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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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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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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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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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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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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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외견문 시리즈 (5) 아프리카 인상기
    <첫부분>1992년 6월 말부터 8월까지 내가 승선한 선박 “코리안스타”호는 “연탄동네”로 불리우는 아프리카7개국에 대한 항행코스를 밟게 되었다. 스켓쥴은 모로코,모리타니, 코트디바르(상아해안), 카메룬, 가봉, 나이지리아이렇게 쭉 잡혀 있었는데 남미주의 포클랜드 해상에서 싣고온 냉동 물고기들을 이런 나라들에서 하역하기로 되어 있었다. 본선이 스페인의 라스팔마스항을 출항하자 선내 방송은 다음과같은 유의사항들을 전달하였다. “선내에 알려드리겠습니다.선내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싶이 본선이 향하는 아프리카입니다. 각 부서들마다 자기의 관할구역 내의 물건들을 잘 간수하기 바랍니다. 그외 매 선원마다 해상경찰 및 세무관원들과의 충돌을 될수록 피면해 줬으면 고맙겠습니다. 거듭 말씀 드리겠습니다…” 라스팔마스에서부터 아프리카 모로코까지의 항행시간은 하루밖에걸리지 않는다 했다. 선내는 삽시에 분주해졌다. 뎃기(갑판)에서는 사처에 널려있는 각종 공구들과 바줄, 심지어 도람통까지 다 창고에 챙겨 넣고는 큼직한 자물통을 잠그었으며 엔징룸(기관실)에서는 출입문 하나만 남겨 놓고는 다른 문들은 몽땅 봉해버리는 것이었다. 그외 내가 근무하는 주방은 일거리가 곱절 많았다. 당시 주방에는 쌀, 기름, 양념과 그릇 등이 가득했는데 예전에는 그 어떠 나라와 항구에 들어갔어도 시시껄렁한 그것들이 잃어질까봐 신경써본적은 한번도 없었다. 헌데 아프리카 사정만은 달랐다. 일단아프리카만 들어서면 정부관원으로부터 빈민굴의 아낙네들에 이르기까지 줄을 쳐서 선박에 오르군 했는데 그네들은 눈에 보이는 물건만 있으면 그것이 자기들한테쓸모가 있건 없건 간에 훔친다는 것이었다. 옷가지, 야채와쌀, 그릇은 물론 자기들이 쓸 줄도 모르는 숟가락, 저가락과먹지도 않는 고추가루까지 닥치는대로 훔치다기에 모든 것을 잘 보관하고 지켜야 했다. 주방장인 나와 싸롱뽀이(주방조리수)는 주방에서 임시로 쓰는 약간의 부식과 그릇만 남겨 놓고는다 창고안에 집어 넣었으며 하루 세끼 식사시간 외에는 주방과 식당에 자물통을 꽁꽁 잠그기로 했다. 이렇듯 한심한 아프리카였기에 한국선원들은 흑인들의 속과 몸뚱아리가모두 연탄처럼 검다 해서 아프리카 동네를 “연탄동네”라고 불렀다. 모로코에서의 첫 인상 본선이 모로코의 시디스얼크항에 입항하자 확실히 다른 세상이라는감이 확 들었다. 부두에서 작업하는 인부들은 일색으로 새까만 흑인들이었는데 어쩐지 그곳 하늘까지도 거멓고흐리터분해 보였다. 입항작업이 완료되자 아니나 다를가 숱한 흑인들이 본선에 올랐다. 그들은 우리를 보자 바람으로 “마이프랜드(나의 친구)”라고 부르면서 시가렛(담배)부터빌었다. 그들한테 담배 한가치씩 나누어 주노라니 말보로 담배 한곽이 삽시에 거덜이 났다. 그리고 담배 한가치라도 주면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베리굿, 베리굿”하다가도 일단 주지 않으면 눈알을 희번덕거리며 흉한 상팜대기를 드러내 보이군 했다. 나는 그런 새까만인종들과 처음 상종하는지라 어쩐지 슬그머니 무서워났다. 그래서 그네들을 달래느라고 담배와 먹을 것을나누어주었지만 우르르 몰켜드는 그들의 수요를 도무지 만족시킬 수가 없었다. 가진 놈은 그래도 인사나마하고 가지만 못가진 놈은 그 모두가 눈알을 굴리면서 주먹까지 내흔들어 보이는것이었다. 바로 그럴 즈음통신장 이덕수씨가 다가오더니 “이 깜둥이 씨팔놈들아, 턱도 없이 지껄이지 말고 썩썩 물러가라”하고 꽥꽥소리치며 그것들을 쫓아 버리고는 나한테 다음과 같이 일깨워 주었다. “주방장 김형은 잘 몰라요.저 깜둥이 놈들을 불쌍히 여길 필요는 털끝만치도 없다구요. 불쌍하다고 아무리 줘봤자 거것들은그걸 모르는 놈들이고 아무리 떼부자라 해도 저 놈들을 구제하노라면 자신이 망해요. 알겠습니까?” 그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니였다. 후일 볼라니 나한테서 빵이나 얻어먹은 놈들도 그 때뿐이지 이튿날이면 그 상이 장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밥이나 음식찌꺼기 같은것을 버리면 버렸지 깜둥이들한테는 주지 않기로 작심했다. 그래서 매일 세끼의 식사가 끝나면 나와 싸롱뽀이는 음식 찌꺼기들을 비닐봉지에 담아서 바다에 처넣어 고기먹이로되게 했다. 헌데 그것도 깜둥이 놈들이 눈치챘다. 그들은곧잘 바다에 뛰어 들어 그것을 건져가군 했다. 그러던 중 한번은 내가 뭔가 바다물에 던지는 걸 본 깜둥이들은몇놈이나 물에 뛰어들어 서로 헤염치면서 그걸 빼앗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누구도 그걸 챙기지못하고 산산히 흩어져 버리자 자기네끼리 싸우더니 나중에는 육지에까지 올라 치고 박고 했다. 퉁퉁 붓고얻어터지고 하면서 말이다. 참, 준다는 것에 인색한 내가나쁜 인간인지? 하지만 고까짓남이 던지는 먹을 것을 두고 싸우거나 기회를 보아 훔치는 그만한 노력이면 일거리나 찾아하면 더 나을 것이 아닌가?… 한편 입항한 그날밤, 우리는각각 택시에 나누어 앉아 시내로 향했다. “연탄동네”라고는 하나 시내는 부두와는 달리 퍼그나 깨끗했다. 야자수들이 길옆에 줄지어 늘어섰고 우리 나라 신강에서나 볼 수 있는 아랍식 건물들이 잘 조화된 정원과 함께들어섰는데 고층건물은 별반 없고 그 거개가 3층 좌우로 무척 아담져 보였다. 그리고 도로 양켠에는 이슬람교 신자들이 음식을 차려놓은 뒤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는 정경을 가끔씩 볼 수있었는데 시내에 들어 갈수록 아랍인종 같기도 하고 스페인 인종 같기도 한 사람들을 많이 볼 수가 있었다. 아무리흑인들이 모여사는 “연탄동네”인 아프리카라 하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 모로코, 이집트, 리비아, 알제리등 부분적 나라들은 확실히 백인 인종비례가 적지 않음이 분명했다. 달리던 택시는 어느 한 차이나레스토랑(중국식당)앞에서 칙ㅡ하고 멈춰섰는데 이는 대리점의 에이젠트가 미리예약해놓은 것이었다. 들어거며 볼라니 이상한 것은 출입문에서 경비를 서는 수위가 작은 구멍으로 내다보고는 우리가 흑인이 아님을 확인하고야 출입을 허락하는 것이었다. 통신장 이덕수씨의 설명에 따르면 아프리카의많은 고급요리청들에서는 고위급 관원외의 지방인들은 언행이 난잡하기에 될수록 그들의 출입을 불허한다는 것이었다. 매출을올리기는커녕 뭐 이미지가 손상 받는다나? 순간 나의 머리속에는1920년대 상해의 어느 한 공원 문어구에 “중국사람과 개는 들어오지 못한다”는 패쪽을 걸었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참, 흑인들이 모여사는 제나라 땅에서 이런 식당에도 출입할 수 없다니. 이건 순전히 스스로 자기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진작 대기하고 있던 접대원 아가씨들이 반겨맞아주는것이었다. 말이 중국인 요리청이지 주인외 요리사와 시중군, 접대원은몽땅 흑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만든 새우튀김, 튀긴 물만두, 닭고기완자 등 음식들은 진짜 중식으로서 생각과는 달리 그 맛이 별맛이었다. 중국인 요리청에서 한끼 만포식을 하고 나온 우리는 그 곳에서멀지 않는 디스코클럽으로 향했다. 디스코클럽에서도 흑인남자들을 들여놓지 않기는 마찬가지었다. 입장권은 미화 20불, 꽤비싸다는 감이 들었고 그 입장권 외에도 경비원들은 담배나 선글라스 등을 줘야 우리가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때는 한창 한밤중이라 클럽안은 술 마시거나 춤을 춰대는 남녀들로북적됐다. 그럼에도 우리 코리아맨들이 들어서자 아가씨들이 확 몰켜 들었다. 하긴 유럽이나 북미의 선진국들에 가면 반야만인 취급을 받는 한국인들이었건만 동남아나 남미, 그리고 아프리카 등 곳에서는 꽤나 인기가 높은 한국선원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밖에 모로코도 원래는 이집트이나 리비아처럼 이슬람교를 신앙하는나라로서 술집과 창녀가 범람하는 것을 엄하게 단속하는 나라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헌데 나라경제가 계속부진상태에 있는데다 많은 소녀들이 스페인이나 프랑스쪽으로 몸팔러 가는 통에 남녀사이의 성비율이 크게 파손되어 혼란을 조성하고 있기에 부득불 나라경제와무작정한 소녀출국을 제한하기 위해서도 술집과 창녀가 들어서는 것을 방관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하지만그렇다고 다른 나라들처럼 드러내놓고 아가씨를 꼬시는 것까지는 허용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아가씨와 오입 한번 하자면 반드시 경찰한테와 아가씨들의보스한테 돈을 찔러줘야 했는데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찰과 범죄자는 한 형제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가 그날밤 많은 선원들이 아가씨 보스한테 돈을찔러준 뒤 경찰과 아가씨 한명씩 차고서 호텔행을 했는데 이튿날 아침에 볼라니 그 모두가 안전한 몸으로 귀선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 일행 거의 모두가 하루밤 사이에 적으만치 200불 이상씩 썼다고 하니 무슨 놈의 오입값 그다지도 비싸단 말인가! 참좆나게 번 돈 좇나게 쓴다더니 아깝지들 않는 모양이지? 좀 참으면 될 걸 갖고서. 도적개 코가 센 나라 모로코에서 출발한 본선은 선수를 모리타니쪽으로 돌렸다. 모리타니ㅡ 본선이 그 나라 해안쪽으로 접근하기 시작하자 저 멀리 사하라사막으로부터 불어오는 모래바람(일명 황사)으로 하여 그 곳의 하늘은 새뽀얗고, 깨끗하던 갑판과 선교는 뽀얀 먼지로 한벌 뒤덮였다. 모리타니 노와디브항에 입항하니 역시 아프리카 땅인지라 대체상모로코와 엇비슷했지만 험한 쪽으로 말하면 다른 점도 많았다. 우선 그 나라의 부두를 놓고 말하면 위생환경이불결하기가 말이 아니어서 입항한 그 시각부터 숱한 쉬파리 떼들이 선박의 주방과 식당에 몰켜들었고 밤만 되면 쥐들이 바줄을 타고 선박으로 기여 드는것을 수시로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미리 준비했던 특별약으로 연기를 피워야 했고 주방과 식당 및 부식창고의곳곳에 쥐약을 놓았는데 파리를 잡을라치면 한번에 수천마리씩 잡을 지경이었으며 쥐도 매일 수십마리씩 잡아 쓰레기더미속에 던져넣을 정도였다. 특히 약을 먹은 쥐들은 제자리에서 죽는 것이 아니라 한동안 지랄을 하다가 죽다보니 물독에 빠져죽은 놈으로, 냉장고 뒤 구석에서 죽은 놈으로 벼의별 것들이 다 있었는대 물독 같은 곳에서 죽은 것은 쉽게 찾을 수 있었으나구석에서 죽은 놈은 제때에 찾지 못했기에 며칠 뒤면 그것이 썩어서 악취를 풍겼기에 그것을 찾노라고 냉장고나 테이블같은 것을 뒤집느라 진땀을 빼군했다. 그러던 중 한번은 주방조리수가 식당안을 청소하다가 새된 소리를지르기에 뛰어 들어가 봤더니 글쎄 적으만치 고양이만큼 큰 쥐 한마리가 술에 취한것처럼 이리 비틀, 저리비틀 하며 다니는 것이 사람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이었다. 우리 둘은 급기야 주방에서 삽 한자루씩 갖고는 쥐한테로 다가갔다. 헌데 내가 면바로 대갈통을 겨누고 친다는 것이 빗치자 그 놈의 쥐가 어정어정할 때와는 달리 감때 사납게 달려드는것이 한메터씩 길이 길이 높이 뛰었다. 그 이빨, 끝이뽀족하고 길이가 큰 마늘쪽 만큼이나 될 듯한 그 이빨에 물린다면 손목도 뭉청 뭉청 잘려 나갈 것 같았다. 우리둘은 쥐를 한가운데 놓고 소리를 치며 혼전을 벌였는데 나중에 다른 선원들이 달려와서 협조해 주어서야 겨우 그 놈을 때려 잡을 수가 있었다. 또한 삽이나 쇠몽둥이 같은 무기가 있었으니 망정이지 빈손으로는 그 누구도 그놈한테 접근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 놈을 때려잡고 나니 긴장이 확 풀리면서 식은 땀이 쫙흘렀고 온 몸이 해나른해져 일할 힘도 나지 않았다. 그외 모리타니는 철두철미한 이슬람교를 믿는 나라로서술집과 창녀같은 건 보고 죽자해도 없었고 음식점 같은 것도 극상해서 음료수와 콜라같은 것을 경영할뿐이었다. 또한봉쇄정책이 어찌도 심한지 달러같은 건 일률로 에이젠트한테 가서 본국화페와 교환하고서야 외출할 수 있었는데 그 환률은 너무도 보잘 것 없어 100불을 바꾸어 봤자 두셋이서 술도 없이 한끼도 먹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일단 달러를 감춰갖고 시내로 들어가면 그 수요자가 엄청나게 많아 암달러 거래가 몹시 성행했고 그 환율은 은행보다 몇배나 더 높다고들 했다. 노와디브에 입항한 이튿날 저녁, 어디서나 외출하지 못하면 몸살이 날 것만 같아하던 통신장 이덕수씨, 냉동사한경오씨, 그리고 갑판원 양일선씨 이렇게 3명 선원이 캪틴(선장)이 그토록 주의를 주며 제지시킴에도 불구하고 끝내 외출하였다. 아니나 다를가 얼마 있지를 아니하여 냉동사와 양일선씨가 어깨가 축 처지여 귀선했는데 물어보자 마나 몸에 지녔던달러와 선원수첩 및 여권을 몽땅 빼앗겼던 것이다. 그쯤하면 그래도 괜찮았지만 글쎄 이덕수씨가 경찰에구속당했다고 하니 난리난 것이 아니겠는가. 그네들의 말에 의하면 미화1000불을 벌금해야 통신장이 풀려 나올 수 있다 하는데 아프리카, 특히 모리타니 사람들한테서는시비고 일리고 일절 통하지 않았다. 그네들이 “야!” 하는일은 괜찮았으나 일단 “NO”란 말 한마디면 하느님도 용빼는 수가 없었다. 결국 본선에서는 억울한대로 벌금 1000불을 내고서야 통신장과 그일행이 빼앗긴 수첩과 여권을 빼내올 수가 있었다. 빼앗긴 달러는 그냥 빼앗긴채로였고 그 사건으로 하여후일 중국선원인 양일선씨는 검토서를 쓰고도 하마트면 강제귀국조치에 걸려들면 했는데 그 곳이 아프리카가 아니라 유럽이나 동남아쪽으로 중국과의 항공선이가능한 곳이였다면 낙자없이 실행될 것이 분명했다. 모리타니 사람들이 안하무인격이라는 말은 그들이 배에 올라와임무를 수행할 때에도 표현되었다. 본선에 오른 세관 경찰들은 그 때까지도 우리 중국서 30~40연대에나 썼을까 하는 싸창을 차고노끈이 달린 보총을 메고서도 자기네 나라가 세계에서 제일 막강한바 아메리카(미국)와 싸워도 이길 수 있다고 우쭐렁거렸다. 그러면서도 늘 크나큰 배낭같은걸 갖고 다녔는데 쌀, 음료수, 과일 같은 것이 보이면 아무런꺼리낌도 없이 집어넣군 하였다. 이에 우리가 나서서 좀 제지시킬가 하면 그들은 다짜고짜로 경찰국으로가자고 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아침에 썼던 밥그릇들이 점심에 밥상을 차리자고 보니 엄청나게 모자랐다. 그날 본선에 오른외인이라고는 세관원 한명뿐이었는데 그래 그 자식외 또 누구를 의심하겠는가 나는 누구도 몰래 그 자식이 보꾸레미를 둔 방에 가서 그 것을 헤쳐 보았다. 아니나 다를가 그 안에는 잃어진 그릇들이 그래로 있었다. 하지만나는 그것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가 없어 통신장한테 그 사실을 반영했다. 그러자 통신장 이덕수씨는 즉시선장방에 있는 그 자식을 불러내서는 따지고 들었다. 헌데 뻔뻔스럽기를 글쎄 실물이 드러났음에도 자식은한사코 부정하면서 다른 한국선박에서 선물받았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참 아침에 올 때만 해도 빈꾸레미던것이그 안에 꼴똑 들어찬 쌀, 식용유, 과일과 그릇 모두가 본선의 물건임에 번연함에도 우기다니도적개 코가 세다는 말이 조금도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나중에는 그놈이 도리여 우리를 훈계하면서 또 경찰국으로가자는데야 진짜 어처구니가 없었다. 쌀과 식용유 같은 건 아껴 먹으면 그만이겠지만 밥그릇이 모자라면진짜 야단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 연변의 농촌들처럼 큰 대야같은 그릇에 밥을 떠준다면이내 주방장 얼굴이 열개라도 그 까다로운 한국선원들한테서 보존하기 어려울 것이 뻔했다. 또한 아프리카에서는도무지 그런 밥그릇을 구입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별 수 없이 우리가 굽어들어 돈 100불을 주면서 그 자식한테 사과해서야 그 그릇들을 도로 찾을 수가 있었다. 한편 항구측에서는 모든 하역작업이 완료됐음에도 불구하고 질질시간을 끌면서 출할수속을 해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 이유인즉 위생보완을 해준다면서 방역일군들이 와서분무기로 파리약을 몇번 쳐주고는 밥 얻어먹고 돈을 받아 갔으며 갑판의 난간이 조금만 파손돼도 자기네 나라에 들어온 선박은 자기네가 책임져 준다면서대충 용접해주고는 또 돈을 챙겨갔다. 또한 항구에 정박해 있는 선박이 적기에 그들은 그 어떤 선박이든오래동안 붙잡고 있어야 그만큼 세금액도 올리고 다른 풋돈 벌이도 할 수 있겠으니 말이었다. 그러자 본선은그들이 출항수속을 해주건 말건 무작정 부두에서 배를 떼고는 외항에다 앵카(닻)을 내리우고 출항을 기다리기로 했다. 이렇게 외항에 나와 이틀이 지나자 과연 더는 부두세를 받을수 없게 된 항구측에서는그제야 출항수속을 하러 오라는 텔렉스(전보)를보내왔다. 헌데 방정맞게도 날씨가 그닥 좋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모든 것이 시간을 재촉하는지라 선장은 단정뽀트를 타고서라도 기어코 뭍으로 가자고 했다. 그날 뭍으로 떠난 이는 선장, 통신장, 2항사, 2기사이렇게 4명이었는데 안타까운 것은 점점 비가 내리고 바람까지 불어치면서 오후가 늦도록 그들이 돌아오지않는 것이었다. 그러자 안달아난 것은 본선에 남아있는 기관장과 1항사였다. 본선은 앵카를 올리고 선장일행이 앉은 단정뽀트를 찾아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한동안 바다를 헤매고 다녀서야 본선은 한바다에서 부평초처럼 표류하고 있는 단정뽀트를 겨우 발견할 수가 있었다. 단정뽀트가 무사히 돌아올 수 없는 원인은 파도가 치면서 단정뽀트의 기관계통에 물이 차서 더는 엔징을 돌릴 수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자체의 동력을 잃은 단정뽀트는 큰 배를 향해 앞으로전진할 수도, 뒤로 후퇴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문제는큰 배가 단정뽀트한테 정확히 접근하는 것이 관건이었는데 길이 160메터나 되는 육중한 본선이 그 작디작은 단정뽀트한테로 면바로 갖다 대인다는 것이 그토록 쉽지 않았다. 또한 간혹 엇비슷하게 접근했다가도큰 배가 헤가르는 물결에 단정뽀트는 또 다시 200~300미터씩 밀려가기가 일쑤였다. 급해난 1항사는연속 당지 해상경비대에 무전과 텔렐스를 날리면서 구원을 청했고 선원들마다 쉴새 없이 SOS구조용폭죽을하늘로 쏘아올렸지만 모리타니라는 나라는 대체 어떤 나라인지 구조조치는커녕 아무런 답복조차도 없었다. 날은 점점 어두워졌다. 새까맣게흐린데다 비까지 내리어 100미터밖도 분간하기 힘든 해상에서 선원들은 브릿치(조타실)에서 내비추는 탐조등 불빛을 빌어 바다를 주시하면서 단정뽀트의행방을 찾아내군 했다. 허나 그것도 잠간뿐 일정한 시간이 흐르자 가끔씩 나타나군 하던 단정뽀트는 끝내우리의 시야에서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선장일행이 모두 나이프쟈크(구명조끼)를 입었기에 생명위험까지야 일으랴만은 그래도 우리는 가슴이 죄여들며 몹시 불안해났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배는완전히 외항에서 벗어나 한바다에 들어서서 정신없이 표류했다. 바로 이럴즈음 통신실에는 다음과 같은 무선신호가날아왔다. “여기는 러시아 선박 ‘×××’호이다. 여기는 러시아 선박 ‘×××’호이다. 귀선의 캪틴(선장)일행 4명이 본선뽀트에의해 구조되어 본선에 올랐다. 속히 귀선위치를 알려주기 바란다. 속히귀선위치를 알려주기 바란다.” 러시아 선박이 어쩌다가 그들을 발견했을까? 진짜 하늘이 도운 모양이었다. 우리가 본선 위치를 알려준 뒤 약반시간쯤 지나자 아니나 다를가 러시아 국적의 트롤선 한척이 다가오더니 세번 고동을 울리는 것이었다. 이에본선도 세번 고동을 울리여 화답해 주었다… 선장일행은 구원되었다. 다른 나라의 해상같으면 일단 SOS구조신호만 오르면 부두에서 멀지 않은 외항이라 진작 헬리꼽터나 구조선 같은 것이 들이닥칠 것이었으나 아프이카만은특히했는바 남한테 구걸하고 빼앗고 훔치는데는 신고를 아끼지 않았으나 남한테 뭔가 좀 주고 손길을 뻗쳐 자선을 베푸는데는 그렇게도 인색했다. 그것이 곧바로 아프리카였다. 코트디바르에서의 이모저모 아프리카를 놓고 말하면 누구나 다 대체로 흑인들이 많이 모여사는동네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헌데 그중 모로코와 모리타니, 남아공화국 등 나라의 흑인들은 장시기 동안 다른 인종과 혼혈배종이 되다 보니 잡종으로서, 얼굴이 그닥 검지 않고 머리가 길게 자라는 사람도 많았다. 하다면 진짜오리지날(토종)흑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동네는 그래도 코트디바르, 가봉, 나이지리아, 콩고, 가봉, 카메룬 등 나라들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 적도 부근의 나라들에 가보니 그 곳 흑인들은 확실히 새까맣다 못해 해빛에 반짝반짝 빛나는 검은 가죽구두를방불케 했고 머리가 좀처럼 자라지 않아 꼬실꼬실한 것을 보면 진짜 아이들은 남녀를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또한듣는 바에 따르면 그 동네에서는 검을수록 미인선발이나 좋은 직업에 뽑히울 가능성도 크다고 했다. 본선이 코트디바르 수도 아비쟝항에 입항한 것은 그해의 7월 중순쯤이라고 기억된다. 적도 가까이에 있는 나라인데다 가뜩이나여름철이 되다 보니 찌는듯한 날씨가 계속되었으며 낮기온이 자주 40도 이상으로 올랐다. 또한 자연온도도 높지만 그 열기에 선박의 갑판이 달아올라 그 위에서 작업하기란 그야말로 숨이 콱콱 막힐 지경이었다. 뭐, 한국선원들의 우스개 말을 빈다면 그 곳 사람들은 더위에 타서피부가 그토록 새까맣게 됐다나? 아비쟝에는 기이한 현상도 많았다. 시내안의 길가는 물론 부두에까지 도마뱀(우리 이 곳의 도마뱀과는조금씩 달랐음)들이 욱실거렸는데 심지어 바줄을 타고 선박으로 오르는 도마뱀들도 있었다. 그 곳 사람들은 그 도마뱀들을 근본 다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것들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을 뿐더러 사람을해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것들이 부두로 몰켜드는 까닭은 선박들에서 하역할 때 떨어지는 물고기 부스레기같은 것을 주어먹기 위해서라 했다. 한편 신경써야 할 것은 1년치고춘하추동이란 계절변화가 거의 없이 찌는듯한 더위가 계속되는 고장이었기에 우리 나라에서는 열병이라고 하는 말라리아란 병이 몹시 성행했다. 그 병에 걸리는 환자수가 많은데다 예방 및 치료조치가 따라가지 못한데서 10일안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기수부지였다. 우리 나라의 동북과 서북지구에서 성행하는 류행성 출혈열이란 병이사망율이 높은 것처럼 말이다. 하기에 본선에서는 아프리카행을 시작해서부터 매일 점심시간마다 말라리아예방약을 선원들한테 공급했다. 헌데 그 예방약이라는 것도 효과가 없었던지 아비쟝에 도착하자끝내 2기사 서춘철씨, 2항사 정명복 그리고 용정서 간 기관원김영림군 이 3명 선원이 덜컥 이 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증상으로 놓고 말하면 장질부사나 학질로 앓는 환자처럼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우나 이불 두채씩 뒤집어쓰고도 덜덜 잇빨을 맞쪼으면서 춥다고 하는 것이특징이었다. 그외 죽물도 넘기기 힘겨울 정도로 목안의 편도선이 부어 환자의생명은 포도당 점적주사로 겨우 지탱하군 했다. 그래도 대리점에서 각종 경로를 통해 그들을 병원에 입원시키고는좋다는 약을 아낌없이 들이대여 치료했기에 그들 모두가 며칠 뒤에 몸이 완쾌되어 귀선할 수가 있었다. 다음으로 전반 아프리카가 거의 다 그러하듯이 특히 아비쟝은동남아의 태국이나 필리핀, 남미주의 컬럼비아, 브라질,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와 더부러 색정업에는 아주 이름난 동네였다. 여기서주목을 끄는 것은 발달한 유럽나라들과 미국, 일본 등 지역보다도 제3세계나라들에 기생들이 더 많다는 그 점이며 그 발달국에 있는 기생들도 그 거개가 제3세계에서 왔다는 그점이다. 대체 웬일인지? 아비쟝에 입항한 그날 저녁, 우리는 거의 습관화된 것처럼 한국선원들과 어울려 “입항신고(아가씨들과 오입하는 걸 말함)”하고 시내로 향했다. 가닿은 곳은 가라오케 비슷하게 차린 술집이었다. 우리가 택시에서내리자 마치도 정글(열대수림)속의 성성이들을 방불케 하는깜둥이 아가씨들이 줄쳐 나와서는 “무쵸아밍고(스페인어-가장가까운 친구)” 라고 하며 서로 빼앗기라도 하듯이 우리의 어깨에 매달렸다. 또한 “오빠, 내가 이뻐?”, “아저씨, 나 술 좀 사줘” 하고 지껄이는 년들도 있었는데 그런년들이 한국남자들을 얼마나 품어봤겠는가 하는 것은 불보듯 뻔했다. 하지만 뭐 한강에 배 지나간 자리가알린다더냐, 억수로 굶은 선원들은 그 따위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술집안에 들어서자 아가씨를 옆에 끼고 술을 마시는 선원, 가라오케 오디오의 반주에 맞춰 춤을 추는 선원들로 무드(분위기)는 제법 짙어갔다. 그야말로 바다에서 지치고 짜증난 스트레스를 풀길없던 마도로스 ㅡ “배놈”들한테는 이 순간들이야말로 천국생활이나 다를 바 없는 모양이었다. 헌데 그넓디 넓은 홀안을 아무리 휘둘러봐도 흑인남자와 코가 큰 서양사내는 한명도 없고 일색으로 동양계의 한국선원외 필리핀선원들뿐이었다. 이상한 것은 서양사내들 거개가 흑인들에 대해 거들어보지도 않는데 반대로 우리 동양인은 흔히 흑인남자들과는 떵떵큰 소리치다가도 왜 계집에 한해서만은 양년이고 깜둥이년이고 가르지 않고 깔아 뭉개는지? 하기에 동남아나남미, 심지어 이 “연탄동네”의 계집년들마저 기분좋을 때면 “아저씨,오빠” 하다가도 일단 기분만 잡치면 “이 씨팔놈아, 하나 빨아라”하는 등의 한국말을 청산유수처럼하는 것 역시 결코 이상하다고 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주흥이 도도해지자 선원들 거개가 그 술집 뒷울안에 있는 창녀촌으로 향했는데 저마다 아가씨 2~3명씩 끼고 나갔다.참 그 화염같은 욕구를 분출한다 해도 아가씨 한명이면 족하겠는데 왜 저러지? 돈깨나 있다는걸 시사하는걸까?! 나는 창녀촌이라고 하니 중국의 여느 시골처럼 농촌마을인 걸로알았는데 그것과는 달리 그 곳의 창녀촌이란 7~8층쯤 되는 빌딩같은 건물이었다. 실내구조를 보면 방마다 침실, 주방과 화장실까지 곁딸렸는데 이로보아 건물주인이 그것을 창녀들한테 세주어서는 그녀들이 거기서 손님도 맞고 살림도 하게 하는 모양, 그것을아가씨들의 방마다 쌓여 있는 한국산 라면 “안성탕면”이 그걸 충분히 말해줬다. 한국선박이 들이 닥쳤다는 소문이 어느새 흘렀는지 그 이튿날저녁부터는 선원들이 미처 샤와를 마치고 외출을 하기도 전에 숱한 창녀들이 본선으로 몰켜들었다. 그래야돈나무인 한국선원들을 중도에서 채낼 수 있으니 말이었다. 항구규칙을 놓고 말하면 아비쟝항 역시 자유항이아니기에 외출하는 선원들은 쏘페스(임시통행증)가 있어야 했고다른 인원 역시 특별출입증에 의해서만이 그 출입이 가능했기에 창녀들의 출입은 근본 불허라 했다. 허나시책이 있으면 대책이 있기 마련이라 창녀들은 방법도 많았다. 아니 그 방법이란 정문의 수위경찰한테 돈만찔러주면 그저 무사통과였다. 그러니 이런 나라일수록 경찰과 도적은 한형제라는 말이 더 적절했다. 헌데 그날 밤에 사달이 생겼다. 글쎄 깜둥이년 5~6명씩이나 자기 방에 불러 들인 뒤 권커니 작커니하며 술을 굽내던 갑판장 김복야씨가 끝내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침대에서 코를 골자 계집년들은 이 때라 하고 김복야씨의 호주머니에서 열쇠구레미를꺼내서는 옷장이고 서랍이고 침대밑이고 몽땅 뒤번져 놓았다. 그 뒤 돈,담배와 술이며 지어는 옷과 휴지와 비누까지 몽땅 털어간데서 김복야씨는 하루 밤새에 알거지로 되고 말았다. 그외 그 곳의 창녀들 거개가 자작한 만능열쇠를 갖고 있었는바 그것을 이용해서 선원들이 자는 침실로 침범하기가일쑤였다. 그 절차를 보면 우선 만능열쇠로 문을 연 뒤 가만히 기여 들어서는 잠자는 선원들의 몸을 감빨거나 쓰다듬으며 성적충동을 일으키게한다. 그러다 선원이 깨여나서 이에 응하면 몸을 팔고 깨여나지 못할 경우 즉 김복야씨처럼 술취해 일어나지못할 때엔 소탕전을 벌려 돈이고 벽에 걸린 옷이고 박치는대로 걷어 가기가 일쑤였는데 나도 그렇게 당한 적이 몇번 잘되었다. 참, 웬 거동에 침대머리맡의 전등을 켜고 보면 성성이처럼 시커먼물건짝이 흰눈자위와 흰잇빨을 드러내 보이며 헤헤 하고 웃으며 다가드는 것이 어찌도 놀랍고도 무서워나던지… 후진국의 낮은 인간자질, 같은신분의 창녀들이었지만 동남아나 남미의 창녀들은 그 정도로까지는 음특하고 속이 검으며 절라라 하지도 않았다.1991년 6월, 본선이 태국의 방콕에 입항했을때였다. 그 때 역시 수십명에 달하는 창녀들이 본선에 올랐는데 2기사서춘철씨의 파트너였던 그 아가씨의 거동은 진짜 사람을 감동시킬만도 했다. 원체 술마시기를 즐기는 서춘철씨인지라오래간만에 이성을 만나 흥분했던지 술을 과음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가씨가 샤와하는 사이에 침대에서 그만깜박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선창이 희붐히 밝아오고… 하느님 맙소사 그때까지 그 아가씨가 소파에 앉아 턱을 고이고 그가 깨여나기를 기다리는것이 아니겠는가. 그녀의 말을 빈다면 창녀도 인간이고 양심도 있는바 믿음직한 신용과 최선의 봉사로 손님한테즐거움을 주고 그 중에서 자기의 가치를 실현한다는 것이었다. 하다면 그런 기대가 아프리카같은 곳에서는 실현될 수나 있을까? 아니 아프리카뿐 아니라 우리 중국 역시 여자를 내세우고 사기협잡, 살인강탈을일삼는 현상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 외 한국신문들을 보노라면 ×××씨 중국교포 여인이 한국사내와위장결혼을 한 뒤 한국국적을 얻고는 도망을 쳤고 ×××씨 중국교포 여인은 일본손님과 한침대에 올랐는데 손님이 잠든 사이에 돈을 털다가 잡혔다는등 기사들이 늘 실리고 있었다. 그러니 사람의 정신세계를 부식시키는 매음업도 질책받을바지만 여인들의인간성, 즉 우리 조선족 여인들의 자질과 수양같은 것도 한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태국의 아가씨들은 선박에 오르자부터 비자루로 바닥을 쓸고 물걸레로 닦고 하였으며 선원들의빨래에까지 신경써 주면서 몸팔기 먼저 인간성을 보여주었다. 그 때 내가 일하는 주방에도 아가씨 2명이 전문 일손을 거들어 주었는데 비록 살길을 찾아 몸을 파는 비천한 아가씨들이었지만 그로해서 나는 더욱 그녀들을짓밟을 수 없었으며 그녀들이 나를 꼬시지 않아도 내 스스로가 그녀들한테 용돈이나 비누, 휴지 같은 것을주고 싶었다. 하다면 이런 아가씨들의 거동을 어떻게 평가해 줘야 할는지? 하지만 아프리카라는 깜둥이 동네에서는 그럴만한 기대를 한다는건 그야말로 처녀불알을 찾는격이었다. 글쎄 갑판장 김복야씨의 방을 턴 년들이 그 이튿날에도 뻔뻔스럽게본선에 올랐는가 하면 전날 밤의 일에 대해서는 시치미를 뚝 떼며 아닌 보살을 할 수가 있었으니 이가 글쎄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이 아니겠는가. 다음으로 아프리카 “연탄동네”의 정조관념에 대하여 의문되는점이 많았다. 짐승도 암컷 하나를 두고 수컷들이 서로 싸운다고들 하는데 반대로 그 놈의 동네에서는 거의모두가 자기 와이프한테 매음을 강요하는 것 같았다. 그때 본선에는 “넘버쓰리”라는 제3기관조리수가 있었다. 한번은 그가 술집에서 여자 한명을 사귀게 되였는데그러던 그가 그녀가 하도 졸라대는 통에 술과 안주를 사들고 그녀의 집으로 가게 된 것은 그 다음의 일, 헌데정작 그 년의 집문턱을 넘어서니 웬걸 그년은 아가씨기는커녕 진작 아이 셋씩이나 있는 한물 간 갈보였으며 거기에 곰같이 생긴 남편까지 있는 년이었다. 이에 너무도 놀라 넘버쓰리 박씨가 뛰는 심장을 붙안고 급기야 36계를놓으려 하자 글쎄 남편이란 녀석이 막아서며 무릎을 꿇더라는 것이었다. 내일 당장 쫍쫍(먹을것)할 것이 없으니 제발 자기 와이프와 하룻밤만 자달라고 말이었다. 그렇듯 무시무시한 분위기속에서 웬간한 사내들 같으면 다 혼비백산해서 아무런 일도 성사할 수 없으련만 그래도그 넘버쓰리 박씨만은 그 일에 미립이 튼지라 그래도 그 갈보년과 함께 침대에 올랐던 것이다. 그 뒤몇차례의 폭풍이 지나갈듯한 힘찬 섹스공세를 마치고 새벽녁에야 겨우 잠이 들었는데 문득 웬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그래서 벌거벗은채로 눈을 떠보니 아이구 맙소사, 글쎄 그 남편이란녀석이 우는 아이를 달래며 역시 벌거벗은채로 넘버쓰리한테 감겨들어서 자고 있는 와이프를 깨우는 것이 아니겠는가.참, 어처구니가 없기로 삶은 소대가리마저 웃을 지경이었다. 다음, 또 하나의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이라면 아비쟝이라는 그 “연탄동네”에도 필리핀클럽이라는 술집 겸 디스코바로 쓰이는 장소가 있었다. 이는 오랫동안 새까만 인종들과만 상대하여 오던 본선의 오입쟁이들의 두눈을 화등잔처럼 크게 한 것은 두말이면잔소리였다. 아니나 다를가 그 필리핀클럽에 들어서니 과연 동양계 아가씨들이 10여명이 바걸(녀접대원)로일하는 것이었다. 그 속에는 필리핀 국적을 갖고 있는 중국인 아가씨도 한명 있었는데 흰만두처럼 새하얀살결에 인물 또한 핥아주고 싶을 정도로 절색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몸값은 필리핀 아가씨들에 비해 배이상으로될 것이 뻔했고 돈깨나 있다는 한국선원들은 앞다투어 그녀의 몸을 가로탔다가 떨어지군 했다. 그 순서를배열하니 냉동사가 1호였고 그 뒤로 3항사와 2타수였으며 선장은 여섯번째로 됐다. 그네들의 말에 따르면 이는 모두“구멍동서”에 속했는바 선장 앞서 냉동사가 제일 맏형이 돼서 술 한잔 사는 놀음까지 벌렸다. 헌데 그녀와성관계를 가졌던 선원 10여명이 아비쟝항을 떠나 얼마 안되어 남근의 파이프가 질질 새며 임질에 걸려사타구니를 붙안고 시달릴줄이야. 아프리카에 들어가기 전부터 본선에서는 성병을 조심하라고 강조했고 또한매 항구마다에 입항해서부터는 선원들의 건강을 책임진 3항사가 외출시마다 선원들한테 “자 여러분, 장화요 장화” 하며 콤돔 한곽(24개) 씩 나누어 줬건만 선장과 3항사부터 성병에 걸렸으니 문제가 좀 심각하지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배놈”은 상놈이라는걸까?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4-25
  • 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시리즈 3)
    ■김철균 임표(林彪)와 조선인 장병 임표(林彪)라 하면 일종 전기적 색채를 띠는 유명한 중국의 군사전략가이다. 지난 세기 50연대 중국 중앙군사위에서 중국군 직함을 수여할 때 임표는 중국의 10대 원수중 주덕과 팽덕회 다음으로 서열 3번째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다. 임표는 일찍 항전시기 유명한 평형관 전투를 직접 지휘하여 팔로군의 대일작전에서의 첫승을 올렸으며 1948년 11월에는 동북인민해방군을 인솔하여 중국의 가장 큰 3대 전역중의 하나이며 또한 이 3대 전역중의 첫 전역인 요심전역을 승리로 장식한 천재적 군사가이다. 당시 요심전역의 승리로 인해 중국전장의 국공 양군의 군사적 위치는 판도가 선명해졌으며 관내에서 작전하는 공산당군한테 대단히 유리한 형세가 조성되었다. 나의 아버지로 말하면 바로 임표가 통솔하는 동북인민해방군 제10종대에서 근무했다. 아버지에 따르면 요심전역에서 임표는 동북인민해방군내의 조선인 장병들에 대해 크게 신뢰하게 되었고 이 장병들을 관건적인 전투에 잘 활용하였다고 한다. “임표가 조선인을 좋아하고 관건적인 전투에 곧잘 투입한 것은 두가지 생각으로 결정된 것으로 짐작된다. 하나는 한족이 아닌 조선인을 대포밥이나 총알받이로 이용하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인 부대가 아니면 진지를 지켜 내거나 목표물을 공략할 수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확실한 건 없다.” 이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나한테 들려준 얘기이다. 그렇다면 임표가 조선인부대를 시험대에 올린 것은 요심전역의 관건전투의 하나인 금주해방전투와 흑산, 대호산 저격전에 배치할 때부터였다. 당시 유아루(刘亚楼 ㅡ 동북인민해방군 참모장)를 비롯한 많은 지휘관들은 조선인부대를 관건전투에 투입하는데 잘 동의하지 않았다. 조선인부대가 중국혁명에 대해 정서적으로 견결하지 못하기에 즉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당시 임표는 “아니야, 조선인은 비교적 단순해. 중국인과는 달라”란 말을 했다고 한다. 이 역시 지금은 증명할 방법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냥 미스터리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결과 당시 금주해방전투에서 조선인부대는 금주외곽성을 공략하는 혈로를 개척하는 임무를 맡고 놀랄만한 용맹을 과시하였다. 그리고 흑산저격전에서는 아군과는 6배에 달하는 국민당군의 무차별한 진공을 한차례, 또 한차례씩 물리치면서 끝내 진지를 지켜냈다. 그 때 조선인 군인중에는 적의 진공을 물리친 뒤에야 자신의 팔 하나가 오간데 없게 된 것을 알게 된 군인도 있었다고 한다. 이는 거짓말 같은 진실이다. 여하튼 요심전역에서 조선인 군인들의 시험대에 올리면서 “단맛”을 본 임표는 그 위에 있은 관건적인 진공시마다 조선족 부대를 선두에 내세우군 했다. 예하면 천진해방전투에는 조선인퇀을 혈로개척에 내세워 전투개시 24시간만에 전반 천진을 해방하게 하였고 무한에서의 장강도하작전에도 조선인부대를 선봉으로 내세웠다. 그덕에 나의 아버지도 돛배의 선수에서 기관총수로 아군의 돌격을 엄호, 숱한 국민당군을 쓸어눕혔다고 한다. 그 뒤 역시 상서에서의 토비숙청시 난공불락의 토비소굴들을 우회작전과 기습 등으로 소탕해버린 것도 조선인부대였고 해남도 해방전역시 뇌주반도에서 해남도로 건너갈 때 돛배에 포를 싣고 국민당의 군함과 맞다들어 군함을 격퇴시킨 부대도 조선인부대였다. 현재 많은 군사평론가들은 중국 국내전쟁시기의 조선인 부대에 대해 여러 가지로 평가하고 있다. 그 중 이구동성으로 인정하는 건 조선인 부대가 확실히 용맹하고 싸움에서의 능수라는 것이다. 하다면 당시 임표가 조선인 부대를 믿어준 것(?)도 의문스럽고 나의 아버지 역시 썩 후에 이 말을 나한테 들려준 것도 어딘가 짚이는데가 있다. (다음기 계속) 주: 본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4-24
  • 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시리즈 2)
    ■ 김철균 일본인들의 이중성격 생전에 아버지는 늘 이런 말을 하였다. “경우에 따라 맘씨 착한 사람이 엄청 엉뚱한 짓과 지독한 일을 한다. 그리고 엉뚱한 짓을 하는 사람의 뒤에는 꼭 그것을 조종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기실 더 나쁘다.” “사람의 행동과 본질이 다를 때가 많다. 많은 행동이 사람의 본의와 다르게 표현될 때가 많다.” …… 이런 얘기들을 들을 당시 나는 아버지가 말하는 뜻을 해득할 수 없었으며 또한 아버지가 왜 이런 얘기들을 하는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였다. 한시기 일본군 공사장에 끌려가 부역을 한 적이 있는 아버지는 일본인과 많이 접촉한지라 그들에 대해 비교적 아는 것이 많았다. “일본사람 총명하면서도 어질기도 하다. 또한 그것 때문에 이중성격자로 표현될 때가 많다.” 아버지에 따르면 당시 아버지가 부역을 하는 공사장에는 17-18세나 될가 하는 한 일본군 십장이 있었는데 처음에 그는 마음이 착한 나머지 근본 부역자들한테 큰소리 치는 법이 없었고 또한 부역자들한테 어울려 얘기도 잘 나눴으며 또한 가끔씩 부역자들한테 사탕이나 과자같은 것을 나눠주기도 했다 한다. 그리고 맡은바의 책임을 다하지 못해 상급 군관한테서 귀쌈도 자주 맞았으며 그렇게 맞은 날 저녁이면 “엄마”를 부르며 하염없이 울군 하여 아버지를 비롯한 부역자들의 동정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한다. 필경 17-18세 되는, 성인도 되지 않은 소년이라 그는 부역자들의 동정을 충분히 불러 일으킬만한 하기도 했다. 헌데 그가 후일 공사장이 감독이 되면서부터 180도로 돌변했다. 부역자들한테 눈알을 굴리며 호통치는 건 물론 아래의 십장한테 귀쌈을 치는 등 행동을 서슴없이 감행했던 것이다. 몇년전 나는 영화 “남경 대학살”을 관람하고 치를 떨었다. 천하에 가장 야만적인 인종이 일본사람들이라고 저주에 저주를 거듭했다. 사람의 목을 잘라 기둥에 걸어놓고, 임신부의 배를 갈라 총창에 태아를 꽂아 쳐들고, 이미 총을 바친 중국군을 무리채로 사살하고… 헌데 패전 뒤의 일본군들의 양상은 그 정반대였다. 광복 후 당시 미처 제때에 귀국길에 오르지 못한 일본군 패잔병들은 훈춘의 농촌마을에도 거주하고 있었는데 우리 집에도 2명이 있은 모양이었다.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순한 양도 그들보다는 더 순하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삶은 감자라도 배불리 먹여준다고 눈물까지 흘리는 일본인들이었다. 그리고 집안일을 도와 물을 길어주고 나무를 패주며 일을 찾아하던 일본인들이었다. 하다면 마을을 토벌한다 하면 닥치는대로 죽이고 빼앗고 불지리고 하던 일본군과는 너무나도 대조되군 했다. 아버지는 이런 사례를 들면서 일본인들의 이중성격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고 하면서 하나는 상급에 무조건 복종한다는 사무라이 정신의 표현이고 다른 한가지는 착하다 보니 이지를 쉽게 잃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에서 예의가 제일 바른 것이 일본인이라면 지독한 짓을 가장 많이 한 인종도 일본인종이라 할 수 있는 듯 싶다. 그리고 이중성격이라면 일본인뿐 아니다. 문화혁명시기 그 어느 민족보다도 적극적이었던 우리 중국조선족, 또한 한반도에서는 대한항공을 폭파했다는 김현희의 행동… 이 모든 것 또한 이중성격 범주에 속한다고 해야 할 것이 아닐까? (다음기 계속) 주: 본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4-23
  • 오묘한 세계 대백과(7)토성의 아름다운 빛무늬
    토성 역시 태양계의 8대행성 중의 하나에 속하는 바 목성 다음의 두번째로 큰 행성이다. 토성은 태양계 대 가정 중 가장 아름다운하나의 “성원”이다. 토성 자체에는 둘레를 휘감은 아름다운 빛무늬가 있다. 비록 천왕성과 목성에도 이러한 빛무늬가 있지만 모두 토성 빛무늬의 아름다움과는 비할수가 없다. 1980년, “여행자” 1호 우주탐측기가 발송한 토성의 사진을 보면 그 빛무늬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지구에서 망원경으로 볼 수 있었던 몇 갈래 토성의 큰 빛무늬는 원래 수없이 많은 작은 빛무늬들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소유의 빛무늬들은 크고 작기가 부동한 많은 부스러기와 알맹이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런 부스러기와 알맹이들의외면에 한층의 견고한 빙각이 씌워져 있다. 이런 빙각들은 태양의 빛을 받아 오색찬연한 빛을 내면서 명랑한빛무늬로 되고 있다. 토성의 빛무늬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특별히 큰 바 그 위에 얼마든지 10여개의 지구를 배열해 놓을 수도 있다고 한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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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23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들(7) 헤트로궁전
    헤트로궁전 자료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네덜란드, 지점: 아펠돌른시 북쪽 함의: 당년 네덜란드 황실 사람들이 가장 즐겨 다녔던 피서지 네덜란드의 심장부인 아펠돌른시에는 광활한 삼림지대가 있다. 당시 네덜란드 황실사람에서 가장 즐겨 다녔던 피서궁 즉 헤트로궁전이 바로 이 삼림속에 있었다. 헤트로궁전은 1685년 네덜란드의 월리엄(威廉) 3세 국왕과 마리아 황후가 지은 것이다. 헤트로궁전은 내부장식이 호화롭고 궁전 외부에는 계단, 등나무 숲과 조각 및 분수시설 등으로 정원을 이루고 있다. 헤트로궁전은 줄곧 네덜란드 통치자들이 즐겨 다니던 여름궁전었다가 1984년부터 네덜란드의 박물관이 되어 일반 서민들도 궁전내외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재현된 왕실생활 헤트로궁전에는 네덜란드 왕실의 각종 궁정용품들이 소장되어있다. 중앙대청과 기타 왕실성원들이 거주하던 진열실에는 대량의 역사 사유물과 서류, 그림, 도자기, 금은장신구 그리고 여러 시대를 거쳐 내려 오던 궁정복장들이 소장되어 있다. 또한 마구간 내부에는 왕실에서 쓰던 마차, 수렵차, 눈썰매 등이 진열돼 있다. 이런 물건들은 진실하고도 생동하게 신비한 황실가족의 생활을 재현시키고 있다. 헤트로궁전의 아름다운 외경 헤트로궁전의 전원에는 분수, 호수, 제형잔디와 각종 조각 등으로 아름답기 그지 없다. 현재 네덜란드 정부의 대규모로 되는 수건으로 헤트로궁전의 정원은 이미 17세기 때의 모양새로 회복되었다. 지금 궁전 주위의 정원은 계단, 등나무 숲, 조각과 꽃밭 등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정원내의 화초 또한 정성어린 재배로 매년 봄과 여름철마다 유람객들한테 선보이고 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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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23
  • “난 바보 엄마야!”
    ◎ 이진숙 결혼 1년 후인 1971년 12월, 큰 딸애가 고고성을 울리며 세상에 나왔다. 그때로부터 만 1년이 지난 1973년 1월에 뒤질세라 둘쨰 딸애가 또 태어났다. 연연생이란 말이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옛말처럼 말하지만 그 때는 정말 인생계획 밖의 일이라 어이가 없어 좋은 줄도 기쁜 줄도 몰랐다. 대학을 졸업하고 남편을 따라 배치받아 간 곳은 헤이룽장성 치따이허(七戴河)시 어느 자그마한 조선족마을의 소학교었다. 그 때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진짜 바보였다. 의학상식, 건강상식…그런 와중에 연속 애를 갖다 보니 “우둔한 놈 곰 잡는 바보 엄마”가 되어 동네방네 웃음거리가 됐다. “아유, 기가 차라, 어쩜 그렇게까지…” “병신 안 된게 천만다행이야!” 정말이지 둘째 딸애가 이 세상에 나온 기적적인 사연에 대해 너무도 끔찍스러워 혀를 끌끌 차지 않은 사람이 없다. 큰 애가 석달 푼히 됐을 때부터 나는 온몸이 몹시 불편했다. 소화가 되지 않아 음식을 전혀 먹을 수가 없었고 면역력이 떨어졌는지 쩍하면 오가는 감기는 내 몸에 와 붙어서는 떨어질 줄 몰랐다. 암을 모르는 세월이고 촌 마을이어서 그렇지 지금 같으면 위암을 의심하며 검사받느라 야단이었을 것이다. 대신 그 때는 농촌합작의료여서 나는 쩍하면 의사한테 가서 소화에 좋다는 약이라면 엇바꿔가며 줄기차게 먹었다. 그래도 그 상이 장상이다. 찌들어가는 나를 보면서 동네 사람들이 말했다. 침을 맞아보라고, 기와집 할배가 의사는 아니지만 사정하면 침을 놔줄 거라고… “바쁜 놈이 우물파기”라고 의사건 말건 상관이 없었다. 그 날로 침할배를 찾아가 증상을 말했더니 “배속에서 여기저기 움직이며 꿈틀대는 건 적”이라며 나더러 누우란다. 주저할게 뭐람, 아파 죽을 지경인데- 나는 누워서 옷을 거둬 올렸다. 할배는 이리저리 꾹꾹 눌러보더니 동침을 빼들고 배의 몇 곳에다 호박 찌르듯 쓱쓱 꽃는 것이었다. 나는 먹지 못하는 고통에서 한시 바삐 벗어 나려고 찍소리 없이 그 침대를 받아들였다. 그 후에도 호전이 없었다. 나는 그냥 약을 밥먹듯 하면서 어려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차 11월 말에 우리는 전근령을 받고 연변으로 나오게 되었다. 간단한 세간들을 동네 사람들에게 다 나눠주고 돐도 안 된 큰 딸애를 업고 달랑 셋이 몸만 차에 실었다. 나오는 길에 우리는 먼저 밀산에 있는 큰 시형네 집에 들렸다. 길에서 극도로 지친데다 감기까지 걸린지라 나는 시형네 집에 도착하자 마자 동네의사를 보이고 링게르를 맞았다. 그런데 하나님 맙소사! 의사말이 임신이란다. 새해 1월 말이 출생예정일이었으니 따져 보면 그 때 벌써 여덟달 된 셈이다. 바보, 바보! 이런 바보가 또 어디에 있담? 몸집이 그다지 알리지 않았어도 평소보다는 완전히 달랐을 텐데 모르다니…진짜 바보야. 첫 애에 이어 두번째 애가 잇따라 생길 수 있다는 것조차 몰랐으니 이보다 더 무지한 바보가 따로 없다. 무지하면 미련한 법이다. 하지만 옛날속담에 “우둔한놈 곰 잡는다” 했다. “자식은 하느님이 주는 선물”이라 했다. 하느님의 은총을 입어서인지 이 미련둥이 우둔한 엄마는 진짜 “호걸”이 되었다.태아 때 벌써 많은 고통을 겪으면서도 딸애는 건강한 몸으로 이 세상에 왔다. 머리 또한 매우 총명했다. 공부에서는 처음부터 1등 자리를 굳혀왔다. 연변1중에서 칭화대학에 추천(동점일 때 우선)되었을 때 그 걸 마다하고 딸애는 베이징우정학원에 갔다. 졸업하여 베이징에 배치받았고 우정부장의 통역으로 일본과 한국에도 다녀왔다. 한국 우정장관이 중국방문 때는 전 리펑 총리의 통역으로 되어 중국 중앙TV방송에도 나왔다. 정말이지 TV방송에서 리펑 총리의 곁에 서있는 딸애를 보던 순간이 나한테는 더없는 영광이었고 자호였으며 세상을 독차지한 그런 심정이었다. 딸애는 지금 중국 이동통신 베이징시 ××구 분국의 부총경리로 근무하고 있다. 조선족 여자애가 이만큼 해낸다는 것이 얼마나 조련찮은 일이냐며 다들 가문의 자랑으로 가슴 뿌듯해 한다. “사선에서 살아 남으면 꼭 복이 온다”더니 “우둔한 엄마”, “바보엄마”를 만나 세상구경도 못해볼 번 했는데 딸애는 어려서부터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과 자랑을 안겨 주었던가. 하긴 불쌍한 몸과 정신을 갖고 이 세상에 온 애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섬찍해난다. “만일에, 만일에” 정말 그제날 그 일을 떠올리기가 무섭다. 그리고 딸애가 무척 고맙고 대견스럽다. 세상엔 결코 “절대적” 또는 “100프로”란 결코 있을 수 없다. “만일”이란 단어가 하필이면 모든 일에서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겠는가. 그 “만일”에서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역전되면서 때로는 인생을 바꿔놓기도 한다. 이게 “바보엄마”인 내가 얻은 또 하나의 인생수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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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23
  • [단독] “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 (10) 일신의 에너지 발산하며
    ◐ 허길성 (전번기 계속) 연길시라지오방송국방송중계소의 건립공정은 내가 이 단위에 입문하자마자 가동되였다. 우선 방송중계소를 세우자면 그 설계방안부터 나와야 했다. 그런데나 본인이 예전에 북경공정학원에서 기계및건축공정설계를 전공했지만 방송중계의 설계만은 아주 생소했고 이 방면에 들어서는 우리 모두가 초보자였다. 그러니 대도시들에 있는 방송중계소를 참관하면서 이런 설계들에 대해 전문적으로 학습해야 했다. 어쩔수 없이 나는 연길시라지오방송국에 출근한 며칠뒤부터 출장을 다녀야 했다. 출장에 대해 말하면 심양군구 공정병사령부에 있을 때 많이 다녔고 또 연길에 와서도 부대에 있을 때는 팔도, 훈춘 등지를 자주 다녔었다. 그리고 총각시절에는 출장다니는것이 그닥싫지 않았다. 홀몸이고 부담이 없으니 기분이 좋은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결혼하고 또 자녀 둘씩이나 있고 보니 출장다니는것이 썩 좋은 일만은 아니였다. 출장가면 고생할 때가 많았다. 특히 음식이 입에맞지 않아 애를 먹는 경우가 허다했다. 음식이란 그래도 같은 된장국이래도 집에서 안해가 끓여주는것이제일 입에 맞고도 구수했다는것을 나는 결혼뒤에야 진정으로 터득할수 있었던것이다. 안해는 나를 극진히도 보살폈다. 매번 출장을 갈때마다 나의 트렁크속에 고추장, 명란젓갈과 말린 누룽지 등을 넣어주군 했으며 때시걱을 절대 거르지 말라고간곡히 부탁하는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면 출장간 뒤 매일 아침마다 함께 간 동료들이 나의 려관방으로몰려오기가 일쑤였다. 모두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였다. 그리고그럴 때마다 동료들은 나의 안해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는 한편 나를 부러워하는 기색도 력연했다. 그러던중 나는 실로 10여년만에 처음으로 북경출장길에오르게 됐다. 도문 – 천진행 기차를 타고 천진에 도착한뒤 천진에서 기차를 다시 갈아타고 북경으로 향하는 등으로 그때의 출장은 비행기는 고사하고 기차를 타고 가는것도 몹시 번거로웠다. 북경에 도착하니 그때까지만 해도 북경은 옛모습 그대로였다. 북경역도그대로였고 천안문광장과 그 광장을 가로지르는 장안가 량측의 건물들도 거의 그 모습 그대로였으며 장안가로 흐르는 거대한 자전거물결도 10여년전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그 10년사이 크게 변한것이 있었다. 바로 사람들의 모습이였다. 개혁개방을 맞으면서 사람들 거의 모두가얼굴에 웃음기가 어리여있었고 그 걸음걸이는 씩씩하고도 활기찼다. 북경에 오게 되자 나는 문득 만나고 싶은 한사람이 있었다. 그가바로 북경공정병학원시절의 동창생이였고 지금은 외교부에서 근무한다던 그 량희원이란 사람이였다. 북경에서 국가외교부를 찾아가는것은 그닥 힘든 일이 아니였다.1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북경의 주요 거리에 대해선 거의 손금보듯 잘 알고있는 나였다. 2 국가외교부 정문앞에 이르자 초병 2명이 버티고 서있었다. 그들은 내가 나타나자 나의 신분을 확인하고는 찾아온 용건부터 물었다. 이에 나는 량희원이란 그 친구와 북경공정병학원 시절의 동창생이라고 나서 이번에 어쩌다 수도 북경으로 왔던 김에한번 꼭 만나보려 한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럼에도 초병은 “그분은 지금 사무가 몹시 바쁘기에 될수록그의 사무에 방해가 되지 말아줬으면 한다”며 그닥 마뜩치 않아하는 눈치였다. 나는 그럼 그한테 전화라도 걸어주면 안되겠는가고 사정했다. 그러자초병은 할수 없었던지 초소안에 들어가 전화를 거는것이였다. 그 초병은 “연변에서 허길성이라고 하는 중년남성이찾아왔는데 아는가”고 확인하고 난 뒤 만날 의향이 있는가고 했다. 그러고 나서야 초병은 나한테 돌아서며거수경례를 붙이고는 “손님, 미안합니다. 공무가 공무인만큼…조금만기다려주십시오”라고 했다. 미구하여 그 외교부 주건물의 출입문쪽에서 한 중년남성이 나타났다. 그 남성은 머리를 들고 우리가 서있는 대문쪽 한번 바라보더니 인차 부랴부랴 걸어오는것이였다. 그가 가까히 다가와서야 그제날 량희원의 모습이 조금 알리는듯 했다. 그 역시 한참이나 나를 뜯어보더니 그제야 “동창생 허길성동무구만”하며 와락 나를 끌어 안는것이였다. 량희원은 나를 몹시 반겼다. “허동무, 정말 마침 잘 왔소. 방금 어디론가 나가려고 준비하고 있던 참이였는데 만약 나갔더라면 진짜 자네가 초병들한테 괄시당할번 했소. 하지만 저 초병들을 원망하지는 마오. 국가외교부는 국가의 기밀단위라그들도 어쩔수 없이 출입자단속을 엄하게 할뿐이오.” “그래그래 그렇구말구.” 아무리 국내의 “촌변두리”인 연변에서 상경했지만 그만한 상식마저 모를 내가 아니였다. 나는 량희원을 따라 건물 2층에 있는 그의 집무실로올라갔다. 량희원의 집무실은 그닥 화려하지는 않았다. 하지만외교관의 집무실답게 기품이 있었다. 그의 사무상에는 중화인민공화국 국기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기가꽂혀있었다. 이는 그가 전문 조선담당 외교관임을 여실히 증명했다. 이어 그가 사무상우에 있는 초인종을 누르자 인차 녀비서 한명이 들어왔다. “커피 두잔.” 녀비서는 우리 두사람한테 고개를 까딱하고 인사하고는 나갔다.아주 세련된 모습이였다. 그 사이 그는 나한테 담배 한가치 권했다. 그때는그 담배가 무슨 담배인지 모르고 피웠지만 후에 알고보니 그 담배가 바로 유명한 명표담배 “말보루”였다. 그리고이윽하여 우리는 녀비서가 타온 커피도 마셨는데 이는 내가 생전 처음으로 마셔보는 커피였다. 우리는 한동안 지난 세기 60년대 당시 북경공정병학원에서갈라진 후의 일과 최근년간의 사업상황 및 가정생활 그리고 자녀들의 상황 등을 서로 주고 받으며 한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얼마후 점심때가 가까워오자 나는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량희원동무, 우리 밖에 나가 식사나 하면서 계속얘기하기요.” 그때 나는 점심식사는 내가 그한테 대접할 타산이였다. 헌데 그는 급해하지 말라며 계속 나한테 이것저것 묻는것이였다. (아니, 이 친구가혹시 자기더러 돈쓰게 할가봐 이러나?! 아무리 시골인 연변에서 왔어두 내가 그처럼 짠 사람은 아닌데?…) 그러나 나는 그를 오해해도 크게 오해했던것이다. 시계바늘이 11시20분을 가르키고 그가 초인종을 누르자 또 아까 들어왔던 그 녀비서가 나타났다. 량희원은서랍에서 메뉴판을 꺼내들더니 몇가지 료리를 체크해서는 그 녀비서한테 넘겨주는것이였다. 녀비서는 역시 종전대로 고개를 까딱하고 인사하고는 방에서 나갔다. 미구하여 량희원의 사무실옆에 딸린 응접실 탁상에는 3-4가지의볶음료리가 올랐다. “허동무, 여기에 여러가지 술이 있는데 어떤 술을좋아하는지 한병 골라보오.” 그가 어느 한 궤에 달린 유리미닫이를 열자 그 안에는고급술만 수십병이 있었다. 나는 두눈이 휘둥그래질수밖에 없었다. 당시 나의 생활수준은 아무때건술생각이 나면 마실수 있을 정도였지만 그렇다고 자기의 돈으로 한병에 수십원씩 하는 술을 사먹을 수준은 아니였으며 한병에 수백원씩 하는 더구나 쳐다볼엄두도 못내는 상황이였다. 그런데 량희원은 이렇듯 수백원씩 하는 고급술을 수십병씩 진렬해놓고 마시다니…말그대로 나와 량희원은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사는 존재인것만 같았다. “빨리 한병 골라잡으라니까. 뭘 그리 구경만 하오?!” 나는 아무래도 마시는바 하고는 좋은 좋은 술을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며 귀주의 모태주 한병 골라잡았다. 이어 우리는 탁상에 마주앉았다. 량희원의 말에 따르면그를 비롯한 많은 외교관들은 아주 특별한 사정외에는 일반적인 식당이나 료리집같은 공개장소로 드나들지 않는다고 했다. 혹시 술에 취한 뒤 외교관원의 형상을 망가뜨리거나 실수로 비밀루설을 하는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 했다. 그러면서 나한테 될수록이면 생활외 자신의 사업에 대해서만은 적게 물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이에 나는 그의 사업에 대해서만은 일절 묻지 않기로 했다. 나역시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한편 나는 그가 좋아하겠는지도 묻지 않은채 그저 나의 성의대로 가방안에 있던 고추장과 명란젓갈그리고 도라지무침 등을 내놓았다. 그러자 대뜸 희색이 만면하여 그는 대단히 반가워했다. “허동무, 이거 참 좋은거요. 이걸 진작 내놓을거지. 참.” 량희원은 볶음료리는 별로 다치지도 않고 내가 내놓은 반찬만 골라집었다. 그러고는 이마에 돋은 땀을 연신 닦으면서 “어허, 참 맛이 있소. 조선족은 그래도 얼큰한 반찬을 먹어야 군이 뚝 떨아진다니까” 라고 하며 하던 말을 자주 곱씹군 했다. 술이 몇순배 돌자 그는 속심말도 털어놓는것이였다. 그는북경공정병학원에 있을 때 내가 북경대학으로 가는것을 거절하였기에 자신이 선택될수 있었다고 하면서 그때의 일을 회고하는것이였다. “그때 북경대학에 전학한 후 나를 데려갔던 그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는데 당시 그분들이 진짜 욕심냈던학생은 자네 허동무였다더구만. 만약 그때 자네가 응했더라면 내가 선택되지 못했을수도 있었을게 아니우?…그러다 후에 북경대학을 졸업하고 외교부에 배치받게 되자 어쩐지 자네한테 미안한 생각까지 다 들더군. 그래서 언젠가 한번은 수소문해 자네를 찾아본다고 했는데 말이야…” 그는 진정성이 고인 어조로 말했고 나 또한 그때의 일은 나 자신이 선택한 일이기에 그럴 필요가없다고 손을 내저었다. “여보게 희원이, 그게 다 내가 선택한것이라네. 자네가 왜 미안해할거 있다구 그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와 나의 현실생활을 비교해보노라니 나 자신이 형언할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 그도 그럴것이 그와 나는 아주 극적인 대조를 이뤘다. 나는 그한테자아소개를 할 때 연길시라지오TV방송국 TV방송중계소 서기로근무한다는 말만 하고 뻐스공장에서 로동개조를 할 때의 일을 밝히지 않은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다. 문화혁명시기에 겪은 나의 고초에 대하여동창생 량희원이 어떻게 알수 있으랴. 10여년만에 만난 동창생이였으니 우리 둘은 할 얘기들이 많고 또많았다. 이렇게 술이 마시며 얘기를 나누다보니 꽤나 시간도 흘렀다. 그리고나도 꽤나 주량이 있는 사람이였지만 량희원 역시 주량에 들어서는 두번째라고 한다면 서러워할 애주가였다. 그날 우리는 한사람이 한병씩 다 마시고서야 자리를 파했다. 드디여 술자리가 끝나 내가 려관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그는 “술마신 친구를 그냥 돌려보낼수 없다”고하면서 기어코 자기의 침대우에 나를 눕히는것이였다. 그러고는 해당일군을 불러 친구 한명이 자기의 침실에서하루밤 자게 된다는것을 신고하고 등록하는것도 잊지 않았다. 그때의 량희원은 전혀 술마신 사람답지 않게 아주 정규적일군의 사업자세를 보였다. 그 며칠뒤 나는 북경에서의 볼일을 다 보고 연길로 돌아가게 되였다. 그날 내가 북경역에 도착해 뻐스에서 내리자 불현듯 누군가 “허동무”하고 조선말로 부르는것이였다. 그 소리에 내가 사위를 둘러보니 바로 량희원이 대합실출입문쪽에서 손짓하는것이였다. 나는 웬간히도 놀랐다. 내가 연길로 돌아간다는것을어떻게 알고 왔단 말인가. “아니, 자네 어떻게 알고 왔소?” 이에 그는 그날 술을 마실 때 내가 아무날에 연길로 돌아가게 된다고 말했다는것이였다. 기실 그날 내가 술을 마시면서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 그한테 연길로 돌아가는 날자를 말했고 그 역시 그냥 머리를끄덕이며 지나가는 소리로 듣는듯 했으나 꼼꼼한 그가 그 말을 깊이 새겨들은것이 분명했다. 그때 나는량희원의 외교관다운 자질에 재차 한번 놀랐다. 이어 그는 찦차운전사를 시켜 차안에서 웬 커다란 트렁크 하나를 꺼내더니 나한테 내밀며 열어보라는것이였다. 열어보니 그안에는 몽땅 고급술이였다. 나는 어리둥절해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허동무, 뭘 그리 놀라는거요. 그날 보니까 자네도 나처럼 술을 좋아하는것 같더구만. 몽땅 연길로갖고 가서 친구들과 함께 마시오. 다만 친구들앞에서 나의 체면을 좀 세워주면 고맙겠구…” 아마도 그날 내가 궤안을 들여다보며 부러워한것을 그가 알아챈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 내가 “나는 마실 술도 모자란데 자네는 이렇게 진렬까지 해놓고 살군”하고 롱담삼아 말한것을 그가새겨듣고 나한테 몽땅 선물한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 친구의 성의가 무던히도 고마웠으며 수십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때의 일을 잊을수가 없다. 량희원 친구,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그때 정말 고마웠네. … 한편 연길시라지오발사탑을 세우는 동안 우리는 무척 고생을 했다. 당시 발사탑은 중앙인민방송국의 설계에 따라 건설되였는데 요구가 매우 높았다.그리하여 관건적인 설비는 북경 중앙인민방송국 산하의 기업에 가서 직접 가져오고 기타의 설비만 연변건축공사 기계공장을 통해 가공하게했지만 그것이 요구에 미달될 때가 많아 애를 먹었다. 그리하여 북경,장춘과 할빈 등 곳을 더 다니기도 했다. 한가지 사례를 든다면 지진과 번개를 방지하기 위해직경 120 메터내 땅속에 동선을 거미줄처럼 늘여야 하는데 3톤에달하는 동선이 수요되였다. 헌데 당시 연길실정에서는 동선 3톤씩구할수가 없었다. 아니, 설사 구할수 있다 해도 그 가격이어마어마할수 있기에 결국 우리는 비용절약을 목적으로 연길시안의 수구소를 돌며 페물속에서 동으로 된 물건을 몽땅사들였다. 그 다음엔 그것을 동선으로 뽑을 공장이 지방에 없으니 그것을 싣고 장춘의 철근가공공장에 찾아가 재가공으로 동선을 뽑아내기까지 했다. (연재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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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04-20
  • “조선족”이냐, “재중동포”냐?
    ■ 정신철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원 요즘 한국내에서 중국조선족을 “조선족”인가, “재중동포”인가를 갖고 많이 의론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보기에는 명칭차이지만 사실은 중국조선족을 어떻게 보는 것과 연관이 된다. 한국적 시각에서 보면 중국조선족을 해외동포의 한 부분으로 “재중동포”라 부르는 것은 일본의 “재일동포”나 미국의 “재미동포”를 부르는 것처럼 같은 차원이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한국적 시각에 불과하다. 사실은 위의 각 자가 처한 배경과 위치가 많이 다름으로 그들을 같은 차원에서 볼수 없다.조선족은 이미 법적으로 인정받은 중국 다민족국가의 한 성원이다.정치적으로 보면 조선족은 민족의 자치지역이 있고 각 급 정부기관에는 조선족 관료가 있다. 문화적으로 보면 중국에는 정부관할의 조선족학교, 조선족문화관 등이 있고 여러 대학과 연구기관에는 조선족교수, 연구원들이 많이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중국에서 조선족은 자기특징을 갖은 하나의 민족공동체로 “조선족”이란 명칭은 이미 특유의 고정된 개념으로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때문에 그 누가 승인을 하든 안하든 “조선족”의 존재는 엄연한 사실이다.따라서 “조선족”이냐, “재중동포”냐 하는 것을 갖고 논의하는 것은 하등의 의미도 없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한국적 시각에서 일반인들이 조선족을 “재중동포”라고 부르는 것은 무방하겠지만 정계, 학계에서까지 “조선족”이냐, “재중동포”냐 하면서 “조선족”명칭을 무시하는 것은 중국조선족의 객관성을 무시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 따라서 이러한 타당성이 없는 언행은 권장할 바가 못 된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4-04-20
  • 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 (시리즈 1)
    ■ 김철균 아버지를 재차 떠올리며 나의 아버지고 김노걸(魯杰)씨가 생전이면 올해 108(1904년생)세가 된다. 한국경상도 울산이 고향인 아버지는 한일합방 이듬해인 2010년에 할아버지한테 이끌려 간도로 이주, 당시 두만강에서 어부로 생계하는 넷째 할아버지와 다섯째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이주했다 한다. 아버지는 1931년에 장가를 들어 큰 딸 김춘옥, 둘째 딸 김춘봉과 큰 아들김승균을 본 뒤 일본군들이 벌인 공사장에 끌려 다니며 부역을 하다가 광복을 맞게 되었다. 광복 후 아버지는동북민주연군에 입대(어머님의 말로는 농사일과 집안을 관계하기 싫어 군대에 갔다고 함), 훈춘보안퇀 일원으로 전우들과 함께 당시 국민당이 장악하고 있던 훈춘공안국을 아침에 점령한다. 2-3명씩 조를 짜갖고 골목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출근하는 공안국 인원들을 한명씩 나포했기에 거의 무손실로 큰일을 해낸 것이다. 그 뒤 아버지는 소련 극동국제여단에서 주보중, 김일성, 최용건 등과 활동하다가 연변으로 진출한 지병학, 석동수 등 항일빨치산 장령들의 인솔하에 훈춘과 흑룡강성 동녕현 일대에 진출하여 토비숙청에 참가하였으며 이어서 국민당의 동만진공으로 하발령 저격전에 참가하는 것을 계기로 중국내 국공양당의 내전에도 뛰어들었었다. 당시 아버지는 동북민주연군 10종대의 기관총수였다. 그러면서 수차 장춘해방전투에도 참가했고 그 뒤 1948년 가을과 겨울에는 세계에서 유명한 요심전역의 흑산저격전에도 기관총수로 참가해 국민당군을 무리로 쓸어눕혔다고 한다. 1948년 12월 아버지는 남하하는 제4야전군을 따라 입관, 천진해방전투 등 많은 전투에 참가하면서도 용케도 목숨만은 잃지 않았으며 이어서 장강도하작전에서는 돛배 선수의기관총수로 해방군의 진격로를 엄호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제4야전군이강서성 남창을 해방하자 상급으로부터 비밀지령이 떨어졌다. 순 조선인군인들만 뽑아서는 어디론가 싣고 가는것이었다. 아버지네가밤중에 당도하고 보니 그 곳은 하남성의 성도 정주였다. 그리고 어느 한 학교마당에 모인 군인들을 보니 말짱 조선인군이들이었다. 어느날 밤아버지네는 재차 화물차 바곤에 싣겼다. 기차는 무한정 달리다가는 가끔씩 멈춰서군 했는데 나와 보면 그곳은가없이 펼쳐진 허허벌판이었고 그런 곳에서 부대는 밥을 먹고 볼일도 보군 했다 한다. 그러다가 또 어느날밤 기차가 한 철교를 건너는가 싶더니 미구하여 문뜩 멈춰섰고 모두들 내리게 했다. 그 곳은 곧바로 조선의 신의주였다. 신의주에서 아버지의 일행은 중국인민해방군 군복을 벗고 조선인민군 군복을 갈아 입었다. 그것이 바로 6.25발발 직전인 1950년 4월경이라 한다. 그 뒤 아버지는조선인민군 제7군단에 소속되어 원산 부근에서 훈련하다가 곧바로 6.25에 뛰어들게 되었으며 낙동강까지 진출했다가 다시 유엔군의 인천상육으로 후퇴의 길에 올랐다. 그러는 과정에서 부상당하여 중국 교하에 있는 조선인민군 야전병원에 입원했다가 상처가 다 아물자 다시 전선에 나갔으며 조선정전협정이 조인된 뒤에야 중국훈춘으로 되돌아오게 됐다. …… 나의 기억속의 아버지는 성격이 괴벽했다. 식사하다가도 뭔가 마땅치 않으면 수절을 메치기가 일쑤였고 지어는 밥상을 엎어 버릴때도 있었다. 그리고 느닷없이 집식구나 남과 트집을 잡을 때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어릴 때 나는 아버지를 무서워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했다. 한편 아버지는뭐나 아끼지를 아니했다. 풋돈깨나 생기면 집안생계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술부터 사 마셨다. 그리고 술 마신 뒤면 이 강산 낙화유슈란 노래를 자주 부르기도 했다. 내가 학교를붙은 이듬해니까 아마 1965년쯤으로 기억된다. 그 때로부터아버지는 뭔가를 예감했는지 자주 어린 나를 앉혀 놓고는 전쟁시기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면서 가끔씩“참,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는 말을 곱씹군 했다. 이제와서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기관총수였으니 사람을 많이 죽였다는 말로도 된다. 그것도 자의가 아니게 군인이란 천직 때문에 사람들을 무리로 쓸어눕혔던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죽인 한국국방군 속에는 아버지의 고향(울산)사람도 혹간 있을 법 아닌가? 그리고 당시나는 아버지가 눈물을 떨구는 모습도 분명 보았었다. 아마 숱한 사람을 죽이고 살아있는 자체가 귀찮았을수도 있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당시 아버지의 성격이 괴벽해진 것을 이해할 수가 있게 되었다. 다른 한편위의 사진을 보다 시피 아버지는 멋지게 생겼으며 키도 비교적 큰 편이었다. 헌데 아버지는 두 아들(나와 형님)만은 키큰 아들로 만들지 못했다. 반면에 딸들은 이쁘기도 하고 키가 작지 않게 잘 만들었다. 그리고딸들 한테는 훗날 모두 잘 살게 되는 팔자를 주었으나 두 아들은 항상 쪼들리게 살게 만들었다. 마치 자신의 팔자처럼 되게 했다. 이는 극히 모순되는 것이었다. 그 사례로나의 형님 김승균씨는 훈춘병원의 업무원장으로 떵떵 거리며 살 수 있었으나 술 마셔도 평생 자기 호주머니 돈만 축냈으며 생전까지 형수님의 단위(교육국)에서 분양해준 집에서 살다가 저 세상으로 갔다. 그것도 병원의 유명 닥터로 암병치료전문가라던 형님은 결국 자신이 암병으로 돌아갔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나는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다. 돈도 잘 번다. 헌데 남는 것이 없다. 특히 몇해전에는 한 예술단체의 친구가 대출을 받을 때 담보를 서주었다가 그 친구가 제때에 갚지 않아 내가 빚을 내면서 그 돈을 갚아주게 됐으며 하마트면 와이프한테 이혼당할뻔 하기도 했다. 당시 남들은어떻게 남의 담보를 서줄 수 있느냐, 친구와 여자는 공유해도 돈거래는 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나 역시 그런 도리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남의 딱한 사정을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뒤 일은 염두에도 두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나의 아버지는 일자무식이었다. 대신 다른 분야가 몹시 발달했다. 얘기를구수하게 잘했다. 그래서 일터에서나 기타 모임에서 동네사람들은 아버지가 하는 얘기(옛말)을 듣기 좋아했다. 특히 아낙네들이 그랬다. 헌데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에 대해 늘 도리질을 했다. 나쁜 사람이라 했다. 아버지가 나쁜사람이라고 점찍은 어머니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 어머니가 다 돌아간 뒤 지난 세기 70연대에 있은 일이다. 당시 나는 형님의 슬하에서 자라고 있었는데 조선으로부터 한 여성이 찾아왔다.그러면서 우리는 형제라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 여성은 아버지가 조선에 감춰둔 딸이었다. 그러니 6.25 당시 그 전쟁의 난리속에서도 아버지한테는 어머니몰래 좋아하던 여성이 조선에 있었으며 그 누님이라는 분은 그 여성이 낳은 딸이었다. 하다면 어머니가 생전에 아버지를 나쁜 사람이라고 한 것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지 않았나 하는 추측이다. 그럼 나는 어머니밖의 아버지의 그 여성을 뭐라 해야 하나? 작은 어머니라고 해야 하나? 여하튼 아버지는 그닥 좋은 분은 못되었다. 그렇다고 나쁜 분이라고도 생각되지 않는다.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지도 어언간 50년(문화혁명시기“외국스파이”로 몰리어)이 된다. 고인이 된 아버지의 잘못을 따진다는 건 자식으로의 도리가 아니라고 인정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생전에 아버지가 나한테 많은 얘기를 해준 것도 어떤 뜻이 담겨져 있는가를 어느 정도 알기에 나는 아버지의 그 얘기들을 정리해서 세상에 공개하기로 결심한바이다. (다음기 계속) 주: 본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4-20
  • 해외견문 시리즈( 4 ) 잊지 못할 설날의 그 추억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매번 음력설이 돌아 올 때마다 나의 눈앞에는 고향을 떠나 머나먼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의 위스키포란 곳에서 선원들의 음력설 음식을 챙겨 주느라 진땀을 빼던 20여년전의 일이 선히 떠오르군 한다. 우리 중국에서는“춘절”이라 하고 한국에서는“구정”이라고 하는 음력설은 한국인들도 각별히 중시하고 굉장히 쇠는 풍속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당시 회사에서는 부모처자를 떠나 원항에서 파도와 싸우는 우리 마도로스 형제들이 음력설을 즐겁게 쇠라고 아프리카에 있는 대리점을 통해 인당 200딸라씩 돌아가는 음력설 특별수당금을 지급했고 선장으로부터 기관과 뎃기의 당직자 외 모든 일군들은 3 일 간 휴식하라는 지령도 내렸다. 선내는 삽시에 명절기분으로 술렁이었다. 하지만 당시 주방장이었던 나는 흥분에 앞서 더럭 겁부터 생겼다. 남들이 다 향수하는 명절 휴식일도 보장이 없는데다 우리 “코리안스타”호의 24명 선원들의 “엄마 대리”와 “아내 대리”가 되어 그들로 하여금 집만 못지 않게 음력설을 쇠게 하는 것이 당시 나한테 부여된 성스럽고도 간고한 사명이기도 했다. 그런 연고로 다른 선원들의 기분과는 반대로 나한테만은 그 음력설의 도래가 조금도 반갑지를 아니했다. 또한 더욱 안타까운 것은 돈은 있지만 그 돈으로 욕심나는 부식물을 살 수 없는것이 특이한 아프리카의 사정이었다. 음력설을 앞둔 어느 날, 통신장 겸 사무장인 이순택씨와 주방장인 나는 부식물 구입에 나섰다. 헌데 째질 정도로 가난한 아프리카인데다 음력설이라고는 달력에서조차 찾을 수 없는 그 곳의 시장에서 음력설 전야라고 부식물이 풍부할리 만무했다. 거기에 수절이라고는 쓸 줄도 모르는 “연탄동네”인 아프리카에서 우리 민족의 전통음식을 찾기란 실로 하늘의 별 따기와 다름이 없었다. 그날 우리는 봉고차를 타고 위스키포는 물론 와리시의 시장이란 시장은 다 돌아다녔지만 약간의 양배추, 토마토 등 야채와 오렌지, 파인내플 등 과일 외에는 설음식에 근사한 부식물은 별반 사들이지 못했다. 우리 민족의 전통음식인 떡부류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그토록 과일이 흔한 고장이었지만 그 과일 속에서 사과는 한알도 생산하지 못하기에 그것을 구하기 또한 무척 힘들었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은 흘러 점심 때도 퍼그나 지났다. 선원들의 점심밥과 반찬은 이미 아침에 해놓았기에 “싸롱뽀이”라고 하는 주방장 조리가 그 것을 점심시간에 차려만 주면 그만이겠지만 저녁을 지을 일이 근심되었다. 그럼에도 부식물 구입은 조금도 진전이 없었다. 바로 이런 찰나에 나의 눈앞은 금시 환해지는듯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따상하이(大上海)”란 간판을 건 중국인 술집이 우리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프라기도 잡고 싶은 심정이라고나 할까? 우리는 다짜고짜로 술집문을 밀고 들어갔다. “해외에서 중국인 술집을 만나니 고향의 친지를 만난 것처럼 기쁩니다. 중국사람이 이국땅에서까지 뿌리박고 장한 사업을 벌이다니 진짜 감동됩니다. 부디 하시는 일이 잘 되기를 기원합니다.” 내가 이렇게 잘 되지도 않는 중국어 밑천을 몽땅 털어가며 술집주인을 춰올린 뒤 찾아온 사연을 말하자 제 아무리 철석간장같은 주인이라지만 우리가 요구하는 물건을 팔아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술집 “따상하이”에서 적지 않은 야채와 육류와 면류 등 부식물을 얻은 우리였으나 우리 민족의 둘도 없는 전통음식인 떡부류만은 끝내 얻지 못하고 귀선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저녁, 다른 선원들은 독특한 적도부근의 풍미를 맛보려고 앞다투어 샤와하고는 외출했지만 나는 그런 사정이 못되었다. 아니, 곧 닥쳐올 음력설 때문에 잠을 자려고 에어컨까지 틀어놓고 잠을 청했으나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이렇게 이궁리 저궁리하며 뒤척거리던 중 나는 문득 기발한 착상이 떠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창고로 달려갔다. 나는 창고에서 얼마 안되는 찹쌀을 꺼내어 2시간 가량 물에 담근 뒤 다시 그 것을 건져 쇠절구에 넣고는 절구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쿵쿵 고향처자 떠나서 웬 말이냐 쿵쿵 사내 놈이 여자 노릇 웬 말이냐 쿵쿵 남들 자는 이 한밤에 웬 짓이냐 쿵쿵 … 내가 찧어대는 절구방아소리는 제법 노래리듬이 되어 스스로 그 무드에 젖어들고말았다. 그러는 사이에 아프리카의 새벽 하늘은 어느덧 조용히 밝아왔다. 그믐날 밤이 되었다. 눈보라가 없고 쩡쩡 갈라터지는 얼음판도 없는 특이한 아프리카의 섣달 그믐날 밤, 배갑판은 등불들로 불야성을 이루었고 그 아래에서 굉장한 파티를 벌인 선원들은 내가 만들어준 음식을 만끽하는 한편 가라오케 오디오의 음악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설을 맞는 즐거움에 젖어 들었다. 그 속에는 밥이 설었다고 나한테 밥그릇을 던지군 하던 꺾다리 기관장이 있었는가 하면 나와 통신장이 짜고 들어 부식비를 뜯어먹지 않는가 하고 늘쌍 눈을 밝히군 하던 “땅개”ㅡ 냉동사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은 단 한시도 쪽을 놓지 않았다. 아니 그 밤도 나를 괄시하고 헐뜯고 뒤조사를 하던 그들더러 설을 잘 쇠라고, 그네들의 “엄마대리”와 “아내대리”로 돼 주었다. 에어컨에서 내뿜는 냉풍도 나의 얼굴에서 흐르는 땀을 식히지 못했다. 부지런히 지지고 튕기고 볶고 쪄냈으나 만들어내기 바쁘게 음식은 바닥이 났다. 거기에 아프리카 깜둥이 아가씨 10여명까지 어울려 먹어대다 보니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날 밤 선원들은 술마시고 놀아대느라고 밤을 새웠고, 나 또한 그네들의 기분을 돋구어 주느라고 밤을 새웠다. 그리고 그 파티는 그 날로 끝난 것도 아니고 설날을 지나 정월 초이튿날까지 계속됐다. 그렇듯 지속되는 연속 작전에 선원들도 지쳤고 나도 지쳤다. 그네들은 먹고 마시느라고 몸에 탈이 생겼고 나는 팔다리가 물러나게 일하느라고 지쳤다. 특히 연 며칠밤을 자지 못했기에 코피가 흘렀고 하루 몇시간씩 더운 가스불 앞에서 일했기에 목과 앞가슴 부위에 좁쌀알만한 땀띠가 가득 내돋았으며 현훈증으로 걸을 때마다 두 다리가 휘청거리군 했다. 하지만 나는 기분만은 좋았다. 나 혼자의 희생으로 전반 24명한테 즐거움을 주었다는 만족감과 그 24명 또한 나를 절대 떠날 수 없다는 자호감에서 짜릿한 흥분이 잦아들기도 했다. 한편 나는 명절 때면 남자들은 먹고 마시느라고 피곤하고 여인들은 뒤시중을 드느라고 피곤하다는 그 말에 이해가 갔고 남정들의 뒤 시중에 드러난 잔등도 가리울새 없이 일하고도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 여인들의 내심세계도 얼마간 알리는 듯 했다. 특히 선박에서 “넘버원”으로 불리우는 기관부의 조기장까지 나의 손을 잡으며 “주방장 김상, 정말 욕봤다잉께. 그렇게 뱃놈한테는 선장이 아빠라면 주방장은 엄마라잉께”라고 전라도방언이 다분히 섞인 어조로 좋아할 때 가슴이 뭉클해나면서 좀만 더 잘해줬더라면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또한 이러한 위안과 믿음이 있었기에 나는 매번 선원들의 생일 때마다 그한테 찰밥에 미역국을 끓여주는 정성을 가질 수가 있었고 짧지 않은 2년여간 단 하루의 휴식일도 없이 선원들의 건강을 책임지며 열심히 일할 수가 있었다. 오늘도 나는 설음식 준비에 분주히 돌아치는 내 와이프의 거동을 절대 무심히 보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엄마와 아내와 아줌마들이 있기에 이 세상 사나이들의 행복과 즐거움과 긍지도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자신의 희생으로 남한테 행복과 즐거움을 아겨주는 것 ㅡ 이는 영원히 제창할만한 인간의 마음가짐일 것이다. 2014년 2월 연길에서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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