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20(월)
 


지난 7월 21일, 중한문화교류협회의 사무국장 루비님이 한국에 온다고 하여 싱록수님이 조직한 모임에 가니 뜻밖에도 <연변일보>사의 장 경률 기자선생님을 만났었다. 1983년부터 룡정시 주재 기자로 계시면서 우리들의 통신 사업을 이끌어 주시던 분이신데 한국에서 만나니 그 기쁨 비할바 없었다.

저의 생애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희망을 안겨 준 것은 무엇이였던가? 그제날 일들이 주마등처럼 안겨왔다. 무산계금문화 대혁명의 격류속에 휘말려 정규적인 교육도 못 받고 중학교를 필업했다는 종이장 하나만 갖고 귀농의 대오에 가담한 저는 항상 배움의 갈증에 목말랐던차 제 마음을 비춰 준 등불이 있었으니 삶의 등불이라 하면 적절할 것이다.

1983년, ㄷ향 선전 사업을 책임지신 김송범님께서 각 촌에 2명씩 선발하여 통신원 학습반을 꾸렸었다. 그날 학습반에 참가하니 장 기자 선생님이 오셔서 통신원의 역할, 기사 쓰는 법, 그리고 짧은 기사 쓰고 원고 평의도 하였다. 그 당시 처음에는 인원이 많다가도 가을에 가면 이런저런 원인으로 떨어지고 몇 명이 견지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봐도 노루꼬리만한 소식이라도 기자 선생님들의 정성어린 수개가 없었더라면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와중에서 저는 통신원의 역할을 알게 되였으며 삶의 진가를 알게 되였다.

제가 어린 아들들의 공부 뒤바라지를 하면서도 ,연변 일보>, ,연변 녀성>등 해마다 구독하니 아들들도 힘내서 학습에 노력하였고 온 가정이 독서에 열을 올렸다. 저는 초등학교를 다니는 두 아들에게 학기말 시험을 치면 85점을 맞으면 5원을 장려해 주고, 95점을 맞으면 10원을 장려해 주고, 그 돈으로 향 공소합작사의 책매대에 데리고가 명인들의 이야기와 과학상식들을 사서 보게 하였으며 다른 것은 없어도 책꽂이는 넘쳤었다. 매일과 같이 일하여도 수입은 적고 힘들때는 사람사는 것이 너무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다가도 그래도 통신을 쓰게 되면 그래도 사회에 기여할 수 있고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의 위안을 느끼기도 했었다.


두 아들을 도회지 학교에 보내고 공부 뒤바라질 할 때의 일이다. 그 때 봄엔 생산 계획을 세우고 닭알 가리를 높이 쌓아 올렸다가도 뜻밖의 자연 재해가 오면 일년농사 <나무아미타불>로 되여 버렸다.


2천년에는 양건종 담배 9무를 심고 콩,옥수수를 심어 정성스레 가꾸면서 수입을 늘리려고 밤낮없이 일했다. 아침 다섯시면 방학에 아들들을 데리고 도시락을 싸 갖고 담배를 따서 그날에 딴것은 그날로 달고 나면 저녁 8,9시에 집으로 오면서 알뜰하게 900줄을 걸어 놓아 90%는 완성한 셈이였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8월 16일이였다. 이날도 남편과 같이 일하고 점심을 먹고 쉬고 있는데 북쪽으로부터 검은 구름장이 몰려 오더니 억수로 퍼붓는 비는 강바닥에 넘쳐나고 제 남편이 2년생 암송아지를 몰고와 고삐를 넘겨주어 그 송아지를 끌고 언 덕에 올라서자 담배 달대는 한곳씩 착착 넘어지더니 비닐박막과 같이 둥둥 정처없이 떠내려 가는 것이였다. 그 송아지를 끌고 언덕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저는 언녕 수중고혼이 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생사 고비를 지나왔기에 아무리 고달파도,인생의 좌표는 흔들리지 않고 앞만 보고 달리게 하였다.

중국말 속담에<물은 30년 동쪽으로 흐르고 , 30년은 서쪽으로 흐른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는것 같다.


2007년,방문 취업 한국어 실무 시험을 쳐 합생격하고 추첨이 되여 2008년 한국에 왔었다.처음에는 식당에가 일했는데 주방이처음이고 말도 서툴어 스트레스도 엄청 받았었다. 하여 적성에 안 맞는다고 판단하고 그해 9월에 <요양 보호사>자격증을 따려고 도전하였다. 오전에는 강의를 받고, 오후에는 상가에 가 청소를 하면서 12월에 자격증을 땄었다.그때도 자신감을 갖고 살며 악착스레 일하고 생활에 신심을 가졌었다. 산 설고 물선 고장에서 살아 남으려면 법에 위반되지 않고 도박 마약.다단계등을 제쳐놓고 돈이 되는 일이면 파출부로도 열심히 뛰였다.

그렇게 일하다가 ㅈ간병 협회에 가입하여 맡기는 일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였더니 김 소장님이 가정집에 보내주어 1급 판정을 받은 할머니를 돌보다 돌아가신 후에도 86세 나는 그집 할아버지를 계속 돌보고 있다.

이렇게 걸어 온 과정에도 통신원을 하여 큰돈 버는건 아니지만 삶을 더 충실히 할 수 있었고 항상 신심을 갖고 도전할 수 있게한 리철억 선생님한테도 감사 드리고 이 시기에 우리들을 이끌어준 기자 선생님들과 ㄷ향 당위에도 감사를 표하고 싶다.

그 어디에 살던지 환경에 적응하고 사회에 쓸모있는 사람으로 남고 싶고 남은 생을 후회없이 살도록 애쓰고 싶다.

2012년 10월 26일

현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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