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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룡 칼럼]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한국 이념논쟁
    ●김정룡(다가치 포럼 대표) 현시대 유명 정치학자로 손꼽히는 하버드대학교 샤무엘 헌탕턴 교수는 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을 출간했다.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로 반응이 뜨거웠다. 그는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2년 후 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냉전 시대가 종말을 맞았다. 냉전 시대 인간은 대체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진영의 이념에 각각 속해 있었다. 냉전이 종말 된 미래사회에서는 이념이 무의미해졌고 따라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면서 다른 귀속처를 찾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귀속처가 바로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라고 제시하였다. 그가 말한 귀속처는 새로운 문명이 아니라 과거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실제로 탈냉전 후 지구촌의 인간무리들은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에로 재편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중국의 경우 개혁개방 전 해외 화교 화인들 중 고국을 못 마땅해하는 사람들도 개혁개방 이후 즉시 돌아서서 고국에 투자를 서슴지 않았다. 아세아 최고 부자 리카싱(李佳成)이 투자에 나서자 주변에서 ‘사기당하면 어쩌냐?’고 말리자 그는 ‘사기당해도 고향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인데 사기라 생각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벌은 남다른 배포가 있는 법이다. 싱가포르 리콴유(李光曜) 전 총리는 본래 반공자였다가 개혁개방 이후 유교 전도사를 자칭하고 나서 중국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것이 바로 이념을 탈피하여 민족문화에로 회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2008년 북경올림픽 개막식 주제가 공자였는데 이것은 전통문화에로의 회귀를 뜻한다. 1990년 초 동구권에서 있었던 코소보 인종청소 전쟁은 종교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아무튼 세상은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흘러가고 있는 추세이며 이미 새로운 역사 흐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지구촌의 흐름을 역행하는 곳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반도이다. 동서 독일이 통일되고 남북 베트남도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문화로 굴러가고 있다. 오로지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것은 남북한이다. 1990년 베이징아세아게임 때 한국관광객이 대량 백두산투어에 나섰다. 그때 한국여행사 에스코트 00사장이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서 생생하게 맴돌고 있다. “참 세월이 놀랍게 변했어요. 우리가 중국 땅을 밟으면서 백두산 구경을 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현실로 되었어요. 이 추세대로라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남북통일도 10년이면 되지 않겠어요!” 그 후 2000년 김대중 대통령께서 북한을 방문하자 매체들이 ‘10년 안에 통일이 이뤄질 것’처럼 떠들었다. 그런데 그 후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현재 남북통일이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요원해지다못해 요즘은 아주 적대관계가 심각해지고 있는 중이다. “가장 중요한 게 이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전에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시중에서는 모두 뜬금없는 발언이라고 하기도 하고 때아닌 이념타령이라고 공격하기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 발언이 확실히 케케묵은 이념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이게 무슨 시대인데 아직도 이념타령이라니? 역사를 거스르는 행위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요즘 한국 사회는 홍범도 장군의 정체성을 갖고 논쟁 중이다. 양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다. 1943년 홍범도 장군이 사망할 당시에는 침략당한 약소국가들에서 나라마다 민족주의가 우선이지 이념과 사상이 우선 과제가 아니었다. 강대국들도 마찬가지로 이념을 떠나 미국과 소련이 협력하여 반파시스 전쟁에 돌입하였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 이념논쟁을 일으킬 사안이 아니다. 한국 정치는 할 일이 하도 없어서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문제는 왜 윤석열 대통령이 이념을 최대 이슈로 들고나왔는지? 맥락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 일부 진영에서는 아직도 빨갱이타령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 종북좌파타령을 70년 동안 벌여오다가 요즘에는 종북좌파 타령이 질리기도 하고 그 실체도 주목을 받기가 조금 약발이 떨어져 친중좌파 공격으로 방향을 틀고 화살을 돌리고 열을 올리고 있다. 필자는 얼마 전에 한국 지인의 소개로 한국 엘리트들이 참여하고 있는 카톡방에 가입한 적이 있다. 카톡방은 흔히 그렇듯 좋은 정보도 나누고 서로 필요한 교류도 하고 인맥도 넓히고 등등 좋은 점이 많다. 하지만 인간무리에는 취향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 취향이 정치적인 성향이 강하면 골머리가 아파난다. 어느 한 분은 윤석열 대통령을 찬양하는 ‘윤비어천가’를 올렸는데 조선 창시자 이성계를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수령을 찬양하는 ‘어천가’보다 훨씬 뛰어난 솜씨로 현직 대통령을 찬양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을 이렇게 신을 찬양하듯 하는 것을 처음 본다. 일각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을 평가하는 기준이 극명하게 나뉘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문재인은 빨갱이고 북한 간첩이다. 나라를 북한에 팔아 먹는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아무리 좌파 성향을 지닌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설마 나라를 팔아먹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상식을 벗어나 비합리적인 주장을 하면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친미를 확실하게 하면 다른 분야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문재인처럼 나라를 팔아먹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굳건하게 박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을 신을 찬양하듯 하는 행위는 필자와는 하도 상관없는 일이라 개의치 않고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는데 다음 일은 도무지 지나칠 수가 없었다. 기름 개구리를 산 채로 끓는 기름에 넣어 튀기다가 물을 넣고 끓여 먹는다. 한 분은 친중좌파들을 개구리 산 채로 튀겨먹고 끓여먹듯이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으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라는 속담이 있다. “미친 아낙네의 악담보다 더 저질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나가기를 해 버렸다. 종북좌파 타령이나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친중좌파 타령이든 모두 같은 이념타령이다. 이런 이념타령이 시중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고 그 세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대통령의 이념논쟁을 때가 아닌 것이라 하거나 뜬금없는 일이라는 지적은 헛발 짚는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공산주의 빨갱이 타령이 심각한데 진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자가 얼마나 될까? 의문이다. 무엇을 대상을 공격하려면 그 대상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나서 공격해야 마땅하나 한국에서 공산주의 빨갱이 공격은 실체를 모르는 막무내식이어서 안타깝다. tvn방송에 <어쩌다 어른>이라는 강연프로그램이 있다. 몇 년 동안 출연을 가장 많이 했던 최진기 강사가 있었다. 그는 자칭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이다. 액면 그대로 믿기로 하고 그가 이해하고 있는 공산주의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마르크스의 노동 분배 원칙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이다. 최진기 강사는 이 공산주의 핵심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마르크스는 아마 아버지가 돈을 벌 능력이 있고 그 돈을 자녀가 학비로 사용하는 케이스에서 힌트를 얻어 내놓은 이론일 것이다.” 이어서 그는 유명 스타 연예인 강동원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을 어떻게 수요에 의해 분배할 것인가?”고 희죽거리면서 공산주의를 형편없는 애들장난처럼 매도하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만약 공산주의가 최진기 강사의 말처럼 그렇듯 유치한 것이라면 어떻게 지구촌 반 되는 인간무리가 추종했겠는가? 능력에 따라 일한다는 것은 인간이 고도의 의식을 갖추면 타인의 능력과 비교하지 않고 또 타인의 노동기여도와 비교하지 않고 나의 능력껏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사회는 물질이 풍부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되어 불필요한 물질을 탐내지 않고 사치를 탐내지 않는 전제하에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것을 의미한다. 요점은 물질이 풍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실천가능한 원칙이라는 것이다. 빨갱이 뜻은 사상이 빨갛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필자의 부친은 평생 당지서를 맡았는데 사상이 붉다못해 둘째 아들이 휴학하는 해에 참외 밭을 대신해 보게하고는 아들이 생산대 참외를 먹었다고 하여 장부에 가을에 떼어내게 기입해 놓았다고 한다. 필자가 자랄 때 동네 어른들이 늘 저한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너의 부친은 진짜 빨갛다.’는 말을 반복했다. 최진기의 자칭 최고 강사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이 수준이라면 진짜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서강대 00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는 제도로서 실천은 실패했지만 그 이념과 사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존재하고 이직도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있는 이 민족의 현실. 언제 가야 통일되고 하나가 되어 부질없는 다툼에서 벗어날 것인지? 민족의 운명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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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4
  • 일본 핵폐수 해양 방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는?
    ● 철 민(논설위원) 한·중·일 해양 안전 문제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였던 일본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처리 문제가 24일 일본 정부의 바다 방류 개시와 더불어 또 새로운 논쟁거리를 몰아오고 있다. 우선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행위를 두고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나라들로는 일본의 이웃 국가들인 중국과 한국(정당과 사회단체 등), 북한 등과 거리가 멀지만, 남태평양 도서국의 반발도 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후쿠시마 오염수가 바다로 흘러들기 시작해서 240일이면 중국 연해에 도착한다며 정부로부터 국민 매 개인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방류 결정을 국제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고 있다. 한편 중국 정부는 일본산 수산물 수입의 전면 중단을 발표하였다. 한국 언론도 한국의 여러 해산물 시장이 거의 텅 비어 있어 어부들은 미래의 생계를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2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제주도 동문어시장에서 20년 넘게 해산물 장사를 해온 한 상인은 “예전에는 오전 10시경과 오후 5∼7시(두 시간대)에 장사가 안될 때도 시장은 붐볐지만, 요즘은 손님이 없는 텅 빈 고속도로”라며 “코로나19 기간에는 장사가 더 잘됐다”라고 우려했고 한국 서부 해안 도시 군산 출신의 한 어민은 “내일 해산물 경매장에 간다고 생각하니 답답하다”라며 “해산물 소비량이 4분의 1로 줄었고 가격도 더 낮아질 것 같다”라고 탄식했다. 부산종합어시장에서는 조기 한 박스가 보통 4만 원 또는 5만 원에 팔리는데, 전국 해산물의 약 30%가 이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번 주 수요일(23일)에는 조기 한 박스가 정상가의 절반 이하로 판매되었으며, 한국인들의 주요 해산물인 멸치는 평소보다 10~20% 정도 가격이 저렴하게 판매되었다. 24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문을 발표하여 일본이 이날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방류를 개시한 것은 지구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면서 핵 오염수 방류계획을 강행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인류에게 핵 재앙을 초래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반인도적 범죄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외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하기로 한 일본의 결정을 알게 된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에 있는 한 비정부기구가 공개적으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으며 또 피지 수바에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시위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은 해외의 국가와 사회단체의 규탄은 물론 일본 자국 내 어민 단체와 국민의 반발을 사고 있다. 특히 1945년 원폭 피해자 후손들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교도통신은 24일 원폭 피해자 후손들로 구성된 일본-전국 원폭 피해자 2세 단체 연락 협의회가 나가사키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후쿠시마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항의했다고 전했다. 이 단체는 원자폭탄의 피해자인 히로시마가 견딜 수 없다며 성명을 발표했고, 이 성명은 총리 관저에 우편으로 발송됐다. 성명은 “원폭 피해자 2세들은 부모들이 방사능 영향으로 고통받는 것을 오랫동안 목격했고, 자신들도 유전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어 건강을 염려하고 있다”라며 “정부와 도쿄전력이 책임을 지고 육상에서 보존·관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외에도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이루다 나열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고도 높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은 국제원자력 기구(IAEA)의 감찰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IAEA의 권위성과 전문성은 인정하지만, 이 기구의 분석과 결론 모두를 믿는 건 아니다. 특히 IAEA 역시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에 대해 명확한 지지 혹은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도 않았다. IAEA 역시 사상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수치나 분석을 통해서는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없은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일이란 시작이나 과정을 통해서는 어떤 결과가 나타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례로 1945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에는 그 위력이 그 정도로 강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자료도 있다. 다음 우리는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더군다나 믿을 수 없다는 추리가 나온다. 일본인을 두고 말하자면 좋게 말하면 “총명하다”하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각도로 말하면 “잔머리를 잘 굴린다” 혹은 “비열하고 간교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은 조선과 중국 그리고 기타 태평양 지역 국가와 지역에 큰 피해를 주었다. 그것도 아주 음융하고 비열하고 잔혹한 수단과 명분 등으로 말이다. 조선 왕조의 명성황후 음해 사건, 중국 대만 강점과 한일 합방 그리고 지난 세기 30~40년대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집할 때는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등 감언리설로 순진한 소녀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1920년대 말의 만주에서의 황구툰(皇姑屯) 사건과 루거우차오(卢沟桥) 사건 등을 분석 조명해보면 당시 일본이 강하다기에 앞서 음흉하고 뻔뻔스럽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시 일본은 한편으로는 미국과 담판함과 아울러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일본을 함부로 믿어서는 큰 코 다친다는 분석도 함께 나온다. 종합적으로 일본을 평가하면 일본인의 겉면을 보면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고 생활이 아주 규칙적으로 보이지만 일본인의 속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겉과 속이 같은 한국인과는 달리, 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중국인과는 달리 또한 거만하지만 우쭐대지는 않는 서양인들과는 달리 일본인한테는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피해국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역대의 독일 총리들과는 정반대로 일본은 오늘 현재도 기나긴 침략 역사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교과서까지 뜯어고치면서 군국주의의 침략사를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두고 각국은 여러 가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중국과는 달리 미국은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한국 정부는 “지지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입장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 두고 일본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속 궁리가 있는가 하면 다른 일종의 전략이 내포되어 있을 수도 있고 한국은 자국민들한테 미칠 손실보다는 일본과 정부 사이의 마찰을 우려하는 듯한 양상이다… 한편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에 대해 지금 과학적이고 안심할 수 있다는 학술적 수치는 있으나 그 영원성을 장담하는 언사는 한 마디도 없다. 어찌 됐든 일본의 핵 오염수는 방류하지 않는 것이 방류하는 것보다는 ‘명지한 선택’이라 보여지며 방류하는 것으로 나쁜 결과가 있을지언정 반대로 좋은 결과는 제로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가령 앞으로 방류 과정에 혹시라도 일본 자국 혹은 주변국들에 피해 사례라도 발생한다면 그때 가서 아무리 미국이나 국제원자력기구라 해도 결코 일본을 위해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일본이라는 이 섬나라의 위망은 일락 천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서기 2023년 8월 24일, 이날은 인류 역사상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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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5
  • 독도는 ‘무주지(無主地)’ 섬이 아니었다.
    ● 김정룡 (多가치포럼' 대표) 민간속설에 ‘이웃이 먼 사촌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가령 이웃집에서 경사가 생기면 함께 기쁨을 나누고, 안 좋은 일에는 같이 슬픔을 나누고, 급한 일이 생기면 이웃이 가장 먼저 달려와 돕는 등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삶을 영위해온데서 생겨난 속담일 터. 민간백성들의 삶은 대개 이웃끼리 화목한데 비해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구성된 국가의 경우 이웃나라끼리 사이는 그다지 화목하지 못하다. 바다를 사이 두고 이웃으로 살아온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좋은 때도 있었지만 서로 반목하는 일들이 더 많았고 지금까지도 해묵은 갈등들이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는데 그 가운데서 독도의 영유권 문제, 종군위안부 문제, 일본전범기업 강제징용 배상문제 등이 주요 쟁점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가 새로운 갈등으로 부상하여 오랜 갈등들에 얹어져 가뜩이나 썰렁한 냉기를 더욱 차갑게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남아 내려온 갈등도, 새로 생겨나고 있는 갈등도 모두 일본 측의 책임이 크건만 정작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후안무치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아주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느 한 착실한 역사학자의 통계에 의하면 한반도는 서너 차례 모자라는 1천 번의 침략을 당해왔다고 한다. 무려 1천 번이나 침략을 당해왔으나 남을 침략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하니 얼마나 착한 민족인가? 누구인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백의민족은 맞기만 하고 때릴 줄 모르니 선천적으로 DNA에 문제가 있다”고. 아무튼 그 1천 번 가운데서 일본의 침략이 다수였다. 일본은 지진이 많고 태풍이 많기로 지구촌에서도 이름난 곳이다. 게다가 땅이 척박하여 먹을 것이 늘 부족했다. ‘제집’ 내에서 해결책이 안 보이니 눈을 ‘옆집’에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남의 것을 빼앗아오는 약탈행위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가에 왜구의 노략질이 들끓었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곡식도 빼앗고, 옷도 강탈하고, 여자도 납치해가고 등 눈에 보이는 쓸 만한 ‘물건’이면 전부 빠트리지 않고 싹쓸이해갔다. 백의민족의 전통인사말은 ‘무사한가?’인데 그 유래가 바로 빈번한 외침을 당한데서 생겨난 것이다. 일본은 왜구의 노략질도 빈번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차원의 침략도 감행하였고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한반도 식민화였다. 1592년 풍신수길이 발동한 임진왜란이 좋은 근거이다. 명나라 조선 파병 때문에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실패했으나 그 후 결코 한반도 식민화 정책은 포기하지 않았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조선정부는 청나라와 일본을 불러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큰 전쟁을 피하고자 조선정부는 동학농민운동 측과 협상하여 평화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고 청나라 군과 일본군 모두 철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모처럼 좋은 기회를 만난 일본이 철회할 리가 만무했다. 청나라와 군대 철회로 갈등을 빚다가 드디어 무력충돌이 발생하였고 그것이 바로 ‘중일갑오전쟁’이다. 일본을 ‘쌰오르번(小日本)’으로 하찮게 여겨왔던 청나라가 생각 밖으로 일본한테 패배한다. 조선을 청나라 속국에서 벗어나게 하고 ‘독립문’까지 세워준 일본이지만 정작 조선은 독립을 하지 못하고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다. 호랑이가 나간 자리에 승냥이가 들어온 셈이었다. 일본은 강대했던 청나라를 물리쳤으나 또 다른 강대한 적인 러시아와 맞붙어 싸워 이겨야 만주와 조선에서의 이권을 모두 독차지할 수가 있었다. 1904년 일본은 한반도에서 자기네가 마음에 드는 곳에 어디든 군사기지를 세울 권리가 있었다. 러시아와 맞붙으려면 동해바다 섬에 군사기지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하여 일본의 레이더망에 독도가 들어왔다. 1905년 일본은 독도를 ‘무주지(無主地)’라 주장하면서 영토편입을 시도하고 시마네현(島根縣)에 지방고시를 알린다. 남의 나라 땅을 침략하고 그 땅을 ‘무주지’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드는 수법은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을 식민지화 하는 과정에서 활발하게 써 먹었던 수법이었다. 즉 일본이 유럽열강들한테서 배운 것을 조선침략에 활용했다는 뜻이다. 독도는 1905년 전에 과연 ‘무주지’였을까? 아니다. 마찬가지로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에 이르는 곳마다 모두 ‘무주지’ 땅들이었을까? 아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무주지’라 주장하는 것일까? ‘발견자우선주의’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활용했던 것이다. ‘발견자우선주의’의 본뜻은 최초로 발견한 사람들이 소유 우선권이 있다는 의미인데 백인들이 아메리카 땅을 발견하고 개척할 당시 수많은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결코 백인들이 최초의 발견자가 아니다. 분명히 그 땅엔 인디언이라는 주인이 이미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식민지를 개척한 그 땅들에 주인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 전부터 발견하고 삶을 영위해온 원주민들이 거주해왔다. 그렇다면 왜 유럽열강들이 ‘발견자우선주의’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들었을까? 주인이 이미 있었는데 ‘무주지’라 주장하고 거기다 한 술 더 떠 ‘발견자우선주의’를 떠드는 근거는? 유럽열강들은 지구촌 곳곳에 살고 있는 인류 집단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그 땅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3C’ 즉 기독교(Chrisianity), 문명(Civilization), 상업(Commerce)을 통해 식민지 정복을 정당화했다. 1455년 교황 니콜라오5세는 아프리카 서쪽 해안의 영토에 대한 포르투갈의 권리를 승인했다. 최초의 탐험시대부터 이미 그 땅에 인류가 살고 있든 말든 국가가 있든 말든 유럽열강들 중 그 누가 먼저 그 땅에 도착하면 자기네들이 주인이라는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를 적용했던 것이다. 독도는 1905년 이전에 조선의 소유이고 조선이 영유권을 갖고 있다는 역사적인 증거는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산업혁명과 식민지개척 공부에 가장 모범생이었던 일본이 서구열강들이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정당화로 써먹었던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 무기를 휘둘러 독도 영유권을 시마네현에 편입하는 고시를 알리는 수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있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일본 소유로 편입되었던 것들을 바로 잡는 조항에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등 제도들이 조선의 영유권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선의 지리는 육지와 3170 개 섬으로 구성되어 있어 섬마다 일일이 모두 표기할 수가 없었고 그때 독도가 빠져있었던 것을 일본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다. 즉 이것 때문에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한국정부가 독도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군대가 주둔하여 관리하고 있다. 6.25 전쟁 때 한국군 36명의 용사가 독도를 굳건하게 지켜냈고 지금까지도 한국이 독도에 주둔하고 관리하고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존재의 일차적인 이유는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2016년 세월호사건과 지난해 10월 발생했던 이태원참사사건에 전체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정부가 국가의 존재이유를 방기했다는 것이다. 다음 자국의 영토를 지키는 것도 국가존재의 주요 이유이다. 영토를 잃는 것은 안전을 잃어버리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기 때문이다. 한국정부의 독도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으로 명백한 우리 소유의 영토이다. 독도에 대한 영유권 분쟁은 존재하지 않으며 독도는 외교 교섭이나 사법적 해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확고한 영토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어떠한 도발에도 단호하고 엄중하게 대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독도에 대한 우리의 주권을 수호해 나아간다.” 다만 걱정이 하나 있다. 일본정치주류세력인 우익이 줄곧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에 대해 올해만 세 번 한일 양국정상이 만난 자리에서 아무 언급도 없었다. 윤석열 정부의 과거사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는 대일외교방침 때문일까? 일각에서는 이대로 나아간다면 일본이 독도를 완전히 빼앗아가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공동관리 주장을 들고 나오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한다. 독도분쟁은 대한민국의 자존심 문제이다. 자존심을 잃으면 나라의 존재이유가 사라질 만큼 국민의 사기가 저하된다. 그러므로 독도만은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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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31
  • [기고] 전주국제영화제 정준호-민성욱 공동집행위원장 투톱체제 성공을 바라며
    독립영화의 요람 전주국제영화제가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로 전환해 정체성 확립과 대중성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지 관심을 받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는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민성욱 부집행위원장과 정준호 영화배우를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의결했고, 지난 26일 조직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은 시장실에서 위촉장을 전달했다. 마력은 동력의 단위로 높을수록 좋다. 이번 쌍두마차 체제가 앞으로 3년 동안 시너지 효과를 일궈낼 것으로 기대된다. 백제예술대학교 방송연예과 교수인 민성욱 신임 공동집행위원장은 전주국제영화제 출범부터 조직위의 사무국장 및 부집행위원장을 역임한 '지킴이'이고, 정준호 신임 집행위원장은 높은 인지도를 가진 대중성을 확보한 영화배우이기 때문. 어떤 조직이나 더 큰 발전과 생존을 위한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시점이 있다. 세계 초일류 전자제품 회사로 대한민국을 빛내는 삼성이 만일 제일제당 시절처럼 사카린을 밀수해 설탕을 팔던 그대로 운영되고 있다면 지금의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 202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는 비경쟁 위주로 실시됐고 올해 2022년 23회 영화제는 국제경쟁, 한국경쟁, 한국단편경쟁, 특별부문(한국 장편 다큐멘터리, 지역공모작품, 비경쟁 아시아 영화)로 진행되며 업그레이드 됐다. 2023년 24회부터 3년간 시행될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기존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보다 더 대중성을 일으켜 더욱 큰 소통을 통해 영화계 발전과 주최지인 전주 지역발전에 더 크게 기여하는 영광이 실현될 지 귀추가 주목된다. 쌍두마차 체제가 된 전주국제영화제는 전주시민의 선택을 받은 우범기 시장이 조직위원장으로 이끄는 마차다. 우 조직위원장이 전주시 발전을 위한 고뇌 끝에 내놓은 묘수라고 풀이된다. 시장은 시민의 행복과 시의 발전을 도모하는 자리기 때문이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에 대해 기대가 큰 반면에 걱정과 반감도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수립되자, 권해효 배우, 방은진·한승룡 감독이 이사직을 사퇴했다. 이사회에서 자신의 의견과 다르게 의결되었다고 사퇴하는 것이 영화제에 대한 진정성일 수도 있지만 무책임하게 보일 수도 있는 지점이다. 고 자니윤(고 윤종승) 코미디언은 2013년 2월28일 해외동포들과 판문점을 방문한 후 가진 뒷풀이에서 "한국 사람들은 너무 똑똑해요.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이XX 안돼, 저XX 안돼 하는거에요. 일을 해보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한국계 코미디언으로 성공하고 그의 인프라를 총동원해 조국 대한민국 관광발전을 위해 기여하고 싶었으나 좌절된데 대한 의견으로 들렸다. 대한민국은 625전쟁 후 폐허에서 일어나 세계 경제 10대 강국이 되었고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나라다. 지난 80년간 대한민국이 변화가 없었다면 우리 국민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억압속에서 지옥살이를 하고 있었을 게 자명하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는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이사회에서 결정된 사안이다. 임기는 3년이다. 3년간 응원하고 3년 후 큰 성공과 발전을 이루면 박수를 치고, 변화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때 가서 비판해도 늦지 않다. 한국언론인연대 박상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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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30
  • "일본 Z세대 중국에 호감" 중국 호감도 세대별로 다른 원인
    ●오카다 미츠루(일본 저널리스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7일 방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3년 만에 처음으로 중·일 정상회담을 갖고 악화된 양국 관계를 '재조정'하기 시작했다. 기시다는 대중 관계 개선에서 반중 여론과 대중 강경 자민당 우파의 제약을 받고 있지만 반중 여론을 거론하면 일본의 Z세대(18~29세)의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40% 이상으로 다른 연령층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Z세대의 정치적 의지가 선거의 키를 쥐고 있는 세계적 흐름을 보면 '반중 여론'과 '우파'에만 의존하는 기시다 외교가 위태롭다. 45분 동안 진행된 이번 일-중 정상회담은 3시간여에 걸친 중-미 정상회담에 비해 일본의 대중국 중요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일·중 정상은 회담에서 국방부 해상 및 항공 연락 메커니즘의 직통 전화선 조기 개통, 새로운 중일 고위급 경제 대화의 조기 개최, 새로운 중일 고위급 문화교류 협의 메커니즘 회의 조기 개최 등 몇 가지 공감대를 형성했다. 향후 중일관계 개선의 지표 중 하나로 정상 간 상호 방문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시다 총리의 대중 관계 개선의 한 가지 저항은 '반중(反中)' 여론 고조다. 일본의 대중(對中) 인식 악화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각부가 매년 발표하는 '외교에 관한 여론조사'에는 흥미로운 수치가 나온다. 예를 들어 지난 1월 발표된 조사에서 응답자의 20.66%가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지난해보다 1.4% 증가)고 답했다.그러나 연령별로는 Z세대 중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는 비율이 41.6%로 전체보다 배 이상 많았다. 60~69세 13.4%, 70세 이상 13.2%에 비해 Z세대는 중국에 대한 친근감이 높다. 그렇다면 왜 연령대에 따라 중국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싶다. 나는 젊었을 때(저자는 1948년생) 중국의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심을 갖고 있었고,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속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중국이라는 '타자' 위에 자신의 생각을 투영해 기대를 부풀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이나 구미의 통치체계를 중국의 정치와 사회에 투영해 일본이나 구미의 기준으로 중국을 관찰하고 판단한다. 요즘 60~70대 일본인들이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다. 그러나 Z세대는 생각이 다르다. 내가 가르친 대학생의 경우 태어나기도 전에 일본 경제가 침체에 빠졌고,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기를 경험하지 못했다. 이들이 철들었을 때 중국은 이미 미국을 추격하는 대국이 됐고 IT 기술에서 일본을 앞섰으며 애니메이션과 게임 품질에서도 일본을 추월하고 있다. 또 Z세대가 다니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많은 곳에서 중국 유학생과 접촉할 기회가 종종 있다. 다시 말해 Z세대는 중국을 일종의 '대등한'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환상은 없다.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가 사회의 버팀목이 될 때 일본인 전체의 대중국 관념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쇠락이라는 역사적 변화, '탈아입구((脫亞入歐)'의식을 심리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대가 '2선 후퇴'하면 일본의 '반중' 여론도 달라질 것이다. 기시다 정권도 언제까지 반중 익찬 여론에 의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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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3

실시간 칼럼/기고 기사

  • 대륙 "알리바바" "아마존" 을 제끼다.
    ■ 리포터 구자선여러분은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40인의 도둑과 알리바바를 알고 있을것이다.그런데 이 동화속 ‘알리바바’ 가 세상을 놀래키고 있으며 아마도 수년안에 그 이름이 전세계 가장 유명한 이름이 될것임을 확신한다.바로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 알리바바가 지난해 처음으로 미국 이베이와 아마존의 규모를 넘어섰고 그 격차는 올해부터 훨씬 더 가파르게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이 전자상거래 분야에서도 무서운 기세로 폭풍 성장하고 있다. 최근 10년 사이 연평균 성장률은 100%를 훌쩍 넘는성장률로 전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일이다. 인터넷 가입률이 높아지고 스마트폰 기반의 모바일 기기 보급이 수직으로 늘고있기 때문이며 이런점에서 알리바바의 폭풍성장과 세계 1위는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것이다. 이에 자극 받은세계 최대 온라인 쇼핑업체 아마존이 인터넷 강국인 한국에 상륙하기로 한 결정은 벌써부터 알리바바에 대한 경쟁구도에서 물러설수 없는 자존심의 다름 아니라 할것이다.중국 전자상거래 시장은 지난 10년간 연평균 120% 라는 경이적인 높은 성장세를 보였다. 지난해 시장 규모 1,900억 달러(약 212조원)로 전년 대비 66.5% 성장했다.중국 전자상거래 시장의 수직성장 배경에는 알리바바의 성공이 있다. 알리바바는 타오바오, 티몰 등의 계열사를 두고 온라인 쇼핑 시장을 주도해 나가고 있으며 2011년 말 기준 C2C(개인 간 거래:개인이 팔고 개인이 구매하는 방식) 시장에서 90.4%의 시장점유율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B2C(기업과 개인의 거래) 시장에서도 51.4%의 점유율을 차지하며 13억 중국 온라인 업계의 1인자로 그 위력을 떨치고 있으며 그 성공과 크기가 어디까지 이르게 될지 아직은 시작에 불과할 따름이다.여기에 알리바바의 창업주인 마윈 회장이 지난 5월10일 최고경영자(CEO) 은퇴를 선언하면서 알리바바가 증시 상장을 위한 준비 절차에 돌입한 것이란 소문이며 알리바바가 이미 세계 최대의 투자 은행인 미국 골드만삭스에 기업공개(IPO) 업무를 맡겼다고 한다. 이제 2014년 한해 미국 월가의 흐름은 “알리바바의 나스닥 상장”이란 초대형 이슈가 한해를 휩쓸며 FACE BOOK 이후 최대의 열기로 덥혀질 전망이다. 온라인 거래와 인터넷 홈쇼핑 등을 포함한 중국 내 전자상거래 규모가 2020년이면 43조8천억위안(약 8천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도는바 그때가 되면 이베이나 아마존과는 비교조차 할수 없는 세계 온라인 전자 상거래 업체의 블랙홀이 될것이란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게 필자의 판단이다.또한 알리바바 연구센터는 지난해 전자상거래가 중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6%에 불과하였으나 2020년에는 16%까지 높아질 것으로 전망하지만 이는 최저 전망치에 불과하다. 중국 온라인 시장의 매력은 다음 4가지 분석에서도 나타난다. 첫째,온라인 매출 등을 포함한 온라인 시장 관심도및 호응도, 둘째,기술,·재정,·물류를 포함한 온라인 인프라의 구현 정도 셋째,디지털 환경 및 검열, 거래 규정을 포함한 관련 법령 정비, 마지막으로 소매 매출 위한 소비,구매 고객 시장 크기 4가지 지표로 평가한 이 자료에서 중국은 단연 1등으로 손꼽혔으며 지난해 이미 중국이 미국을 추월하고 전자상거래 시장의 선두 자리를 거머쥔 여세를 몰아 올해부터는 그 격차가 더욱 심하게 벌어질 것이다.중국 전자상거래 2020년 8천조원 전망온라인 소비의 급성장에는 스마트폰을 기반으로한 모바일을 구현하는 초고속 인터넷 보급이핵심이다. 2011년 중국의 인터넷 보급률은 38.3% 수준이었으나 2012년 42.1%까지 상승했다. 중국의 브로드밴드(광대역 통신망) 가입자 수는 지방의 인터넷 인프라가 개선되면서 2012년 말 기준으로 1억7800만명에 달했다. 인터넷 이용자 수도 5억6400만명에 이르게 되었다. 2012년 온라인 쇼핑 이용자 수는 전년 대비 21.4%가 증가해 2억4700만명에 이르렀다. 2012년 중국의 연간 1인당 온라인 이용자 소비 금액은 전년 대비 25% 상승해 5203위안(약 94만6천원)에 달하면서 온라인 거래를 통한 이용자의 지출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상승세를 타고 있다.알리바바가 거대 기업으로 성공할 수 있던 배경에는 중국 정부의 전자상거래 지원 정책이 있다. 중국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2011년 기준 알리바바를 포함한 중국 기업들의 C2C 시장 점유율은 99.4%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전자상거래 사업의 인허가를 대부분 자국 기업에만 내주고 있어 외국계 업체들은 중국 기업과 합작 설립 운영하거나 투자에 참여하여야 하는데 바로 야후와 재일교포 3세 손정의 씨의 소프트 뱅트가 알리바바의 대주주로 참여하여 60% 이상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사례인 것이다.구글에 밀려 생존조차 불투명 했던 야후와 소프트 뱅크 수뇌부들은 일찍이 미국에서의 피튀기는 생존과 사활보다 그당시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중국 온라인 시장에 주목하여 마윈 회장의 알리바바에 투자한 것이 불과 10 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전세계 온라인 상거래 업체의 절대지존이 되어가고 있는 알리바바의 전설을 이룬 1등 공신으로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알라바바는 2003년 설립 이후 더 많은 중국인들이 전자상거래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혁신을 모색해왔다. 우선 거래 수수료 무료 정책을 통해 판매자들의 온라인 판매 장벽을 없애면서 시장을 확대해나갔다. 둘째, '알리당당'이라는 메신저를 개발해 판매자와 구매자 간의 효율적인 거래가 가능한 서비스를 제공했다. 셋째, 사기거래 방지를 위해 '알리페이'라는 안심결제 기법을 개발 170 중국내 은행망을 통해 판매자와 구매자 간 “믿고 거래할수 있는 제도“ 로 보증해줬다. 이를 통해 의심많은 중국인들에게 안심하고 온라인 거래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 것이다.물론 중국 전자상거래에 있어서의 최대 화두는 빠른 배송 시스템 구축이다. 현재 알리바바는 현 중국 택배 물량의 60% 이상을 담당하고 있으며 폭발적 매출성장에 비례하여 빠른 택배의 배송망을 기하급수로 늘려가야 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가 될 것이다. 알리바바는 여기에 2020년까지 160 억 달러 (18조 원)를 투자해 중국 전역에 당일 배송 물류 네트워크를 구축한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알리바바는 중국에서의 성공을 기반으로 본격적인 해외시장 진출도 벌써부터 도모하고 있다. 홍콩, 대만, 싱가포르 그리고 말레이시아 위주로 시장을 확대하고 물류 및 결제 시스템 구축을 위한 파트너십도 계획하고 있다. 이와 함께 미국에서의 기업공개(IPO)에 대한 기대감이 천정부지로 치솟는데 그도 그럴것이 페이스 북이 2년전 나스닥 상장으로 기업가치가 1,500억 달러가 되었는데 중국에서 서비스가 되지 않고 수익모델도 아직까지 불안한 상태것을 감안하면 이미 아마존을 넘어선 세계최대의 온라인 시장의 절대 강자의 지위를 확보하였으며 지난해 이미 페이스북 보다 순이익을 훨씬 많이 기록한 알리바바에 온 지구촌의 자본가들이 얼굴을 외면할 까앍이 절대로 없기 때문이다.급변하는 온라인 시장 환경에서 혁신과 고객 만족은 생존의 문제다. 중국 전자상거래 시장의 빠른 외형적 성장 속에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혁신하고 변화하면서 고객 만족 극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알리바바를 전망하면서 알리바바의 성장과 성공이 미국을 넘어선 중국 대륙과 중국인의 성공 모습으로 자리매김 하길 기대해 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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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11
  • [수기] 망각과 화해를 위한 “악수”
    ■ 김철균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잔디 엮어 지은 맹세야// 세월에 꿈을 실어 마음을 실어/ 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 넘자......이 노래은 일찍 어린 시절 내가 아버지한테서 배운 노래였고 또한 크면서 남몰래 추억속에 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조용히 불러보군 했던 노래이기도 했다. 그제 날 전 박정희 한국대통령의 “18번지”었다던 이 노래ㅡ 나는 지금 이 노래를 다시 불러 보면서 이내 인생의 한토막을 정리해본다. × × ×연길시 모 호텔 예식장ㅡ 30대 고개에 갓 들어선 젊은 부부가 아기의 돌생일 파티를 열고 있었다. 사회자의 웅글진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이미 할아버지와 할머니로 된 50대 중반의 남녀가 춤을 추며 젊은 부부와 아기가 앉은 상앞으로 다가가더니 축의금이 든 붉은 봉투를 생일상 위에 놓는다. 이 50대 중반의 남녀ㅡ 그 남자가 바로 나였고 중년여인은 바로 나의 옛 마누라였던 임××씨었다. 임××ㅡ 나한테 있어서 그녀는 애증이 몹시 엇갈리던 여인이었다. 일찍 20대였던 낭만의 그 시절 가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치도록, 아니 죽도록 사랑했던 여인이었고 가정을 이룬 뒤에는 티격태격 다투었었고 이내 주먹에 맞아 얻어터지기를 반복했던 여인이었으며 그 때의 세월에는 그닥 흔치도 않은 이혼이란 비극을 나한테 안겨준 여인이기도 했다. 이혼 뒤 나는 그녀를 두고 나의 모든 것을 망치게 한 죽일 년이라며 두고 두고 저주해 왔다. 나는 가정의 파열로 창피스러운 나머지 당시 “철밥통”이라는 직장에서 사표를 냈고 집도 없이 형제들의 집을 찾아 다니며 떠돌이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죽자고 “디디우이(敌敌畏)” 한병을 사 놓고 자살을 시도, 3살짜리 어린 아들을 두고 차마 실행에 옮길 수 없어 포기한 적까지 있었다. 후에 나의 인생은 다시 반전이 됐다. 형제와 친구들의 도움으로 대형 화물선에서 근무하는 해외의 마도로스가 되어 세계 여러개 나라를 항행하며 안계를 넓히는 행운을 가지었으며 돈도 어느 정도 벌었다. 또한 돌아온 뒤에는 다시 “상경(연길)”해 내가 좋아하던 직업을 찾게 되었고 이어서 자식이 딸리지 않은 여인과 결혼(남들은 내가 처녀한테 장가를 들었다고 부러워 했음)해 귀여운 딸까지 보게 되었다. 하지만 반대로 한창 공부할 나이었던 나의 아들은 나와 임×× 여인 사이로 오가며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1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절강성 의오시에서 막노동을 하다가 나중에야 한국회사에 취직하면서 생활의 안정을 찾을 수가 있었다. 나는 남의 자식들이 대학을 나와 하나 둘씩 국가 공무원 혹은 기타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을 볼 때마다 나의 첫 마누라 임××씨에 대한 증오감으로 이빨을 갈군 했다. 몇년 뒤 나처럼 떠돌이 생활을 하며 그처럼 고생하던 나의 아들도 어느 정도 인생반전이 되어 결혼을 하게 됐고 1년 후 자식을 보았으며 이어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첫 아기의 돌생일 파티도 하게 됐던 것이다. 얘기는 다시 앞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1년 10월 6일에 있은 아들의 결혼식 때 나와 아들 사이에는 약간의 분쟁이 있었다. 아들의 주장인즉 자신의 결혼식에 친어머니가 참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지금의 마누라는 한국에서 체류하고 있는 상황, 아들의 결혼을 두고 마누라와 나는 여러 차례 전화통화를 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본처의 결혼식 참가여하에 대한 언급은 한 마디도 없었다. 언급이 없다는 건 마누라가 본처의 참가를 묵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었다. “여보, 내가 참가하지 않는다고 해서 절대 아들의 결혼식을 어수선하게 하지 마세요.”이 말은 본처가 참가해도 된다는 암시었고 또 이 때문에 자기가 한국에서 온지 않는다는 뜻이 다분히 담겨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들의 주장도 마누라의 귀뜸도 받아 들이지 않았다. 이유란 없었다. 그저 자존심이었다. 아들의 결혼식은 바로 내가 주최한다는 뜻에서 오는 자존심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라지만 가령 그 때 아들의 결혼식을 그 애의 어머니인 임××씨가 주최한다고 한다면 역시 자존심 때문에 긍정코 참가하지 않을 심산이기도 했다. 그 이후 나는 아주 커다란 자아모순속에 빠졌다. 아무리 자존심이라지만 어딘가 너무했다는 자책도 없지 않았다. 썩 후에야 알았지만 아들의 결혼식이 되자 임××씨 여인은 한국에서 돌아 왔었다. 그리고 결혼식 날 장소에는 들어 오지 못하고 입구에서 몰래 혼례식을 올리는 아들과 며늘 아기의 모습을 훔쳐 보면서 그저 울기만 했다고 한다. 후에 아들은 울면서 이 얘기를 나한테 들려 주었다. “…아버지, 아버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로 놓고 말하면 평생을 두고 가슴에 못이 박히는 일이예요.”아들은 별로 나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마디마디가 채찍이 되여 나의 가슴을 후려 치는 것 같았다. 기실 임×× 여인과의 이별내면에는 나의 잘못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살고 있던 단층집에 비가 새도 문학을 한답시고 책만 붙잡고 있은 골방샌님, 거기에 초겨울 석탄을 실어 올 때마다 그 것을 창고에 퍼들이는 일은 그냥 아내의 일로만 여겼던 나였으며 그렇다고 문학으로 성공한 것도 아니었다. 어찌보면 나의 과실이 더 크다 할 수도 있었다. 나는 고개를 떨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로부터 2년이 지난 뒤 이번에는 손자의 첫돌생일이 되었다. 나는 이번에만은 아들의 친어머니가 참가할 수 있도록 허락하기로 했다. 아니, 이번의 행사는 아들네 내외가 주최하니 그들한테 권리가 있다는 것이 더 적절했다. 헌데 손자의 첫돌생일이 되자 어느날 아들의 계모 즉 나 현재의 마누라가 우리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이 일을 어쩐담?…아들의 생모가 손자생일에 참가할 권리가 있다면 아들을 키워준 계모한테는 손자생일에 참가할 권리가 없단 말인가?! 이러한 나의 고민을 풀어준 것은 그래도 마누라였다. “여보, 애들의 결혼에 임×× 언니를 참가시키지 않은 것이 썩 잘된 일은 같지 않아요. 제가 양보할테니 이번엔 임××언니가 당당하게 애엄마의 자격으로 참가하게 합시다. 전 그냥 참가해 지켜만 보면 돼요.”나는 마누라가 눈물 겹도록 고마왔다. 아들 며느리가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면 와락 끌어 안고 키스 세례라도 퍼붓고 싶은 마음이었다. 드디어 손자의 첫 돌 생일날 이전의 마누라와 함께 춤을 추며 손자한테로 다가가던 중 나는 얼핏 지금의 마누라가 앉아 있는 좌석을 뒤돌아 봤다. 그녀는 조용히 앉아 박수를 치는 것이었다. 기뻐하는 기색도, 그렇다고 억울해 하거나 분통해 하는 기색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마누라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장면, 이는 분명 그녀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여인인들 남편이 본처와 함께 춤추는 모습을 좋아하겠는가! 다만 그 심정을 감추고 있을 뿐이었다. 행사가 끝난 뒤 나는 옛 마누라 임××씨와 손을 잡았다. “오늘 합작을 잘해 줘 고맙소. 그리고 건강하고 부디 행복하길 바라오.”나는 불쾌했던 그녀와의 과거를 깡그리 잊기로 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잘 지내기로 했다. 그냥 잘 알고 사이가 좋은 여인처럼, 또한 내 아들의 엄마로, 며느리의 시어머니로, 손자의 친할머니처럼 대해 주기로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거기까지었다. 도를 넘는 일, 그 것만은 분명 삼가해야 할 사항이었다. 그것은 필경 우리는 한솥 밥을 먹는 한가족도, 한 이불을 덮고 자는 부부가 아니기 때문이다.이런 생각을 굴리며 나는 뒤에서 지켜 보는 이내 현재의 마누라를 돌아 보았다. 마누라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사랑은 낙화유수 인정은 봄이라/ 오늘도 가는 곳이 꿈속이더냐// 영춘화 야들야들 피는 들창에/ 이 강산 봄소식을 편지로 쓰자 주소:吉林省延吉市光明街89号 延边日报 综合周报 金哲均(김철균)电话:138-4433-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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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09
  • 어머니와 인생살이 그리고…
    ■ 김철균 인생살이에 있어서 어머니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될까? 이렇게 질문하면 당신은 과연 어떤 답안을 써 넣을지? 당신은 가능하게“여기에는 공식적인 답안은 없다” 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그렇다. 여기에 공식적인 답안을 써넣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 또한 인생에 있어서 어머니가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라고 획분할 방법이 없다. 단, 나의 인생여정을 돌이켜 보노라면 나한테 있어서 어머니가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도 컸다. 그냥 60%요, 70%요 하고 획분하지 못할 뿐이다. 그것은 어머니가 나한테 많이 주어서가 절대 아니다. 아니, 나한테 뭔가를 많이 주기는커녕 나의 곁을 너무나도 일찍 떠나버린 어머니였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가 10살때와 11살 때 각각 돌아갔다. 모두 그 동난세월이었던 문화대혁명 기간이었다. 아버지는 “외국특무”란 누명을 쓰고 맞아서 사망되고 어머니 또한 매를 이기지 못해 훈춘강에 몸을 날리며 자결을 선택했었다. 헌데 당시 아버지의 죽음은 막을수 없었지만 어머니의 죽음은 얼마든지 말릴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1968년 8월의 어느 비오는 날 오전, 전날 밤 “독재소조”에서 매맞고 돌아온 어머니는 돼지먹이풀 캐러 간다면서 나한테 함께 가지 않겠는가고 물었다. 이에 내가 비가 내리기에 안 가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나를 이윽토록 내려다보더니 그냥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집을 나서는 것이었다. 이렇게 집을 나간 어머니, 어머니는 그 길로 훈춘강가로 향했고 그 다음은 2일 만에 경신향의 두만강 나루터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아, 어머니ㅡ 그때 가령 내가 돼지먹이풀 캐러 간다던 어머니를 따라갔더라면 어머니의 마음을 완전히 돌릴 수 있었을 것이고 내가 수십년이 지나도록 가슴을 치며 후회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었다. 그 때로부터 나한테 있어서 어머니란 그리움과 후회 사이로 오가는 무형의 존재였다. 형수님의 슬하에서의 4년, 집체호 생활의 3년 그리고 7년간의 기나긴 숙사생활을 하면서 나는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어머니를 머리속에 떠 올렸고 간혹 지나 가는 40-50대 여인만 보아도 “저 분이라도 나의 어머니로 돼 줬으면”하고 어처구니가 없는 기대를 해본 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한편 나는 원래의 아내와 이혼을 하고 외토리로 생활해 본 적도 있었다. 아내가 없는 생활, 힘들고 외롭기는 마찬가지었다. 하지만 아내가 없는 생활이 어머니가 없는 생활에는 비길 수가 없었다. 막말로 “아내는 다시 찾아 맞아 들이면 될 수 있으나 한 번 간 어머니는 영영 돌아 올 수가 없는 법”이었다. 그렇다면 인생에서 아내와 어머니의 비중ㅡ 이를 저울로 뜰 수는 없지만 또한 사람마다 가늠하는 척도는 다를 수도 있겠지만 나의 마음속에서만은 어머니의 빈자리를 아내가 결코 대신할 수 없음을 분명히 말해주고 싶다. 사람들은 흔히 어머니를 비롯해 부모님이 돌아가면 늘 평소에 잘해주지 못했다면서 후회한다. 특히 여인들이 그렇다. 사위도 “반자식”이라고 나 또한 장모님을 몇 년간 모셔 본 적이 있다. 당시 나의 아내는 장모님과 어짢은 일 갖고도 자주 다투고 언성을 높이군 했다. 노인이 되면 다시 아이처럼 된다고 80세 고령인 장모님이 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없지는 않았다. 헌데 이는 원래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고 돌아가기 전의 2 – 3년간 치매 비슷한 현상이 오면서 그런거였다. 후에 장모님이 사망하자 아내는 평소에 장모님과 싸우던 일을 외우면서 자주 울군 했다. 아내의 사례를 보아도 세상에 후회 약이란 없는 모양이다. 주지하다 시피 우리 세대는 이제 오래잖아 60고개에 올라서게 된다. 그러면 우리도 자식으로부터 노인취급을 받을 것이고 어짢은 일에도 자식한테 서운하고 더 나아가 노여운 일도 생길 것이다. 그럼 바꿔놓고 내가 부모한테 잘 했는가를 딱 한 번만이라도 생각해 보자. 부모한테 잘 해주는 것 그것은 결국 자식한테 효도를 바라는거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作者地址:延吉市光明街89号延边日报综合周报金哲均电话:0433-2512568(办公室),138-4433-1207(手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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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08
  • [기고]개혁 개방 일번지 심천과 덩샤오핑
    ■ 리포터 구자선"문화대혁명" 현대 중국사의 가장 잔혹사로 남아있는 비극과 암흑의 시대였음을 누구도 부인 하지 못한다. 10여년의 "문화대혁명"기간은 중국의 역사와 문화,전통의 가치관을 송두리채 뒤엎어버리며 「혁명」이라는 명분아래 수많은 지식인,학자,문화인들이 죽음을 당하거나 감옥으로 끌려 갔으며 중국 대륙 전체가 거대한 수용소나 감옥과 같이 숨죽인 죽음과 고난의 시기였으며 이를 빗대어 외부에서는 「철의 장막」 「죽의 장막」이라 하여 단절되l고 통제된 중국대륙은 국제적 비난과 조롱의 대상 이었다. 그런 죽의 장막의 문화대혁명 말기인 78년 갑작스런 마오저뚱의 사망을 맞게된다.건국 이후 많은 정적들을 제거하며 1인 독재체제를 구축하며 30년 권좌에서 중국대륙을 이끌던 절대권력자 마오의 사망이후 1년 남짓 과도기 화궈핑 체제로 숨고르기한 중국공산당의 "중화 인민 공화국" 에 오랜 부침을 거듭해야 했던 덩샤오핑이 마침내 권력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5척 단신의 작은 거인 "덩샤오핑"은 중국이란 거대한 지도위에 "개혁개방"이란 야심찬 설계도를 그리고 바로 이곳 홍콩 건너 조그맣고 보잘것 없고 가난하기 짝이없던 어촌,항구 마을 「선전」과 함께 개혁개방 특별지구4곳을 선정..화교 자본을 중심으로 한 외국의 자본.기술.경험들을 과감하개 받아들이면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특히 마오쩌뚱 의 정치 사상에 완전히 배치되는 위험하고 도발적인 정치적 모험을 착수하게 된다. 「문화대혁명」기간 퇴보와 정체와 단절의 문 빗장을 처음으로 열게된 이름「개혁 개방」이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검던 희던 쥐를 잘 잡아야 하는게 고양이"라는 인민들을 잘 살게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국가가 할 일을 하는 것이 중국식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그의 실용주의 정치 사상의 단면을 그대로 드러내는 유명한「 덩샤오핑 이론」이다.이 운동은 그야말로 전인민들의 전폭전인 지지를 받아 그 힘으로 그의 개혁적이고 과감한 정책들을 펼쳐 나갈 수 있었으며 오늘의 발전되고 성공한 중국을 실험한 혁명적 장소가 바로 이 곳 선전이다. 이 실험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거대한 중국 대륙 전체가 공업화, 개방화의 길을 걸어 나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결과적으로 30여년 지난 오늘날 선전은 샹하이와 더불어 가장 개방화,공업화된 도시로서 도시평균 연소득이 선진국 수준인 $20,000을 넘을 정도로 글로벌 차이나를 견인하는 중심축이 되었으며 이제는 반환 이후 특별 행정기구로 남아있는 강 건너 홍콩을 인구 규모면에서 압도하면서 위용을 자랑한다.이곳 "연화산 공원"에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을 기리기 위해 새워진 유일한 동상이 서있다. 동상에서 정면으로 내려다 보이는 곳에 아치 모양의 시 정부 청사가 자리 잡고 있으며 100층 이상의 고층 빌딩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개혁개방의 명과 암을 극명하게 경험하고 있는 오늘의 "사회주의 정치, 자본주의 경제 체재"를 처음 씨뿌렸던 심천을 내려다보며 덩샤오핑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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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06
  • [기고]2014 중국의 온라인 소비 패턴 전망
    ■ 구자선 2013년 미국의 온라인 매출 규묘는 2287억불 인데 중국이 매년 인터넷 이용자수가 3,500만명씩 증가 하더니 온라인 매출 규묘도 2124억불 까지 늘어 났다. 올해는 중국이 미국을 추월하여 온라인 매출 세계1위가 되는 것이 확실하다. 미국의 해외 온라인 수출은 국경이 맞닿아 있는 캐나다에 미국 전체 해외 온라인 수출의 49%를 차지한다. 한국의 미래 희망은 여기에서 찾을수 있다. 캐나다와는 비교가 되지않는 거대 시장인 중국과 일본이 이웃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축복이고 행운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일전 인천 신항의 한 부두에 중국 상하이에서 온 이탈리아 국적 크루즈 선박이 정박하자 1000 여명의 여행객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관광버스를 나눠타고 당일치기 서울투어를 떠나는 모습을 보았다. 호텔내의 면세점 쇼핑을 하는데 주로 호장품,주방용품,개인 위생 및 미용용품,유아용품 등 이들이 지나간 자리는 매장이 텅비어 버릴 정도이다. 이들이 Off Line 쇼핑객 들로 중국내 중산층들의마지막 소비 패턴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중국 온라인 쇼핑 매출이 지난해 2,124 억 불이란 통계에서 보듯이 소비와구매 패턴이 On Line 으로 옮겨가기 시작했으며 가파르게 거의 수직 상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마지막 시장과 성공의 기회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중국 13억 소비시장의 비약적 성장을 주도하고 견인해갈 온라인 쇼핑,인터넷 소비 시장에 올인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분야는 대기업이 갖지 못한 역동성과 차별화 전략, 고객이자 소비자인 유저들에게 충성도를 높이기 위한 보상과 소득 시스템을 적극 활용한다면 아직 걸음마 단계인 중산층들의 OnLine 쇼핑패턴을 주도해 나갈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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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05
  • 한국 정치에서 ‘재한조선족의 비중’은?
    조선족이 한국에서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등장’이라는 움직임이 감지돼 펜을 들어본다. 물론 현재 한국에서 정치적 권리를 지닌 조선족은 그 수가 제한적이지만, 공개적으로 드문드문 ‘특정 정당을 지지 선언’ 또는 ‘특정 후보를 성원한다’는 성명을 내는 현상으로 비추어 볼 때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므로 ‘한국 정치에서 재한조선족의 비중’을 미리 전망해 보고자 한다. 하나, 대한민국 현재를 위해 조선족은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본래 지역색의 정서가 짙게 밴 한국의 정치국면에 조선족마저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면 곤란하다. 더구나 지역색을 띤 한국의 정치판에서 특정 정당의 장기판 ‘졸’로 이용될 가능성이 매우 크고 그러다 보면 결국 한국 사회에서 조선족은 특별히 자신의 이익집단을 형성하기도 전에 수효가 극히 적은 소집단으로 낙인찍히고 외면당할 가능성이 100%다. 아직 정치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조선족에 대한 막연한 따돌림이 존재하는 한국사회 현실에서 공식적인 정치 개입은 조선족 입지를 더욱 어렵게 할 수밖에 없다.작금의 조선족은 같은 이익집단을 형성할 여건이 아직 충분하지 않다.재외동포법이 발효된 후, 십여 년 동안 한국정부의 ‘조선족 분열책동’ 비스름한 정책으로 말미암아 재한조선족과 미래형 재한조선족은 이미 계층 간 신분이 확연하게 나뉘어있다. 우선 국적이 회복돼 한국의 국민이 된 노인세대와 그 직계 후손들을 조선족 시선에서 볼 때, 기득권층이다. 다음 F-4 비자 제도로 장기 거류증을 받은 조선족들은 기득권층과 비기득권층 간 모호한 존재다. 이어서 H-2 비자 노무자 신분으로 입국한 조선족은 미득권층이고 하층으로 분류한다. 얼핏 보기에도 세 집단의 계층은 서로 추구하는 이익과 정치 참여 권리도 다르다. 조선족이 한국에서 단합돼 통일된 정치 세력으로 등장하자면 우선은 장기 거류증 신분인 지식계층에서 뜻을 같이하는 자들이 정치 지도자 집단으로 집결돼야 하고, 그 지도자 집단이 H-2 노무자들의 이익을 대변해 정책 방향을 담을 강령을 새로 제정하고 그런 정책강령들은 또 유권자인 기 국적획득자들을 통해서만 한국정치권에 명함을 내밀 수 있다. 이익 목표가 다른 두 계층. 즉 상위에 있는 기득권층 및 모호한 존재가 과연 하층을 대변할 의향이 있을까.절대 이뤄질 수 없다. 물론 뜻을 함께할 수 있는 무리는 조직하기 쉽다. 원래 사람들은 가진 것이 없을 때는 단합이 잘된다. 그러나 이익을 함께 할 수 있는 무리는 조직하기 어렵다. 그러한 붕당은 자연적으로 이익을 좇으면서 형성돼야 한다. 회사와 같은 조직은 이익을 함께 하는 무리다. 양심도 속일 수 있고 회사의 이익에 무조건 충성만이 그 회사에서 살아남는 길이다. 그래서 뭉칠 수밖에 없고 단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H-2 비자와 F-4 비자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이미 한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들은 서로 공동의 이익을 만들어 낼 수 없다. 뜻을 같이할 친구 ‘友’에는 아무런 먹을 게 없다. 하지만 이익을 함께 할 친구 ‘朋’은 고깃덩이를 두 덩어리를 나란히 놓은 형태로 돼 있고 그 의미 또한 ‘차려진 고깃덩이 두 덩어리를 각각 공평하게 나누어 가짐’을 말한다. 만약 F-4 비자 범위를 더 개방한다고 하면 H-2 취업 비자는 그만큼 어려워진다. 또 F-5 비자의 취업 범위에 H-2 비자를 개방하면 F-4 비자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가 ‘값’이 떨어진다고 투덜댈 것이다. 더군다나 이와 같은 외국 노동자와 이익을 함께하는 H-2 비자와 F-4 비자를 대변해 자기 자신의 권리를 내줄 국적자들은 토박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외국 노동자와 토박이들 간 벌써 일자리 경쟁이 벌어지고 있으므로….이러한 상황에서 재한조선족이 정치권에서 자기 자신들의 대변인을 찾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또 그렇게 분열될 수밖에 없고 이미 분열된 조선족 사회를 대변해 줄 기존의 정치인은 절대로 없다. 그건 그 정치인의 정치생명을 조기 결속 지을 수 있는 위험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혹자는 “‘조선족이 가지고 있는 투표권’에 기대를 걸면서 그와 같은 정치인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고 말하곤 하지만, 그것은 한국의 정치 생리를 전혀 모르고 마치 ‘잠꼬대’ 같은 소리를 남발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조선족의 한 표를 얻기 위해서 토박이 다섯 표를 떼일 위험천만한 법안을 누군가 발의한다면, 아마 당내에서 ‘미친놈’이라고 당장 철퇴를 맞을 것이다. 또 혹자는 ‘이자스민’을 예로 들면서 “순수 외국인 귀화자에게서 모두 국회의원이 비례대표로 나왔는데 왜 동족인 조선족에게서는 그런 의원이 없는가” 하면서 투덜댄다. 그 귀화자대표 이자스민은 이미 조선족 귀화자까지 대표하고 있다. 그런데 거기까지다. 그 이상 더 조선족에 대한 특혜를 바란다는 것은 조선족을 한국사회에서 고립시키는 위험천만한 생각이다. 조선족 노무자를 배려해준 노무현 대통령에게 감격해 마지않는 H-2 눈물과 일전 대선 때 공식적으로 박근혜 후보 지지 선언을 발표한 모 재한조선족(이미 한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들이 주측이 된 모임)들 모습에서 이미 단일이익을 위한 재한조선족의 이익집단은 형성될 수 없음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한편 이런 분열된 모습이야말로 대한민국에는 바람직한 모습이다. 각 개인이 본래 한국인의 모습으로 돌아가 토박이보다 더 토박이답게 한국 사회에 녹아들면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주인공이 된 모습이고 자기 자신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렇지 않고 얼토당토않게 자기 자신들이 무슨 대한민국 채권자의 자식인 양 대한민국에 과분한 요구를 하거나 한국 사회 적응과 융화에 한계를 드러내면서 기름처럼 둥둥 떠다니는 모습은 그야말로 부평초 신세며 한국 사회에서 ‘소수 무리 - 조선족’으로 따돌림당할 게 뻔한 이치다. 조선족 모두가 한국에 귀화(?)한다고 하더라도 기껏해야 2백만 미만인데 인구의 4%도 안 되는 비중으로 무슨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되겠다고?!<연통> 주: 본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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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2-19
  • 암담한 조선족사회, 어디로 가야 할까?
    ■ 김충정 동포세계신문 편집위원 근래 언론보도를 보면, 조선족 사회 환경은 그리 낙관할 일이 아니다. 50%의 조선족 마을이 없어졌고, 나머지 50%는 한 두호, 혹은 10호 좌우가 마을을 지키고 있다. 80%의 조선족학교가 없어졌다. 90%의 논밭이 타 민족에 의해 경작된다.조선족 거주현황을 보면, 한국 60만명, 일본, 미국 등 외국 거주자 20만명, 중국 연해도시 50만명이 흩어져 살고, 동북3성 현지엔 70만명이 남아 황폐된 학교와 마을 논밭을 지키고 있다. 현지 조선족촌은 학교 교직원과 어린 학생들, 노인들과 한국에서 임시로 돌아간 귀국 동포들이다.조선족 가정의 8다(八多)현상 조선족 가정의 8다(八多)현상도 심각하다. 과부, 홀아비, 늙은 총각, 이산가족, 한족사위와 며느리가 많아지고 있고 성(姓)은 알지만 본(本)을 모르는 젊은이가 많다. 50대 이하는 기본상 할아버지 한반도 고향 주소를 모른다. 컨로주(龈老族), 즉 일하기 싫어하는 아들이 늙은 부모에 의지해 살아가는 현상도 심각하다.이미 중국에서 거대한 나라까지 세웠던 4개 민족은 이미 본 민족의 언어는 물론, 문자까지 모두 상실된 실태이다. 청나라를 세웠던 민족, 아랍민족인 회족, 서하(西夏)국을 세웠던 당항족(黨項族), 녕하 장족차지구의 장족(壯族) 등이다.조선족 또한 중화(中華) 문화에 완전 용해될까? 필자는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 조선족의 오늘의 현실, 대한민국 오늘의 정책을 볼때 우리의 동포 4세, 5세가 완전히 한족으로 변하지 않는다고 어느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중국경제 성장에 따른 새 변화1992년의 통계에 의하면 조선족은 192만 5천명, 35가구 이상의 조선족 마을이 흑룡강성에 2,678개, 조선족의 논은 110만 ha였다. 한중수교 21년이 지난 지금 모두 땅을 버리고 한국에, 외국에, 연해도시로 떠났다. 이는 사회발전의 필연이라 생각한다.하지만 이제 상황이 바뀌어 조선족의 한국 진출은 정점에 이르렀다고 본다. 중국경제 성장에 따른 현상이다. 중국 천진을 보면, 한국인 5만명, 조선족 3만명 현대, 삼성전와 그 계열 부품공장 등 기업체가 3000개에 이르고, 근로자는 15만명(한족 근로자와 조선족 간부 포함), 사무실 직원의 월급은 6000위안 이상, 노무근로자는 5000위안 좌우이며, 지금도 조선족의 수요는 무한이다. 연길 기준으로도 일반 국가 공무원의 봉급은 5000위안 이상, 일반 직장인의 월급은 3000위안 이상이다. 중국은 봉급 외에도 장금(奬金)이 많아 기본 월급을 몇배 초과할 때도 있고, 퇴직금은 3000위안 이상이다. 젊어서 정직하게 출근하면 노후 생활은 근심이 없다. 한국에 나올리 만무하다.이런 시대 변화에 맞춰 우리 조선족은 어디로 가야 하나?“시각장애인만 장애인이 아니다. 비전이 없는 사람도 장애인이다.”어느 철인의 말이 생각난다. 필자는 아래와 같이 제시하고자 한다.첫째, 중국으로 돌아가자. 제 18기 3차 회의의 결졍에 의하면 중국의 토지정책이 변하는 것 같다. 농호들이 경작하던 토지, 잔류지도 팔수 있는 조짐이 보이고, 농촌에서 60세 이상 노인들은 양로 보험금을 되돌려 받을 수 있다.조상들이 일구어 놓은 동북삼성, 내몽고의 한국 농토의 3배 되는 땅을 되찾아 충북 홍성군 문당리 마을처럼 협동농장을 만들고 ‘새마을 운동’을 하여 유기농 녹색 식품 기지를 후대에게 물려주자.둘째, 재한동포들은 단합하자. 중국이나 한국에서 소외된 군체! 말로만 뭉치지 말고 갑론을박의 국면을 타개하여 진정 활기가 넘치는 동포 공동페를 만들자, 지난 12월 8일 한중타임즈 이영한 사장에 의해 동포단체들의 공동주최한 ‘제1회 재한동포군영만회’는 그런 측면에서 의미가 깊었다고 본다.셋째, 옳고 그른 것을 바로 알고 피해근성에서 벗어나자. 조선족사회는 부실 여행사, 부실 언론사, 부실 학원 등의 소행으로 많은 폐단을 겪고 있다. 그 결과 정부정책에 대해 고마움 보다 반대 목소리를 높이는 성향이 있다. 우리는 한국정부의 노고도 이해하며 평가하여야 한다고 본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동포세계신문에 있습니다. 무단전재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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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2-18
  • [류대식 칼럼]조선족인구의 격감세를 두고
    □ 류대식 조선족 인구의 격감세를 두고 비상이 걸렸다. 그래서 연변자치주에서는 둘째를 낳으면 정책적으로 혜택을 주자고 여러번 정부회의 때 제안이 올라왔다고 한다. 2010년 제6차전국인구보편조사에 의하면 조선족 인구는 183만 명으로 2000년 192만 3천명에 비해 약 10만이 감소해 중국 56개민족 중 유일하게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는 민족이 되었다. 그래서 30년후면 조선족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들고 60년후면 조선족이 사라진다는 추론도 나오고 있다.조선족 인구가 왜 감소되는 걸까?필자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다.첫째 원인은 저출산이다. 아이를 많이 낳으면 인구가 늘어나고 아이를 적게 낳으면 인구가 줄어든다. 아주 간단한 논리다. 그런데 왜 조선족한테서 저출산 현상이 나타난 걸까 하는 것이다. 통계에 의하면 지금 조선족 도시화율은 69퍼센트로 중국 평균수준의 51퍼센트를 앞서고 있는데 이미 세계 선진국수준에 이르렀다. 현대사회에서 도시화율은 사회발전의 체온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교육정도와 문화수준도 중국에서 줄곧 앞자리를 차지하며 중국 사회발전의 선두에 서서 발전해왔다. 이런 의미에서 놓고 볼 때 조선족사회는 이미 많은 면에서 세계 선진수준에 접근하고 있거나 그 문턱을 넘어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개혁개방 이후 사람들의 관념은 어느 민족보다 빠른 변화를 가져왔고 따라서 보다 많은 시간과 정력 물력을 삶의 질과 향상 자아가치의 실현을 추구하는데 투입하게 되었다. 그러니 자연 저출산일 수밖에 없다.보면 낙후한 지역일수록 인구성장률이 높으며 발달한 지역일수록 저출산, 저인구 저성장이다.둘째는 대외혼인이다. 대외혼인은 두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국제혼인이고 하나는 국내 타민족과의 혼인이다. 조선족인구 마이너스 성장에서 대외혼인의 영향에 대해 중시를 돌리지 않고 있는데 사실 대외혼인은 조선족 인구 마이너스 성장의 '블랙홀'이다.먼저 국제혼인을 말해보자. 개혁개방이후 조선족사회에서 국제혼인이 나타나기 시작해서 중한수교이후 그 수가 폭발적인 증가를 가져왔다. 국제혼인에서 대부분은 조선족 여성이 경제적으로 발달한 국외에 시집가는 것이다. 통계에 의하면 2001년부터 2011년까지 대개 10만안팎의 조선족 여성이 외국인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서 볼 점은 조선족인구의 마이너스 성장 수치인데 2000년부터 2010년까지 감소된 인구수가 10만이다. 그러니 만약 국제결혼이 없었더라면 조선족인구 마이너스 성장 현상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고, 만약 이런 여성분들이 평균으로 아이 하나만 낳는다 해도 조선족인구는 오히려 10만이 증가하게 되는 플라스 성장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그 다음은 국내 타민족과의 혼인인데 이에 대해 통계는 없지만 유의하여 살펴보면 이 숫자도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집안을 살펴볼 때 나는 친형제에 사촌까지 합하면 23명인데 타민족과 결혼한 사람이 4명이나 된다. 그러니 타민족과의 결혼이 20퍼센트에 이른다는 얘기다. 주위를 살펴보면 어느 가정이나 타민족과의 혼인하는 일이 다 있다. 그런데 국내에서 타민족과의 혼인을 구체적으로 분석해보면 특수성이 있다는 것이다. 조선족여성이 타민족에게 시집가면 그건 두말할 것 없이 인구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이고 조선족남자가 타민족 여자와 결혼했을 경우 겉으로 볼 때 사람을 벌어들인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조선족은 소수민족이기에 남자쪽에서 서서히 여자쪽으로 동화되어 버리고 그 후대는 호구상에는 조선족이어도 많은 경우에 타민족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국내 타민족과의 혼인에서 조선족 인구의 소실도 국제결혼에서 소실되는 수치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 않다.셋째는 싱글현상이다. 중국사회가 발전하고 경제상황이 좋아지고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싱글들의 수도 놀랍다. 한국은 지금 25퍼센트가 '나노(nano)가족'(일인가족)인데 조선족도 그만큼은 안될 것 같지만 싱글들의 수가 상당히 많다. 20년전에는 20대 후반이 돼야 노처녀, 노총각 소리를 들었고 10년전에는 30대 초반, 중반이 돼야 노처녀, 노총각소리를 들었는데 지금은 40안팎이 되어야 노처녀, 노총각소리를 듣는다. 그만큼 관념이 많이 변했고 혼인이 늦어지고 심지어 평생을 결혼 안하는 싱글들이 많아지니 조선족인구 저성장에 설상가상이 되는 것이다.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조선족인구가 격감되는 추세를 완화하거나 막을 수 있을까?첫째는 물론 많이 낳는 것이 관건이고 상책이다. 그러자면 연변주에서 검토하고 있는 것처럼 정부차원에서 혹은 민간차원에서 생육에 대해 정책적으로 경제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하나의 좋은 방법이다. 동시에 언론 매체에서 여론을 조성하고 적극적으로 성원하여 관념상 전환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금 주위를 살펴보면 경제상황도 좋아지면서 "그래도 자식이 제일 큰 재산이다","마지막에 남는 것은 자식밖에 없다"...등 생각들이 많아 둘째를 낳는 수가 많아지고 있다. 둘째는 대외혼인 현상을 가능한 줄이는 것이 인구감소를 막는 방도가 아닐 수 없 다. 자고로 사랑에는 경계선이 없어 대외혼인 현상이 생기지 않을 수 없지만 조선족 경우는 그 비례가 너무 엄청난 것이다. 중국사회도 이제는 많이 발전되어 살만하니깐 국내에서 조선족끼리 '평등관계'를 이룰 수 있는 혼인을 될수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금의 혼인을 보면 감정도 감정이겠지만 물질적조건이 사람나름으로 차이를 보이며 전제로 되고 있다. 국제혼인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사실 발달한 나라에서 뒤떨어진 나라에서 혼인자를 찾는 경우 대부분은 그 나라에서 장가를 못가서 국제혼인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현실을 정시하고 기대치와 엇비슷하게 맞는 대상자를 찾아야 행복하지 그렇지 못할 경우 장미빛 꿈은 깨어지고 인생행복지수가 낮아지고 지어 불행하게 된다.생활은 구체적이기 때문에 지난세기 90년대처럼 맹목적인 국제혼인을 피한다면 개인적으로도 행복할 것이고 조선족인구증가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국제혼인에서 큰적자가 생기는 국면을 돌려세우려면 우리도중국보다 뒤떨어진 나라에서 신부감을 물색하는 것이 하나의 방도이다. 이것은 실질적으로 인구를 버는 것으로 된다.그리고 타민족과의 혼인을 보면 많은 경우에 합당한 한민족을 못찾아서 타민족과 결혼하는 경우가 많다. 조선민족은 자고로 민족 자부심이 아주 강한 민족이다.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우리민족과 혼인하려 한다. 그런데 중국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조선족들이 전통집거구를 떠나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있으니 합당한 우리민족을 찾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져 타민족과의 혼인하는 일이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여러 가지 플렛폼을 만들고 기회를 제공하여 우리민족 혼인의 가능성을 높여주는 것이 문제해결의 고리가 되는 것이다. 지금은 정보화의 시대고 네트워크시대라 얼마든지 가능할 수가 있다. 지금 많은 지방에서 정기적으로 조선족 우리민족 혼인을 위한 모임 같은 것을 만들고 있고 사이트들에서도 전문란을 개설하고 있는데 활동이 더 활발해 졌으면 좋겠다.셋째는 싱글 문제인데, 이 문제 해결에서 전통 가정관념이 관념이 강한 가정 이상분들의 '교육'과 '압력'이 제일 효과적일 것이다.총체적으로 갖은 방법으로 인구감소세를 막아 어렵사리 자리 잡고 가꿔온 중국이라는 이 터전에서 우리 조선족이 세세손손 계속 이어나가고 번영하고 창성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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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2-04
  • [이성기 칼럼]70-80后 중국동포, 이젠 자녀와 함께 한국행
    한국에 체류할 수 있는 재중동포 중 방문취업 약 30만명(쿼터제), F-4 재외동포 약20만명 추산… 이외에도 재외동포법이 통과되고 나면 재중동포의 한국행은 더 수월해 질 것이고 장기간 한국에 체류하는 동포의 수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과거 한국에 입국하였던 1세대 재중동포의 경우 한국정부의 비자정책에 따라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하였지만 점차 폭이 넓어지고 있는 법무부 정책에 따라 재중동포의 가족이주 한국행이 늘어만 가고 있다.70-80后라 불리우는 세대들은 대다수 결혼을 하였고 또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세대 들이다. 이들 젊은 세대들은 대다수 부모와 떨어져 청소년, 유아기를 보냈던 불운한 경험이 있는 재중동포 세대들이다.이들은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것이 어떠한 문제점을 발생시키고, 그것이 얼마나 고통 스러운지를 스스로 체감하며 성장한 세대들 이기에 이들의 가족에 대한 욕구는 더 강할 수 밖에 없다.한국 정부역시 과거와 달리 부모 중 한사람 이라도 한국에서 합법적 장기체류 비자를 가지고 있을경우 만18세 미성년자 자녀에 한해서는 부모가 한국에 체류하는 기간만큼 자녀역시 동반 체류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인구 산아제한정책에 따라 중국에서는 小황제라 까지 불리우는 한세대 한자녀가 많으며 이들 小황제들은 생활전선에 뛰어든 부모를 대신하여 퇴직 년령이 넘어선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보살핌 속에 성장하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한국 정부는 올해부터 재중동포 중 만60세 이상 대상자에게 조건없이 한국에서 장기간 체류할 수 있는 F-4 비자를 발급하여 주고 있다.이는 과거에는 자녀들이 한국에 나가 일하는 시간동안 부모들이 고향에서 손주. 손녀를 대신 돌보아 주던 풍토가 이젠 변화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시사한다.특히나 한국행에 따라 발생되었던 재중동포의 높은 이혼률의 원인 중 한가지였던 가족이 떨어져 지내며 발생되었던 문제점이 이젠 한국에서 재중동포의 가정이 형성되어 더이상 부모는 한국에서 , 자녀는 중국에서 떨어져 지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부모의 손길이 필요한 성장기 어린이 들에게 부모의 품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 되었기에 과거 발생하던 이혼률도 줄어들 것이며, 자식의 성장을 눈앞에 두고서 보다 성실히 가정을 이끌어 나가려는 부모의 욕심도 늘어날 것이므로 이혼과 가정해체 라는 극단적 상황이 많이 줄어들 것이라 생각된다.또한 60세 이상 고령 재중동포의 한국행이 자유로워진 만큼 부모들은 불안하게 남의손에 자녀들을 맡기지 않고, 할머니. 할아버지손에 자녀들을 보살피게 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른바 3세대 전가족의 한국 체류가 먼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실제로 이미 많은 수의 젊은 재중동포 부부들은 한국에 출국하기에 앞서 자녀동반 비자를 신청하고 있으며 그 수가 매우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자기 자녀와 함께 한국에서 생활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교육, 육아, 의료 등 해결하여야 할 문제역시 산적해 있다.수요가 많아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공급이 늘어나느 시장경제 원리상 재중동포 자녀들을 위한 교육시설과 재중동포 맞춤형 의료시설 등이 늘어날 것으로 생각된다.한국에서 장기체류 할 수 있는 비자정책의 완화는 굳이 영주권이나 한국국적을 획득하지 않아도 원하는 만큼 한국에서 장기간 체류할 수 있는 상황으로 변화하고 있다.이는 가족체의 거주공간의 변화와 성장하는 자녀들의 교육환경 등 많은 변화를 시사하는 점이다.어떠한 결과가 만들어 질지는 모르나 과거 일명 “수업료”라 불리우던 과거의 잘못된 관행들이 줄어들어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한국생활을 위한 정보공유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지 않나 생각한다.적어도 우리 부모세대들과 그 자녀들의 고통을 자라나는 3세대 자녀들에게 까지 물려줄 필요는 없는 반복할 수 없는 절대적인 일이니 말이다.칼럼니스트 - 이성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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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1-24
  • 소중한 추억
    서울의 거리는 노랗고 붉게 물들어 완연한 가을이다. 오가는 차들과 아름다운 거리를 거니느라니 한국에 온지 어언간 여섯번째 가을을 맞는 이시각 저도 모르게 숨 쉴 틈도 없이 달려 온 자기를 뒤돌아 보게 된다.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후 무던하고 말수가 적은 남편은 언 제나 저의 의사를 잘 따라 주었으며 시골에서 아들들의 공부 뒤바라지를 하느라고 경제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여준 그였다. 힘들고 벅찬 나날들을 다 넘기고 출국이 자유로와 지면서 남편이 먼저 고령 동포로 입국하여 시골에서 토마토 농장에서 일한 석달 노임 270만원은 사장이 잠적하여 못받기도 하고 나주의 뱀장어 양식장에서 일하기도 하다가 만 삼년이 되여 고향에 갔다 온 후에는 천안의 양돈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여 체류 자격을 변경하고 그 곳에서 계속 일하고 있다. 매일 굴암퇘지와 새끼 돼지 백 여마리를 먹이를 주고 돼지우리를 청소하고 설사를 하는 돼지 새끼들은 제때에 주사도 놓으면 정성 들여 키워야 함은 물론이고 돼지 분변 냄새가 코를 찌르는 돈사에서 일하기란 쉽지 않다. 다행이도 남편은 비염이 심해서 어지간한 냄새는 모르고 지독하게 냄새가 나야 아니 그나마 참을만 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여지껏 살아 오면서 난 그이를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그의 내심 세게와 그에 대한 관심이 적다고 생각하며 마음이 알짝지근해 난다. 내 마음속엔 아들들의 전도만 생각하고 일군으로만 생각한 내가 야속하고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여 번 돈은 응당하다고 받아 들이고 가정의 계획과 노후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작년 가을부터 남편을 생각하여 홍삼정을 사서 보내 주었으며 봄과 가을에 주기적으로 복용하고 하였다. 우리 가난이 지겨워 고국에 와 돈을 벌어 경제적으로 부를 이루어 아파트를 사고 자식들의 교육비도 대면서 좋은 것을 얻었지만 단란하게 모여 살지 못하고 서로 그립고 고독한 생활을 해나가는 것이 비일비재다. 오늘 생각해 보니 얻은 것도 많고 희생도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도 열심히 일한 남편에게 수고 많으시다고 사랑의 메세지 전하고 싶다. 감 천 2013년 10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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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13-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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