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6-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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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태일 시/개산툰 구월
    개산툰 구월 박태일 모아산 질러 넘다 왼쪽으로 내려 서면 화룡에서 룡정에서 너른 평강 들 타고 내린 해란강 걸음걸음 고요하다 동성진 너머 리민 너머 옥수수 키잡이로 서서 파랗게 쏘다니는 구릉 마을 집들은 산협의 가난을 풀풀 날리고 창유리 깨진 틈으로 도닥도닥 옛말 드난다 개산툰 개산툰 구월은 두만강 건너 회령 산천 어디서 오득오득 개암이나 씹는 것일까 걸어 내리고 오르는 시장 마당 지난주 건너왔을 북녘 소식은 어느 집 낮술에 비틀거리고 있을까 아는 이 친척도 없이 나는 이 골짝에 갇혔다 장대교회 붉은 십자가가 국경 철책을 바라고 선 뒹겨장 빛깔 어두운 흙길 따라 룡정으로 연길로 나가는 버스는 그치고 택시 기사 둘 버드나무 아래 버드나무 그늘인 양 빈둥거리는 너머 두만강 수척한 물빛을 숨기며 개산툰 구월은 이제 입을 다문다. 박태일의 시집 '연변 나그네 연길 안까이'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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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9
  • 박태일 시/조양천
    조양천 박태일 마을 이층 숲 참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하양 여우가 존다 배달말 깨우친 누나와 배우는 애토끼 귀엣말 조심조심 걸음 옮긴다 마을 이층 숲 누가 들렀나 누가 한국서도 멀리 부산서 온 너구리 아저씨 여름 물골에 부들처럼 무성한 천자문 배우기 배달말 배우기 책고랑 따라 걷는다 살몃살몃 아침부터 한낮까지 동무들 와도 그만 그만 안 와도 여우는 졸음을 살대발처럼 내렸고 마을 이층 숲 계단 아래로 삼월 고슴도치 찬바람이 구른다 마주 선 소학교와 중학교 사이 전깃줄을 뛰는 참새 떼 양조장 굴뚝은 볼 부어 붉고 높아 집집 지붕 더 눌러 앉힌다 기차역 폐품장 흐린 담길은 부스럭스럭 수수 밭머리로 고개 돌리고 근들이술 두 집만 일찍 등을 밝힌 채 저녁 고양이 기다린다. 박태일의 시집 '연변 나그네 연길 안까이'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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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9
  •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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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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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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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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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21)
    ■ 김철균 3 순자 옆의 식구들은 날이 갈수록 계속 하나 둘씩 떨어져 갔다. 인류생활사에 있어서 자녀가 부모의 슬하에서 자라다가 성인이 되고 또 결혼하면서 부모와 떨어져 사는 것은 자연적인 윤리라 하지만 그 당시 사전에도 없는 “신조어”인 집체호로 인해 우리 중국에 나타나 수천수만의 가정에서 자녀들이 정든 도시와 부모의 곁을 떠나 농촌으로 가야 했다. 순자의 가정도 영남이와 영순이가 떠난 뒤를 이어 1970년에는 영옥이가 떠났고 1973년에는 영애, 또 그 뒤엔 경남이까지 집체호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남편 용환이는 비록 돈화의 “5.7” 간부학교로부터 돌아와 명예를 회복하긴 했으나 얼마 안있어 의료대 성원으로 뽑혀 몇 달씩 내몽골과 기타 지구에 가있군 하다보니 역시 생이별이나 다름이 없었고 후에는 집체호에 내려갔던 둘째 아들 경남이까지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하면서 집을 떠났다. 둘째 아들 경남이가 군에 입대하게 된데는 순자의 역할이 아주 컸다. 당시 경남이는 연길시 장백공사 동풍대대에 하향하였다. 그는 하향한 이듬해에 군에 신청했다. 둘째가 군에 신청했다는 소식을 듣자 순자는 아들이 매우 대견스럽게만 느껴졌다. 엄마의 잔등에 업혀 재롱을 부리던 때가 어제 같은데 어느 덧 성인이 되어 집체호로 내려갔고 이젠 또 군에 신청하다니 그야말로 볼수록 자랑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혹시 신체검사나 기타 심사에서 탈락하지는 않을는지 슬며시 우려되기도 했다. 기실 순자는 해방군을 몹시 흠모하였었다. 거리에서 군복을 입은 군인들을 볼 때마다 내 아들도 저런 모습을 하고 나섰으면 하는 부러움을 가져본 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큰 아들 영남이를 군대에 신청하게 하였었는데 뜻밖으로 당시엔 남편인 김용환이 “외국특무”란 누명을 쓰고 있었기에 그 소망을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젠 가정출신이 좋겠다, 남편도 “외국특무”란 누명도 벗었겠다 거기에 신체까지 좋은 둘째 아들 경남이가 군에 입대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집에서 안절부절하던 순자는 마침내 둘째 아들 경남이가 하향한 동풍대대를 찾아갔다. 동풍대대 당지부서기와 민병연장을 만난 순자는 찾아온 목적을 이실직고하였다. “저는 아들 셋이나 둔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아들 셋 중 군대에 간 아들은 아직 한명도 없답니다. 큰 아들은 한시기 아버지가 ‘외국특무’란 모자를 쓰고 있어 가지 못했습니다. 이젠 걔들 아버지의 모자도 벗었으니 둘째 아들만은 꼭 군대에 보내고 싶습니다. 당지부서기와 민병연장께서 아무쪼록 저의 아들이 신체만 합격된다면 첫 사람으로 추천해 주기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이에 당지부서기와 민병연장은 순자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뭔가를 궁금해하는 것이었다. “아니, 경남이는 집체호 지식청년이기에 몇년 안 있어도 노동자 모집으로 도시에 올라갈 수 있겠는데 왜 부디 군대에 보내겠다고 하는 겁니까? 군대에 가면 농촌 못지 않게 힘들고 고생스러울텐데요?!” “그것 때문이 아니랍니다. 남자대장부로 생겨서 나라를 지키는 일터에 가는 것이 얼마나 장한 일입니까?! 그리고 고생을 겪어봐야 더욱 견강한 남아가 될 것이 아닙니까? 또 아들 셋이나 두고 그 중 한명도 군대에 보내지 못하면 제가 어떻게 당당한 어머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에 당지부서기와 민병연장은 몹시 감동돼하면서 경남이가 평소의 표현도 출중하고 신체도 좋으니 경남이를 적극 추천하겠노라고 답복을 주는 것이었다. 당지부서기와 민병연장과 작별한 순자는 또 장백공사 무장부에도 찾아가 무장부장한테 재삼 이상과 같은 부탁을 하고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경남이가 평소에 잘해서인지 아니면 순자가 아래위로 뛰어다니며 “외교활동”을 적극 벌여서인지 그 해 겨울 경남이는 자신의 뜻대로 군대에 나가게 됐다. 그것도 일반 육군이 아닌 해군으로 입대에 성공했다. 소속부대는 광서에 있는 모 해군기지의 부대였다. 당시 중국의 남부 변경지대의 형세는 몹시 복잡했다. 1975년 베트남 북방이 남부를 해방하고 통일을 실현한 후 점차 구소련의 힘을 믿고 중국과 등지는 외교를 해오다가 1976년 9월 중국의 모택동주석이 서거하자 공공연히 중국을 반대하고 중국과 엇서는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그것은 당연히 변경에서의 집탈로 표현되었다. 베트남군은 쩍하면 포사격으로 중국 변경주민들의 안정된 생활을 파괴하였는가 하면 때로는 중국 쪽으로 건너와 중국주민들의 물건을 빼앗거나 중국 주민을 학살하기도 하였다. 또한 대내적으로는 화교들을 탄압하고 내쫓는 행위를 감행, 한시기 양국의 변경다리로는 중국으로 들어오는 화교들로 줄을 잇기도 했다. 베트남당국은 중국의 참을 수 있는 경고를 계속 무시하면서 이러한 행위를 계속했다. 두나라 관계는 일촉일발의 전쟁분위기가 짙게 감돌았다. 바로 이럴 때 경남이가 군에 입대, 그것도 중국과 베트남 변경인 광서로 가게 되었다. 드디어 경남이가 참군한 그 이듬 해인 1979년 2월 17일 베트남에 대한 중국의 자위반격전이 개시되었다. 전하는데 따르면 베트남에 대한 중국의 자위반격전에는 운남과 광서의 변방부대가 주력으로 출동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경남이네가 소속한 해군부대도 출격한 것이 아닐까? 그러지 않아도 무시무시한 소식들이 자주 들려왔다. “장기간 전쟁이 세례를 받은 베트남 군대는 몹시 지독하다”느니 “부상당한 베트남의 여민병은 중국군대의 등에 업혔다가도 비수를 뽑아 중국군대의 목에 찌른다”느니 “인원상에서는 중국군대 측이 더 큰 손실을 입었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수없이 나돌았다. (혹시 경남이네도 전선에 나가 베트남해군과 맞붙지는 않았는지? 또한 싸움 중 어떤 불상사라도 생기지 않았는지?……) 순자는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20년간 키워오면서 남의 집 애들처럼 잘 먹이지도 잘 입히지도 못했는데 그 애가 전쟁에 참가하여 혹시 불상사라도 생긴다면… 자식의 안위에 대해 걱정하는건 순자 역시 여느 어머니들과 마찬가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순간에 불과했다. 순자는 다시 자신의 마음을 정리했다. 모택동의 큰 아들 모안영도 전쟁터에 나가서 희생되지 않았던가. 모두들 자기 자식이 아깝다고 붙잡고 있으면 이 나라는 그래 누가 지킨단 말인가?! 이렇게 마음을 정리하니 순자는 부대에 간 아들 경남이가 자랑스럽기만 했다. 또한 혹시 그 경남이한테 어떤 불상사가 생기더라도 자신이 아들을 부대로 보낸 것은 아주 잘된 일이라고 단정하였다. 4 순자의 막내아들 김진이는 다행히도 하향지식청년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당시 자녀 5명이 농촌으로 하향하면 한명은 농촌으로 내려가지 않아도 된다는 나라의 정책이 있었기에 그 혜택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17평방미터가 되는 작은 집에는 순자와 막내아들 김진 이렇게 모자 두 사람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식구가 단촐하면 살림을 조직하기가 보다 쉽다는건 살림살이를 해본 모든 주부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으군 하는 이치인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순자네만은 그 예외였다. 당시 순자의 남편 용환이의 노임은 55원이었는데 의료대로 외지생활을 하는 용환이한테 매달마다 얼마씩 보내고 난 뒤 나머지로 집안의 생활을 조직해야 했다. 아니, 집체호에 내려간 영남이, 영순이, 영옥이와 영애의 비누와 치약 등을 사는 생활비용도 대주어야 했다. 그것은 남편과 모든 자식들이 한 집에서 함께 생활할 때보다 그 생활비용이 곱절 더 들었다. 생활하다 보면 돈이나 물건같은 것을 가져가는 사람은 그것이 흔히 아주 적어 눈에 차지 않고 만족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퍼주는 사람은 그것이 크게 자리나게 축나기 마련이다. 그것은 돈이나 물건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집에서 여러 곳에 지원하며 살림을 조직하는 순자로서는 적은 생활비로 여기 저기에 맞춰대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떤 달에는 남편의 노임을 받는 날로 그것이 거덜날 때도 있었으니 그런 달에는 쌀밥 한끼를 해먹는다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나 마찬가지었고 기타 배급표로 나오는 돼지고기같은 부식품을 사먹든다는 것은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 했다. 바로 이 때 신흥가두판사처와 제 9 거민 위원회에서는 순자네 가정의 생활형편을 요해한 뒤 토론을 거쳐 순자더러 연변건축공사에서 임시공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당시 직업이 없는 가정주부가 임시일이라도 하려면 거민 위원회에서 주민들이 선거추천하고 가두판사처의 토론과 심사비준을 거쳐야 하는 일종 “빈곤부축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다만 가정이 가난해서만 여기에 뽑혀 임시일자리를 얻는 것이 아니었다. 가정출신토대가 좋고 사회적인 평가도 좋은 사람만이 그 “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중국판 “노가다”라고 할 수 있는 건축공사장에서 임시일을 할 수 있게 된 김순자, 이는 건국전 명신여자중학교를 졸업한 순자한테 있어서 너무나도 가혹한 운명의 희롱이었다. 순자는 억울했다. 명신여자중학교때의 동창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것을 봐도 억울했고 자갈치기, 벽돌부리기와 시멘트반죽을 나르던 몸이 데친 배추잎처럼 후줄근해진채 퇴근해서는 또 뒤죽박죽이 된 집안을 거두며 저녁밥을 지을 때도 억울했다. 하지만 순자는 이러한 억울함을 단 한번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순자는 이 모든 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위생학교 기숙사의 임시공일을 할 때도 그랬고 건축공사장의 막 일을 하는 그 때도 역시 순자는 뭐든지 하면 열심히 하였다. 한편 자기의 안위는 돌보지 않고 남을 위하는 순자의 정신세계는 그 곳 건축공사장에서도 체현되었다. 당시 공사장에는 순자처럼 임시공일을 하는 ×××이란 젊은 한족여인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녀는 공사장 책임자한테 며칠간 휴식하련다고 말미를 맏는 것이었다. 공사장에서 말미를 맡고 며칠씩 나오지 않는 일이란 흔히 있는 것으로서 당시 순자는 그녀가 말미를 맡는 것에 대해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몸이 불편하지 않으면 가정에 무슨 일이 있나보다고 여겼을뿐이었다. 헌데 며칠 뒤에 나타난 ×××이란 여인은 얼굴색이 백지장같고 몹시 부석부석한 모습이었다. (저 여인한테 무슨 일이 있었구나…) 순자는 의심쩍은 생각이 들어 그 여인이 일하는 모습을 자주 지켜보았다. 아니나 다를가 외바퀴밀차에 벽돌을 실어나르는 일을 하면서 그녀는 몹시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연했으며 현훈증을 느끼는지 외바퀴밀차를 밀다말고 자주 땅에 주저앉는 것이았다. 그리고 그닥 덥지 않은 날씨임에도 이마에서는 콩알같은 땀방울이 내돋군 하였다. “아니, 임자. 자네한테 웬 일이 있는 모양이구만.” “아니, 아무런 일도 아니예요. 괜찮아요. 언니 저한테 신경쓰지 마세요.” 그러면서도 여인은 두손으로 얼굴을 막으면서 분명 울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참는 것이었다. “아니 임자, 웬 일이요? 내가 조선족이라고 거리감을 두지 말고 언니처럼 생각하오. 어서 말해보오. 대체 웬 일이요?” “언니, 기실… 기실 제가 2일전에 낙태수술을 했어요.” “뭐, 유산을 하고 일하러 나왔다고?! 쯧쯧…그 몸으로 어떻게 이 일을 할 수 있어?! 내가 책임자한테 말할테니 집에 들어가 며칠 푹 쉬다가 나오라구.” 그러자 ×××여인은 급기야 순자의 입을 막으며 사정했다. “언니, 그러지 말아요. 기실 저의 집 생활형편이 말이 아니예요. 그러다가 책임일군이 혹시 저를 자르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 말에 순자 역시 짚이는데가 있었다. 자신 역시 가정의 생활고 때문에 건축공사장에서도 제일 힘든 임시공일을 하는 것이 아닌가? 오, 오죽했으면 이 몸을 갖고 일나오겠는가! 순자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기가 일하던 모래를 치는 곳에 가서 삽자루를 잡았다. 하지만 자꾸만 눈길이 ×××여인한테 돌려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얼마 안있어 순자는 다시 ×××여인한테로 다가왔다. “안되겠어. 임자 내가 하던 모래치는 일을 하라구. 내가 외바퀴밀차를 밀테니.” “?!…” ×××여인은 어안이 벙벙해했다. “뭘해? 어서 저 쪽에 가서 모래를 치라구?” 그제야 순자의 뜻을 알아차린 ×××여인은 “언니, 감사해요”라고 하면서 외바퀴밀차를 순자한테 넘겨주었다. 순자가 하던 모래를 치는 일을 하는 ×××는 자주 감동으로 어깨를 들먹이었다. 후에 몸이 완쾌되자 ×××여인은 호떡 2개를 사가지고 순자를 찾아왔다. 자기를 대신해 힘든 일을 맡아준 순자한테 고맙다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순자는 그 호떡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그 한족 여인의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임잔 참 성질이 곧은 아낙네구려. 그럼 임자가 나의 일을 대신 해준다면 나는 조선족 찰떡을 사주어야겠구만.” 순자의 농담에 ×××여인은 얼굴을 붉히면서 “언니도 참”하며 눈을 곱게 흘기었다. 한편 건축공사에서 임시공으로 일하는 3년간 순자는 해마다 “선진사업자”와 “민족단결모범”을 되었다. 이는 임시공들 중에서는 유일한 “선진사업자”였고 “민족단결모범”이었다. 또한 건축공사와 순자와의 계약은 더는 가두판사처의 추천과 소개를 거치지 않고 건축공사에서 직접 채용하군 하였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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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12-05
  • 저우언라이가 마지막 남긴 싸인과 말 한마디
    (위인 저우언라이는 1976년 1월 8일 오전 9시 57분, 향년 72세로 별세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1975년 9월 20일, 병이 위독한 저우언라이(周恩来)는 부득불 병원입원 후의 4번째로 되는 대수술을 받게 되었다. 당시 저우언라이는 그 수술결과가 예측하기 매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 저우언라이는 사업일군을 불러서는 1972년 6월 중앙의 비림정풍(批林整风) 회보회의에서 한 “‘몽골 언더르한 사건’에 관한 국민당의 여론날조 문제”란 보고의 녹음기록을 적은 문건을 한번 읽은 뒤 떨리는 손으로 거기에 싸인하면서 그 싸인 날짜와 환경에 대해 “1975년 9월 20일,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이라고 적었다. 이는 저우언라이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한 싸인이었다. 수술실로 들어가면서 저우언라이는 가까스로 목청을 높여 한마디 맘속의 말을 하였다. “나는 당과 인민에 충성하였다! 나는 절대 투항파가 아니다!”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덩잉초우(邓颖超)는 후에 왕둥싱(汪东兴)을 통해 이 모든 것이 모우저둥(毛泽东)한테 전달되게 하였다. 1976년 1월 5일 새벽, 병원의 의료진은 병이 위독한 저우언라이한테 마지막 한차례의 수술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어 저우언라의 병이 위독하다는 통지를 받은 베이징의 중앙정치국 성원 및 국무원 책임자들이 육속 병원으로 찾아와 병문안을 했다. 1월 7일, 저우언라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숨소리는 매우 미약하였고 장기간 혼미상태에 있었다. 의료진 성원과 간호일군들은 주야로 병실을 지키면서 수시로 구급준비를 했다. 그날 밤 11시경, 저우런라이는 혼미상태에서 깨어나서는 두 눈을 간신이 뜨며 신변의 우제핑 의사한테 부탁했다. “나 여기는 별문제가 없을테니 당신들은 다른 환자들을 돌보시오. 당신들은 다른 환자들한테 더욱 수요될 것이오…” 이는 저우언라이가 마지막으로 남긴 한마디 말이었다. 중국의 부강을 위해 평생의 노력을 다 바친 총리 저우언라이는 생명의 경각에 이는 마지막 순간에도 타인의 병치료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1976년 1월 8일 오전 9시 57분, 중국과 세계 많은 나라의 존경을 받던 세기적 위인 저우언라이는 영영 깨어날 수 없는 세상으로 떠났다. 향년 7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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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1-30
  • 【장편실화연재】한 여인의 인생변주곡(20)
    ■ 김철균 제9회 역경의 지속 1968년 말에 접어들면서 폭풍우처럼 몰아치던 문화혁명의 기세는 한풀 꺾이는듯 싶었다. 거리에서 조직과 조직사이의 무단적 폭력투쟁은 가라 앉았고 “독재대상”이 되었던 김용환도 풀려나왔다. 사회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듯 하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운 형식으로서의 문화혁명의 동난은 계속됐다. 김용환은 일단 구금생활에서 풀려나왔지만 얼마 안있어 돈화의 어느 한 산골로 노동개조를 가야 했다. 말로는 “5.7간부학교”라고 했으나 기실 정배살이와 다름이 없었다. 이어서 초고중을 졸업한 큰 아들 영남이와 큰 딸 영순이가 같은 날 동시에 농촌으로 내려가 집체호생활을 하게 되었다. 문화혁명은 순자네 부부와 자녀를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게 하였다. 그 때 그 세월, 이렇게 한집식구가 흩어져사는 가정이 어찌 순자네 가정 한집뿐이었으련만 그 당시 정신상, 경제상에서 순자가 받는 압력은 여느 가정과는 비할 수도 없었다. 한가지 실례를 들고 봐도 한꺼번에 식구 3명이 집에서 나가니 적어도 이불과 요 3채씩은 있어야 했다. 당시 집에 이불이라고는 고작 3채뿐이었다. 그러면 남편과 두 자녀한테 새 이불을 해주어 보내는 것이 마땅한 도리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때 다른 집들에서는 자식이 농촌집체호로 간다고 하니 모두 새 이불을 해주는 바람이 일다싶이 했다. 그러다보니 연길시내의 몇몇 백화상점들에는 이불등과 이불안감 그리고 이불솜이 거덜날 지경이었다. 그리고 많은 집들에서는 자식들한테 이불을 해주어야겠는데 천표와 솜표가 없어서 긍긍 속을 앓기도 했다. 한편 이와는 반대로 순자네는 천표와 솜표가 남아돌았으나 돈이 없어 새 이불 3채씩이나 할 수 없었다. 순자는 남들이나 자식들한테 새 이불을 해줄 수 있게 하기 위해 집에 있는 천표와 솜표를 몽땅 남들더러 쓰라고 줘버렸다. 이를 두고 남들이 “다문 얼마씩이라도 돈을 받고 천표와 솜표를 팔 것이지 왜 그냥 주고 말았느냐?”, “나 같으면 찢어버리거나 부억아궁이에 넣어 태워버릴지언정 남한테 그냥 공짜로 안 주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썩 후에 있은 일이다. 집에 있는 이불 3채는 남편과 영남, 영순이가 각각 한채씩 가지고 갔다. 그러자 집에는 이불 한채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이구 누님, 집에 이불 한채도 없이 밤에 어떻게 잔다고 그러오?!” 어느 날 순자네 집에 왔던 남동생이 기가 막혀하며 혀를 끌끌 차다가 이불천과 솜을 사줄터니 천표와 솜표를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순자가 하는 말이 천표와 솜표는 또 남들한테 몽땅 줬다는 것이 아닌가. 남동생은 너무 한심하여 머리를 흔들었다. “누님, 그 것까지 남들한테 줘버리면 어떡하겠다는거요? 그렇게 마음이 헐하니 가난밖에 차례지지 않는거요.” 남동생은 누나를 책망하면서도 자기의 집에 가서 천표와 솜표를 가져다서는 돈과 함께 이불감을 사라면서 순자앞에 내놓았다. 그날 순자는 반나절 눈물을 흘렸다. 남동생의 소행이 고마워서 울었고 자식과 남편한테 잘해주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며 울었다. 하지만 그토록 인심이 헤푼 자신을 탓하면서도 밤만 자면 또 남한테 뭔가를 주지 못해 속을 앓군 하는 순자였으니 이는 곧바로 그의 천성이었다. 2 착한 순자한테 세월은 무정하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영남이가 하향한 안도현의 ××산골과 영순이가 하향한 의란공사 ××촌은 째지게 가난한 고장이었다. 죽도록 일해도 한공에 20여전밖에 가지 않는 고장이라 벌어서 집을 돕기는커녕 자립조차 할 수 없었다. 영남이와 영순이는 “돈 5원만 보내주오”, “털모자가 없어서 겨울에 일할 수가 없소”,“신이 다 판났는데 발이 시려서 일하러 다닐 수가 없소” 하며 한달이 멀다하게 찾아와서는 손을 내밀었다. 자식들뿐이 아니었다. 돈화에서 노동개조를 하는 남편 김용환도 인편에 신과 장갑을 보내달라고 부탁해왔다. 당시 집에서는 순자는 물론 영옥이, 영애와 경남이, 김진 모두가 동복과 겨울신을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석탄을 절약하느라고 불을 적게 때다 보니 집이 춥기로 말이 아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물독의 물에 살얼음이 낄 지경이었다. 남편과 자식 모두가 헐벗는 판에 과연 누구부터 돌봐야 하는가? 결국 순자는 손수 자기의 손으로 손장갑 몇컬레를 만들고 아끼고 아꼈던 생활비로 겨울신과 두꺼운 양말 등을 사서는 남편한테부터 보내주었다. 왜서였던가! 당시 순자는 그저 가정의 세대주인 남편만은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했을뿐이었다. 남편이 건강하게 살면서 역경을 이겨내고 무사히 돌아와야 이 가정의 앞날도 운운할 수 있다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순자는 역경일수록 힘을 낼 수 있도록 자식들한테 자신감을 주기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순자의 말마따나 경제적으로 도와주지 못하니 정신적으로 힘을 북돋우어주는 것이었다. 1968년 12월 19일, 순자가 큰 아들 영남이한테 쓴 편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내 아들 지식청년 영남아, 도시에서 살다가 농촌의 간고한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겠구나. 어머니는 농촌에서 살아보았기에 그런 점을 잘 알고 있단다. 하지만 어려울수록 간고분투하는 뇌봉정신을 본받아야 하느니라. 영남아, “뇌봉일기”의 77페지에는 다음과 같은 몇개 구절이 씌어져있다. 가장 곤난하고 간고한 사업을 할 때에 황계광을 생각하면 온몸에 힘이 솟구치고 투지가 억세어진다. 임무를 수행할 때 구소운을 생각하면 자기한테 엄격히 요구하게 되고 규율을 잘 지키게 된다. 향수를 받게 될 때마다 베쮼동지를 생각하기만 하면 먼저 남을 돌보고 후에 자기를 생각하게 된다. …… 영남아, 이러한 영웅들의 일기를 잘 학습하여라. 영웅들이 한 말들은 흔히 평소에 사람들한테 많은 힘을 주고 살아감에 있어서의 거울이 되고 등대로 될 때가 많으니 이를 항상 명심하거라. …… 순자는 이런 편지를 큰 아들 영남이한테만 쓴 것이 아니라 선후로 집체호에 나간 영순이, 영옥이와 영애 등 모든 자녀들에게 써보냈다. 그 당시 순자는 모든 자녀들의 “거울”이였다. 자녀들은 어머니가 하는 일은 모두 옳다고 여겼고 어머니의 말씀이라면 100%로 잘 따라주었다. 농촌에 내려간 자녀 3명은 비록 생활적으로는 아주 가난하게 보냈지만 농촌의 각종 활동에서 모범을 보였다. 큰 아들 영남이는 아버지한테서 배운 의학지식을 토대로 생산대 사원들의 병을 떼주기도 하여 “맨발의사”라며 큰 호평을 받았고 영순이도 아주 부지런하게 일한 결과 집체호에 나간지 얼마 안되어 생산대의 부녀대장과 총 보도원으로 되었다. 이렇듯 어머니인 순자한테서 남다른 교양을 받아서인지 영남이와 영순이는 물론 후에 집체로로 내려간 영옥이와 영애 또한 부지런하고도 착하고 남을 잘 도와주어 항상 사원들의 입에 올라 칭찬을 받군 했다. 그중 1973년에 연길시 흥안공사 대성촌의 집체호로 내려간 영애한테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있었다. 한번은 영애가 판난 신을 신고 다니는 것을 본 순자는 그 것이 가슴아파 큰 결심을 내리고 새신 한컬레를 사주면서 시내로 오거나 집에 들어올 때마다 싣으라고 했다. 헌데 후에 집으로 온 영애를 보니 여전히 그 해진 신을 신고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영애이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다음과 같았다. “어머니, 욕하지 말아주세요. 기실 우리 생산대에 저보다도 엄청 더 가난하게 보내는 가정이 있어요. 그래서 그집에 있는 제 또래의 친구한테 그만 그 새신을 주고 말았어요.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순간 순자는 어이가 없었다. 큰 결심을 내리고 사준 새신을 남한테 훌쩍 줘버렸으니 그럴만도 했다. 하지만 영애를 탓할 수도 없었다. 자기 자신이 자식한테 늘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자녀들한테 교양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자녀들 또한 모두 자기를 닮아 저렇게 마음이 헐하고 착한데야 어찌하랴. 한편 당시 돈이 없어 영애한테 재차 신을 사주지 못한 것으로 하여 순자는 지금까지 그 때의 일을 가슴아파하며 늘 입에 올리군 한다. 1969년의 음력설전야, 남편 김용환은 “5.7간부학교”에서 특별허가를 해주었기에 집으로 올 수 있었다. 영남이와 영순이도 음력설을 쇠러 집으로 왔다. 음력설 날 아침, 순자는 돼지고기에 감자를 섞어서 볶은 채와 통채로 덥힌 두부 등을 밥상에 차려놓고 전날 줄을 서서 받아온 술도 주전자에 덥혀갖고 남편한테 내놓았다. 아내가 부어준 술을 서너잔 마시더니 남편은 급기야 낙루하는 것이었다. “내가 나쁜 놈이지 당신한테 뭐가 있다고 손을 내밀었담. 아무렴 내가 나쁜 놈이구 말구…” 그도 그럴 것이 설전날 집이라고 찾아온 영남이와 영순이가 입은 모습을 보니 남루하기가 말이 아니었다. 둘 다 판나서 솜이 삐죽히 나온 솜바지에 발가락이 보일 정도로 험하게 판난 솜신을 신고 나타났던 것이다. 억이 막힌 용환이는 말이 나가지 않았다. 자초지종을 들어보지 않았지만 그 동안 아내가 얼마나 고생했음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자기한테 죄가 있어서가 아니지만 그래도 자기 때문에 아내와 자식 모두가 고생한다는 것을 용환이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겨우 참고 참았던 모든 것이 음력설 아침 술이 몇잔 들어가자 울컥 치밀어올랐던 것이다. “여보, 미안하오. 당신한테 부담만 가득 안겨준 내가 정말 당신을 볼 면목이 없구려. 아이구 내가 못난 놈이지.” “여보, 설날인데 왜 눈물을 보이는거예요. 골란은 잠시적인 것이예요. 당신은 청백한 사람이고 앞으로 꼭 모든 것이 좋아질 날이 있을거예요.” “아버지, 저희들도 아버지를 믿어요. 아버진 훌륭하고 양심있는 인민교원이예요. 저희들도 잠시 고생하는 건 모두 참을 수 있어요.” 아들 영남이와 딸 영순이와 영옥이도 아버지를 위로했다. “그래 그래 고맙다. 이 아비는 청백하다. 훌륭하지는 못하지만 당과 국가에 미안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만하자. 자, 설날인데 우리 함께 설음식을 먹자구나. 그리고 영남아, 너도 이젠 사회로 나왔으니 어른이 되었다. 자, 이 아비가 부어주는 술 한잔 받거라.”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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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1-28
  • 송미령과 월키 사이에 진짜 부당관계 있었을까?
    1942년 늦여름, 당시 동맹군은 많은 전쟁터에서 저조기를 겪고 있었다. 미국의 루즈벨트는 미국인은 전쟁중에서 반드시 단결해야 한다고 여러번 강력하게 강조하였다. 그는 1940년에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된 월키 루이스를 여러 나라들을 방문시키면서 미국은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준엄한 전쟁시련을 겪고 있는 나라들에 알리려 계획하였다. 그 당시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송미령은 어느 날 공상희의 거처에서 중국을 돕고 있는 미국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연회를 차렸다. 연회에서 월키는 송미령과 송경령의 중간에 앉았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송미령은 월키의 팔을 잡으면서 “제가 당신한테 나의 다른 한 언니를 만나게 할게요. 언니는 신경통이 있기에 오늘 연회에 오지 못했어요.” 연회도중 송미령과 월키가 자리를 뜨자 사람들은 의론이 분분했다. 연회에서 공상희는 송미령과 월키가 없어지자 매우 황당해하며 두 남녀의 행방을 추궁하였다. 그 해 10월 중순, 장개석은 중국방문을 마친 월키를 위해 송별모임을 조직했다. 송별모임은 수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예당에서 진행되었다. 이날 장개석과 송미령이 모임에 나타나자 모임의식이 시작되었고 장개석과 송미령은 특별의자에 앉았다. 축사가 끝나나 장개석과 송미령은 월키와 기타 내빈들을 접대하기 시작, 약 1시간 뒤 월키는 헨리 챈들러(당시의 수행인원)를 불렀다. 그는 몰래 헨리한테 잠시후 자기가 송미령과 함께 모임장소를 떠날테니 자신을 대신해 장개석의 곁에 있어달라고 부탁했다. 이어 월키와 송미령이 몰래 장소를 떠나자 헨리는 장개석의 곁을 떠나지 않고 이것 저것 물음을 제기하면서 장개석의 주의력을 분산시키기에 노력했다. 행사를 마치고 헨리가 거처에 돌아온 뒤 한밤중이 되자 장개석이 노기등등해 들어왔으며 자동소총을 잡은 3명의 사병이 뒤를 따랐다. 장개석은 가까스로 노기를 억제하며 헨리한테 물었다. “헨리선생, 당신 빌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요?” “전 모르는데요.” 헨리가 머리를 가로 저었다. 장개석은 방안의 모든 것을 수색했다. 침대밑을 들여다 보고 옷궤도 열어본 뒤 맨 나중에 방안에서 나갔다. 월키는 새벽 4시경에야 거처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들어서자 바람으로 송미령과 함께 있었던 일을 털어놓으면서 이미 송미령을 미국으로 초청하였다고 자랑했다. 이에 헨리는 “바보!” 라고 월키를 꾸중한 뒤 이제 귀국하면 부인과 아들이 공항에 마중나올텐데 장부인과 함께 비행기에서 내리면 서로 입장만 곤난하게 된다면서 또한 이제 1944년이 되면 재차 대통령 선거경쟁에 나서야 할 것이 아니냐며 충고하기도 했다. 그 이튿날 헨리와 송미령은 어느 한 비밀거처에서 만났다. 이는 이전에 그들이 자주 만나던 거처였다. 이날 헨리는 송미령한테 월키와 함께 워싱턴으로 가서는 안된다고 일침을 놓았다. “누가 안된다고 해요?” “바로 나요.” 이러자 송미령은 즉각 손톱을 날카롭게 살려서는 헨리의 얼굴을 긁어놓았다. 그 뒤 송미령은 미국인 클라라한테 쓴 편지에서 “당시 나는 진짜 월키 선생과 함께 워싱턴으로 가고 싶었으나 남편(장개석)이 내가 인차 미국으로 가는걸 원하지 않았다”고 고백하였다. 월키와 헨리가 떠나는 날, 그들은 송미령이 차린 한 자선기구에서 송미령과 작별, 이날 송미령의 사무실로 들어간 월키는 인차 문을 닫았고 헨리가 문밖에서 1시간 20분 가량 기다려서야 이들이 함께 나왔다. 이날 송미령은 이들 두사람과 함께 공항까지 갔다. 월키는 비행기에 오르기전에 송미령을 한번 포옹하면서 얼굴에 미묘한 키스자욱을 남겼다. 출처: 신화넷 김철균 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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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1-26
  • [역사인물 스케치] 존 케네디의 백악관으로 가는 길
    존 F 케네디는 미국의 제35대 대통령이며 미국의 저명한 케네디 가족성원이다. 그는 대통령 임기기간인 1963년 11월 22일에 댈레스에서 자객의 총에 맞아 암살당하였다. 케네디는 1960년에 미국대통령 선거에 성공, 미국 역사상 가장 나젊은 대통령으로 되었으며 또한 미국 역사상 첫 천주교를 신앙하는 대통령이자 유일한 퓰리처금상을 수상한 대통령이기도 했다. 윗 사진은 1960년 4월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수개월전에 미국 중동부에 위치한 웨스트버지나아주에 있는 한 잡화점을 방문하는 모습이다. 사진은 미국 뉴욕의 TV생방송실에서 죤 케네디의 부인 재클린 케네디가 대통령변론현장의 남편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장면이다. 1960년 4월 존 케네디가 그의 동생이며 조수인 포비 케네디와 함께 있는 장면이다. 1960년 4월 케네디가 로간지구에서 의자위에 올라 강연하고 있는 모습이다. 케네디의 동생 포비 케네디와 그의 부인 에쌀이 매사추세츠주에서 투표에 참가하고 있는 장면이다. 1960년 5월 존 케네디가 신문을 통해 자신의 대통령 출마와 관련된 보도를 읽고 있다. 1960년 7월 미국민주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존 케네디를 지지하는 여성들이다. 재클린 케네디가 1960년 10월 뉴욕에서 있은 한차례의 시위에 참가하고 있다. 한시기 미국에서는 케네디와 그의 부인의 패션이 유행되기도 했다. 사진은 1961년 1월, 뉴욕의 복장전매점에서 케네디와 그의 부인의 모델을 전시하고 있는 장면이다. 1961년 1월 존 케네디(왼쪽 세번째)가 곧 만기가 되는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취임연설 현장에서 함께 있는 장면이다. 1963년 11월 22일 12시 30분 미국 제35대 대통령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와 부인 재클린 케네디가 텍사스주 댈레스의 디리광장에서 한 자객에 의해 총에 맞아 암살되었다. 그가 암살된 후 자객인 오스왈드는 경찰에 의해 감옥으로 압송되던중 스탠드바의 보스 제크 로비가 쏜 총에 맞아 죽었다. 그 뒤 어떤 사람들은 케네디가 암살당한 후의 3년간 선후로 18명에 달하는 해당 관건적인 증인들이 사망했으며 1963년부터 1993년 사이에 무려 115명에 달하는 해당 증인들이 각종 기이한 사건중에서 자살하거나 모살당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아직도 미스테리로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출처: 홍콩 봉황넷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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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1-13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19)
    ■김철균 ( 3 )위에서도 자주 언급되다싶이 순자의 가정은 워낙 생활이 풍족하지 못하였다. 신흥소학교 동쪽의 17평방미터밖에 안되는 비좁은 집에 식구가 많았고 또 남편 김용환 한명의 노임으로 살아가다보니 생활이 어렵다는 건 불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거기에 문화혁명 기간 남편이 갇히어 노임이 제대로 발급되지 않은데다 순자마저 위생학교 기숙사식당의 임시일자리에서 나오다보니 수입내원이 줄어들어 매일 매일의 식생활을 이어대기가 극난이었다. 당시 순자한테는 자식 6명이나 딸려 있었다. 큰 아들 영남이, 큰 딸 영순이, 둘째 딸 영옥이, 셋째 딸 영애 그리고 둘째 아들 경남이와 셋째 아들 김진 이렇게 연연생 혹은 2-3년 터불씩 여럿이 되었고 모두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었으며 사회에 진출해 직장에 다니는 자식은 단 한명도 없었다. 이 정도로 말하면 순자 한사람만 쳐다보는 이 가정의 상황에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 당시 뭐 생활적 여유가 있는 가정이 몇 집 안되고 거개가 힘들고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은 건 사실이었으나 순자네 가정은 더할 나위가 없이 근근득식의 계속이었다. 한창 클 나이었던 둘째 딸 영옥이는 영양실조로 얼굴이 노랗게 되었고 둘째 딸 영옥이는 역시 영양실조로 15살 어린 나이에 머리가 새하얗게 되어 “백모녀”란 별명을 가지게 되었으며 둘째아들 경남이는 누가 “뭘 먹었느냐”고 물을 때마다 “푸대죽”이라고 대답하여 별명조차 “푸대죽”으로 되고 말았다. 푸대죽이란 말 그대로 시래기와 옥수수 가루를 마구 섞어갖고 끓인 죽으로서 그 때 그 시기 아주 오랫동안 순자네 집에서는 그 푸대죽이 주식으로 되었으며 밥을 해먹을 때가 아주 적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혹시 위생학교에서 교직원들한테 뭔가를 나누어도 독재대상이 된 김용환한테는 늘 몫이 없었다. 그 때 중학교 이상의 학교들마다 거의 모두가 농업실천기지가 있었는데 연변위생학교에도 그런 기지가 있어 거기에서 수확되는 벼, 옥수수와 콩은 흔히 학교 교직원들이 나누기가 일쑤였다. 인당 그닥 많이 차례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입쌀 한알이 귀한 세월이라 그것은 어려운 가정생활에 큰 보탬이 되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용환이네 가정은 항상 제외되었다. 처음에 순자는 학교에서 그런 나누기를 한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불평의 말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워낙 공짜를 싫어하고 공짜와는 담을 쌓고 살아왔던 순자는 가난해도 절대 그런데는 손을 안 내민다고 단언했던 터였다. 헌데 나중에 볼라니 그렇게 간단하게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당시 위생학교에는 김용환처럼 “독재대상”이 된 교직원이 11명이 되었는데 순자네뿐 아니라 그런 가정들이 모두 학교의 “나눠가지기”명단에서 제외됐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가정의 몇몇 아낙네들이 찾아가 제기했으나 학교지도부에서는 “오류분자”의 가정은 제외된다면서 번번히 면박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순자는 자기네만 가지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불공정했다. 순자는 학교내에서 배척받고 있는 모든 가정을 위해서라도 자기가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한번은 학교에서 학교둘레를 막은 널판자 배자를 뜯고 벽돌담장을 쌓으면서 뜯어낸 널판자들을 교직원들한테 나눠주게 되었는데 이 역시 김용환을 비롯한 11세대 독재대상자의 가족은 그 명단에서 제외였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순자는 그 11세대 가정의 “권익”을 위해 무작정 위생학교 지도부를 찾아갔다. “뭐?! 배자를 뜯어낸 널판자를 달라구? 동무는 그래 ‘오류분자’가정에서 그걸 가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오?” “뭐가 ‘오류분자’ 가정인가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의 남편 김용환 선생은 당의 훌륭한 아들로서 건국초기 연변의 위생사업을 개척한 선구자중의 한사람이예요. 당신들이 뭔데 당의 훌륭한 간부인 김용환 선생을 가두어 놓은 것도 모자라 이런 나눔에서도 우리와 같은 가족을 외면하는가요. 그 심보는 뭔가요? 당과 모주석께서 이러라고 당신들한테 시킵데까?” “이 동무가 이거, 왜 함부로 당과 모주석을 욕보게 하지 마시오. 그리고 그만 말하시오. 듣기 싫소.” 사무실일군이 손을 내저었지만 순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단 말을 시작하자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왔다. “아니, 계속 말해야 하겠습니다. 그래 누가 당과 모주석을 욕보게 하는가요. 바로 당신같이 무지막지한 사람들이야말로 당과 모주석을 욕보게 하는 사람들인 거예요. 당과 모주석께서는 극소수의 나쁜 놈들을 제외하고는 광범한 인민대중과 단결하라고 했습니다. 그래 저희들 가족들까지 나쁜 놈들이란 말입니까? 어디 한번 대답해보시요. 당신들이 이렇게 우리 가족들까지 계속 무시하고 배척해 보세요. 그러다가 그 가족들이 정말 앙심을 품고 나쁜 사람들 켠으로 넘어갈 때에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때는 당신들같은 사람들 모두가 역사의 심판대에 오를 것이예요……” 이 때 40대쯤 되어보이는 간부 한명이 문을 떼고 들어서다가 순자와 사무실일군이 언쟁을 하는것을 보고는 그 사무실일군을 불러냈다. 그 40대의 간부가 사무실일군을 불러내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순자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약 10분 뒤 다시 사무실로 들어온 그 일군은 한결 부드럽게 어투를 바꾸며 순자네를 비롯한 그 11세대 가정의 집주소를 일일이 체크하는 것이었다. 그 사무실일군과의 설전에서 순자는 일단 승리하였다. 순자가 밖으로 나오자 위생학교의 목수일을 하던 리동무가 감탄했다. “아주머니, 아주머니가 어쩌면 그렇게도 정치를 잘하십니까? 그 사무실일군은 말 마디가 막혀 한 마디도 못하더군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라고 하며 엄지손가락을 내미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가 2일 후 위생학교에서는 실제로 순자네를 비롯한 11세대 가정에 널판자를 실어다 주었다. 헌데 순자네 집에 실어온 널판자는 운전수가 집에서 일정한 거리가 있는 큰 길옆에 부리웠고 또한 순자네 집에 제때에 알리지 않은데서 길가던 사람들이 불쏘시개용으로 하나 둘씩 주어가기 시작했다. 얼마 후 순자가 소식을 듣고 나왔을 때는 별반 남아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순자는 큰 길가에 널판자를 부리워놓은 운전사도, 또한 그 널판자를 하나 둘씩 주어가는 사람들도 탓하지 않았다. 워낙 공짜에 큰 욕심이 없는 순자로서 다만 문화혁명의 피해대상인 그 11세대 가정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한 것으로 만족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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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11-02
  • 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16)
    ■김철균 내가 8살 때 소학교에 붙었으니까 그 해가 아마 1966년이었을 것이다. 그 시기 아버지의 생활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즉 내가 태어나던 1957년부터 그 때까지 아버지는 별로 “외출”을 하지 않았으며 어디에 갔다가도 밤만은 꼭꼭 집에 와서 자군 하였다. 또한 바깥에 나가 돌배 한알이라도 생기면 건사했다가는 꼭 집에 온 후 나를 주군 하였다. 그만큼 나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은 각별했다. 그런가 하면 아버지는 정치상에서도 크게 “진보”했다. 아버지의 “혁명경력”이 은을 냈던지 아버지는 촌 당지부서기로 일했던 것이다. 글공부를 거의 하지 못한 아버지가 촌지서사업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 나는 전혀 알 길이 없다. 단, 아버지가 얘기를 잘한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중국어에 대해서는 청산유수였다. 조선어면 조선어, 중국어면 중국어 이렇게 중조 두가지 언어에 대해 막힘이 없는 아버지였으며 그 당시 촌에서 두가지 언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는 사람은 아버지외 별반 없었다. 아마 그래서 상급당조직에서는 아버지한테 촌지서사업을 맡겼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헌데 내가 어섯눈을 뜨면서 지켜볼라니 그 때의 아버지는 자주 한숨을 내쉬며 뭔가에 고민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 자주 “내가 그러는게 아니었는데 참 왜 내가 그런 못된 짓을 했노?”라고 혼자말로 중얼거리군 했다. 그 때 아마 아버지는 그 무슨 폭풍우를 예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몇년 뒤 아버지는 문화혁명중에 반란파들한테 물매를 맞게 되었고 결국 그 때문에 세상을 하직한 것도 사실이었다. 사망하기 전 아버지는 나한테 이런 말을 남겼다. “이 아비가 남들의 봉창을 당한 거란다. 봉창을… ”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것을 들려주었다. 1964년은 중국에서 사회주의교육운동이 한창일 때었다. 그 때 상급에서 사회주의교육공작대가 내려왔고 촌당지부에서도 정풍운동이 크게 벌어졌다. 바로 그 때 촌학교의 한 여성 당원교원이 당시 당지부의 부서기로 있던 김××와 눈이 맞아 돌아친 것이 탄로되었고 아버지는 당지부 지도부회의에서 그 여성당원을 호되게 비판하였으며 거수표결로 그녀를 당내 엄중경고 처분(당적을 보류하고 지켜보기)을 주었다고 한다. “낸들 그러기 좋아서 그랬겠느냐?! 어쩔 수 없었다. 그 사람의 처가 그 일을 알고는 속을 태우다 못해 목을 매고 자결했으니 일이 데럽게 꼬였단 말이다. 그 여자를 보호할 여지가 없었단 말이다.” 한편 그 일 때문에 아버지는 어머니한테서도 많은 꾸중을 듣기도 했다. “당신이 뭔데 시집도 가지 않은 남의 여자를 회의에서까지 망신시켜유?! 당신은 얼마나 깨끔한 사람인데 다 그런대유…” “남들이 뒤에서 어떻게 손가락질을 하는지 알기냐 해유?! 나 참 챙피해서 그 말 입에 담지 못하겠수.” 어머니의 꾸중에 아버지는 한마디 대꾸도 없었다. 워낙 옛날의 성미가 많이 죽어든데다 아버지 자신 또한 그 일때문에 몹시 참회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었다. 헌데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1966년 여름, 상해에서부터 시작된 문화혁명의 폭풍은 마침내 연변의 작으마한 농촌마을인 나의 고향에도 들이닥쳤고 아버지는 제일 선참으로 반란파들에 의해 붙잡혀나와 투쟁을 받게 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죄명은 여러가지였다. 지난날 술을 좋아하다 못해 공소합작사에 가서 외상술까지 받아 마셨으니 부화타락한 생활을 추구하는 “주자파”였고 문화혁명전 조선으로부터 민주연군시기의 전우가 찾아왔었으니 “외국스파이”었으며 조선에 있는 여인과의 일이 어떻게 새나갔는지 생활작풍상에서도 문제가 엄중한 “계급이색분자”였다. 당시 아버지를 가장 호되게 족친 사람은 다름 아닌 소학교의 당원교원인 이금자란 여자와 당지부 부서기었던 김정범이란 남성이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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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1-02
  • 오묘한 세계대백과(24)
    근 100년래 전반 지구의 기후가 보편적으로 따뜻해지는 추세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최근 10년의 지면의 평균기온은 1961년부터 1990년의 평균치보다 약 0.6도가 높아졌다. 그럼 지구는 어찌하여 “열”이 나는가? 근 한세기 이래 인류는 석탄, 석유 등 광물연료를 대량 사용하면서 이산화탄소 등 온실기체를 대량 배출하고 있다. 대기중의 온실기체는 한층의 두꺼운 유리마냥 지구로 하여금 큰 온난방처럼 만들면서 전반 지구의 기후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지구의 지속적인 온난화추세는 전반 지구의 강수량을 다시 분배하면서 빙천과 동토가 해동이 되고 바다물 평면이 높아지는 등 자연생태계통의 평형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오면서 아울러 인류의 식물공급과 거주환경에 위협을 주고 있다. 전문가들은 만약 전 지구의 온난화 추세를 효과적으로 억제하지 못하면 미래의 100년중 지구의 온도가 1.4도 내지 5.8도까지 올라가게 된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2100년이 되면 세계에서 1/3이 되는 동식물 서식지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겨 수많은 동식물 종류가 새로운 생존환경에 적응할 수가 없어 멸종이 된다고 한다. 때문에 세계 각국에서는 협력하여 지구기후의 온난화문제를 해결하여 새로운 생존환경을 찾아야 한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제공
    •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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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0-30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25)
    트로이유적의 자료 소속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터키, 지점 터키 트로아스평원 함의: 호메로스가 쓴 동화색채가 충만된 옛성 유적 기원전 9세기 고대그리스의 호메르스(荷马) 사시(史词) 중에는 트로이(特洛伊)전쟁을 제기한적이 있는데 이로하여 트리오성이 유명해지게 되었다. 트로이는 기원전 3000년과 기원전 2000년 기간에 일찍 한 왕국의 수도였다. 그러다가 그것이 버려진지 몇 세기 후 그리스인들이 다시 자리잡기 시작, 후에 이 지방은 선후로 페르샤인 알렉산드르 황제와 로마인이 통치하게 되었다. 324년 후 이곳은 점차 삭막해지기 시작했다. 지금 트로이유적에는 오래된 성곽, 옛성 등으로 형성됐던 층층의 폐허와 여신 아테네(雅典娜)의 무덤이 모셔져 있으며 트로이로 하여금 가장 매력적인 세계 문명고적의 하나로 만들고 있다. 토로이목마 호메르스(荷马) 사시(史词)의 기재에 따르면 트로이왕자 패리스(帕里斯)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ㅡ 아내 헬렌(海伦)을 빼앗아갔다고 한다. 그러자 아내를 다시 빼앗아오기 위하여 스바다(斯巴达)왕은 형제 아가멘놈(阿伽门农)한테 간청하여 그리스 연합군과 합류하여 트로이를 치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장장 10년간 지속된 전쟁이었는데 최종 그리스군대가 숨겨져있는 한 거대한 목마(木马)를 통해 몰래 트로이성내로 진입해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현재 트로이 로구역입구에는 재건된 거대목마가 있으며 이미 터키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풍경선으로 되고 있다. 아홉개 성의 중첩 고고학자들의 발견에 따르면 트로이유적은 9개의 부동한 시기의 유적들이 중첩돼 함께 형성된 것이다. 그 중 유적의 제일 아래층으로부터 5층에 이르면 이 트로이성이 부단히 확대되었던 상황을 볼 수가 있다. 제 6 층의 폐허는 트로이문화에서 하나의 전변기로 이 때 북방의 초원민족이 트로이로 진입하면서 도시의 면모가 이전과 다르게 되었다. 제 7 층의 페허는 호메로스(荷马)사시에 기재된 트로이성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제 8 층과 제 9층 은 그리스인들이 거주하던 시기와 로마 통치시기의 도시면모를 갖고 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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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0-30
  • 생존해있는 “옛상해의 마지막 아가씨”ㅡ 엄유운
    엄유운(严幼韵) ㅡ 그녀는 민국시기 자가용을 몰고 교정으로 드나드는 “복단대학의 꽃”이었다. 첫 남편이 일찍 사망한 것 외에는 그의 출신, 경력, 용모와 학력 등은 모두 사람들한테 부러움을 주었다. 민국시기 엄유운은 복단대학의 첫기 여대생이였고 전란시기에는 국민정부 외교관의 부인이었으며 중국의 근현대사를 견증하는 옛상해의 마지막아가씨었다. 엄유운은 절강 녕파의 출신으로 지난 9월 108세 생일을 쇠었다. 다세기를 살아오면서 그녀의 아름다움은 점점 퇴색해가고 있지만 그녀한테 보관되어 있는 몇장의 사진들은 여전히 황홀했던 그제날 그녀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복단대학 교정의 “사랑스런 꽃”  1925년 엄유운은 호강대학(沪江大学)에 입학했다가 2년 뒤에 복단대학 상업학부에 전학, 복단대학의 첫 여대생으로 되었다. 당시 엄유운은 정안사(静安寺)에 거주, 대학과 비교적 먼거리 되는 곳에서 살고 있었다. 그 때 그녀는 자기의 자가용에 앉아 학교로 드나들었다. 집에서 그녀한테 운전기사를 배치했던 것이다. 그 시기 엄유운 역시 차를 몰줄 알았기에 자주 운전기사가 옆에 앉고 그녀가 차를 몰군 하였다. 그 시기 그녀가 모는 자가용의 번호는 “84”번이었다. 이 번호를 두고 당시 어떤 남학생들은 영어 “eighty four”를 상해방언으로 발음하며 “사랑스런 꽃”이라고 하였다. 엄유운은 워낙 생김새가 이뻤으며 거기에 부친 또한 상해 남경로에서 비단옷가게를 운영하였기에 그녀는 아빠의 가게에서 늘 각종 비단옷을 골라 입을 수 있었다. 때문에 당시 엄유운이 매일 바꿔입는 복장은 항상 가장 앞서가는 패션이어서 눈부실 정도였다. “사랑스런 꽃”이란 그녀의 말도 그냥 온 것이 아니었으며 재빨리 복단대학 교정내에 파급되었고 그녀의 사진은 당시 상해의 이름난 잡지의 표지에도 실리게 되었다. 엄유운은 공부에도 아주 큰품을 들였다. 대학에서 그녀는 많은 것을 배웠으며 특히 영어공부에서의 성적이 아주 높았다. 이는 후일 그녀가 외교사업을 함에 있어서의 아주 훌륭한 토대로 되었다. 조부는 “녕파방” 개척의 선구자 엄유운의 가족을 말하자면 그녀의 조부 엄신형부터 시작해야 한다. 엄신형의 고향집은 현재의 상해 강북구 장교가두의 비시촌에 있었는데 이 곳은 당시 엄씨가족의 대본영인 수지산장(寿芝山庄)이 있는 곳이었다. 엄신형은 중국 근현대사에 있어서 매우 이름있는 실업가로서 일찍 항주에서 호설암이 개설한 신원은루(信源银楼)의 비서로 있었고 호설암의 소개로 이홍장한테 추천되어 중용을 받기도 했다. 후에 엄신형은 소금업을 경영하여 많은 재부를 축척하였으며 회화와 서법에서도 큰 재능을 보이었다. 특히 갈대밭 그림을 잘 그리어 소문놓았는데 현재 녕파에는 전문 그의 그림을 연구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엄신형은 주로 민족 공상업과 금융업을 발전시켰다. 1887년 그는 백은 5만냥을 투자하여 녕파만에 중국의 첫 기계타면공장을 세웠고 후에는 상해에 투자하여 밀가루공장과 기름공장을 세웠으며 1902년에는 상해의 첫 상업단체인 상해상업회의공소의 초대총리로 되기도 했다. 녕파시 정협 문사위 특별위원이며 원 상해시 강북구 문사위 책임자였던 사진성 선생에 따르면 엄신형 선생은 다년간 금융업과 공상업을 발전시키는 가운데서 녕파적 인사들을 자기의 주위에 흡입하여서는 “녕파방”을 구성, 낡은 식의 상업망을 근대식 기업가단체로 개조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녕파방”의 개척 선구자였다. 한편 엄신형 선생은 딸 둘과 한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 엄자균은 개명한 상인으로 가업을 진일보 확대하였다. 바로 그런 가정환경속에서 엄유운이 태어나고 자라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와 그녀의 언니들인 엄채운과 엄연운 모두 중국의 제1대로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이었다. 엄유운의 첫 결혼 엄유운과 첫 남편 양광생의 만남은 역시 “사랑스런 꽃”과 연관이 있었다. 양광생 역시 한 상업가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19세기 말에 상해에서 견직업에 종사, 양광생이 처음 엄유운을 볼 때는 그녀가 바로 “사랑스런 꽃” 승용차를 운전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양광생은 일종의 호기심을 갖고 엄유운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모두 같은 모임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 때 양광생은 친구의 소개로 엄유운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열렬하게 그녀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1929년 9월 6일, 엄유운과 양광생은 혼례를 거행, 10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거행된 혼례는 당시 매스컴에서 다투어 보도하는 화제로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찍은 혼례사진이 신문에 발표되자 당시 상해에서는 많은 청년남녀들이 보을 따는 패션으로 되었다. 또한 이 사진은 근 한세기가 지난 오늘에는 여전히 옛상해의 혼례문화를 반영하는 견증자로 되고 있다. 1938년 양광생은 필리핀 주재 중국영사관의 영사로 부임되었다. 그러자 엄유운은 1939년초에 3명의 딸을 데리고 마닐라로 가서 남편과 합류하였다. 당시 총영사의 부인으로서 엄유운은 직접 영사관내의 모든 장식을 설계하고 그 작업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그가 명예주석으로 있는 필리핀 화교부녀협회는 금은장신구를 헌납하는 운동을 발기하여 애국헌금활동을 펼치었으며 전선의 전사들을 위해 100만개에 달하는 구급의료도구를 만들기도 했다. 비록 힘들었지만 남편을 위해 이런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엄유운의 그 나날들은 보람이 있었다. 한대의 피아노로 고통스런 나날을 동반하며 엄유운이 딸들과 함께 귀국한 뒤 1942년 1월 2일, 마닐라가 일제에 의해 함락되고 양광생은 일제에 의해 구금되었으며 그해 4월 17일 양광생과 기타 7명의 중국외교관들은 무참히 살해되었다. 하지만 엄유운은 오랫동안 남편의 생사를 모르고 있다가 1945년 전쟁이 끝난 뒤에야 남편이 일제에 이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일찍 어릴 때부터 세상에 부러운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자랐고 고생이란 거의 겪어보지 못한 엄유운이었건만 돌변된 운명앞에서 그녀는 모든 아픔과 비애를 이겨내는 생활의 강자로 되었다. 그녀는 조난당한 기타 외교관들의 아내들과 함께 야채를 심고 신을 만들었고 울안에는 닭과 돼지도 치면서 생활하였고 세 딸을 키워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줄곧 낙관적인 심태를 유지했으며 마음이 허전할 때면 피아노앞에 앉아 추억의 음악을 치면서 한곡씩 부르기도 하였다. 지금도 엄유운은 당시를 추억하면서 “남편이 없는 상황에서 애들을 살리고 키우려면 용감해질 수밖에 없었으며 생활을 직시하며 살아야 했었다”고 말하군 한다. 두번째 남편 고유균과의 행복한 만년 1959년, 엄유운은 저명한 외교가인 고유균(顾维钧)과 멕시코에서 결혼등록을 하였다. 그해 엄유균은 54세었고 고유균은 71세었다. 고유균과 엄유운의 첫 만남은 1946년 7월 고유균이 주미대사로 지내던 시기었다. 당시 미국으로 간 엄유운은 여권이 만기가 되어 중국대사관으로 찾아갔다가 고유균을 알게 되었고 당시 고유균은 엄유운을 위해 직접 국민정부 외교부에 여권연기 신청을 해주기도 했다. 퇴직후 고유균은 장기간 외국에 있으면서 국제법관으로 지냈고 두 남녀는 오랫동안 서로 떨어져 살아야만 했다. 그 뒤 고유균과 결혼하여 함께 있게 되자 엄유운은 훌륭한 가정주부로, 간호사로 또한 훌륭한 비서의 역할을 하면서 고유균을 돌봐주었으며 매일 아침, 고유균이 기상하면 우유를 풀어주었고 그의 아침식사부터 저녁식사까지 직접 자기가 만든 것으로 대접하군 하였다. 고유균과 엄유운은 26년간 함께 생활, 고유균은 1985년에 타계했는데 향년 97세였다. 생전에 고유균은 자기의 양생심득에 대해 3가지를 담론하면서 “산보, 소식과 부인의 관심”이라고 개괄했다. 향수 치고 하이힐 신는 108세의 노인 “어머니는 올해 108세예요. 어머니는 특별히 흥성한 것을 좋아하거든요. 그리하여 딸들이 매일 어머니에게 활동을 배치해주는거죠.” 이는 엄유운의 둘째딸 양설란이 하는 말이다. 엄유운의 둘째딸 양설란은 올해 77세이고 언니 양뢰맹은 82세었다. 양설란에 따르면 엄유운은 기억력이 좋아 아직도 책을 읽고 마작도 논다고 하며 특히 친구를 사귀기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매일 일기도 쓰는가 하면 이미 미국에서 영어로 쓴 책도 한권 출판했다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엄유운의 전화번호책에는 자주 이용하는 전화번호가 수십개가 있었는데 108세가 되는 노인이 그걸 거의 암송하고 있었다. 또한 수십년래 줄곧 개변하지 않은 습관이 있다면 노인은 아직도 하이힐을 신고 있었으며 향수를 치고 있었다. 엄유운의 세딸 모두 출중한 여인들이었다. 장녀 양뢰맹은 편집원출신으로 “사랑이야기”, “키신져의 회억록” 등 250여권의 책을 출판했으며 일찍 미국 저명한 쌍일출판사의 주필을 맡아한적도 있었다. 차녀 양설란은 기업가로서 일찍 1989년 미국 제너럴모터스사(通用汽车公司)의 유일한 화상 부총재를 지니기도 했었다. 그리고 삼녀 양천은은 한시기 부동산개발을 하면서 명성을 떨치었으나 애석하게도 어머니 먼저 저 세상으로 갔다고 한다. 사진 글 출처 : 신화넷 김철균 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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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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