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21(화)

전체기사보기

  • 세계서 가장 호화스러운 공항 VIP실 TOP 5
    최근 영국 데일리 메일 보도에 따르면 영국의 한 인터넷 사이트는 세계에서 가장 호화스러운 공항 VIP실 TOP5를 선정했다. 단연 1위는 터키 이스탄불 공항이다. 이스탄불 공항 VIP라운지는 세계가 알아주는 유명 피아노, 당구대, 도서관 및 대형 스크린 텔레비전 등을 갖추고 있다. 2위는 미국 뉴욕의 케네디 공항이 차지했다. 케네디 공항 VIP라운지는 금빛 천장으로 고급스러움을 뽐내고 있으며, 빨간 초대형 소파가 눈길을 끈다. 그 외 당구대도 비치돼 있으며 여러 종류의 칵테일도 제공한다. 핀란드 헬싱키 공항이 3위를 차지했다. Marimekko.사가 디자인한 헬싱키 공항 VIP 라운지는 북유럽 특유의 깔끔함이 돋보인다. 라운지 내에서 사우나도 즐길 수 있다.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공항의 VIP 라운지가 4위에 랭크됐다. 여기서 고객등은15분 정도 걸쳐 스파 서비스를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샴페인과 고급 시가도 제공한다. 5위는 싱가포르 창이 공항이 차지했다. 이 곳에서는 다수의 텔레비전이 제공되고 있어 고객들이 자신이 원하는 TV프로그램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 뉴스홈
    • 국제뉴스
    • 중동·아프리카
    2014-06-14
  • 해외견문 시리즈(10) 젊은 마도로스의 수기
    ■ 김철균 포클랜드에서 곧추 부산으로 가는가 했더니 거치는 곳도 많았다. 라스팔마스, 마린, 비고, 사우디, 방콕 이렇게 거쳐오다가 이번에는 또 중국 대만의 고웅항에 입항하여 2박 3일을 머무르게 됐다. 대만에서의 일정은 포클랜드에서 싣고온 냉동오징어 800톤을 하역하는 것이었다. 대만 - 나의 머리속에서는 그때까지도 이전에 우리가 불렀던 “중국인민은 대만을 꼭 해방할 것이다”란 구호와 대만어선들에서 본 “삼민주의로 중국을 통일하자!”란 글발이 새겨진 기발들이 맴돌고 있었다. 하기에 대만 고웅항에 입항하자 우리 중국조선족선원 4명한테는 위구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국민당과 공산당은 지난 세개 20연대부터 40연대말까지 줄곧 20여년간이나 싸우다가 결국 국민당이 대만섬까지 쫓겨가지 않았던가. 그 후에도 국민당은 계속 “반공대륙”이요, “대륙광복”이요 하면서 대륙을 적대시하는 정책을 실행해 왔은즉 그들이 공산당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또 그 천하에서 온 우리를 반겨줄리가 없겠으니 말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위구심은 지나친 것이었다. 당국의 요인들은 어떤 정책을 강요했든지 우리가 본 대만사람들은 그렇게도 인자하고 민족을 중히 여기는 이들이었다. 우선 입항수속을 수속을 할 때 본선에 4명의 대륙선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자 세관일군은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수속을 끝내자바람으로 우리를 하나하나 찾아보는 것이었다. 나를 찾아 주방까지 찾아온 세관원 한명은 오래도록 나의 손을 잡고있으면서 이렇게 만나니 정말 반갑고 기쁘다고 곱씹어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대륙에서 사는 것은 어떠한가?”, “밥은 배불리 먹는가”하며 이 것 저 것 관심조로 묻는 것이었다. 그들 역시 대륙상황이 무척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 뒤 그는 갖고온 선물이 없어 미안하다면서 어디서 구했는지 대만산 “장수표”권연 한보루를 기어코 나한테 밀어맡기었다. 그날저녁, 우리는 국민당의 천하라는 위구심보다 대만 한구석의 이모저모에 대한 궁금증으로 하여 외출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렴 대만 역시 사람이 사는 동네이겠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공교롭게도 그날 밤 우리가 찾아간 술집인즉 “몽강술집”이란 간판이 걸려있는 레스토랑이었다. 아니 그렇다면 몽강이란 지금 우리 길림성 정우현의 전신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내가 술집주인하고 여쭤봤더니 아니나 다를가 술집주인 부친의 고향이 곧바로 옛날의 몽강현이라는 것이었다. 즉 주인의 부친한테는 노모와 3남 2녀의 형제, 그리고 그 본인보다 네살이나 이상인 안해까지 있었는데 1940년대 말기에 국민당군의 패망과 함께 대만으로 건너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부친은 1년전부터 대륙의 고향과 편지래왕이 있는데 노모와 형님 한분은 진작 저 세상의 고인으로 되었고 안해는 다른 곳으로 개가했으며 나머지 형제들은 제각기 흩어져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또한 노인은 이미 당국에 고향방문 신청까지 해놓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술집주인은 알려주었다. 그날 밤 우리는 오래도록 술잔을 나누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특히 술집주인은 술이 거나하게 되지 몹시 흥분하면서 언제라고 딱히 말할 수는 없으나 자기도 한번은 꼭 대륙에 다녀올 것이며 고향사람들한테도 기념으로 될만한 좋은 일을 해놓겠노라고 했다. 참, 고향이라 하지만 생소한 고장, 그럼에도 마음이 가는 곳, 사람의 정이란 과연 이상하기도 했다. 그 이튿날저녁, 뜻밖에도 그 “몽강술집” 주인의 부친이 글쎄 아들을 앞세우고 선박에까지 찾아온 것이 아니겠는가. 노인은 배에 오르자마자 우리 네사람과 선장, 기관장과 통신장을 기어코 청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사절끝에 그들 부자가 갖고온 봉고차에 나누어앉아 노인의 거처로 향하는 수밖에 없었다. 노인의 저택은 고웅시 중심에서 퍼그나 떨어진 해변가의 녹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새 건물은 아니었으나 담장에 둘러쌓인 것이 퍼그나 고풍스럽고도 아늑한, 전통적인 중국식 별장이었다. 호텔, 술집과 나이트클럽 등 많은 재산을 갖고 있다는 노인이었으나 여전히 헝겊신에 다부산즈차림을 한 것이 더욱 풍채가 돋구어져 존중이 갔다. 헌데 그런 틀거지와는 달리 노인은 자주 주전자의 술을 부어 굽내면서 말이 많아졌으며 한담 중에도 가끔 경극노래 한곡조씩 머리를 흔들며 뽑군 하였다. 노인을 보면 어쨌든 옛날 국민당군의 한자리쯤은 한 것 같았는데 정치와 시국에 대한 얘기는 한마디도 없고 가금씩 우리의 손을 잡으니 눈물까지 보이는 것이었다. 같은 민족 사이에 서로 맞대고 총포를 쏘며 싸우던 그제날이 무척 후회하는 모양이었다. 자리를 파할 때 노인은 정유식 선장한테 영어로 “이 애들을 잘 돌봐주시오”하고 몇번씩이나 부탁하면서 손수 대문밖까지 따라나오시는 것이었다. 그날 우리 선박에서는 냉동오징어 열박스를 노인네 집에 드렸고 우리는 또 노인으로부터 만리장성을 그린 유화 한폭과 중국선원 4명한테 특별히 선물하는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받았다. 대만에 체류하는 사이에 우리는 2박 3일이라는 그 짧은 시일에도 불구하고 사상과 이념의 계선을 벗어나 다 같은 중화민족이란 공동관심사를 갖고 세관일군과 몽강술집의 부자간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과 그토록 진지하게 마음과 마음을 나눌 수 있었다. 하다면 우리 동족이 살고 있는 반도는 과연 어떠한가? 아직도 동족상잔의 “6.25”때의 상처를 끄집어내며 남과 북이 서로 상대방을 괴뢰라고 욕하는 한편 전쟁준비에 광분하는 사람들, 그래 아직도 피의 대가가 적단 말인가?! 지금도 반도의 남북은 화해를 위한 대책마련에 뇌즙을 짜는 것이 아니라 서로 헐뜯지못해 광분하는 양상이다. 우선 말부터가 상대방의 비위를 상하게 한다. 이른바 “북한”이 뭐고 “남조선” 또한 뭐란 말인가? 통일이란 외쳐대서만이 되는 것이 아니다. 통일이란 상호 존중하는 전제하에서 그것을 이룩할만한 토대를 하나하나, 작은 것부터라도 쌓아가야 함이 바람직한 것이다. 그럼 반도의 남과 북은 대륙인들인 중국사람들한테서 무엇부터 배워야 하겠는가! 속이 검고 “만만디”라고 비웃지 말고 대국인들의 “커이커이 왠량바(可以可以,原谅吧!)” 하는 것부터 배워야 할 것이며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동포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모든 알륵을 풀어야 할 것이다.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6-14
  • 춘향 진 임하늘양 ‘따뜻한 미소를 전하는 춘향이가 되고 싶어요’
    [동포투데이 남원] 춘향제 첫째날인 12일 축제의 첫머리를 장식한 제84회 춘향선발대회에서 임하늘양이 춘향제 최고의 미인으로 선정되었다. 춘향진으로 뽑힌 임하늘 양은 당선 소감을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이 모습을 보셨다면 매우 기뻐하셨을 것 같다.” 고 밝혔다.임 양은 “한국무용을 공부하는 과정에 여러 작품을 통해 춘향이를 접하면서 전통적인 미인상에 가까워지고 싶어서 춘향선발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고 참여 동기를 말했다.활동계획으로 “앞으로 사람들에게 따뜻한 미소를 전하는 춘향이가 되고, 아름다운 풍경이 있고 먹거리 풍부한 남원을 널리 알리는데도 최선을 다하겠다.” 하였다.외동딸로 자란 임하늘 양은 자기의 장점은 “남을 배려하고 욕심을 버리는 생활을 하고 있다.”며 장래 희망은 “아나운서”라고 밝혔다. 임하늘양은 ‘따뜻한 선발된 춘향이들은 춘향제향, 환영만찬, 개막식, 춘향길놀이 행사에 카페이드를 참석하여 춘향제 홍보와 남원을 찾는 방문객들을 맞이할 예정이다. 6월12일부터 춘향선발대회를 시작으로 17일까지 남원 광한루원에서 펼쳐지는 제84회 춘향제는 4개분야 26종목으로 춘향제향, 신판춘향길놀이, k-뷰티콘테스트, 창극춘향전, 춘향국악대전, 춘향시대속으로 등 춘향전을 소재로한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준비했다.
    • 뉴스홈
    • 국내뉴스
    • 문화
    2014-06-14
  • 中 제조 궤도객차 브라질 월드컵 수송의 80% 담당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 전 세계의 주목 속에 2014 브라질 월드컵 축구경기가 개막됐다. 이번 브라질 월드컵 축구경기 기간, 경기가 펼쳐지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축구선수, 축구팬, 관광객 수송을 주로 담당하는 궤도객차 차량의 80%가 중국 북차그룹 장춘궤도객차주식유한회사에서 제조한 제품이라고 중국 동방망이 전했다. 브라질 월드컵 수송 담당 알아본데 따르면 일찍 2009년에 브라질정부에서는 중국 북차그룹의 자회사인 장춘궤도객차주식유한회사에 2014년의 브라질 월드컵 축구경기와 2016년의 올림픽운동회에 제공할 궤도객차 공개입찰에 참가할 것을 초청했다. 그번 공개입찰에서 장춘궤도객차회사는 일거에 낙찰됐고 연속 4개 항목을 계약, 그 계약금액은 8억달러에 달하며 수출차량은 도합 564대에 달한다. 목전 이미 차량 234대가 정식 운영에 들어갔다. 특히 2014 월드컵 기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세계 각국의 선수와 관광객들에게 봉사를 제공하는 지하와 지면 궤도교통 차량의 80%가 중국 북차그룹 장춘객차주식유한회사에서 제조한 제품이다. 이 차량들은 리우데자네이루 중앙역에서 출발해 월드컵 경승전이 펼쳐지는 경기장과 전기적인 색채가 가득한 리우마라카나 경기장을 통과, 월드컵 경기기간 전 세계 몇백만 관광객들을 수송하게 된다. 2016 올림픽 때의 지하철 차량 생산 한편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는 계속하여 중국 북차그룹 장춘궤도객차주식유한회사로부터 두 패의 차량들을 구입했는데 각기 전동열차편 60대와 지하철 120차량. 전동열차편은 이미 매달 40대씩의 속도로 교부하기 시작했고 지하철 120차량은 2016년 올림픽경기 때 수송을 담당하게 되며 현재 생산제조 중에 있다. 북차 판매액 세계 궤도교통 장비업계의 1위 독일 권위기구에서 발표한 데이터에 따르면 중국 북차주식유한회사는 2011년에 판매액 893억 5000만위안, 2012년에 판매액 924억 3000만위안으로 세계 궤도교통 장비업계의 1위에 올랐다(2013년의 순위는 아직 공포되지 않았음. 2013년 북차의 영업수입은 972억 4000만위안). 지난 5년간 중국 북차의 전력기계차, 지하철 차량과 철도 화물차 판매량은 모두 세계 1위였으며 각기 전 세계 전력기계차의 28%, 지하철 차량의 21%, 철도 화물차의 12%를 점한다. 한편 중국 북차에서 제조한 시속 300킬로미터 이상의 탄환열차(动车组)도 세계 처음이다. 중국 북차 년도보고서에 따르면 국제시장에서의 이 회사 수입은 2012년에 96억 5900만위안, 2013년에 76억위안이었다. 장춘궤도객차주식유한회사의 궤도객차 생산에서 가장 관건적인 기술고리인 발동기 연구개발의 주역이 중국조선족 여성인 것으로 알려졌다.
    • 뉴스홈
    • 국제뉴스
    • 아시아
    2014-06-14
  • 중국 여기자 렌즈에 담긴 북한인들의 생활상
    ▲공원에서 불고기를 먹고 있는 평양의 젊은이들. 신화사 북한 주재 여기자의 렌즈를 보고 함께 점심식사를 하자며 여기자를 부른다.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 김정은 시대의 북한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민생 등 여러 면에서 변혁을 가져오고 있다. 하지만 외계에서는 북한을 여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다. 중국 관영 신화사 평양 주재 여기자 두바이위(杜白羽)는 여러 차례 북한측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북한 주민들에게 접근, 오늘날 북한의 사소하지만 “이채”로움을 렌즈에 담았다. 그녀의 저서로는 실화 “나의 평양이야기”, 수기 “조선(북한)인상기”가 있다. 오늘 중국 신화망에 발표된 사진들은 “조선인상기”에서 일부 선재한 것이다. ▲평양 지하철 문이 닫히는 순간. ▲평양의 옥류교. 흔히 북한인들 마음속에서 아름다운 생활의 대명사로 통하는 창전거리, 수풀처럼 일떠선 고층건물들은 외국인들로부터 “작은 두바이”로 불리운다. 이곳에는 북한 교사와 근로모범들이 살고 있다. ▲모란봉악단은 북한 문예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왔다. ▲마식령스키장 호텔의 복무원들. ▲재건하여 2014년 3월 개업한 평양 메아리사격장, 활쏘기를 하고 있는 북한의 관광객들. ▲북한인들이 해변가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여기자가 평양에서 기차를 타고 나선으로 향했다. 창밖으로 렌즈에 담긴, 트럭에 앉은 북한 농민들의 얼굴이 밝다. ▲북한 한 가정 세 식구가 전자사격 놀이를 하고 있다.
    • 뉴스홈
    • 국제뉴스
    • 중동·아프리카
    2014-06-14
  • [2014브라질월드컵] 스페인 네델란드에 1:5 완패
    4년 전 우승팀 스페인이 14일(한국시간) 본기 월드컵 B조 첫 경기에서 네델란드에 1:5로 완패했다. FIFA 홈페이지는 경기 결과를 전하며 "월드컵 역사상 가장 뜻밖의 결과다. 판 페르시는 대단히 훌륭한 헤딩슛으로 동점골을 만들어냈다"고 전했다. 이날 스페인은 전반 26분 디에고 코스타가 얻어낸 페널티킥을 사비 알론소가 성공시켜 기선을 제압했다. 하지만 이후 네덜란드는 전반 44분 판 페르시의 그림 같은 다이빙 헤딩골로 동점을 만들었다. 이어 후반 7분 로벤이 역전골을 성공시켰다. 기세를 이어 후반 19분 세트피스 상황에서 데 브라이의 헤딩골로 3-1로 달아났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네덜란드는 스페인 골키퍼 카시야스의 실수를 틈타 후반 27분 반 페르시, 후반 35분 로벤의 릴레이 골로 스페인에 치욕적인 대패를 안겼다. 한편 멕시코는 14일(한국시간) 브라질 나탈 에스타디오 다스 두나스에서 열린 2014 브라질 월드컵 조별리그 A조 1차전 카메룬과 경기서 1-0으로 승리했다. 심판의 오프사이드 판정으로 2골을 도둑맞았던 멕시코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골을 뽑아내며 귀중한 승리를 챙겼다. 이밖에 14일(한국시간) 브라질의 쿠이아바의 판타나우 경기장에서 열린 B조 조별리그 1차전에서 남미의 강호 칠레가 1골 1도움을 기록한 알렉시스 산체스(바르셀로나)의 활약을 앞세워 B조에서 최약체로 평가받는 호주를 3-1로 꺾었다.
    • 스포츠
    2014-06-14
  • [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4)
    ■ 김철균 전반 태평양상공에 전운이 감돌고 간도의 가는 곳곳마다 전쟁소동이 광분하는 가운데 순자는 어느덧 14살을 먹었고 그해 즉 1944년 12월에 소학교졸업을 맞게 되었다. 졸업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오후수업까지 마치자 담임교원이 순자를 부르더니 일본인 교장이 찾는다면서 어서 가보라는 것이었다. (웬일인가?) 순자는 웬 상서롭지 못한 일이 생겼다고 수군덕거리는 애들의 눈길을 피하며 머리를 수그리고 교장실로 찾아갔다. 교장은 노크하고 들어와 곱게 인사를 올리는 순자를 유심히 뜯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나다노, 나마에와 기슈구데쓰까?(네이름이 기숙이 맞느냐?)” “하이, 소우데스(예, 그렇습니다.)” 순자는 깍듯이 머리를 쪼아리면서 일본말로 대답했다. “너의 집에 돈이 얼마나 있느냐?” 도수 높은 안경너머로 교장은 순자의 얼굴을 넌지시 쓸어보다가 다시 물었다. “돈, 돈 말입니까?” 순자는 가슴을 파르르 떨면서 쥐구멍으로 기여들어가는 소리로 다시 반문했다. “귀가 멀었느냐? 돈이 얼마 있는가말이다.” 교장은 권연을 꼬나물고 신경질적으로 성냥을 홱 그어댔다. “지금은 한푼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방학이 되어 제가 벌어 월사금만은 꼭 내겠습니다.” 순자는 나직히 힘주어 대답했다. 돈없는 사람을 업신여기고 기시하는 교장이 아직 채 물지 못한 월사금을 내라고 압력을 들이대지 않는가 하는 위구와 의심이 갔기 때문이다. “그런게 아니다. 현재 우리 대일본제국은 천황의 대령을 받고 아시아 민족의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마련해주려고 위대한 성전에 뛰어들었다. 현재 이 성전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돈과 재물, 인력을 지원하고 있단 말이야. 그래서 우리 학교 많은 학생들도 이미 돈을 헌납했단다. 돈없는 사람들은 인력을 지원하며 근로봉사에 가고…그래 너는 돈을 헌납하겠느냐 아니면 근로봉사로 육체를 헌납하겠느냐?”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던 교장은 눈총을 쏘며 순자한테 질문했다. “근로봉사에 가겠습니다.” 순자는 별로 긴 생각을 하지 않은채 대답했다. “부모의 허락도 없이 네 마음대로 결정할만하냐?” “할만합니다.” 가난한 가정형편을 잘 아는 순자는 진작 마음의 준비가 돼있었던 것이다. “소까. 너, 참으로 훌륭한 황국신민답구나. 넌 아직 잘모르겠지만 우리 일본의 황군은 천하무적으로서 도처에서 승전에 승전을 거듭하고 있단다. 이제 오래잖아 우리 일본황군이 최후의 승리를 이룩하면 아시아에 새로운 평화가 깃들 것이다. 그때면 너희들처럼 대일본제국에 충성한 황국신민들은 반드시 천황페하의 특수혜택을 받을 것이다. 알겠느냐?” “예, 잘 알겠습니다.” 당시 순자는 일본이 망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독립선언에 서명했던 춘원 이광수같은 인물도 일본이 천하무적이라고 인정하며 친일파가 되는 세월에 순자같은 애숭이가 당시의 전황을 판단할 수 있을리 만무했다. “좋다. 아주 좋아. 기슈구양, 그럼 여기에 손도장을 찍거라.” 순자는 깊은 생각도 하지 않고 선뜻이 손가락을 내밀어 일본인 교장이 가리키는 자리에 지장을 꾹 찍었다. 천진하고 단순하기 짝이 없는 어린 순자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던 일본인 교장은 순자가 나가자 저로서도 한심한듯 머리를 가로 저었다. 자기한테도 순자만한 자식이 있었던지, 아니면 일본인이었지만 아직 꼬물만한 양심은 있었던지 제법 긴 한숨까지 지으며 “참, 망할 놈이 세상! 조센징 불쌍한 민족이군”하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그날 저녁 순자는 대문동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서 이 사실을 부모님앞에서 털어놓았다. 그러자 집에서는 또 한바탕 난리가 났음은 구태어 더 말할 것도 없다. 조선에서는 수많은 애어린 처녀들에게 직업을 얻어준다며 사탕 발린 말로 구슬려서는 생뚱같은 곳으로 끌고 간다는데 인간의 탈을 쓴 일본놈들이 또 어떤 수작을 부릴지 누가 안담? 어머니는 윤씨는 나 죽는다고 아우성을 쳤고 아버지는 화가 난 나머지 “죄꼬만 계집애가 담도 크게 그게 어디라고 지장을 찍느냐”며 순자의 귀쌈을 치기도 했다. 이는 순자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한테서 맞아보는 매였다… 이튿날 순자의 아버지는 어린 순자를 이끌고 그 일본인 교장을 찾아가 사정하였다. “교장선생님, 어린것이 철없이 지장을 찍었으니 한번만 봐주십시요. 어린 것이 뭘 알겠습니까? 돈은 제가 2-3일내로 어떤 방법을 대든지 마련해 올테니 근로봉사대 명단에서 우리 기슈구의 이름만은 빼주십시요.” “기규구 부친의 심정을 잘 알겠다만 이미 명단이 위로 올라갔으니 나로서도 어쩔 수 없구만요. 그리고 근로봉사대에 가서 대 일본제국을 위해 봉사한다는 것도 일종 영광으로 여겨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걸 모르는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렇지요. 이 어린 것이 어떻게 일을 한다고 그럽니까?” “근심마십시오. 여덟시간 근무에 아주 편하며 먹는 것도 아마 집에서보다는 훨씬 영양가가 있고 맛있는 걸로 공급된다고 합니다.” … 순자의 아버지가 아무리 애걸복걸하며 사정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당시 학교마다에 근로봉사로 보낼 학생들의 모집명액이 확정되었은즉 그 명액을 다 차게 하지 못해 안절부절하던 일본인 교장이 순자의 아버지라고 그 사정을 봐줄리 만무했다. 순자의 아버지 명기 어른은 그저 한심한 세상과 나라를 빼앗긴 약소민족의 운명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6 그때로부터 며칠 뒤, 당시 간도의 서울로 불리는 용정의 역광장. 순자가 또래들과 함께 떠나던 날이 됐다. 그날도 그 일본군가 “마모루모 세무루모 구로가네노”가 주악되는 가운데 그닥 크지 않은 용정역은 울음바다로 되었다. 부모들은 자기 자식을 붙안고 아우성을 쳤고 일본헌병들은 그러는 부모와 자식을 총칼로 위협하며 뜯어 놓았다. 순자와 그 또래들은 총창을 꼬나든 일본군헌병들의 감시속에 줄을 서서 열차에 오르기 시작했다. 미구하여 뿡 ㅡ하는 기적소리가 길게 울렸고 열차의 둔중한 바퀴는 천천히 움직이었다. “아버지, 엄마ㅡ 제가 꼭 돈을 많이 벌어갖고 효도할게요ㅡ” 순자는 차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두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채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말았는지 멀리서 어머니 윤씨가 뭐라고 넉두리를 하다말고 땅에 풀썩 주저앉는 것이 보이더니 인차 순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제야 순자는 어머니가 왜 저렇게 쓰러지는가를 좀 알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전 엎질러진 물,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보는 기차였지만 신기하다는 기분도 들지 않았다. 열차는 해란강 철교를 넘어서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 이튿날 아침, 열차는 만주에서 가장 크고 인구도 가장 많은 봉천(지금의 심양)에 도착했다. 봉천은 제법 큰 도시였다. 봉천역 광장에 나오니 용정이나 연길과는 달리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붐비었으며 기차처럼 레루우에서 달리는 전차가 신기하기도 했다. 또한 그 곳에서도 일본군의 태평양전쟁을 가송하는 군악이 울리고 고약딱지같은 일장기를 든 일본군 대오가 행진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으며 거리에서 백성들한테 구두발로 차고 욕질을 해대는 일본헌병들의 행패는 여전했다. 봉천에 도착한 날로 순자네가 끌려간 곳은 “도요다이야 고죠”라고 부르는 어느 한 방직공장이었다. 공장에는 순자처럼 끌려온 아동공이 아주 많았다. 조선인 외에도 만주인, 몽골인과 지나인(중국인)으로 수백명에 달했다. 순자네는 여러 작업반으로 나뉜 뒤 인차 근무에 들어갔다. 소년공들이 근무하는 시간은 아침 7시부터 이튿날 아침 7시까지었다. 말하자면 24시간 작업하고 24시간 휴식하였으며 휴식하는 낮에는 밥도 공급되지 않았다. 여덟시간 근무제이고 먹는 것도 영양가치가 높고 맛있는 것으로 공급된다던 일본인 교장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출퇴근을 할 때는 물론 심지어 식당으로 밥먹으러 갈 때도 군대식으로 줄을 서서 “일본군가”를 부르며 행진해야 했으며 모든 생활이 엄한 규율이 강요되었다. 작업은 지루하고도 몹시 힘들었다. 24시간씩 근무하노라면 자주 졸음이 왔고 졸음이 와서 간혹 끊어진 실오리가 생겨나면 일본인 십장한테서 귀쌈을 맞으면서 욕보고 야단맞기가 일쑤였다. “칙쇼! 황국신민이 되어 2등 국민의 대우를 받으면서 이 따위로 근무해?! 이래서 조센징은 안된다는거야!” “너희들이 왜 나라를 빼앗겼는지 알만해? 바로 이런 정신상태를 가졌기 때문이야. 이런 정신상태를 갖고 나라를 운영할 수 있겠어?” … 이렇게 억울하게 욕볼 때마다 순자는 비록 가난하긴 했지만 어머니와 함께 있었을 때가 좋았고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집이 사무치게 그리워났다. 또한 돈벌어 빚도 갚고 부모님한테 효도하겠다는 단순한 생각에 봉사단에 참가한 자신이 괘씸하도록 얄밉기도 했다. (아, 지금쯤 동네애들은 앞내가 얼음강판에서 썰매를 타고 팽이를 치면서 신나게 놀겠지? 헌데 난 이게 무슨 꼴이람.) 그리고 때는 한창 한겨울이라 추운날 밤 살얼음이 낀 물에 두손을 넣고 태실을 씻을 때면 손이 시리다 못해 숨이 넘어가는듯 했으며 어떤 여자애들은 진짜 견디기가 힘들어 엉엉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러면 또 일본인 십장이 달려와 그런 애들의 귀쌈을 사정없이 후려치군 했다. “바가, 너희들의 요만한 곤난도 이겨내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천황페하의 황국신민이라고 할 수 있소까?!” 감옥같은 생활, 맘놓고 울 수도 없는 것이 당시 나어린 소년공인 순자네가 직면한 운명이었다. 한편 공장에서는 끌려온 아동공들한테 집에 편지를 쓰도록 했다. “근로봉사대에 와서 배불리 잘 먹고 있으며 일도 힘들지 않다”, “하루 근무시간은 여덟시간이고 매주 하루씩 휴식하며 휴식하는 날에는 단체로 도시구경도 한다”는 등으로 좋은 말만 골라서 쓰도록 했다. 그러고는 십장 혹은 감독한테 검열을 거친 뒤에야 편지를 발송하도록 허락했다. 순자도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한테 편지를 썼다. 존경하는 아버지 어머니 전상서 제가 부모님 슬하를 떠나 봉천에 온지도 거의 한달이 돼가는군요. 그동안 저희들은 공장측에서 배치해준 따뜻한 숙사에 들어있으면서 하루 세끼 이밥에 돼지고기 혹은 물고기국을 먹으면서 아주 유쾌히 잘 보내고 있답니다. 이 곳의 작업은 힘들지 않고 그 작업량도 많지 않답니다. 하루 8시간 근무에 매주 하루씩 휴식하는데 휴식하는 날이면 단체로 활동사진구경(영화관람)을 가기도 하고 공장측에서 주는 상여금으로 맛있는 것을 사먹기도 해요. 그리고 시간이 날적마다 축음기에서 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그것을 배우기도 하고 그것이 갑갑하면 밖에 나가 친구들과 함께 제기도 차고 숨박꼭질도 놀면서 아주 재미있어요. 그렇게 유쾌하게 지내서인지 지금 저의 얼굴엔 살이 포동포동 올랐어요. 이제 제가 집으로 돌아가면 부모님들도 몰라보실거예요. 아버지, 어머니, 그러니 저한테 대한 근심을 일절 하지 마시고 부모님의 건강만 챙겨주세요. 그리고 임금은 공장측에서 단체로 저축했다가 1년 만기 후 저희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 한푼도 곯지 않게 내준다고 했으니 그때에 제가 많은 돈을 벌어가지고 가서 부모님께 효도 한번 잘할게요. 아버지 어머니, 건강하세요. 딸 기슈구(기숙) 올림 1945년 1월 ×일 봉천에서 순자는 일본십장이 시키는대로 편지를 썼다. 순자는 일본십장이 시키지 않아도 그렇게 쓸 타산이었다. 자기 때문에 부모님들이 가슴이 아파하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편지를 쓰면서 순자는 눈물을 흘렸는데 그것이 편지종이에 떨어지면서 여러곳이 얼룩졌다. 순자네가 근로봉사대에 끌려온지 약 한달이 지나자 공장내에는 “상한병(伤寒兵)”이라고 하는 전염병이 나돌기 시작했다. 병은 숙소에서 단체로 먹고 자고하는 애들한테 급속도로 확산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나가는 애들도 하나둘 생겨났다. 전염병은 순자가 가엽다고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어느날 순자는 갑자기 몸에 열이 오르면서 으슬으슬 추워나기 시작하더니 목이 타들어가는 것 같으면서 저녁밥 한술도 넘길 수가 없었다. 그날밤 순자는 옷을 입은채로 누워 이불을 머리꼭대기까지 뒤집어썼으나 온몸이 그냥 와들와들 떨리기만 했다. 그러다가 밤중에 일본인 의사가 주는 알약 한알을 먹은 순자는 새벽녁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이튿날 말째인 몸을 갖고 직장에 나간 순자는 근무도중에 열이 불덩이처럼 오르고 눈앞이 노랗게 되면서 사위가 빙글빙글 돌아갔고 도무지 몸을 가늘 수가 없었다. 그 한몸을 갖고 휘청거리며 작업대앞에 나서서 일하던 순자는 끝내 현훈증을 일으키며 쓰러지고 말았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가? 순자가 눈을 떠보니 자기가 중국식 온들로 된 숙소에 홀로 누워있었는데 입에서는 겨불내가 나는 것이 목구멍이 타들어가는듯 했다. “게 누구 없어요? 물…물 좀 주세요.” 입을 열었으나 목이 꽉 막히면서 소리가 나가지 않았다. 아니, 소리를 친다고 해도 텅빈 방안에는 도와줄 이도 없었다. (내가 이러다 부모님도 뵙지 못하고 죽는 건 아닐가?) 이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슬퍼지면서 눈물이 양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구멍이 난 창호지로 밖을 내다보니 마침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은 꽤나 많이 내려 발목만큼의 두께가 되는듯 싶었다. 순자는 밖에 나가서 눈이라도 먹으면 나을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순간 재차 눈앞이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목안은 계속 침 한방울 넘길 수 없을 정도로 타들어갔다. 일어날 수 없는 순자는 기여서 바닥에 내려가려다가 쿵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중국식 온들이 꽤나 높은지라 엉덩이쪽으로부터 떨어졌건만 그 부위가 한동안 얼얼해났다. 그는 안간힘을 써가며 출입문쪽을 향해 기고 또 기였다. 그가 가까스로 출입문을 열자 찬기운이 쓸어들어오면서 정신이 좀 개운한듯 했다. 순자는 다시 기운을 내어 밖으로 기여나간 후 두손으로 눈을 움켜쥐고 입안에 밀어넣었다… 한편 순자가 일하러 나가지 못하게 되자 공장측에서는 간도에 있는 용정영사관을 통해 순자가 전염병에 걸렸으니 그를 데려가고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도록 순자네 집에 통지하게 하였다. 이에 집에서는 또 큰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는 한탄하며 땅을 쳤고 어머니는 아예 기혼해 넘어지고 말았다. 순자의 처지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으나 순자의 편지를 받고 어느 정도 안심(편지종이에 얼룩진 눈물자국을 보고는 순자가 그냥 부모가 그리워 운 것으로 오산)하였는데 이런 기막힌 일이 발생하다니… 집에서는 셋째오빠 구완이를 대신 보내고 순자를 데려왔다. 그때는 순자의 목숨이 한창 경각을 다툴 때였다. 집으로 돌아온 순자는 일주일동안 혼미상태에 있다가 어머니 윤씨의 병구완끝에 가까스로 의식을 회복했다. 한편 얼마 안있어 순자 대신 봉천에 간 오빠마저 그 몹쓸 상한병에 걸려 결국 드러눕게 되었다는 기별이 또 일본영사관을 통해 전해왔다. 그야말로 설상가상이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집에 있는 돈푼이 갈만한 물건을 몽땅 팔아 겨우 노비와 벌금돈을 마련해 갖고 봉천으로부터 오빠를 데려오게 됐다. 인사불성인건 오빠 구완이도 마찬가지었다. 어머니 윤씨가 하도 의악스럽게 아들과 딸의 병구완을 한덕에 그들 오누이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가정에 액운이 거듭되던 그 세월, 참으로 갑갑하고 암울한 연대었다. 그 때가 바로 1945년 4월, 일제의 패망을 몇개월 앞두고 있던 나날이었다.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6-14
  • 中 여교원에게 프로포즈 한 대학생 화제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중국 언론 광명넷에 따르면 일전 길림건축대학 운동장에서 이 학원 마케팅학과의 4학년 남학생이 여교원에게 공개프로포즈를 하였다. 3년동안 연애를 하면서 사랑을 키워온 이들은 이날 운동장에 몰려든 수많은 학생들 앞에서 공개프로포즈를 하면서 행복한 커플로 거듭날 것이라고 밝혔다. 프로포즈 현장에 있던 학생들도 그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보냈다. “결혼상대가 여교원이면 어떻고 남학생이면 어떻습니까? 다 성인이고 미혼인 이상 두 사람의 사랑은 축복받을 일”이라고 현장의 학생은 소감을 밝혔다.
    • 뉴스홈
    • 국제뉴스
    • 아시아
    2014-06-14
  • 조선족의 정신 인프라
    ■ 김인섭 (연변일보) 조선족은 정확한 자아관을 수립하고 자아상을 확실히 파악하면서 민족사회의 재기를 도모하고 새 목표를 실현하려는 확고한 의지를 수립해야 한다 “눈물도 배가 불러야 난다.”는 옛말이 어투루 내던진 지날말이 아닌 같다. 요즘 조선족 사업가들과 마주하면 담화의 내용이 확연히 달라짐을 감지하게 된다. 사막화 일로로 나가는 조선족사회를 바라보며 랭철한 반성과 사색을 심심찮게 던져내고있으며 여태껏 가난의 탈피와 재부의 축적에 도정신하며 살았다면 이젠 민족의 정신인프라 구축으로 새로운 민족적도약을 실현해야 할 때라고 입을 모으고있다. 조선족은 정확한 자아관을 수립하고 자아상을 확실히 파악하면서 민족사회의 재기를 도모하고 새 목표를 실현하려는 확고한 의지를 수립해야 한다. 조선족사회의 부산한 현실은 신구체제의 전환 과정에서 나타날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현상으로서 반드시 지나야 할 고비길이고 성숙사회가 되는데서의 통과의례이며 사회 격변기의 재분화, 재조합의 합법칙적 력사단계이다. 우리에게는 특수한 지정학적 위치와 중한 두 나라 문화에 물젖은 독특한 우세와 오래동안 구축된 경제문화적 기반이 마련되여있다. 특히 중한수교이후 이 자산은 막대한 자본으로 전화되여 향후 발전을 위한 튼실한 물질적 기반을 구축하는 원동력으로 되였다. 국제사회의 공력(共力)이 동아시아에로 대이동하는 현 시점에서 중화경제권을 배경으로 하고 한국과 일본과 조선까지 포함하는 동북아지역을 무탈하게 래왕할수 있는 집단인 조선족의 중요성이 새삼스럽게 부상되고있다. 우리는 자문화를 드팀없이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이것은 조선족이 무한한 발전을 실현하는 기본조건이다. 허나 이러한 전승은 부조전래(父祖传来)의 전부를 마구잡이로 고수하는 승계가 아니고 타문화로부터 끊임없이 “필수영양원소”를 섭취하여 자기의 “영양조직”을 보강하는 개방적인 계승과 발전이여야 한다. 급변을 거듭하는 정세의 수요에 부응하여 업그레이드된 민족문화의 플랫폼을 현대적 감각에 알맞게 건설하고 여세추이(与时俱进)의 참신한 문화사회를 재건함으로써 발전의 새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 우리들이 창조한 기존의 물질자산이 선진문화와 결합할 때 그는 왕성한 생명력을 과시하며 배가의 가치로 전화되여 민족의 위상을 곱절로 폭등시키게 된다는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주민족으로서의 우리는 타민족과의 영합과 단합에서 눅진한 뉴대를 끈끈히 다져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조선족사회를 건립하고 발전시키는데서 무상의 자본이였으며 미래에도 우리 자산의 교환가치를 갑절로 증폭시킬 보귀한 재산이다. 타민족은 우리들이 영원히 공생공영해야 할 이웃이고 동도동지(同道同志)이며 우리 상품의 단골 매입자들이고 우리 민족을 홍보하는 최고의 선전관들이다. 조선족의 언어, 즉 민족어와 중국어는 학교뿐만이 아닌 인민 전체가 그 질적인 수준을 부지런히 제고해야 할 제일 문화자본이다. 더우기 민족언어는 민족의 발전에서 전제조건이며 비할바 없는 장점이기도 하다. 중국어에 대한 요구가 높아질수록 조선어의 더 높은 수준을 절박히 수요하고있으며 능란한 언어구사 능력의 중요성도 갈수록 불거지고있다. 현재 우리는 세인이 부러워하는 이중언어화자이지만 새시대는 대량의 삼중언어화자들과 다중언어화자들을 더욱 수요하게 되는데 조선족은 여기에 탁월한 기반이 있다. 민족 후대의 육성에 혼신의 힘을 부어야 한다. 출산의 대대적인 저하와 삶터의 급격한 이동으로 인한 인구의 “탈수”현상은 대략 10년 이후가 되면 틀림없이 인재의 갈급증(渴急症)이란 부병(负病)으로 이어진다. 세계화물결의 도도한 흐름과 중국의 력사유물론적개혁이 가져오는 불가역적 변화로 하여 다중지능, 다중문화, 다중언어의 조선족인재를 대량으로 수요하게 될 력사시기가 눈앞에 박두하고있다. 인구수의 대량적인 감소를 대비하여 전체 후대들을 고품질 인재 집단으로 구성시킴으로써 량적인 부족을 미봉할 플랜(plan)이 지금부터 비상대책으로 마련되여야 한다. 외면적인 조선족사회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있다. 그러나 다시말해도 이것은 과거 시대에 형성된 결합조직에 대한 생리기능의 재조절이고 신장기(伸长期)의 성장통(成长痛)으로서 결코 쇠락이 아니고 더우기 퇴락은 아니다.이 현실은 우리에게 시대의 변화에 동승하여 새로운 도약을 시도해야 할 때라는 점을 강력히 시사한다. 시대의 분수령앞에서 참신한 도전정신으로 자기의 터전에 백화를 만발시켰을 때 우리는 중국 땅의 우수한 민족 구성원이 되고 세인이 흠모하는 모습으로 세계 민족의 대렬에 우뚝 설것이라고 믿어마지않는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4-06-13
  • 이자스민 인천아시안게임 다문화 홍보대사 위촉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한국 최초의 다문화 국회의원인 이자스민 새누리당 의원이 인천아시안게임 홍보대사로 임명됐다. 2014인천아시아경기대회 조직위원회(위원장 김영수)는 11일 인천 송도 미추홀타워에서 이자스민 의원을 인천아시안게임 다문화 분야 홍보대사로 위촉했다. 조직위 관계자는 “이자스민 의원은 바쁜 국회 의정활동에도 최근 다문화 가치 확산 및 외국인 지위 향상과 관련해 많은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며 “소통과 화합, 나눔과 배려의 대회이미지에 부합돼 홍보대사로 위촉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날 위촉식에서 이자스민 의원은 “인천아시안게임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홍보대사로서 노력할 것”이라며 “이번 대회에 45개국 모든 아시아 나라가 함께한다는 화합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다문화 가치를 알리는데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 스포츠
    2014-06-13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