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6-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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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태일 시/개산툰 구월
    개산툰 구월 박태일 모아산 질러 넘다 왼쪽으로 내려 서면 화룡에서 룡정에서 너른 평강 들 타고 내린 해란강 걸음걸음 고요하다 동성진 너머 리민 너머 옥수수 키잡이로 서서 파랗게 쏘다니는 구릉 마을 집들은 산협의 가난을 풀풀 날리고 창유리 깨진 틈으로 도닥도닥 옛말 드난다 개산툰 개산툰 구월은 두만강 건너 회령 산천 어디서 오득오득 개암이나 씹는 것일까 걸어 내리고 오르는 시장 마당 지난주 건너왔을 북녘 소식은 어느 집 낮술에 비틀거리고 있을까 아는 이 친척도 없이 나는 이 골짝에 갇혔다 장대교회 붉은 십자가가 국경 철책을 바라고 선 뒹겨장 빛깔 어두운 흙길 따라 룡정으로 연길로 나가는 버스는 그치고 택시 기사 둘 버드나무 아래 버드나무 그늘인 양 빈둥거리는 너머 두만강 수척한 물빛을 숨기며 개산툰 구월은 이제 입을 다문다. 박태일의 시집 '연변 나그네 연길 안까이'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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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9
  • 박태일 시/조양천
    조양천 박태일 마을 이층 숲 참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하양 여우가 존다 배달말 깨우친 누나와 배우는 애토끼 귀엣말 조심조심 걸음 옮긴다 마을 이층 숲 누가 들렀나 누가 한국서도 멀리 부산서 온 너구리 아저씨 여름 물골에 부들처럼 무성한 천자문 배우기 배달말 배우기 책고랑 따라 걷는다 살몃살몃 아침부터 한낮까지 동무들 와도 그만 그만 안 와도 여우는 졸음을 살대발처럼 내렸고 마을 이층 숲 계단 아래로 삼월 고슴도치 찬바람이 구른다 마주 선 소학교와 중학교 사이 전깃줄을 뛰는 참새 떼 양조장 굴뚝은 볼 부어 붉고 높아 집집 지붕 더 눌러 앉힌다 기차역 폐품장 흐린 담길은 부스럭스럭 수수 밭머리로 고개 돌리고 근들이술 두 집만 일찍 등을 밝힌 채 저녁 고양이 기다린다. 박태일의 시집 '연변 나그네 연길 안까이'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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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9
  •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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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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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4-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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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첩의 제왕 메이어 다간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세계 첩보사에서 “어둠의 제왕”, “초인간”으로 알려진 메이어 다간(梅尔•达甘)은 출생부터 남달랐다. 제2차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1월에 소련에서 뽈스까 폴란드로 향하던 열차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나치스독일의 유태인 핍박을 피해 소련으로 도피했다가 귀국하던 참이었다. 조부를 비롯해 가족대부분이 대학살에 죽었다. 다행히 살아남은 그의 부모는 어린 다간을 데리고 신생국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수도 텔아비브 남쪽 아랍인 거주지에서 성장한 다간은 자연스럽게 아랍어와 그들의 습성을 익혔다. 18살에 군에 입대한 그는 타고난 싸움기술 특히 능수능란한 칼던지기 솜씨를 갖고 최정예 특수부대 “샤이렛 매트칼”에 지원했지만 미세한 차이로 떨어져 대신 낙하산 부대에 들어갔다. 3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사회에 복귀한지 불과 얼마 되지 않은 1967년에 제3차 중동전쟁(6일전쟁)이 터지면서 다간은 장교로 임명되어 군대에 다시 들어갔다. 치밀함과 과감함을 동시에 갖춘 그는 군부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특히 팔레스티나 무장조직을 상대로 임시 편성된 비밀 특수부대 “샤이렛 리몬”의 활약이 워낙 뛰어나 이를 지휘한 다간은 신체적 결함에도 최고의 특수전 전문가로 명성을 쌓는 한편 출세의 길로 달렸다. 다간은 진급과 함께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길 때마다 한가지 “보물”을 간직하고 다녔다. 바로 곤봉과 권총을 쥔 독일군 앞에 무릎 꿇고 죽음을 기다리는 조부의 사진이었다. 다간은 “이 사진을 보면서 우리가 늘 강해져야 하고 스스로 지킬 힘을 기르지 않으면 유태인 대학살의 비극이 재현된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말을 습관처럼 하군 했다. 기갑여단장과 총참모부 국장을 거쳐 1995년에 소장으로 전역한 다간을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摩萨德)로 이끈 사람은 바로 당시의 이스라엘 총리 아리엘 샤론(阿里埃勒•沙龙)이었다. 샤론 총리는 군에서 나가서 총리의 대테로 담당 보좌관을 잠시 지낸 다간에게 신임 특명과 함께 모사드의 수장자리를 권했다. 그해는 2002년 8월이었다. 다간이 취임할 당시 정보기관 모사드는 엉망이었다. 요르단, 스위스, 끼쁘로스, 뉴질랜드에서 팔레스티나 과격단체 하마스의 지도자를 대상으로 한 제거작업이 잇달아 실패하면서 모사드의 명성은 송두리째 떨어졌다. 이런 상황을 타개할 인물로 등장한 다간은 조직문화에서부터 작업활동까지 통째로 모사드 대개혁에 나섰다. 정보수집과 분석 및 비밀외교를 강조하던 것에서 벗어나 과감하면서도 치밀한 비밀공작을 중시하는 적극적인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또 미국 중앙정보국, 영국 육군정보 6국 등 우방 정보기관과의 긴밀한 협력관계 확대에도 발벗고 나섰다. 이에 일부 간부들이 불만을 표시하면서 퇴직했지만 다간은 자신의 정책을 과감하게 밀어붙였다. 치밀하면서도 과감한 비밀공작은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대담하면서도 증거를 남기지 않은 치밀한 모사드의 비밀공작은 숙적인 아랍권 심장부에서 잇달아 이루어졌다.2004년 9월 26일에 수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의 한 복판에서 하마스 간부인 칼릴이 승용차에 시동을 걸자마자 터진 폭발물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2008년 2월 12일에도 다마스쿠스에서 대형 차량폭탄 사고가 일어났다. 사망자는 레바논 진주당 최고 지도자 중의 한명인 무그니예였다. 무그니는 1983년에 레바논주재 미국 대사관과 미국 해병대 막사 폭탄테로와 외국인 납치를 배후에서 조종한 혐의로 미국정부가 500만 달러의 현상금을 내건 인물이었다. 두 사건의 배후는 다간이 지휘한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였지만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 2008년 8월 1일에 수리아 서부 지중해 연안 도시 타르투스 부근 자하비예 휴양지에서 알아사드 대통령의 군사보좌관 겸 알키바르 핵시설 보안책임자인 술레이만 장군이 별장 앞바다를 지나가던 요트에서 발사된 총탄에 맞아 숨졌다. 이 술레이만 암살도 다간이 이스라엘 해군 특수부대 제13전단과 합작한 것이었다. 또 2010년 1월 19일에 두바이에서는 이스라엘 병사 납치와 살해 및 무기밀수 혐의로 수배를 받아온 하마스 요원 알마브후가 암살되었다. 이 사건은 용의자로 지목된 33명의 모사드 요원들이 모두 영국, 프랑스, 독일, 아일랜드, 오스트랄리아의 위조여권 소지자로 드러나 국제적인 파문을 일으켰다. 이란은 “지도에서 이스라엘을 아예 없애버리겠다”는 계획으로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다. 다간의 가장 큰 성공은 이란의 이 계획을 저지하기 위한 관련 공작이었다. 2014년 10월 5일 저녁 11시에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일어난 대형 폭발사고의 위력은 발생지인 파르친 군사지역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가옥이 심하게 요동칠 정도였다. 인공위성 사진으로 본 결과 이 폭발로 이란의 군사지역내 대형 시설물 두채가 완전히 파괴됐으며 일부는 다음날까지 불길에 휩싸였다. 폭발 현장에서 300미터 떨어진 곳의 건물도 피해를 보았다. 이 폭발 지역은 국제원자력기구와 이스라엘 모사드가 이란의 핵무기개발 관련 극비시설들이 들어선 곳이라고 나란히 지목한 표적이다. 이 폭발도 다간이 지휘한 모사드의 “작품”이었다. 지난 2010년 후에 이란에서 가스관과 군시설물에서 원인을 알수 없는 일련의 폭발 사고와 적어도 4명의 이란 핵 과학자들이 잇달아 피살되었다. 그리고 2011년 11월 12일에도 이란 수도 테헤란 인근의 비밀 미사일 기지에서도 대형 폭발사고가 일어나 기지일대가 한순간에 페허로 변했다. 이 사고로 이란의 중거리미사일 개발 책임자인 모가담장군 등 17명이 목숨을 잃었다. 장거리미사일용 고체연료 발동기 수십기도 고철로 변했다. 이 것들도 모두 다간의 “공로”였다. 2011년 7월 23일에 이란 수도 테헤란 남부 하셈거리에서 발생된 핵물리학자 네자드가 피살된 사건도 모사드가 고용한 현지 공작원에 의한 것이었다. 네자드 피살사건 전해인 2010년 11월 29일에도 핵개발 계획의 최고책임자급인 샤리아리 박사와 다바니 박사 두 사람 역시 차량폭탄에 의해사망되였다. 또 같은 해인 1월 12일에는 물리학 분야의 최고 전문가이자 핵개발 계획의 고문이던 모하마디 교수가 출근하려고 자동차문을 여는 순간 차량부근에 세워진 오토바이에 설치된 폭발물이 터져 목숨을 잃었다. 모사드는 이란이 이 지하핵시설에 3000대의 원심분리기를 설치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란 내의 모사드 정보원들은 이란 핵개발 계획의 중심인물인 테헤란대학 물리학과의 파크리자 데교수에 대한 상세정보를 제공했다. 정보를 확보한 다간은 국제공조를 통해 미국과 유럽연합 입국금지와 은행 구좌 동결 조치와 함께 제거 대상이 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곧이어 개발작업 관계자들의 활동을 저지시키는 공작이 이어졌다. 2010년 여름에 이란의 핵개발 계획을 통제하는 컴퓨터 수천대가 컴퓨터 비루스에 감염됐다. 이듬해까지 이 바이러스는 이란 핵 시설 내 원심분리기 절반가량의 작동을 중단시켰다. 이란 핵개발 저지 작전과 관련해 모사드의 “해결사”, “암살자”로 불리우는 비밀공작원의 무용담도 화제로 되였다. 죽음의 공포도 아랑곳하지 않고 투철한 애국심과 직업적 헌신성으로 무장한 비밀공작원들이 숨은 주인공으로 묘사됐지만 역시 실체는 드러나지 않았다. 모사드의 집요한 저지공작이 없었다면 이란은 이미 핵무기로 무장해 중동정세를 더욱 “꼬이게” 만들었을 것이라는 것이 서방 정보기관들의 지배적 시각이다. 특히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모사드의 이란 핵개발 저지공작에 나선 다간 국장의 예리한 정세 판단과 과감한 실행력에 대해선 과거 이스라엘과 4차례나 중동전쟁을 한 애급의 극우 신문도 “지난 7년간 다간은 이란의 핵개발 계획에 극심한 타격을 입혀 진전을 막았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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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2-18
  • 쓰딸린은 대숙청에서 사람을 얼마나 죽였는가? ①
    [동포투데이] 조기 쏘련공산당의 민주분위기는 비교적 농후했다. 레닌이 살았을 때 당내논쟁은 대역무도한 일이 아니었다. 트로쯔끼(托洛茨基), 스베르들로브(斯维尔德诺夫), 카메네프(加米涅夫), 부하린(布哈林), 류꼬브(李可夫) 등은 늘 레닌의 노선을 반대했다. 레닌이 그들을 비판할 때에도 이런저런 비무산계급세계관의 “감투”를 씌워 여지없이 반격했다. 그러나 논쟁이 끝난 후 레닌과 그들의 혁명 우정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하나의 이상한 현상은 레닌이 종래로 쓰딸린을 세계관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지 않은 것이다. 레닌은 만년에 그루지야사건, 대외무역롱단권, 로농검찰원제안 등등으로 쓰딸린과 몇차례 충돌이 있었지만 한번도 문제를 세계관의 높이까지 끌어올려 비판하지 않았다. 왜서 레닌은 쓰딸린의 세계관에 존재하는 문제를 지적하지 않았는가? 만약 그가 지적했더라면 쓰딸린이 그의 후계자로 되지 못하여 세계상 첫 사회주의국가의 운명도 달라졌을 것이다. ▲ 2014년 3월 크림 반도의 러시아 강제 병합을 환영하는 주민이 거리에서 옛 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쓰딸린의 얼굴이 들어간 달력을 들고 있다. 쓰딸린은 20년 집정기간에 평균 2년에 한번씩 큰 억울한 사건을 만들어냈다. 절대적인 통계에 의하면 쓰딸린이 살해한 노일대 혁명자의 수는 옹근 싸황(沙皇)정권시기에 노일대를 살해한 숫자보다도 더 많다. 싸황러시아는 1721년에 뾰뜨르(彼得)대제가 세운 군주제국가인 러시아제국을 말하는데 1917년 니꼴라이(尼古拉) 2세 때에 와서 러시아혁명에 의해서 붕괴되었다. 쏘련의 저명한 역사학가이며 다른 정치견해를 가지고 있는 메드베데프(麦德维杰夫)는 “우리 당과 우리 혁명을 반대하는 어떠한 적들도 우리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쟁취하는 사업에 쓰딸린보다 더 큰 손해를 끼치지 못했다”고 말했다. 쏘련공산당 역대 중앙위원, 후보중앙위원은 모두 284명인데 대숙청(1936~1939년)전에 자연 사망한 45명을 제외하고 남은 239명 중에서 총살당했거나 감옥에서 죽은 사람이 188명, 자살한 사람이 8명, 중앙위원에서 제명당한 사람이 22명이었다. 다만 21명밖에 무사하게 “중년”을 보내지 못했다. 그러나 무사하게 “중년”을 보냈다고 해서 무사하게 만년을 보낸 것이 아니었다. 쓰딸린이 1952년에 또 새로운 숙청을 긴박하게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주곡인 “크레물리궁 사사건”이 이미 연주되기 시작했다. 베리야(贝利亚), 클리멘트 보로실로프(克利缅特•伏罗希洛夫), 몰로토프(莫洛托夫), 아나스타스 미꼬얀(阿纳斯塔斯•米高扬), 카가노비치(卡冈诺维奇)는 모두 이미 쓰딸린이 이름을 불러 비판했기에 그들은 극도의 공포 중에 있었다. 당시 후르쑈브만은 당황해하지 않았다. 제19차 대표대회에서 비판한 명단 중에 그의 이름은 지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쓰딸린이 1953년에 갑자기 사망되지 않았더라면 소련에 또 어떤 피바람이 불어칠지 알 수 없었다. 쓰딸린은 숙청기구에 명령해 우크라이나의 몇백명 민간연예인을 처형했다. 이 민간연예인들은 민족문화의 살아있는 화석이었다. 음악가 쇼스타코비치(肖斯塔科维奇)는 “그들이 민간연예인을 총살할 때마다 몇백 수의 위대한 음악작품이 그들과 함께 소실되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의 민간가수들은 모두 맹인이여서 그들의 가곡은 문자기록이 없었다. 이런 음악작품은 제자들을 통해 세세 대대로 전해졌다. 매 하나의 맹인가수들은 모두 자신의 독특한 가곡이 있었다. 쓰딸린은 무슨 병태적인 의심으로 이런 맹인예술인들을 소멸했는가? 맹인예술인들이 쓰딸린에게 무슨 위협이 되었는가? 당시 농촌에서 한창 집체화 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부농은 한 계급으로 이미 소멸되었다. 쓰딸린은 이런 맹인가수들이 사처로 돌아다니면서 부르는 노래가 매우 슬픈 곡조인데 그들이 부농을 위해 억울함을 하소연할지 누가 아는가? 맹인에 대해 무슨 심사제도가 있을 수 있겠는가? 고쳐서 비준한 가사를 맹인들에게 주어 부르게 할 수도 없고 서면 지시를 하달할 수 없었다. 맹인들은 무엇이나 모두 입으로 전달할 수 있었다. 맹인들을 통제할 수 없을 바엔 차라리 그들을 총살하는 것이 간단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이리하여 쓰딸린은 맹인연예인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쓰딸린은 명령을 내려 1만 5,000명의 뽈스까군관을 총살한 적이 있다. 독일군이 뽈스까를 침략했을 때 뽈스까군은 서부전선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적가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쏘련군이 동쪽에서 뽈스까영토를 공격했다. 독일군의 공격도 막아내기 힘든 판에 쏘련군이 뒤에서 공격해오니 뽈스까군은 투항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죽어도 독일군에 투항할 수 없었던 뽈스까군은 결국 쏘련군에 투항하는 길을 선택했다. 쏘련 내무부는 쓰딸린의 명령에 따라 뽈스까군의 포로를 “정치감별”한 후 병사들을 하나하나 석방하고 군관 1,500명만 남겨놓았다. 뽈스까인들의 심목중에이 1,500명의 군관들은 모두 민족영웅이었다. 그러나 쓰딸린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뽈스까군의 군관들은 입대 전에 모두 전업 지식분자(이는 뽈스까군의 매우 특별한 점)였다. 1만 5,000명의 군관은 공정사, 교사, 기술원, 농예사, 의사, 회계사, 작가 등으로 구성되었다. 쓰딸린은 이 사람들을 석방한다면 앞으로 꼭 뽈스까 자산계급 정권을 위해 일할 것이라고 여겼다. 런던에 망명정부를 세운 뽈스까 자산계급정부가 그들에 의거해 또 군대를 조직한다면 이는 쓰딸린이 앞으로 세우게 될 쏘련 괴뢰정부인 뽈스까인민정부에 얼마나 큰 우환이 되겠는가? 모두 총살해 버리는 것이 우환거리를 제거하는 속 시원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쓰딸린은 내무부에 “뽈스까의 1만 5,000명 군관을 모두 카틴삼림(卡廷森林)에 끌고 가서 비밀리에 총살하라고 명령했다. 확실하게 죽이기 위해 사람마다 모두 머리에 총을 쏘았다. 그리고 큰 구덩이를 파서 그들을 매장했다. 이것이 바로 카틴삼림 학살사건이다. 반세기가 지난 후에 고르바쵸브와 에리친은 쏘련정부를 대표하여 과거 쏘련이 카틴삼림 학살사건을 저지른데 대해 뽈스까인민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며 깊은 참회를 표시했다. 1990년 1월 30일에 구쏘련의 국가안전부 부주석은 “현존하는 서류자료의 통계의 의하면 1930년부터 1953년까지 쏘련 전국에 377만 8,234명이 정치 핍박을 받았고 78만 6,098명이 극형(총살)을 당했다”고 말했다. 쓰딸린은 집정 20여 년 동안 78만여 명을 사형에 처했는데 이 숫자는 그리 많은 것이 아니다. 쏘련 내무부에 남은 서류는 전부의 사망자 수를 반영하지 못한다. 서류가 소각된 정황도 있기 때문이다. 1934년에 쏘련공산당 대표 1966명 중에서 1108명이 반혁명죄로 체포되어 대부분이 집중영과 감옥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이 당대표들은 직접 사형판결을 받아 죽은 것이 아니기때문에 그들은 78만 6098명의 수치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와 비슷한 정황은 매우 많다. 기록보관소의 모든 서류를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던 쏘련국방부 군사연구소 소장은 “1937과 1938년의 그 비참했던 2년 동안에 약 350만~450만명이 진압당했고 그중 60만~80만명이 사형판결을 받고 죽었다. 그외 또 매우 많은 사람들이 ‘법정’에서 사형판결을 받지 않았지만 후에 노동개조영과 감옥에서 애매하게 죽었다”고 말했다. 숫자에는 소리가 없다. 450만 명이든 350만 명이든 누가 “옷을 잡고 발을 동동 구르며 우는” 통곡 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생태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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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2-06
  • 무측천이 창조한 4대 세계기록
    [동포투데이] 세계기록은 경기장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다른 분야에도 여전히 각양각색의 세계기록이 존재한다. 중국통치자 중의 하나의 특수한 사례로서 무측천(武则天)은 많은 기록을 창조했다. 그녀는 이름이 무조(武曌)이고 별명이 무측천, 무미(武媚)이다. 그래서 무미랑(武媚娘)이라고도 한다. 무측천은 중국 역사상 유일한 정통 여황제, 수명이 가장 긴 황제 중의 하나(82세)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세계기록이 아니다. 그녀는 혼자서 황제중의 4대 세계기록을 창조했다. 중국에서 그 어느 황제도 이 세계기록을 깨지 못했을 뿐만아니라 세계적인 범위로 보더라도 여전히 최고기록이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이 4대 세계기록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임용한 재상이 가장 많았다. 당왕조에는 재상이라고 칭하는 관직이 아주 많았다. 좌복야, 우복야 및 문하성, 상서성, 중서성 3성의 장관을 모두 재상이라고 칭할 수 있다. 그리하여 당나라의 재상수량은 전체적으로 다른 왕조를 넘어섰다. 예를 들어 당태종은 재위 23년간 재상을 25명 임명했다. 그러나 이 숫자는 무측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무측천은 인재를 아끼기로 유명했다. 과거를 크게 일으켜세우는외에 지방의 각급관리들에게 우수한 인재를 추천하도록 장려했다. 그렇기는 해도 그녀는 인재를 놓칠가봐 두려워했고 나중에는 심지어 사람들에게 스스로가 스스로를 추천하도록까지 격려했다. 인재가 많아지니 그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했다. 그렇지 않고 놀려두면 그 것은 낭비였다. 결국 그녀의 통치하의 국가관료기구는 커지게 되었다. 재상의 직만 앞뒤로 73명에 달하게 되었다. "수당사(隋唐史)"에서는 이렇게 해석했다. “무후는 일처리가 마음내키는대로였고 좋고 나쁜 것이 항상 바뀌었다. 그래서 그녀가 즉위한 동안에 재상은 모두 73명에 이르렀다.” 적인걸(狄仁杰)도 무측천시기의 재상이다. 적인걸(630~700년)은 자가 회영(怀英)이고 태원사람이다. 적인걸은 천수 2년(691년) 9월에 봉각란대평장사를 담임하여 재상으로 되었다. 그러나 얼마 안되여 래준신의 무함으로 감옥살이를 했다. 억울한 누명을 벗은 후 팽택현령으로 강등되었다가 거란족의 난이 일어났을 때 다시 기용되었다. 신공 원년(697년)에 적인걸은 다시 재상으로 되었다. 적인걸은 바른 말을 잘 하기에 무측천에게 려릉왕 리현을 태자로 책봉하라고 강력하게 권고하여 당조의 사직이 지속되게 하였다. 여기에서 무측천이 재상을 임용한 사례를 들어보기로 한다. 대주왕조를 건립하기전에 부유예(傅游艺)라는 9품관리가 기회를 잘 노렸다. 그는 무측천이 황제를 칭할 야심이 있는 것을 알아채고 사람을 끌어모아 상소를 올렸다. 무측천에게 국호를 “주”로 고치라고 요구했다. 무측천은 기뻐하며 1년동안 9품관리인 부유예를 3품관직으로까지 승진시켰다. 그리하여 재상의 위치에 이르렀다. 당나라때 1품, 2품관리는 아주 적었다. 재상은 대부분 3품관이었다. 무측천은 지독하기 그지없는 악녀였지만 다행히 부지런히 정무를 보았고 나라를 잘 다스렸다. 빈번하게 재상을 바꾸었지만 국가의 혼란은 오지 않았다. 역사상 무측천에 다음가는 황제는 숭정황제이다. 이 명나라 마지막 황제는 일생동안 사람을 쓰면서도 의심을 계속 하였고 재위 7년동안 재상을 50명이나 썼다. 명왕조는 병이 깊었는데 그가 이렇게 뒤흔들면서 더욱 회복할 방법이 없어지게 되었다. 둘째, 즉위년령이 가장 많았다. 무측천의 이전에 즉위시 년령이 가장 많았던 황제는 유비였다. 이 유현덕은 전반생을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유격전을 벌렸지만 다행히 늙으막에 복이 있어 당시로서 가장 큰 2개의 주(형주, 익주)를 차지하고 최종적으로 60세에 영광스럽게 황제에 등극하고 촉한정권을 세웠다. 무측천은 그보다 더욱 힘들었다. 당태종의 재인에서 당고종의 소의(昭仪)를 거쳐 황후, 천후에 이르고 다시 태후에 이르렀다. 67세가 되여서야 비로소 황제의 보좌에 올랐다. 이 해가 기원 690년이다. 무측천은 국호를 주(周)로 바꾸고 자칭 “성신황제(圣神皇帝)”라고 칭했다. 14살때부터 그녀는 이미 53년을 분투한것이다. 그외에 오대십국때 마은(马殷)이라는 사람이 당나라말시기에 호남에 할거했다. 927년에 이르러 후당은 그를 초국왕에 봉했다. 그는 75세의 나이에 대기만성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지 “왕”일 뿐이고 죽을 때의 묘호도 초무목왕이었다. 뿐만아니라 이 왕은 중앙의 할거세력이 봉한 것이므로 황제의 반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셋째, 릉묘의 규모가 가장 컸다. 무측천이 처한 시대는 당나라의 번영시기였다. 풍부한 국력은 그녀의 릉묘건설에 견실한 재력기초를 제공했다. 그녀의 릉묘인 건릉(乾陵)은 684년에 공사를 시작하고 23년의 공사를 거쳐 1기가 완성되었다. 건릉은 수도 장안성을 모방해서 비슷하게 만들었다. 외곽성, 황성, 궁성의 3중성곽이 있고 내성에는 동쪽에 청룡문, 남쪽에 주작문, 서쪽에 백호문, 북쪽에 현무문이 있다. 남북의 주축선은 길이가 4.9킬로메터에 달했다. 남북의 담은 길이가 1450메터이고 동쪽의 담은 1582메터, 서쪽의 담은 1438메터이다. 총면적이 230만평방킬로메터에 달했다. 이러한 규모는 당태종의 소릉도 견줄수가 없어 력대제황제릉 중 최고라고 할 수 있다. 그외에 성내에는 헌전, 편방, 회랑, 궐루와 적인걸 등 60여명의 중신들의 사당이 있다. 이는 또 하나의 장안성이라 할만하다. 아쉬운 것은 “안사의 란”에 건릉의 휘황하고 장관인 지면건축물이 상당히 크게 파괴되였다는 것이다. 정원 14년(798년)에 이르러 다시 수리되었다. 이렇게 큰 릉묘이니 안에 들어있는 부장품도 만만찮았다. 현대학자의 예상에 따르면 부장된 진귀한 보물의 총량은 최소한 500톤가량일 것으로 본다. 만일 무측천의 건릉이 열린다면 아마도 진시황릉과 같이 중요한 고고학적 대사가 될 것이다. 넷째, 사용한 년호가 가장 많았다. 년호는 한무제가 발명했다. 제왕기년법의 연속이다. 무측천의 이전에 이 세계기록을 보유한 사람은 한무제였다. 그는 55년간 재위하면서 년호를 모두 11개 사용했다. 평균 5년에 1개를 사용한 셈이다. 이 년호는 각각 건원(기원전140~기원전135), 원광(기원전134~기원전129), 원삭(기원전128~기원전123), 원수(기원전122~기원전117), 원정(기원전116~기원전111), 원봉(기원전110~기원전105), 태초(기원전104~기원전101), 천한(기원전100~기원전97), 태시(기원96~기원전93), 정화(기원전92~기원전89), 후원(기원전88~기원전87)이다. 무측천에 이르러서는 그녀가 황제에 등극해서부터 마지막에 정변으로 자리를 낼때까지의 21년동안에 모두 17개의 년호를 사용했다. 생활력이 강한 녀강자로서의 무측천은 개성있는 년호를 사용했다. 이 년호는 각각 광택, 수공, 영창, 재초, 천수, 여의, 장수, 연재, 증성, 천책만세, 만세등봉, 만세통천, 신공, 성력, 구시, 대족, 장안이다. 그중 비교적 재미있는 것은 천수 3년이다 그해에 무측천은 두번이나 년호를 바꾸었다. 즉 천수 3년, 여의 원년과 장수 원년은 모두 같은 해에 바꾼 것이다. 이 해는 바로 692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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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13
  • [단독] 한성호(韩晟昊), 그는 누구인가?
    [동포투데이] 한성호(韩晟昊) 중국재한교민협회총회 회장은 "한국적 조선족이며 신화보(월간) 사장인 조명권(曹明权)이 나의 과거를 들먹이며 나의 인격을 모독하고 명예를 훼손시키는 문장을 만들어 나의 얼굴에 먹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의 애국적인 인격을 짓밟고 나의 생명안전을 위협하였다. 이에 참을래야 참을 수 없다'며 기고문을 작성하여 본지에 보내왔다. 다음은 한성호 회장이 보내온 기고문 전문이다. 1945년, 나 한성호는 19세 때 일본이 투항하고 중국 국민정부가 승리하자 동북이 해방되었음. 당시 나 한성호는 동북 길림사범대학 2학년 학생이었는데 학교의 수업이 중단되자 고향인 길림성 장백현으로 돌아갔다. 1946년 나 한성호가 20살이 되던 시기 동북에서는 대혁명으로 대지주와 부농을 타도하는 유혈적인 투쟁이 개시되었으며 나의 가정은 선참으로 재산을 몰수당하고 가택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부친과 형제 몇명도 사처로 도망갔으며 모친은 대들보에 목을 매고 자결하였다. 나 한성호 역시 그 폭풍을 피해가지 못하고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죄명이란 첫째, 대지주의 아들이고 둘째, 위만주국 시대의 대학생이란 것이었으며 셋째, 51 폭동의 주모자(주: 제3조의 죄명은 순전히 날조된 것이었으며 1984년에 이르러 해명되었음)라는 것이었다. 후에 나 한성호는 친척 및 친구와 중공간부의 비밀도움으로 탈옥(越狱)하여 압록강을 넘어 북한으로 도망하기에 성공하였고 1948년에는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건너갔으며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로 되어 지금까지 살고 있다. 1949년 당시 23살인 나 한성호는 한국 서울에서 신문을 발간,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시작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한성호는 한국에서 철거하는 화교들을 실은 선박 “영송호(永淞号)에 승선하여 대만으로 피난, 6개월 뒤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으며 이어 국민당에 가입하였고 그 때로부터 국민당에서 사무를 보면서 생활을 유지하게 되었으며 비록 한국전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나 한국을 떠나지는 않았고 지금까지 70여 년간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다. 1951년 25살인 나 한성호는 재한 중국 국민당 직속지부의 조직훈련과 과장으로 사업, 겸임으로 재한 대만 대도통신사(大道通讯社) 특파원 및 재한 화교청년 반공항러구국총회(反共抗俄救国总会) 총회장(주: 재한 국민당 직속지부의 조직일군들로는 다음과 같다. 주한대사 왕동이 이 지부의 당무지도원으로 최고의 권력자였고 비서로는 여규생, 과장으로는 나 한성호였고 간사는 우천덕이었다. 당시 3명씩으로 하나의 소지부가 되어 당무 및 교포사업을 하였는데 국민당의 해외지부는 근근히 간판효과만 있었을 뿐 아무런 실권도 없었다)으로 사업하기도 했다. 1952년 나 한성호는 당시 왕동 주한 중화민국 대사 및 국민당 지부 지도원의 추천으로 대만에 가서 중국 국민당 혁명실천연구원 제 20기 당무훈련반에 참가, 당시 원장은 장개석(蒋介石)이었고 학원생은 300명이었으며 1개월을 한기(주: 대북 양명산에서, 부록 1: 동창록 등 문건, 참고)로 되어 있었다. 졸업시 장개석 원장이 학원생들을 고무하고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하여 매 학원생들과 기념사진 한 장(주: 부록에서의 사진이 증명, 왼쪽 사람이 한성호이고 오른쪽 사람이 재한 화교 국민대회 대표 왕흥서임. 이 사진은 나 한성호가 한국전쟁에서 공로를 세워 장개석의 회견을 받고 찍은 것이 절대 아님임)씩 남기었다. 헌데 이 사진을 갖고 한국적 조선족이며 신화보(월간) 사장인 조명권(曹明权)이 나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문장을 만들어 떠들줄이야. 그는 나의 인격을 모독하는 요언을 조작, “한성호가 한국전쟁에 참가하여 중공혁명선열들을 살해했으며 한성호의 두손에는 공산당인들의 선혈이 낭자하게 묻혀 있는 바 이것으로 ‘부친을 살해한 그 원수’를 갚은 ‘공로자’로 되었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이런 망나니가 이 공로로 장개석의 접견을 받게 되었다” 라고 하며 나한테 죄를 뒤집어 씌우고 나의 얼굴에 먹칠을 하였을뿐만 아니라 나의 애국적 인격을 짓밟고 나의 생명안전까지 위협하였다. 이에 참을래야 참을 수 없게 된 나 한성호는 부득불 자신의 프로필을 간단히 작성하여 공개해 설명하는 바이다. 1953년 한국전쟁이 결속된 뒤 나는 여전히 재한 중국 국민당 직속지부에서 사업하였으며 1955년 29살이 되던 해에 일체 당무사업에서 손을 떼고 한국 전라남도 군산시에서 군산 화교학교 교장으로 교편을 잡게 되었다. 동시에 한국 동양한의대학(东洋汉医大学)에 입학(4년제), 후에 다시 한국 경의대학교 한의대학에 전학(6년제)하였으며 5학년 때 대한민국 제34기 한의사(汉医师) 국가시험에 통과되어 한의사 허가증을 획득하면서 지금까지 줄곧 의료사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1992년 대만독립을 주장하는 이등휘가 중화민국 대통령 및 중국 국민당 주석으로 당선되던 날, 나 한성호는 실망스럽고 분노한 나머지 단연히 중국 국민당에서 사퇴한 동시에 ‘한화천지(韩华天地)’ 및 ‘중국천지’ 잡지를 발간, 그 때로부터 대만독립을 반대하고 통일을 추진하고 교포들을 발동하여 대만독립을 반대하고 조국을 지지하는 사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후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주한대사관과 중국화교연합회의 지지하에 2002년에 한국 서울에서 재한 중국교민협회 및 재한 중국평화통일추진연합총회를 창립, 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20여 년래 나 한성호는 돈과 힘을 바치고 모든 노고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조국을 지지하고 대만독립을 반대하는 애국사업에 투신하였으며 분열세력들에 대해서는 일보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또독립세력과 가까운 분자들과는 그 어떤 타협도 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나 한성호의 인격이고 품격이었다. 비록 찬반의견이 교차되는 염량세태(世态炎凉) 속에서도 나 한성호는 그 어떤 후회도 없었으며 지금까지 자신의 그 주장을 펼쳐가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은 중화민국으로 하여금 참전하지 못하게 했기에 중화민국의 당정 및 군부 측은 한국전쟁에 참가해 공산당을 살해할 자격과 권리가 없었다. 나 한성호 역시 재한 화교청년으로서 독서와 사업에만 몰두했을 뿐 사사로이 한국전에 참가해 공산당을 살해할 자격이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 또한 마음대로 중국공산당을 살해할 수 있는 그런 고장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한편 나의 연령과 경력을 보면 곧 나 이 한성호가 한국전쟁에 참가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중공선열과 조명권의 부친을 살해해 조명권한테 있어서 ‘부친을 살해한 원수’가 되었다고 하는데 20대의 한 재한 화교청년이 무슨 권리로 공산당을 살해하고 대공을 세울 수 있으며 어떻게 현저한 공로로 장씨 부자와 함께 사진을 찍고 또한 상여금가지 받을 수 있었단 말인가?! 조명권이 불순한 동기로 고의적으로 나 한성호한테 살인죄를 씌우기에 더 이상 용인할 수 없는바 민사, 형사로 고발해 끝까지 진상을 밝히고야 말 것이다. 모두들 미친개한테는 몽둥이 이상이 없고 정신병자한테는 철창병원이 최고라 한다. 진리도 마찬가지이다. 또 모두들 사람을 일시적으로 기만할 수는 있지만 일생 동안 기만할 수는 없다고들 말한다. 정의도 마찬가지이다. 나 한성호의 90년 일생을 돌이켜 볼 때 젊은 시절에는 국공 양당의 유혈투쟁에서 피해자였으며 결코 가해자는 아니었으며 나 자신은 추격대상이 되었지 결코 살인자는 아니었다. 나 한성호는 한국에서 의료사업에 종사한 사람이었지 한국전에 참가해 전문 공산당을 죽인 살인자는 아니었다. 엄숙히 말하면 그제날 극좌의 공산당인들이야말로 ‘두 손에 나 한씨 가정의 선혈을 가득 묻힌 사람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나 한성호는 당연히 한국전에서 두 손에 공산당인의 선혈을 가득 묻힌 살인자로 될 자격이나 권리가 없었다. 이 사실이 충분히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으며 절대 억지로 변명하는 것이 아니다. 헌데 이런 요언에 대해 믿는 사람이 있고 이런 무함에 대해 역시 인정하는 사람이 있다. 소위 요언은 두뇌가 명석한 사람들한테서 사라져야 할테지만 아쉽게도 두뇌가 명석한 사람이 많지 못하고 정의가 적은 것이 큰 비애이며 큰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결론적으로 나 이 한성호는 일생중에서 단 한번도 남을 고발해 본적이 없다. 특히 해외에서 내가 제일 반대해 온 것이 바로 중국인이 중국인을 고발하는 것이었다. 이는 나의 신념이었고 원칙이었다. 하지만 현재 나는 부득불 나의 이 원칙을 깨뜨리지 않을 수 없다. 나 한성호의 90세 인생의 명예를 위해 한국법원에 조명권을 고발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유는 첫째, 명예훼손죄, 둘째, 인격모독죄, 셋째, 이유없이 요언을 날조하여 죄를 뒤집어 씌우면서 이념 원한을 도발하고 나 이 한성호의 생명안전을 위협한 죄(주: 이외 조명권은 나 이 한성호가 한화로 공금 1.000만원을 사사로이 챙겼다고 비방중상했기에 함께 고발할 것임), (주: 나 한성호가 일찍 한국에서 중국국민당 재한 직속지부의 당무, 교무, 청년운동, 부녀운동 및 선전사업을 한 것은 사실이나 이는 명령에 따라 일하는 기층 당사업일군이었지 불호령을 내리는 상급 결책지위에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나는 일개의 화교로서 한국전에 참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중공 혁명선열을 살해하고 조명권한테 부친을 살해한 원수로 될 이유는 더욱 없었다. 조명권은 오래 자신의 나이가 46세라고 했는데 한국전이 발발한지 65년이 지난 것을 보면 그는 한국전이 발발한지 20년이 지난 뒤에 태어난 사람이다. 한국전 당시 조명권은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그가 어떻게 이 한성오가 한국전에 참가했고 또한 ‛두 손에 공산당인의 선혈이 낭자’한 것을 알 수 있었는가?! 조명권은 나 이 한성호가 한국전에 참가했고 ‛두 손에 공산당인의 선혈이 낭자’했다는 증거를 내놓기를 바란다. 그리고 모든 것을 명백히 밝혀 나 이 한성호의 청백한 명예를 철저히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 그러지 못할 경우 나한테 인증, 물증이 모두 구비되어 있으니 한국법정에서 만나 시비곡직과 선악진가를 판별하기를 바란다. 당신(조명권) 같은 의리를 배신하는 것으로 밥 먹는 사람한테는 오직 냉정한 법원의 판결만 수요될 뿐 윤리도덕을 담논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조명권이 인터넷 매체를 이용하여 나 한성호에 대해 악성선전을 한 것은 이미 교민사회와 중국 내지 및 중국의 해당 교민관리 기관에까지 파급되어 극히 불량한 영향을 가져오고 있다. 그 사례로 중국 중앙정부 모 부문의 한 고위 지도자는 북경에서 열린 한국 화교 및 평화통일 회의(5명 부총 회장이 참가)에서 나 한성호를 ‛두 손에 공산당의 선혈이 가득 묻은 사람으로서 대단할 인물이 아니며 존경할 가치’조차 없다는 등의 말을 쏟아냈다고 한다. 그의 어구와 어조는 완전히 조명권의 어구 및 어조와 똑 같았다. 나에 대한 조명권의 고의 요언조성과 악성파괴는 영향 면이 극히 넓고도 깊은바 도무지 용인할 수가 없다. 나의 명예와 인권을 회복하려면 법정해결 외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사회계층의 여러분들이 나 이 한성호 노년의 불행과 핍박에 못이겨 양산에 오르는 심정에 대하여 양해해주기 바란다. (주: 이상 5명 부총회장의 성명에 대해서는 잠시 지적하지 않고 앞으로 법정에서 증거로 내놓을 것임) ▲ 부록 1 - 1952년 제20기 혁명실천연구원 동창록 ▲ 혁명실천연구원 원장인 장개석의 초상 ▲ 부록 3 - 동창록, 한성호 학원생(20295번)의 사진 ▲ 부록 4 -동창록, 한성호의 신상기록 ▲ 부록 5 - 한성호와 원장 장개석의 합영 이 사진은 나 한성호가 한국전에 참가하여 두손에 공산당의 선혈을 가득 묻힌 현저한 공로로 인해 장개석을 만나 한께 찍은 것이 아니라 중국 국민당 혁명실천연구원 졸업시 장개석 원장과 함께 남긴 기념사진이다. 그 시기 나 한성호는 26세였다. 중간 사람이 장개석이고 오른쪽 사람이 재한화교 국민대회 대표 왕흥서(王兴西)이고 왼쪽 사람이 나 이 한성호이다. 년도는 중화민국 41년이고 서기 1952년 9월이며 지점은 대북 양명산이다. 당시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한성호는 재한화교로서 한국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다. 단 한명의 공산당원도 살해한 적이 없다. 주: 본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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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8-01
  • 아들아, 다음 생애에는 너의 집 개로 태어나고 싶구나…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한 독거노인이 아들에게 보내려고 쓴 편지가 인터넷에 공개되면서 열점화제로 되고 있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들에게 : 아들아, 어제도 나 홀로 시장에 나가 장사꾼들이 팔다 버린 남새 찌꺼기들을 골라 빈 주머니에 주워담다가 그만 부주의로 한 아가씨의 예쁜 옷을 어지럽히게 되었는데 그 아가씨가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면서 욕설을 퍼붓더구나. “빌어먹을 노인네, 제몸도 제대로 못 이기면서 개처럼 쏘다니며 뭘 자꾸 주워대?” 그 말을 듣고 난 정말 기뻤단다. 기쁜 나머지 바보처럼 웃었단다. 나를 개에 비유하다니? 내가 그렇게 되고 싶었던 개에 비유하다니? 이게 그래 기쁜 일이 아니고 뭐겠니? 아들아, 난 정말 너의 집의 개가 되고 싶단다. 난 정말 너의 집 개가 되고 싶은 것이 가장 큰 소원이란다. 불면 날까, 쥐면 터질까 애지중지 키운 네가 마침내 좋은 일자리를 찾고 새 아파트에 입주하고 예쁜 색시까지 얻어 자가용차 두대씩이나 굴리고 다니며 남 부럽잖게 잘 살고있을 때 이 에미는 아직도 비 내리면 크고 작은 대야로 빗물을 받아내며 지붕이 무너져내릴까봐 조마조마하게 살고 있단다. 한번은 내가 된 감기에 걸려 약방에 가려다가 빗물을 담은 대야에 걸려 넘어진 일이 있었단다. 그래서 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너의 아들 그러니까 내 손자가 받더구나. 그래서 사연을 말하고 너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어. 그리고 이제나 저제나 너에게서 전화 한 통만 오기를 학수고대 기다렸단다. 그러다가 너에게서 불쑥 전화가 오긴 왔는데 넌 일이 바빠서 올 시간이 없다고 하면서 “요즘 전화비용이 엄청 올랐어요”하고 전화를 끊더구나. 난 네가 사업에 실패해 빚을 지고있는게 아닌가 해서 걱정했단다. 다행히 그날은 이웃집 젊은이가 사다준 감기약을 먹고 고비를 넘겼단다. 그리고 한 달후에 너도 보고 싶고 손자도 보고 싶어 너의 집으로 갔지. 내가 너의 집에 들어섰을 때 마침 너의 안해 그러니까 나의 며느리가 자가용차에서 내리더니 두손에 무슨 먹거리를 가득 들고 오더구나. 그게 뭔가 물어보니 “우리 아기 옷과 맘마”라고 하더구나. 나는 네가 어느새 둘째를 보았는가 해서 깜짝 놀랐지. 그런데 며느리는 집에 들어서기 바쁘게 막 매달리는 강아지 한 마리를 보고 “우리 아기 잘 있었어? 오늘 너의 옷과 맘마를 사느라고 이 엄마가 1000원이나 썼단다”라고 하지 않겠니? 그 말을 듣고 나는 너무 놀라서 멍해졌단다. 지금 나는 천식에 관절염까지 발작했고 당뇨병까지 심해졌단다. 병원에 가고싶어도 돈이 없어 못가고 약 살 돈도 없어서 정통편(진통제)만 먹는단다. 아들아, 난 언제면 너의 집 그 개가 먹는 맘마를 마음껏 배불리 얻어먹을수 있을가? 밤이면 온몸이 쑤시는듯 아파서 뜬눈으로 지새우다가 새벽녘에야 어슴프레 잠이 들군 한단다. 아들아, 난 정말 너의 집 개가 되고싶구나. 손자의 말을 들어보니 너의 집에서는 애완견인지 뭔지 하는 개에게 고급옷을 사입히고 미용원에 데리고가서 미용도 시킨다더구나. 또 개가 감기에 걸렸다고 동물병원에 공주님처럼 모시고가서 1,000위안씩 하는 고급주사를 맞혔다더구나. 나도 너의 집 개가 되여 병원에 가서 주사 한대 맞고싶구나. 그러면 몸이 아프지 않겠는지? 넌 저녁마다 곱게 단장한 개를 데리고 매일 공원이며 거리에 산책을 간다더구나. 개는 앞에서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고 너와 며느리는 뒤에서 “귀염둥이야 먼데 가지마"라고 하며 개를 공주님처럼 떠받든다더구나. 그야말로 아름다운 한폭의 풍경이더구나. 아들아, 언제면 넌 늙으 엄마를 모시고 강변유보도라도 함께 산책할수 있겠니? 난 팔다리마저 매우 불편하여 이제는 자체로 움직이기조차 어렵구나. 절강성의 여자애들이 강아지를 불 붙여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너는 너무 격분하여 “짐승보다도 못한 년들, 그런 년들은 온 집안을 몰살시켜야 한다. 개도 생명이다. 어떤때에는 개가 사람보다 훨씬 낫다”고 떠들어댔다더구나. 아들아, 네 말이 조금도 틀리질 않는구나. 내 생각에도 개 한 마리 기르는쪽이 아글타글 무정한 아들을 기르기보다 훨씬 나아보이는구나. 못난 어미에게도 이제는 한가지 소망이 있단다. 다음 생애에 다시 태여나면 꼭 너의 집의 개로 태어나고 싶구나. 하느님께 빌어볼까, 부처님께 빌어볼까? 두손 모아 빌고 또 빌어본다. 아들아, 난 정말 너의 집 개가 너무 부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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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6-06-29
  • 천정부지로 치솟는 중화권 여스타들의 하룻밤 몸값
    [동포투데이] 중국속담에 “즐거운 밤, 여성의 몸값은 천금”이라고 최근 중화권에서 여스타들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아 화제로 되고 있다. 그녀들과 함께 식사를 하려고 해도 많은 액수가 필요하거니와 하룻밤을 동반하여 자려면 더욱 혀를 내두를 가격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적지 않은 부자들은 여스타들과의 동침을 위하여 천금도 아끼지 않고 있다. 아래의 것은 최근 년 간 거부들의 돈주머니를 노리는 중화권 여스타들의 이른바 몸값이다. - 편집자 수수썬(萧淑慎): 50만 타이완달러 타이완 매체에 따르면 최근 타이베이(台北)경찰은 한차례의 매음사건을 파 헤쳤는데 뜻밖으로 많은 유명 여스타들이 사건에 말려 들었다. 이 유명 여스타들 중에는 수수쎈도 포함되었으며 그녀는 수차 마약투여사건에도 연루되었었는데 이번에는 성매매사건에도 그 이름을 올렸던 것이었다. 내막을 잘 아는 인사에 따르면 수수썬은 여러 차례 안면이 전혀 없는 드라마 연출 혹은 투자상들과 잠자리를 같이 하여 전반 타이완의 오락권에서 선세이션을 말아올렸다고 한다. 한편 타이완 경찰은 10여명 여스타와 모델들의 이름을 나열하면서 이들이 성교역 최저 액수는 10만 타이완 달러였다고 밝혔다. 그 와중 경찰은 자주 수씨 성을 가진 여스타를 거론, 많은 사람들은 그녀가 수수썬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수이팅(萧依婷) 30만 타이완달러 2009년 타이완 매체에 따르면 일찍 저우제룬(周杰伦)의 MV에 출연한 적이 있는 신인스타 수이팅이 마약투여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는데 경찰에서 그녀는 수차 강요에 의해 많은 남자들과 잠자리를 함께 했으며 이 중 대부분은 각 계의 명류인사들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이에 사람들은 오락권내의 혼란과 난잡함에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한편 그녀는 생활압력에 의해 타인의 알선으로 10여 차례 남자들과 잠자리를 같이 하였는데 제일 처음 받은 돈이 3만 타이완달러였다. 우야신(吴亚馨) 25만 타이완달러 우야신은 “리중루이(李宗瑞CD사건” 때문에 부득불 자신의 연역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리중루이와 함께 판결받았으며 점차 흐리터분한 인생미궁에 빠지게 되었다. 최근 그녀가 간신히 연예권에 복귀하였지만 인터넷에서는 여전히 우야신처럼 된 여스타들의 사례가 등재되면서 그녀를 괴롭히고 있다. 또한 최근 그녀는 홍콩에서 재차 모 성매매집단으로부터 강한 유혹을 받기도 했다.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한 막후보스인 C선생은 2015년 어느 한 모임에서 우야신을 만나자 주동적으로 자아소개를 하면서 그녀한테 “사업”에 대해 의논하자고 건의해 왔다. 사실 C선생은 성매매집단의 보스로서 늘 젊고도 인기가 있는 미녀스타들을 찾아 다니는 사람이었다. C선생에 따르면 선택된 여스타가 한번 “출정”해 4∼5일간 근무하면 100만 타이완달러를 벌 수 있으며 특히 만약 유람선에서 부자들과 침대에 함께 오르면 더욱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옌수밍(严淑明) 35만 타이완달러 1995년 옌수밍이 갓 오락권에 데뷔했을 때 그녀는 일개 방창녀였고 또한 유명 여스타의 공연을 돕기도 했었다. 그러다 1996년 동남아 성매매 사건에 그녀 예수밍이 휘말려 들게 되었다. 후에 그녀는 자신이 쓴 책을 통해 오락권에 데뷔한 뒤 누군가 그녀한테 안면도 모를 연출과 인기 남스타를 소개했고 옌수밍은 출세를 위해 그들과 잠자리를 함께 하였다고 털어놓았다. 이 책에서 그녀는 또 연예권 내에서 전해지는 정계 혹은 상업계 거두들이 사업교제를 할 때 여스타들을 찾는 것은 일찍 보통일상으로 되었다고 까밝아 놓기도 했다. 린워이링(林韦伶) 38만 타이완달러 2010년 린워이링은 자기의 한국생활을 기록한 책을 출판, 책에서 그녀는 한 낯선 투자상과 잠자리를 함께 한 후에야 비로서 한국에서 첫 앨범을 낼 수 있었다고 고백하였다. 또 한국의 대부분 남녀스타들은 모두 강요에 의해 몸뚱아리로 한국에서 연예사업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며, 이는 이미 한국오락업내에 잠재된 규칙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적지 않은 한국연예인들이 자살의 길을 선택하는 것에 대해 그녀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나 역시 한국에서 늘 남과 잠자리를 함께 할 것을 강요당하곤 했다. 나의 한국생활을 보면 매일 5시간씩 무용연습을 하다보니 무릎이 닳아 모진 동통이 생기군 했으며 자주 주사를 맞아야 동통이 멈추군 했다. 또 3일만에 겨우 토스트 한쪼각을 먹은 적도 있고 장장 1년 반 동안 쌀 한알 먹어보지 못한적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눈 감고 입술을 옥물고 남성들과 잠자리를 하려는 생각도 해보군 했다.” 한편 한국측 매니저회사가 그녀와 함께 합작한 영화의 장면 때문에 린워이링은 은폐된 AV 여스타로 의심받으면서 한국법원에 기소되었고 냉동실에 갇히기도 하고 연금되기도 하다가 몇 년전 친구를 통해 비행기 티켓을 사서야 겨우 타이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린쟈치(林嘉绮) 60만 타이완달러 가슴이 풍만한 타이완의 이 행운 여스타는 한 글로벌 홍보대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자 그 명성이 대뜸 직상승하게 되었으며 그녀에 대한 뉴스는 늘 양안 보도분야를 석권하게 되었다. 특히 그녀가 가슴을 드러내 놓고 아기한테 젖꼭지를 물릴 때면 촬영사들은 그녀 가슴의 사이즈를 최대한 확대하여 린쟈치는 늘 “타이완 제1의 모델”이란 칭호를 달고 다녔다. 수챵(萧蔷): 50만 타이완달러 타이완에서 가령 수챵의 나이가 10살만 젊었다면 부호들이 초청하는 첫 상대는 절대적으로 수창이었을 정도로 한 시기 타이완 제1미녀의 칭호를 받았었던 그녀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녀도 여자 나이 40살을 넘은지라 아직 싱싱한 그대로인 린즈링(林志玲)과 비길 바가 못되며 무정한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몸값 또한 많이 하락한 상황이다. 이로 하여 일찍 그녀와 잠자리를 함께 하고 싶어했던 매 타이완의 남자들은 모두 지금은 긴 탄식을 흘리고 있는 상황이다. 왠융이(袁咏仪): 50만 타이완달러 왠융이가 오락권에 조용히 데뷔하였을 때,표독스러운 성격으로 많은 동료들의 원한을 사게 하고 또한 제3자로 되어 타인의 애정을 빼앗는 “악녀”로 되게 한건 그녀를 춰올리는 보도매체들이었다. 이어 세상이 깜짝 놀랄만한 사건이 폭발, 당시의 거부상인 뤄조후이(罗兆辉)가 한달에 50만 타이완달러라는 가격으로 한 여스타와 동거했다는 뉴스였으며 더욱 놀라운 것은 왠융이 그녀의 입으로 그 거부상인과 동거한 사실을 인정했다는 그것이었다. 2002년 2월, 뤄조휘는 돌연히 지나간 자신의 사생활을 매체에 폭로, 이 중에는 쑨쟈쥔(孙佳君), 왠융이, 류쟈링(刘嘉玲), 마이쟈치(麦家琪)와 Maggie 등과 함께 참여한 기타 부호들의 이름도 거론되었다. 그 뒤 일찍 뤄조후이를 숭배하던 여스타들은 모두 매우 불안해하였다. 특히 평소 그와 자주 연락하던 여스타들은 주동적으로 뤄조후이와 연락, 겉으로는 안부인사를 한다고 했지만 기실은 자기들이 침대에서 뒹굴 때 촬영한 비디오테이프 등이 뤄조후이한테 있는가 하는 것을 시탐하는 것이었다. 차이소우펀(蔡少芬): 1억 홍콩달러 홍콩에는 여스타들과 계약동거를 즐기는 몇몇 부자들이 있다. 몸값이 수억원에 달하는 류롼슝(刘銮雄) 역시 이 중의 한 사람이었다. 지난 10여년간 그는 많은 여스타들한테 부동산, 신식승용차, 보석, 골동품 등을 예물로 선사하군 했는바 그 가치가 10억 홍콩달러에 달했으며 차이소우펀은 그 여스타들 중의 일원이었다. 보도에 따르면 차이소우펀은 오락권에 데뷔한 뒤 얼마 안되어 어머니와 이모한테 이끌려 부자들과 함께 식사하고 차도 마시고 했는데 슈퍼부자 류롼슝이 바로 이 중의 한명이었으며 도박에 인이 박힌 어머니는 딸을 “돈나무”처럼 여길 때가 많았다. 예추이추이(叶翠翠): 30만 홍콩달러 홍콩의 재록신 예추이추이는 부호쟁탈전에서 조워이(赵薇)한테 패하여 몸값 10억달러에 달하는 내지의 부호상인 황유룽(黄有龙)을 빼앗겼지만 그녀는 오히려 버림받은 부자여인으로 변신하였다. 황유룽한테 버림받고 돈줄이 끊어졌지만 그녀의 생활은 여전히 부유했다. 50만 달러에 달하는 Audi 캠핑카(房车)를 소유했는가 하면 5만 달러에 달하는 맛사지 의자도 구입하였다. 알고 보니 황유룽과 작별한 후 그녀는 빠른 시일내에 내지의 다른 한 부호의 품에 안겨들었고 그 부호는 달마다 근 30만위안씩 예추이추이한테 제공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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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06
  • 등려군은 간첩? 뒤늦게 밝혀진 비밀
    ▲ 등려군(邓丽君) 관위에 국만당 당기 덮여지고 장례식 소장급별로 치러져 등려군(邓丽君)은 대만의 유명한 여가수였다. 일찍 중화권의 스타 성룡(成龙)의 회억에 따르면 일찍 지난 세기 80미국생활시기 성룡과 등려군은 함께 영화를 보고 식사도 하고 사진도 찍으면서 매우 유쾌한 나날을 보냈었다. 헌데 그런 유쾌한 나날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성룡과 등려군의 내왕이 빈번해지고 상호 신임과 요해가 깊어짐에 따라 성룡은 등려군한테 이외의 다른 비밀이 있음을 감지하게 되었다. 그것인즉 당시 등려군은 대만 국민당의 첩자의 신분이었던 것이다. 그 뒤 성룡은 모진 번민에 시달리던 끝에 드디어 고통을 참으며 등려군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는 중국 대륙과 대만의 양안관계가 비상시기었던만큼 성룡은 비교적 명석한 두뇌를 갖고 그것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결코 누가 누구에 대한 잘못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연예인이 정치에 개입하면 필경 심신이 자유롭지 못하다는건 번연한 사실이다. 실제로 지난 세기 80연대 후기에 들어 등려군이 대륙에 건너와 순회공연을 하게 된다는 설이 수차 나돌았으나 일이 진척되지 않아 최종 그녀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원인 역시 국민당첩자란 그녀의 특수신분과 관련이 있었다고 한다. 1995년 5월 8일, 등려군은 천식질환으로 사망(사인 아직도 불투명함), 그뒤 거의 20년이 돼서야 당시 그녀의 관위에는 국민당 당기가 덮여졌고 그녀의 장례식은 국민당군 소장급별로 치러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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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23
  • 인생(人生)은 아름다운 긴 여행 / 이치수
    인생(人生)은 아름다운 긴 여행 / 이치수 우주의 신비로움 같이 엄마 몸 밖으로 나온 아기는 탄생의 순간 기쁨을 노래하며 세상과 조우(遭遇)한다. 맑고 초롱한 아기의 눈빛과 해 맑은 미소는 부모의 가슴 속에 영원히 간직되어 세상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이 되고 엄마 품에 안긴 아기는, 엄마와 아빠, 할머니와 할아버지 우리 선조들께서 그러했듯 인생(人生)이란 여행을 시작한다. 인생이란 여행은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공존하는 세계로 서로의 마음에 상처 주기도 하지만 더 많은 기쁨과 행복을 선사한다. 함께 떠나는 인생의 여정(旅程)에서 우리는 왜 서로를 배려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것은 아무 일도 아닌 것을 오직 나의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보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만의 지나친 욕심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우리는 서로 다른 시각 차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오해로 다툼도 하고 간혹 앙금이 쌓여 감정에 휘둘린 외마디에 커다란 아픔과 상처로 괴로워하면서 이기심과 자존심으로 그 뜻은 아니라고 항변하고 이것이 기쁨과 슬픔의 교차점 슬픔이 다가올 때 이겨내지 못하면 감당할 수 없는 더 커다란 고통이 잉태(孕胎)한다. 마음의 여유조차 주지 않는 툭 던진 외 마디의 말은 서로의 마음만 멍들게 하고 이러한 고통이 끝이었으면 밤마다 기도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아픔의 시작이 되어 “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너에게는 단어에서 풍기는 어감만 느꼈는가 보다. 너에게 아픔을 주려 한 말들이 아니었는데 너에게 아픈 상처가 되었구나 내가 말한 참뜻은 그게(그것이) 아니었는데...” 나의 지나친 욕심은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도 외면하고 우리는 자꾸만 쌓여 가는 아픔에 이러한 아픔은 세월과 함께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 되리라 위안 삼고 그러나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은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을 전할 수 없을 때 그것은 또 다른 아픔의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 온다는 것을 인생이란 여행 길 이전에 알려지지 않은 미지(未知)의 길도 있다. 처음 가는 길에 대한 두려움으로 혼돈의 세계에 빠지기도 하고 힘든 고비를 넘어 서기도 전 방황하며 쓰라림도 맛본다. 미지(未知)의 길 그러나 세상 어느 곳에도 새로운 길은 없다 오직 나의 세계에서 새롭게 보일 뿐 우리가 아무리 새로운 길을 찾으려 해도 그 길은 이미 누군가가 밟아 온 길이며 지금 그 길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것은 단지 우리의 기억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 인생이란 여행 길목에서 우리가 개척해 가야 할 길 중 가지 말아야 할 길이 있다. 밟지 말아야 할 길 가서는 안 되는 길이 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그 길을 가지 말 것을 이야기해도 진심을 말하는 사유(思惟)조차 들으려 하지 않기에 다시 되돌리기엔 옳은 길을 찾아 나서는 것 그 길을 간다는 것은 대단한 인내(忍耐)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길을 마다하고 남이 가지 않는 새로운 길만 나의 길을 가는 데 그리 오랜 시간 걸리지 않을 텐데 나 조차 모르는 험하고 힘든 길을 찾아 나서는 오류를 그 길을 따라 간 이후 나에게 어떠한 결실로 맺어질지 가늠조차 하지 않고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잘못된 길 걸어온 지난날을 후회하고. “내가 걸어온 그 길이 너무도 험하여 너에게는 결코 그와 같은 길을 밟지 않게 하리라 그렇게 다짐했다. 네가 모르는 세상 내가 먼저 보았다는 것에 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 먼 훗날 너에게 닥칠 그 아픔 생각하면 내가 왜 이리도 목 매워 애원하는지..." 인생(人生)은 긴 여행 우리와 마주하는 세상 어떤 미물(微物)도 소중하지 않은 존재 없듯 우리는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 간다. 모양은 각각 다르지만 누구나 인생이란 여행을 향유할 권리 있어 이것이 인생이란 여행에서 누릴 수 있는 우리의 특권(特權). 우리는 서로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것으로 행복을 느끼며 때로는 누군가의 넉넉한 마음씀씀이로 억제할 수 없는 기쁨의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지만 작지 않은 이 행복을 마주하면서도 그 기쁨과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삶의 순간순간 마다 찾아오는 자그마한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잊고 사는 우리들 인생이란 여행 중 만날 수 있는 기쁨과 슬픔 모두 우리의 삶을 엮어가는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삶의 일부분인 것을 우리는 그저 일상화된 무관심으로 흩날려 버리고... 서로 다른 길 서로 다른 세계를 꿈꾸며 그 속에서 저마다 느끼는 기쁨과 슬픔 담아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인연(因緣)은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누구나 갖는 인생 여정에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 찾는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 네가 볼 수 있는 것도 내가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 소요되지 않을 텐데 왜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깨닫게 되는 것일까! 인생은 여행이어서 누구나 마음을 가린 창의 커튼을 조금만 열면 생명들이 속삭이는 감미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인생이란 여행 중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은 오직 물질적인 이면보다 내면적 성찰(省察)에 있는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을. 인생(人生)은 긴 여행 아름다운 인연(因緣)으로 맺어진 너와 나의 노래가 희망과 사랑의 날개가 되어 세상에서 가장 큰 울림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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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30
  • 남자 3천명을 치마폭에 감고 논 민국의 여인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남자들은 모두 성감적인 여인을 좋아한다. 그녀들한테 일종 특수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다면 민국시기 남자 3000명의 자기의 석류치마폭에 감고 논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과연 누구였을까? 민국의 서적들을 읽다 보면 우리는 흔히 임휘인, 사빙심 등 여재들의 스토리를 볼 수 있으나 광주의 여미언(余美颜)에 대해서는 크게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기실 지난 세기 20년대 여미언은 세상에 잘 알려진 가문의 규수었으며 그녀의 인생행로는 그 누구와도 비할 수 없이 화려하였다. 한편 그녀는 부유한 가정의 딸이었기에 조용하고도 사치스런 생활을 즐기었다. 그리고 상업에 종사하는 남편이 늘 집밖에서 돌다보니 고독함을 견디기 힘들어 늘 밖에서 “즐거움”을 찾기도 했다. 전하는데 따르면 그녀는 3000명에 달하는 사내들과 여관방에서 나체로 침대에 올랐는바 말그대로 민국시기 제1의 “성개방”조류의 선봉었다. 그녀는 남자들한테서 받은 정서(情书)를 책으로 출판하였을뿐만 아니라 책이름을 “모던정서(摩登情书)”라고 달았다. 당시 그녀가 출판한 이 책은 서점가에서 가장 잘 팔리는 책중의 하나로 되었다고 한다. 여미언은 광동 대산현 사람이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자태가 아름답고 총명하였는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자체로 영문을 전공하기도 했다. 당시 그녀의 부친은 딸을 자기의 통역관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하지만 여미언은 공부를 마친 후 늘 고담준론과 자유해방을 주장하는 신문학파로 변하였다. 그녀의 출신신분은 봉건색채가 짙었지만 그가 배운 교육은 오히려 서양문명이었으며 특히 외국서적들을 통해 그녀는 서양의 애정스토리를 많이 접촉, 이는 그녀가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계기로 되었다. 청춘기에 들어서면서 여미언의 아름다운 자태는 절정에 이르렀다. 당시 그녀는 신생사물을 좋아했는바 새로 나온 패션을 입기 좋아했고 친구사귀기를 즐겼으며 특히 남들과의 접촉에서 호방하고 대범하기도 했다. 친구들 속에서 그녀는 늘 독특한 주장을 내세웠기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으며 친구들이 많기도 했다. 물론 그 속에는 일부 부랑배들도 있었다. 당시 여미언의 부친은 늘 상업에 몰두하다 보니 딸에 대해 크게 관여하지 못했고 모친 또한 그냥 딸에 대해 엄숙하게 타이르지 못했다. 한번은 여미언이 외갓집으로 갔을 때 옆집의 아들이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또한 여미언도 상대방의 준수한 모습에 추파를 보내기도 했으며 나중에 둘은 “백년가약”을 약속했으나 여미언의 부친 여대경의 강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여대경은 상인이었기에 줄곧 딸이 배경이 좋은 가정의 아들과 인연을 맺을 것을 바랐으며 그것으로 자기 상업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고 하기도 했다. 결과 부친의 노력을 거쳐 여미언은 개평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담씨 가문의 아들과 결혼하게 되었다. 당시 여미언의 남편 역시 대단한 가문의 귀공자였으나 그들의 결혼생활까지 순리로운 것은 아니었다. 결혼 후 여미언의 남편은 상업경영을 위하여 미국으로 가게 되었고 여미언은 고독한 여인으로 되었다. 이미 남자를 알게 된 여미언은 결국 탈선행위를 하게 되었고 얼마 뒤 그녀의 사생활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남편의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혼한 여미언은 부친에 의해 기예학교를 다니면서 학습하는 기회를 가졌다. 이 학교를 졸업한 뒤 여미언은 더는 모든 것이 염두에 없었다. 애정에 대한 갈망 등은 그녀로 하여금 더는 유언비어에 얽매이지 않게 했으며 자신의 성적취향에 따라 행동하게 하였다. 그녀는 각종 유형의 사내들과 교류, 그들이 돈만 쓰면 그들을 상대로 춤을 추고 침대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사내들과는 무릇 그가 돈이 아무리 많아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짧디짧은 4년간 여미언은 무려 3000명에 달하는 사내와 침대에 함께 올랐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음탕녀”라고 욕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기생이라고 손가락질했지만 그녀는 그냥 웃음으로 흘려보냈다. 사내들과의 많은 교류중 그녀는 남자들의 세계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또한 남자들을 냉대하면서 조롱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당시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를 개변할 수 없었으며 자기의 이상 또한 달성할 수 없었다. 그녀는 점차 자유와 이상에 대해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1928년 4월, 홍콩에서 상해로 가는 한 여객선 갑판에는 때로는 울기도 하고 때로는 웃기도 하는 요염하게 생긴 한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는이런 행동을 여러번 반복하더니 망망한 대해를 바라보며 바다로 투신하였다. 이 여인이 바로 여미언이었다. 그녀는 기이한 여인이었고 시대의 “욕녀”이기도 했으며 더욱이는 고집스레 자유를 추구해온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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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18
  • 바위돌 / 이치수
    바위돌 / 이치수 거세게 휘몰아치던 파도가 밀려가고 곳곳에 드리워진 휘갈긴 자국들 어느 시대의 아픔이기에 이토록 깊이 베어 있나! 조금씩 아주 조금씩 살점은 떨어져 나가고 뼈대만 남아 거칠게 몰아치는 저 검붉은 파도에 맞서 너 홀로 의연(毅然)히 서 있어. 번쩍이는 이빨 드러낸 포악한 상어처럼 파도가 또 다시 거세게 휘몰아 치면 그것은 숙명(宿命)이라고. 뜯기고 또 뜯기어 마지막 한 조각 남은 살점마저 흩날릴 때에도 지켜내고자 하였던 너의 고귀한 정신은 오직 하나... 한(恨)이 서려 눈물이 마르지 않는 저 암흑의 바다에서 너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어. 시류(時流)의 거센 파도 앞에 허무하게 무너져버린 외마디 원통함도 토해낼 수 없이. 불의(不義)에 눈 감은 오늘의 세태(世態)를 비통해하며 울부짖는 너는 시공(時空)을 초월한 한 오라기 바람이 되어 내 가슴속 깊이 파고든다. 실낱 같은 희망 하나 멀어져 간 뒤에 불어 닥친 견딜 수 없는 슬픔 어찌 너의 아픔에 견줄 수 있으랴! 세상을 향해 부르짖는 한 맺힌 너의 절규(絶叫)는 궤변(詭辯)이 난무(亂舞)하는 이 어둠의 바다에서 더욱더 구슬피 들려 온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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