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내셔널포커스] 한국전쟁에서 같은 전장을 누볐던 중국과 북한. 중국에서는 두 나라의 관계를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의 ‘순망치한(唇亡齿寒)’으로 표현했고, 양국은 오랫동안 ‘피로 맺어진 친선’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역사를 들여다보면 북중관계가 언제나 혈맹이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1960년대 후반은 수교 이후 가장 험악했던 시기 가운데 하나였다. 중국에서는 김일성의 노선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왔고 북한은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강하게 경계했다. 국경에서는 상대방을 겨냥한 선전전이 벌어졌으며, 냉전기 외교자료에는 1969년 양측 사이에 국경 무력충돌이 있었다는 기록까지 등장한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불과 10여 년 만이었다.
한때 생사를 함께했던 두 나라는 왜 이처럼 멀어졌고, 전쟁 가능성까지 우려할 만큼 관계가 악화된 뒤 어떻게 다시 손을 잡았을까.
그 배경에는 김일성의 권력 강화와 북한의 자주노선, 중소분열, 중국 문화대혁명 그리고 1969년 중소 국경분쟁이라는 냉전사의 거대한 흐름이 얽혀 있었다.
한국전쟁 뒤에도 남은 불신…갈등의 씨앗은 1956년
1950년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은 북한의 운명을 바꿨다.
유엔군이 압록강 가까이 진격하자 중국인민지원군이 전쟁에 뛰어들었고 전선은 다시 남쪽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함께 전쟁을 치렀다는 사실이 중국과 북한 지도부 사이의 완전한 정치적 신뢰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전쟁 이후 김일성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북한 내부에 남아 있던 외부 세력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1956년 ‘8월 종파사건’은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당시 노동당 내부에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세력 외에도 중국 공산혁명과 연관된 연안계와 소련계 인사들이 존재했다. 이들 일부가 김일성의 개인숭배와 경제정책 등을 비판했지만 권력투쟁에서 패배했다.
이후 중국과 소련이 개입했다.
중국의 펑더화이와 소련의 아나스타스 미코얀이 참여한 공동대표단이 평양으로 가 김일성에게 숙청 중단과 일부 인사의 복권 등을 요구했다.
김일성은 일단 일부 요구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후 반대세력을 다시 제거하며 권력기반을 강화했다.
최근 공개된 중국·소련 자료를 토대로 한 연구에서는 당시 김일성의 권력이 실제로 제거될 정도로 위태로웠다는 전통적인 해석에 이견도 제기된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북한 지도부가 중국과 소련이 북한 내부정치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을 경계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에서 피를 나눈 기억 뒤에서 이미 ‘누가 북한의 운명을 결정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싹트고 있었다.
중소분열이 만든 틈…북한은 왜 중국과 멀어졌나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북한을 둘러싼 국제질서가 크게 흔들렸다.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무너졌다.
이념과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주도권, 국가이익을 둘러싼 갈등이 겹치면서 한때 ‘사회주의 형제국’이었던 두 강대국이 경쟁자로 변했다.
북한에는 위기이면서 기회였다.
1960년대 초 북한은 중국에 상대적으로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김일성은 니키타 흐루쇼프의 수정주의와 대외정책을 비판했고 여러 국제문제에서도 중국과 유사한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이를 북한이 중국 편을 선택했다고 해석하면 전체 그림을 놓치게 된다.
평양이 원했던 것은 베이징을 새로운 ‘큰형’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베이징과 모스크바 모두로부터 자율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두 강대국이 북한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경쟁하면 북한은 양쪽에서 경제·군사적 지원을 확보하면서 어느 한 국가에 대한 의존을 줄일 수 있었다.
1964년 흐루쇼프가 실각하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지도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변화가 나타났다.
소련은 북한과의 관계회복에 나섰고 경제·군사 지원도 확대했다. 북한 역시 모스크바와 관계를 개선했다.
1966년 북한 대표단이 소련 공산당 제23차 당대회에 참석한 것도 이러한 변화의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결국 중소분열은 북한에 ‘중국이냐 소련이냐’라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었다.
김일성에게 더 중요한 질문은 두 강대국의 경쟁을 이용해 북한의 행동 공간을 얼마나 넓힐 수 있느냐였다.
문화대혁명 직격탄…‘혈맹’이 서로를 비판하다
1966년 중국에서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이미 벌어져 있던 북중 균열을 공개적인 충돌로 바꿨다.
중국 내부의 극단적인 정치투쟁은 국경 밖으로도 번졌다.
일부 홍위병과 급진적인 정치선전에서는 북한이 중소분쟁에서 중국을 확실하게 지지하지 않는다며 김일성과 북한 노동당을 공격했다. 김일성을 ‘수정주의자’로 비판하는 주장까지 등장했다.
냉전기 외교자료에는 압록강 일대에서 확성기를 이용한 비난 방송이 벌어졌다는 내용도 나타난다.
북한에는 단순한 외교적 마찰이 아니었다.
1956년 중국과 소련의 공동개입을 경험한 김일성에게 외부에서 자신의 지도체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행동은 북한의 정치적 자율성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북한 역시 중국의 문화대혁명 노선과 거리를 뒀다.
정치·문화 교류가 크게 위축됐고 국경 왕래와 경제관계도 영향을 받았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기가 북한의 대남·대미 군사행동이 가장 거칠어진 시기와 겹친다는 점이다.
1968년 1월 북한 무장요원들이 청와대를 기습하려 한 ‘1·21 사태’가 발생했고 바로 다음 날 북한은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를 나포했다. 같은 해에는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도 벌어졌다.
그러나 미국·한국과 북한의 대립이 격화됐다고 중국과 북한이 가까워진 것은 아니었다.
냉전기 자료를 분석한 연구에서는 1967년부터 1969년 무렵을 북중관계의 최저점 가운데 하나로 평가한다.
이는 당시 북한을 단순한 ‘중국의 동맹국’으로 바라보면 설명하기 어려운 장면이다.
1969년 국경까지 번진 긴장…정말 전쟁 직전이었나
1969년 중국의 안보환경은 더욱 위험해졌다.
3월 중국과 소련 군대가 우수리강의 전바오다오, 즉 진보도를 둘러싸고 실제 교전을 벌였다.
이념논쟁으로 시작된 중소분쟁이 군사충돌로 번진 순간이었다.
이후 다른 국경지역에서도 충돌이 발생했다. 소련의 대중국 군사압박과 핵시설 선제공격 가능성까지 거론되면서 중국 지도부가 대규모 전쟁 가능성을 심각하게 우려했던 시기다.
중국의 지정학적 상황은 매우 불리했다.
북쪽과 서쪽의 긴 국경에서 소련과 대치하고 있었고 몽골에도 소련군이 주둔했다. 여기에 동북지역과 맞닿은 북한과의 관계마저 최악이었다.
북중 국경도 완전히 평온하지 않았다.
냉전기 동유럽 외교문서와 이를 분석한 연구에는 1969년 북중 국경에서 양측 사이에 무력충돌이 발생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후대 북한 측 설명에서도 중국 측 인원이 북한 영토로 넘어왔다는 주장이 등장한다.
다만 이 부분에서는 기록의 성격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현재 알려진 내용 가운데 상당수는 북한 측 설명이나 북한에 주재했던 동유럽 외교관들의 보고를 통해 전해졌다. 정확한 충돌 장소와 병력 규모, 사상자, 중앙정부의 개입 정도까지 완전히 확인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1969년 북중 국경에서 무력충돌이 있었다는 사료가 존재한다’고 설명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를 곧바로 ‘중국과 북한이 전면전 직전까지 갔다’고 확대하는 데에는 신중해야 한다.
국경충돌과 국가 차원의 전쟁계획은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북한군 12만 협공설’ 사실인가…사료로 따져보니
바로 이 역사적 공백을 파고든 이야기가 중국 인터넷에서 오랫동안 유통돼 왔다.
1969년 북한이 압록강 일대에 5개 사단, 약 12만 명의 병력을 집결시키고 소련과 함께 중국을 남북에서 협공하려 했다는 주장이다.
극적인 이야기다.
사실이라면 한국전쟁에서 중국과 함께 싸웠던 북한이 불과 16년 만에 중국 침공을 준비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현재 공개된 주요 냉전기 외교문서와 학술연구를 기준으로 보면 ‘5개 사단·12만 명’이라는 병력 규모나 북한과 소련 사이에 중국을 협공하기 위한 구체적인 작전계획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신뢰도 높은 자료로 확인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사실과 추정을 분리해야 한다.
1960년대 후반 북중관계가 심각하게 악화됐다는 것은 여러 자료에서 확인된다.
국경에서 선전전이 벌어졌고 무력충돌을 언급하는 외교문서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북한이 소련과 손잡고 중국 침공을 준비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당시 북한의 안보환경을 생각하면 전면적인 대중국 전쟁은 북한에도 엄청난 모험이었다.
남쪽에서는 이미 한국군과 주한미군을 상대하고 있었다. 북쪽의 중국까지 적으로 돌린다면 북한은 사실상 두 방향에서 군사적 위협을 감당해야 했다.
실제 북한의 이후 행동도 중국과 전쟁을 준비하는 방향이 아니라 관계를 복원하는 쪽으로 움직였다.
따라서 ‘북한군 12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중국을 공격하려 했다’는 이야기는 확인된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실제 북중갈등을 토대로 후대에 확대·재구성된 주장으로 보는 것이 현재 자료에 가장 부합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확인되는 역사 자체가 충분히 극적이다.
‘혈맹’으로 불리던 두 나라가 국경 무력충돌이 기록될 정도로 멀어졌다가 불과 몇 달 뒤 다시 관계개선에 나섰기 때문이다.
적대에서 다시 화해로…1969~1970년 극적인 반전
관계의 방향이 바뀐 것은 1969년 하반기였다.
그해 10월 북한의 최용건이 중국 건국 20주년 행사 참석을 위해 베이징을 방문했고 마오쩌둥 등 중국 지도부와 접촉했다.
얼어붙었던 고위급 대화가 다시 시작됐다.
당시 양국 모두 관계개선이 필요했다.
중국은 소련과 실제 국경전을 치른 상황에서 북한까지 장기적인 적대관계로 돌리는 것을 피해야 했다.
북한의 계산도 비슷했다.
남쪽에서 한국과 미국을 상대하면서 북쪽의 중국까지 적으로 만들 경우 안보 부담이 지나치게 커진다. 냉전기 외교자료에는 북한 지도부가 사실상 ‘배후에 또 하나의 적을 만들 수 없다’는 취지의 판단을 했음을 보여주는 기록도 있다.
관계회복의 결정적인 장면은 이듬해 찾아왔다.
1970년 4월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가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회담했다.
양국은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쌓인 갈등을 수습하고 정치·경제 관계를 정상화하기 시작했다. 중국 측이 북한에 대한 문화대혁명기의 공격을 수습하고 유감을 표시하는 과정도 화해에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서 소후 등 일부 중국 인터넷 글의 주장과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 나타난다.
마오쩌둥이 미국에 접근하자 소련과 북한이 물러났고 그 결과 북중관계가 회복됐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연대기는 그렇게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북중 고위급 접촉 재개는 1969년, 저우언라이의 평양 방문은 1970년 4월이다. 헨리 키신저의 비밀 방중은 1971년 7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역사적인 중국 방문은 1972년 2월이었다.
즉 북중관계의 해빙은 중미관계의 역사적인 전환보다 먼저 시작됐다.
중소분쟁이 중국의 대미 접근을 촉진한 중요한 전략적 배경이었다는 사실과 **‘미국 카드 하나로 북한을 굴복시켰다’**는 주장은 구분해야 한다.
북중 화해의 직접적인 동력은 오히려 명확했다.
서로를 믿지는 못했지만 서로를 적으로 만들기에는 양국이 치러야 할 전략적 비용이 너무 컸다.
혈맹보다 국익…냉각기가 보여준 북중관계의 본질
1960년대의 북중갈등을 단순한 ‘북한의 배신’이나 ‘중국의 승리’로 설명하면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된다.
김일성이 추구한 것은 중국과 소련 가운데 하나를 새로운 보호자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었다.
때로 중국에 접근하고 다시 소련과 관계를 강화하면서 두 강대국 사이에서 북한의 자율성을 최대한 확보하려 했다.
그 바탕에는 체제 생존이 있었다.
중국도 한국전쟁에서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는 역사적 경험만으로 북한을 뜻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1956년 중소 공동개입은 북한의 외세 경계심을 키웠고 문화대혁명기의 김일성 비판은 그 불신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두 나라는 서로를 완전히 버릴 수 없었다.
중국에는 북한이 한반도에서 미국의 군사적 영향력이 중국 국경까지 직접 접근하는 것을 막아주는 전략적 공간이었다. 북한에도 중국은 국경을 맞댄 강대국이자 경제와 안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이 역사는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의미가 있다.
최근 북한은 러시아와 군사·경제·외교 협력을 크게 강화했다. 이를 두고 북한이 중국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해석도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러나 1960년대 경험을 대입하면 다른 관점도 가능하다.
당시 북한이 중소 경쟁 속에서 한쪽에 완전히 종속되기보다 양쪽을 활용해 자신의 전략적 공간을 넓히려 했듯, 오늘날의 북러 밀착 역시 북한이 중국과 결별한다는 단선적인 구도보다 강대국 사이에서 자신의 선택지를 확대하려는 움직임인지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론 1960년대와 현재의 국제환경은 크게 다르기 때문에 두 시기를 그대로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한 가지 역사적 패턴은 분명하다.
북중관계는 가까워졌다고 완전한 신뢰관계가 되는 것도 아니었고, 갈등이 발생했다고 쉽게 무너지는 관계도 아니었다.
한국전쟁이라는 엄청난 공동의 경험도 국가이익의 충돌을 없애지 못했다. 반대로 문화대혁명과 국경충돌이라는 심각한 갈등도 지정학적 필요성을 지우지는 못했다.
1969년 북중관계가 군사적 충돌이 기록될 정도로 얼어붙었다가 1970년 다시 정상화된 과정은 바로 그 역설을 보여준다.
북중관계를 움직여온 힘은 ‘혈맹’이라는 감정만도, ‘배신’이라는 단어만도 아니었다. 서로를 경계하면서도 서로를 필요로 하는 지정학과 체제 생존의 계산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북러 밀착으로 동북아의 전략구도가 다시 움직이는 지금, 1960년대의 북중 냉각기를 다시 들여다봐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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