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9년 바타비아호 난파 후 100여 명 학살…영국 연구진, 현대 조직심리학으로 권력 장악 과정 분석
[인터내셔널포커스] 1629년 6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무역선 바타비아호가 호주 서부 해안의 암초에 좌초했다. 배에 타고 있던 300여 명 가운데 상당수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주변 섬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구조를 기다리던 생존자들은 뜻밖의 공포에 직면했다. 같은 배를 타고 온 사람이 살인을 지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심에는 동인도회사의 하급 상무원 제로니무스 코르넬리스가 있었다. 난파 이후 남은 생존자 가운데 최고위 회사 관계자가 된 그는 식량과 무기, 물자를 장악하며 사실상 지도자로 군림했다.
코르넬리스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을 모아 무장집단을 만들었다. 반대하거나 위협이 될 만한 생존자들은 다른 섬으로 보내거나 살해했다. 여성과 어린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약 두 달 동안 이어진 학살로 100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는 일반적으로 약 125명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 앵글리아러스킨대학교 연구진은 최근 이 사건을 현대 조직심리학의 관점에서 분석한 결과를 소개했다. 9월 학술지에 발표된 연구는 코르넬리스의 행동에서 기업 조직 내 사이코패스적 특성 10가지를 모두 확인했다고 밝혔다.
연구진이 분석한 행동에는 타인을 조종하는 능력, 공감 부족, 책임 회피, 권력욕 등이 포함됐다. 코르넬리스는 추종자들에게 특권을 나눠주면서 충성을 확보했고, 반대자에게는 폭력을 행사했다. 살아남기 위해 서로 협력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그의 지배 아래 갈라졌다.
연구에서 사용한 '기업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은 직장이나 조직에서 나타나는 특정 행동 유형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코르넬리스가 의학적으로 사이코패스 진단을 받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연구진은 당시 기록을 토대로 그의 행동을 현대 심리학의 분석틀에 대입했다.
모든 생존자가 코르넬리스에게 굴복한 것은 아니었다. 군인 출신 비베 하예스는 다른 섬으로 보내진 뒤 동료들과 방어조직을 꾸렸다. 이들은 코르넬리스 일당의 공격을 막아냈고, 구조선이 도착하자 학살 사실을 알렸다.
코르넬리스는 체포된 뒤 현지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됐다. 그를 따랐던 일부 가담자들도 처벌받았다. 바타비아호 난파 사건은 네덜란드 해양사에서 가장 참혹한 사건 가운데 하나로 기록됐다.
이번 연구가 흥미로운 이유는 학살을 저지른 한 개인의 잔혹성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코르넬리스는 처음부터 모든 생존자를 무력으로 굴복시킨 것이 아니었다. 지위와 물자를 이용해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고, 그렇게 확보한 권한으로 폭력을 확대했다.
400년 전 외딴 섬에서 벌어진 사건을 오늘날의 기업 조직과 그대로 비교하기는 어렵다. 다만 연구진은 코르넬리스의 행동에서 현대 조직에서도 관찰되는 조종과 지배, 공감 부족의 특성을 발견했다. 난파선에서 시작된 학살은 이제 조직심리학의 연구 대상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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