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d2f563dcfd154a6f63f5381a22bfb05a_rAM5MQwpDXu5loqh9KnOkNcs15.png[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간고한 항일무장투쟁시기 여성의 몸으로 육중한 기관총을 보총다루듯 휘두르며 일제놈들을 무리로 쓸어눕힌 한 조선인 “여장군”이 있었다. 그가 바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4사 제1퇀 제1련의 첫 여성기관총사수인 허성숙이다.

1934년의 겨울은 빨리도 찾아왔다. 10월에 들어서자 동만의 대지는 큰 물속에 파묻혀 버렸다. 그때 허성숙은 과도한 피로와 열악한 숙영 환경 등으로 병들어 눕게 되었다. 그러나 조직에서는 그를 연길현 사방대구위에 보내 부녀사업을 하는 한편 병 치료를 하게 하였다.
 
동북항일연군에 있어서 겨울은 가장 간고한 시기였다. 일제의 토벌, 방화, 약탈 등 심공정책으로 하여 당시 인민들의 생활은 극히 간고하였고 항일부대 역시 먹는 것을 해결하는 것이 가장 큰 난제였다. 허성숙은 그냥 남들의 관심 속에서 병 치료만은 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한테 차례진 식량을 가난한 백성가정의 애들한테 보내주고는 자기 역시 함께 허리띠를 졸라매며 풀뿌리로 연명하였다. 허성숙은 또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기도하여 사람들은 선량하고도 의지가 견강한 이 처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시시각각 부대의 전우들을 그리었다. 1935년 봄, 허성숙은 신체가어느 정도 회복되자 부대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그의 간절한 요구에 의해 부대에서는 그더러 기관총수로 되기 위하여 허성숙은 모든 시간을 집중하여 훈련하였다. 매번 부대가 숙영할 때 기타 전우들은 모두 잠자리에 들었지만 그만은 피로를 무릅쓰고 훈련을 견지하였다. 결과 그의 기관총 사격기술과 묘준 능력은 놀라운 제고를 가져왔다.

1935년 6월, 허성숙은 연갈현의 도목구와 옹성라자 지구에서 있은 전투에 참가, 냉정을 잃지 않고 정확하게 적들을 쓸어 눕혀 전우들로부터 절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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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30일 새벽 김인구가 인솔하는 2천여 명의 적들은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간삼봉을 삼면으로 둘러싸고 올라왔다.(이미지 출처 : 중국해방군보)
 

1936년 3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은 동북항일연군 제2군으로 개편되었고 허성숙이 소속된 제1퇀은 제1사로 되었다. 항일연군 제2군은 저명한 항일장령 왕덕태, 위증민의 인솔하에 동만과 남만의 여러 현에서 출몰하면서 기동 영활한 유격전술로 일제한테 수차례에 거쳐 섬멸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 해는 허성숙한테 있어서 가장 빈번하게 전투에 참가한 한해였다. 4월의 화전현 대포차자(지금의 돈화시)공략 전투,8월의 무송현성 전투,10월의 안도현 동청구에서의 위만주국군과 교전, 11월의 임강현 대양차에 있는 위만주국군의 거점을 날려 보낸 전투 등으로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당시 허성숙의 기관총은 무송현성을 진격할 때 부대로 하여금 성동남쪽의 거점을 일격에 점령하게 하였고 대양차의 전투와 동청구의 전투에서도 큰 위력을 발산하였다. 이러한 전투에서의 단련과 고험을 거쳐 허성숙은 항일연군의 용맹한 여전사로 거듭났으며 1936년에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임규광의 희생은 허성숙에게 형언할 수 없는 비통과 슬픔을 가져다주었다.

 

허성숙은 어느 한 나무아래에서 한동안 통곡한 뒤 눈물을 닦고는 입술을 악물었다.

 

“저에게 기관총을 맡겨주십시오!”

 

허성숙은 상급에 간절히 요구하였다. 상급에서는 그의 요구를 허락하였다. 이리하여 허성숙은 항일연군 제1로군 제4사 제1퇀 제1련의 첫 여성기관총사수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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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30일 새벽 김인구가 인솔하는 2천여 명의 적들은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간삼봉을 삼면으로 둘러싸고 올라왔다.  허성숙은 사격명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기관총으로        맹렬한 사격을 가하여 적들을 무더기로 쓸어 눞혔다. (이미지 출처 : 중국해방군보)
 
1937년 6월 허성숙은 부대를 따라 장백현 13도구에 진출, 간삼봉에서 일제와 조우전을 벌이게 되었다.

6월 30일 새벽 김인구가 인솔하는 2천여 명의 적들은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간삼봉을 삼면으로 둘러싸고 올라왔다. 기관총을 손에 잡고 적들을 노려보던 허성숙은 사격명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맹렬한 사격을 가하였다. 놈들은 무더기로 쓰러졌다. 기세 당당히 덮쳐들던 적들은 혼비백산하여 뿔뿔이 도망쳤다.

 
간삼봉전투 후 전사들은 허성숙의 용감성과 대담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여성의 몸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기관총을 휘두르며 적들을 삼대베듯 쓸어 눕히는 그에게 “여장군”이라는 영광스러운 별호를 달아주었다. 그때로부터 제4사에서는 “여장군”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편집 철민 기자/다음에 계속)

참고문헌

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 2, 原書房, 1967, 65~66쪽.☞
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 1-분책, 563~564쪽.☞
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 3, 326쪽.☞
박용옥, 「조신성의 민족운동과 의열활동」,『오세창교수 화갑기념논총』, 한국근현대사학회, 1995 참조.☞
『독립신문』 1921년 1월 15일, 3월 26일, 12월 6일자 ; 『동아일보』 1921년 10월 21일자 ; 박용옥, 「조신성의 민족운동과 의열활동」, 『오세창교수 화갑기념논총』.☞
『동아일보』 1921년 6월 13일자.☞
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편저, 『항일녀투사들』, 1984.☞
村田陽一 編譯, 『コミンンテルンン資料集』 2, 大月書店, 1982, 75쪽.☞
조선총독부, 『朝鮮の治安狀況』, 1930, 12~13쪽.☞
중공연변주위 당사사업위원회 편저, 『연변인민의 항일투쟁』, 연변인민출판사.☞
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편저, 『항일녀투사들』, 101~102쪽.☞
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편저, 『항일녀투사들』, 201~216쪽.
허성숙의 열사전은 『불멸의 투사』 및 『빨찌산의 녀대원들』등에 실려 있는데, 그의 장렬한 희생 장면 묘사는 각기 다르다. 『항일녀투사들』에서는 7대의 敵특설부대 중 첫 번째 트럭을 향해 사격하다가 다리와 복부에 적탄을 맞고 쓰러진 것을 그 이튿날 한 韓醫師가 자기 집에 데려다 눕히자 죽었다고 했다. 『불멸의 투사』에서는 다리 부상으로 적에게 체포 압송된 그녀가 自衛團長의 딸임을 알고 전향시키려 했으나 끝내 불복하여 총살했다고 했다. 『빨찌산의 녀대원들』에서는 중상으로 체포되느니 차라리 끝까지 싸우다 죽겠다고 생각, 250여발 보총 탄알을 모두 쏘았고 마지막으로 수류탄을 적에게 던져 큰 희생을 주고 자신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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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항일연군 조선인 "여장군" ― 허성숙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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