사라져 갔다. 하지만 그나마 안위되는것은 그가 보여준 만년의 행보가 어제를 회고하고 반성하는 로인네의 웅숭깊고 착한 자세를 보여줬기때문이다.
 
“만주국”의 실력자로서 “만주오인방”의 하나였고 전후 일본정계를 주물렀던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 아베신죠 일본총리처럼 죄책감이 없는 자들이 스스로 마련한 작은 무대에서 력사를 위배한 광대극을 놀고있것이 작금의 일본이다. 이러한 상황에 요시코의 반성과 노력은 여운을 남긴다. 그것이 리향란, 아니 요시코라는 인물의 서거에 대중이 눈길을 모으며 그녀의 노래를 거부감없이 받아들이는 리유라면 리유다.
 
야래향은 이제 아름답게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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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칼럼] 야래향,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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