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6-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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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 중국의 첫 여성 외교대사- 정설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사람들은 조선인 작곡가로 중국의 <아리랑>으로 불리는 <연안송> 및 <팔로군행진곡>과 <조선인민군 행진곡> 등 두 나라 군가를 창작한 <군가 창작의 아버지>인 정율성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겠지만 그의 부인이며 새 중국의 첫 여성대사인 정설송(丁雪松)에 대해서는 그닥 잘 알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설송- 그녀는 지난 세기 30년대부터 중국의 진보적인 여성혁명가였는가 하면 예술가 및 외교가로 맹활약을 펼쳐왔으며 남편 정율성에 못지 않는 걸출한 여성명인이었다. 1918년 5월 27일, 정설송은 중국 사천성 파현(巴县-지금 중경시 파남구)에서 출생, 1924년 파현 목동진 복음당 소학(木洞镇福音堂小学)에 입학하였고 중경시 문덕여자중학(文德女中) 및 사천성 성립여자직업학교(四川省立女子职业学校) 등을 거치면서 당시 중국 상황으로는 흔치 않게 공부할 수 있는 행운을 가졌었다. 1934년, 정설송은 중경시 평민은행에 취직하면서 열혈적인 애국여성으로 발돋음하였다. 당시 18세 문학소녀였던 정설송은 당시 간행물이었던 중경의 <상무일보(商务日报)> 등 신문에 <민족해방의 전에는 그 어떤 아름다운 꿈도 거품뿐(在民族解放前什么美梦都会成为泡影)>, <개인의 일체 환상을 포기한다(抛弃个人的一切幻想)> 등 글을 발표, 중화민족의 해방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장한 뜻을 지녔다. 그 뒤 1936년 7월 중경시 직업청년구국회가 설립되자 이사로 당선되었고 그 이듬해 중경시 부녀구국회가 설립되자 상무이사로 발탁되었으며 그해 11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하지만 당시 중경에서의 국민당통치에 대해 환멸을 느낀 정설송은 단연히 혁명의 성지- 연안을 선택, 성도와 서안을 거쳐 연안을 찾았으며 1938년 1월 연안에서 항일군정대학 제3기 2대대 여성대 편입되어 공부하기 시작했고 그 뒤 선후로 제4대대 여성대 대장, 제5대대 여성대 대장을 맡다가 그 해 11월 항일군정대학 여성대대가 설립되자 대대장을 맡기도 했다. 정설송은 연안을 찾은 진보적인 청년 중에서도 가장 진보적이고도 지식과 재능이 돌출한 청년여성이었다. 이는 후일 그가 정치적으로 발전함에 있어서도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1939년 7월, 연안에서 중국여자대학이 고고성을 울리자 이 대학 고급연구반에 입학한 정설송은 학생회 부회장 및 학생클럽의 편집으로 활약, 얼마 뒤 중앙에서 여자대학의 학생 45명을 선발하여 섬감녕변구(陕甘宁边区) 선거사업에 투입시키자 정설송은 수덕(绥德), 미지(米脂) 등 현에서 선거사업단 부단장으로 있다가 1941년엔 섬감녕변구 참의회 사업에도 몸담았었고 또 변구 부주석 이정명(李鼎铭)의 비서로도 있었다. 이 시기 정설송은 조선인 음악가 정율성을 알게 된다. 그녀는 조선독립을 위해 중국 연안까지 찾아온 이 조선인 청년에 대해 깊이 동정하던 나머지 나중에는 그것이 사랑으로까지 승화된다. 그 뒤 연안에서 정풍운동이 시작되자 정율성은 <계급이색분자>, <일본간첩> 등 혐의로 여러 가지 의심을 받게 되었으며 이는 정율성과 정설송 사이 커다란 사랑의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정율성의 드높은 혁명열정과 혁명투지에 감화되었던 정설송은 변함없이 이 조선인 청년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드디어 1941년 12월, 연안의 막굴에서 결혼식을 치르기까지에 이른다. 정설송은 문학과 음악에도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다. 연안에서의 다망한 혁명사업과 간고한 환경은 그녀로 하여금 문학과 음악 재능을 키우는데 정력을 쏟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특히 1943년 4월, 임신 8개월이었던 정설송은 산비탈에 굴러 떨어지면서 조산, 이로 인해 그녀는 젖이 없었다. 그러자 정설송은 이를 악물고 평소 남편 정율성이 그렇게도 아끼던 바이올린을 팔아 어미산양을 사서 딸애한테 양젖을 공급하기로 결심을 굳히기까지 했으며 바이올린을 판 것을 기념하여 이들 부부는 딸애의 이름을 <정소제(郑小提)>라고 지었다고 한다. ▲ 정율성,정설송(丁雪松) 부부 1945년 8월 15일, 일본천황의 항복선언(방송)과 더불어 중국 항일전쟁의 승리와 조선의 광복이 동시에 찾아왔다. 그 해 9월, 정율성이 광복된 조국으로 돌아가게 되자 정설송은 그토록 중국을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따라 산 설고 물 선 조선에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조선에 도착한 정설송은 남편이 황해도 인민위원회 선전부장으로 사업하는 해주에 머물다가 1947년부터 조선노동당 중앙교무위원회(侨务委员会) 비서장, 북조선화교연합회 위원장, 주중 동북행정위원회 북조선상업대표단 대표 등 직에 종사했으며 새중국의 창립 전야에는 신화사 평양분사의 사장에 임명되기고 했다. 1950년 한반도에 <6.25>가 발발하자 그 해 9월, 정율성과 정설송 부부는 주은래와 김일성의 협상과 동의를 거쳐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고 얼마 뒤 남편 정율성은 중국국적에 가입하게 된다. 중국으로 돌아온 정설송은 새 중국 건설 및 외교사업을 위해 더욱 분망한 활동에 투신하였다. 1952년부터 중공중앙 국제활동 지도위원회 사무실 주임으로 중국여성대표단을 따라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거행된 아시아 아프리카 여성회의에 참가하였고 1958년에는 중국 고위층여성대표단 일원으로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방문했으며 1961년에는 허광평이 이끄는 중국 여성대표단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리고 1956년에는 중공 제8차 전국대표대회 대표로 평선되었고 1958년 국무원 외교사업사무실이 설치되자 비서실 조장으로 부임되면서 정치적으로는 남편을 능가하는 리더십을 보여 주기도 했다. 중국의 문화혁명은 정설송한테 있어서도 일종의 재난이었다. 문화혁명이 시작되자 정설송은 사업정지를 당하면서 심사를 받았고 1969년에는 국가 직속기관을 떠나 녕하의 평라(平罗)에서 노동개조를 하면서 정치적으로는 물론 심신상으로도 많은 위축을 받았다. 1971년 사업에 복직되자 정설송은 중국인민 대외우호협회 비서장(후엔 부회장)을 맡게 되면서 외국에 나가 많은 활동을 펼치었으며 1975년에는 제4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1976년 12월 7일, 남편 정율성이 뇌출혈로 사망하자 정신적으로 커다란 타격을 입은 정설송이었지만 사업에 대한 충성심만은 변함이 없었다. 특히 1979년 새 중국의 첫 여성대사로 주 네덜란드 중국대사과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되자 더욱 굵직굵직한 일들을 맡아 처리하면서 중국의 대외사업에 커다란 기여를 하여 1982년 중국공산당 제12차 전국대표대회와 제5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하였으며 1984년 8월 네덜란드 및 덴마크 특명전권대사를 거쳐 귀국하였다. 그 후에도 정설송은 제6기, 제7기 전국정협 위원으로 당선되면서 각종 국가 대사에 참여, 전국정협위원, 중국대외우호협회 이사의 신분으로 구소련, 라틴아메리카 6개국 등 많은 나라들을 방문하면서 외교활동에 종사하다가 1994년 6월에 정식으로 이직하였다. 이직 후 정설송은 자신의 인생 회억록을 쓰는 등으로 만년을 보내다가 1996년 한국 국립국악단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 남편 정율성인 고향은 광주광역시를 찾아 남편의 고향집을 다녀오기도 했다. 새 중국의 첫 외교대사였던 정설송 여사는 2011년 5월 29일 북경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으며 향년 93세였다. 정설송 여사의 일생은 여성혁명가의 일생이었고 중국의 첫 여성외교대사의 일생이었다. 정설송의 이름은 영원히 중국 근대 여성발전사에 휘황한 한 폐지를 남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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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31
  • 새로운 “비주얼”- 홍색성지 옌안에 2천만무“林海” 탄생
    ▲ 사진=신화사(新華社)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옌안(延安)이라고 하면 중국혁명의 성지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곳이다. 하지만 그제 날 이 곳은 중국 섬북의 황토고원으로 거의 <불모의 땅>으로 불리던 지방으로 아주 낙후하고 사람들의 눈길이 거의 닿지 않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중국의 건국 후에도 옌안은 여전히 그 낙후한 오명을 벗어나지 못한 채 지난 세기 60연대 지식청년들마저 그곳으로 하향하기가 대단히 꺼려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옌안은 고층건물들이 우후죽순마냥 늘어선 것은 물론 <번대 머리>었던 민둥산들이 푸른 단장을 하기 시작, 경제생활에서의 부유와 더불어 대자연의 개조 역시 <일사천리>로 내달리게 되었다. 1월 30일, 신화통신에 따르면 1999년부터 옌안사람들은 <자력갱생, 간고분투(自力更生,艰苦奋斗)>의 정신으로 물이 부족하고 식수난도가 큰 악열한 자연조건에서도 누계로 2000여만무에 달하는 황무지를 녹지로 만들어 섬북지구의 녹색면적을 북으로 400킬로미터로 확장시켰다. 사진은 옌안시 우치현(吴起县)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녹색화가 된 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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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31
  • 中 정저우 철도경찰, 특대 가짜 기차표 제조판매사건 해명
    ▲ 사진=중신망(中新網)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1월 30일, 중신망(中新網)에 따르면 중국 정저우(郑州) 철도경찰은 최근 특대 가짜 기차표 제조 및 판매 사건을 적발/해명하고 5명의 범죄 혐의자를 체포했으며 비법 교역장부와 범죄활동에 이용된 컴퓨터, 인쇄기 5대 등을 압수하였다. 이 5명의 범죄혐의자들은 중국의 전통명절인 춘절(한국의 구정)을 앞두고 기차표가 긴장한 기회를 이용하여 대량의 가짜 기차표를 제조하고 판매, 체포되던 당 날 이들의 몸에는 1만 6000여장의 가짜 기차표가 있었으며 그 표면가격은 150여만 위안으로 밝혀졌다. 철도경찰은 춘절을 앞두고 여행객들은 정규적이고도 합법적인 창구를 통해 기차표를 구입하거나 중국철도부의 관방 사이트 12306번을 통해 기차표를 예약/구매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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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31
  • 반도무용의 영원한 전설-최승희
    편집자의 말 : 최승희를 놓고 말하면 그녀의 정치적 이념과 사상성을 두고 논란이 많은 인물이다. 일찍 지난 세기 30-40년대 최승희가 침략확장에 광분하는 일본군을 위문하려고 중국대륙과 동남아 여러 나라에 다니며 공연한 것을 두고 역사학가들은 그녀를 친일파라고 지적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그녀가 장시기 동안 이북에서 활동한 것을 미루어 적색분자로 점찍기도 한다. 하지만 이 글은 최승희 그녀의 무용예술만 언급하면서 우리 한민족 무용 발전을 위해 각고한 노력을 했다는 사실만 나열하려고 한다. 이 글의 많은 내용은 구소련 간행물 <소련여성> 1948년 제3호에 실린 글임을 밝히는 바이다. ▲ 사진출처 : 인터넷 1911년 11월 24일, 최승희는 조선 경성(지금의 서울)의 한 의사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15살이 되던 해 최승희는 경성에 있는 <숙명여자고등학교> 보통 반을 나왔고 그 뒤 1926년 5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서 일본현대무용의 선구자인 이시이 바쿠가 세운 무용학교에서 공부했으며 3년 뒤 이 학교의 1번 무용수로 활약했다. 뿐만 아니라 얼마 안 있어 이 무용학교의 <수석 대리교사>로 선발되기도 했다. 1929년 조선으로 돌아온 최승희는 18세 나이에 조선의 첫 현대무용가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으며 그해에 무용연구소를 세우는 야심을 드러냈다. 그리고 1930년부터 1932년 사이에 세 번에 거쳐 전문 공연회를 개최, 대표작으로는 현대 조선민족 무용을 상징하는 <영산무(灵山舞)> 등이 있었다. 최승희의 무용에서 계발을 받고 후일 성공한 사람도 많았다. 대만의 유명한 무용가 임명덕(林明德)이 바로 그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한사람이었다. 1936년 그는 최승희의 무용공연을 보고 일본에 가서 무용을 전공, 22세었던 1936년부터 8년이란 품을 들여 도쿄대학 예술학부와 이시이 바쿠의 무용학교를 오가면서 독일풍의 현대무용을 배웠고 1943년에 도쿄에서 개인 공연회를 가지었으며 그 뒤 대만으로 돌아가서는 무용 <예상우의무(霓裳羽衣舞)>와 <수사몽가(水社梦歌)> 등 미학정서가 짙은 무용작품을 무대에 올리면서 대만의 무용예술의 발전을 위해 중대한 기여를 했다. 한편 서방의 무용기교와 조선 전통무용의 정신주체를 결합시켜 조선 무용계에서 돌풍을 일으킨 최승희는 1937년 당시 세계적인 무용대가로 등극한 미국인 솔로몬 왜루크의 알선으로 미국을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주의 여러 나라와 유럽 등지를 방문하면서 100여차 공연, 공연은 1939년까지 지속되면서 무용논평원들과 당지 관중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심지어 부분적 간행물들에서는 “일본이 조선을 정복하였지만 최승희만은 정복하지 못하였다”라고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1939년 말, 조선으로 돌아온 최승희는 일제가 한복을 입고 공연하는 것과 민족무용을 갖고 무대에 오르는 것을 금지시키자 단연히 고국을 떠나 중국 북경으로 향했고 그 곳에서 중국무용을 연마하고 탐구하였다. 하지만 그 때로부터 최승희는 중국의 만주와 상해, 남경 등지를 돌며 이른바 황군을 위한 <위문공연>도 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는 한복을 입고 무대에 오르는 것을 탄압하는 일제가 싫어 조선을 떠난 최승희와는 다른 친일행위를 한 최승희로서 모순되는 면이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당시 최승희의 무용을 두고 일제마저 고도로 인정했다는 것만은 의심할바가 없는 것 같다. ▲ 사진출처 : 인터넷 1946년 해방이 되자 최승희는 그 해 5월 귀국선으로 인천으로 돌아왔으나 한국에는 정착하지 못하고 7월에 문예평논가로 활약하고 있는 남편 안막을 따라 월북했으며 평양에서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세웠다. 이 후 최승희는 조선무용동맹 위원장으로 활약하면서 공훈배우 칭호 및 국기훈장 제1급 등을 받았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최승희는 북경으로 가서 중국의 중앙희극학원에 최승희 무용반을 설치하여 많은 제자들을 양성, 새 중국의 제1대 무용예술인들은 그 거개가 최승희가 양성해낸 인재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66년 최승희는 그녀의 마지막 무용작품인<고구려 무희>를 창작하여 무대에 올린 뒤 관중들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최승희는 그 자신의 친일행위 및 평양에서의 사망 등으로 많은 미스테리를 낳고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녀의 가정사 및 자녀의 행적 등도 아직은 알려진 바가 없으며 또한 그녀가 행운아인가 아니면 비운의 인물인가 하는 것도 판정하기 어렵다고 보아진다. 하지만 반도가 낳은 세계적인 무희- 최승희의 무용예술은 말 그대로 세계가 공인하고 있으며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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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30
  • 베이징현대차, 63,852대 투싼(TUCSON) 신차 리콜 예정
    [동포투데이 김다윗 기자] 중국 관영 신화망은 29일, 국가품질감독검사검역총국(국가질검총국)에서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베이징현대(北京現代)자동차유한공사는 2018년 2월 1일부터 총 63,852대에 달하는 투싼(TUCSON, 途勝) 신차를 리콜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이번 리콜에 포함된 차량은 2017년 4월 1일-10월 25일 사이에 생산했고 조립 문제로 인해 정차 상태에서 브레이크 페달을 밟은 후, 브레이크 페달과 회선군이 서로 지장을 주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 밖에, 베이징현대차는 2018년 2월 1일부터 2016년 6월 1일-8월 23일 사이에 생산한, 7단 듀얼 클러치 변속기(DCT)를 탑재한 뉴 투싼의 리콜 수량을 33,722대 추가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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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30
  • 中 올해 환경오염 어떻게 다스릴가? 지역마다 대책 마련에 분주
    ▲ 사진= 인민망(人民網) [동포투데이 김다윗 기자] 현재 중국에서 2018년 성급 두 회의가 한창 소집되고 있으며 각지 정부사업보고 또한 공개되고 있다. 그중 환경문제가 지방정부의 중대한 민생문제로 되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가 광범한 주목을 받고 있다.인민망(人民網)에 따르면 북경은 배기가스 배출이 높은 챠량 통제를 중점으로 저배출량 구역을 6환선내로부터 전 시 구역으로 확장했고 배기가스 배출표준을 초과한 차량을 엄격히 단속할 것을 요구했다. 중경은 자동차 배기가스, 생활페기오염을 통제하고 먼지통제시범을 추진할 것을 제출했다. 호남성은 탄소집약도 하강목표를 완성하고 중점적으로 장사, 주주(株洲), 상담(湘潭) 지역의 푸른 하늘 보위전에서 승리할 것을 요구했다. 하북성은 국가에서 제출한 오염퇴치공략전에서 승리할데 관한 방안을 실행하고 두드러진 환경문제를 잘 해결할 것을 제출했다.그외, 적지 않은 성에서는 청결에너지를 널리 보급하고 사용하는 것을 중점사업중의 하나로 정했으며 구체적인 임무를 제출했다.북경은 농촌에서 석탄을 청결에너지로 개조하는 사업을 질서있게 추진하고 기본적으로 평원지역의 “무석탄화”를 실현할 것을 명확히 했다.공기오염문제가 비교적 엄중한 하북성은 푸른 하늘 보위전 3년 작전계획과 겨울철 청결난방 3년 계획을 편성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길림성은 18개 저탄소에너지시범현 건설을 가속화하고 시, 현의 천연가스 비축능력건설을 강화하며 전기에너지 난방면적을 800만평방미터 증가할 것을 강조했다. 대기오염 퇴치 외, 물오염 퇴치도 올해의 중점사업으로 열거되었다. 그중 “하장(河长)제도”, “호장(湖长)제도”가 많은 지방 정부사업보고의 핵심단어로 되였다.길림성은 “하장제도”, “호장제도”를 전면 보급하고 부설 전업순시검사제도와 퇴치조치를 보완할 것을 제출했다. 산서성은 하장제도, 호장제도와 “1하1호1책(一河一湖一策)”을 전면 낙착하여 전 유역 생태복구와 보호를 추진할 것을 명확히 했다. 섬서성에서도 4급 하장책임을 단단히 다지고 물오염 퇴치강도를 강화할 것을 요구했다.“기업 오염, 군중 피해, 정부 배상”은 환경오염 해결의 “3박자”로 된 것 같다. 이와 같은 어려운 국면을 해결하기 위해 작년에 인쇄발부한 “생태환경 손해배상제도 개혁방안”에서는 2018년 1월 1일부터 전국적으로 생태환견 손해배상제도를 시행할 것을 명확히 규정했다.절강성은 성내 유역 생태에 관한 “우수한 것을 장려하고 나쁜 것을 처벌하는” 보호보상기제를 탐색, 건설하고 단위 에너지 소모를 기초로 하는 에너지사용권리 거래제도와 상벌정책을 가동 실시할 것을 제출했다. 광동성은 생태환경 손해배상제도를 실시하고 시장화, 다원화적인 생태보상기제 건립을 추진할 것을 제출했다.강서성은 2018년 생태문명제도건설을 가속화하고 생태보호보상제도체계를 보완하며 파양호습지생태보상시점을 추진해 점차적으로 삼림, 습지, 수류, 경작지 네개 중점 영역의 생태보호보상 전면 피복을 실현할 것을 요구했다.마찬가지로 2018년 감숙성 정부사업보고에서도 감숙성은 소각, 공제, 보상 등 방식으로 광업권을 전면 퇴출시키며 삼림과 초지의 “한 지역 두개 서류”문제를 해결하고 핵심구역의 농민과 유목민 59호 212명을 이사시키며 6.18만 양단위(가축의 계산단위)의 가축을 감소하고 10개의 수력발전소 퇴출이라는 단계적인 임무를 완성하며 4개 차별화 정돈의 관광항목 규범적 관리와 운영을 가속화할것을 명확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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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30
  • 배우 이민호, 홀트아동복지회에 쌀 1톤 기부
    [동포투데이 김나래 기자] 홀트아동복지회(회장 김대열)는 배우 이민호의 팬클럽 미노즈(Minoz) 회원들이 2018 평창 동계올림픽대회 및 동계패럴림픽을 맞아 쌀 1톤을 기부했다고 밝혔다. 이민호 소속사 측은 “국내외 팬들이 보내준 따뜻한 마음이 뜻 깊게 쓰여지길 바란다“며 이민호와 팬클럽의 이름으로 적립된 드리미 쌀을 홀트아동복지회에 전달했다. 이 쌀은 어려운 환경에도 운동선수의 꿈을 키우는 저소득가정 아동과 장애로 어려움을 겪는 아동을 위해 사용될 예정이다. 이민호와 이민호의 팬들은 2014년 이민호가 직접 고안한 사회공헌 기부 플랫폼 프로미즈를 통해 꾸준한 나눔을 실천해오고 있다. 이처럼 나눔을 실천하는 이민호의 뜻에 동참하여 세계 각국의 이민호 팬클럽 미노즈는 환경 보존을 위한 숲 조성, 봉사활동 및 기금 전달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선행을 이어오고 있으며 올바른 팬 문화 형성에 기여하고 있다. 한편, 프로미즈는 2016년 홀트아동복지회와 사회공헌 협약을 맺고, 도움이 필요한 아동을 지키는 일에 지속적으로 협력하고 있다. 홀트아동복지회는 1955년 전쟁과 가난으로 부모를 잃고 고통 받고 있던 아이들에게 새로운 가정을 찾아주는 입양을 시작으로 아동복지, 미혼한부모복지, 장애인복지, 지역사회복지를 비롯 다문화가족지원, 캄보디아, 몽골, 탄자니아, 네팔 해외빈곤 아동 지원에 이르기까지 소외된 이웃을 위해 전문적인 사회복지를 제공하는 종합사회복지기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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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30
  • 중국 '화룡1호' 핵발전 압력용기 가설 성공
    ▲ 사진=신화사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1월 29일, 신화통신에 따르면 지난 28일 오후 5시(현지시간) 중국 핵발전그룹 푸칭(福清) 핵발전소 5호기조에서는 원자로 압력용기를 순리롭게 가설하는 작업을 성공적으로 진행하였다. 이 설비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완전한 지식자주권으로 만들어낸 제3대 핵발전 압력용기로서 이번 작업의 성공은 앞으로 있을 후속가설작업에 양호한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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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30
  • 지난 세기 20-30년대 중국영화계의 황후 호접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올해 1월 20일은 지난 세기 20-30년대 중국 상해에서 “영화황후(电影皇后)”로 불리었던 호접(胡蝶)이 태어 난지 110주년이 되는 날이 된다. 이 날을 기념하면서 최근 상해시 촬영예술센터에서는 “접몽백년(蝶梦百年)”으로 명명된 호접의 영상역사 전시회(1월 20일-3월 18일)가 막이 올랐다. 전람에는 수십 년간 호접의 영화배우생애와 사생활 및 해외여행 중의 순간순간을 기록한 진귀한 사진 근 200점이 진열되었다. 그만큼 지난 세기 20-30연대 호접은 상해영화계의 유명스타였다. 당시 조선인 영화배우 김염(金焰)이 상해에서 “영화황제(电影皇帝)”로 떠올랐다면 호접은 “영화황후”로 손색이 없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상해에서 일반 노동자의 월급이 20원 정도였다면 호접의 월급은 2000여원으로 일반 노동자 월급의 100배에 달했는바 이는 그녀의 몸값이 어느 정도였다는 것을 충분히 설명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 영화황후 호접의 영상역사 전시회의 포스터 1908년 스페인 예술인 엘 레마스가 상해에서 중국의 첫 영화관을 세웠다. 영화관은 홍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얼마 후 호서화(胡瑞华)란 이름을 가진 소녀가 찾아왔다. 영화관 보스는 대뜸 이 소녀를 보고 “바로 저 애이다”라고 탄성을 지를만큼 기뻐했다. 그것으로 이 소녀는 자신의 일생을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그녀가 바로 상해영화계에서 이름을 날린 호접이었다. 호접은 중국 영화사상 가장 명성이 높고도 전기적 색채가 농후한 여스타였다. 호접이란 이름은 중국영화계에서 일찍 알려졌고 장시기 동안 전해져온 이름으로서 중국영화계 스타중의 스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40여 년 간 영화배우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호접은 90여부의 영화에서 주역을 담당, 자주 “영화황후”로 등극하였으며 많은 영화팬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다싶이 하였다. 그리고 당시 영화팬들한테 있어서 호접은 단지 스타였을 뿐만 아니라 어느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이름이었으며 지어 당시 그녀를 숭배하는 것은 일종 문화이기도 했다. 호접의 고고성은 중화민족의 거대한 변화 및 영화업과 더불어 울리었다. 1908년 상해에서 출생, 그 해 광서황제와 자희태후가 선후로 죽었다. 그렇다면 호접의 일생은 중국의 봉건제왕제로부터 중화민국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까지 탄생하는 격변기를 지켜본 일생이었으며 그녀가 생을 마감하는 1989년은 중국 대륙과 대만 사이의 냉전시기이기도 했다. 호접이 태어날 때 부모는 철도부문에서 근무했다. 그러한 연고로 호접은 부모를 따라 상해, 북경, 천진, 중경과 광주 등 대도시를 거쳐 나중엔 광주에서 오래 동안 머물었다고 한다. 이렇게 거의 중국대지의 절반을 돌면서 그녀는 북경말은 물론 광동말과 상해말까지 유창하게 구사했고 견식면이 넓은데다 양호한 가정교양으로 자랐다. 이는 소녀시절의 호접으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연예사업을 위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 소녀시절의 호접(왼쪽 두 번째) 16살 때 부모를 따라 다시 상해로 돌아온 호접은 당시 중국영화학교의 제1기생으로 입학, 아울러 그녀의 예명 호접(胡蝶)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영화학교에서 학습하는 기간 호접은 다방면 재능을 익히기 위해 노력, 심지어 자동차운전기술과 기마기술까지 숙련되게 익히었으며 또한 당시 생활방식과 배우가 수요하는 기예를 장악하기 위해 촬영에 대한 연구에도 집념했다. 그녀는 자주 자신을 촬영하는 일꾼과 함께 촬영각도와 광선의 조절 등에 파고 들면서 촬영효과를 높이는데 많은 품을 들이기도 했다. 1926년 18살에 호접은 상해의 유명한 화보 “양우(良友)” 창간호 표지인물로 실리었다. 그해에 호접은 영화 “추선원(秋扇怨)”에 출연하면서 스크린생활의 진정한 첫 발자국을 떼었고 유명해시기 시작했다. 그 시기는 중국 영화의 탐색기술, 연기기술 및 시장 개척의 초보시기었고 또한 무성영화 시대었기에 배우의 표정예술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던 때였으며 배우 거개가 표정예술에 노력을 경주하던 시기었다. 당시 호접의 풍격은 이미 관중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는바 동작성이 크지 않으면서도 진실한 것이 곧바로 관중을 끄는 매력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당시 상해의 “붉은 장미 화보(红玫瑰画报)”는 호접의 연기를 두고 “성정이 고요하여 그 속에 여자규수의 풍격이 있으며 왁작지껄이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지금 와서 호접이 출연한 영화들을 보면 거의 호접한테서 “크나큰 욕망”같은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녀는 최대한 그 무슨 “욕망”같은 것을 억제하면서 자신의 인성을 연기, 그 표현기교는 형언할 수 없는 경지에 달하게 한다. 평소에 영화관람을 별로 즐겨하지 않던 한 관중은 호접이 출연한 영화를 본 뒤 “호접이 출연한 배역이 아무리 조용하면 할수록 그 속에서 더욱 장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라고 소감을 밝히었다. 또한 1940년 중국 경극예술의 아버지인 매란방(梅兰芳) 역시 호접이 출연한 영화 “절대가인(绝代佳人)”을 보고 “호접의 연기는 어느 유파를 대표하는 것으로 그녀는 조용한 것을 장기로 삼아 관람자들한테 자신의 수양깊이를 보여준다”라고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1949년 호접은 영화 “금수천당(锦绣天堂)”에 출연하여 여주인공역을 담당, 이 영화는 중국의 첫 칼라영화였다. 1928년 호접은 다부작 영화 “불타는 홍련사(火烧红莲寺)”에 출연, 도합 18집으로 된 이 영화는 무협영화로서 당시 무협영화의 조류를 일으켰으며 티켓판매수입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 뒤 호접은 계속해 영화 “부자의 생활(富人的生活), “도화호(桃花湖”, “자유의 꽃(自由之花), “가수 홍모란(歌女红牡丹)” 등에 출연하면서 보다 실생활과 접근하는 인물로 많은 영화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1933년 3월 5일, 호접이 주역을 맡은 영화 “광류(狂流)”가 상해에서 첫 방영이 되면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영화는 1931년에 있는 특대 수재를 배경으로 사회의 최하층 사람과 상류사회 사람들간의 계급투쟁을 반영한 영화로서 특대 수재를 통해 민족위기를 경종하기도 했다. 당시 영화계의 평론가들은 이 영화야말로 중국영화의 새로운 노선을 개척했다고 대서특필했다고 한다. 호접의 행운은 동업계 영화인 중에서 그 생애가 가장 길고 출연차수가 많아서만이 아니다. 그녀는 수차례에 거쳐 영화계의 선구자로 되기도 했다. 1931년 호접은 중국영화계에서 선참으로 프랑스 백대영화회사와 합작하여 스크린에 출연했고 또한 중국의 첫 유성영화 “가수 홍모란”에 출연한 배우기도 했다. ▲ 영화배우 시절의 호접(촬영시기 미상) 호접의 배우생활은 1930연대에 들어 클라이막스로 치솟았다. 1935년 그녀가 주역을 맡은 영화 “자매의 꽃(姊妹花)” 등 몇부의 영화가 소련에서 있은 국제영화제에 선보이었고 선후로 독일, 프랑스, 스위스와 이탈리아 등 나라에서 방영되기도 했으며 그때마다 호접은 그런 나라를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도 했다. 이는 그녀의 생애에서 일대 화려한 대악장이기도 했다. 1935년 호접의 혼례는 당시의 중대한 문화적 대사였다. 친우들의 축복 외 영화계의 많은 인사들은 그녀가 앞으로 가정의 속박에서 벗어나 계속 나라와 영화계에서 기여하며 활약하는 “여대장부”가 되기를 기대했다. 특히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의 전신인 “의용군행진곡”의 작사자인 전한(田汉)은 한수의 시로서 호접으로 하여금 주방과 작별하고 영화에 매진하라고 격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혼 후 호접은 이러한 안목의 제약에서 벗어나기로 작심했다. 영화배우로는 전성기의 나이었지만 그녀는 점차 가정에 많은 정력을 쏟는 삶에 충실하기 시작했다. 즉 남편을 섬기고 자녀를 양육하는 것으로 제2의 인생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는 당시 조류였던 소위 진보여성 및 현대여성과는 다른 선택이었으며 그렇다고 남권사회에 얽매인 봉건여성의 선택인 것도 아니었다. 어찌 보면 당시 소위 가정을 버리고 “진보”만을 외쳐대는 극단적인 여성조류에 대한 일종의 반항었다. 일대 절색으로 20-30연대 중국의 영화계를 휩쓸었던 호접은 1989년 호접은 캐나다 밴큐버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20여 년이 지난 2016년 초 호접의 생전유품이던 진귀한 사진 50여점이 캐나다 밴큐버의 미술관(아시아부)에 전시되면서 사람들은 재차 민국시기의 이 영화황후를 머릿속에 떠올리었으며 이는 중국정부의 커다란 중시를 받기도 했다. 전시회가 끝난 후 밴큐버 미술과 아시아부의 총감인 정승천(郑胜天)은 중국영화사 연구원 이진(李镇)을 초청하여 그와 함께 수천부에 달하는 자료를 찾아 호접에 대한 자료를 수집, 도합 호접의 영화인생과 관련된 205점의 자료사진을 모아서는 그해 11월에 중국으로 돌아왔으며 1년여만의 준비과정을 거쳐 드디어 호접의 영상역사전시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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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27
  • '우블리' 우효광, 中 년도공익선봉인물 대상 수상 영예
    [동포투데이 배우 우효광(於曉光)이 24일 중국에서 열린 자선공익축제에서 "년도공익선봉인물"상을 수상했다. 줄곧 공익자선활동에 전력한 우효광은 빈곤지역, 재해지역에 수차례 돈과 물건을 기부했다. 지난해1년동안 우효광은 사천 아안야륵센터(雅安冶勒中心)초등학교에 "우효광 사랑독서실"을 의연 건조해 모든 교실의 책상과 걸상, 교단을 새롭게 바꾸고 학생들에게 학용품과 스포츠 용품을 기증했다. 또 9월에는 중국빈곤구제기금회 "99공익일"행사에 참석해 가난한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함께 돈을 기부할 것을 호소했고 12월에는 중국빈곤구제기금회로부터 "선행대사" 영예칭호를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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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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