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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룡 칼럼]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한국 이념논쟁
●김정룡(다가치 포럼 대표) 현시대 유명 정치학자로 손꼽히는 하버드대학교 샤무엘 헌탕턴 교수는 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을 출간했다.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로 반응이 뜨거웠다. 그는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2년 후 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냉전 시대가 종말을 맞았다. 냉전 시대 인간은 대체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진영의 이념에 각각 속해 있었다. 냉전이 종말 된 미래사회에서는 이념이 무의미해졌고 따라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면서 다른 귀속처를 찾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귀속처가 바로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라고 제시하였다. 그가 말한 귀속처는 새로운 문명이 아니라 과거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실제로 탈냉전 후 지구촌의 인간무리들은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에로 재편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중국의 경우 개혁개방 전 해외 화교 화인들 중 고국을 못 마땅해하는 사람들도 개혁개방 이후 즉시 돌아서서 고국에 투자를 서슴지 않았다. 아세아 최고 부자 리카싱(李佳成)이 투자에 나서자 주변에서 ‘사기당하면 어쩌냐?’고 말리자 그는 ‘사기당해도 고향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인데 사기라 생각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벌은 남다른 배포가 있는 법이다. 싱가포르 리콴유(李光曜) 전 총리는 본래 반공자였다가 개혁개방 이후 유교 전도사를 자칭하고 나서 중국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것이 바로 이념을 탈피하여 민족문화에로 회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2008년 북경올림픽 개막식 주제가 공자였는데 이것은 전통문화에로의 회귀를 뜻한다. 1990년 초 동구권에서 있었던 코소보 인종청소 전쟁은 종교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아무튼 세상은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흘러가고 있는 추세이며 이미 새로운 역사 흐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지구촌의 흐름을 역행하는 곳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반도이다. 동서 독일이 통일되고 남북 베트남도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문화로 굴러가고 있다. 오로지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것은 남북한이다. 1990년 베이징아세아게임 때 한국관광객이 대량 백두산투어에 나섰다. 그때 한국여행사 에스코트 00사장이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서 생생하게 맴돌고 있다. “참 세월이 놀랍게 변했어요. 우리가 중국 땅을 밟으면서 백두산 구경을 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현실로 되었어요. 이 추세대로라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남북통일도 10년이면 되지 않겠어요!” 그 후 2000년 김대중 대통령께서 북한을 방문하자 매체들이 ‘10년 안에 통일이 이뤄질 것’처럼 떠들었다. 그런데 그 후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현재 남북통일이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요원해지다못해 요즘은 아주 적대관계가 심각해지고 있는 중이다. “가장 중요한 게 이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전에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시중에서는 모두 뜬금없는 발언이라고 하기도 하고 때아닌 이념타령이라고 공격하기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 발언이 확실히 케케묵은 이념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이게 무슨 시대인데 아직도 이념타령이라니? 역사를 거스르는 행위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요즘 한국 사회는 홍범도 장군의 정체성을 갖고 논쟁 중이다. 양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다. 1943년 홍범도 장군이 사망할 당시에는 침략당한 약소국가들에서 나라마다 민족주의가 우선이지 이념과 사상이 우선 과제가 아니었다. 강대국들도 마찬가지로 이념을 떠나 미국과 소련이 협력하여 반파시스 전쟁에 돌입하였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 이념논쟁을 일으킬 사안이 아니다. 한국 정치는 할 일이 하도 없어서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문제는 왜 윤석열 대통령이 이념을 최대 이슈로 들고나왔는지? 맥락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 일부 진영에서는 아직도 빨갱이타령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 종북좌파타령을 70년 동안 벌여오다가 요즘에는 종북좌파 타령이 질리기도 하고 그 실체도 주목을 받기가 조금 약발이 떨어져 친중좌파 공격으로 방향을 틀고 화살을 돌리고 열을 올리고 있다. 필자는 얼마 전에 한국 지인의 소개로 한국 엘리트들이 참여하고 있는 카톡방에 가입한 적이 있다. 카톡방은 흔히 그렇듯 좋은 정보도 나누고 서로 필요한 교류도 하고 인맥도 넓히고 등등 좋은 점이 많다. 하지만 인간무리에는 취향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 취향이 정치적인 성향이 강하면 골머리가 아파난다. 어느 한 분은 윤석열 대통령을 찬양하는 ‘윤비어천가’를 올렸는데 조선 창시자 이성계를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수령을 찬양하는 ‘어천가’보다 훨씬 뛰어난 솜씨로 현직 대통령을 찬양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을 이렇게 신을 찬양하듯 하는 것을 처음 본다. 일각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을 평가하는 기준이 극명하게 나뉘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문재인은 빨갱이고 북한 간첩이다. 나라를 북한에 팔아 먹는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아무리 좌파 성향을 지닌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설마 나라를 팔아먹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상식을 벗어나 비합리적인 주장을 하면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친미를 확실하게 하면 다른 분야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문재인처럼 나라를 팔아먹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굳건하게 박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을 신을 찬양하듯 하는 행위는 필자와는 하도 상관없는 일이라 개의치 않고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는데 다음 일은 도무지 지나칠 수가 없었다. 기름 개구리를 산 채로 끓는 기름에 넣어 튀기다가 물을 넣고 끓여 먹는다. 한 분은 친중좌파들을 개구리 산 채로 튀겨먹고 끓여먹듯이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으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라는 속담이 있다. “미친 아낙네의 악담보다 더 저질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나가기를 해 버렸다. 종북좌파 타령이나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친중좌파 타령이든 모두 같은 이념타령이다. 이런 이념타령이 시중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고 그 세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대통령의 이념논쟁을 때가 아닌 것이라 하거나 뜬금없는 일이라는 지적은 헛발 짚는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공산주의 빨갱이 타령이 심각한데 진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자가 얼마나 될까? 의문이다. 무엇을 대상을 공격하려면 그 대상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나서 공격해야 마땅하나 한국에서 공산주의 빨갱이 공격은 실체를 모르는 막무내식이어서 안타깝다. tvn방송에 <어쩌다 어른>이라는 강연프로그램이 있다. 몇 년 동안 출연을 가장 많이 했던 최진기 강사가 있었다. 그는 자칭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이다. 액면 그대로 믿기로 하고 그가 이해하고 있는 공산주의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마르크스의 노동 분배 원칙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이다. 최진기 강사는 이 공산주의 핵심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마르크스는 아마 아버지가 돈을 벌 능력이 있고 그 돈을 자녀가 학비로 사용하는 케이스에서 힌트를 얻어 내놓은 이론일 것이다.” 이어서 그는 유명 스타 연예인 강동원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을 어떻게 수요에 의해 분배할 것인가?”고 희죽거리면서 공산주의를 형편없는 애들장난처럼 매도하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만약 공산주의가 최진기 강사의 말처럼 그렇듯 유치한 것이라면 어떻게 지구촌 반 되는 인간무리가 추종했겠는가? 능력에 따라 일한다는 것은 인간이 고도의 의식을 갖추면 타인의 능력과 비교하지 않고 또 타인의 노동기여도와 비교하지 않고 나의 능력껏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사회는 물질이 풍부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되어 불필요한 물질을 탐내지 않고 사치를 탐내지 않는 전제하에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것을 의미한다. 요점은 물질이 풍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실천가능한 원칙이라는 것이다. 빨갱이 뜻은 사상이 빨갛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필자의 부친은 평생 당지서를 맡았는데 사상이 붉다못해 둘째 아들이 휴학하는 해에 참외 밭을 대신해 보게하고는 아들이 생산대 참외를 먹었다고 하여 장부에 가을에 떼어내게 기입해 놓았다고 한다. 필자가 자랄 때 동네 어른들이 늘 저한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너의 부친은 진짜 빨갛다.’는 말을 반복했다. 최진기의 자칭 최고 강사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이 수준이라면 진짜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서강대 00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는 제도로서 실천은 실패했지만 그 이념과 사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존재하고 이직도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있는 이 민족의 현실. 언제 가야 통일되고 하나가 되어 부질없는 다툼에서 벗어날 것인지? 민족의 운명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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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핵폐수 해양 방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는?
● 철 민(논설위원) 한·중·일 해양 안전 문제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였던 일본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처리 문제가 24일 일본 정부의 바다 방류 개시와 더불어 또 새로운 논쟁거리를 몰아오고 있다. 우선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행위를 두고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나라들로는 일본의 이웃 국가들인 중국과 한국(정당과 사회단체 등), 북한 등과 거리가 멀지만, 남태평양 도서국의 반발도 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후쿠시마 오염수가 바다로 흘러들기 시작해서 240일이면 중국 연해에 도착한다며 정부로부터 국민 매 개인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방류 결정을 국제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고 있다. 한편 중국 정부는 일본산 수산물 수입의 전면 중단을 발표하였다. 한국 언론도 한국의 여러 해산물 시장이 거의 텅 비어 있어 어부들은 미래의 생계를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2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제주도 동문어시장에서 20년 넘게 해산물 장사를 해온 한 상인은 “예전에는 오전 10시경과 오후 5∼7시(두 시간대)에 장사가 안될 때도 시장은 붐볐지만, 요즘은 손님이 없는 텅 빈 고속도로”라며 “코로나19 기간에는 장사가 더 잘됐다”라고 우려했고 한국 서부 해안 도시 군산 출신의 한 어민은 “내일 해산물 경매장에 간다고 생각하니 답답하다”라며 “해산물 소비량이 4분의 1로 줄었고 가격도 더 낮아질 것 같다”라고 탄식했다. 부산종합어시장에서는 조기 한 박스가 보통 4만 원 또는 5만 원에 팔리는데, 전국 해산물의 약 30%가 이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번 주 수요일(23일)에는 조기 한 박스가 정상가의 절반 이하로 판매되었으며, 한국인들의 주요 해산물인 멸치는 평소보다 10~20% 정도 가격이 저렴하게 판매되었다. 24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문을 발표하여 일본이 이날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방류를 개시한 것은 지구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면서 핵 오염수 방류계획을 강행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인류에게 핵 재앙을 초래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반인도적 범죄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외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하기로 한 일본의 결정을 알게 된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에 있는 한 비정부기구가 공개적으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으며 또 피지 수바에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시위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은 해외의 국가와 사회단체의 규탄은 물론 일본 자국 내 어민 단체와 국민의 반발을 사고 있다. 특히 1945년 원폭 피해자 후손들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교도통신은 24일 원폭 피해자 후손들로 구성된 일본-전국 원폭 피해자 2세 단체 연락 협의회가 나가사키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후쿠시마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항의했다고 전했다. 이 단체는 원자폭탄의 피해자인 히로시마가 견딜 수 없다며 성명을 발표했고, 이 성명은 총리 관저에 우편으로 발송됐다. 성명은 “원폭 피해자 2세들은 부모들이 방사능 영향으로 고통받는 것을 오랫동안 목격했고, 자신들도 유전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어 건강을 염려하고 있다”라며 “정부와 도쿄전력이 책임을 지고 육상에서 보존·관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외에도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이루다 나열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고도 높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은 국제원자력 기구(IAEA)의 감찰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IAEA의 권위성과 전문성은 인정하지만, 이 기구의 분석과 결론 모두를 믿는 건 아니다. 특히 IAEA 역시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에 대해 명확한 지지 혹은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도 않았다. IAEA 역시 사상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수치나 분석을 통해서는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없은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일이란 시작이나 과정을 통해서는 어떤 결과가 나타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례로 1945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에는 그 위력이 그 정도로 강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자료도 있다. 다음 우리는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더군다나 믿을 수 없다는 추리가 나온다. 일본인을 두고 말하자면 좋게 말하면 “총명하다”하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각도로 말하면 “잔머리를 잘 굴린다” 혹은 “비열하고 간교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은 조선과 중국 그리고 기타 태평양 지역 국가와 지역에 큰 피해를 주었다. 그것도 아주 음융하고 비열하고 잔혹한 수단과 명분 등으로 말이다. 조선 왕조의 명성황후 음해 사건, 중국 대만 강점과 한일 합방 그리고 지난 세기 30~40년대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집할 때는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등 감언리설로 순진한 소녀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1920년대 말의 만주에서의 황구툰(皇姑屯) 사건과 루거우차오(卢沟桥) 사건 등을 분석 조명해보면 당시 일본이 강하다기에 앞서 음흉하고 뻔뻔스럽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시 일본은 한편으로는 미국과 담판함과 아울러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일본을 함부로 믿어서는 큰 코 다친다는 분석도 함께 나온다. 종합적으로 일본을 평가하면 일본인의 겉면을 보면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고 생활이 아주 규칙적으로 보이지만 일본인의 속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겉과 속이 같은 한국인과는 달리, 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중국인과는 달리 또한 거만하지만 우쭐대지는 않는 서양인들과는 달리 일본인한테는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피해국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역대의 독일 총리들과는 정반대로 일본은 오늘 현재도 기나긴 침략 역사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교과서까지 뜯어고치면서 군국주의의 침략사를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두고 각국은 여러 가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중국과는 달리 미국은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한국 정부는 “지지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입장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 두고 일본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속 궁리가 있는가 하면 다른 일종의 전략이 내포되어 있을 수도 있고 한국은 자국민들한테 미칠 손실보다는 일본과 정부 사이의 마찰을 우려하는 듯한 양상이다… 한편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에 대해 지금 과학적이고 안심할 수 있다는 학술적 수치는 있으나 그 영원성을 장담하는 언사는 한 마디도 없다. 어찌 됐든 일본의 핵 오염수는 방류하지 않는 것이 방류하는 것보다는 ‘명지한 선택’이라 보여지며 방류하는 것으로 나쁜 결과가 있을지언정 반대로 좋은 결과는 제로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가령 앞으로 방류 과정에 혹시라도 일본 자국 혹은 주변국들에 피해 사례라도 발생한다면 그때 가서 아무리 미국이나 국제원자력기구라 해도 결코 일본을 위해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일본이라는 이 섬나라의 위망은 일락 천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서기 2023년 8월 24일, 이날은 인류 역사상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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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무주지(無主地)’ 섬이 아니었다.
● 김정룡 (多가치포럼' 대표) 민간속설에 ‘이웃이 먼 사촌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가령 이웃집에서 경사가 생기면 함께 기쁨을 나누고, 안 좋은 일에는 같이 슬픔을 나누고, 급한 일이 생기면 이웃이 가장 먼저 달려와 돕는 등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삶을 영위해온데서 생겨난 속담일 터. 민간백성들의 삶은 대개 이웃끼리 화목한데 비해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구성된 국가의 경우 이웃나라끼리 사이는 그다지 화목하지 못하다. 바다를 사이 두고 이웃으로 살아온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좋은 때도 있었지만 서로 반목하는 일들이 더 많았고 지금까지도 해묵은 갈등들이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는데 그 가운데서 독도의 영유권 문제, 종군위안부 문제, 일본전범기업 강제징용 배상문제 등이 주요 쟁점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가 새로운 갈등으로 부상하여 오랜 갈등들에 얹어져 가뜩이나 썰렁한 냉기를 더욱 차갑게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남아 내려온 갈등도, 새로 생겨나고 있는 갈등도 모두 일본 측의 책임이 크건만 정작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후안무치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아주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느 한 착실한 역사학자의 통계에 의하면 한반도는 서너 차례 모자라는 1천 번의 침략을 당해왔다고 한다. 무려 1천 번이나 침략을 당해왔으나 남을 침략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하니 얼마나 착한 민족인가? 누구인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백의민족은 맞기만 하고 때릴 줄 모르니 선천적으로 DNA에 문제가 있다”고. 아무튼 그 1천 번 가운데서 일본의 침략이 다수였다. 일본은 지진이 많고 태풍이 많기로 지구촌에서도 이름난 곳이다. 게다가 땅이 척박하여 먹을 것이 늘 부족했다. ‘제집’ 내에서 해결책이 안 보이니 눈을 ‘옆집’에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남의 것을 빼앗아오는 약탈행위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가에 왜구의 노략질이 들끓었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곡식도 빼앗고, 옷도 강탈하고, 여자도 납치해가고 등 눈에 보이는 쓸 만한 ‘물건’이면 전부 빠트리지 않고 싹쓸이해갔다. 백의민족의 전통인사말은 ‘무사한가?’인데 그 유래가 바로 빈번한 외침을 당한데서 생겨난 것이다. 일본은 왜구의 노략질도 빈번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차원의 침략도 감행하였고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한반도 식민화였다. 1592년 풍신수길이 발동한 임진왜란이 좋은 근거이다. 명나라 조선 파병 때문에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실패했으나 그 후 결코 한반도 식민화 정책은 포기하지 않았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조선정부는 청나라와 일본을 불러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큰 전쟁을 피하고자 조선정부는 동학농민운동 측과 협상하여 평화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고 청나라 군과 일본군 모두 철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모처럼 좋은 기회를 만난 일본이 철회할 리가 만무했다. 청나라와 군대 철회로 갈등을 빚다가 드디어 무력충돌이 발생하였고 그것이 바로 ‘중일갑오전쟁’이다. 일본을 ‘쌰오르번(小日本)’으로 하찮게 여겨왔던 청나라가 생각 밖으로 일본한테 패배한다. 조선을 청나라 속국에서 벗어나게 하고 ‘독립문’까지 세워준 일본이지만 정작 조선은 독립을 하지 못하고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다. 호랑이가 나간 자리에 승냥이가 들어온 셈이었다. 일본은 강대했던 청나라를 물리쳤으나 또 다른 강대한 적인 러시아와 맞붙어 싸워 이겨야 만주와 조선에서의 이권을 모두 독차지할 수가 있었다. 1904년 일본은 한반도에서 자기네가 마음에 드는 곳에 어디든 군사기지를 세울 권리가 있었다. 러시아와 맞붙으려면 동해바다 섬에 군사기지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하여 일본의 레이더망에 독도가 들어왔다. 1905년 일본은 독도를 ‘무주지(無主地)’라 주장하면서 영토편입을 시도하고 시마네현(島根縣)에 지방고시를 알린다. 남의 나라 땅을 침략하고 그 땅을 ‘무주지’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드는 수법은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을 식민지화 하는 과정에서 활발하게 써 먹었던 수법이었다. 즉 일본이 유럽열강들한테서 배운 것을 조선침략에 활용했다는 뜻이다. 독도는 1905년 전에 과연 ‘무주지’였을까? 아니다. 마찬가지로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에 이르는 곳마다 모두 ‘무주지’ 땅들이었을까? 아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무주지’라 주장하는 것일까? ‘발견자우선주의’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활용했던 것이다. ‘발견자우선주의’의 본뜻은 최초로 발견한 사람들이 소유 우선권이 있다는 의미인데 백인들이 아메리카 땅을 발견하고 개척할 당시 수많은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결코 백인들이 최초의 발견자가 아니다. 분명히 그 땅엔 인디언이라는 주인이 이미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식민지를 개척한 그 땅들에 주인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 전부터 발견하고 삶을 영위해온 원주민들이 거주해왔다. 그렇다면 왜 유럽열강들이 ‘발견자우선주의’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들었을까? 주인이 이미 있었는데 ‘무주지’라 주장하고 거기다 한 술 더 떠 ‘발견자우선주의’를 떠드는 근거는? 유럽열강들은 지구촌 곳곳에 살고 있는 인류 집단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그 땅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3C’ 즉 기독교(Chrisianity), 문명(Civilization), 상업(Commerce)을 통해 식민지 정복을 정당화했다. 1455년 교황 니콜라오5세는 아프리카 서쪽 해안의 영토에 대한 포르투갈의 권리를 승인했다. 최초의 탐험시대부터 이미 그 땅에 인류가 살고 있든 말든 국가가 있든 말든 유럽열강들 중 그 누가 먼저 그 땅에 도착하면 자기네들이 주인이라는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를 적용했던 것이다. 독도는 1905년 이전에 조선의 소유이고 조선이 영유권을 갖고 있다는 역사적인 증거는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산업혁명과 식민지개척 공부에 가장 모범생이었던 일본이 서구열강들이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정당화로 써먹었던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 무기를 휘둘러 독도 영유권을 시마네현에 편입하는 고시를 알리는 수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있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일본 소유로 편입되었던 것들을 바로 잡는 조항에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등 제도들이 조선의 영유권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선의 지리는 육지와 3170 개 섬으로 구성되어 있어 섬마다 일일이 모두 표기할 수가 없었고 그때 독도가 빠져있었던 것을 일본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다. 즉 이것 때문에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한국정부가 독도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군대가 주둔하여 관리하고 있다. 6.25 전쟁 때 한국군 36명의 용사가 독도를 굳건하게 지켜냈고 지금까지도 한국이 독도에 주둔하고 관리하고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존재의 일차적인 이유는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2016년 세월호사건과 지난해 10월 발생했던 이태원참사사건에 전체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정부가 국가의 존재이유를 방기했다는 것이다. 다음 자국의 영토를 지키는 것도 국가존재의 주요 이유이다. 영토를 잃는 것은 안전을 잃어버리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기 때문이다. 한국정부의 독도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으로 명백한 우리 소유의 영토이다. 독도에 대한 영유권 분쟁은 존재하지 않으며 독도는 외교 교섭이나 사법적 해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확고한 영토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어떠한 도발에도 단호하고 엄중하게 대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독도에 대한 우리의 주권을 수호해 나아간다.” 다만 걱정이 하나 있다. 일본정치주류세력인 우익이 줄곧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에 대해 올해만 세 번 한일 양국정상이 만난 자리에서 아무 언급도 없었다. 윤석열 정부의 과거사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는 대일외교방침 때문일까? 일각에서는 이대로 나아간다면 일본이 독도를 완전히 빼앗아가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공동관리 주장을 들고 나오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한다. 독도분쟁은 대한민국의 자존심 문제이다. 자존심을 잃으면 나라의 존재이유가 사라질 만큼 국민의 사기가 저하된다. 그러므로 독도만은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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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전주국제영화제 정준호-민성욱 공동집행위원장 투톱체제 성공을 바라며
독립영화의 요람 전주국제영화제가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로 전환해 정체성 확립과 대중성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지 관심을 받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는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민성욱 부집행위원장과 정준호 영화배우를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의결했고, 지난 26일 조직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은 시장실에서 위촉장을 전달했다. 마력은 동력의 단위로 높을수록 좋다. 이번 쌍두마차 체제가 앞으로 3년 동안 시너지 효과를 일궈낼 것으로 기대된다. 백제예술대학교 방송연예과 교수인 민성욱 신임 공동집행위원장은 전주국제영화제 출범부터 조직위의 사무국장 및 부집행위원장을 역임한 '지킴이'이고, 정준호 신임 집행위원장은 높은 인지도를 가진 대중성을 확보한 영화배우이기 때문. 어떤 조직이나 더 큰 발전과 생존을 위한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시점이 있다. 세계 초일류 전자제품 회사로 대한민국을 빛내는 삼성이 만일 제일제당 시절처럼 사카린을 밀수해 설탕을 팔던 그대로 운영되고 있다면 지금의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 202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는 비경쟁 위주로 실시됐고 올해 2022년 23회 영화제는 국제경쟁, 한국경쟁, 한국단편경쟁, 특별부문(한국 장편 다큐멘터리, 지역공모작품, 비경쟁 아시아 영화)로 진행되며 업그레이드 됐다. 2023년 24회부터 3년간 시행될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기존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보다 더 대중성을 일으켜 더욱 큰 소통을 통해 영화계 발전과 주최지인 전주 지역발전에 더 크게 기여하는 영광이 실현될 지 귀추가 주목된다. 쌍두마차 체제가 된 전주국제영화제는 전주시민의 선택을 받은 우범기 시장이 조직위원장으로 이끄는 마차다. 우 조직위원장이 전주시 발전을 위한 고뇌 끝에 내놓은 묘수라고 풀이된다. 시장은 시민의 행복과 시의 발전을 도모하는 자리기 때문이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에 대해 기대가 큰 반면에 걱정과 반감도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수립되자, 권해효 배우, 방은진·한승룡 감독이 이사직을 사퇴했다. 이사회에서 자신의 의견과 다르게 의결되었다고 사퇴하는 것이 영화제에 대한 진정성일 수도 있지만 무책임하게 보일 수도 있는 지점이다. 고 자니윤(고 윤종승) 코미디언은 2013년 2월28일 해외동포들과 판문점을 방문한 후 가진 뒷풀이에서 "한국 사람들은 너무 똑똑해요.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이XX 안돼, 저XX 안돼 하는거에요. 일을 해보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한국계 코미디언으로 성공하고 그의 인프라를 총동원해 조국 대한민국 관광발전을 위해 기여하고 싶었으나 좌절된데 대한 의견으로 들렸다. 대한민국은 625전쟁 후 폐허에서 일어나 세계 경제 10대 강국이 되었고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나라다. 지난 80년간 대한민국이 변화가 없었다면 우리 국민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억압속에서 지옥살이를 하고 있었을 게 자명하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는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이사회에서 결정된 사안이다. 임기는 3년이다. 3년간 응원하고 3년 후 큰 성공과 발전을 이루면 박수를 치고, 변화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때 가서 비판해도 늦지 않다. 한국언론인연대 박상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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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Z세대 중국에 호감" 중국 호감도 세대별로 다른 원인
●오카다 미츠루(일본 저널리스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7일 방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3년 만에 처음으로 중·일 정상회담을 갖고 악화된 양국 관계를 '재조정'하기 시작했다. 기시다는 대중 관계 개선에서 반중 여론과 대중 강경 자민당 우파의 제약을 받고 있지만 반중 여론을 거론하면 일본의 Z세대(18~29세)의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40% 이상으로 다른 연령층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Z세대의 정치적 의지가 선거의 키를 쥐고 있는 세계적 흐름을 보면 '반중 여론'과 '우파'에만 의존하는 기시다 외교가 위태롭다. 45분 동안 진행된 이번 일-중 정상회담은 3시간여에 걸친 중-미 정상회담에 비해 일본의 대중국 중요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일·중 정상은 회담에서 국방부 해상 및 항공 연락 메커니즘의 직통 전화선 조기 개통, 새로운 중일 고위급 경제 대화의 조기 개최, 새로운 중일 고위급 문화교류 협의 메커니즘 회의 조기 개최 등 몇 가지 공감대를 형성했다. 향후 중일관계 개선의 지표 중 하나로 정상 간 상호 방문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시다 총리의 대중 관계 개선의 한 가지 저항은 '반중(反中)' 여론 고조다. 일본의 대중(對中) 인식 악화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각부가 매년 발표하는 '외교에 관한 여론조사'에는 흥미로운 수치가 나온다. 예를 들어 지난 1월 발표된 조사에서 응답자의 20.66%가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지난해보다 1.4% 증가)고 답했다.그러나 연령별로는 Z세대 중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는 비율이 41.6%로 전체보다 배 이상 많았다. 60~69세 13.4%, 70세 이상 13.2%에 비해 Z세대는 중국에 대한 친근감이 높다. 그렇다면 왜 연령대에 따라 중국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싶다. 나는 젊었을 때(저자는 1948년생) 중국의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심을 갖고 있었고,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속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중국이라는 '타자' 위에 자신의 생각을 투영해 기대를 부풀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이나 구미의 통치체계를 중국의 정치와 사회에 투영해 일본이나 구미의 기준으로 중국을 관찰하고 판단한다. 요즘 60~70대 일본인들이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다. 그러나 Z세대는 생각이 다르다. 내가 가르친 대학생의 경우 태어나기도 전에 일본 경제가 침체에 빠졌고,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기를 경험하지 못했다. 이들이 철들었을 때 중국은 이미 미국을 추격하는 대국이 됐고 IT 기술에서 일본을 앞섰으며 애니메이션과 게임 품질에서도 일본을 추월하고 있다. 또 Z세대가 다니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많은 곳에서 중국 유학생과 접촉할 기회가 종종 있다. 다시 말해 Z세대는 중국을 일종의 '대등한'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환상은 없다.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가 사회의 버팀목이 될 때 일본인 전체의 대중국 관념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쇠락이라는 역사적 변화, '탈아입구((脫亞入歐)'의식을 심리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대가 '2선 후퇴'하면 일본의 '반중' 여론도 달라질 것이다. 기시다 정권도 언제까지 반중 익찬 여론에 의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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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민주주의의 성공 비결
●송첸/중국 리즈 트러스(Liz Truss) 영국 총리가 집권 44일 만에 사임하고 리시 수낙(Rish Sunak) 총리가 두 달 만에 보수당 내 세 번째 총리로 취임한 것은 영국식 민주주의가 정치적 안정을 담보하기에는 무능함을 보여준다. 미국식 민주주의도 마찬가지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 서방 민주주의는 정당 정치에 기반한 부자들을 위한 클럽이다. 서방 정치의 주장은 풀뿌리들이 국가의 지도자가 아니라 의회에서 대표자를 선출하기 위해 투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권자들이 정부 정책에 대해 항의할 수 있지만 정치인들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느라 너무 바쁘기 때문에 그러한 항의가 귀에 들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트러스의 몰락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낙수 경제"를 기대하면서 수백만 파운드의 기업과 개인에 대한 세금 부담을 낮추려는 그녀의 계획으로 인해 발생했다. 그러나 비평가들은 그 계획이 부자는 더 부자가 되도록 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깊은 빈곤으로 몰아넣는다고 비난했다. 미국에서 최고 정치인(낸시 펠로시 하원의장 포함)은 백만장자이다. 빈곤율 11.7%는 세계 평균인 10.1%보다 높지만, 이들은 국민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돈을 찍어내며 세계 곳곳에서 불필요하고 부당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마약 중독과 총기 난사도 정부가 국내 정책보다 대외 정책에 집중하기 때문에 골칫거리다. 반면 중국은 절대빈곤을 근절한 유일한 주요국이다. 14억 인구의 삶의 질을 향상시켰다. 이를 통해 토지 개발, 교통 연결성, 수력 발전소를 통한 청정에너지 생성 등 생활 환경도 개선했다. 중국은 또한 인터넷 서비스가 가장 외진 마을에도 도달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이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의 결과이다. 서방에서 정치는 국민의 복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 현 정부가 하거나 제안하는 모든 것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권력에서 생존하거나 권력을 얻는 것에 관한 것이다. 서방의 민주주의는 혼돈 속의 권력이다. 중국의 민주주의는 법이나 조치를 확정하기 전에 풀뿌리를 포함한 사회 각계각층의 의견을 고려하는 인민의 힘이다. 서방이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18세에 도달한 모든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이 투표권과 피선거권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타운 및 카운티 수준에서 대표자를 선출하기 위해 투표할 수 있다. 그리고 시민에 의해 선출된 지방 인민대표대회 대표는 투표를 통해 더 높은 수준의 대표를 선출한다. 이는 영국, 미국 및 기타 서방 국가의 민주적 투표 시스템과 어느 정도 유사하다. 자격이 있는 유권자들이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그 의원이 해당 국가의 지도부를 선출하는 방식이다. 중국에서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 "인민이 스스로 통치한다"로 번역되는 민주다. 중국은 이처럼 크고 다양한 국가이기 때문에 소수 민족 간의 투표도 허용한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이 제도를 사람 최우선으로 하고 책임감 있는 시민으로 만들고 좋은 거버넌스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돕는 제도라고 설명했다. 중국의 정책 결정은 서방처럼 정치인에만 국한되지 않고 풀뿌리 국민도 포함한다. 국가 최고 정치 자문기구인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는 의사결정과 문제해결에 있어 폭넓은 협의를 주창함으로써 중국 사회주의 민주주의의 특징과 장점을 충분히 보여준다. 학술 연구에 따르면 공개 협의를 통해 수립된 정책 선택은 여론과 밀접하게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광범위한 공개 협의로 인해 중국의 정책 변경은 위에서 아래로, 지역, 성, 시, 진 및 촌에 이르기까지 긴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은 개인의 생각과 필요를 반영하며 정치인의 아이디어와 결정이 우세한 서구에서 볼 수 있는 정치적 또는 조직적 투입 때문에 방해받지 않는다. 현대 기술의 출현으로 중국 정부는 시민들에게 법률 및 규정 초안에 대해 피드백을 제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수단으로 온라인 상담을 점점 더 많이 활용하고 있다. 실제로 온라인 상담은 거버넌스 개혁의 도구가 되었으며 정치협상회의는 이를 대중적 지지를 육성하는 수단으로 수용했다. 시진핑 주석의 말처럼 정치협상회의는 중국 공산당이 만든 위대한 정치 협상제도이다. 사회주의 협상 민주주의를 추진하기 위해 당파, 인민단체, 민족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을 포괄한다. 주 : 본문의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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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강술래는 야합(野合)의 축제였다
한국국어사전은 강강술래와 강강수월래를 같은 말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강강술래는 한문 표기가 없고 강강수월래를 한문으로 ‘强羌水越來’로 표기하고 있다. 强은 강하다는 뜻이고, 羌(중국서부에서 양을 토템으로 삼은 민족이며 세력이 강해 늘 중원을 위협하여 한족정권은 그들을 오랑캐로 취급해왔음)은 오랑캐라는 의미이다. ‘强羌水越來’는 강한 오랑캐가 물을 건너온다는 뜻이다. 필자는 한국국어학자 어르신들에게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즉 강강술래는 수천 년 동안 지속되어온 민속인데 강한 오랑캐가 물을 건너오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아무런 연관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는 걸까? 답이 아닌 답이 하나 있긴 하다. 국어학자들이 강강술래를 한문으로 표기할 방법을 찾지 못해 본래 4음절인 강강술래를 음악의 필요에 따라 5음절로 늘린 강강수월래를 말도 안 되는 ‘强羌水越來’로 표기했을 것이다. 이런 억지춘향 표기현상을 가리켜 사자성어로 견강부회(牽强附會)라고 말한다. 강강술래를 ‘强羌水越來’로 표기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설명하려면 먼저 강강술래의 어원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강강은 본래 감감이다. 감은 감다, 감돌다 등등의 의미이며 감감은 감의 강조이다. 강강술래는 원을 그리며 빙빙 돌아가는 놀이이기 때문에 본래 감감술래였다. 감감술래가 세월이 흐름에 따라 강강술래로 변음 되었던 것이다. 술래는 가운데서 눈에 띠를 두르고 숨은 자를 찾아내는 자를 일컫는 말이다. 한국국어학자들은 술래가 한자어인 순라(巡邏)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데 글쎄 썩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강강술래의 어원을 살펴보았으니 이번에는 강강술래란 도대체 어떤 놀이인지? 알아보자. 강강술래는 본래 순수 우리말이고 그 뜻은 원무를 의미한다는 데 포커스를 맞추고 유래를 찾아야 한다. 원무는 고대사회에 수많은 민족들이 보편적으로 추었던 춤이다.『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에서 저자는 원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영지주의자 예수는 미스테리아 입문식에서 원무를 이용하여 제자들을 이끈다. 그러한 입문식 춤은 이교도 미스테리아 의식에서 두루 나타나는 것이다.” 현대의 한 권위자는 이렇게 말했다. “고대입문식 축제 가운데 춤이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엘리우시스에서의 미스테리아 의식에서 입문식 후보자는 중심에 자리 잡고, 다른 사람들은 둘레에서 춤을 추었다. 그것은 행성과 별들의 궤도를 흉내 낸 것이었다. 미트라스 미스테리아의 의식에서도 미트라스를 상징하는 입문자는 중앙에 자리 잡고, 황도의 12궁을 상징하는 12명이 주위를 돌며 춤을 추었다. <요한행전>에서도 그와 비슷하게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춤을 춘다. 예수가 신호를 보내면 사도들이 신성한 말 ‘아멘’을 읊조린다. 예수는 이러한 ‘원무’를 통해서 ‘수난’을 나타낸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것을 예수는 ‘신성한 비밀’이라고 부르도록 했다. 원무는 고대사회에 있어서 보편적인 춤이었으나, 그 형식과 내용 및 목적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위의 글에서는 원무가 이교도 입문식과 예수라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의 원무가 행성과 별의 궤도를 흉내 낸 데서 유래되었다면 동양의 원무는 달을 흉내 낸 데서 유래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달을 흉내 내는 원무를 추는 것을 도월(跳月)놀이라 한다. 민속학자 임동권(任東權) 씨는 고대인들의 도월놀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원시시대에 있어서는 달을 중심으로 하여 행사가 많았다. 상원과 추석이 그러했고 달 밝은 밤이면 모두 모여 유희를 즐긴 것은 우리 조상만이 아니고 지금도 미개사회사회에서는 모두 그렇다. 따라서 옛날 1년 중에서 가장 달 밝은 한가윗날 마을의 소녀나 부인들이 모여 만월과 같은 둥근 원을 그리면서 놀이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때에 노래도 부르며 뛰기도 했을 것이니 강강술래가 임진왜란 때에 비로소 창안된 것이 아니고 그 이전에도 민족전래의 유희로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강강술래처럼 대대적인 것은 아니나 달밤에 소녀나 소년들이 손을 잡고 뛰며 노는 유희는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그러한 뜻으로 강강술래를 보면 문헌고증을 할 수 없어서 그렇지 함화진(咸和鎭) 씨가 추상한 것처럼 마한 때의 민족유희였을지도 모르며 마한이 아닐지라도 백제 또는 고려시대에 이미 전파되었던 놀이인지도 모르겠다.” 중국소수민족문헌인『묘속기(苗俗記)』에 도월놀이에 관한 기사가 있는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른 봄에 남녀가 들판에 모여 배우자를 찾는 것을 이름 지어 ‘도월(跳月)’이라 한다. 정월 초 3일부터 13일까지 모두 도월놀이 기간이다. 13일 도월놀이가 끝나면 남자는 갈대피리를 불면서 앞장서고 여자가 띠를 끌고 뒤따르며 장내를 세 바퀴 돌고나서 손잡고 대나무숲속에 들어가 먼저 야합하는 바, 이름 지어 ‘라양(拉陽)이라 부른다. 그러고 나서 임신되면 시집가고 임신이 안 되면 이듬해에 또 반복해서 도월놀이에 참여한다. 『귀주통지(貴州通志)』에도 위의 기사와 비슷한 내용이 적혀 있다. “화묘(花苗), 매년 이른 봄에 남녀가 들판에 모이는 것을 ‘도월’이라 부른다. 평평한 곳(平壤)을 택해서 월장(月場)으로 삼는다. 남자가 갈대피리를 불고 여자가 방울을 울리며 빙빙 돌면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면서 하루 종일 즐긴다. 날이 어두워지면 남녀가 서로 짝을 지어 갔다가 날이 밝으면 헤어진다.” “백묘(白苗), 도월놀이 풍습이 화묘와 같다.” 우리는 전라남도 남해안 여러 지방의 강강술래도 역시 묘의 제족(苗之諸族)과 같은 순수한 도월놀이였으며 따라서 강강술래도 역시 청춘남녀들이 야합을 목적으로 한 놀이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인은 야합을 음란행위로 간주하지만 고대인에게 있어서 야합이야말로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는 신성한 의무라고 여겼을 것이다. 중국 유명 학자 이중탠 교수는 이것을 ‘이른 새벽 모닥불 축제’라고 표현한다. 중국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위대한 공자님도 그의 부모가 매신을 제사하는 모임에서 만나 야합해서 탄생되었다고 한다. 『조선의 향토오락』에 의하면, 강강술래는 주로 상원과 추석, 즉 만월 시에 진행했다고 한다. 왜 강강술래놀이는 만월 시에 했을까? 중국신화연구자들에 의하면, 달은 여성의 생래규칙과 닮았다고 한다. 달이 이지러지고 차는 것은 여성의 임신현상과 닮았고, 또 여성의 월경주기는 달의 주기와 같다고 한다. 월경, 월신(月信), 월수라고 부르는 것은 달의 규칙과 같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달 속에는 생식을 주관하는 월정(月精)이 있는바, 개구리의 화신인 상아(常娥)가 곧 월정이라고 한다. 만월 시의 달의 모양이 아름다운 것은 달 속에 아름다운 상아가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며, 따라서 상아의 ‘출현’은 곧 인간의 생식을 관장하고 또 인간의 생식력을 왕성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강강술래가 만월 시에 진행된 것은 곧 고대인의 생식숭배의식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강강술래 참여자들이 본래 소년 소녀들이었다가 여자의 중심으로 된 것은 후대에 내려오면서 유교문화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두어 말하자면 강강술래는 순수한 우리말이며 원무를 뜻하며 원무는 곧 도월놀이며 도월놀이는 곧 남녀야합의 놀이었다. 후대에 내려오면서 소위 학자라는 어르신들이 영웅주의사상, 한문숭배사상, 유교사상의 덫에 걸려든 탓에 강강술래의 본래의 모습을 말살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는 고대문화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우리민족의 비극이다. 풍류인물이였던 세종대왕이 박연(朴堧)에게 고대로부터 내려온 민속을 채집하여 정리할 것을 부탁해 성과가 있었다. 하지만 유생들이 그 귀중한 자료들을 전부 화롯불에 던져버렸다. 결과 오늘날 선조들의 수많은 풍부한 민속 문헌고증이 차단되었다. 그리고 한국인은 다재다난(多災多難) 했던 민족이어서 고유한 민속을 영웅주의에 덧씌워 풀이하다보니 역사가 유구했던 민속의 상한선을 기껏해야 임진왜란시기에 꿰맞추는 경향이 짙다. 이를테면 전라남도 남해안 일대 여러 지방의 고유민속인 강강술래를 임진왜란시기 의병술에 능하고 전쟁에 공이 많았던 이순신 장군이 창안해낸 것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후세인들이 강강술래놀이를 하는 것은 이순신 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한 행사라고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민속학자인 임동권 씨는 1960년대 두 차례나 전라남도 여러 지방을 현지답사 하였는바, 현지고로들은 강강술래를 이순신 장군에 의해 창안되었다고 믿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김창호(金昌浩), 어석경(魚錫經) 등 학자들도 현지고로들의 말을 믿고 역시 그렇다고 주장했다. 한 가지 미묘한 것은 강강술래의 전파지가 전라남도 남해안 일대로서 이순신 장군의 전적지와 맞물린다는 것이다. 허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강강술래는 그 상한선이 마한 혹은 더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결코 이순신 장군이 창안해낸 것이 아니고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한 놀이도 아니다. 다만 한 가지 가능성이 있다면 이순신 장군이 고유한 민속놀이를 의병술에 이용했을 것이다. 필자는 이주민의 한 사람으로서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법무부 귀화시험 교재에 역시 강강술래를 이순신 장군이 창안한 것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이 될 이주민들한테 잘못된 역사교육을 시키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한국사회는 쩍하면 중국과 일본을 향해 역사왜곡을 하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하고 있는데 자기네들 역사를 자기네들이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으니 얼마나 비극적인가? 김정룡 '多가치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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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 “50년”을 이야기한다
● 이 성 (By Star Lee) 오늘은 한중수교 30주년이다. 과거의 30년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愛恨情仇(사랑, 원망, 정, 원한)이 뒤섞인 두 연인 간의 멜로드라마와 같았다. 한 때는 서먹서먹했던 맛선 본 선남선녀처럼, 한 때는 애정행각이 지나쳐 주변사람들이 눈쌀을 찌프렸던 연인처럼, 또 한 때는 서로간의 오해와 불만으로 사랑이 식어가며 냉정의 시간을 갖고자 하는 커플처럼…. 어느 중국의 외교관이 사석에서 이런 농담을 하였다고 한다. 한국은 중국에 있어 매력적인 애인과도 같아 항상 그립고 가슴이 설레이지만 저 북방에 사는 본처를 생각하면 가까워지기에는 부담스럽고 떨어지려니 애간장이 탄다고 한다. 조금 불편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그것이 양국간의 애뜻하고 불편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필자는 한국에서 수십년, 중국에서 수십년 살아오면서 ‘한중수교’라는 멜로 드라마를 본방사수하면서 지켜봤던 사람으로 각별한 애착과 소감이 있다. 열혈 팬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평범한 서민의 시각에서 한중간의 과거 30년 미래 20년을 논하고자 한다. 제1화 1992~2002 연모의 시대 30년전 한중수교가 이뤄졌다. 양국 대중에 있어 40년전 전쟁을 했던 ‘적대국가’, 서로 정체성마저 부정했던 ‘괴뢰정부’와 수교한다는 것은 조금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서먹함과 생소함을 덜하게 했던 것은 88 서울 올림픽과 90 북경 아시안게임이였다. 그 당시에 한중수교가 중국인에 가져다준 가장 큰 변화는 경제도 아니고 문화도 아니였다…스포츠 경기에서 국가명칭이 남조선이 대한민국으로 바뀌였고 중공이 중국으로 바뀌였던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의 신북방정책에 힘입어 중국동포들의 한국 친지방문이 한중교류의 물꼬를 텄으며 뒤따라 한국 제조업 기업의 중국진출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동남아국가에 진출하려면 상당히 많은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극복해야 했지만 중국에서 수십년간 정착한 동포들은 한국기업의 중국 진출에 있어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말이 안통해도 현지에서 동포통역, 동포직원을 채용하면 모든 일이 다 순리롭게 풀릴것만 같았고 10억인구 상대로 한사람당 1원만 벌어도 10억원이 벌어진다는 차이나 드림에 벅차 북경, 상하이, 산동성, 요녕성, 강소성, 광동성 등 지역에 줄기차게 태극기를 꽂았다. 시험을 거치지 않고 빽으로 명문대에 입학한 학생이 잔혹한 대학생활을 맞이하게 되는 것처럼…중국진출의 열정과 자신감은 냉혹한 현실속에서 좌절하기 시작하였다. 세계의 역사를 보면 어느 나라도 신하나 내시에게만 의지하는 성군이 없었던 것처럼 언어가 통한다는 이유로 현지 동포직원에게 과도하게 의지하면서 구매관리, 고객관리, 직원관리를 소홀히 하며 많은 기업들의 경영이 난관에 부딪치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는 일부 실패의 요인에만 불과하다. 20년전 어느 삼성출신 중국 주재원이 쓴 책을 본적이 있다..중국에서 실패하지 않는 비법 중에서 1위가 중국여인과 거리를 두라는 것이다. 주색을 삼가라는 말이 당연해 보이지만 이 역시 그 시기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의 수준을 여실히 들어냈다. 결국 21세기에 들어서서 많은 제조업기업들이 중국을 탈출(심지어 야반도주)하게 되면서 중국 제조업 진출의 열풍은 서서히 저물어갔다. 이로서 제조업이 테마를 이루던 한중간의 사랑 드라마 1화는 막을 내리며 다음의 10년을 그리는 새로운 막이 열렸다. 제2화 2002~2012 동거의 시대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제조업의 중국 정복은 순탄하지 않았지만 한중관계는 갈수록 돈독해졌다. 조심스럽게 상대방을 알아가면서 사랑의 싹을 틔우던 연인은 이제 동거를 하기 시작한 것과 같았다.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10년간의 하드웨어 교류의 시대를 넘어 소프트웨어 교류의 시대가 막을 올렸다. 이때부터 한국음식, 한국문화, 한국패션이 본격적으로 중국에서 대중화되기 시작하였다. 한국 드라마, 한국 음악이 중국에서 서서히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중국보다 더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한국은 중국인이 흠모하는 나라가 되였다. 젊은 층은 한국 현대문화의 모든 것을 따라하고 싶어했으며 우호적인 외교관계도 한중양국 국민감정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북경 올림픽 전까지만 해도 경제력이 3~4위에 불과하던 중국이 미래 G2 가 될 것이라는 예측을 과대평가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때만 해도 중국은 일인당 GDP가 3000달러 조금 넘는 빈국이였고 국민들에 있어 국가가 부강해진다는 기대감만 있을 뿐 미국을 도전할 수 있는 초강대 국으로 성장할 것이란 자신감은 아직 턱없이 부족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한국 학생의 중국유학 붐은 최고조에 달았으며 21세기 초반 월드컵 진출, 올림픽 유치, WTO진입 3대호재가 터지면서 “중국이 미래다”라는 여론이 세상을 뒤덮으며 한국 내 중국어 교육기관들은 최대의 호황을 누렸었다. 북경의 HSK학원에는 한국인 수강자들로 북적였으며 모든 중국의 대학교에는 한국인 유학생이 항상 1위를 차지하였다. 중국인의 해외관광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늘어나면서 한국방문 관광객이 100만명을 돌파하기 시작하였고 재한 화교들은 중국과의 혈연적인 연고를 무기로 내세워 중국인 인바운드 여행과 쇼핑을 거의 독식하다시피 하면서 한중 관광산업의 새 시대를 열어갔다. 이 시기는 한중간의 관계가 가장 안정적인 시기였으며 외교관계, 문화교류, 경제교류 모든 면에서 엄청난 변화와 성장을 가져왔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동거를 겪으면서 서로 간의 단점들이 속속히 들어나면서 한중관계는 새로운 양상을 맞이하기 시작하였다. 제3화 2012~2022 모순의 시대 20년간의 동거동락을 겪으며 한중관계는 새로운 시기에 접어들기 시작하였다. 한국에서의 중국열풍도 만만치 않겠지만 중국에서의 한류는 최고조에 달하며 주변국가의 질투를 살 정도로 뜨거웠다. 외교관계 같은 정치적인 요소를 떠나서 대중문화적인 영향력을 봤을 때 한국을 10으로 보면, 미국이 7, 일본은 4, 기타국가 합치면 3이였다. 이때가 한중 양국은 과거 수천년 교류 역사상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 시기였을 것이다. 지난 역사상 한중관계 가장 가까웠던 시기는 아마 명나라 때였다. 明史를 보면 그때의 한중관계를 이렇게 평가했다 “他國不敢望也”(다른 나라가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밀접했다). 21세기에 들어서 한중관계가 바로 이렇게 “타국불감망야”가 된 것이다. 그러나 중국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物極必反(어떤 사물이든간에 도가 지나치면 그 반대로 바뀐다) 한중관계는 지나친 열정시기를 겪으며 결국 그 반대로 돌변하게 된 것이다. 한중관계는 정치인들과 경제인들만의 파티가 아니라 대중 속에 그 뿌리가 있다. 한중관계의 밀접함은 대중문화에서 여실히 반영 되였다. 중국의 방송을 켜보면 10대 예능프르그램 중 8개 한국 프로그램 포맷을 번안한 것이였다. 한국에서 인기있는 무한도전, 나는 가수다, 복면가왕, 진짜 사나이, 아빠 어디가, 슈퍼맨이 돌아온다, 런닝맨, 히든싱어 모두 중국에서 그 모조품을 볼 수 있었다. (물론 단순 도용이 아니라 대부분 저작권료를 주고 사들인 것이였다) 저자는 이런 광경을 목격하며…드디어 올 것이 온다는 안좋은 예감이 들었다. 한국 방송에서 중국의 예능 포맷이 80% 차지하고 중국 연예인이 한국 드라마 주연들을 독식한다면 한국 국민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결과는 뻔하다…엄청난 후폭풍이 휘몰아치게 되는 것이다...그러한 전략적인 타산이 없이 2020년 마스크 붐 때 너도나도 마스크 사업하듯이 중국의 방송사들은 무분별하게 한국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결국 경착륙이란 국면을 맞이하게 되였다.. 사드사태는 다들 아는 내용이니 여기서 거론안하겠지만. 사드를 빌미로 행해진 한한령은 사드라는 계기를 이용했을 뿐이지 절대로 사드만이 불러온 결과가 아니라고 본다. 외국의 문화가 본국의 문화 발전공간을 무참히 짓밟고 본국 문화의 생존토양을 파괴했을 때는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전세계 어느 문화도 한류가 중국에 끼친 영향처럼 큰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아무리 미국이 문화 선진국이라고 해도 영국과 멕시코의 문화를 이처럼 송두리째로 바뀌지는 못했지만 이 밀월기의 한국은 중국에서 그런 것을 이뤄냈다. 이는 칭찬이 아니다…오늘날의 국면을 자초한 도화선이라고 본다. 2016년 6월까지만 해도 태양의 후예를 정점으로 한류는 중국을 점령하면서 문화 식민지를 확장해 나갔다. 그러나 이 과열된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바로 ‘사드’가 그 ‘총알받이’가 된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2016년 7월 사드배치를 발표하면서 중국 정부에 한류를 경착륙시킬 명분을 주었다. 과도한 한류의‘횡포’를 지켜보던 중국 정부는 사드 사태에 대한 1차 타격목표로 한류 문화를 지목하게 되었다. 한중경제교류에 있어 한국문화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중국의 젊은 세대에 미치는 영향은 간과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음으로 부득이 손을 보게 된 것이라고 중국국내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한한령의 실시가 6년 지나면서 중국은 자국문화가 빼앗긴 고지를 되찾으며 포스트 한류시대 중국 본국 문화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주식시장에 청소부 법칙이란 재미있는 룰이 있다. 즉 모 주식을 청소부마저 관심가지고 샀을 땐 그 주식을 과감히 매각해야 한다는 것이다…즉 과열은 과냉을 초래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세번째 10년은 한중관계가 파란만장한 애정 스토리를 전개하는 과정이다. 곧 결혼을 할 것처럼 뜨겁게 사랑하다가 상대방의 단점이 하나 둘씩 보이고 거기에다 양가 부모의 반대, 주변인들의 험담, 자기 정체성의 약화를 겪으며 과연 이런 사랑이 진정으로 행복한지를 느끼게 하는 고비를 겪게 된다. 그 전환점이 사드라는 돌발사태로 인해 발생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계기일뿐 예고된 결과라고 말하고 싶다. 한중관계는 지나칠 정도로 뜨거웠던 것이 문제라고 본다…중국이 소위 혈맹이나 전통우방국가라고 이야기하는 북한, 파키스탄, 라오스 등 국가와의 관계를 보면 한국처럼 가깝게 지낸 적이 없다. 물론 이는 한국의 문화적인 선진성에서 유래되었지만 이러한 과도 밀접한 관계는 서로 간의 기대를 지나치게 부풀리게 되고 판단을 흐트리게 되며 상대방과의 문화적인 차이, 제도적인 차이를 약화시키다가 특정 시기에 특정 계기로 그 모순이 폭발하게 된 것이다. 사드는 한국의 친중파를 피말리고 씨말리게 만들었으며 중국의 민심을 한순간에 떠나게 만들었다. 또한 한국국민도 덩달아 중국을 불신하기 시작하였으며 중국과의 사랑이 결혼대상자에서 그냥 친구로라도 지냈으면 좋겠다는 관계로 강등하게 되었다. 제4화 2022~2032 냉정의 시대 올해가 한중 두 국가의 멜로드라마가 방영 된지 30주년을 맞이하는 시기이다. 공자님은 30이립(三十而立)이라고 이야기하였는데 군자는 서른살이 되면 가정을 이루고 철이 들 때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30년전 경제적으로 막상막하하던 중국은 이젠 어느덧 한국 경제력의 10배가 된 G2국가가 되었고 중국과 수교하면 큰 이득이 생길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이젠 국운을 좌우지할 만큼 중요한 국가관계로 부상하게 되였다. 중국의 속담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三十年河東,三十年河西(삼십년은 하동에서 삼십년은 하서에서). 이제 한중관계는 30년간의 사랑과 원망을 겪으며 성숙된 어른이 된 것이라 본다. 또한 한중관계라는 고정적인 패턴도 이젠 30년의 역사를 겪으며 새로운 30년을 맞이하게 된다. 미래의 한중관계는 어떻게 변모할 것인가? 이 글에서 필자는 단순히 한중관계 과거 30년을 돌이켜 보는 것뿐만 아니라 미래 20년간 한중관계에 대해서도 전망을 적고자 한다. 30년전 한중 수교당시 한국은 미국의 눈치를 볼 필요없이 자유롭게 중국과의 관계를 정립할 수 있었지만 어느덧 미국과 대등한 체격으로 성장한 중국이 미국의 최대 경쟁자가 되면서 한중관계에 있어 새로운 변수로 등장하게 되었다. 현재 한중관계는 항상 미중관계, 한미관계라는 변수들을 고려해가면서 대응해나가는 관계로 변모되면서 한국 정부에게 새로운 숙제를 마련하였다. 한중관계의 30년은 사실 두 연인이 맞선을 보면서부터 사랑에 빠지고 동거하고 서로 의심하고 관계가 나빠지는 식상한 멜로드라마의 스토리를 연출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파혼하게 된 것이다. 앞으로 다시 관계가 좋아질 수 있을까라는 시청자들의 궁금증이 많겠지만 필자는 이제는 과거로 돌아가기 어렵다고 본다…사드문제가 해결되고 양국 국민의 감정이 회복되었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10대부터 시작하여 20대를 겪으며 철없이 사랑에 푹 빠져 정신 못차리던 시기를 넘어서 이젠 성숙해졌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한중양국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서로 다른 가문에서 태어난 연인으로 사랑을 이루기엔 너무나 많은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 어찌보면 양국의 관계라는 것은 무거운 결혼보다 서로 애뜻한 정을 주고받는 애인관계가 더 아름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핀란드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어떻게 스웨덴을 평가하냐고 물으니 핀란드 남자는 스웨덴 남자들은 대부분 게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필자가 핀란드 사람은.스웨덴 사람을 좋아하지 않은 것이냐 따지니 하는 말이 “사이좋은 이웃국가가 없잖아요”라고 대답했다. 정말 그런 것인가? 중국의 주변국가 중 중국을 좋아하는 나라는 몇이 되는가? 또한 한국의 이웃국가 중 한국을 좋아하는 나라는 얼마인가? 아마 답은 머리 속에 떠올랐을 것이다. 강대국 속에서 생존과 발존을 모색하는 상황은 21세기 20년대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국왕조의 전환기에 한반도 왕국이 항상 겪던 일이였다. 한나라와 흉노를 사이 둔 고구려, 고구려와 당나라를 사이 둔 신라, 거란과 송나라를 사이 둔 고려, 원나라와 명나라를 사이 둔 조선, 청나라와 명나라를 사이둔, 조선 고비마다 지혜롭게 강대국 사이에서 생존전략을 모색하며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 사직을 지킨 한반도의 왕국은 이 시대의 미중 양국의 경쟁구도 속에서 슬기롭게 난관을 이겨낼 것이라고 본다. 물론 그 과정이 험난하고 고달프고 마음이 힘들어도 말이다. 그것이 이 반도의 동포들이 회피하기 힘든 숙명일 수 있겠지만 그런 고난 속에서 더 강인해지고 똑똑해지는 법이다…그러한 차원에서 한반도는 중국왕조보다 더 강한 생명력을 가졌었다. 이 10년은 중국이 미국을 초월하여 세계 최대 경제강국으로 부상하는 시기일 것이다. 물론 PPP방식으로는 10년전에 이미 미국을 초과하였지만 허영심이 강한 백인은 실질보다 명목을 더 중요시한다. 그래서 올림픽에서도 자신에게 유리할때는 금메달로 순위 매기지 않고 메달수로 순위를 매긴다. 미쏘 갈등은 백인 내부 이데올로기적인 모순에 불과하다면 미중 갈등은 문명의 시프트를 상징함으로 엄청 신경쓰고 있는 것이다..문제는 이러한 동양 문명의 시프트가 10년 안에 이뤄질 것 같은 두려움에 빠지면서 오늘날의 국제관계를 혼돈에 빠뜨리게 만든 것이다. 서양문명은 중국의 부상을 저지하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겠지만 14억 인구인 중국의 발전 모멘텀을 막기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 있어 설마 중국이 경제적으로 넘버원이 되었다고 하여 엄청난 세계정치경제지형의 변화를 불러올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한국은 수천년간 겪어왔던 것처럼 세계의 정상으로 복귀한 중국을 맞이하게 될 것이지만 이는 하나의 축복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전세계에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4대 강국이 에워싸고 있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거인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총각이라고 생각하기 보다 여러 미남들에 의해 에워싸인 미인이라 정의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는가? 한국은 중국, 미국, 일본, 러시아 모두에 있어 항상 존중하고 아껴주고 자기 편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국가이다…드라마의 한장면이 떠오른다…어느 남자가 미인을 넋이 빠져 바라보다가 그 여성이 불쑥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시무룩해진 장면… 역시 미인은 싱글일 때가 더 매력적이다.. 정치적인 이야기를 조금 가미하자면 이 시기에 한국은 친미, 친중, 친일을 논하기 보다 모든 사안을 개별적으로 쪼개 국익에 부합되고 대다수 국민의 이익에 부합되고 실보다 득이 더 많은 것만 골라서 사안별로 입장을 취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이유는 “미인은 싱글일 때가 더 매력적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전세계의.미인 선발대회엔 미쓰만 참가할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시기는 또한 포스트 코로나의 시기이다. 포스트 코로나의 최대의 수혜주는 무엇인가? 두말할 것 없이 관광일 것이라 본다. 중국의 코로나 봉쇄가 해소되고 해외 관광이 자유로워지면 해외관광시장은 과거의 5배로 커질 것으로 예상하며 연간 5억명의 중국인이 해외 관광을 나설 것으로 본다. 코로나 기간 동안 힘든 민생을 무엇으로 달랠 것인가? 내부적인 지원책과 개혁만으로는 역부족일 것이다…외부적인 힘을 빌어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것이 답이 아닌가 생각한다. 꿈 같은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2023년 중국관광객 5천만명이 한국 방문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때 되면 한국의 대부분 서비스산업, 상당수 제조업이 혜택을 볼 수 있다. 코로나로 인해 식어간 모든 상권이 관광산업의 부흥으로 인해 엄청난 호황을 누릴 것이 틀림없다. 중국이 밉든 곱든, 인접국가로서 최대의 고객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 중요한 것은 중국이란 시장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정부의 지침대로 움직이는 대형 시장임으로 한중관계의 꽃길 같은 미래만 꿈꿀 것이 아니라 그 꿈이 현실이 되도록 모든 이가 그 밑걸음을 깔아야 한다. 그 사이 맺힌 것도 많고 얽힌 것도 많고 섭섭한 것도 많겠지만…연인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포스트 코로나를 맞이하며 한중 양국이란 연인이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는 시기이다. 농담하나 하겠다. 오래 전에 헤어진 연인이 전화 올 땐? 정답은 “다단계 영업”이라고 한다….이것이 제 4화의 줄거리이다. 제5화 2032~2042 격변의 시대 2032년의 세상은 어떻게 변모할 것인가? 10년후의 세상을 예측하긴 쉽지 않겠지만 현실을 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중국의 부상은 모멘텀에서 현실로 이뤄질 가능성이 높으며 미국은 여러가지 내부/외부적인 요인으로 말미암아 순탄치 않은 10년을 겪으면서 과거와 같은 영광을 누리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 북한에 대한 예측은 항상 어긋났음으로 변수가 아닌 그냥 무시해도 좋은 상수로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또한 한국은 일인당 소득이 4만 5천불이상의 선진국으로 도약할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한중관계는 10년의 냉정기를 겪으며 새로운 시기에 들어설 것이라 보는데 학계나 정계에서는 여기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사람이 없는 것 같아 좀 안타깝다. 물론 예측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담대한 가정을 전제로 새로운 세상을 분석하며 한중관계를 다시 짚어보고자 한다. 지금 중국은 미국의 압박 속에서 어렵게 생존의 틈을 찾아가고 있는데 가장 큰 아킬레스건은 바로 반도체이다. 그러나 미국의 봉쇄가 과연 주효한지를 심각히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초기에는 중국에 대한 반도체 봉쇄를 통해 중국의 성장을 늦출 수는 있겠지만 중국이란 거대한 공룡의 돌진을 막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 10년 후 중국이 만약 반도체의 독립을 이뤘을 때 그때 세계의 패권은 진정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문제는 기술의 초격차를 지향하는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미국의 영향 아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중국의 오기를 불러일으켜 10년의 시간으로 그 기술격차를 극복했을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냐는 고민을 해보았는가? 실제로 지금 중국인 이미 자국기술력으로 7나노 반도체 파운드리를 이뤄냈다. 아직 삼성과 TSMC와 상당한 격차가 있지만 중국 상하이 중심국제반도체 회사의 리더가 바로 TSMC와 삼성의 기술혁신을 이뤄낸 CTO 량멍숭이란 사실이다. 반도체는 하나의 산업기술에 불과하지만 미래 10년 심지어 50년간의 국제관계를 재정립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바로 이런 요소 때문에 미중간의 디커플링이 쉽지가 않고 또한 국제관계의 이합집산이 이뤄지고 있다. 과거 20년간 한국은 항상 중국의 최대 수입국이였으며 중국은 한국의 최대 흑자국이였다. 중국이 미국에서 수천억달러를 벌어오면 거기에 한국이 수백억달러를 인출했던 구도였다. 그러나 올해에 들어서서 한중 교역은 처음 적자로 돌아섰다. 이는 액시던트가 아니라 이제는 자연스러운 모멘텀이라고 본다. 그동안 한국이 중국으로 수출한 제품 중 대다수는 중간재였다. 특히 미국으로 수출하는 비중이 제일 컸다. 그러나 미중갈등으로 인해 미국의 하이테크 중국제품 수입이 줄어들면서 중국의 한국 중간재 수입도 줄게 되었고 중국 자체 생산 원자재의 발전은 한국산의 수요를 감소하게 만들었다. 이런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한국의 산업은 과거의 패턴 그대로 작동하고 있지만 중국은 이미 크게 변하고 있다. 과거 20%이상 차지하던 삼성 핸드폰의 시장점유율은 0.5%로 떨어졌고 인기가 절정에 달하던 현대기아차도 이젠 중국차와 가격을 겨뤄야 하는 현실로 되고 있다. 이마저도 참담한 현실인데 10년 후는 어떻게 될 것인가? 현시점에서도 중국은 세계 최대의 핸드폰, 배터리, 전기자동차 생산국이다. 이는 이미 양적인 우위를 벗어나 질적인 우위라 내달리고 있다. 그럼 10년 후면…믿고 싶지 않겠지만 중국기업은 중국 방방곳곳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의 악몽이 될 수도 있다. 과거 신발이나 가전처럼 말이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도 아직 초격차를 운운하고 있다. 초격차는 이 10년간은 유효하지만 다음 10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초격차가 무격차가 되면 다음은 뭐로 먹고살 것인가? 전세계 역사상 어느 국가도 이처럼 초고속으로 성장하면서 글로벌 시장을 잠식한 이웃국가를 마주한 사례가 없었다… 중국의 위협은 현실뿐만 아니라 미래까지도 커버될 날이 멀지 않다. 삼성보다 싸고 좋은 메모리, 스크린, 핸드폰, 현대보다 싸고 좋은 자동차, 로보트, 한화, SK, 롯데, LG보다 싸고 좋은 화학원료의 메이드 인 차이나가 세계를 석권할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필자는 중국의 위대함을 칭송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 무감각하고 근거 없는 자신감이 팽배한 이 시대의 풍조를 바로잡고 싶을 뿐이다. 미래 10년후의 한중관계는 지금 겪어보지 못했던 심지어 과거 수천년간 겪어 보지 못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것이라 본다. 역사 속에서 한반도는 현재의 중국처럼 나락에 떨어졌다가 다시 정상으로 복귀한 시대를 겪어보지 못했다. 미래의 10년을 대비하려면 대한미국은 어마어마한 중국전문가를 양성해야 하고 중국의 산업구조 산업발전을 제대로 분석하고 대응해야 한다. 중국과 등진 경쟁자가 아닌 중국이란 거대시장과 거대경장 속에서 자신의 포지셔닝을 제대로 하고 변화를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특공대가 되야 한다. 중국시장과 생산과의 융합도 심각하게 고민하고 분석해야 한다. 이는 특정 기업만이 아니라 전체 국가와 국민적인 차원에서 다뤄야하는 숙제이다. 이 숙제를 잘 푸냐 못 푸냐는 미래 10년뿐만 아니라 미래 100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본다. 현재 반중정서가 팽배해 있는 시기에 중국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 날 따라 줄어들고 중국 전문가들도 갈수록 주목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중국은 어둠속의 도둑처럼 조용히 질주하고 있지만…대한민국은 태평성세의 연예가무에 빠져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걱정이 든다. 사드 때가 위기이가? 진정한 위기는 다음 10년이라고 본다. 중국이란 거대 공룡을 옆에 두고 과연 몸집이 작은 파충류가 먹이를 구할 수 있을 것이란 현실적인 걱정이 든다…그러나 이 땅에서 과연 누가 이런 심각한 고민을 해보았는가? “중국은 파멸할 것이다. 분열할 것이다”라는 허황된 꿈으로 자기 위로하면서 살아갈 것인가? 노키아와 모토롤라의 몰락을 보면 경쟁 속에서 잘못된 전략이 얼마나 큰 피해를 초래할 것인가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21세기 30년대의 한중관계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면모를 보일 것이다. 자신감이 넘치고 교만함까지 보이며 실질적인 파워까지 겸비하고 심지어 비민주적이란 프레임마저 사라진 미래의 중국을 다룰 생각을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고 그냥 어영부영 10년을 넘기다가 엄청나게 후회할 것이라 경고하고 싶다. 중국을 경계하고 두려워하기보다 옛정을 그리며 앞으로 어떻게 화합하며 살아가고 중국 부상의 피해자가 아닌 수혜자로 될 수 있는 가가 21세기의 나머지 시간의 테마가 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친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중(知中)이고 중중(重中)이다. 그런 의미에서 친미는 현상유지, 친일은 과거유지, 친중은 미래유지이다...라는 정의를 내릴수도 있다. 이로서 한중양국이 50년간 이뤄진 멜로드라마가 NEXT 시즌을 기대하며 종영이 된다. 한중수교 60주년일때는 환갑의 나이의 두 노인의 사랑 스토리가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다...영화 "은교"처럼 될 것인가? "죽여주는 여자"처럼 될 것인가? 그것은 다음세대 출연자들의 몫이 될 것이다. 필자에 대해 당신이 뭔디 이렇게 거창하고 허황된 이야기를 꾸미는가 질타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나중에 지켜보면 이 드라마가 제가 예상한 각본대로 연출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럼 여기까지…글을 마치고 2032년에 다시 2탄을 올리겠다. 그때까지 이 글의 독자와 한중관계 모두 건강하시기 기원한다. 2022년 8월 24일 서울에서 (By Star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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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의 '정치적 유산'
● 양백강, 로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가 2022년 7월 8일 거리 연설에서 67세의 나이로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아베 신조 피살 사건은 일본 정계는 물론 국제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아베는 전 일본 총리로서 자신의 기록적인 초장기집권과 일본 내 보수세력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전후 일본 정치사, 국가전략 진화의 한 축을 차지하는 등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파장을 남겼다. 아베 자신은 역사가 됐지만 일본의 미래 국가 발전 방향에 대한 조명은 아베의 '정치적 유산'이라는 시각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정치인 가문의 출신인 아베는 1993년 7월 중의원 의원으로 처음 당선돼 당시 최연소 국회의원이 됐고, 2006년 9월 총리가 돼 첫 전후 출생 총리가 됐지만 1년도 안 돼 물러났다.이후 5년간의 칩거 끝에 2012년 9월 자민당 총재에 당선되고 12월 총리에 취임하면서 7년 8개월여의 '아베 시대'가 열렸고, 아베는 헌정 사상 최장수 총리가 됐다. 2020년 8월 퇴임 후 짧은 휴양을 거쳐 정계에 복귀한 아베는 정계 보수세력을 결집했다. 2021년 11월 아베가 자민당 최대 파벌인 호소다파 회장에 취임하면서 아베계로 기치를 바꾸는 등 정치권에서 강세를 보였다. 장기간의 임기를 제외하면 아베의 정치적 위상은 당시의 국제환경과 국내 정치상황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2007년 아베 총리 사임부터 2012년 재집권까지 5년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미·서방 국제체제에 크게 의존하던 일본은 충격을 받았다. 자민당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아소 타로(麻生太郞) 정권, 후속 민주당 3선 내각이 모두 난국에 빠졌다. 상대적으로 미국과 유럽의 패권이 쇠퇴하고,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들이 집단적으로 부상하면서 2010년 중국 경제는 처음으로 일본을 추월하며 격차를 벌렸다. 국제 권력구조, 글로벌 거버넌스 시스템의 심각한 변화, 각 분야의 질서, 규칙, 발언권 다툼이 날로 치열해지고 일본의 대외위기의식, 국제게임의식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어 '강인정치'에 대한 요구가 더욱 절실해졌다. 당시 요미우리신문 사설은 잦은 총리 교체로 일본 지도자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외국 지도자의 모습은 "일본에 수치"라고 했다. 이런 '비정'적이고 대외적인 주장을 더욱 강하게 하는 전략적 마인드와 여론의 분위기는 아베가 재집권해 장기집권을 이어갈 수 있는 중요한 전제조건이 됐다. 총리 재임 후 아베는 계파적 자원과 정치적 수완을 앞세워 당내 최고 권력을 장악했고, 자민당의 6연속 총선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우경화 보수적 정치관과 국제정세 및 일본 국민의 마음가짐 변화를 긴밀히 결합시켜 전략적 행동을 통해 일본을 '강대하게' 만들겠다는 자신의 정책 철학을 제시했다. 실제로 아베는 초대 총리 시절부터 방위청 승격, 교육기본법·국민투표법 개정, 해양기본법 제정 등을 추진해왔다. 2012년 이후 긴 임기 동안 아베는 정치·안보 분야에서 일본의 '자립'과 '자주'를 체계적으로 강화해 더 큰 '전략적 공간'을 넓히려 했다. 아베가 역사교과서 추가 수정, 무라야마 담화 부인 등 기존 역사 발언, 전후 외교 총결산 추진 등을 통해 일본 정치의 우경화를 가속화하고 아시아 이웃 국가들에서 우려를 낳고 있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아베 시대'는 냉전 이후 일본의 국가전략 전환 발전의 중요한 단계로, 일본이 금융위기 이후 세계구도, 국제질서 변화에 적응하는 데 중요한 시기였다. 이 시기 '아베 노선'은 안보 분야의 '돌파'를 접점으로 국가전략의 전환을 추진하고, 다각화된 외교수단을 활용해 '종합전략의 활성화'를 높이겠다는 것이 기본 발상이었다. 국제사회, 특히 아시아 국가들이 이런 돌파구에 대한 우려와 의구심은 자명하다. 개헌 추진, 자위대 입헌 지원 외에 아베 주도로 2013년 첫 국가안전보장전략, 일본판 국가안보회의(NSC) 설립, 방위계획대강 조기 개정, 2014년 내각 정령으로 집단적 자위권 부분해제, 새로운 방위장비 이전 3원칙 마련, 2015년 평화안보법안과 국제평화지원법안, 이른바 신안보법 제정, 적에 대한 공격능력 보유 및 대형화·공격무기장비 플랫폼 도입 검토, 대외방위협력, 외교정책 안전화 등을 추진했다. 안보 분야에서도 아베가 추진한 '개혁'은 전략체제, 법치의 틀, 집행체제, 역량건설의 모든 측면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어 전후 일본 보수세력의 전후체제 돌파와 '안전 자주' 실현이라는 기본적 발상을 답습할 뿐 아니라 일본 안보전략의 외향성과 공격성을 더욱 가속화했다. 이는 평화헌법의 굴레를 뚫고 일본의 '국방정상화'와 '군사대국화'를 가속화하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일본의 안보정책과 방위정책, 방위력 건설 목표의 대전환을 예고하고 있어 아태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위협이 되고 있다. 외교 분야에서 아베는 '전략적 외교'를 적극 추진했으며, 재임 기간 동안 총 비행 거리는 158만km로 80개 국가와 지역을 방문했으며 이는 지구를 39바퀴 도는 것과 같다. 아베 총리는 또 '지구 외교' '적극적인 평화주의'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 등의 개념을 내세워 '도덕적' 색채를 부각시키려 했다. 하지만 사실 아베 외교는 고도의 현실주의, 실력주의, 지정학적 경쟁 사고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강대국의 게임이 그의 핵심 관심사다. 아베의 입장은 미·중 간 총체적 균형을 유지하며 '좌우를 만나다'는 전략 아래 미·일 동맹의 '체제 내 발전'을 견지하고, 대외정책의 융합을 추진하고 경제·안보·문화적 수단을 통합 운용해 '중등 세력' 특히 유럽·인도·태국과의 전방위적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일본 국내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아베는 그동안 위축되었던 일본 외교를 크게 뒤집고 국제 담론력을 강화했지만 많은 논란과 문제점도 남겼다. 아베는 역대 총리 중 최장수 집권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정치인의 업적은 시차를 두고 평가되지 않는다. 내부적으로는 우익세력의 요구에 부응하고 외부적으로는 미국을 숭배하고 추종했지만, 저출산·고령화, 디지털 시대의 발전, 주요 외교 문제는 제때에 해결되지 않았다. 실제로 아베 총리가 2020년 8월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그의 '정치적 유산'에 대한 논쟁은 계속됐다. 아베의 '정치 유산'은 개인적 색채가 뚜렷하지만 전후 일본 보수 정치세력의 국제질서, 일본 국가 발전에 대한 해석을 대변한다.이런 해석은 1980년대 중후반부터 '정상국가론' '정치군사대국 몽'이라는 형태로 일본의 국가전략 방향에 영향을 미쳤다 아베는 그동안 자신을 '열린 보수주의자'라고 칭하며 자신의 보수적 정치이념을 확산시키고 개인 정치권을 공고히 하는 데 열심했다. 장기 집권을 거치면서 아베 주변에는 보수 정치인이 대거 포진했고, 그 중 적지 않은 수가 자민당과 정부 고위직을 차지하며 '아베 독트린'의 추종자이자 집행자로 자리매김했다. 현 일본 정계의 보수세력의 '정신적 지도자'인 아베의 죽음은 추종자들의 추종을 중단시키기는커녕 이들의 더 집요한 행동을 자극해 아베의 '미완의 의지'를 완성하겠다는 자세로 공감과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다. 아베의 후계자인 스가 요시히데와 기시다 후미오는 인맥·공직 경력에서 아베와 그의 측근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두 사람 모두 '아베 색채'에서 벗어나 자신의 특색을 살리는 경향이 있지만, 스가 시대 정책이나 지금까지의 기시다 정권의 정책을 보면 전체적으로 '아베 노선'을 답습하고 있다. 기시다가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자주방위정책과 '신시대 현실주의 외교'도 아베의 정책과 유사하다. 기시다가 자신의 특성을 과시하기 위해 제안한 '일본식 신자본주의' 경제·사회 정책도 정책 여백이 부족해 '아베노믹스'로 회귀할 위험이 있다. 동시에 아베의 '정치적 유산'이 일본의 정치적 현실을 완전히 뒤흔들 수는 없다는 점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외교안보정책 분야에서 일본의 '전략적 주관성'과 '역동성'을 모색하겠다는 아베의 제안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길잡이 역할을 계속할 것이다. 대만 문제에 대해 아베 총리의 '대만 공동방위'에 대한 미일군사 개입 등 허위 주장은 일본의 현실적인 정책이 되기는 더욱 어렵다. 한반도와 러시아에 대한 외교 측면에서도 현 정부는 아베 총리의 기존 사고방식을 현 상황에 맞게 바꾸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현재의 러시아-우크라이나 분쟁을 배경으로 일본이 국제위기를 이용하여 국내의 전략적 변혁을 촉진하고 해외의 전략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관행은 아베 시대의 그림자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질서의 변화와 국가의 전략적 변혁에 직면하여 일본의 구체적인 대응책은 변함이 없을 것이며 아베의 '정치적 유산' 중 비합리적이고 비건설적이며 지속 불가능한 내용은 결국 폐기되고 잊혀질 것이다. 작자 양백강(楊伯江)과 로오(盧昊)는 각각 중국사회과학원 일본연구소 소장, 부연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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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룡 칼럼]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한국 이념논쟁
- ●김정룡(다가치 포럼 대표) 현시대 유명 정치학자로 손꼽히는 하버드대학교 샤무엘 헌탕턴 교수는 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을 출간했다.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로 반응이 뜨거웠다. 그는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2년 후 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냉전 시대가 종말을 맞았다. 냉전 시대 인간은 대체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진영의 이념에 각각 속해 있었다. 냉전이 종말 된 미래사회에서는 이념이 무의미해졌고 따라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면서 다른 귀속처를 찾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귀속처가 바로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라고 제시하였다. 그가 말한 귀속처는 새로운 문명이 아니라 과거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실제로 탈냉전 후 지구촌의 인간무리들은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에로 재편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중국의 경우 개혁개방 전 해외 화교 화인들 중 고국을 못 마땅해하는 사람들도 개혁개방 이후 즉시 돌아서서 고국에 투자를 서슴지 않았다. 아세아 최고 부자 리카싱(李佳成)이 투자에 나서자 주변에서 ‘사기당하면 어쩌냐?’고 말리자 그는 ‘사기당해도 고향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인데 사기라 생각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벌은 남다른 배포가 있는 법이다. 싱가포르 리콴유(李光曜) 전 총리는 본래 반공자였다가 개혁개방 이후 유교 전도사를 자칭하고 나서 중국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것이 바로 이념을 탈피하여 민족문화에로 회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2008년 북경올림픽 개막식 주제가 공자였는데 이것은 전통문화에로의 회귀를 뜻한다. 1990년 초 동구권에서 있었던 코소보 인종청소 전쟁은 종교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아무튼 세상은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흘러가고 있는 추세이며 이미 새로운 역사 흐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지구촌의 흐름을 역행하는 곳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반도이다. 동서 독일이 통일되고 남북 베트남도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문화로 굴러가고 있다. 오로지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것은 남북한이다. 1990년 베이징아세아게임 때 한국관광객이 대량 백두산투어에 나섰다. 그때 한국여행사 에스코트 00사장이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서 생생하게 맴돌고 있다. “참 세월이 놀랍게 변했어요. 우리가 중국 땅을 밟으면서 백두산 구경을 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현실로 되었어요. 이 추세대로라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남북통일도 10년이면 되지 않겠어요!” 그 후 2000년 김대중 대통령께서 북한을 방문하자 매체들이 ‘10년 안에 통일이 이뤄질 것’처럼 떠들었다. 그런데 그 후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현재 남북통일이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요원해지다못해 요즘은 아주 적대관계가 심각해지고 있는 중이다. “가장 중요한 게 이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전에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시중에서는 모두 뜬금없는 발언이라고 하기도 하고 때아닌 이념타령이라고 공격하기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 발언이 확실히 케케묵은 이념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이게 무슨 시대인데 아직도 이념타령이라니? 역사를 거스르는 행위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요즘 한국 사회는 홍범도 장군의 정체성을 갖고 논쟁 중이다. 양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다. 1943년 홍범도 장군이 사망할 당시에는 침략당한 약소국가들에서 나라마다 민족주의가 우선이지 이념과 사상이 우선 과제가 아니었다. 강대국들도 마찬가지로 이념을 떠나 미국과 소련이 협력하여 반파시스 전쟁에 돌입하였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 이념논쟁을 일으킬 사안이 아니다. 한국 정치는 할 일이 하도 없어서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문제는 왜 윤석열 대통령이 이념을 최대 이슈로 들고나왔는지? 맥락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 일부 진영에서는 아직도 빨갱이타령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 종북좌파타령을 70년 동안 벌여오다가 요즘에는 종북좌파 타령이 질리기도 하고 그 실체도 주목을 받기가 조금 약발이 떨어져 친중좌파 공격으로 방향을 틀고 화살을 돌리고 열을 올리고 있다. 필자는 얼마 전에 한국 지인의 소개로 한국 엘리트들이 참여하고 있는 카톡방에 가입한 적이 있다. 카톡방은 흔히 그렇듯 좋은 정보도 나누고 서로 필요한 교류도 하고 인맥도 넓히고 등등 좋은 점이 많다. 하지만 인간무리에는 취향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 취향이 정치적인 성향이 강하면 골머리가 아파난다. 어느 한 분은 윤석열 대통령을 찬양하는 ‘윤비어천가’를 올렸는데 조선 창시자 이성계를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수령을 찬양하는 ‘어천가’보다 훨씬 뛰어난 솜씨로 현직 대통령을 찬양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을 이렇게 신을 찬양하듯 하는 것을 처음 본다. 일각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을 평가하는 기준이 극명하게 나뉘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문재인은 빨갱이고 북한 간첩이다. 나라를 북한에 팔아 먹는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아무리 좌파 성향을 지닌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설마 나라를 팔아먹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상식을 벗어나 비합리적인 주장을 하면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친미를 확실하게 하면 다른 분야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문재인처럼 나라를 팔아먹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굳건하게 박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을 신을 찬양하듯 하는 행위는 필자와는 하도 상관없는 일이라 개의치 않고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는데 다음 일은 도무지 지나칠 수가 없었다. 기름 개구리를 산 채로 끓는 기름에 넣어 튀기다가 물을 넣고 끓여 먹는다. 한 분은 친중좌파들을 개구리 산 채로 튀겨먹고 끓여먹듯이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으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라는 속담이 있다. “미친 아낙네의 악담보다 더 저질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나가기를 해 버렸다. 종북좌파 타령이나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친중좌파 타령이든 모두 같은 이념타령이다. 이런 이념타령이 시중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고 그 세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대통령의 이념논쟁을 때가 아닌 것이라 하거나 뜬금없는 일이라는 지적은 헛발 짚는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공산주의 빨갱이 타령이 심각한데 진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자가 얼마나 될까? 의문이다. 무엇을 대상을 공격하려면 그 대상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나서 공격해야 마땅하나 한국에서 공산주의 빨갱이 공격은 실체를 모르는 막무내식이어서 안타깝다. tvn방송에 <어쩌다 어른>이라는 강연프로그램이 있다. 몇 년 동안 출연을 가장 많이 했던 최진기 강사가 있었다. 그는 자칭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이다. 액면 그대로 믿기로 하고 그가 이해하고 있는 공산주의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마르크스의 노동 분배 원칙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이다. 최진기 강사는 이 공산주의 핵심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마르크스는 아마 아버지가 돈을 벌 능력이 있고 그 돈을 자녀가 학비로 사용하는 케이스에서 힌트를 얻어 내놓은 이론일 것이다.” 이어서 그는 유명 스타 연예인 강동원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을 어떻게 수요에 의해 분배할 것인가?”고 희죽거리면서 공산주의를 형편없는 애들장난처럼 매도하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만약 공산주의가 최진기 강사의 말처럼 그렇듯 유치한 것이라면 어떻게 지구촌 반 되는 인간무리가 추종했겠는가? 능력에 따라 일한다는 것은 인간이 고도의 의식을 갖추면 타인의 능력과 비교하지 않고 또 타인의 노동기여도와 비교하지 않고 나의 능력껏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사회는 물질이 풍부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되어 불필요한 물질을 탐내지 않고 사치를 탐내지 않는 전제하에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것을 의미한다. 요점은 물질이 풍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실천가능한 원칙이라는 것이다. 빨갱이 뜻은 사상이 빨갛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필자의 부친은 평생 당지서를 맡았는데 사상이 붉다못해 둘째 아들이 휴학하는 해에 참외 밭을 대신해 보게하고는 아들이 생산대 참외를 먹었다고 하여 장부에 가을에 떼어내게 기입해 놓았다고 한다. 필자가 자랄 때 동네 어른들이 늘 저한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너의 부친은 진짜 빨갛다.’는 말을 반복했다. 최진기의 자칭 최고 강사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이 수준이라면 진짜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서강대 00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는 제도로서 실천은 실패했지만 그 이념과 사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존재하고 이직도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있는 이 민족의 현실. 언제 가야 통일되고 하나가 되어 부질없는 다툼에서 벗어날 것인지? 민족의 운명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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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룡 칼럼]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한국 이념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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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핵폐수 해양 방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는?
- ● 철 민(논설위원) 한·중·일 해양 안전 문제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였던 일본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처리 문제가 24일 일본 정부의 바다 방류 개시와 더불어 또 새로운 논쟁거리를 몰아오고 있다. 우선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행위를 두고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나라들로는 일본의 이웃 국가들인 중국과 한국(정당과 사회단체 등), 북한 등과 거리가 멀지만, 남태평양 도서국의 반발도 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후쿠시마 오염수가 바다로 흘러들기 시작해서 240일이면 중국 연해에 도착한다며 정부로부터 국민 매 개인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방류 결정을 국제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고 있다. 한편 중국 정부는 일본산 수산물 수입의 전면 중단을 발표하였다. 한국 언론도 한국의 여러 해산물 시장이 거의 텅 비어 있어 어부들은 미래의 생계를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2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제주도 동문어시장에서 20년 넘게 해산물 장사를 해온 한 상인은 “예전에는 오전 10시경과 오후 5∼7시(두 시간대)에 장사가 안될 때도 시장은 붐볐지만, 요즘은 손님이 없는 텅 빈 고속도로”라며 “코로나19 기간에는 장사가 더 잘됐다”라고 우려했고 한국 서부 해안 도시 군산 출신의 한 어민은 “내일 해산물 경매장에 간다고 생각하니 답답하다”라며 “해산물 소비량이 4분의 1로 줄었고 가격도 더 낮아질 것 같다”라고 탄식했다. 부산종합어시장에서는 조기 한 박스가 보통 4만 원 또는 5만 원에 팔리는데, 전국 해산물의 약 30%가 이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번 주 수요일(23일)에는 조기 한 박스가 정상가의 절반 이하로 판매되었으며, 한국인들의 주요 해산물인 멸치는 평소보다 10~20% 정도 가격이 저렴하게 판매되었다. 24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문을 발표하여 일본이 이날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방류를 개시한 것은 지구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면서 핵 오염수 방류계획을 강행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인류에게 핵 재앙을 초래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반인도적 범죄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외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하기로 한 일본의 결정을 알게 된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에 있는 한 비정부기구가 공개적으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으며 또 피지 수바에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시위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은 해외의 국가와 사회단체의 규탄은 물론 일본 자국 내 어민 단체와 국민의 반발을 사고 있다. 특히 1945년 원폭 피해자 후손들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교도통신은 24일 원폭 피해자 후손들로 구성된 일본-전국 원폭 피해자 2세 단체 연락 협의회가 나가사키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후쿠시마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항의했다고 전했다. 이 단체는 원자폭탄의 피해자인 히로시마가 견딜 수 없다며 성명을 발표했고, 이 성명은 총리 관저에 우편으로 발송됐다. 성명은 “원폭 피해자 2세들은 부모들이 방사능 영향으로 고통받는 것을 오랫동안 목격했고, 자신들도 유전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어 건강을 염려하고 있다”라며 “정부와 도쿄전력이 책임을 지고 육상에서 보존·관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외에도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이루다 나열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고도 높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은 국제원자력 기구(IAEA)의 감찰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IAEA의 권위성과 전문성은 인정하지만, 이 기구의 분석과 결론 모두를 믿는 건 아니다. 특히 IAEA 역시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에 대해 명확한 지지 혹은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도 않았다. IAEA 역시 사상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수치나 분석을 통해서는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없은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일이란 시작이나 과정을 통해서는 어떤 결과가 나타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례로 1945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에는 그 위력이 그 정도로 강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자료도 있다. 다음 우리는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더군다나 믿을 수 없다는 추리가 나온다. 일본인을 두고 말하자면 좋게 말하면 “총명하다”하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각도로 말하면 “잔머리를 잘 굴린다” 혹은 “비열하고 간교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은 조선과 중국 그리고 기타 태평양 지역 국가와 지역에 큰 피해를 주었다. 그것도 아주 음융하고 비열하고 잔혹한 수단과 명분 등으로 말이다. 조선 왕조의 명성황후 음해 사건, 중국 대만 강점과 한일 합방 그리고 지난 세기 30~40년대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집할 때는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등 감언리설로 순진한 소녀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1920년대 말의 만주에서의 황구툰(皇姑屯) 사건과 루거우차오(卢沟桥) 사건 등을 분석 조명해보면 당시 일본이 강하다기에 앞서 음흉하고 뻔뻔스럽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시 일본은 한편으로는 미국과 담판함과 아울러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일본을 함부로 믿어서는 큰 코 다친다는 분석도 함께 나온다. 종합적으로 일본을 평가하면 일본인의 겉면을 보면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고 생활이 아주 규칙적으로 보이지만 일본인의 속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겉과 속이 같은 한국인과는 달리, 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중국인과는 달리 또한 거만하지만 우쭐대지는 않는 서양인들과는 달리 일본인한테는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피해국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역대의 독일 총리들과는 정반대로 일본은 오늘 현재도 기나긴 침략 역사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교과서까지 뜯어고치면서 군국주의의 침략사를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두고 각국은 여러 가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중국과는 달리 미국은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한국 정부는 “지지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입장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 두고 일본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속 궁리가 있는가 하면 다른 일종의 전략이 내포되어 있을 수도 있고 한국은 자국민들한테 미칠 손실보다는 일본과 정부 사이의 마찰을 우려하는 듯한 양상이다… 한편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에 대해 지금 과학적이고 안심할 수 있다는 학술적 수치는 있으나 그 영원성을 장담하는 언사는 한 마디도 없다. 어찌 됐든 일본의 핵 오염수는 방류하지 않는 것이 방류하는 것보다는 ‘명지한 선택’이라 보여지며 방류하는 것으로 나쁜 결과가 있을지언정 반대로 좋은 결과는 제로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가령 앞으로 방류 과정에 혹시라도 일본 자국 혹은 주변국들에 피해 사례라도 발생한다면 그때 가서 아무리 미국이나 국제원자력기구라 해도 결코 일본을 위해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일본이라는 이 섬나라의 위망은 일락 천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서기 2023년 8월 24일, 이날은 인류 역사상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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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핵폐수 해양 방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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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무주지(無主地)’ 섬이 아니었다.
- ● 김정룡 (多가치포럼' 대표) 민간속설에 ‘이웃이 먼 사촌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가령 이웃집에서 경사가 생기면 함께 기쁨을 나누고, 안 좋은 일에는 같이 슬픔을 나누고, 급한 일이 생기면 이웃이 가장 먼저 달려와 돕는 등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삶을 영위해온데서 생겨난 속담일 터. 민간백성들의 삶은 대개 이웃끼리 화목한데 비해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구성된 국가의 경우 이웃나라끼리 사이는 그다지 화목하지 못하다. 바다를 사이 두고 이웃으로 살아온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좋은 때도 있었지만 서로 반목하는 일들이 더 많았고 지금까지도 해묵은 갈등들이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는데 그 가운데서 독도의 영유권 문제, 종군위안부 문제, 일본전범기업 강제징용 배상문제 등이 주요 쟁점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가 새로운 갈등으로 부상하여 오랜 갈등들에 얹어져 가뜩이나 썰렁한 냉기를 더욱 차갑게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남아 내려온 갈등도, 새로 생겨나고 있는 갈등도 모두 일본 측의 책임이 크건만 정작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후안무치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아주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느 한 착실한 역사학자의 통계에 의하면 한반도는 서너 차례 모자라는 1천 번의 침략을 당해왔다고 한다. 무려 1천 번이나 침략을 당해왔으나 남을 침략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하니 얼마나 착한 민족인가? 누구인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백의민족은 맞기만 하고 때릴 줄 모르니 선천적으로 DNA에 문제가 있다”고. 아무튼 그 1천 번 가운데서 일본의 침략이 다수였다. 일본은 지진이 많고 태풍이 많기로 지구촌에서도 이름난 곳이다. 게다가 땅이 척박하여 먹을 것이 늘 부족했다. ‘제집’ 내에서 해결책이 안 보이니 눈을 ‘옆집’에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남의 것을 빼앗아오는 약탈행위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가에 왜구의 노략질이 들끓었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곡식도 빼앗고, 옷도 강탈하고, 여자도 납치해가고 등 눈에 보이는 쓸 만한 ‘물건’이면 전부 빠트리지 않고 싹쓸이해갔다. 백의민족의 전통인사말은 ‘무사한가?’인데 그 유래가 바로 빈번한 외침을 당한데서 생겨난 것이다. 일본은 왜구의 노략질도 빈번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차원의 침략도 감행하였고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한반도 식민화였다. 1592년 풍신수길이 발동한 임진왜란이 좋은 근거이다. 명나라 조선 파병 때문에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실패했으나 그 후 결코 한반도 식민화 정책은 포기하지 않았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조선정부는 청나라와 일본을 불러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큰 전쟁을 피하고자 조선정부는 동학농민운동 측과 협상하여 평화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고 청나라 군과 일본군 모두 철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모처럼 좋은 기회를 만난 일본이 철회할 리가 만무했다. 청나라와 군대 철회로 갈등을 빚다가 드디어 무력충돌이 발생하였고 그것이 바로 ‘중일갑오전쟁’이다. 일본을 ‘쌰오르번(小日本)’으로 하찮게 여겨왔던 청나라가 생각 밖으로 일본한테 패배한다. 조선을 청나라 속국에서 벗어나게 하고 ‘독립문’까지 세워준 일본이지만 정작 조선은 독립을 하지 못하고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다. 호랑이가 나간 자리에 승냥이가 들어온 셈이었다. 일본은 강대했던 청나라를 물리쳤으나 또 다른 강대한 적인 러시아와 맞붙어 싸워 이겨야 만주와 조선에서의 이권을 모두 독차지할 수가 있었다. 1904년 일본은 한반도에서 자기네가 마음에 드는 곳에 어디든 군사기지를 세울 권리가 있었다. 러시아와 맞붙으려면 동해바다 섬에 군사기지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하여 일본의 레이더망에 독도가 들어왔다. 1905년 일본은 독도를 ‘무주지(無主地)’라 주장하면서 영토편입을 시도하고 시마네현(島根縣)에 지방고시를 알린다. 남의 나라 땅을 침략하고 그 땅을 ‘무주지’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드는 수법은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을 식민지화 하는 과정에서 활발하게 써 먹었던 수법이었다. 즉 일본이 유럽열강들한테서 배운 것을 조선침략에 활용했다는 뜻이다. 독도는 1905년 전에 과연 ‘무주지’였을까? 아니다. 마찬가지로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에 이르는 곳마다 모두 ‘무주지’ 땅들이었을까? 아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무주지’라 주장하는 것일까? ‘발견자우선주의’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활용했던 것이다. ‘발견자우선주의’의 본뜻은 최초로 발견한 사람들이 소유 우선권이 있다는 의미인데 백인들이 아메리카 땅을 발견하고 개척할 당시 수많은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결코 백인들이 최초의 발견자가 아니다. 분명히 그 땅엔 인디언이라는 주인이 이미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식민지를 개척한 그 땅들에 주인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 전부터 발견하고 삶을 영위해온 원주민들이 거주해왔다. 그렇다면 왜 유럽열강들이 ‘발견자우선주의’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들었을까? 주인이 이미 있었는데 ‘무주지’라 주장하고 거기다 한 술 더 떠 ‘발견자우선주의’를 떠드는 근거는? 유럽열강들은 지구촌 곳곳에 살고 있는 인류 집단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그 땅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3C’ 즉 기독교(Chrisianity), 문명(Civilization), 상업(Commerce)을 통해 식민지 정복을 정당화했다. 1455년 교황 니콜라오5세는 아프리카 서쪽 해안의 영토에 대한 포르투갈의 권리를 승인했다. 최초의 탐험시대부터 이미 그 땅에 인류가 살고 있든 말든 국가가 있든 말든 유럽열강들 중 그 누가 먼저 그 땅에 도착하면 자기네들이 주인이라는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를 적용했던 것이다. 독도는 1905년 이전에 조선의 소유이고 조선이 영유권을 갖고 있다는 역사적인 증거는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산업혁명과 식민지개척 공부에 가장 모범생이었던 일본이 서구열강들이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정당화로 써먹었던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 무기를 휘둘러 독도 영유권을 시마네현에 편입하는 고시를 알리는 수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있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일본 소유로 편입되었던 것들을 바로 잡는 조항에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등 제도들이 조선의 영유권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선의 지리는 육지와 3170 개 섬으로 구성되어 있어 섬마다 일일이 모두 표기할 수가 없었고 그때 독도가 빠져있었던 것을 일본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다. 즉 이것 때문에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한국정부가 독도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군대가 주둔하여 관리하고 있다. 6.25 전쟁 때 한국군 36명의 용사가 독도를 굳건하게 지켜냈고 지금까지도 한국이 독도에 주둔하고 관리하고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존재의 일차적인 이유는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2016년 세월호사건과 지난해 10월 발생했던 이태원참사사건에 전체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정부가 국가의 존재이유를 방기했다는 것이다. 다음 자국의 영토를 지키는 것도 국가존재의 주요 이유이다. 영토를 잃는 것은 안전을 잃어버리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기 때문이다. 한국정부의 독도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으로 명백한 우리 소유의 영토이다. 독도에 대한 영유권 분쟁은 존재하지 않으며 독도는 외교 교섭이나 사법적 해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확고한 영토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어떠한 도발에도 단호하고 엄중하게 대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독도에 대한 우리의 주권을 수호해 나아간다.” 다만 걱정이 하나 있다. 일본정치주류세력인 우익이 줄곧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에 대해 올해만 세 번 한일 양국정상이 만난 자리에서 아무 언급도 없었다. 윤석열 정부의 과거사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는 대일외교방침 때문일까? 일각에서는 이대로 나아간다면 일본이 독도를 완전히 빼앗아가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공동관리 주장을 들고 나오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한다. 독도분쟁은 대한민국의 자존심 문제이다. 자존심을 잃으면 나라의 존재이유가 사라질 만큼 국민의 사기가 저하된다. 그러므로 독도만은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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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무주지(無主地)’ 섬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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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전주국제영화제 정준호-민성욱 공동집행위원장 투톱체제 성공을 바라며
- 독립영화의 요람 전주국제영화제가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로 전환해 정체성 확립과 대중성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지 관심을 받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는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민성욱 부집행위원장과 정준호 영화배우를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의결했고, 지난 26일 조직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은 시장실에서 위촉장을 전달했다. 마력은 동력의 단위로 높을수록 좋다. 이번 쌍두마차 체제가 앞으로 3년 동안 시너지 효과를 일궈낼 것으로 기대된다. 백제예술대학교 방송연예과 교수인 민성욱 신임 공동집행위원장은 전주국제영화제 출범부터 조직위의 사무국장 및 부집행위원장을 역임한 '지킴이'이고, 정준호 신임 집행위원장은 높은 인지도를 가진 대중성을 확보한 영화배우이기 때문. 어떤 조직이나 더 큰 발전과 생존을 위한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시점이 있다. 세계 초일류 전자제품 회사로 대한민국을 빛내는 삼성이 만일 제일제당 시절처럼 사카린을 밀수해 설탕을 팔던 그대로 운영되고 있다면 지금의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 202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는 비경쟁 위주로 실시됐고 올해 2022년 23회 영화제는 국제경쟁, 한국경쟁, 한국단편경쟁, 특별부문(한국 장편 다큐멘터리, 지역공모작품, 비경쟁 아시아 영화)로 진행되며 업그레이드 됐다. 2023년 24회부터 3년간 시행될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기존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보다 더 대중성을 일으켜 더욱 큰 소통을 통해 영화계 발전과 주최지인 전주 지역발전에 더 크게 기여하는 영광이 실현될 지 귀추가 주목된다. 쌍두마차 체제가 된 전주국제영화제는 전주시민의 선택을 받은 우범기 시장이 조직위원장으로 이끄는 마차다. 우 조직위원장이 전주시 발전을 위한 고뇌 끝에 내놓은 묘수라고 풀이된다. 시장은 시민의 행복과 시의 발전을 도모하는 자리기 때문이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에 대해 기대가 큰 반면에 걱정과 반감도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수립되자, 권해효 배우, 방은진·한승룡 감독이 이사직을 사퇴했다. 이사회에서 자신의 의견과 다르게 의결되었다고 사퇴하는 것이 영화제에 대한 진정성일 수도 있지만 무책임하게 보일 수도 있는 지점이다. 고 자니윤(고 윤종승) 코미디언은 2013년 2월28일 해외동포들과 판문점을 방문한 후 가진 뒷풀이에서 "한국 사람들은 너무 똑똑해요.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이XX 안돼, 저XX 안돼 하는거에요. 일을 해보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한국계 코미디언으로 성공하고 그의 인프라를 총동원해 조국 대한민국 관광발전을 위해 기여하고 싶었으나 좌절된데 대한 의견으로 들렸다. 대한민국은 625전쟁 후 폐허에서 일어나 세계 경제 10대 강국이 되었고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나라다. 지난 80년간 대한민국이 변화가 없었다면 우리 국민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억압속에서 지옥살이를 하고 있었을 게 자명하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는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이사회에서 결정된 사안이다. 임기는 3년이다. 3년간 응원하고 3년 후 큰 성공과 발전을 이루면 박수를 치고, 변화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때 가서 비판해도 늦지 않다. 한국언론인연대 박상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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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전주국제영화제 정준호-민성욱 공동집행위원장 투톱체제 성공을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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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Z세대 중국에 호감" 중국 호감도 세대별로 다른 원인
- ●오카다 미츠루(일본 저널리스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7일 방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3년 만에 처음으로 중·일 정상회담을 갖고 악화된 양국 관계를 '재조정'하기 시작했다. 기시다는 대중 관계 개선에서 반중 여론과 대중 강경 자민당 우파의 제약을 받고 있지만 반중 여론을 거론하면 일본의 Z세대(18~29세)의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40% 이상으로 다른 연령층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Z세대의 정치적 의지가 선거의 키를 쥐고 있는 세계적 흐름을 보면 '반중 여론'과 '우파'에만 의존하는 기시다 외교가 위태롭다. 45분 동안 진행된 이번 일-중 정상회담은 3시간여에 걸친 중-미 정상회담에 비해 일본의 대중국 중요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일·중 정상은 회담에서 국방부 해상 및 항공 연락 메커니즘의 직통 전화선 조기 개통, 새로운 중일 고위급 경제 대화의 조기 개최, 새로운 중일 고위급 문화교류 협의 메커니즘 회의 조기 개최 등 몇 가지 공감대를 형성했다. 향후 중일관계 개선의 지표 중 하나로 정상 간 상호 방문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시다 총리의 대중 관계 개선의 한 가지 저항은 '반중(反中)' 여론 고조다. 일본의 대중(對中) 인식 악화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각부가 매년 발표하는 '외교에 관한 여론조사'에는 흥미로운 수치가 나온다. 예를 들어 지난 1월 발표된 조사에서 응답자의 20.66%가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지난해보다 1.4% 증가)고 답했다.그러나 연령별로는 Z세대 중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는 비율이 41.6%로 전체보다 배 이상 많았다. 60~69세 13.4%, 70세 이상 13.2%에 비해 Z세대는 중국에 대한 친근감이 높다. 그렇다면 왜 연령대에 따라 중국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싶다. 나는 젊었을 때(저자는 1948년생) 중국의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심을 갖고 있었고,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속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중국이라는 '타자' 위에 자신의 생각을 투영해 기대를 부풀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이나 구미의 통치체계를 중국의 정치와 사회에 투영해 일본이나 구미의 기준으로 중국을 관찰하고 판단한다. 요즘 60~70대 일본인들이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다. 그러나 Z세대는 생각이 다르다. 내가 가르친 대학생의 경우 태어나기도 전에 일본 경제가 침체에 빠졌고,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기를 경험하지 못했다. 이들이 철들었을 때 중국은 이미 미국을 추격하는 대국이 됐고 IT 기술에서 일본을 앞섰으며 애니메이션과 게임 품질에서도 일본을 추월하고 있다. 또 Z세대가 다니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많은 곳에서 중국 유학생과 접촉할 기회가 종종 있다. 다시 말해 Z세대는 중국을 일종의 '대등한'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환상은 없다.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가 사회의 버팀목이 될 때 일본인 전체의 대중국 관념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쇠락이라는 역사적 변화, '탈아입구((脫亞入歐)'의식을 심리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대가 '2선 후퇴'하면 일본의 '반중' 여론도 달라질 것이다. 기시다 정권도 언제까지 반중 익찬 여론에 의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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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Z세대 중국에 호감" 중국 호감도 세대별로 다른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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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와 "발이"
- ●김경화(재중동포작가)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애가 급기야 발리(<발>: 발이의 중국식 꼬부랑혀 발음)????를 입 밖에 토해낸 것은 지난 4월말경의 어느 아침, 유치원에 가려고 자기 스스로 신을 신다가 말고서였다. 나는 한참이나 멍해있을 수밖에 없었다. 설마 했는데… 남편과 나는 둘 다 출근족이다 보니 애가 일곱 달 되던 때부터 남의 손에 맡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친정 쪽에도 시집 쪽에도, 단 하루도 애를 봐줄 수 있는 사람조차` 없다보니, 물론 친할머니, 외할머니 다 계시지만 연세도 있고 사정상 애를 맡길 수 없는 상황이라 그동안 보모 손에서 전탁으로 전전긍긍하면서 그야말로 전쟁을 치르듯 살아왔던 우리. 애를 제대로 봐줄 수 있는 보모만 구했더라도… 여러 가지로 마땅치 않아 골머리를 앓으면서 지내오다가 아들애가 스무 개월 되던 지난해 11월, 끝내 참지 못하고 탁아소(어린이집)를 알아봤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생겼다. 우리가 사는 구역이 한족(중국인)들만 모여 사는 집거구역이라 조선족탁아소를 찾을 수가 없었다. 시내 공중버스를 이용해 애를 데려가고 데려올 수 있는 그런 곳도 샅샅이 돌아보았지만 한족탁아소뿐이였다. 그러던 중 우리 집과 가까운 곳에 규모가 잡히고 환경도 괜찮은 유치원을 발견했는데 마침 탁아소까지 곁들어 있어 마음이 끌렸다. 한족유치원이긴 했지만 조선족반도 있었고, 탁아소에도 한족선생님 두 명에 조선족선생님 한 분이 계셔서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시간상 더 돌아볼 여유도 없어 아들애를 그 유치원에 붙이기로 결정했다. 한창 말을 번지기 시작하던 때라 혹 꼬부랑 한족(중국)말부터 배우지 않을까 내심 우려도 했지만 조선족 선생님이 계시니 괜찮을 거다, 그리고 한족말 배워서 나쁠 것도 없지 않은가. 중국에서 살고 있는 한 한족 말을 능숙하게 하는 것도 어쩌면 낭패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애를 유치원에 데려가고 데려오고 하는 일을 나보다 시간적 여유가 더 많은 남편한테 떠맡겼다. 그냥 별 탈 없이 유치원과 집 사이를 잘 오가는 아들애를 보면서 소반부터 조선족반으로 옮기면 된다고 간단하게 생각했고 .마마(엄마), 빠바(아빠), 나이나이(할머니)와 츠판(밥 먹어) 정도의 한족 말을 구사하는 것은 그저 좋게만 받아들였다. 주변에서도 중국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구사하는 아들애를 보고 어린 것이 대단하다며 칭찬할 때면 솔직히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었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내가 방심하고 조금씩 으쓱해하고 있는 사이에 아들애의 혀는 어느새 중국 특유의 꼬부랑혀로 변해가고 있었고 언제부터인가는 한족말만 해대고 조선말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조선말은 시켜봐야 겨우 한두 마디 하는 정도였고 일상용어가 완전히 한족말로 바뀌운 것이다. 몇 마디 말을 더 시켜봤더니 그전에는 잘만 하던 "오리"도 어느새 "올리"로 꼬부라져 있었고 대신 한족 말은 아주 정확하고도 또렷하게 발음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조선말은 하기 싫어 짜증을 부리기도 했다. 나보다 유치원사정에 더 밝은 남편이 어느 날인가 아들애네 탁아소에 조선족애가 두 명뿐이라 선생님들이 거의 조선말을 안 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나름대로 중국 땅에 살지라도 자기 민족의 뿌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다니던 내가 어쩌다가 아들애를 혀꼬부랑이로 만들었단 말인가! 중국에 사는 조선족, 이중성을 띤 민족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떡하다보니 우리는 고국을 앞뒤에 두고 타국을 조국이라 부르면서 살게 된 것이다. 다행이라면, 중국에서 살고는 있지만 자기 민족의 언어와 풍속습관, 문화를 잊지 않고 지키고 발전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가 중국에서 한족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면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에 조선족인구가 점점 줄어들고 있어 2,3십 년 후에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없어질 지도 모른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또한 우리 민족교육이 위기에 처한 것도 타민족에 비해 현저하게 낮은 조선족 인구 출생률 문제도 있겠지만 더 큰 문제는 많은 학부모들이 자식을 한족학교에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어려서부터 중국어를 배우면 물론 좋은 점은 많다. 중국어를 능란하게 구사하고 중국인들 속에서 그들과 어울려 그들의 문화를 배우고 생활해 가면 중국이라는 이 거대한 땅덩어리에서 생존해나가기에는 많이 유리할 것이다. 이는 자식을 한족학교에 보내는 부모님들의 공통된 생각이기도 하다. 자기 자식을 중국에서 좀 더 편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그들에 대해 왈가왈부 말썽들이 많았지만 내 자식을 위한 부모의 마음 그것을 누가 감히 뭐라고 할 것인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중한 수교 이후로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점점 커가는 양국 간 경제무역 거래로 인해 중국 내지에 한국어에 능통한 인재 수요가 급증했고 중국인들 속에서 한국어 학습 붐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어 학습 붐은 여기 조선족 집거지인 연변에도 세차게 불어치고 있다. 연변대학 한국어학부는 응시하는 수험생이 너무 많아 고시에서 어지간한 높은 점수를 맞지 못하면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또한 갈수록 많은 한족들이 자기 자식을 조선족 학교에 보내고 있다. 그런데 내가 아들애를 한족 유치원에 보냈다는 큰 실수를 저지르다니. 김치와 토장국으로 식단을 차리고 빨래를 푹 삶아 짱짱 빨래 방치소리까지 곁들여야만 직성이 풀려하는 내가 아니던가. 조선족은 참 알뜰하다, 이런 식의 칭찬을 중국인들한테서 들을 때면 가슴 한구석이 뿌듯했던 내가 아니었던가. 어디 가서나 가장 자랑스러웠던 그 한마디― 저는 조선족입니다, 바로 그거였는데. 한류열풍이 중국대륙을 강타했을 때 인터넷상에선 한국과 조선족은 어떤 사이냐고 묻는 중국인들이 많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고. 현재 중국에 살고 있지만 그들과 똑같은 조선민족이라고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며 설명해주곤 했다. 중국을 항상 앞서가는 한국이 우리의 고국이고 한국인들과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 큰 자랑이었다. 그런데 나는 어느새 아들애를 허울만 조선족인 우리말도 할 줄 모르는 중국애로 키워가고 있었다. "발리", 그것은 누가 들어봐도 중국인이 우리말을 하는 그런 모습인 것이다. 먼 훗날, 아들애가 어느 날 "엄마, 엄마는 왜 날 자기 민족의 언어도 제대로 구사 못하는 놈으로 만들었어요? " 하고 물어온다면 과연 나는 무엇이라 대답해야 되는 것일가? 그리고 어느 날, 중국인들이 왜 당신 아들애는 자기 민족의 언어도 제대로 구사 못하는가고, 과연 조선족이 맞긴 맞냐고 한다면 그 역시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나 스스로 만들어낸 숙제 앞에 나는 기분이 착잡해져만 갔다. 아들애가 민족어를 잊어가고 있는 것에 대해 절대 그대로 놔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들애를 민족어도 구사할 줄 모르는 반쪽짜리 조선족으로 만드는 죄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아들애도 나처럼 우리 민족에 대한 긍지감을 안고 살아가게 하고 싶었다. 단군의 피와 살을 이어받은 몸으로서 내 민족의 전통과 언어, 문화를 지키고 빛뿌리며 거기에 타민족의 언어까지도 잘 구사할 수 있는 사람, 그것이 바로 우리 민족의 후예다운 모습이고 이 시대가 바라는 인재가 아니겠는가. 이제라도 나는 아들애를 "발리"가 아닌 "발이"를 정확하게 구사할 줄 아는 진정한 조선족으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 민족을 사랑하고, 그래서 내 민족의 언어, 문화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빛뿌려갈줄 아는 그런 인간으로 말이다. 지금 아들애는 집과는 거리가 좀 멀리 떨어진 조선족유치원에 다니고 있다.. "발리사건"이 있고 나서 불달린 마음으로 유치원을 옮겨버린 것이다. 거리가 멀다고는 하지만 통근차가 아침저녁으로 다녀서 큰 불편은 없고, 무엇보다 교령이 십년이상 되는 아들애 담임 선생님이 참 맘에 들었다. 아들애도 처음엔 그동안 한족유치원을 다녀서인지 첨엔 생활이나 언어 등 면에서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더니 한 달이 지나니 새로운 환경에 점점 적응되고 다른 애들하고 잘 어울려 놀기 시작했다. 우리말 노래도 배우고 춤도 배우고, 단어도 하나하나 익혀가는 모습이 대견스럽기만 하다. 따라서 "올리(오리)", "발리(발)" 등 중국식 꼬부랑발음을 하던 혀도 많이 펴진 듯 했다. 이제 발을 "발리"가 아닌 "발이"로 옳게 발음할 수 있는 아들애, 오리를 "올리"가 아닌"오리"로 옳게 발음할 수 있는 아들애. "곰 세 마리", "반딧불" 등 우리말 노래도 제대로 다 부르고 만두가 아닌 토장국에 김치를 좋아하며 어른들을 만나면 구십 도로 허리를 굽히면서 «안녕하세요? 잘 가세요,» 등 인사도 제법 잘한다. 이제 나는 아들애한테 우리 말 우리글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사랑하는 그런 민족의 자긍심을 가르쳐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전통과 역사를 가르칠 것이다. 단군할아버지가 누구이며 훈민정음을 만들어낸 세종대왕이 누구인지를 가르쳐줄 것이다. 그래서 먼 훗날 아들애가 성인이 되고난 후 중국이거나 한국만이 아닌 세계 그 어느 곳에 가서더라도 우리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안고 우리 민족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게. 오늘도 나는 아들애에게 "발이"를 해보라고 한다. "발이, 발이". "발리"가 아닌 "발이, 발이". 그리고 나는 아들애한테 이렇게 속삭인다. 이제 너는 그 두 발(발리가 아닌 발이)로 중국이라는 이 땅덩어리 위에서, 더 나아가 세계의 중심에 서서 자신만의 세상을 그러안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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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와 "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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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시각으로부터 본 연변지역 조선족 여성 항일운동
- ●방미화 중국조선족은 항일전쟁과정에서 가장 먼저 반일혁명에 참가한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이다. 통계자료에 따르면 연변지역 총 항일열사 중 조선족이 무려 3,204명을 차지하며 그 가운데서도 조선족 여성 항일열사는 338명에 달하여 조선족열사의 10.54%를 차지한다('중국공산당연변역사대사', 2002). 현재까지 조선족 항일전사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남성전사에게 집중되었다. 설사 조선족 항일 여전사에 대한 자료라 해도 그들의 항일에서의 공헌을 높이 평가하는 공헌사, 보충사의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항일활동 속에서의 결혼, 출산, 자녀양육 등을 둘러싼 그들의 처우에 대한 여성학적인 해석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에 필자는 본고에서 여성주의시각으로부터 출발하여 연변지역 조선족 항일 여전사들의 항일활동에 내포된 여성해방의 함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연변지역 조선족 항일 여전사들은 대부분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열악한 경제적 환경 속에서 어릴 적 부모를 도와 농사를 짓거나 가무를 담당함으로써 힘들었던 노동생활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결혼 이후에도 힘들게 항일운동 농사짓고 각종 생업에 종사하면서 생계를 유지해나갔다. 그들은 혁명에 참가하기 이전 자신들을 둘러싼 가부장적 문화와 가정 안팎에서 여성들의 희생만 요구받는 현실 때문에 고달픈 인생을 살아갔다. 그러던 것이, 그들에게 의식전환의 계기가 찾아오게 된다. 바로 당시 연변지역에서의 민족주의계열의 여성계몽운동, 공산주의 계열에서의 남녀평등과 여성해방 사상 전파 등 사상적 배경 하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가난한 처지를 불공평한 사회적 현실로 자각하면서 그러한 가난은 일제 침략, 지주와 자본가의 착취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한다. 이 뿐만 아니라, 봉건적 남존여비사상에 얽매인 전통가정의 속박에서 벗어나 글을 배우고 사회에 눈을 떠야만 진정한 남녀평등을 실현할 수 있다고 인식하게 된다. 이와 같이 그들은 의식의 변화 및 감정의 풍파 등의 경험 속에서 부모, 형제, 남편, 친인척, 야학, 학교, 혁명지사, 진보적 서적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혁명에 참가하게 된다. 조선족 여성 항일열사 중에는 전장에서 직접 전투에 참가하여 전사한 여성들도 있는가 하면, 작식대, 재봉대, 의료대에서 활동함으로써 전투력을 재생산하는 임무를 완수한 여성들도 있다. 항일연군 제2군의 최희숙 등 8명의 재봉대원들은은 한 달 동안 600건 군복을 만들어내라는 긴급통지를 받고 엄동설한을 무릅쓰고 삼림 속에 들어가 낡은 재봉기로 낮과 밤을 이어가며 끝내 한 달이 되기 전에 600건의 군복을 재봉하였고, 작식대 리신금 여전사 역시 한차례 습격에서 부상을 입었지만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전우들이 한주일 굶은 상태에서 행군할 힘을 없다는 것을 알고 자신도 한주일이나 먹지 못했지만, 전우들을 위해 정신을 차리고 사처로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구함으로써 전우들로 하여금 행군을 지속하도록 하였다(《연변녀성운동사》,1991). 특히 직접 전투에 참가한 조선족 항일 여전사들은 전장에서 남성전사 못지 않은 용맹함과 전투능력을 보이면서 전우를 엄호하기 위해, 당의 비밀을 엄수하기 위해, 적들을 소멸하기 위해 끝까지 싸웠다. 투쟁중 일본군 앞에서 당의 비밀을 엄수하기 위해 혀를 깨문 여전사들이 있는가 하면, 열 손톱을 입으로 물어뜯은 전사도 있고, 일본군에 의해 두 눈알이 빠져도 끝까지 투항하지 않은 여전사도 있다. 이처럼 그들의 항일에서의 행동은 대단히 용맹하고 헌신적 이였다. 때문에 현재까지 여러 자료와 회억록 등에서도 그들의 헌신정신과 용맹함에 대해 높이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항일전장에서의 그들의 처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직면하고 또한 감당해야 할 고난과 고통에 대해 한번 짚어보도록 하자. 전장에서 그들은 신체적 조건의 취약함을 극복해야 함은 더 말할 나위도 없고, 생리적 고충, 생육의 고통도 극복해야 했다. 여성들에게 있어 전장에서의 가장 큰 고통은 달거리 임신과 해산 이였다. 달거리 때는 그렇다 치더라도, 임신하면 대개 작식대와 재봉대에 배치되는데, 임신해서도 그들은 대원들의 식량을 장만하고 해진 옷을 깁는 등 일에 종사하면서 쉴 새 없이 보내기가 일쑤다. 해산시의 조건도 말이 아니었다. 옥중 해산한 여전사가 몇몇 있는가 하면 해산시에 먹을 것이 하나도 없고 젖도 나오지 않아 아이를 낳자마자 5일 만에 잃은 여전사도 있다. 이러한 견정한 혁명정신으로 인한 친육의 상실 뒤에 오는 고통은 그들 스스로 감내해야 하는 슬픔과 고통이었다. 또한 가정과 자식을 포기해야 하는 고통도 견뎌내야 했다. 여전사들은 항일을 위해 전장에 나간 뒤, 대개 1년 내지 2년에 한번 남편과 상봉하거나 더욱 긴 경우도 있으며, 자식을 키울 수가 없어 다른 집에 보내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조선족 여전사들의 항일활동에 내포된 여성의 의미는 또한 무엇일가. 먼저, 여전사들은 확실히 항일운동을 통해 가정으로부터 사회로 진출했으며, 가정주부로부터 사회혁명가로의 신분전환을 실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항일운동에 참가하면서 그들은 남성과 똑같은 전사로서의 사회적 신분을 부여받음으로써 가정주부로부터 사회혁명가로의 역할 전환을 부분적으로 실현하였다. 그들은 전장에서 남성들과 똑같이 전투에 참가하면서 여러 가지 칭호와 명예를 가지게 되였다. 다음으로, 항일근거지에서 조선족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 되였다. 정치적으로 그들은 각급 당정기관의 중요한 직위 예하면, 부녀위원, 소비에트정부의 회장, 현아동국 국장, 부국장 등에 임용되어 정치방면에서 평등한 권리를 부여받음으로써 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실현하였다. 경제방면에서도 남자와 똑같이 땅을 분배받음으로써 경제적 독립권을 향유하게 되였으며, 교육방면에서도 중점적으로 여성간부를 양성하는 원칙에 의해 평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부여받았다. 이와 같이 그들은 조선족 여성 지도자들이였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아내, 어머니, 며느리, 전사, 부녀회원 등 다중 역할을 동시에 행사하는 행위주체였다. 요컨대, 여전사들의 평등을 실현하려는 의지에서 우리는 해방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항일운동에 참가함으로써 해방을 실현하고자 하는 견강한 의지, 전쟁과정에서 들이닥친 모든 고난을 감내하고 이겨내는 또한 목숨도 아끼지 않는 헌신정신과 희생정신 등에서 우리는 그들의 평등과 해방을 실현하려는 철같이 강한 의지를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조선족 여전사들과 같이 빛을 보려는 의지, 그 의지만이 우리를 해방으로 이끌고, 미지의 세계, 창조적인 세계로 이끄는 통로이자 희망으로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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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시각으로부터 본 연변지역 조선족 여성 항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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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룡 칼럼] 재한조선족은 원숭이에게 감투 꼴
- ●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진나라 서울 함양으로 치달아 들어간 항우는 이전에 유방에게 항복한 진왕 영(瓔)을 죽이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 불은 석 달을 두고 탔다고 한다. 항우는 시황제의 무덤도 파헤쳤으며 진나라의 재물들을 모두 거둬 갔다. 부녀자들도 모두 붙잡아 갈 만큼 항우의 군사는 갖은 잔학한 짓을 다하고는 함양을 떠났다. 그때 한생(韓生)이란 사람이 항우에게 말했다. “진나라 땅은 지리가 좋고 땅도 길어서 이곳에 도읍을 정하면 천하의 패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항우는 잿더미가 된 진나라 궁궐들이 보기에도 싫었을 뿐 아니라 고향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한생의 말을 듣지 않았다. “사람이 부귀하게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밤에 비단 옷인지 누가 보고 알아 줄 것이냐.” 한생은 기어이 고향으로 가려는 항우를 보고 ‘초나라 사람들은 원숭이가 감투를 쓴 꼴이다.’고 했다가 항우의 노염을 사서 잡혀 죽었다. 항우에 대한 이야기는 중국역사상 굉장한 비중을 차지해왔다. 따라서 이 고사가 후세에 전해지면서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 스스로 자신을 과대 포장하는 행위를 빗대 ‘원숭이에게 감투 꼴’이란 속담으로 전해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 속담을 우리 현실에 적용시켜보면 재한조선족사회 상황에 신통하게 하모니가 되어 있다. 10년 전의 일이다. 00한국 분이 필자에게 왈, “한국에 온 조선족 분들이 평균 수준이 굉장히 높네요.” “무슨 말씀인지?” “저마다 선생(교사) 했다는 분들이 엄청 많네요.” “아~, 그래요.” 뻥이다. 뻥도 보통 뻥이 아니라 한심한 강냉이 뻥 튀기 식의 뻥이다. 10년 전에 한국에 온 조선족 중에 교사했던 사람이 있었지만 극히 소수였다. 00단체장의 우스운 이야기다. 자신은 조선글, 조선말 잘 못한다고 하는 사람이 연길에서 00중학교에서 선생 했다고 자랑한다. “그 학교가 조선족중학교인데”라고 말했더니 “아, 잘못 말했는데 xx중학교요.” “그 학교도 조선족학교인데요.” 얼굴이 원숭이의 궁둥이가 되어 머뭇거린다. 선생 해 본 적이 없는 단체장이 자신이 있어 보이기 위해 선생 했다고 뻥 친다. 조선족사회 리더라고 하는 단체장이 이 정도로 뻥 치고 있으니 일반 구성원들이야. 또 법원이나 검찰원에서 일반 직원으로 심부름이나 하던 조선족이 한국에 와서 자신은 중국에서 판사 혹은 검사였다고 뻥친다. 왜냐? 한국에서는 판사나 검사가 최고 엘리트로 대접받기 때문에 자신을 최고 엘리트로 포장하는 것이다. 예전에도 언급했듯이 재일조선족사회와 재한조선족사회 최대 구분이 바로 전자는 유학생 주류로 형성된 것인데 비해 후자는 노무일군을 주류로 형성된 것이다. 더욱이 한국에 온 조선족은 머리 쓸 필요 없이 팔다리가 멀쩡하면 모두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85만이나 밀려 온 것이다. 한국은 민주주의국가이다. 민간단체 설립이 굉장히 쉽다.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슬쩍슬쩍 한두 마디 변경해서 정관이나 만들고 회원 명단만 작성하면 되고 활동 내역도 어지간히 만들어 넣으면 00협회란 법적 등록이 가능하다. 재한조선족사회 00협회 이름으로 된 단체가 한 때 가장 많을 때 60여 개나 있었다. 개혁개방 직후 80년대 연길에 실체나 실속 없는 피빠아오꿍쓰(皮包公司, 허수아비회사)가 너무 많아 당시에 ‘무슨 놈의 꿍쓰(회사)가 변소간보다 더 많다.’는 말이 유행되었다. 재한조선족사회 단체들이 똑 마치 그때 피빠아오꿍쓰(皮包公司, 허수아비회사)를 신통하게 닮았다. 구체적인 일은 하는 것이 전혀 없이 일단 단체장이라는 감투만 쓰면 능력은 없어도 자신이 큰 벼슬을 한 것처럼 개폼을 잡는다. 능력이 있을 수가 없다. 이들 ‘회장님’들은 중국에 있을 때 아무 것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이고 더욱이 단체장 가운데 대학문을 나온 사람이 거푸 한두 명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것이 재한조선족단체와 재일조선족단체의 큰 차이다. “저희들은 한국에서 여러 가지 형사처벌을 받았지만 여전히 재한조선족사회 리더로 활동하고 있어요.” 한국00사법기관 동포 관련 간담회에서 나온 조선족 단체장의 발언이다. 한국공무원들이 재한조선족사회를 어떻게 바라볼까? 정말 창피하다. 창피한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국은 외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국가이고 동포밀집지역 관공서와 서울시청 등에서 다문화(이럴 때면 조선족도 다문화에 포함시킨다.) 관련 간담회가 많다. 뻥인지, 진짜인지는 모르겠으나 중국에서 선생 했다거나 언론 관련 기관에 종사했다거나 혹은 자신을 지식인이라 폼 잡는 사람들이 회의에서 하는 발언들을 들고 있노라면 한국어가 서툰 것은 허물도 아니다. 회의 주제도 파악하지 못하고 아무 관련이 없는 말을 길게 늘여놓고 게다가 목소리도 크고 악센트도 세서 동네망신이다. 참다못한 사회자께서 마이크를 놓으라고 제지한다. 단체장들은 스스로 재한조선족사회를 대표한다고 자랑한다. 문제는 대표라는 사람들이 이 수준이니 한국공무원들이 이쪽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겠는가? “중국에 있었을 때 같으면 함께 같은 밥상에 마주 않지도 못했을 ‘빈 깡통’들이 한국에 와서 회장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꼴을 정말 못 봐주겠다.” 조선족출신 00공무원의 말씀이다. 재한조선족사회에 정말 불가사의한 이상한 현상이 한 가지 있다. 중국에서 경찰한테 감히 대들지 못하던 조선족들이 이상하게 한국에 와서 한국경찰한테 협조하지 않을뿐더러 경찰을 무시하고 을러멘다. “사건 현장에 출동할 때면 둘이 갈 일을 넷이 가고 넷이 갈 것을 여덟이나 갑니다. 동포들이 군중영웅심리가 강해 사건과 관련이 없는 지나가던 동포들이 경찰공무집행을 방해하고 있어 많이 출동해야 합니다.” 동포밀집지역 경찰공무원의 고충이 담긴 고백이다. 왜, 이럴까? 중국에서 돈고생 하다가 한국에 와서 얼마간 돈을 벌었으니 세상이 녹두 알만해 보이고 자신이 영웅이나 된 것처럼 행세한다. 이런 조선족이 굉장히 많다. 일하기 싫어 입에 풀칠도 곤란한 동포들이 한군데 모여 빈둥대면서도 트럼프부터 김정은에 이르기까지 중국정치부터 일본우익에 이르기까지 세상사를 논하는데 한다하는 정치논객들을 뺨 칠 정도다. 서로 제 말이 옳다고 우겨대는 목소리는 온 동네를 시끌벅적하게 만든다. 이 광경을 목격하고 있노라면 진짜 원숭이에게 감투 꼴이란 말이 실감난다. 한국사회가 재한조선족사회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데는 이유가 충분히 있다 . ‘모든 일은 남을 탓하지 말고 스스로 반성하자.’ 이것이 필자의 일관된 신조이다. 언제 가면 재한조선족사회가 지적으로 변화되어 한국사회로부터 환영받는 집단으로 거듭날까? 지금으로서는 막연해 보인다. 참고로 모든 단체장이 다 그런 것처럼 이 글을 오해할 수 있는데 일부 조선족단체장들은 훌륭한 일을 많이 해서 한국정부로부터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다. 따라서 다수의 재한조선족은 묵묵히 열심히 착실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점 밝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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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룡 칼럼] 재한조선족은 원숭이에게 감투 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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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민족사회의 추진기와 안전띠
- ●김인섭(칼럼니스트) 국내의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즘즈문하다 싶더니 국외에서 일파만파로 확산되며 세상인심이 바늘방석에서 내려 가시방석에 올라앉은 분위기이다. 이 역병이 몰고오는 인명과 재산 피해가 얼마이고 그 파장이 어느 때까지인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남기는 고통과 후유증 무게는 천문학 단위로 헤아려야 할 것만은 틀림없다. 이 초유 병귀(病鬼)의 횡포에 질겁한 인류는 생존과 생업을 위하여 정보통신 시스템과 지능화 기기들과 각종 최신 과학 기술을 리용하며 아득바득 몸부림을 치고 있다.오늘 각 나라마다 국가동원의 체제를 발동하여 전쟁이 방불한 전역을 벌이고 있으니 언젠가 평온한 일상이 돌아올 것이다.다른 일각에서는 코로나 대응 과정에서 형성된 디지털 삶의 양식들이 인간의 일상 생활에 고착되고 있으며 참신한 삶의 모델들이 륜곽을 명료히 드러내고 있다. 신종코로나 바이러스는 호흡도의 비말 전파와 기타 신체적 접촉이 주되는 감염 원인이기에 마스크 착용을 위시한 각종 조치들이 두루 쓰이고 있지만 외출을 자제하고 대소 모임을 최대한 줄이거나 금지하고 사람간 직접 혹은 가까운 접촉을 피하는 이것이 결정적 대책이다.이리하여 정보통신기술과 지능 기기를 리용하여 원격 환경에서 역병을 관리하고 기존 업무를 대체하는 문화가 시운을 타고 확산되게 되는것이다.이것은 이례적인 상황에서 나타난 홀출(忽出) 현상이지만 현대화 정보통신과 디지털 산업의 발전에 따라 구축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플랫홈에서 실재화되고 현상화되는 것으로 봐야 한다.오늘의 코로나 초기에 비상대응책으로 활용되던 이 정보사회의 성과들이 실용 과정에서 놀라운 효률성과 실효성을 나타내어 사람들의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현실이다.물론 아직 상당히 미숙한 초기 단계인 관계로 일정한 혼란도 로출되지만 신속히 익숙해 지고 친숙해 지는 단계에 진입하였다.제4차산업혁명의 산물인 정보통신기술이 원격 비접촉 문화라는 혁신적 변혁을 추진하고 있으며 인류사회는 지능화 시대로 급속히 돌입한다는 명증이다. 미증유의 돌림병 공황이 우리 생활에 대한 충격이 장기화되고 있다.금번 사태에 대처하는데서 원격 비접촉이 필수인 원인으로 재래적 대면식 회의와 달리 화상회의와 원격치료와 같은 교류 수단이 광범히 리용되는 것이 새삼스럽다.코로나바이러스는 나라와 국경 그리고 민족을 불문하고 무차별적으로 치명타를 가하는 포악한 괴질이다.그러므로 그의 예방과 치료에서 근본적 효과를 보려면 독자적 국가가 아닌 모든 나라들과 모든 인류가 손잡고 이겨나가야 하는 것이다.그러므로 역병과 싸움에서 자력갱생이나 각자도생이란 시도는 망녕된 시도란 그 이상이 될 수도 없다.이라하여 금번 코로나의 방역 싸움에서 이뤄지는 국제화 교류도 시류를 따르는 원격 비접촉 방식으로 다양하게 이뤄지면서 디지털 문화를 급속히 확산시키고 있다.바로 코로나와의 전쟁이 인류 시대가 지능화 시대에로 비약하는 또 하나의 도약대가 아닌가 본다. 화제를 돌리고.코로나의 방지와 퇴치를 위하여서는 반드시 물리적 거리를 늘여야 하지만 인간 소통이란 사회적 거리는 더욱 가까이 하여야 실효를 보게 된다.위하여 비대면의 상황이라도 사회 교류는 더 활발하고 소통은 더욱 원활하고 협력 폭도 더 확장해야만 소기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이 모순을 해결하는 만능열쇠가 바로 디지털 수단이다.향후의 인간 생활에 미지의 역병이 불시착으로 습격할 것은 의심할 바 없고 폭우,폭설, 가뭄,홍수,지진 등등 천재지변도 불가피적인 것이다.이러한 재난을 순조롭게 넘으려면 비접촉 생존 방식이 여전히 필요가 아닌 필수로 되게 된다.그러므로 비접촉 문화는 향후의 복잡한 경제,정치,문화 환경에서도 더 폭발적으로 보급해야 한다.오늘 코로나 재난을 헤치고 나가는 조선족 사회의 모습을 보면 자신의 문화력을 바탕으로 지능화 도구의 리용 효과를 가배로 늘리고 월등한 효과를 올리고 있다.다시 말하면 민족 사회의 근저에는 우리의 선진 문화가 튼튼한 저력이 된다는 사실이다.그렇다면 조선족은 지능화 시대에 있어서 사회의 재난 및 평온 여부를 불문하고 생존과 발전의 천혜적인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이다. 미증유의 역병이 원격진료, 화상회의, 원격교육, 공장 무인자동화, 물류 배송 체계, 재택근무 같은 디지털 문화를 조기 정착시키는 기폭제이자 신호탄이 되고 있다.오늘의 코로나 재앙의 고비를 우리는 문화력 탄력을 받아 무난히 넘을 수 있다면 향후 비접촉경제 시대에도 문화가 역시 강대한 생산력으로 승화되어 막대한 작용을 발휘할 것이다.우리가 이 새로운 년대에 민족문화로 더욱 큰 민족 활무대를 열어가자고 한다면 결코 '열에 들뜬 헛소리'가 아닌 현실적 가능서을 가지고 있다. 바야흐로 도래하는 비접촉문화와 비대면경제가 흥기하는 이 뉴노멀(新常态) 시대에 이중언어를 위시한 민족문화는 혼란기의 생존 안전띠로, 안정기의 발전 추진기로 되고 남음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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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민족사회의 추진기와 안전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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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남성과 결혼한 조선족 이주 여성들의 삶의 여정
- ● 방미화 현재 한국사회는 국제결혼의 시대를 맞이하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은 여러 가지 국제적 환경 및 한국의 경제 사회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1980년대,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에 따라 산업부문 특히 중소기업의 생산 관련 직의 인력부족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남과 동시에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에 따라, 그리고 1987년 이후의 노사분규의 급격한 증가로 인해 노동자의 임금수준은 급상승했다. 이와 같은 경제성장과정에서 1980년대 중반 한국내에서는 ‘3D’직종의 일을 기피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였고 이는 아시아지역 개발도상국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 특히 여성 이주 노동자의 유입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한국노동시장의 소비형 서비스 산업의 증가추세와 한국사회에서의 성차별문화, 가족중심주의 인식은 이 부문에서 선호하는 여성노동자의 인력난을 초래하였다. 거기에 덧붙여 한국여성의 결혼기피 및 만혼, 배우자 선택의 차별화, 남성의 경제력약화, 남성성비의 불균형 등등 사회적 요인으로 말미암아 한국 여성배우자와의 결혼이 힘든 한국남성들은 국제결혼으로 그 모순을 해결하려 하였다. 이러한 복합적인 요소 하에 아시아 여러 국가 및 기타 발전도상국의 여성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한국에 입국하게 되며, 정상적인 경로를 통한 한국으로의 노동이주가 불가능한 여성들은 이주의 수단으로 국제결혼, ‘위장결혼’을 선택하여 한국으로 입국하게 된다. 조선족여성들도 당시의 국제적 환경의 흐름 속에서 한국남성과의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으로 입국하게 되였으며 현재 한국의 국제결혼 여성 가운데서 가장 많은 수치를 차지한다. 조선족여성들이 국제결혼의 방식으로 한국으로 입국하게 된 것은 또한 국제결혼행사에 대한 한국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 및 지원과 갈라놓을 수 없다. 한국여성들과 결혼할 수 없는 한국남성들에게 조선족여성과의 결혼은 하나의 대안으로 여겨졌으며 한국정부는 또 그들이 결혼과 관련된 행사에 적극 개입하거나 지원하는 것 외에 노동력이주는 엄격하게 제한하면서 가장 손쉽고 유리한 입국통로로서 결혼을 통한 이주를 허용하고 지원하는 이주정책을 시행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조선족여성들이 ‘결혼’이라는 이주방식을 선택하게 되는 것은 개혁개방이라는 시대 속에서 부풀어오르는 부에 대한 욕망, 자녀부양 등 개인적 선택, 경제적으로 무능력하여 한국여성과의 결혼이 어려워진 남성들의 수요와 이를 보장해주는 이주정책 그리고 상업화된 결혼시장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남성과의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으로 입국한 조선족여성들의 삶의 여정은 어떠한가. 물론 한국남성과 결혼한 여성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통틀어 살펴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으로 입국한 조선족여성들도 학력, 직업 등에 따라 계층적으로 분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한국남성과 결혼하여 한국에서 살아갔던 조선족여성들의 삶의 여정을 부분적으로나마 살펴보는 것은 이주여성의 능동적인 삶을 드러내고 향후 발전 방향을 가늠함에 있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된다. 우선, 한국으로 이주하기 이전 조선족여성들의 삶의 방식에 대해 살펴본다면, 개혁개방 이전 조선족여성들의 생활과 가치관의 변화를 세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 단계는 19세기 중엽 조선반도의 ‘조선인’들이 대량으로 중국에 이주하면서부터 1949년 새중국 창립 이전까지이고 둘째 단계는, 새 중국 창립 이후부터 문화대혁명 이전까지이고 세 번째 단계는 1966년-1976년 사이의 문화대혁명 기간이다. 먼저, 동북 이주 초기에 봉건적인 ‘삼강오상(三綱五常)’, ‘삼종사덕(三從四德)’의 고정관념을 그대로 지니고 온 조선족여성들은 의식주행용 일체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을 어른, 남편, 자식을 위하며 오직 가도만을 위하여 노력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봉사하고 희생하는 것을 유일한 미덕으로 간주하였으며 또한 그러한 의식이 몸에 배인 여성들이였다. 그 후, 1919년 신문화운동과 서방의 자유, 평등, 박애 사상의 전파는 민족의식교육과 구국구민(救國救民)운동 등 반일계몽운동의 중요한 사상적 배경이 되였을 뿐만 아니라 장시기 동안 봉건유교사상의 속박하에 있던 조선족여성들로 하여금 ‘남존여비’, ‘삼강오상’, ‘삼종사덕’ 등 봉건륜리도덕규범을 타파하고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며 자신의 독립적인 인격을 갖추도록 추동하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대부분 조선족여성들은 가부장적인 문화 속에서 현처량모를 인생의 최종가치로 간주하며 순종적이고 페쇄적인 삶을 살았다. 다음으로, 새중국 창립 이후 조선족여성들의 사회적 지위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고 여성들의 가치관 판단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중국은 전반 여성의 노동계급화를 통하여 생산수단을 사회화하였고 가정의 사회화, 집단화를 정책적으로 추진시켜나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족여성들은 남성들과 똑같이 사회에 나가서 생산로동에 참가하였다. 이렇게 본격적인 사회진출을 통하여 조선족여성들은 사회적 지위와 정치적 지위의 향상은 얻어왔지만 동시에 사회와 가정에서 양립해야 하는 이중적 역할의 부담도 상당히 컸다. 도시나 농촌을 막론하고 여전히 남자중심의 가정생활로서 조선족여성들은 모든 가사노동을 전적으로 부담하면서 사회생산활동에도 참가해야 하였기에 사회와 가정의 이중적 부담으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매우 피로하고 힘겨웠다. 그 다음으로, ‘문화대혁명’의 10여 년간 중국의 조선족여성들은 가정생활과 혼인생활도 의식적으로 정치와 연관시키면서 정치운동 참여에서 자기의 사회적 지위, 정치적 가치를 찾으려 하였다. 한마디로 개혁개방 이전 조선족사회에서 여성들은 우선은 가족의 생존이라는 중임을 짊어질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여성들이였을 뿐만 아니라 부지런하고 열정적이며 삶에 있어서의 무한한 잠재력을 갖춘 여성들이였으며 또한 변화에 대한 강한 적응력과 생활력, 포용력의 소유자들이였다. 개혁개방 이후 조선족여성들은 상업에 종사하게 되였으며 도시, 해외로 이동하여 경제활동에 종사함으로써 경제적 지위가 향상시킴과 동시에 점차 과거 가정의 현처양모, 사회에서의 종속적 지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던 모순체로부터 탈리되어 자존, 자주, 자강의 의식을 가지게 되였다. 따라서 혼인관에 있어서도 결혼을 평생 결합으로 간주하고 혼인에 만족하지 않으면서도 이혼하는 것을 명예롭지 못한 일로 여기면서 혼인을 파괴하지 않으려던 의식으로부터 국제결혼도 능히 허용하고 또 출국의 수단으로 국제결혼도 가히 이용하는 혼인의식을 형성하였다. 국제결혼에 나타나는 ‘가짜이혼’ 혹은 ‘위장결혼’ 현상은 그들의 정조관념이 륜리도덕보다 경제를 우선시하는 실용주의에로 변화되였음을 말해준다. 어찌되였든간에 중요한 것은 일부 조선족여성들이 그들이 가족 부양의 의무 때문에 글로벌 차원의 결혼시장으로 편입하기는 했으나 그러한 의무 못지않게 그들 자신의 계층상승이나 새로운 삶에 대한 욕망도 그들이 국제결혼을 선택한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체제의 급격한 변화에 신속히 적응하면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과감히 과거에 도전하면서 새로운 선택을 하는 적극적 행위자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으로 입국한 후 그들의 삶은 순탄하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결혼이란 서로 다른 가정에서 성장한 성인 남녀가 만족스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계속적인 노력이 필요한 적응과정이기 때문이다. 하기에 어려운 점이 하나도 없는 완벽한 결혼생활을 영위하기란 매우 어렵다. 더욱이 서로 다른 력사적, 문화적 배경을 가진 두 남녀가 맺는 국제결혼은 결혼하는 순간부터 많은 모순들을 내재하고 있다. 조선족여성들의 국제결혼 가정도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같은 민족’이라는 점에서 더욱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된다. 예하면, 한중관련 정치적인 뉴스가 나올 경우 남편은 중국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으면서 조선족 안해를 ‘무시’하고 ‘비하’한다. ‘같은 민족’이고 ‘같은 가족’이기 때문에 가족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조선족여성들은 이런 남편의 태도에 ‘정말 실망’하게 되며, 이런 부부간의 생활을 체험하면서 조선족여성들은 “내가 왜 한국에 시집왔는지”, “나는 누구인지”에 대한 고민을 가진다고 한다. 국가의 이해관계에 있어서 의견이 다른 경우 한국남성은 조선족여성을 아내라고 생각하지 않고 ‘중국인’이라고 인식하면서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비난한다. 국가관에 있어서 한국남성들은 조선족여성들이 무조건 남성의 국가관을 순응해야 한다는 가부장적 태도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이 한국남성들은 조선족여성들이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에서 왔기 때문에 더 순종적이고 자신의 말이면 무조건 들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그들은 결혼생활을 통해 사회주의국가인 중국에서의 남녀관계는 한국보다 덜 ‘전통적’이며 상대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조선족여성들은 수십 년 동안 중국이라는 문화권 속에서 사회발전의 흐름에 따라 점차 조선반도의 여성과는 다른, 중국의 한족과도 상이한 조선족특유의 문화를 창조하였고 이중성격의 여성상으로 발전하였다. 그들은 외유내강의 기질과 강한 생활력, 적응력, 포용력의 소유자로서 사업에서는 자신이 자주적이고 남성들과 겨룰 수 있는 강자로 되려고 하며 생활에서도 자신의 생활적 여유와 향수도 누릴 수 있는 삶을 바란다. 하지만 한국 가족구성원들은 조선족여성들의 이러한 고유한 문화특성을 무시한 채 일방적인 적응만 강요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한국에서의 적응기에 있어서 남편으로부터 '소외', 시부모에 대한 '복종', 동서들로부터 받은 '무시'경험, 한국인으로부터 받은 차별적 경험을 하고 있으며, 그들과의 다양한 관계 속에서 삶의 방식을 재형성함과 동시에 민족정체성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즉 조선족여성들은 다양한 가족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신을 버리고 한국 사회에 완전히 적응하기보다는 적절하게 회피하거나 적당히 반항하는 등 자신만의 방어기제와 삶의 전략을 형성하게 된다. 예하면, 중국어구사능력으로 자신만의 우월감을 형성하며 ‘중국인’ 정체성을 형성하기도 하고 또 완전히 ‘한국인’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불가능함을 인식하고 조선족단체에 귀속되여 ‘중국조선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하면서 한국에서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사회적 활동에 참여하는 여성들도 있다. 요컨대, 한국남성과 결혼한 국제결혼 이주 여성들은 새로운 미래와 비젼을 위해 국제결혼 이주를 선택한 능동적인 행위주체들로서 그들은 계층상승 혹은 더 나은 삶에 대한 욕망과 강한 생활력의 소유자들로서 남편과 가족 및 한국 사회의 차별과 편견에 맞서, 완전히 복종하지 않으면서 또 완전히 파괴하지 않는 유연성과 포용력으로 스스로의 삶의 전략을 구사하면서 한국사회에서 가정을 영위해나갔으며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기에 다양한 사회적 활동을 전개하면서 조선족여성만의 독특한 삶의 단면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조선족 국제결혼 이주 여성들의 삶의 여정은 세계 각국 이주 여성들의 초국적인 경험과 삶을 조명하고 향후 이주 여성들의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데 좋은 일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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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남성과 결혼한 조선족 이주 여성들의 삶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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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중물
- ●김경화(재중동포작가) 얼마 전, 시내로 갔다가 어느 한정식 집 앞에서 녹이 쓴 뽐프(펌프)를 보게 되었다. 공능을 상실한 뽐프는 불그스름한 녹을 온몸 가득 바른 채 우두커니 서서 식당 앞에서 하나의 풍경으로, 누군가의 향수를 자극하는 관상용으로 돼있었다. 녹 쓴 뽐프를 마주하고 순간, 내 마음 밑바닥에서 무엇인가 울컥하는걸 어쩔 수 없었다. 고향을 수천리 등진 한국땅에서 마주한 녹슨 뽐프는 시공을 가로질러 아련한 향수를 자극했다. 어린 시절, 물 한바가지 부어넣으면 이내 콸콸 시원한 맑은 물을 올려주던 시골 고향집뽐프가 생각났다. 상수도가 없던 그때 그 시절의 사람들에게 뽐프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마시고 쓰는 가정용에 필요한 모든 물이 뽐프를 통해 얻어졌지를 않았던가. 알뜰한 집에서는 뽐프에 뼁기칠도 자주 해주고, 먼지 들어가지 말라고 손수건만큼한 천도 씌워놓았었다. 한참을 녹슨 뽐프를 마주하고 우두커니 바라보며 나는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한국땅에서 재한동포로 불리며, 현대판 이산가족을 앓고 있는 우리는, 누군가의 마중물일수는 없습니까. 저 녹슨 뽐프에 물 한바가지 부어넣고 지레대질을 하여 맑은 물을 콸콸 나오게 하듯,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줄수는 없습니까 라고. 언제부터인가 시작된 우리 중국조선족의 한국행은 이제 수십만이라는 수자를 기록하고 있다. 중국에서보다는 좀 더 많은 돈을 벌수 있다는 것이 그래서 좀 더 현대적이고 윤택한 삶을 살수 있다는 것이 어제도, 오늘도, 중국 조선족이 한국진출을 하는 가장 주되는 목적이다. 돈을 벌어 잘사는 것, 얼마나 밝고 긍정적인 일인가, 하지만, 이 밝고 긍정적인 화면 뒤에는 수많은 어둠이 드리워져있는것 또한 현실이다. 오랫동안 떨어져있는 관계로 부부사이가 소원해지고, 불신이 깊어지고, 수많은 가정이 해체되거나, 해체위기에 서있다. 중국에 있는 가족은 한국에 있는 가족이 돈을 적게 보낸다고 원망하고 전화가 자주 안온다고 원망한다. 반면 한국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돈을 벌고 있는 동포들은 스트레스와 고된 일에 시달리는 자기들을 가족이 이해하여주지 못하고 자기들의 고생을 알아주지 못한다고 불만한다. 이런 것들이 쌓이다보면 전화상으로도 좋은 말들이 오가지 못하고 점차 서로가 소원해질 수밖에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아이들을 옆에서 돌보지 못하는 부모는 그저 미안한 마음에 금전으로 모든 것을 보상하려 하고, 아이는 부모가 돈 이외에 해준게 머가 있냐고 소리 지른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부를 포기할 수 없다. 돈이 대체 뭐냐고 하지만, 돈이 없으면 생존조차 할 수 없는게 현실이 아니던가. 결국, 우리는 이것도 저것도 확실하지 못한 채, 모순 속에서 서로를 원망하고 불신하고, 상처만 입어가면서 오늘도 내일도 불안하고 위태위태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중국조선족의 뼈아픈 삶의 현실이다. 나는 조선족의 한국진출을 긍정적으로 본다. 마침내 우리는 한국행을 통하여 부를 얻었고, 많은 것을 배웠고, 소중한 경험을 쌓았고, 내 고향에서는 미처 몰랐던, 많은 소중한 것들을 새삼 깨우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나 역시 너무나도 고생스럽고 힘들어서 다시 떠올리기조차 싫을 정도로 한국생활이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얻은 것이 더 많은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가정들은 지금 위기에 직면해있는것 또한 현실이다. 가족이란 한집에서 한솥밥을 먹고 함께 잠을 자면서 알콩달콩 부대끼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 서로 헤여져있으니 아무래도 라는 말,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말, 참으로 말하고 들을수록 맥만 빠지는 소용없는 말들만 주절주절 어제도 오늘도 되풀이하고 있다. 깊은 한숨을 쉬고 맥 빠진 탄식을 한다. 어쩌면 우리는 뽐프가 아닐지 모르겠다. 누군가 나라는 뽐프에 부어줄 마중물을 바라고있는건 아닐지 모르겠다. 한꺼번에 충분한 량의 마중물을 받았을때에야만 비로소 작동하는 저 뽐프처럼, 조금씩 찔끔찔끔 넣어서도 안 되고 한꺼번에 충분한 량을 넣어주는것과 동시에 지렛대를 반복적으로 작동시켜야만 밑에 있는 물을 끌어올릴 수가 있는 뽐프처럼, 물 넣는 것만 생각하고 지레대질을 소홀히 해서도 안 되고 무작정 지레대질만 힘차게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닌, 마중물의 량과 지레대질의 빈도와 강약, 모든 것이 맞물릴 때 비로소 자기 기능을 발휘하여 저 땅 밑에서 물을 끌어올려주는 뽐프가 아닐까 모르겠다. 누군가 마중물을 넣어주고 지레대질을 해줘서 보기만 해도 시원해질 것 같은 맑은 물을 콸콸 뿜어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괴로운 뽐프가 아닌지 모르겠다. 마중물을 기다리는 뽐프이기보다는 우리 스스로 마중물이 되는 건 어떨까. 저 땅속 맑은 물을 끌어내는 뽐프의 지혜를 다 배우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뽐프와 마중물의 그 끈끈한 애정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현실을 바로 보고 무엇이 올바르고 무엇이 가장 소중한 것인지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뜨거운 가슴을 열어 내 사랑하는 사람과 내 가족과, 내가 뜨거운 눈물을 가슴으로 삼키며 지키고자 떠났던 것들을, 지키고자 떠나보내야 했던 그 사람을, 그 사랑하는 것들을, 그 목마른 애정과 그리움들을, 그 눈물겨운 것들을 인내해야 하는 그 이유를 한번쯤 다시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냉정하고 차가운 머리로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이 과연 무엇인지, 내게 가장 소중했던 건 과연 무엇이였는지, 지금 나는 무엇을 지키고, 또 무엇을 위해 마음을 다잡고 눈물을 삼켜야 하는지 한번쯤 생각해보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녹슨 모습으로 의연히 서서 풍경이 되고 누군가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해주고 마음을 울려 나를 되돌아보게 해준 뽐프를 다시 바라본다. 햇빛에 반사된 녹이 진 붉게 빛난다. 나는 한발 가까이 다가가 손가락을 내밀어 녹을 문질러본다. 깔깔한 감촉이 손가락을 타고 온몸 가득 스며든다. 햇빛이 찬연하다. 녹슨 뽐프가 햇빛아래 반짝반짝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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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를 기리는 사람들
- ●김 혁(재중동포소설가) 윤동주 연구의 결정판 "윤동주 평전"의 저자 한국 소설가이자 사학가인 송우혜.宋友惠와 윤동주의 릿쿄대학 후배이자 연구자인 야나기하라가 만난 자리에 나의 인물전 "윤동주"가 등장했다. 송우혜는 1947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대 간호학과에 입학하여 중퇴하고 한신대 신학과에 편입하여 졸업했다. 이화여대 대학원 사학과(한국사 전공)에서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1982년 한국문학 신인상, 1984년 삼성문예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눈이 큰 씨름꾼 이야기≫, 장편소설 ≪남도행≫, ≪저울과 칼≫, ≪투명한 숲≫, ≪하얀 새≫, 산문집 ≪서투른 자가 쏘는 활이 무섭다≫ 등이 있고, 평전으로 ≪윤동주 평전≫, ≪송창근 평전≫ 등이 있다. 또 연변지역 동포들의 삶 등 다양한 소재를 통해 우리의 시대정신을 탐구하는 『스페인 춤을 추는 남자』(1998) 등이 있다. 한국사 관련 논고와 학술논문으로는 「청산리전투와 홍범도 장군」, 「북간도 대한국민회의 조직형태에 관한 연구」, 「대한독립선언서(세칭 무오독립선언서)의 실체」,「이은. 李垠의 정략결혼연구─언론보도 (1907~1920)를 중심으로」(석사학위론문) 등이 있다. 역사적 소재 및 당대의 사회상을 통해 인간의 삶과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는 평을 받고 있다. 각종 언론매체에서 예리하게 시사문제를 논하는 칼럼니스트로서도 이름이 높다. 송우혜가 되살려낸 윤동주의 순결한 초상 『윤동주 평전』은 다양한 주변 인물들과 함께 살아간 다채로운 삶의 자취, 북간도의 역사와 당시의 시대상황, 일경의 극비취조문서, 일본 경도재판소의 판결문 등을 비롯한 각종 자료들에 대한 예리하고 집요한 추적과 분석을 통해 민족시인 윤동주의 삶과 시를 정리한다. 야나기하라 야스코.楊原泰子는 1946년생으로 릿쿄 대학 문학부 사학과 졸업했다. 야나기하라 씨는 릿쿄대학 사학과 졸업생으로 윤동주 시인의 후배가 된다. 20여 년 전 시인 이라바키 노리코의 에세이에서 '릿쿄대학에 유학했던 시인 윤동주'에 대한 문장을 읽고 윤동주 시인의 발자취를 좇기 시작했다. 시인이 일본에 남긴 발자취를 조사하고 체포시 압수당한 장서 찾기를 계속하고 있다. 2008년 릿쿄대 졸업생, 교직원과 함께 ‘윤동주 시인을 기념하는 릿쿄 모임’을 설립하고, 시인의 기일인 2월 16일 전후로 ‘윤동주 시인과 함께’를 매년 개최해 왔다. 윤동주가 숨진 곳에서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기억하고 미래지향적인 자세를 보여준 이들의 행보는 우리에게 많은 귀감으로 되고 있다. 기라성 같은 윤동주 연구의 장인들 앞에서 필자의 작은 책자가 초라할 뿐이다. 격동의 지난 세기, 북간도 용정에서 태어나 한반도와 일본열도에 자취를 고루 남긴 윤동주는 아시아 문인들중 유일하게 한국, 중국, 일본에 모두 기림비가 세워진 시인이다. 이에 연구가들은 "세계가 서로 다른 가치관으로 충돌하고 있는 오늘날 윤동주는 오욕의 역사를 씻고 한, 중, 일의 새로운 유대를 잇는 문화사자의 역할을 은연중 하고 있다"고 정평한다. 시인이 그 고난과 격변이 세월에 쓴 시는 시대와 국경, 언어의 벽을 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다. 시 속에 담긴 하늘과 바람과 별의 의경.意境은 중국의 "북간도",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넘어 같은 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아시아 사람의 생각을 대변한다고도 할 수 있다. 윤동주의 고향 용정에서 십 수 연간 오롯이 시인에 대한 연구와 기림사업에 몰두 해온 필자로서는 이념과 역사의 벽을 넘어 한. 중. 일에서의 윤동주 연구가 더 활발하게, 더 협력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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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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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를 기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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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룡 칼럼] 변소간보다 더 많은 사장님, 회장님
- ●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도시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전인 1980년대까지 중국 도시골목마다 공용변소가 많았고 아침이면 줄 서 순번을 기다리던 풍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정확한 통계는 모르겠으나 당시 연길시에 1천여 소에 달하는 공용변소가 있었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정확한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무튼 공용변소가 그만큼 많았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중국 개혁개방 직후인 1980년대 중후반부터 경제 분야에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남에 따라 독립적인 경제활동이 법적 인가를 받은 00꿍스(公司)가 자고 깨면 생겨날 정도로 우후죽순마냥 많이 나타났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당시 다수 꿍스(公司)들을 내실도 실적도 없고 하여 허수아비라는 뜻이 담긴 피바오꿍스(皮包公司)라 불렀고 꿍스(公司)의 법인(法人) 경리(經理)들을 빗대어 “경리가 변소간보다 더 많다.”고 비꼬았다. 당시 피바오꿍스(皮包公司) 중국식 경리들을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사장님들이다. 그러니까 바꿔 말하자면 “사장님이 변소간보다 더 많았다”는 말이 성립된다. 중국에선 독립적인 경제활동을 하는 업체의 법인을 경리 혹은 규모가 크면 총경리라 부르고 규모가 굉장히 작은 업체 혹은 구멍가게의 법적등록인은 보편적으로 ‘라오반(老板)’이라 부르고 개별적으로 ‘짱꾸이(掌櫃)’라 부른다. 한국은 규모가 크든 작든 하다못해 부부가 운영하거나 심지어 혼자 운영하는 구멍가게 책임자조차도 전부 사장이라 부른다. 거기에 한국식 특유 경어를 붙여 ‘사장님’이라 부른다. 뿐만 아니라 중국에선 길가에서 낯선 사람과 대화할 경우 상대를 높여 사부(師傅)라 부르는데 비해 한국에선 이럴 경우에도 상대를 ‘사장님’이라 한다. 한국엔 ‘사장님’이 어떻게나 많은지 인파가 북적거리는 동대문상가에서 “감사장!”라고 부르면 열에 다섯이 머리를 돌린다고 한다. 이 경우 김씨가 많다는 말이 되겠지만 그만큼 ‘사장님’의 호칭이 남발되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중국과 한국에서 사장이란 호칭이 서로 다르게 사용될 뿐만 아니라 회장이란 호칭도 사용법이 엄청 다르다. 중국에선 계열사를 갖고 있는 대기업 오너를 ‘동사장(董事長)’이라 부르는데 비해 한국에선 ‘회장님’이라 부른다. 그리고 중국에서 말하는 주임(主任)이 한국에선 회장이 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이를테면 시골마을이나 도시 부녀회 책임자를 중국에선 ‘주임’이라 부르고 한국에선 ‘회장’이라 부른다. 정부기구도 중국에서는 인대(人大) 책임자를 중앙기구는 위원장이라 부르고 성급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주임이라 부른다. 화교사무실, 외사사무실 등등의 많은 기구의 책임자도 주임이라 부르는데 비해 한국에선 정부기구의 모든 직책에 거의 다 ‘장(長)’자를 붙이는 호칭이 보편적이다. 전형적인 실례로서 중국에선 가도(街道) 책임자를 주임이라 부르는데 비해 한국에선 ‘장(長)’자를 붙여 ‘동장(洞長)’이라 부른다. 중국과 한국에서 사장과 회장이란 호칭이 왜 이토록 다르게 사용되고 있을까? 그 이유를 알려면 먼저 사장이란 ‘사(社)’의 역사적인 의미부터 살펴보고 또 회장이란 말의 유래를 알아야 한다. <설문해자>에 의하면 ‘社’는 “흙을 뫼어놓아 사가 되었다(堆土爲社).”고 한다. 그런데 아무 사람이 아무 곳에서 아무렇게나 흙을 뫼어놓으면 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한 개 부족이 조상을 기리기 위한 징표로 흙을 쌓아놓았고 그 징표를 중심으로, 즉 사(社)를 중심으로 족장이 백성을 거느리고 생산 활동을 진행하고 제사를 지내며 종교 활동을 하면서 삶을 영위한다. 사회란 이 사(社)에 모여서 삶을 영위한다는 뜻에서 유래된 말이다. ‘사(社)’란 뜻이 워낙 이렇듯 거창하기에 중국역사엔 ‘사장(社長)’이란 말이 없었다. 지금 한국에서 남발로 사용하고 있는 사장이란 호칭은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다. 일본이 동양 삼국에서 서양의 근대화를 따라 배우는 선두에 섰고 많은 서양의 어휘들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지어낸 것들, 이를테면 과학, 화학, 물리, 지식인 등등이 일본이 지어낸 어휘들이 중국에 수출되었고 따라서 한반도에도 전해졌던 것이다. 그 중에 사장이란 호칭도 포함되어 있다. 변소를 화장실(けしょうしつ:化粧室)이라 하는 용어도 일본인이 지어낸 어휘이다. 일본이 사장이란 말을 지어낸 것은 중국식 번역인 서양식 꿍스(公司)를 일본인은 중국역사문화에 결부시킨 결과였다. 즉 사람이 모여 기도 올리며 종교 활동을 진행하는 곳을 ‘신사(神社)’라 부르는 것처럼 사람이 모여 경제활동을 벌이는 업체를 ‘회사(會社)’라 지어내고 그 책임자를 사장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일본인은 중국역사문화적인 용어인 사회를 거꾸로 하여 회사란 용어를 지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즉 사회를 거꾸로 하면 회사가 되는데 사회는 ‘사(社)’가 포인트이며 사를 중심으로 모인다는 뜻이라면 회사는 ‘회(會)’가 포인트로서 사람이 모여 ‘사(社)’를 꾸린다는 의미이다. 일본인은 이 사람이 모이는 것을 여러 포기라는 표현을 빌려 ‘주식회사(かぶしきかいしや(株式會社)’라고 불렀다. 사장이란 호칭은 본래 이렇듯 주식회사 대표자를 부르는데서 유래되었는데 지금 한국에선 구멍가게 주인, 길 가는 아저씨한테도 사장님이라 남발하고 있다. 회장이란 말도 중국역사에선 그다지 사용되지 않는 어휘인데 일본이 동양에서는 매우 낯설었던 서양의 상공회 같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조직의 책임자를 회장, 또 NGO단체 같은 사람이 많이 모여 시민 활동하는 조직의 책임자를 역시 회장이라 지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과 한국은 일본의 영향에 의해 사장, 회장이란 호칭을 도입하였으나 중국에선 그다지 사용되지 않고 있는데 반해 한국에선 진짜 변소간보다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를테면 중국에선 큰가마밥 제도가 실시되던 인민공사 책임자를 사장이라 불렀고 당시 사장이 관할하는 인구는 적어도 수천 명이었다. 또 신문사, 출판사 책임자를 사장이라 부르기는 하였으나 사장보다 편집과 편제(編制)를 총괄한다는 의미로서 총편(總編)이란 호칭을 더 선호하였던 것이다. 신해혁명 전 역사에 없었고 겨우 수십 년 전의 일이다. 그렇다면 왜 중국은 사장과 회장 호칭을 적게 사용하는데 비해 한국에선 남발로 사용하고 있을까? 첫째 한국은 중국보다 일본문화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 둘째 한국인은 멋을 추구하는 겉치레 문화를 즐기기 때문에 아무데나 무작정 ‘長’을 붙이기를 굉장히 선호한다. 셋째 양반과 상놈의 문화에 한이 맺혔던 한국인은 일단 ‘長’을 붙이면 출세의 의미가 다분하기에 사장, 회장을 남발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자유 민주사회에 진입함에 따라 각종 비영리단체 등록이 쉬워지고 따라서 그 단체들을 협회라 부르는데서 회장이란 호칭이 남발되고 있는 것이다. 재한조선족사회는 상기 한국사회 물에 듬뿍 젖어 역시 중국에서 사용하지 않았던 사장, 회장 호칭을 남발하고 있다. 조선족이 한국에서 업체를 꾸려봤자 무역업체나 제조업체는 매우 적고 또 대규모의 음식점이 없고 절대다수가 소규모의 음식점이나 식품상점 등 구멍가게를 운영하면서 명함에 사장이라 박고 공중장소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스스로 ‘사장’이라 말한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한국인은 보편적으로 스스로에게 사장을 붙이지 않고 “00를 운영하고 있는 00입니다.”라고 겸손하게 자아소개 한다. 그리고 한국식을 따라 배워 영양가 없는 협회들을 잔뜩 만들어 놓고 실체도 내실도 없이 회장님이랍시고 어깨에 힘주고 남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재한조선족사회 다수 사장님, 회장님들은 중국에선 상상도 못할 일들, 즉 한국에서 ‘長’을 스스로 붙이고 아Q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정신건강에 유리하므로 무조건 나쁜 일이라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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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룡 칼럼] 변소간보다 더 많은 사장님, 회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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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 ● 김경화 내 휴대폰화면에 슬라이드로 지나가는 문구다. 한국에 온지 얼마 안 되던 어느 날엔가 나는 이런 문구를 휴대폰화면에 넣고 있었다. 서로 다른 문화에 차이에 부대끼고, 힘든 일에 지쳐가고, 가족도 그립고, 설상가상으로 한국에 온 이튿날에 화장실문에 새끼손가락을 끼여 손톱 하나가 빠져나간 채로 일을 해야만 하던 극한의 상황속에서였다. 중국조선족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꿈꾸어봤을 코리안 드림, 열악한 환경속에서 고된 일을 해야 하고, 수모와 냉대가 아무리 빗발친다고 떠들어도 코리안 드림을 향한 그 거센 물결을 막을 수 없는 것은 아무래도 임금의 차이가 아닐까, 거기에 내 조상의 뿌리가 있는 고국이라는 점이 포인트를 더해 코리안 드림의 유혹은 한국 문이 열려서부터 지금까지 빛을 바래지 않고 있지를 않는가!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다섯 살 배기 아들애의 손을 놓기가 죽기보다 싫었음에도 나는 사증도장이 찍힌 여권을 들고 회심의 미소를 짓지 않았던가?! 사람이 살아가는데 돈보다 소중한건 얼마든지 있다는 말을 나는 찬성한다. 그렇지만 또한 돈보다 더 소중한 것도 없다는 말도 반대하지 않는다. 그만큼 돈이라는 이 매개물은 때론 어마어마한 위력을 갖고 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튼 나의 한국행도 예외는 아니였다. 과연 내가 한국이라는 땅에 가서 가장 힘든 3D업종 밑바닥에서 적응해 낼 수 있을 거라는 걱정도 앞섰지만 남하는데 내가 못 하랴는 배짱 하나를 가지고 떠난 터였다. 이제 활은 이미 시위를 벗어 난지 오랜 터, 내겐 앞으로의 질주만 있어야 할뿐 후퇴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이였다. 하지만 처음 해보는 식당일, 그것도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정신없이 뛰어야 하는 자장면 집 서빙일, 손님들의 이런저런 잔소리와 뜬금없이 툭툭 쏘아대는 주인들의 핀잔에 몸과 마음이 매일 매일 혹독한 고문을 견디는 격이였다. 잠간 짬이 나서 밖을 내다보면 엄마가 가는 뒤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아들애를 재워놓고 밤중에 도망치다 싶이 비행기를 타버린 생각에 가슴이 미여졌다. 당금이라도 엄마 하고 아들애가 달려올 것만 같아 눈물이 나던 그 나날, 나는 나 스스로 희망의 빛을 내게 던지기로 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그것은 그 혹독한 시련 같은 나날을 견디어 내야 한다는 나 스스로의 각오이기도 했고, 나보다 더 마음이 아플 아들애와 남자의 몸으로 아들애를 돌보며 나 못지않게 고생하고 있을 남편에게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오늘을 이겨나가야만 내일에 웃을 수 있다는 어떤 결의 같은 것이였다. 그럭저럭, 눈이 내리던 새벽에 길을 떠난 지가 어제 같은데 봄, 여름 가을이 지나고 또 다시 눈발이 흩날리는 겨울이 도래했다. 한국 땅에 발을 들여 놓은 지도 십여개월, 이제 환경에도 적응이 되었고 일도 손에 익었다. 새끼손톱도 새로 자라나 거짓말같이 원상복귀 되었다.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이리라. 지금 한국에 온 중국조선족을 비롯하여 세계가 경제위기로 고난을 겪고 있다. 특히 한국에 있는 중국조선족들은 지난해에 비해 반으로 훌쩍 줄어든 환율로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고 있다. 나 역시 같은 처지이기에 그 마음을 잘 안다. 하지만 걱정한다고, 한숨을 쉰다고 머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나 혼자의 고난도 아닐진대, 우리가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한, 내가 맡은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한, 모든 것은 지나가고 반드시 밝은 빛이 우리 앞에 도래할 것임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세상에는 영원한 행복도 영원한 슬픔도 없지 않을까?! 모든 건 잠간 우리 곁에 손님처럼 머물고 지나 가는게 세상사가 아니던가? 행복에도 100% 도취되지 말고, 슬픔에도 완벽하게 절망하지 않는, 모든 건 지나가리라는 0도 심리로 세상을 사는 것 또한 삶의 한 지혜가 아닐까?! 힘든 오늘을 사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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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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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룡 칼럼] 코로나19와 21대 총선
- ●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때는 2016년 3월 21일 저녁, 서초구에 위치한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사무실에서 독서모임이 있었다. 토론지정 책은 미국 대법관을 40여년 지낸 더글라스의 인물평인 <더글라스 평전>이었고 직접 저자가 참석하여 강의했다. 여느 모임도 마찬가지. 처음에는 ‘주제’를 둘러싸고 한참을 얘기를 나누다 나중에는 시국에 대한 담론이 오가기 마련이다. 그날 시국담론은 다가오는 4.13 제20대 총선이었다. 그로부터 2년 전인 2014년 ‘4.16 세월호 사건’을 겪고 나서 민심이 크게 등 들리고, 2015년 12월 말경 정윤회 문건 파동이 있었고 그때부터 최순실 이름이 슬슬 거론되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대통령은 서열 3위라는 충격적인 말까지 나돌았는데도 보수정권은 전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오히려 아주 잘하고 있다는 도취에 빠져 있었다. 20대 총선을 앞두고 보수당은 180석 확보는 따 놓은 당상이라는 듯 오만에 빠져 있었다. 설마 설마하면서 불안감을 느끼는 쪽은 당연히 진보진영이었다. 민변은 진보단체이기 때문에 그날 모임에서 진짜 그렇게 된다면 나라 앞날이 암울하다고 큰일이라는 반응들이었다. 이에 대해 <더글라스 평전>의 저자인 안경환 교수 왈,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나라 국민의 의식수준이 나라가 망가질 지경으로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과연 안경환 교수의 예언대로 보수당은 패배했고 진보당이 이겼다. 20대 총선 결과를 통해 필자는 안경환 교수의 탁월한 식견에 탄복했다.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생활에서 교수, 변호사, 고급관료들을 많이 접촉했어도 안경환 교수의 식견을 초과하는 엘리트를 만나보지 못했다. 민주당은 20대 총선의 순풍을 타고 그 후 있은 2017년 제19대 대선, 2018년 제7회 지방선거, 이번 21대 총선까지 승리해 4연승을 달려왔다. 이 4연승 중에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이 1987년 민주화 운동 이래 가장 좋은 성적을 거뒀다. 이렇듯 민주당이 연승가도를 달리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일각에서는 민주당이 잘해서가 아니라 보수당이 너무 못해서 민주당이 반사이익을 얻은 결과라고 주장한다. 박근혜 탄핵 이후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에 대해 반성도 성찰도 없고 변화도 없고 혁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보수당은 그 동안 변화와 혁신을 입이 아프도록 외쳤으나 그것은 눈속임에 지나지 않았고 실제적인 행동은 없었다. 총선을 앞두고 보수당은 물리적인 통합은 이뤄냈으나 화학적인 결합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또 당명은 미래통합당이지만 실제로는 ‘과거통합’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치9단으로 불리는 박지원 의원은 21세기 국회의원이 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의원직을 사퇴한다는 말을 함부로 던지지 말 것. 둘째, 삭발하지 말 것. 셋째, 단식투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황교안 통합당 대표는 국회의원이 아니기 때문에 던질 의원직이 없지만 머리 깎고 밥을 먹지 않는 운동을 여러 번 했고 쩍하면 광화문에 가는 장외정치를 감행하여 낡은 정치, 구태정치라는 이미지로서 국민들의 마음을 떠나게 했던 것이다. 게다가 보수당은 과거 낡아빠진 정치 수단이었던 ‘좌파 빨갱이’ 이념공격이 유권자들에게 전혀 먹히지 않는 시대가 왔으면서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효할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해 듣기 거북한 공격을 퍼붓는 바람에 유권자를 등 돌리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정녕 빨갱이란 무엇인지? 보수당 국회의원 중에 제대로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도 모르고 그냥 빨갱이 공격이 여전히 난무하니 국민들을 식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외적 요인은 변화의 조건이고 내적 요인이야말로 변화의 근거라는 철학적 논리가 있다. 야당이 잘못해 여당이 어부지리를 얻은 부분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없는 사실이나 어디까지나 당사자가 잘해야 큰 성과를 이룩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가 뭘 잘했나? 크게 두 가지로 접근할 수 있다. 하나는 투명성이고, 다른 하나는 시민의식 강화이다. 굳이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국가의 존재이유인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는 의무를 지킨 것이다. 아주 상식적인 얘기지만 전 정권은 국민의 안전에 소홀했다. 그 예가 바로 세월호 사건이다. 박근혜 정부가 밀리게 된 계기가 바로 세월호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메르스 사태 때도 전 정권은 대응이 미진해 말밥에 올랐던데 비해 이 정부는 정신을 차리고 국민 안전 지키기에 최선을 다 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의 대응에 있어서 한국은 지구촌의 스승으로 급부상했다. 여러 가지 이유 중에서 필자는 한국은 정보를 투명성 있게 국민들에게 공개한 점을 높게 평가하고 싶다. 지금까지 선진국이라고 동경을 받아왔던 미국과 서구 여러 나라들 및 일본은 이번 사태에서 정보가 투명하지 못했다. 물론 속이고 싶어 속인 것은 아니겠지만 의료시스템문제와 국가 방역시스템이 낙후되어 투명하지 못한 것도 있고 일본처럼 천방백계로 올림픽을 치르려는 욕심에 일부러 숨겨온 이유도 있을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정보가 투명하지 못하면 국민들의 신뢰를 받지 못한다. 이들 선진국에 비해 한국은 정보의 투명성을 확보했고 이로서 국민은 정부를 믿고 관과 민이 정보를 공유하고 협력하는 좋은 방향으로 흘러왔기 때문에 한국이 외신의 찬양을 높게 받고 있는 것이다. 아주 상식적인 말로 하자면 정보가 투명하다는 것은 솔직하다는 얘기이고 인간은 부부, 부모와 자식, 형제, 친구 사이에 서로 솔직하지 못하면 거리가 멀어지고 솔직해야 마음으로 가까워진다. 비즈니스조차도 서로 진정성이 있어야 오래간다. 한국국민은 정부의 정보 투명성을 좋게 여기고 믿고 따르고 심지어 이번 총선에서 정부가 여러모로 허물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믿어주자는 심리 덕분에 표를 많이 주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 민주주의에 대해 별로 탐탁지 않게 여겨왔던 사람이다. 한국 민주주의는 너무 시끄럽다. 사회주의체제하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면 모두 같은 생각일 것이다. 너무 시끄러운 나머지 나라가 별로 나라 같지 않다는 생각마저 들 때가 많았다. 예를 들어 야당은 반대만 있고 대안은 전혀 없이 시비만 걸고 국민을 불안하게 만든다. 대통령을 함부로 하야하라고 외치고, 대통령 외교를 천렵질(낚시질)이라고 비하하고 심지어 대통령을 아주 막말로 ‘동네 강아지’ 대하듯 함부로 하는 저질 행위도 그 어떤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아 나라가 시끌벅적해서 불안해 날 때가 많다. 물론 정권의 성향에 따라 시끄러운 상대를 대하는 방법과 방식이 다를 수 있다. 보수정권 같으면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언론을 장악해서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만든다든지, 정부에 지극히 맞서는 집단에 물대포라도 쏠 사건을 이 정부는 전혀 물리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시끄럽게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다. 태극기가 나라의 상징이지만 일부 보수단체가 애국이란 명분으로 태극기부대를 만들어 정권을 흔들어도 정부는 물리적인 탄압이 없었다. 정부가 도가 지나친 반대 세력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점잖아서 무능하다는 소리까지 들어왔다. 이 정부가 도가 지나친 반대 세력에 잠잖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대한민국 인권신장을 취지로 만든 ‘민주주의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창업 맴버이고, 지금 문재인 대통령, 경관(京官)인 박원순 서울 시장, 인구가 가장 많은 경기도 이재명 지사 모두 민변 출신이다. 그래서 이 정부가 더욱 점잖다. 그렇기는 하지만 한편 정권이란 힘이다. 정권을 갖는다는 것은 힘을 발휘하라는 의미이다. 그런데도 힘을 전혀 쓰지 않고 저토록 점잖게 대하면 앞으로 극단적인 반대 세력들을 어떻게 이겨내려고 저럴까? 하는 의문을 수없이 해왔다. 아무리 자유민주주의라 하지만 무슨 정당들이 그토록 많은지 정당투표용지가 48센티이고 비례정당이 35곳이 기재되어 있다. “키 작은 사람은 감당키 버거울 것”이란 발언을 해 여론의 물매를 맞아 이미지에 손상을 입은 통합당 황교안 대표의 말처럼 선거민주주의 이래 투표용지가 가장 길었다. 35곳 정당 중에 들어본 정당은 거푸 대여섯 곳 넘지 않고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정당들이 선거를 앞두고 임시 창당한 것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무리 자유민주주의라도 거를 것은 거르고 국민들의 눈 높이에 맞는 정당을 투표용지에 올리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닌가는 의문을 가졌었는데 그런 작업은 전혀 없었다. 아니 그런 작업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만18세부터 전체국민에게 매달 150만원 준다고 하고 코로나환자는 1억씩 준다는 정당을 누가 믿을 것인가? 그러나 전혀 말이 안 되는 이런 황당무계한 장당조차 이름을 올렸으니 투표용지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더욱 한심한 것은 선거를 앞두고 공영방송인 KBS선거방송 타임에 기독교당 후보인 탈북자 여성이 출연하여 정권을 함부로 매도하고 구속된 전광훈 목사를 ‘영웅’으로 칭송하는 목소리를 함부로 발설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만약 조선족 후보가 그 탈북여성처럼 공영방송에 출연하여 함부로 정권을 매도하고 구속된 목사를 찬양한다면 한국사회의 반응이 어떨까? 그 결과는 뻔하다. 정신병 취급을 받지 않으면 당장 추방하라고 한바탕 난리일 것이다. 여기서 탈북자와 조선족을 비교하자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어떻게 ‘굴러온 돌’이 대한민국의 은혜에 대해 ‘원수’로 갚을 수 있는가는 것이다. 보수정부든 진보정부든 모두 대한민국 정부다. 탈북자는 대한민국 정부의 혜택을 입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현재 무슨 정부든 간에 정부를 매도하는 행위는 어쩐지 용납이 가지 않는다. 또 국민들이 아파하는 세월호 사건을 막말로 대한다든가, 5.18광주항쟁을 폄하한다든가, 대통령을 너무 막말로 공격한다든가 하는 정치인이 보수진영에 많아서 다수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어왔다. 어중이떠중이 정당들, 태극기부대로 불리는 애국당, 기독교당이라 불리는 극단보수단체, 막말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지 못하는 막말 정치인들은 모두 이번 총선에서 궤멸 당했다. 만약 정부가 공권력을 투입하여 제거하려고 한다면 큰 파장을 불러올 것이고 후유증이 심각할 것이다. 이번 총선은 정부의 공권력이 아닌 국민의 한 표 한 표로서 이들 세력들을 말끔하게 정리해버렸던 것이다. 만약 정부의 힘으로 탄압한다면 반발이 엄청 셀 것이지만 국민의 표로서 심판 받으니 할 말을 잃고 조용히 지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대로 된 민주주의 1인1표의 정치의 본질이자 기본 정신이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의 표현을 빌자면 이것이 바로 ‘시민적인 역량강화’ 정치시스템이다. 14세기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은 5천만의 목숨을 앗아갔다. 당시는 국가적인 방역시스템도 없었고 마스크도 없는 상황에서 교회에 모여 예배를 계속 강행한 결과 감염이 더욱 심각했던 것이다. 이렇듯 큰 전염병을 겪고 나서 생각 없이 감성적으로만 믿어왔던 신에 대해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고 따라서 르네상스의 바람을 일으켰던 것이다. 한국도 이번 코로나19를 통해 사회적으로 큰 변화가 생겨났다. 우선 정부의 대응에 국민이 이번처럼 신뢰를 가져본 적이 없다. 시민의식이 이번처럼 강화된 적이 없다. 시민의식 강화라는 이 훈풍은 매우 힘든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치르게 되는 21대 총선까지 이어져서 또 한 번 지구촌을 깜짝 놀라게 했다. 미국은 오는 11월에 대선이 있다. 은근히 한국 총선을 지켜봤다. 결과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나서 아주 성공적으로 질서정연하게 치른 한국총선을 따라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이번 21대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을 거둔 것에 나는 별 관심이 없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이번 총선을 통해 정부의 공권력이 아닌 시민의 역량으로 부정세력을 정화하는 정치시스템에 매우 높은 점수를 부여하고 싶다. 더불어 이번 총선을 통해 한국사회는 엄청난 변화와 발전을 가져올 것이고 나라가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업그레이드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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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룡 칼럼] 코로나19와 21대 총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