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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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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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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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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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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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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룡 칼럼]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한국 이념논쟁
●김정룡(다가치 포럼 대표) 현시대 유명 정치학자로 손꼽히는 하버드대학교 샤무엘 헌탕턴 교수는 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을 출간했다.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로 반응이 뜨거웠다. 그는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2년 후 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냉전 시대가 종말을 맞았다. 냉전 시대 인간은 대체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진영의 이념에 각각 속해 있었다. 냉전이 종말 된 미래사회에서는 이념이 무의미해졌고 따라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면서 다른 귀속처를 찾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귀속처가 바로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라고 제시하였다. 그가 말한 귀속처는 새로운 문명이 아니라 과거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실제로 탈냉전 후 지구촌의 인간무리들은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에로 재편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중국의 경우 개혁개방 전 해외 화교 화인들 중 고국을 못 마땅해하는 사람들도 개혁개방 이후 즉시 돌아서서 고국에 투자를 서슴지 않았다. 아세아 최고 부자 리카싱(李佳成)이 투자에 나서자 주변에서 ‘사기당하면 어쩌냐?’고 말리자 그는 ‘사기당해도 고향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인데 사기라 생각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벌은 남다른 배포가 있는 법이다. 싱가포르 리콴유(李光曜) 전 총리는 본래 반공자였다가 개혁개방 이후 유교 전도사를 자칭하고 나서 중국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것이 바로 이념을 탈피하여 민족문화에로 회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2008년 북경올림픽 개막식 주제가 공자였는데 이것은 전통문화에로의 회귀를 뜻한다. 1990년 초 동구권에서 있었던 코소보 인종청소 전쟁은 종교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아무튼 세상은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흘러가고 있는 추세이며 이미 새로운 역사 흐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지구촌의 흐름을 역행하는 곳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반도이다. 동서 독일이 통일되고 남북 베트남도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문화로 굴러가고 있다. 오로지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것은 남북한이다. 1990년 베이징아세아게임 때 한국관광객이 대량 백두산투어에 나섰다. 그때 한국여행사 에스코트 00사장이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서 생생하게 맴돌고 있다. “참 세월이 놀랍게 변했어요. 우리가 중국 땅을 밟으면서 백두산 구경을 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현실로 되었어요. 이 추세대로라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남북통일도 10년이면 되지 않겠어요!” 그 후 2000년 김대중 대통령께서 북한을 방문하자 매체들이 ‘10년 안에 통일이 이뤄질 것’처럼 떠들었다. 그런데 그 후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현재 남북통일이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요원해지다못해 요즘은 아주 적대관계가 심각해지고 있는 중이다. “가장 중요한 게 이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전에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시중에서는 모두 뜬금없는 발언이라고 하기도 하고 때아닌 이념타령이라고 공격하기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 발언이 확실히 케케묵은 이념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이게 무슨 시대인데 아직도 이념타령이라니? 역사를 거스르는 행위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요즘 한국 사회는 홍범도 장군의 정체성을 갖고 논쟁 중이다. 양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다. 1943년 홍범도 장군이 사망할 당시에는 침략당한 약소국가들에서 나라마다 민족주의가 우선이지 이념과 사상이 우선 과제가 아니었다. 강대국들도 마찬가지로 이념을 떠나 미국과 소련이 협력하여 반파시스 전쟁에 돌입하였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 이념논쟁을 일으킬 사안이 아니다. 한국 정치는 할 일이 하도 없어서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문제는 왜 윤석열 대통령이 이념을 최대 이슈로 들고나왔는지? 맥락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 일부 진영에서는 아직도 빨갱이타령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 종북좌파타령을 70년 동안 벌여오다가 요즘에는 종북좌파 타령이 질리기도 하고 그 실체도 주목을 받기가 조금 약발이 떨어져 친중좌파 공격으로 방향을 틀고 화살을 돌리고 열을 올리고 있다. 필자는 얼마 전에 한국 지인의 소개로 한국 엘리트들이 참여하고 있는 카톡방에 가입한 적이 있다. 카톡방은 흔히 그렇듯 좋은 정보도 나누고 서로 필요한 교류도 하고 인맥도 넓히고 등등 좋은 점이 많다. 하지만 인간무리에는 취향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 취향이 정치적인 성향이 강하면 골머리가 아파난다. 어느 한 분은 윤석열 대통령을 찬양하는 ‘윤비어천가’를 올렸는데 조선 창시자 이성계를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수령을 찬양하는 ‘어천가’보다 훨씬 뛰어난 솜씨로 현직 대통령을 찬양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을 이렇게 신을 찬양하듯 하는 것을 처음 본다. 일각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을 평가하는 기준이 극명하게 나뉘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문재인은 빨갱이고 북한 간첩이다. 나라를 북한에 팔아 먹는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아무리 좌파 성향을 지닌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설마 나라를 팔아먹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상식을 벗어나 비합리적인 주장을 하면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친미를 확실하게 하면 다른 분야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문재인처럼 나라를 팔아먹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굳건하게 박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을 신을 찬양하듯 하는 행위는 필자와는 하도 상관없는 일이라 개의치 않고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는데 다음 일은 도무지 지나칠 수가 없었다. 기름 개구리를 산 채로 끓는 기름에 넣어 튀기다가 물을 넣고 끓여 먹는다. 한 분은 친중좌파들을 개구리 산 채로 튀겨먹고 끓여먹듯이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으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라는 속담이 있다. “미친 아낙네의 악담보다 더 저질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나가기를 해 버렸다. 종북좌파 타령이나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친중좌파 타령이든 모두 같은 이념타령이다. 이런 이념타령이 시중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고 그 세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대통령의 이념논쟁을 때가 아닌 것이라 하거나 뜬금없는 일이라는 지적은 헛발 짚는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공산주의 빨갱이 타령이 심각한데 진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자가 얼마나 될까? 의문이다. 무엇을 대상을 공격하려면 그 대상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나서 공격해야 마땅하나 한국에서 공산주의 빨갱이 공격은 실체를 모르는 막무내식이어서 안타깝다. tvn방송에 <어쩌다 어른>이라는 강연프로그램이 있다. 몇 년 동안 출연을 가장 많이 했던 최진기 강사가 있었다. 그는 자칭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이다. 액면 그대로 믿기로 하고 그가 이해하고 있는 공산주의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마르크스의 노동 분배 원칙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이다. 최진기 강사는 이 공산주의 핵심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마르크스는 아마 아버지가 돈을 벌 능력이 있고 그 돈을 자녀가 학비로 사용하는 케이스에서 힌트를 얻어 내놓은 이론일 것이다.” 이어서 그는 유명 스타 연예인 강동원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을 어떻게 수요에 의해 분배할 것인가?”고 희죽거리면서 공산주의를 형편없는 애들장난처럼 매도하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만약 공산주의가 최진기 강사의 말처럼 그렇듯 유치한 것이라면 어떻게 지구촌 반 되는 인간무리가 추종했겠는가? 능력에 따라 일한다는 것은 인간이 고도의 의식을 갖추면 타인의 능력과 비교하지 않고 또 타인의 노동기여도와 비교하지 않고 나의 능력껏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사회는 물질이 풍부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되어 불필요한 물질을 탐내지 않고 사치를 탐내지 않는 전제하에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것을 의미한다. 요점은 물질이 풍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실천가능한 원칙이라는 것이다. 빨갱이 뜻은 사상이 빨갛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필자의 부친은 평생 당지서를 맡았는데 사상이 붉다못해 둘째 아들이 휴학하는 해에 참외 밭을 대신해 보게하고는 아들이 생산대 참외를 먹었다고 하여 장부에 가을에 떼어내게 기입해 놓았다고 한다. 필자가 자랄 때 동네 어른들이 늘 저한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너의 부친은 진짜 빨갛다.’는 말을 반복했다. 최진기의 자칭 최고 강사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이 수준이라면 진짜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서강대 00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는 제도로서 실천은 실패했지만 그 이념과 사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존재하고 이직도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있는 이 민족의 현실. 언제 가야 통일되고 하나가 되어 부질없는 다툼에서 벗어날 것인지? 민족의 운명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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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핵폐수 해양 방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는?
● 철 민(논설위원) 한·중·일 해양 안전 문제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였던 일본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처리 문제가 24일 일본 정부의 바다 방류 개시와 더불어 또 새로운 논쟁거리를 몰아오고 있다. 우선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행위를 두고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나라들로는 일본의 이웃 국가들인 중국과 한국(정당과 사회단체 등), 북한 등과 거리가 멀지만, 남태평양 도서국의 반발도 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후쿠시마 오염수가 바다로 흘러들기 시작해서 240일이면 중국 연해에 도착한다며 정부로부터 국민 매 개인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방류 결정을 국제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고 있다. 한편 중국 정부는 일본산 수산물 수입의 전면 중단을 발표하였다. 한국 언론도 한국의 여러 해산물 시장이 거의 텅 비어 있어 어부들은 미래의 생계를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2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제주도 동문어시장에서 20년 넘게 해산물 장사를 해온 한 상인은 “예전에는 오전 10시경과 오후 5∼7시(두 시간대)에 장사가 안될 때도 시장은 붐볐지만, 요즘은 손님이 없는 텅 빈 고속도로”라며 “코로나19 기간에는 장사가 더 잘됐다”라고 우려했고 한국 서부 해안 도시 군산 출신의 한 어민은 “내일 해산물 경매장에 간다고 생각하니 답답하다”라며 “해산물 소비량이 4분의 1로 줄었고 가격도 더 낮아질 것 같다”라고 탄식했다. 부산종합어시장에서는 조기 한 박스가 보통 4만 원 또는 5만 원에 팔리는데, 전국 해산물의 약 30%가 이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번 주 수요일(23일)에는 조기 한 박스가 정상가의 절반 이하로 판매되었으며, 한국인들의 주요 해산물인 멸치는 평소보다 10~20% 정도 가격이 저렴하게 판매되었다. 24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문을 발표하여 일본이 이날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방류를 개시한 것은 지구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면서 핵 오염수 방류계획을 강행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인류에게 핵 재앙을 초래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반인도적 범죄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외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하기로 한 일본의 결정을 알게 된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에 있는 한 비정부기구가 공개적으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으며 또 피지 수바에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시위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은 해외의 국가와 사회단체의 규탄은 물론 일본 자국 내 어민 단체와 국민의 반발을 사고 있다. 특히 1945년 원폭 피해자 후손들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교도통신은 24일 원폭 피해자 후손들로 구성된 일본-전국 원폭 피해자 2세 단체 연락 협의회가 나가사키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후쿠시마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항의했다고 전했다. 이 단체는 원자폭탄의 피해자인 히로시마가 견딜 수 없다며 성명을 발표했고, 이 성명은 총리 관저에 우편으로 발송됐다. 성명은 “원폭 피해자 2세들은 부모들이 방사능 영향으로 고통받는 것을 오랫동안 목격했고, 자신들도 유전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어 건강을 염려하고 있다”라며 “정부와 도쿄전력이 책임을 지고 육상에서 보존·관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외에도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이루다 나열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고도 높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은 국제원자력 기구(IAEA)의 감찰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IAEA의 권위성과 전문성은 인정하지만, 이 기구의 분석과 결론 모두를 믿는 건 아니다. 특히 IAEA 역시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에 대해 명확한 지지 혹은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도 않았다. IAEA 역시 사상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수치나 분석을 통해서는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없은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일이란 시작이나 과정을 통해서는 어떤 결과가 나타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례로 1945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에는 그 위력이 그 정도로 강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자료도 있다. 다음 우리는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더군다나 믿을 수 없다는 추리가 나온다. 일본인을 두고 말하자면 좋게 말하면 “총명하다”하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각도로 말하면 “잔머리를 잘 굴린다” 혹은 “비열하고 간교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은 조선과 중국 그리고 기타 태평양 지역 국가와 지역에 큰 피해를 주었다. 그것도 아주 음융하고 비열하고 잔혹한 수단과 명분 등으로 말이다. 조선 왕조의 명성황후 음해 사건, 중국 대만 강점과 한일 합방 그리고 지난 세기 30~40년대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집할 때는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등 감언리설로 순진한 소녀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1920년대 말의 만주에서의 황구툰(皇姑屯) 사건과 루거우차오(卢沟桥) 사건 등을 분석 조명해보면 당시 일본이 강하다기에 앞서 음흉하고 뻔뻔스럽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시 일본은 한편으로는 미국과 담판함과 아울러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일본을 함부로 믿어서는 큰 코 다친다는 분석도 함께 나온다. 종합적으로 일본을 평가하면 일본인의 겉면을 보면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고 생활이 아주 규칙적으로 보이지만 일본인의 속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겉과 속이 같은 한국인과는 달리, 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중국인과는 달리 또한 거만하지만 우쭐대지는 않는 서양인들과는 달리 일본인한테는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피해국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역대의 독일 총리들과는 정반대로 일본은 오늘 현재도 기나긴 침략 역사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교과서까지 뜯어고치면서 군국주의의 침략사를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두고 각국은 여러 가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중국과는 달리 미국은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한국 정부는 “지지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입장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 두고 일본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속 궁리가 있는가 하면 다른 일종의 전략이 내포되어 있을 수도 있고 한국은 자국민들한테 미칠 손실보다는 일본과 정부 사이의 마찰을 우려하는 듯한 양상이다… 한편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에 대해 지금 과학적이고 안심할 수 있다는 학술적 수치는 있으나 그 영원성을 장담하는 언사는 한 마디도 없다. 어찌 됐든 일본의 핵 오염수는 방류하지 않는 것이 방류하는 것보다는 ‘명지한 선택’이라 보여지며 방류하는 것으로 나쁜 결과가 있을지언정 반대로 좋은 결과는 제로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가령 앞으로 방류 과정에 혹시라도 일본 자국 혹은 주변국들에 피해 사례라도 발생한다면 그때 가서 아무리 미국이나 국제원자력기구라 해도 결코 일본을 위해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일본이라는 이 섬나라의 위망은 일락 천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서기 2023년 8월 24일, 이날은 인류 역사상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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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무주지(無主地)’ 섬이 아니었다.
● 김정룡 (多가치포럼' 대표) 민간속설에 ‘이웃이 먼 사촌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가령 이웃집에서 경사가 생기면 함께 기쁨을 나누고, 안 좋은 일에는 같이 슬픔을 나누고, 급한 일이 생기면 이웃이 가장 먼저 달려와 돕는 등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삶을 영위해온데서 생겨난 속담일 터. 민간백성들의 삶은 대개 이웃끼리 화목한데 비해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구성된 국가의 경우 이웃나라끼리 사이는 그다지 화목하지 못하다. 바다를 사이 두고 이웃으로 살아온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좋은 때도 있었지만 서로 반목하는 일들이 더 많았고 지금까지도 해묵은 갈등들이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는데 그 가운데서 독도의 영유권 문제, 종군위안부 문제, 일본전범기업 강제징용 배상문제 등이 주요 쟁점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가 새로운 갈등으로 부상하여 오랜 갈등들에 얹어져 가뜩이나 썰렁한 냉기를 더욱 차갑게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남아 내려온 갈등도, 새로 생겨나고 있는 갈등도 모두 일본 측의 책임이 크건만 정작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후안무치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아주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느 한 착실한 역사학자의 통계에 의하면 한반도는 서너 차례 모자라는 1천 번의 침략을 당해왔다고 한다. 무려 1천 번이나 침략을 당해왔으나 남을 침략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하니 얼마나 착한 민족인가? 누구인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백의민족은 맞기만 하고 때릴 줄 모르니 선천적으로 DNA에 문제가 있다”고. 아무튼 그 1천 번 가운데서 일본의 침략이 다수였다. 일본은 지진이 많고 태풍이 많기로 지구촌에서도 이름난 곳이다. 게다가 땅이 척박하여 먹을 것이 늘 부족했다. ‘제집’ 내에서 해결책이 안 보이니 눈을 ‘옆집’에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남의 것을 빼앗아오는 약탈행위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가에 왜구의 노략질이 들끓었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곡식도 빼앗고, 옷도 강탈하고, 여자도 납치해가고 등 눈에 보이는 쓸 만한 ‘물건’이면 전부 빠트리지 않고 싹쓸이해갔다. 백의민족의 전통인사말은 ‘무사한가?’인데 그 유래가 바로 빈번한 외침을 당한데서 생겨난 것이다. 일본은 왜구의 노략질도 빈번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차원의 침략도 감행하였고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한반도 식민화였다. 1592년 풍신수길이 발동한 임진왜란이 좋은 근거이다. 명나라 조선 파병 때문에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실패했으나 그 후 결코 한반도 식민화 정책은 포기하지 않았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조선정부는 청나라와 일본을 불러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큰 전쟁을 피하고자 조선정부는 동학농민운동 측과 협상하여 평화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고 청나라 군과 일본군 모두 철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모처럼 좋은 기회를 만난 일본이 철회할 리가 만무했다. 청나라와 군대 철회로 갈등을 빚다가 드디어 무력충돌이 발생하였고 그것이 바로 ‘중일갑오전쟁’이다. 일본을 ‘쌰오르번(小日本)’으로 하찮게 여겨왔던 청나라가 생각 밖으로 일본한테 패배한다. 조선을 청나라 속국에서 벗어나게 하고 ‘독립문’까지 세워준 일본이지만 정작 조선은 독립을 하지 못하고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다. 호랑이가 나간 자리에 승냥이가 들어온 셈이었다. 일본은 강대했던 청나라를 물리쳤으나 또 다른 강대한 적인 러시아와 맞붙어 싸워 이겨야 만주와 조선에서의 이권을 모두 독차지할 수가 있었다. 1904년 일본은 한반도에서 자기네가 마음에 드는 곳에 어디든 군사기지를 세울 권리가 있었다. 러시아와 맞붙으려면 동해바다 섬에 군사기지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하여 일본의 레이더망에 독도가 들어왔다. 1905년 일본은 독도를 ‘무주지(無主地)’라 주장하면서 영토편입을 시도하고 시마네현(島根縣)에 지방고시를 알린다. 남의 나라 땅을 침략하고 그 땅을 ‘무주지’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드는 수법은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을 식민지화 하는 과정에서 활발하게 써 먹었던 수법이었다. 즉 일본이 유럽열강들한테서 배운 것을 조선침략에 활용했다는 뜻이다. 독도는 1905년 전에 과연 ‘무주지’였을까? 아니다. 마찬가지로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에 이르는 곳마다 모두 ‘무주지’ 땅들이었을까? 아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무주지’라 주장하는 것일까? ‘발견자우선주의’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활용했던 것이다. ‘발견자우선주의’의 본뜻은 최초로 발견한 사람들이 소유 우선권이 있다는 의미인데 백인들이 아메리카 땅을 발견하고 개척할 당시 수많은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결코 백인들이 최초의 발견자가 아니다. 분명히 그 땅엔 인디언이라는 주인이 이미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식민지를 개척한 그 땅들에 주인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 전부터 발견하고 삶을 영위해온 원주민들이 거주해왔다. 그렇다면 왜 유럽열강들이 ‘발견자우선주의’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들었을까? 주인이 이미 있었는데 ‘무주지’라 주장하고 거기다 한 술 더 떠 ‘발견자우선주의’를 떠드는 근거는? 유럽열강들은 지구촌 곳곳에 살고 있는 인류 집단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그 땅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3C’ 즉 기독교(Chrisianity), 문명(Civilization), 상업(Commerce)을 통해 식민지 정복을 정당화했다. 1455년 교황 니콜라오5세는 아프리카 서쪽 해안의 영토에 대한 포르투갈의 권리를 승인했다. 최초의 탐험시대부터 이미 그 땅에 인류가 살고 있든 말든 국가가 있든 말든 유럽열강들 중 그 누가 먼저 그 땅에 도착하면 자기네들이 주인이라는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를 적용했던 것이다. 독도는 1905년 이전에 조선의 소유이고 조선이 영유권을 갖고 있다는 역사적인 증거는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산업혁명과 식민지개척 공부에 가장 모범생이었던 일본이 서구열강들이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정당화로 써먹었던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 무기를 휘둘러 독도 영유권을 시마네현에 편입하는 고시를 알리는 수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있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일본 소유로 편입되었던 것들을 바로 잡는 조항에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등 제도들이 조선의 영유권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선의 지리는 육지와 3170 개 섬으로 구성되어 있어 섬마다 일일이 모두 표기할 수가 없었고 그때 독도가 빠져있었던 것을 일본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다. 즉 이것 때문에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한국정부가 독도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군대가 주둔하여 관리하고 있다. 6.25 전쟁 때 한국군 36명의 용사가 독도를 굳건하게 지켜냈고 지금까지도 한국이 독도에 주둔하고 관리하고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존재의 일차적인 이유는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2016년 세월호사건과 지난해 10월 발생했던 이태원참사사건에 전체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정부가 국가의 존재이유를 방기했다는 것이다. 다음 자국의 영토를 지키는 것도 국가존재의 주요 이유이다. 영토를 잃는 것은 안전을 잃어버리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기 때문이다. 한국정부의 독도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으로 명백한 우리 소유의 영토이다. 독도에 대한 영유권 분쟁은 존재하지 않으며 독도는 외교 교섭이나 사법적 해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확고한 영토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어떠한 도발에도 단호하고 엄중하게 대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독도에 대한 우리의 주권을 수호해 나아간다.” 다만 걱정이 하나 있다. 일본정치주류세력인 우익이 줄곧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에 대해 올해만 세 번 한일 양국정상이 만난 자리에서 아무 언급도 없었다. 윤석열 정부의 과거사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는 대일외교방침 때문일까? 일각에서는 이대로 나아간다면 일본이 독도를 완전히 빼앗아가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공동관리 주장을 들고 나오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한다. 독도분쟁은 대한민국의 자존심 문제이다. 자존심을 잃으면 나라의 존재이유가 사라질 만큼 국민의 사기가 저하된다. 그러므로 독도만은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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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전주국제영화제 정준호-민성욱 공동집행위원장 투톱체제 성공을 바라며
독립영화의 요람 전주국제영화제가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로 전환해 정체성 확립과 대중성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지 관심을 받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는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민성욱 부집행위원장과 정준호 영화배우를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의결했고, 지난 26일 조직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은 시장실에서 위촉장을 전달했다. 마력은 동력의 단위로 높을수록 좋다. 이번 쌍두마차 체제가 앞으로 3년 동안 시너지 효과를 일궈낼 것으로 기대된다. 백제예술대학교 방송연예과 교수인 민성욱 신임 공동집행위원장은 전주국제영화제 출범부터 조직위의 사무국장 및 부집행위원장을 역임한 '지킴이'이고, 정준호 신임 집행위원장은 높은 인지도를 가진 대중성을 확보한 영화배우이기 때문. 어떤 조직이나 더 큰 발전과 생존을 위한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시점이 있다. 세계 초일류 전자제품 회사로 대한민국을 빛내는 삼성이 만일 제일제당 시절처럼 사카린을 밀수해 설탕을 팔던 그대로 운영되고 있다면 지금의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 202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는 비경쟁 위주로 실시됐고 올해 2022년 23회 영화제는 국제경쟁, 한국경쟁, 한국단편경쟁, 특별부문(한국 장편 다큐멘터리, 지역공모작품, 비경쟁 아시아 영화)로 진행되며 업그레이드 됐다. 2023년 24회부터 3년간 시행될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기존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보다 더 대중성을 일으켜 더욱 큰 소통을 통해 영화계 발전과 주최지인 전주 지역발전에 더 크게 기여하는 영광이 실현될 지 귀추가 주목된다. 쌍두마차 체제가 된 전주국제영화제는 전주시민의 선택을 받은 우범기 시장이 조직위원장으로 이끄는 마차다. 우 조직위원장이 전주시 발전을 위한 고뇌 끝에 내놓은 묘수라고 풀이된다. 시장은 시민의 행복과 시의 발전을 도모하는 자리기 때문이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에 대해 기대가 큰 반면에 걱정과 반감도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수립되자, 권해효 배우, 방은진·한승룡 감독이 이사직을 사퇴했다. 이사회에서 자신의 의견과 다르게 의결되었다고 사퇴하는 것이 영화제에 대한 진정성일 수도 있지만 무책임하게 보일 수도 있는 지점이다. 고 자니윤(고 윤종승) 코미디언은 2013년 2월28일 해외동포들과 판문점을 방문한 후 가진 뒷풀이에서 "한국 사람들은 너무 똑똑해요.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이XX 안돼, 저XX 안돼 하는거에요. 일을 해보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한국계 코미디언으로 성공하고 그의 인프라를 총동원해 조국 대한민국 관광발전을 위해 기여하고 싶었으나 좌절된데 대한 의견으로 들렸다. 대한민국은 625전쟁 후 폐허에서 일어나 세계 경제 10대 강국이 되었고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나라다. 지난 80년간 대한민국이 변화가 없었다면 우리 국민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억압속에서 지옥살이를 하고 있었을 게 자명하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는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이사회에서 결정된 사안이다. 임기는 3년이다. 3년간 응원하고 3년 후 큰 성공과 발전을 이루면 박수를 치고, 변화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때 가서 비판해도 늦지 않다. 한국언론인연대 박상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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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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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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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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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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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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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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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한국인인가?
-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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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한국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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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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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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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세계 대백과(10)명랑한 금성
- 금성은 밤하늘에서 찬란한 금빛을 뿌리는데 태양과 달 외 우리가 지구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밝은 빛을 내는 별이 바로 금성이다. 그럼 금성은 어찌하여 이렇듯 밝을까? 원래 금성은 태양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기에 태양복사가 금성의 빛을 반사하여 기타의 별들의 빛보다 더 많아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는 금성이 특별히 밝은 원인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 외 금성의 외면에는 한층의 두꺼운 운무층이 깔려 있다. 그것은 75% 이상의 태양빛을 반사되게 하여 금성으로 하여금 늘 금빛찬란하게 한다. 금성은 명랑할 뿐만 아니라 매우 부지런하다. 금성은 저녁이면 제일 먼저 하늘에 나타나기에 사람들은 금성을 “장경성(长庚星)”이라고 부르며 또한 아침에도 제일 마지막에 사라지기에 “계명성(启明星)”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관찰계산에 따르면 금성의 공전주기는 약 224.7일이 되지만 자전주기는 도리어 243일이 되어 금성의 “하루”는 날이 갈수록 더 길어진다고 한다. 금성은 또한 태양계에서 유일하게 역향자전하는 대행성이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편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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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세계 대백과(10)명랑한 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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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10) 성소피아성당
- 성 소피아성당의 자료 소속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터키, 지점: 이스탐불 함의: 고대토이기건축예술의 걸작임 성 소피아성당(圣索菲亚大教堂)성당은 기원 325년에 세워졌는데 콘스탄티황제가 지혜의 신인 성 소피아를 모시기 위해 세운 것으로 세워진지 9개 세기 후엔 청진사로 고쳐졌다. 하기아 소피아성당은 수차의 수난을 거쳤는바 이스탐불의 역사와 끈끈히 인연을 맺어 왔다. 이스탐불의 가장 큰 성당으로 하기아 소피아성당은 터키에서 가장 대표성을 띤 종교건물이며 고대건축예술의 걸작이기도 하다. 수난역사의 견증 소피아성당의 운명은 수차 파란곡절을 겪었다. 기독교성당이 선지 900년후인 1453년, 오스만제국의 터키사람들이 이스탐불을 점령, 수단 무하메드(穆罕默德) 2세가 명령을 내려 이 교회당을 청진사로 고치라고 하였으며 교회당 주위에 네개의 높다란 선례탑을 세우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성 소피아성당의 모습으로서 건축풍격상의 분열은 이 수난의 역사를 견증해주고 있다. 1935년, 성 소피아성당은 터키의 국가박물관으로 되었다. 조형이 독특한 성당 하기아 소피아성당은 세계에서 두번째로 높은 성당이다. 성당의 꼭대기에는 40개의 창문이 있다. 해빛이 성당 내를 비출 때면 전반 대청은 유난히 밝고 명랑하다. 그리고 성당의 부분적 곳에는 바닥에 그리스식 십자가조형을 채용했으며 공간에 여러 개의 작은 기둥이 있는 외 대형 대청에는 아무런 기둥도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문과 벽과 작은 원주기둥 등이 설계상 서로 분담하여 커다란 중량을 받아내면서 큰 기둥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이로하여 신도들은 더욱 아름답고도 성스로운 천계(天界)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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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10) 성소피아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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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시리즈 5)
- ■ 김철균 대남정찰 아버지가 소속된 조선인민군 제 7 군단은 원산에 도착한 즉시로 긴장한 훈련에 돌입하였다. 훈련은 야간기습, 지뢰제거 및 포위섬멸과 고지점령 등이였는데 어쩐지 이상했다는 것이 아버지의 추억이었다. 조국을 보위하려면 저격전, 진지전 및 참호파기 등이 위주인 것이 상식이었지만 그것과는 정반대인 모양이었다. 한편 아버지네 부대는 가끔씩 밤중이면 원산항에 가서 군수물품 하역작업에도 동원되었었는데 군함에 싣고온 군수물품은 전부 탱크, 대포와 기관단총 및 따발총과 탄약 등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어딘가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바로 그럴즈음 1949년 5월초, 한국군내 2명의 대대장이 각각 자기의 대대를 이끌고 월북귀순하는 일이 발생했으며, 평양방송을 통해 “남조선 괴로군이 북진통일을 부르짖고있다”는 것도 자주 듣군 했다. 남조선군이 북진해온다면 인민군은 반드시 그들을 저격하는 훈련을 해야할텐데 왜 훈련하는 건 그것과는 정반대지?아버지한테는 그때로부터 전쟁은 기필코 터진다는 예감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밤, 아버지와 기타 2명의 사병한테 특수명령이 하달됐다. 즉 그날밤으로 38선을 넘어가 원주까지 통하는 교통요도의 다리와 한국군 진지배치 등을 정찰해오라는 것이었다. 그날밤 밤의 장막을 이용해 아버지네 일행 3명이 38선을 넘어 산발을 타고 약 20리 정도 걸었을가 할 때 날이 희붐히 밝아왔고 앞에는 고향의 두만강과 거의 비슷한 폭으로 됨직한 강이 보이였고 다리도 있었다. 아버지네 일행 정찰병들은 다리를 사진으로 찍으면서 그 주위의 병력배치를 살폈다. 얼핏 봐서는 다리 양측에 그저 4명의 보초만 있을뿐 토치카같은 강한 화력망은 없어보였다. 아버지네 일행이 약 한시간 정도를 숲속에 엎드린채 주의깊게 살폈으나 다리쪽에서는 여전히 별다른 동정이 없었다. “남조선 군대의 경비가 몹시 허술해 보입니다.” “아니,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어. 보이지 않는 초소가 꼭 어디에 있을거야.”동료의 말에 아버지는 좀 더 살펴보자고 했다. 아니나 다를가 과연 얼마후 빈 통조림통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다리주위의 사처에서 한국군 사병들이 모여드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왁작지껄 떠들면서 소란스러웠다. 아마 아침식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대충 짐작해도 20여명은 푼히 되는듯 싶었다. 전시도 아닌데 다리 하나를 놓고 군인 20여명이나 지키다니? 이 다리의 전략적위치를 알 수 있었다. 아버지네 정찰병들은 보다 더 지켜보기로 했다. 화력망을 더 정확히 파악해야 했고 강의 수심도 알아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식사를 마친 한국군 사병들은 재차 어디론가 제각각 사라졌다. 다리위는 또 새벽녘처럼 고요했다. 그러자 동료 정찰병 2명은 또 이젠 그만 관찰하고 돌아가자고 졸라댔다. 아버지 역시 더 이상 알아낼 방법이 없는지라 돌아가기로 했다. 바로 이 때 다리 남쪽으로부터 군인들을 가득 실은 군용트럭 2대가 나타나더니 다리목에 와서 멈춰섰고 곧바로 그 군인들이 차에서 뛰어내리는 것이었다. 이는 한국군측에서도 전쟁에 대해 뭔가 낌새를 챘으며 이 다리만은 결사적으로 리용하려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니 꼭 이 다리에 대해 더 알아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버지가 직접 나섰다. 아버지는 기타 2명의 동료한테 뭔가를 지시하고는 자신이 직접 모험하기로 작심했다. 아버지는 숲에 몸을 숨기면서 강가로 접근한 후 돌을 던져 수심의 깊이를 관찰, 다행히도 수심은 사람의 키를 넘을 것 같지 않았다. 이어 아버지는 교두보를 지키고 있는 한국군 초병을 향해 권총 두방을 쏘았다. 한국군 화력망을 시탐하기 위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가 한국군 토치카들에서 불을 내뿜었는데 교두보에 있는 토치카 말고도 산기슭의 여러 군데 보이지 않는 화력망이 배비돼 있었다. 아버지는 나무뒤에 몸을 숨기고는 그 토치카들의 위치를 그려넣었다. 한편 숲속에 숨어있던 아버지의 동료 2명도 총을 쏘며 아버지를 엄호했고 아버지는 민첩하게 몸을 움직이며 산등성이에 매달렸다. 이어 밤이 되자 아버지네는 강을 건너 계속 남으로 향하면서 교통요도와 한국군의 막사, 포진지 등을 정찰, 원주시가지가 보이는 산마루에 도착한 후 다시 귀로에 올랐다. 그것이 바로 6.25 발발 직전인 1950년 6월 중순경이었다. (다음기 계속) 주: 본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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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시리즈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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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들의 시위로 비쳐 본 ‘한국사회’
- 한국 대학생들이 8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가족들의 요구사항 수용과 특검 실시’ 그리고 ‘박근혜 정권 퇴진’을 주장하는 기습 점거 시위를 벌였다.”는 한국 신문기사를 접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이를테면 “박근혜 대통령 물러가라!” 한다고 해서 물러날 일도 없을 것이고,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러고 보면 한국인들은 가끔 실현 불가능한 것에 집착하고, 맹목적으로 집회 또는 시위하는 것을 볼 때마다 조금은 이해 불가다.한국사회를 관심 있게 지켜보면서 느끼는 점은 마치 불과 물의 상극 관계처럼 매일 시위 등을 하지 않으면 못살 것 같은 느낌이다. 야당을 비롯해 국민이 정부나, 여당을 감독하고 견제해야 더 건강하고 밝은 사회를 지향함에 이롭겠지만, 한편으로는 모두 함께 공존하고 더불어 살 줄도 알아야 나라가 안정하고 평화로울 수 있는 건데 그저 ‘민주주의 국가니, 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맹목성이 상당히 강하다.즉, 한국도 이제 민주화를 이룩한 지 꽤 됐음 직한데 아직 성숙하지 못한 민주주의 같은 맹목성을 지니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물론 집회와 데모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필요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집회나, 데모가 빈번하다고 해서 그것이 꼭 민주주의 국가의 자랑처럼 얘기하는 것은 절대 아니라고 본다. 되려 나라가 많이 불안하게 보일 수도 있고, 행복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계기일 수 있다. 그동안 한국은 민주주의를 위하여 많은 사람이 피와 땀을 흘렸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위해 대한민국이 존재하는지, 대한민국을 위해 민주주의가 존재하는지, 이젠 더 성숙한 민주주의를 위해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등에 깊이 고민하는 사람들은 그리 없는 것처럼 보인다.정치계의 보수든ㆍ진보든 그리고 종교계든, 지역 문제든…… 거의 이 같은 맹목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그 맹목성으로 자신들과 다른 체제의 국가, 타 국민이나 민족, 다른 문화 등을 얘기함에도, 아무런 견식이나 체험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마음대로 함부로 평가하고 왈가불가하려는 용맹함과 맹목성을 나타내곤 한다.그렇다고 다른 민족들에 비해 자신의 신념을 위해 끝까지 견지하는 지구력이라도 있는가? 모두 냄비근성이고, 자기중심적일 뿐…….박근혜 같은 대통령이라도 중도에 물러나는 것보다 5년 만기를 끝마치는 게 국가에 더 유익하고, 국민이 모두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함께 어울리며 공존해 나가는 게 국가의 안정과 발전 측면으로 볼 때 대한민국에 더 보탬이 될 것이다.물론 야당을 비롯해 정부와 여당이 바른길을 가고 있는가, 국정을 잘 이끌어 나가고 있는가에 대한 감독과 견제가 필요하겠지만.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지만, 한국사회를 보면 둥글둥글 모나지 않게 조화롭게 살아가는 게 아니라, 너무 극과 극으로 계급투쟁으로 싸울 줄밖에 모른다는 인상을 종종 받는다. 그렇다고 국가의 모든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반듯하게 잘 짜인 것도 아니고, 그래서 항상 세상을 경악할 일들이 잘 일어나기도 하지 않는가? <연변통보 준이>주: 본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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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칼럼/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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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들의 시위로 비쳐 본 ‘한국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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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13)
- ■ 허길성 해리서산업에서 나는 “폭발호”처럼 부자는 되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치부했다고 할수는 있었다. 일본에서 박사공부를 하는 아들의 뒤바라지를 하고도 집 한채를 마련했으며 용돈도 그닥 남부럽지 않게 쓸수 있었다. 한편 하도 까근하고 과학적인 관리를 한데서 실패가 적었고 또한 적시적으로 그것을 포기하고 정리한테서 빚더미에 올라앉는 위기는 만회했다. 그때는 이미 일본류학 3년째로 박사시험을 칠 날도 멀지 않았고 거기에 아들애가 적지 않게 아르바이트로 뛰면서 공부했는가 하면 또 장학금도 탔고 있었기에 부모로 된 우리의 부담은 상대적으로 많이 덜어진 셈이였다. 더이상 “제3산업”을 벌이지 않아도 될수 있었다. 하지만 동물사육업에 재미를 붙인데다 나는 미립이 텄고 경험도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이 사회에서 생활하자니 돈쓸 일이 많았으며 앞으로 로후에 들어서서 사람한테 어떤 일이 터질지 어떻게 알랴. 결국 나는 안해와 의론하고는 곰사육업을 벌여보기로 하였다. 안해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이였다. 나는 이번에도 곰을 사놓기에 앞서 서점에 가 곰사육에 관련된 책을 사다보면서 곰사육에 관련된 지식과 기초상식부터 익혔다.곰사육을 시작할 때 우리는 사육장이 없다 보니 집안 객실에 굵은 철근으로 곰우리를 만들고는 그안에 곰 1마리를 가두고 키웠다. 곰사양장을 짓자면 큰 자금이 들어가기때문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곰사육장을 지을만한 자금이 없어서가 아니였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즉 곰사육양 역시 지난번의 해리서사육처럼 시장이 막힐 경우를 생각해서였다. 그도 그럴것이 만약 곰사육에 크게 투자해 곰사육장을 지었다가 그 산업이 얼마 안가 막을 내리게 되면 자칫 투자금도 뽑지 못할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었기 때문이였다. 한편 곰을 사육하면서 보면 조심해야 할것이 많았다. 곰(해리서도 마찬가지였음)이란 녀석은 강아지나 고양이와는 달리 주인을 알아보고 주인을 반기는 그런 애완동물이 아니였다. 먹거리를 주거나 혹은 가려워한다고 나무꼬챙이로 등을 긁어주거나 또는 목욕을 시킬 때도 까딱 조심하지 않으면 갑자기 주인한테 덮쳐들어 손을 물어놓거나 긁어놓기도 하군 했다. 그래서 나와 안해는 그 녀석한테 조금씩 다친적이 여러번 되였다. 그럴 때마다 우리 부부는 “이 주인도 알아보지 못하는 미련한 놈”하고 욕하군 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곰사육이란 이 산업을 포기하지 못하였다. 아니, 곰한테서 뽑아내는 웅담분을 파는 시장이 포화되지 않는한 그것을 계속 해야 했다. 그러면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동물을 치다보면 머리속에 떠오르는 한가지 법칙같은것이 있었다. 즉 개, 고양이 등 애완동물은 귀여울 때가 많아 그것들을 고와하다 보면 가족 지어는 집식구처럼 느껴질 때가 있으며 적지 않은 가정들에서는 진짜 애완동물을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런 애완동물은 경제적 가치가 적었다. 적어도 웅담분을 제공하는 곰이나 알을 낳는 닭에는 비할수가 없었으며 오히려 자식한테 투자하는것처럼 돈을 때려넣는 경우가 허다했다. 례하면 먹는것이 사람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사람보다 더 비싼 육류같은것을 먹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곰이나 해리서 그리고 닭이나 게사니같은 동물이나 가금류는 절대 가족으로 생각할수 없는것들이다. 귀엽지 않고 애를 먹이기도 한다. 가끔씩 좋은것을 먹이고 병치료도 해주지만 그렇다고 그 비용이 애완동물한테 쓰는것과는 비길수 없었다. 반면에 곰처럼 미욱한것들은 주인한테 부를 창조해주고 있는것이다. 이는 묘한 대립적 관계가 아닐수 없었다. 만약 이것들한테 그 어떠한 공통점이 있다면 애완동물은 주인한테 즐거움을 선물하고 곰같은 미욱한 동물은 주인한테 경제적 가치를 제공한다는것으로 이 두가지 모두가 사람한테는 수요된다는 바로 그 점이라 할수 있다. 6 곰사육업이 본격적인 궤도에 들어서고 또 거기에 일정한 비결이 생기고 미립도 트자 우리는 곰을 1마리로부터 5마리까지 늘였다. 곰사육업이 그냥 “흑폭풍”처럼 다가왔다 지나가는 그런 단기행위업종이 아닌것 같아서였다. 하긴 제3산업에는 단기행위를 거금을 투자를 하여 제꺽 본전을 뽑고도 큰돈을 버는것이 있는가 하면 보다 적은 돈을 벌더라도 원견성이 있고도 지구력이 있게 끌고나가는 산업항목이 별도로 있는것 같았다. 당시 우리가 생산해낸 웅담분은 주로 한국으로 많이 수출되였다. 연변특산으로는 한국행을 하는 사람들이 한국인들한테 선물하기엔 제격인 모양이였다. 그외 우리는 아들이 있는 일본과 딸이 있는 북경에도 웅담분을 적지 않게 보내주어 적지 않은 판로를 개척했다. 그리고 당시 우리가 생산해낸 웅담분은 잡질이 적고 순도가 높아 고객들한테서 호평이 좋았으며 한시기 한국나들이하는 사람들이 다투어 사가는 특산품으로 되기도 했다. 어찌보면 “공급이 수요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정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여기까지 오노라니 고생스러운건 사실이였다. 질병예방에도 신경써야 하였지만 사료장만이 여간 여러운것이 아니였다. 곰이란 녀석은 먹기를 엄청 많이 먹었다. 해리서를 사육할 때처럼 여겼던 내가 크게 오산한 셈이였다. 게다가 마리수가 5마리다보니 더욱 그랬다. 특히 겨울철에 먹을거리가 제일 걱정거리였다. 우리는 해마다 겨울철이 다가오면 우리는 당근, 수박, 사과와 개미 등을 대량 구입했고 옥수수도 3000근 이상씩 구입해서는 일반 개인집의 김치움보다는 5-6배가 더 큰 움안에 보관해야 했는가 하면 돈을 절약하기 위해 교외의 배추밭과 과수원을 오르내리면서 배추와 사과배 이삭을 줏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손을 얼구기도 했고 차림을 하고 나선 꼴이 말이 아닐 때도 많았다. 그리고 해리서를 키우면서 손실을 본것처럼 공사육에서도 큰 손실을 본적도 있었다. 우리는 1993년부터 2012년까지 약 20년간 곰사육을 했었는데 선후로 곰 3마리가 죽어나가기도 했다. 그중 한마리는 뇌진탕에 걸려 죽었고 한마리는 설사를 맞아 앓다가 죽었으며 또 다른 한마리는 집에서 키우는 식물을 뜯어먹은것이 중독되면서 죽기도 했다. 그때 200근이 넘는 곰 한마리가 2만원씩 했으니 6만원을 손실본 셈이였다. 그 6만원 ㅡ 그것은 큰 기업인으로 놓고 말하면 새발의 피도 되나마나 했겠지만 작은 규모로 곰사육업을 하는 우리한테 있어서는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였다. 하긴 이렇듯 고생스런 나날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아들딸의 뒤바라지를 성공적으로 할수 있은것도 사실이였다. 바로 이런 우리의 고생과 헌신으로 의해 딸 영혜가 이젠 북경에서 일본회사에 출근하며 보람찬 나날을 보내고 있고 아들 영동이 또한 박사모를 쓰는것으로 일본류학생활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한동안 일본의 모 대학에서 교편을 잡다가 이젠 당지의 모 회사에서 출근하며 회사중견으로 립지를 굳힌 상황이다. 특히 영동이가 박사학위를 취득할 당시 아들은 우리 부부를 초청해 일본구경을 시키기까지 했다. 아들이 일본에 없다면 언제 우리 부부가 일본나들이를 할 생각이나 할수 있었으랴. 금빛석양 1 나는 예전부터 많은 사람들로부터 “일복이 있는 사람”이란 말을 자주 들어왔다. 그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닌것 같다. 왜냐하면 지나온 나의 일생을 놓고 보아도 나는 항상 시간이 넉넉하거나 한가할 때가 없었다. 초기 부대생활을 할 때에는 뭔가를 배우느라고 늘 시간의 부족함을 느꼈고 북경공정병학원을 졸업한 후에는 배운것을 실천하느라고 항상 바삐 보냈으며 그뒤 뻐스공장에서 “로동개조”를 할 때거나 연길시라지오방송국으로 전근한 다음에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그중 한가지 빼놓을수 없는 일이 있다면 1996년 4월 우리 3형제가 “고향정”이란 주제를 갖고는 룡정시 석정향 중성촌에 고향에 다녀온 그것이다. 당시 우리는 여러가지 준비를 했다. 우리 삼형제는 각각 호주머니를 털어서는 촌로년협회에 기부할 자금을 마련했고 또 연변예술학원 지도부와 련계해서는 가수 박춘희 등 20명으로 구성된 예술소분대를 청하기도 했다. 그날, 우리 3형제와 예술학원의 예술소분대가 중성촌에도착하자 마을사람들은 촌구락부에 모여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마침 그때는 진달래가 피는 계절이라 촌에서는 진달래꽃을 꺾어와서는 구락부의 무대를 장식하기도 했다. “고향정”활동모임에서는 촌민위원회 주임의 발언과 촌로년협회 회장 등 여러 사람들의 발언에 이어 예술소분대의 공연이 펼쳐졌다. 그러자 촌민들속에서는 자주 탄성이 터졌다. 특히 박춘희가수가 건들건들한 목소리로 조선족민요를 부르자 촌민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흥겨워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시골구석에서 처음으로 구경하는 전업예술단의 공연이 아닐수 없었다. …그날 오후 예술학교 소분대와 기타 사람들은 다 연길로 돌아갔지만 활동조직자들인 나 그리고 둘째형님과 셋째형님은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서 하루밤 묵기로 하였다. 촌에 보다 더 실질적으로 좋은 일을 하기 위해 촌간부들과 토의하기 위해서였다. 그날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의론했다. 하다면 촌을 위해 도대체 어떤 좋은 일을 해야 하는가?의론중 문득 셋째형님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놨다. 곧바로 오래지 않아 “6.1”절이 다가오기에 그때 촌아이들한테 연길구경을 시키자는것이였다. 그러자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찬성했다. 그날밤 우리는 촌아이들한테 연길구경을 시킬 때 필요한 절차와 각자가 맡을 임무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토론하기도 했다. 드디여 1996년 6월 1일이 닥쳐왔다. 때마침 그해 연길시인민경기장에서 “6.1”절 경축대형활동모임이 있었는데 우리는 연길시교육국과 련계하여 룡정시 석정향에서 오는 애들과 교원 및 학부모 등 100여명이 앉을 장소를 마련했다. 그날 석정향에서 온 학생, 교원과 학부모는 약 80명이 됐으며 우리가 사전에 장소를 마련했기에 그들은 아주 쉽게 연길시인민경기장에 입장했고 또한 경축활동의 모든 장면들을 구경할수가 있었다. 점심때가 되자 애들과 학부모 그리고 교원들은 연길시인민경기장에서 그닥 멀지 않은 우리 집에 가서 식사하기로 하였다. 당시 우리 집은 140여평방메터가 되는지라 80명이 식사하는데는 별 불편이 없었다. 그날 점심은 애들과 학부모들이 갖고온 도시락과 우리 집에서 준비한 음식들로 마련되였다. 이어 오후에는 시간이 있게 되자 우리는 애들한테 연길시신화서점을 참관시켰다. 당시 신화서점 지도부에서는 촌어린이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었을뿐만 아니라 수백권에 달하는 책을 애들한테 기증했다. 참으로 고마운 신화서점 지도부일군들이였다. 그날 저녁이 되자 우리는 애들과 학부모 및 교원들을 우리 3형제의 집에 배치하여 식사하고 또 주숙하게 하였는데 주숙하는데는 아무래도 좀 자리가 모자란것 같아서 연길시 하남가두의 독보조 장소를 빌려쓰기도 했다. 이튿날 새벽, 우리는 애들과 학부모 등을 데리고 연변일보사 인쇄공장을 찾아가 신문인쇄현장을 참관시켰다. 둘째형님인 허길룡씨가 연변일보사에 재직이였기에 사전에 련계했던것이다. 아침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또한 애들을 데리고 연길공항으로 갔다. 모두 사전에 련계했던것이다. 연길공항에서우리는 애들한테 공항내부와 비행기내부 등을 참관시켰으며 비행기의 리착륙장면도 구경시키였다. 연길공항까지 구경시키고 나니 점심때가 되였다. 그러자 우리는 연길동북아호텔로 향했다. 그시기 우리 허씨종친회의 허순자녀사가 동북아호텔의 총경리로 있었기에 그가 80명에 달하는 애들과 학부모 및 교원들한테 무료로 점심 한끼를 제공하기로 했던것이였다. 참으로 나의 일을 자기의 일처럼 생각하면서 도와준 허순자녀사였다. 나는 이번 집필기회를 빌어 현재 연길시에서 일본료리집을 운영하고있는 허순자녀사한테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그번 활동에서 나와 둘째형님 그리고 셋째형님은 적지 않은 돈을 팔기도 했다. 전문용 뻐스 2대를 세내여 애들과 학부모 및 교원들이 타고다니게 했고 또한 식사를 제공하는데도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갔다. 하지만 이를 두고 형님들과 나는 물론 형수 두분과 나의 안해도 불쾌해하는 내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촌애들을 위해 늦게나마 좋은 일을 한것으로 하여 무척 기뻐하는 모습들이였다. 한편 그때의 활동은 연변일보에 게재되기도 하고 연변TV에 방송되기도 했는데 연변일보의 기사는 둘째형님인 허길룡씨가 직접 쓴것이였다. (연재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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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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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세계 대백과(9)천왕성
- 천왕성은 천문학자 헤겔이 1781년에 발견한 것으로서 태양계 8대 행성 중에서 세번째로 큰 행성이다. 천왕성은 토성 밖의 해왕성 내에 있는데 해록색으로 단장되어 있다. 천왕성은 태양계 대가정 중 제일 게으른 “아이”와도 같다. 천왕성은 그 자체의 자전 혹은 공전을 막론하고 모두 “누운채”로 돌고 있다. 누군가 추측하기를 천왕성은 가능하게 아주 먼 옛날에 다른 한 천체와 부딪쳤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천왕성은 뾰로통해져 갖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고 있단다. 천왕성은 게으르기도 하거니와 또 아주 차갑다. 그것의 핵심 온도 역시 2000도 내지 3000도밖에 되지 않으며 아울러 핵심외면을 둘러고 있는 층은 전부 얼음으로 깔려있다. 천왕성의 내부핵심과 목성 및 토성의 물질분포는 거의 비슷하다. 또한 천왕성 역시 토성처럼 그 자체의 빛무늬가 있는데 그 빛무늬가 비록 크지만 매우 어둡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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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세계 대백과(9)천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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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선생님, ‘책무’가 뭐예요
- ■ 문 민 해마다 이맘때면 멀리 중국 어딘가에 계실 스승이 그립습니다. 어렸을 적에 다녔던 학교가 폐교 되었으니 찾아 뵐 수 없어 마음이 더 아련합니다.17년 전 서울에서 다시 공부하여 모교 두 개가 더 생겼습니다. 하나는 한국외국어대학교이고 다른 하나는 서울대학교이지요. 학교 모두 서울에 있어 집에서 1시간 이내 거리지만 졸업 후 선생님을 한 번도 찾아뵙지 못했습니다.고등학교 2학년인 딸아이가 5월 15일 스승의 날에 중학교 선생님을 찾아뵈러 간다기에 나도 한번 나의 스승을 찾아뵐까 용기를 내보지만 갑자기 여러 명의 선생님들이 떠올라 어느 선생님부터 찾아뵈어야 할지 망설여집니다. 그래서 이 지면을 통해 선생님께 안부를 전하고자 합니다. “선생님 가르침 감사합니다. 스승의 날 행복하게 보내세요.”이렇게 인사를 올렸지만 왠지 불효한 제자인 것 같아 죄책감이 듭니다.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학부 공부를 할 때는 전공보다 교양과목이 더 재미있었습니다. 성적증명서를 보니 그때 재미있게 들었던 교양 과목 성적 역시 높게 나왔습니다. 3학년 1학기에 들었던 ‘논리와사고’과목은 A+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수업이 생생합니다. 담당 선생님은 탁석산 박사였는데 한 학기 동안 아주 얇은 교과서 하나를 소개하면서 그 책을 꼭 사지 않더라도 읽고 나서 중간고사 전까지 독후감을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읽었던 책은 ‘한국의 정체성’이었습니다. 150페이지도 되지 않은 얇은 책이라 부담되지도 않았습니다. 리포터를 제출하기 위해 읽고 또 읽었습니다. 읽을수록 나의 정체성을 얘기하는 것 같아 책속에 푹 빠졌습니다. 나는 A4 3장 되는 리포터에 나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실토했습니다. 선생님은 빨강 펜으로 잘 썼다고 코멘트를 달아 주었습니다. 졸업하고 퍽 후에 알게 되었지만 탁석산 박사는 종종 TV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마다 선생님께 연락드리고 싶었지만 혹여 알아보지 못할까봐 그만두곤 했습니다. 당시 한반에 수강생이 50~60명이 되었지요.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학부 공부를 할 때는 지도교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서울대학교에서 석사공부를 할 때는 입학하면서부터 지도교수가 정해졌습니다. 나의 지도교수는 “학교 컨설팅” 책을 쓰신 진동섭 교수였습니다. 2003년 서울대학교 교육학 석사를 지원할 때 저는 연구계획서에 중국의 조선족 학교에 대해 연구하겠다고 썼습니다. 일반적으로 연구계획서와 졸업논문이 꼭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입학 당시 제출했던 연구계획서와 졸업논문 주제가 거의 일치했습니다. 조금 수정되었다면 범위를 줄였을 뿐이었습니다. 원래는 중국 동북3성의 조선족학교를 대상으로 하려고 했는데 졸업논문에서는 흑룡강성 조선족학교를 중심으로 썼습니다. 선배들은 석박사 졸업논문을 쓰면서 한번쯤은 ‘논문병’에 걸린다고 했습니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심장이 콩알만 해져 쉽게 놀라고 긴장이 수개월 지속되면서 머리카락도 많이 빠지고......한국어 실력이 낮은 나로서는 동기들에 비해 두 배, 세배 힘들었습니다. 띄어쓰기, 철자, 사투리 등등 논문을 쓸 기본이 되어있지 않았습니다.논문자격시험은 통과했지만 막상 논문을 쓰려니 앞이 캄캄했습니다. 졸업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힘들 때마다 지도교수님은 띄어쓰기, 철자, 사투리를 하나하나씩 첨삭지도를 해주셨습니다. 최종 인쇄되기까지 7번~8번 교수님께 지도를 받았습니다. 교수님은 번마다 꼼꼼히 첨삭지도를 해주셨습니다. 졸업한지 7년이 되고 그동안 이사를 두 번이나 하였지만 아직도 교수님께서 직접 첨삭 해준 논문원고를 보관하고 있습니다. 최종 인쇄본보다 더 값진 논문이라고 생각되어 폐기 하지 않고 있습니다. 교수님 이 못난 제자를 기억하고 계시나요? 첨삭논문원고를 볼 때마다 선생님 생각이 납니다.“선생님, 감사합니다.”선생님, 저는 요즈음 7년 전에 썼던 논문을 자주 읽어보곤 합니다. 논문 쓸 당시 갖고 있던 문제인식이 그대로 멈춰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중국동포 자녀 교육을 위해 주말학교를 만들고자 합니다. 선생님, 그때 학창시절 노트를 보니 “어떻게 Leaning community를 이룰 것인가”라는 메모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책무성 accountability’에 대해 메모도 있습니다. 주말학교가 ‘학습커뮤니티(Leaning community)’의 일환이라면 어떻게 ‘책무성 (accountability)’을 실천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선생님, 7년 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주말학교가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교육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한 답을 찾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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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선생님, ‘책무’가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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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9) 벨베데레궁전
- 벨베데레궁전의 자료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오스트리아, 지점: 잘쯔부르그 남쪽 함의: 알파브산 이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상 원림지대임 17세기초,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교주 마쿠스(马尔库斯)는 수원이 충족한 헬부른산밑에 궁전 하나를 짓자고 생각했었다. 당시 궁전설계사는 궁전을 짓기에 지형이 좋기에 말쿠스한테 아름다운 수상경치를 위주로 한 휴가궁전인 이 헬부른궁전(海尔布伦宫)을 지어주었다. 헬부른궁전은 화원을 포함하여, 풍격이 독특하기로 이름난 분수못, 그리고 기계 꼭두각시극장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알프스산 북쪽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표적인 건축물로서 역시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값진 문화재의 하나로 되고 있다. 헬부른궁전의 분수못 분수못은 헬부른궁에서 가장 독특한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분수의 원천은 작은 나무와 수림 뒤에 있는가 하면 돌상과 돌의자 밑에도 있으며 심지어 어떤 분수의 기관은 사람들이 상상도 못할 곳에 숨어있는 곳도 있다. 전하는데 따르면 대교주 마쿠스는 일찍 여기에서 연회를 베풀어 손님들을 청했는데 손님들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몰래 분수기관을 열어놓아 물기둥이 사처로부터 튀어나오게 했다 한다. 그래서 모두들 사처로 피했지만 온몸이 물에 흠뻑 젖었다고 한다. 당시 유일하게 물 한방울도 맞지 않은 이가 바로 이 “자작극”을 꾸민 말크스 교주였단다. 헬부른궁전 내에는 아주 깜찍하게 지어진 돌건축물이 있는데 이 건물이 바로 신기한 꼭두각시 극장으로 매개 극의 정경과 인물은 모두 세계 저명한 동화이야기로 제작되였다. 돌건축물 내의 중앙에는 하나의 특이한 돌이 있는데 위에는 왕관 하나가 놓여 있으며 사람이 손으로 그 왕관을 다치기만 하면 왕관밑으로부터 분수가 뿜겨져 나온다. 또한 분수로 꼭두각시 극장의 무대를 움직이는데 100개의 꼭두각시들이 순식간에 생명을 얻어 움직이게 되며 아름다운 음악속에서 각 자가 자기의 역을 감당, 자태가 다양해 아주 생동감을 준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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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9) 벨베데레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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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시리즈 4) 아버지네들을 맞아준 조국
- ■ 김철균 아버지네들을 맞아준 조국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하다싶이 아버지는 중국인민해방군의 일원으로 강서성 남창까지 나간 뒤 다시 중국 중앙군위의 비밀지령에 의해 정주에 모였다가 화물차에 앉아 조선으로 나가게 되었다. 신의주에 도착한 그날 밤에도 아버지네들은 그곳이 조선 즉 조국인줄을 몰랐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튿날 새벽 날이 밝으면서 여기저기에서 숱한 사람들이 나타나 아버지네들의 부대가 휴식하고 있는 곳에 와서 구경하였는데 모두가 한결같이 조선말을 하는 것이었다. 이 때 누군가 흥분에 젖어 소리쳤다고 한다. “야, 조선이다. 우리 조국에 왔단 말이다!”그러자 모두들 환성을 지르며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 흥분에 들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로 술렁이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조선사람 조선으로 길이 보존하세…환호성속에서 전사 여럿은 또 태극가를 부르기도 했단다.……미구하여 중국에서 나간 군인들 앞에는 인민군 정복을 한 군관 한명이 나타났다.누더기같은 군복을 입은 중국해방 군출신과는 어울리지 않게 멋진 차림의 군관이었다. “여기 지휘관이 누구요?”새파랗게 젊은 녀석인데 반말이다. “나요. 나 이 부대를 지휘하고 있는 사단장인데 지병학이라고 하오.” “사단장? …”인민군 군관은 지병학 사단장을 아래 위로 훑어보더니 “흥!”하고 냉소를 했다. 사단장이라는 사람이 옷을 입은 꼴이 이게 뭐냐는 뜻이었다. “무슨 부대가 이렇게 무질서한거요?!” “이제 금방 중국에서 막 나오다보니…”지병학 사단장은 새파란 젊은 녀석 앞에서도 예의를 갖추었다. “하긴 중국에서 유격전이나 하던 사람들이라 다를리 있겠소만…”이 때 어디선가 트럭 2대가 달려오더니 부대앞에 와서 칙-하고 멈춰섰다. “당신들은 오늘부터 조선인민군 부대가 되었단 말이요. 중국에서 유격전이나 하던 부대가 아닌 소련군 고문들한테서 훈련을 받게 될 정규부대가 됐다 이 말이요.”트럭에 싣고 온 것은 전부 인민군 복장이었다. 이어 군복이 발급되었다. 사병들은 여태껏 입고 있는 중국해방군 복장을 벗고는 인민군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사단장이고 일반 사병이고 분별이 없이 똑 같은 것으로 갈아입었다. 뒤이어 찦차 한대가 달려오더니 역시 부대가 있는 곳에서 멈춰서더니 차에서 군계급이 아주 높아보이는 군관 2명이 내렸다. “아니, 강신태 동지…김책 동지!”지병학 사단장은 반달음으로 그들앞으로 다가가더니 거수경례를 붙였다. “지병학 동지 오느라 수고가 많았소. 반갑소. 조국은 동지들의 나라 건설과 보위 사업에 뛰어드는 것을 열렬히 환영하오.”그러고는 아까 그 젊은 군관한테 지병학 사단장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이 동지가 바로 소련으로부터 함께 중국 동북에 진출했던 지병학 장군이오. 인사하고 예의를 갖추도록…”그 젊은 군관은 갑자기 눈이 휘둥그래지는 것이었다. 강신태 장군은 자기 역시 1948년 말경에 조선에 나오게 되었다는 것과 조선에 온 뒤 이름을 강건으로 바꾸었다고 소개했다. 한편 복장을 바꿔입은 사병들은 여전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하며 태극가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자 강건 장군은 그것을 제지시켰다. “동무들이 중국에서 나왔기에 잘 모르는가 보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새로운 애국가를 만들었소. 아까 그 태극가는 케케 묵은 것으로서 남조선에서는 여전히 불려지고 있다만…” 그러면서 아까 그 젊은 군관더러 새로 나온 애국가를 불러보라는 것이었다.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금에 자원도 가득한/ 삼천리 아름다운 내 조국 반만년 오랜 역사에// 찬란한 문화로 이어진 슬기론 인민의 이 영광/ 몸과 맘 다 바쳐 이 조선 길이 빛내이세…장엄하고도 힘있는 애국가였다. 그날 조선으로 진출한 후 아버지네가 처음 배운 노래가 그 애국가와 “김일성 장군의 노래”였다. 그 뒤 아버지네 부대는 재차 열차편으로 원산쪽으로 이동, 원산에 당도한 부대는 그 곳의 명사십리라는 해변가에서 개편되어 조선인민군 제7군단이란 부대번호를 갖고 훈련에 들어갔다. (다음기 계속) 주: 본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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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시리즈 4) 아버지네들을 맞아준 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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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관광객 35명 자전거로 북한에 진입, 관광
-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 2일 오후, 중국 관광객 35명이 자전거로 중국 두만강을 건너 북한 경내에 진입해 3시간동안 이국풍정을 유람했다고 중국 텅쉰망이 3일 보도했다. 중국 관광객 35명은 이날, 자전거를 타고 도문세관을 통해 국경을 넘은 후 북한 남양시에서 기타역전, 김일성동상 등을 유람하고 남양시에서 유명한 상업거리를 돌며 북한의 음식도 맛보았다. 관광은 3시간이였다. 도문시와 북한 남양시는 강을 사이 두고 바라보고 있으며 중국 관광객들이 북한에 입경하는 중요한 통로의 하나이다. 최근 전통적인 관광항목으로 도문에서 북한으로 가는 출경관광 열이 일면서 도문시는 북한 칠보산관광 전문열차 운행을 재개했고 북한 자전거 출경관광 등 여러 항목의 북한관광을 회복, 개통했다. 관광객들의 북한관광에 편리를 주기 위해 도문시에서는 여러 가지 새로운 조치를 취했다. 관광객이 사흘 전에 출경정보를 도문시 관련 여행사와 관광국에 제공하기만 하면 원하는 날에 출경관광 수속을 해서 그날로 출경, 관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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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관광객 35명 자전거로 북한에 진입, 관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