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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스마트 경비 로봇 등장
    ▲ 사진출처=중국신문망(中新網) [동포투데이] 중국망(中國網)에 따르면 최근 스마트 경비 로봇 ‘청청(成成)’이 중국철도청두국(成都局)집단유한공사 청두전력공급구간젠먼관(劍門關)변전소에서 순찰을 진행했다. 2017년12월6일 시청철도 개통 이후 ‘청청’은 첫 춘윈(春運 춘제 연휴 특별수송 기간)을 맞이했다. 1.1m 높이의 스마트 경비 로봇 ‘청청’은 변전소 내 순찰을 진행하면서 실시간으로 현장 화면 및 데이터를 원격 통제시스템에 전송한다. 또 ‘청청’은 적외선 검온 기능을 갖추고 있어 발열 현상 등을 즉시 탐지할 수 있으며 변압기 소리를 채집해 분석함으로써 변압기의 운행 상황을 판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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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20
  • 동북항일연군 조선인 "여장군" ― 허성숙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간고한 항일무장투쟁시기 여성의 몸으로 육중한 기관총을 보총다루듯 휘두르며 일제놈들을 무리로 쓸어눕힌 한 조선인 “여장군”이 있었다. 그가 바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4사 제1퇀 제1련의 첫 여성기관총사수인 허성숙이다. 1934년의 겨울은 빨리도 찾아왔다. 10월에 들어서자 동만의 대지는 큰 물속에 파묻혀 버렸다. 그때 허성숙은 과도한 피로와 열악한 숙영 환경 등으로 병들어 눕게 되었다. 그러나 조직에서는 그를 연길현 사방대구위에 보내 부녀사업을 하는 한편 병 치료를 하게 하였다. 동북항일연군에 있어서 겨울은 가장 간고한 시기였다. 일제의 토벌, 방화, 약탈 등 심공정책으로 하여 당시 인민들의 생활은 극히 간고하였고 항일부대 역시 먹는 것을 해결하는 것이 가장 큰 난제였다. 허성숙은 그냥 남들의 관심 속에서 병 치료만은 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한테 차례진 식량을 가난한 백성가정의 애들한테 보내주고는 자기 역시 함께 허리띠를 졸라매며 풀뿌리로 연명하였다. 허성숙은 또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기도하여 사람들은 선량하고도 의지가 견강한 이 처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시시각각 부대의 전우들을 그리었다. 1935년 봄, 허성숙은 신체가어느 정도 회복되자 부대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그의 간절한 요구에 의해 부대에서는 그더러 기관총수로 되기 위하여 허성숙은 모든 시간을 집중하여 훈련하였다. 매번 부대가 숙영할 때 기타 전우들은 모두 잠자리에 들었지만 그만은 피로를 무릅쓰고 훈련을 견지하였다. 결과 그의 기관총 사격기술과 묘준 능력은 놀라운 제고를 가져왔다. 1935년 6월, 허성숙은 연갈현의 도목구와 옹성라자 지구에서 있은 전투에 참가, 냉정을 잃지 않고 정확하게 적들을 쓸어 눕혀 전우들로부터 절찬을 받았다. ▲ 6월 30일 새벽 김인구가 인솔하는 2천여 명의 적들은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간삼봉을 삼면으로 둘러싸고 올라왔다.(이미지 출처 : 중국해방군보) 1936년 3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은 동북항일연군 제2군으로 개편되었고 허성숙이 소속된 제1퇀은 제1사로 되었다. 항일연군 제2군은 저명한 항일장령 왕덕태, 위증민의 인솔하에 동만과 남만의 여러 현에서 출몰하면서 기동 영활한 유격전술로 일제한테 수차례에 거쳐 섬멸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 해는 허성숙한테 있어서 가장 빈번하게 전투에 참가한 한해였다. 4월의 화전현 대포차자(지금의 돈화시)공략 전투,8월의 무송현성 전투,10월의 안도현 동청구에서의 위만주국군과 교전, 11월의 임강현 대양차에 있는 위만주국군의 거점을 날려 보낸 전투 등으로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당시 허성숙의 기관총은 무송현성을 진격할 때 부대로 하여금 성동남쪽의 거점을 일격에 점령하게 하였고 대양차의 전투와 동청구의 전투에서도 큰 위력을 발산하였다. 이러한 전투에서의 단련과 고험을 거쳐 허성숙은 항일연군의 용맹한 여전사로 거듭났으며 1936년에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임규광의 희생은 허성숙에게 형언할 수 없는 비통과 슬픔을 가져다주었다. 허성숙은 어느 한 나무아래에서 한동안 통곡한 뒤 눈물을 닦고는 입술을 악물었다. “저에게 기관총을 맡겨주십시오!” 허성숙은 상급에 간절히 요구하였다. 상급에서는 그의 요구를 허락하였다. 이리하여 허성숙은 항일연군 제1로군 제4사 제1퇀 제1련의 첫 여성기관총사수로 되었다. ▲6월 30일 새벽 김인구가 인솔하는 2천여 명의 적들은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간삼봉을 삼면으로 둘러싸고 올라왔다. 허성숙은 사격명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기관총으로 맹렬한 사격을 가하여 적들을 무더기로 쓸어 눞혔다. (이미지 출처 : 중국해방군보) 1937년 6월 허성숙은 부대를 따라 장백현 13도구에 진출, 간삼봉에서 일제와 조우전을 벌이게 되었다. 6월 30일 새벽 김인구가 인솔하는 2천여 명의 적들은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간삼봉을 삼면으로 둘러싸고 올라왔다. 기관총을 손에 잡고 적들을 노려보던 허성숙은 사격명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맹렬한 사격을 가하였다. 놈들은 무더기로 쓰러졌다. 기세 당당히 덮쳐들던 적들은 혼비백산하여 뿔뿔이 도망쳤다. 간삼봉전투 후 전사들은 허성숙의 용감성과 대담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여성의 몸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기관총을 휘두르며 적들을 삼대베듯 쓸어 눕히는 그에게 “여장군”이라는 영광스러운 별호를 달아주었다. 그때로부터 제4사에서는 “여장군”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편집 철민 기자/다음에 계속) 참고문헌 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 2, 原書房, 1967, 65~66쪽.☞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 1-분책, 563~564쪽.☞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 3, 326쪽.☞박용옥, 「조신성의 민족운동과 의열활동」,『오세창교수 화갑기념논총』, 한국근현대사학회, 1995 참조.☞『독립신문』 1921년 1월 15일, 3월 26일, 12월 6일자 ; 『동아일보』 1921년 10월 21일자 ; 박용옥, 「조신성의 민족운동과 의열활동」, 『오세창교수 화갑기념논총』.☞『동아일보』 1921년 6월 13일자.☞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편저, 『항일녀투사들』, 1984.☞村田陽一 編譯, 『コミンンテルンン資料集』 2, 大月書店, 1982, 75쪽.☞조선총독부, 『朝鮮の治安狀況』, 1930, 12~13쪽.☞중공연변주위 당사사업위원회 편저, 『연변인민의 항일투쟁』, 연변인민출판사.☞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편저, 『항일녀투사들』, 101~102쪽.☞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편저, 『항일녀투사들』, 201~216쪽.허성숙의 열사전은 『불멸의 투사』 및 『빨찌산의 녀대원들』등에 실려 있는데, 그의 장렬한 희생 장면 묘사는 각기 다르다. 『항일녀투사들』에서는 7대의 敵특설부대 중 첫 번째 트럭을 향해 사격하다가 다리와 복부에 적탄을 맞고 쓰러진 것을 그 이튿날 한 韓醫師가 자기 집에 데려다 눕히자 죽었다고 했다. 『불멸의 투사』에서는 다리 부상으로 적에게 체포 압송된 그녀가 自衛團長의 딸임을 알고 전향시키려 했으나 끝내 불복하여 총살했다고 했다. 『빨찌산의 녀대원들』에서는 중상으로 체포되느니 차라리 끝까지 싸우다 죽겠다고 생각, 250여발 보총 탄알을 모두 쏘았고 마지막으로 수류탄을 적에게 던져 큰 희생을 주고 자신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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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20
  • 류경기 서울시 전 부시장, ‘류경기의 우문현답’ 출판기념회 개최
    [동포투데이] 류경기 서울시 전 부시장은 32년간의 공직생활과 서울시정을 정리한 자전적 에세이 <류경기의 우문현답-서울을 바꾼 지혜와 용기> 출판기념회를 24일(토) 오후 5시 중랑구 묵동 웨딩그룹 위더스 중랑 5층에서 개최한다. 류경기 전 부시장은 1985년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과 동시에 행정고시 29회에 합격하여 서울시공무원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서울시 산업정책과장, 기획담당관, 경영기획관, 대변인, 기획조정실장, 행정1부시장 등을 역임한 후 작년 퇴임하였다. 서울시 최고의 기획통으로서 주요 사업들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번 자전적 에세이 <류경기의 우문현답-서울을 바꾼 지혜와 용기>를 통해 류경기 전 부시장은 그동안 서울시 현장 곳곳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내용들을 진솔하게 풀어냈다. 서울이 세계가 부러워하는 최고의 도시가 되기까지 그동안 거듭해온 변화와 혁신의 과정, 그 속에서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도전으로 서울시 발전에 일조해 온 그의 역사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류경기 전 부시장은 오랫동안 ‘현장에 답이 있고 아픈 곳이 중심이다’라고 강조해왔다. 이러한 마음가짐에서 그가 얼마나 현장을 중요시 여기고 시민소통과 협치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왔는지 알 수 있다. 지난 1월에는, 6.13 지방선거 중랑구청장 출마를 선언하며 “그동안 서울시 행정경험을 통해 얻은 ‘참여행정, 소통행정, 현장행정’의 지혜와 용기를 중랑구 발전을 위해 쏟아 붇겠다.”고 밝힌 바 있다. 류경기 전 부시장은 “변화는 현장에서부터 시작된다.”며 “늘 현장에서 지역주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소통의 행정가가 되어 중랑구 구석구석 모든 곳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킬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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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20
  • 서울시, ‘2018 서울시 청년수당’ 대상자 7천명 모집
    [동포투데이] 서울시는 청년의 구직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2018 서울시 청년수당’ 대상자를 3월 2일부터 3월 13일까지 모집한다고 밝혔다.작년부터 안정적으로 제도화된 서울시 청년수당은 청년이 사회 진입을 위한 준비 시간을 확보할 수 있게 돕는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으로서 추진되었다. 올해는 작년보다 2000명 많은 7000명을 대상으로 3월과 5월, 2회에 나누어 진행하며 이번 3월 진행되는 모집은 1차 모집으로 4000명 내외를 우선 선발할 계획이다. 서울시 청년수당은 공고일 기준으로 서울시에 거주하고 있는 가구 중위소득 150% 이하의 만 19세부터 29세의 미취업청년이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으며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 가능하다. 최종 지원 대상자 4000명은 가구소득과 미취업 기간, 부양가족 수, 활동 계획 등을 통합적으로 고려하여 선발한다. 선정 기준은 가구소득(60점), 미취업 기간(40점)이며 배우자 및 자녀가 있는 청년은 최대 12점까지 가산점을 받을 수 있다. 또한 활동계획서를 바탕으로 활동 목표 및 계획 내용이 사업 취지에 맞지 않는 청년은 심사 과정에서 제외될 예정이다. 최종 대상자로 선발된 청년은 구직활동을 위해 매월 50만원씩 최소 2개월에서 최대 6개월간 지원받는다. 또한 체계적인 구직활동을 위하여 서울시청년활동지원센터의 청년마음건강, 관계확장모임, 구직역량강화 등 청년 특화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다. 서울시 청년수당의 2017년 참여자 분석 연구에 따르면 99.2%의 청년들이 목표 달성에 청년수당이 도움이 되었다고 응답한 바 있어 1차적인 정책의 실효성을 확보했다는 평가다. 2017년 청년활동 지원사업 연구 성과 발표회는 3월 6일 열릴 예정이다. 서울시는 청년수당이 다양한 취업활동에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신뢰를 바탕으로 한 ‘사용자 자율성’을 보장하고 있다. 다만 사업 취지에 맞지 않는 특급 호텔, 카지노, 상품권 판매, 귀금속, 유흥주점 등은 사용이 제한된다. 그 외에도 서울시는 참여자가 제출한 활동 내용 등이 사실과 다를 경우 선정 취소 및 환수 등을 통해 사업 운영에 만전을 기할 예정이다. 전효관 서울혁신기획관은 “요즘 청년들은 학자금 상환금이나 생활비 마련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있다”며 “이는 미래를 저당잡힌 채 방치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고 밝혔다. 또한 “청년수당은 50만원의 지원금을 넘어 사회가 빼앗은 시간을 청년들에게 되돌려 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며 “청년수당의 성공적 추진을 통해 시간을 되돌려 받은 청년들이 사회에서 마음껏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게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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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19
  • 두 세기의 교체시대, 中 서구문화의 선구자 황초구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황초구(黄楚九 1872-1931)는 절강 여요인(浙江余姚人)으로서 청조말년과 민국초엽 서약업 및 오락업을 중국으로 들여온 즉 서구문화를 보급시킨 선구자라 할 수 있다. 그는 또 일생의 창업 중 여러 개 업종에 투신하여 <백가보스(百家经理)>로 불리기도 했다. 예하면민간자본으로 된 중국의 첫 제약기업인 <용호회사(龙虎公司)>를 세웠고 중국의 첫 종합성 오락장소인 <상해신세계(上海新世界)>의 창립자였으며 또한 중국의 첫 오락신문인 <대세계보(大世界报)>를 창간, 이른바 의약, 오락, 금융과 부동산 등 업에까지 손을 뻗었으며 21개의 의약기업을 묶어 세운 <황씨의약그룹(黄氏医药集团)>의 대보스였다. 황초구의 <학력>이라고 하면 큰 학당에 다닌 것도 아니고 서양에 다녀온 것은 더욱 아니었으며 중의였던 어머니를 따라다니면서 안과의술 비법을 익힌 것이 그 전부였다. 하지만 황초구는 영리하고 머리가 비상했으며 취미가 다양했는가 하면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지꿎고도 담대한 그것이었다 한다. 황초구가 16세가 되던 해인 1887년, 부친이 타계했다. 그러자 그는 모친을 따라 상해에 들어갔다. 당시 그의 보자기 속에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약서(药书) 한권이 있었다. 황초구가 이 책 한권에 모든 인생을 기탁하면서 상해로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상해에서 황초구는 모친과 함께 성황묘 부근의 한 고층누각 밑에서 난전을 펼쳐놓고 약재를 파는 장사를 시작, 인생개척의 첫 발자국을 내디디었다. 당시 성황묘 부근은 옛 상해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로서 상가들이 운집된 곳이기도 했다. 바로 이곳에서 난전을 벌인 황초구는 돈을 번다기보다는 작은 난전으로부터 한 가지 업체를 운영하는 비법을 배우기에 더욱 신경을 기울였다. 어떻게 하면 물건을 사는 이들의 마음이 기쁘게 할 수 있겠는가? 또 이들이 가장 급히 수요하는 약재품종, 평소 필수적으로 사재해두는 약재품종 등에 대해 곰곰이 따져보기도 했으며 앞으로 장사를 함에 있어서 어떤 방향으로 기틀을 잡아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도 자주 생각해 보았다. 이렇게 자신의 일확천금보다는 고객들의 수요와 만족도에 대해 집착할수록 황초구의 난전은 날이 갈수록 단골이 많아졌으며 흥성해지기도 했다. 한편 이런 고객들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향후도 뚜렷한 선택이 있게 되었다. ▲ 황초구가 세운 <상해대세계>의 건물모습 그 뒤 1890년(광서16년 - 光绪十六年), 상해 법대거리(法大马路)에 자신의 첫 업체인 <상해 중불대약방(上海中法大药房)>을 차리면서 황초구의 인생은 비교적 승승장구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당시 중약만 고집하는 봉건시대의 의약업체들과는 달리 황초구는 중서의가 결합되는 의약발전의 길을 선택, 중국의약계에 신선한 서구의약의 문화 붐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나이 32세가 되던 1904년, 황초구는 상해는 물론 중국 전체가 깜짝 놀랄 대사를 일궈냈다. 그것인즉 황초구가 세운 의약기업 <용호회사>에서 연구제작한 <에로보뇌즙(艾罗补脑汁)>이 탄생한 것이었다. 중서의약이 결합된 이 약은 출시하자마자 의약판매업체 및 병원들에서 앞다투어 구입하는 명약으로 되었으며 지어 당시 어떤 의원들은 이 약을 두고 <지혜를 키우고 백병 제거(长智慧、祛百病)하는 명약> 이라고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어찌 보면 그 때로부터 중국의 의약업은 <황초구의 시대>에 들어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어서 황초구는 100년 넘게 중국의 약방들에 없어서는 안 될 약 <용호인단(龙虎人丹)>을 연구‧개발하여 재차 세상을 놀라게 했다. 위에서 언급하다 싶이 이 시대는 황초구의 창업사상 말 그대로 승승장구하던 시대였다. ▲ 옛 상해 거리의 일각 1907년,하쇄방과 합작해 오주대약방(五洲大药房) 개설한 뒤를 이어 황초구는 의약업계를 벗어나 기타 항업에도 새로운 활무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1913년, 문화오락업체인 <신세계(新世界)>를 개업, 1918년에는 독자적으로 중화영화회사(中华电影公司)를 창립했으며 1919년에는 일야은행(日夜银行)을, 그 이듬해인 1920년에는 합작업체인 상해 일야물권교역소(海日夜物券交易所) 등 문화 및 금융 등 분야에도 그 명맥을 이어갔다. 그 외, 삼정부동산회사(三星地产公司), 복창엽업회사(福昌烟公司), 온천욕실(温泉浴室), 몽춘각찻집(萝春阁茶馆), 구복남 잡화점(九福南货店), 맥스카이 당과점(麦司凯糖果店), 황초구병원 등 중소업체까지 합치면 그 업체가 100여개에 달했다. 그러면서 황초구는 상해상회 위원(上海商会委员), 상해적십자회 경제위원(经济委员), 상해신동약업공회 주석(上海新同药业公会主席) 등 사회직무도 맡아해 한시기 동안 상해의 서민사회에 눈길을 돌이면서 사회와 민중한테 많은 유익한 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50대에 들어서면서 황초구는 투기활동에 참여, 상해의 폭력사회와 자주 이러저러한 마찰을 빚다가 당시 상해 폭력사회의 두목 황금영(黄金荣), 두월생(杜月笙) 등 사람들한테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31년 1월 19일, 황초구는 심장병으로 상해에서 타계, 향년 59세였다. 한편 황초구가 사망한 뒤인 그해 5월, 그의 오락업체였던 <상해대세계>가 폭력사회의 두목 황금영한테 넘어간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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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19
  • 日초등학생 모델, 얼굴 미모로 인기몰이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일본의 한 초등학생 모델이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외관으로 주목을 받는 인기몰이 모델신인으로 발돋음 했다고 18일 현지 언론이 보도했다. 나카지마 세나란 이름을 가진 이 초등학생 모델은 지금의 키가 1.63미터로 연예권에 데뷔한지 1년밖에 되지 않지만 뛰어난 미모와 자신의 노력으로 이미 일본의 유명배우 이나가키 고로, 츠요시, 카토리 싱고 등과 함께 영화에도 출연했으며 많은 잡지의 표지모델로도 선정되곤 했었다. 올해 12살인 나카지마는 오는 3월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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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19
  • 인간세상에 내려온 중국의 8명 ‘서시’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중국 청년망(靑年網)에 따르면 요즘 중국의 인터넷에서는 임시 음식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8명 <서시(西施)>의 얼짱을 두고 의논이 분분하다. 이들 8명의 <서시>들로는 다음과 같다. <뽀즈 서시(包子西施)>: 최근 베이징영화학원의 한 학생은 <뽀즈를 파는 농아 소녀>란 제목을 단 단편영화 한편을 찍었는데 길가의 한 뽀즈가게를 임대맡고 촬영하기 시작, 공교롭게도 많은 행인들이 동조하면서 촬영이 아주 순리로웠으며 그 것을 인터넷에 올리자 대뜸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오징어 서시(鱿鱼西施)>: 이는 청두(成都)에서 한 오징어 가게를 차린 젊은 부부가운데의 여주인공으로 흰 찐빵처럼 새하얀 피부에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소녀로 청두 건설골목에서는 모두 그녀를 <오징어서시>라고 정답게 불러주고 있다. <볶음밥 서시(炒饭西施)>: 서남 석유대학(西南石油大学) 주변에서 발견한 이 여자애는 식당의 접대원 차림을 한 미녀로서 그녀는 흔히 볼 수 있는 <식당아줌마>같은 인상을 주고 있는 <볶음밥 서시>이다. 그녀는 평범한 여대생 생활 속에서 돈도 벌고 서민생활도 체험하고 있다고 한다. <사탕수수 서시(甘蔗西施)>: 대학 재교생인 그녀는 겨울방학이 다가오자 부모님을 도와 장사에 나선 <사탕수수 서시>이다. 청순한 외모를 가진 소녀는 장사에 나서자 마자 폭발적인 뉴스인물로 되었으며 외모가 아름다운가 하면 마음씨는 더욱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돼지족발 서시(猪蹄西施)>: 대학을 나오자 마자 창업 길에 나서서 한 돼지족발 가게를 차린 그녀는 몇 번 매스컴의 뉴스인물로 오르내리더니 대뜸 주변의 인기로 되었다. 리페이위(李佩煜)란 이름을 가진 그녀는 용모가 단정하고 또한 봉사성도 훌륭하여 <돼지족발 서시>란 별칭을 갖게 되었다. <두유 서시(豆浆西施)>: 화중 과학기술대학(华中科技大学) 1층에서 두유를 파는 이쁘게 생긴 이 소녀는 학생들로부터 두유보다도 더 흰 <두유 서시>로 불리고 있다. <수이징까오 서시(水晶糕西施)>: 방학기간 부모님을 도와 수이징까오(중국 베이징의 전통음식)를 파는 이 소녀는 어느 한 네티즌에 의해 웨이버(微博)에 오르자 마자 뉴스인물로 되었으며 그것을 계기로 <수이징까오 서시>란 칭호도 따라 붙게 되었다. <쟝샹빙 서시(酱香饼西施)>: 부모와 함께 저쟝 공상대학(浙江工商大学) 근처에서 쟝샹빙 가게를 차린 이 소녀는 류하이(刘海)란 이름을 가진 이쁘장한 아가씨로서 대학가 학생들은 모두 이 소녀를 두고 <쟝샹빙 서시>라고 불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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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18
  • 정월 초이튿날 中 하이난, 관광객들로 북적
    [동포투데이 김다윗 기자 ] 지난 17일(음력 정월 초이튿날) 길이가 20여 킬로미터가 되는 중국 하이난(海南)의 산야만(三亚湾) 해수욕장에는 관광객들로 붐비었다. 이 날 산야만의 기온은 32도에 달해 해수욕장의 백사장에는 공기가 맑고 해빛이 따뜻해 휴가를 즐기는 관광객들의 레저천당으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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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18
  • 동북항일연군 조선인 "여장군" ― 허성숙①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간고한 항일무장투쟁시기 여성의 몸으로 육중한 기관총을 보총다루듯 휘두르며 일제놈들을 무리로 쓸어눕힌 한 조선인 “여장군”이 있었다. 그가 바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4사 제1퇀 제1련의 첫 여성기관총사수인 허성숙이다. 허성숙, 1915년 연길현 차조구 중평촌(지금의 안도현)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가난하여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그는 어려서부터 집살림을 도와 산나물도 캐오고 땔나무도 해오면서 노동으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는 남자들 못지않게 힘도 셌으며 성격도 남달리 쾌활하였다. 그가 15살 되던 해인 1930년 5월, 동만일대에서는 성세호대한 반제·반봉건투쟁은 노한 불길마냥 용정을 중심으로 온 동만을 휩쓸었다. 그 당시 중평촌에는 혁명자들이 세운 야학교가 있었다. 선생은 농민들에게 문화지식을 보급한다는 명의로 일본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반대하고 자유해방을 쟁취할데 관해 선전하였다. 당시혁명가들의 강의를 청취하는 사람들 중에는 동그란 얼굴에 단발머리를 한 12~13세 가량의 소녀가 있어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그는 매일 저녁마다 가장 일찍 야학교에 와 강의시간을 기다렸으며 강의가 시작되면 정신을 집중하여 들었다. 때로는 눈을 깜빡이면서 뭔가를 사색하기도 했다. ▲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4사 제1퇀 제1련의 첫 여성기관총사수인 허성숙(이미지 출처 : 중국해방군보) 이 소녀가 바로 허성숙이였다. 그는 야학교의 선생님을 몹시 탄복, 선생님은 지식과 재능이 있어 강의하는 구절 구절과 마디마디가 이유가 있고 들을수록 격동되고 통쾌하며 새힘이 솟구친다고 생각하였다. 야학교에서 강의를 듣는 차수가 많아질 수록 허성숙의 혁명지식은 갈수록 풍부해 졌다. 한번은 집에서 마을의 애들한테 야학교에서 들은 쏘베트에 대한 얘기를 해주다 아버지한테 훈계를 당하였다. 아버지는 “어린애들은 그런일에 참견하지 말아야 안다”고 했고 허성숙은 “전 배울 뿐만 아니라 앞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반발하였다. 1930년, 반제반봉건투쟁의 불길이 동만지구에서 활활 타올랐고 편벽한 시골인 중평촌 역시 이 격류속에 말려들었다. 당시 허성숙은 15세였지만 공산당 지하공작원의 교육과 도움으로 소년선봉대에 가입하였고 혁명투쟁에 투신하였다. 1933년에 허성숙은 청년단에 가입, 그해 그는 또 연길현유격대 여전사로 되었다. 열화와 같은 항일투쟁을 맞으면서 허성숙의 가슴에서는 피가 끓어번지였다. 그는 청년들한테 주어진 중임을 깨달았으며 멸망의 위기에 처한 나라와 민족을 구하고 일본침략자를 몰아내는 투쟁에 매진하겠다고 다짐하였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일제의 “동계토벌”이 시작되었다.일제와 위만주국군은 도합 3,000여 명의 병력을 출동하여 동만항일무장을 요람속에서 없애버리려고 시도했다. 연길현 유격대는 “반토벌”전에서 14일간 전투를 견지, 일제는 유격대를 소멸하지 못햇을 뿐만 아니라 유격대에 의해 10여구의시체를 내버려둔채 현성으로 물러가는 수밖에 없었다. 전투 중에서 허성숙은 남달리 용감하고도 결단성 있게 전사들과 함께 돌격하면서 적을 무찔렀다. 그는 또 행군도중이나 숙영지에서도 다른 전사를 도와 총을 메고 상병원을 돌보는가하면 전사들의 옷을 씻어 기워 주었으며 취사원을 도와 밥도 짓곤 하였다. 오직 부대의 일이고 항일에 유익한 일이라면 뭐든지 개의치 않고 충실히 하였다. 바로 그 시기 포수로 사냥을 즐기던 허성숙의 부친 허기영은 일제의 농락과 협박에 넘어가 자위단 단장으로 되었다. ▲ 1934년 7월의 어느날 허성숙은 중평촌 부근의 한 골짜기에서 아버지 허기영이 인솔하는 자위단과 조우전. (이미지 출처 : 중국해방군보) 1934년 7월의 어느날 허성숙이 소속된 동북인민혁명군(동북항일연군)독립 1퇀 1련은 중평촌 부근의 한 골짜기에서 허기영이 인솔하는 자위단과 조우,일촉즉발의 대치상태를 이루었다. 이때 허성숙은 딸의 절절한 호소로 부친의 마음을 움직이리라 마음먹었다. “아버지! 딸 성숙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들은 일제를 때려엎고 민족을 해방하기 위해 싸우는 대오입니다. 무엇때문에 우리들이 서로 싸워야 합니까? 아버지! 총부리를 돌리십시오, 딸 성숙이와 함께 성스러운 반일투쟁에 참가합시다!” 허성숙이는 애타는 목소리로 웨쳤다. 그는 지금이라도 아버지가 잘못을 뉘우치고 혁명의 길에 들어설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염원과는 반대로 허기형의 멱따는 소리와 함께 요란한 총소리가 울렸다. 자위단 놈들이 허기형의 지휘하에 공격을 개시했던 것이다. 아군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돌격명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전사들은 쏜살같이 적진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놈들은 무리로 쓰러졌다. 어느 하루 허성숙은 유격대원들과 함께 식량을 얻어가지고 돌아오는 도중 토벌대 놈들과 맞띄우게 되었다. 그는 침착하게 다른 대원들을 수림 속에 은폐시키고 자기는 짐을 진채 전봇대에 올라갔다. 5~6명의 토벌대 놈들이 전봇대 부근에 접근하자 허성숙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놈들에게 수류탄 불벼락을 들씌웠다. 이 일로 하여 부대의 전사들은 허성숙의 지혜와 용감성에 깊이 탄복하였다. (편집 철민 기자/다음에 계속) 참고문헌 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 2, 原書房, 1967, 65~66쪽.☞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 1-분책, 563~564쪽.☞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 3, 326쪽.☞박용옥, 「조신성의 민족운동과 의열활동」,『오세창교수 화갑기념논총』, 한국근현대사학회, 1995 참조.☞『독립신문』 1921년 1월 15일, 3월 26일, 12월 6일자 ; 『동아일보』 1921년 10월 21일자 ; 박용옥, 「조신성의 민족운동과 의열활동」, 『오세창교수 화갑기념논총』.☞『동아일보』 1921년 6월 13일자.☞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편저, 『항일녀투사들』, 1984.☞村田陽一 編譯, 『コミンンテルンン資料集』 2, 大月書店, 1982, 75쪽.☞조선총독부, 『朝鮮の治安狀況』, 1930, 12~13쪽.☞중공연변주위 당사사업위원회 편저, 『연변인민의 항일투쟁』, 연변인민출판사.☞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편저, 『항일녀투사들』, 101~102쪽.☞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편저, 『항일녀투사들』, 201~216쪽.허성숙의 열사전은 『불멸의 투사』 및 『빨찌산의 녀대원들』등에 실려 있는데, 그의 장렬한 희생 장면 묘사는 각기 다르다. 『항일녀투사들』에서는 7대의 敵특설부대 중 첫 번째 트럭을 향해 사격하다가 다리와 복부에 적탄을 맞고 쓰러진 것을 그 이튿날 한 韓醫師가 자기 집에 데려다 눕히자 죽었다고 했다. 『불멸의 투사』에서는 다리 부상으로 적에게 체포 압송된 그녀가 自衛團長의 딸임을 알고 전향시키려 했으나 끝내 불복하여 총살했다고 했다. 『빨찌산의 녀대원들』에서는 중상으로 체포되느니 차라리 끝까지 싸우다 죽겠다고 생각, 250여발 보총 탄알을 모두 쏘았고 마지막으로 수류탄을 적에게 던져 큰 희생을 주고 자신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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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18
  • 역사의 살아있는 증인, 조선족 항일투사 - 이재덕③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이(리)재덕(李在德)- 동북항일연군 내의 조선족 여투사이자 국제주의 전사였으며 살아 있은 역사의 증인이다. 그리고 조선인으로부터 중국조선족으로 탈바꿈하게 된 특수시대가 낳은 여성강자이기도 하다. 결혼 뒤 이재덕은 여전히 6군 피복공장에서 근부했고 남편 우보합은 소년련의 100명 기병을 거느리고 부금(富锦), 화남(桦南), 쌍압산(双鸭山), 의란(依兰)으로 진출했다. 1938년은 동북의 항일전쟁 사상 전투가 가장 치열했고 가장 간고한 한해이기도 했다. 5월에 들어서면서 이재덕은 임산기에 이르렀으나 부대를 따라 이동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시 조직에서는 이태준(李泰俊) 부부를 파견하여 이재덕을 돌보게 했다. 그 때 그들은 깊은 밀림속의 한 작은 골짜기에서 은신할 곳을 찾아 숙영했고 이재덕은 그 곳에서 남자애를 출산, 이태준 부부가 새생명을 위해 성의껏 돌봤지만 환경이 열악하고 먹을 것마저 없는 상황에서 이들은 생사의 고비에서 울부짖는 이 작은 생명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으며, 어린 것의 숨이 떨어지자 이들은 비통을 참으며 어린 것을 밀림속에 매장해야만 했다. 1939년 1월, 우보합과 이재닥은 동북항일연군 제6군 4사 32퇀의 37명 전사들과 함께 우쑤리강(乌苏里江)을 건너 소련의 임마 누엘을 거쳐 다시 하바롭스크 도착, 하바롭스크에서 이들 부부는 조상지 사령과 6군 군장 및 11군 군장 등을 만날 수가 있었다. 1940년부터 이재덕은 사업의 수요로 소련 하바롭스크에서 무선전 접수 및 발신 그리고 수리 기술을 배웠다. 그 뒤 1941년 7-8월에는 항일연군 제2로군 2지대 왕효명(王效明)이 인솔하는 소부대를 따라 중국내로 잠입, 보청(宝清), 부금(富锦)과 의란(依兰) 등 지에서 활동하면서 소부대의 무선전 접수/발신 임무를 맡아하였다. 1942년 겨울, 이재덕은 강신태(姜信泰) 정위를 따라 재자 소련으로 건너가 88국제여단 교통영의 전사로 되었다. 1945년 8월 8일, 소련은 정식으로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150여만명의 막강한 병력을 동원해 중국의 동북과 조선을 향해 파죽지세로 진격, 이와 더불어 88국제여단의 많은 항일연군 장병들은 분분히 소련홍군과 배합하여 동북 및 조선 해방 전투에 뛰어들었다. 그해의 9월 8일, 이재덕의 남편 우보합은 주보중 장군을 따라 비행기에 탑승해 장춘으로 향발했다. 소련군과 배합해 질서를 유지하고 인민무장을 조직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재덕은 남편과 동행할 수 없었다. 두 자녀가 있는 여성인데다 당시 이재덕은 세 번째로 임신한 몸이었기 때문이었다. ▲ '중국인민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65주년’ 기념활동에 참가한 이재덕 여사 이재덕은 1945년 12월이 돼서야 부분적으로 자녀들을 거느린 기타 여 전사들과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떠나기 앞서 이재덕은 김정숙(김일성 부인), 왕옥환(최용건 부인) 등 함께 동고동락을 해오던 10여명의 여전사들과 뜨거운 포옹으로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당시 88국제여단의 조선인 장병들 중 두갈래로 나뉘어 한갈래는 중국 동북으로 진출하고 다른 한 갈래는 조선으로 진출하게 되었는데 김정숙, 왕옥환 등 여전사들은 조선으로 진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재덕이 귀국해 수분하를 거쳐 장춘에 도착하자 주보중 장군이 장춘역까지 마중나와 있었으며 동북민주연군의 대부분 부대는 이미 장춘을 떠나 길림부근의 차루허(岔路河)까지 철수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소련정부는 국민당 정부와 이른바<중소우호동맹조약(中苏友好同盟条约)>을 체결, 소련군이 전반 동북을 해방시킨 후 동북의 대도시들을 국민당 정부에 넘겨주기로 했으며 이 <조약>에 따라 동북민주연군은 잠시 장춘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동북민주연군은 일단 소련홍군이 철거만 하면 신속하게 장춘, 하얼빈, 치치할 등 대도시를 점령할 계획을 잡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장춘의 전략적 위치는 아주 중요하기도 했다. 이 계획을 차질없이 수행하기 위하여 당시 주보중은 우보합을 소련군에 파견, 소련군과 접촉하는 기간 그들이 <66666>이란 신호로 장춘에서의 철수 시간을 알린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렇게 되자 우보합과 이재덕은 윤번으로 잠을 자면서 주야로 소련군의 무선전 통신을 감청, 드디어 1946년 4월 14일 낮 12시, 소련군 무선통신은 과연 <66666>을 발송했고 이재덕은 즉시 참모장한테 이를 보고했다. 이 날 오후 2시, 주보중이 장춘을 향해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동북민주연군은 세갈래로 나뉘어 도심을 향해 총공격을 발동, 18일 새벽에 장춘을 공략하였다. 하지만 국민당이 대병력을 집중하여 수차 공격해오고 또한 중공중앙의 포치에 따라 중공 동북국에서는 임시 대도시를 포기하기로 결정하고는 5월 28일 재차 장춘에서 철거했다. 그 뒤 동북국과 동북군구는 하얼빈으로 철수했고 이재덕은 길동군구를 따라 길림을 거쳐 연길에 도착, 이재덕은 길동군구 무선전 부문에 배치되어 장장 3년에 거친 중국 국내해방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다. 길동군구에서 근무하는 동안, 이재덕은 3명의 자녀를 거느린 몸임에도 불구하고 중임을 맡고 있는 남편의 내조에 정성을 다하는 한편 자신이 맡은 업무도 출중하게 완수하여 늘 강신태를 비롯한 길동군구 장령들의 표창을 받았었다. ▲ 1992년, 리재덕과 그의 자녀들은 평양을 방문, 김일성 주석과 기념사진을 남겼다. (왼쪽부터큰 딸 우화, 이재덕, 김일성 주석, 장남 우영) 1948년 3월, 이재덕은 지방으로 전근, 선후로 길림성 부녀연합회 위원, 연길 조선족간부학교 조직과 과장, 화룡현위 위원 겸 부련회 주임 직을 맡았으며 1949년 1월에는 길림성 부녀대표단 성원으로 심양에 가 동북부녀대표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1949년 3월, 이재덕은 제4야전군을 따라 남하, 호북성 이창(宜昌)까지 갔다가 이창에서 시부녀연합회 주비위원회(筹委会) 주임으로 활약했으며 그의 남편 우보합은 이창시 전신국의 군대표로 되었다. 새 중국이 창립된 후 이재덕은 중앙인민정부 비서처 당지부 조직위원 및 보위위원으로 있다가 1953년에는 국가 정무원(政务院- 국무원 전신) 당대표대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당시 이재덕은 사업에 까근하고 업무완수량이 많고도 실수가 없어 늘 주은래 총리의 애대를 받아왔는바 동료들로부터 늘 총리의 개인도장과 정무원 옥새를 장악하고 있는 <장새대신(掌玺大臣-)>으로 불리기도 했다. 1955년 1월부터 이재덕은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판공청에 전근되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한편 1960년, 조선 부수상 최용건이 중국을 방문, 최용건을 환영하는 국가연회를 베풀 때 주은래 총리는 이재덕이 연회에 배석하게 했다. 항일연군의 여전사로부터 중국 국가의 당당한 중견일군으로 된 이재덕을 보는 순간, 최용건 부수상은 반가움과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왜냐하면 최용건이 양성한 수많은 조선인 항일 여투사들 중 유일한 생존자는 이재덕뿐이었으니 말이었다. 또한 이재덕 모친의 입당소개인이었던 최용건은 이재덕과 그 가정에 특수한 정분을 갖고 있기도 했다. 1964년 이재덕은 제3기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로 당선, 문화혁명기간 각종 누명을 쓰고 직무에서 쫓겨나 <5.7> 간부학교에서 노동개조를 하다가 1979년에 누명을 벗고 전국인대 당위 도서관 주임으로 복직하게 됐고 1982년 6월에는 전국인대 당위 비서국 부국장으로 부임되었다. 이재덕은 1982년 9월에 이직하여 은퇴생활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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