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2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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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임스 선정 아시아대학 순위서 중국 4개 대학 앞 10위에
    중국 북경대학 제5위에 올라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 영국 “타임스”는 19일 아시아대학 순위를 발표, 중국 내륙에서 18개 대학이 순위에 들어 지난해보다 3개 대학교가 증가되었다고 중화망이 20일 전했다. 이번 아시아대학 순위에서 중국 내륙에서 가장 높은 순위에 오른 대학교는 북경대학으로 제5위였고 다음으로 청화대학이 제6위, 중국과학기술대학이 제21위, 복단대학이 제25위였다. 순위에 오른 기타 내륙의 대학교들로는 인민대학 32위, 남경대학 36위, 절강대학 41위, 상해교통대학 47위, 무한이공대학 49위, 중산대학 56위, 천진대학 62위, 무한대학 64위, 화동사범대학 67위, 할빈공업대학 69위, 대련이공대학 79위, 호남대학 81위, 동제대학 87위, 서안교통대학 95위였다. 지난해에 비해 천진대학, 화동사범대학, 호남대학과 동제대학이 순위에 새로 올랐고 지난해 제99위였던 화중과학기술대학이 올해에는 순위에 오르지 못했다. 순위에 오른 중국 홍콩특구의 대학교들로는 홍콩대학 3위, 홍콩과학기술대학 9위, 홍콩중문대학 12위, 홍콩도시대학 19위, 홍콩이공대학 33위, 홍콩침회대학이 50위였다. 중국 대만지역은 도합 13개 대학교가 순위에 올랐는데 대만대학, (대만)청화대학, 교통대학, 중산대학, 성공대학, 과학기술대학, 증앙대학, 사범대학, 중국의약대학, 아시아대학, 원지대학, 중원대학, 양명대학이었다. 그 가운데서 제일 앞 순위에 오른 대학교는 대만대학으로 제14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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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21
  • 中오문, 월드컵 관련 최대 축구도박 사건 수사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 세계적으로 도박으로 유명한 중국 오문특구는 요즘 월드컵 축구도박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문특구 사법경찰국은 20일 브리핑을 가지고 최근 연속 브라질 월드컵 축구경기 관련 축구도박 사건 두건을 수사했으며 그 가운데의 한건은 도박판돈이 홍콩페로 50억위안에 달하는바 오문이 항구를 개설한 이래 최대 규모의 도박사건이며 이 사건의 범죄용의자는 22명에 달한다고 밝혔다고 중화망이 전했다. 이달 18일 밤, 정보를 장악한 오문 사법경찰측은 19일 새벽 2시경 출동해 항구의 한 호텔에서 불법적으로 축구도박을 하고 있는 22명을 나포했다. 사건 관련자중 9명은 중국 내륙에서 오고 9명은 말레이시아에서, 기타 4명은 홍콩에서 온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현장에서 현금으로 홍콩페 200여만위안과 가치가 홍콩페로 200여만위안에 달하는 금장식품, 인삼, 명주(名酒) 등 장물들을 압수했다. 이 도박집단은 전문 월드컵을 겨냥하고 세밀한 준비를 거쳐 월드컵 축구경기 기간 운영에 들어갔다고 경찰이 소개했다. 이 축구도박 사건은 당일로 오문특구검찰원에 이송되어 심사에 들어갔다. 한편 오문사법경찰은 19일 새벽, 또 다른 축구도박 사건을 수사했으며 이 사건도 현재 진일보로 되는 심사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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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21
  • [장편실화연재]한 여인의 인생변주곡 (5) 인생선택
    제3회 인생선택 ■김철균 1945년 8월 6일 아침 8시경, 미국의 B29형 비행기 편대가 일본 히로시마 상공의 만미터 고공에서 몇바퀴 배회하더니 인류 사상의 첫 원자폭탄 1매를 투하했다. 당시 32만 8000여명의 인구를 가진 이 도시는 삽시에 폐허로 되었고 도합 11만 8000여명의 희생자를 냈다. 3일 뒤 미국의 B29형 폭격기 두대가 재차 일본의 군수공업기지인 나가사키에 출격, 두 번째의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역시 도시를 재더미로 되게 한 동시에 수많은 희생자가 나타나게 했다. 이어서 8월 9일, 즉 대 일본선전포고를 한 이튿날 소련홍군은 5550여대이 탱크, 3440여대의 비행기와 2만 6100여문의 대포 그리고 도합 157만 7700여명의 막강한 병력으로 운집, 세 갈래로 나뉘어 만주와 조선 지역으로 진출하며 파죽지세로 일본군에 대한 최후의 공격을 들이댔다. 소련홍군의 공세는 그해 4월 독일본토의 베를린을 진격할 때의 속도를 초과하였다. 한시기 천하무적이라던 일본황군의 방선은 미국과 소련 이 두 동맹국이 합세하자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미국의 원폭투하와 소련홍군의 밀물공세에 더는 버텨낼 수 없게 된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점심 마침내 동맹군의 투항조건을 접수하고 천황 히로히토의 공개방송으로 항복을 선언했다. 일본천황 히로히토의 공개방송 내용 (소화 20년 8월 15일)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서 시국을 수습코자 충량한 신민들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국, 영국, 지나(중국), 소련 등 4개국의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 제국신민의 강녕을 도모하고 만방공영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자 함은 황조황종(黄祖黄宗)의 유범으로서 짐은 이를 삼가 제쳐두지 않았다. 일찍 미국과 영국 2개국에 선전포고를 한 까닭도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하는 행위는 원래 짐의 뜻이 아니었다. 그런데 교전한지 이미 4년이 지나 짐의 육해군 장병의 용전(勇战), 짐의 백관유사(百官有司)의 여정(励精), 짐의 일억 중서(衆庶)의 봉공(奉公), 등 각각 최선을 다했음에도 전국(战局)이 호전된 것은 아니었으며 세계의 대세 역시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적은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빈번히 무고한 백성들을 살상하였으며 그 참해(惨害)는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우기 교전을 계속한다면 결국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뿐더러 나아가서는 인류의 문명도 파각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짐은 무엇으로 억조의 적자를 보호하고 황조황종의 신령에게 사죄할 수 있겠는가. 짐이 제국정부로 하여금 공동선언에 응하도록 한 것도 바로 이런 까닭이다. 짐은 제국과 함께 비명(非命)에 쓰러진 자 및 그 유족을 생각하면 오장육부가 찢어진다. 또한 전상(战伤)과 재화(灾祸)를 입어 가업을 잃은 자들의 후생(厚生)에 이르러서는 짐이 우려하는 바가 크다. 생각하건대 금후 제국이 받아야 할 곤난은 물론 심상치 않고 신민의 충정도 짐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짐은 시운이 흘러가는 참기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 이로써 만세(万世)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열고자 한다. 이로써 짐은 국체(国体)를 수호할 수 있을 것이고 신민의 적성(赤诚)을 믿고 의지하며 항상 신민과 함께 할 것이다. 만약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함부로 사단을 일으키거나 혹은 동포들끼리 서로 배척하여 시국을 어지럽게 함으로써 대도(大道)를 그르치고 세계에서 신의를 잃는 일은 짐이 가장 경계하는 일이다. 아무쪼록 거국일가(举国一家)자손이 서로 전하여 굳건히 신주-일본의 불멸을 믿고 책임은 무겁고 길은 멀다는 것을 생각하여 장래의 건설에 총력을 기울여 도의(道义)를 두텁게 하고 지조(志操)를 굳게 하여 맹세코 국체의 정화(精华)를 발양하고 세계의 진운(进运)에 뒤지지 않도록 하라. 신민은 어러한 짐의 뜻을 명심하여 잘 지키도록 하라. 천황의 공개방송은 반성하는 어투가 아니었다. 어딘가 괴변을 부리는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천황의 항복방송은 필경 포츠담 회담의 선언을 받아들이며 항복한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일본천황의 항복방송에 용정에 있는 일본인 주택구역은 울음바다로 되었다. 땅에 엎드려 천황의 방송내용을 전달받은 일본인들은 “대일본 제국이 투항하다니 믿을 수 없다”, “아니다. 뭔가 방송이 잘못됐다. 한창 잘못됐다”며 땅을 쳤으며 지어는 할복자살한 군인도 몇명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소수의 친일주구 외 모든 조선인들은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다. 순자네가 사는 동네에서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8월 15일 오후였다. 용정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마을로 돌아온 한 중학생으로부터 이 소식을 얻어들었던 것이다. 일본이 망하면서 일본인교장이 운영하던 용정의 중학교들도 무기한 방학을 해버렸으며 소련홍군이 이미 연길과 용정에까지 들이닥쳤다는 것이다. 그날 산에서 약재를 캐던 순자는 어쩐지 마을 쪽에서 이상하게 떠들썩하기에 웬일이 일어났다 싶어 부랴부랴 산에서 내려왔다. 마을에 내려오니 사람들 얼굴마다 활기가 넘쳤고 몇몇 조무래기들마저도 “만세!”를 부르며 마을길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집안에 들어서니 아버지가 농궤속에 깊숙히 감추어두었던 태극기를 꺼내놓고 있었다. 아버지는 태극기를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리였다. 아버지의 입에서는 낮았지만 웅글진 “태극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 광복이 됐다. 저주받을 왜놈들은 쫓겨갔고 세상이 바뀌었다. 그리고 온 동네가 열광했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일제의 핍박에 못이겨 쪽지게에 짐을 싣고 두만강을 건너왔던 간도조선인한테 있어서 광복의 함의는 너무나도 컸다. (광복이란 바로 이런 것인가?) 어린 순자는 어른들과는 달리 광복이란 그 뜻에 대해 다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젠 더는 일본놈들의 성화를 받지 않고 또한 조선말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데서 그 역시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얼마 후부터 많은 조선인가정들에서 조선으로 돌아가는 바람이 일었다. 어떤 동네는 절반 이상의 조선인들이 마을을 떠나 동네 전체가 텅비다 싶이 되기도 했다. 이어서 한동안 문을 닫았던 학교들도 하나 둘 수업을 회복하였다. 물론 조선인이 교장을 맡았고 한동안 폐지되었던 조선말교육도 회복되고 말이다. 하지만 순자는 인차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학교에 다니기 싫어서가 아니라 서발막대기 휘둘러도 거칠 것 없는 집안사정을 손금보듯 잘 아는 그로서는 차마 학교에 가겠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기실 많은 사람들이 조선으로 돌아갈 때 순자의 아버지도 그들과 함께 따라갈 타산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순자의 아버지 김명기는 인차 단념했다. 가뜩이나 없는 살림에 전염병에 걸린 순자와 둘째아들의 병을 치료하느라고 집안에서 팔 수 있는 물건은 다 팔아버리고 많은 빚까지 지다보니 조선에 돌아가 정착할 재산은 고사하고 두만강을 건너갈 노비마저 없는 상황이었다. 한편 소학교의 최우등생이던 순자는 어디까지나 다시 공부를 할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자체로 학비를 마련할 목적으로 거의 매일이다싶이 산으로 다니며 개암이나 버섯을 따고 약재도 캐군 하였다. 어느날 순자가 산비탈에서 땀을 흘리면서 괭이로 약재를 캐고 있는데 용정으로 통하는 신작로 쪽에서 여학생들의 명랑한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자유의 강산에서 우리 자라고/ 평화의 낙원에서 꽃피려 하는// 새 나라 어린 동무 노래부르자/ 세상에 부려울 것 그 무엇이냐 …… 아, 얼마만에 들어보는 우리 조선사람의 노래인가? 순자는 격동된 심정을 억제하지 못한채 괭이를 집어던지고 무작정 여학생들이 오는 쪽을 향해 달려 내려갔다. “얘들아, 아까 너희들이 부르던 그 노래는 누구한테서 배운거니?” “음, 우리 학교에 새로온 선생님이 배워주었는데 이젠 학교에서는 일절 일본말을 하지 않고 조선말만 한단다.” “그래, 너 기숙이는 공부도 잘하고 노래도 잘 부르는데 너도 우리와 함께 학교에 다니면 얼마나 좋겠니?” “…?!” 순자는 자기의 심정을 그다지도 잘 알아주는 애들이 눈물겹도록 고마워났다. 그는 잇빨자리가 나도록 입술을 옥물었다. “알았어, 나도 너희들처럼 꼭 학교에 다시 다닐 날이 있어거야.” 그날 저녁, 순자는 소학교 때 갖고다니던 책보자기속에 깊숙히 감추었던 작은 보자기를 꺼내서는 아버지앞에서 그것을 헤쳐놓았다. 그 동안 약재를 캐고 버섯을 따서 번 돈이었다. “아버지, 그 동안 제가 모은 돈이예요. 전 옷을 해입는 것도 싫고 맛있는 걸 사먹는 것도 싫으니 제발 절 학교에 가게 해줄래요?! 아버지 이 딸이 이렇게 빕니다.” …… 한동안 말없이 엽초만 태우며 버들광주리를 틀던 아버지는 드디여 용단을 내렸다. “네 소원이 정 그러하다면 그렇게 하려므나. 이 애빈들 왜 널 공부시키고픈 마음이 없겠느냐?” “네?! 그러세요? 아버지 감사합니다. 꼭 공부를 잘해 출세하여 앞으로 부모님께 효도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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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21
  • 범죄자 남편에게 주는 아내의 마지막 입맞춤
    [동포투데이] 봉황넷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을 들썽케 했던 “7.23”사건의 주범인 하심국에게 일전 중국 광서고급인민법원은 공개심판에서 사형에 처하고 정치권리를 종신박탈한다고 선포하였다. 4명의 자녀를 둔 하심국은 호적을 올리는 문제로 위생 및 계획생육국 간부와 언쟁이 있은 다음날 장도를 들고 칼부림을 하여 위생 및 계획생육국 직원 2명이 죽고 4명을 다치게 했다. 6월 19일 공개심판을 받던 날 아내와 면회를 한 하심국은 참회의 눈물을 흘렸고 아내는 하심국의 볼에 눈물의 마지막 입맞춤을 해주었다. 극단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하심국은 결국 사랑하는 가족과 영영 이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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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21
  • 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10)
    ■ 김철균 유엔군 인천상륙 및 인민군의 후퇴 아버지가 고상철에 의해 구원되어 부대로 돌아온 뒤 얼마 안있어 평양의 최고사령부로부터 뜻하지 않던 명령이 하달됐다. 전반 전선에 변수가 생겨 주력부대의 전략적 퇴각이 시작되기에 아버지네 부대는 이튿날 아침 즉 9월 17일까지 진지를 고수하다가 후퇴하라는 것이였다. 그렇찮아도 당시 낙동강전선의 인민군부대들은 마지막 한방울의 전력까지 쏟아가며 전투를 진행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부산쪽으로는 유엔군이 계속 증가되고 있는 한편 인민군은 후방공급이 끊어진데다 인원보충도 되지 않는, 그야말로 억지로 견지하고 있었으며 더는 진공할 수도, 그렇다고 후퇴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후퇴명령은 바로 이러한 때에 떨어졌다. 뒤이어 유엔군의 대규모적인 공습과 포격이 개시됐다. 그 잡도리를 보아 인민군의 진공을 견제하려는 반격과 기습인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인민군을 밀어 붙이려는 전면적인 공세였다. 아버지네 부대는 옹근 하루낮과 하루밤을 이어가며 한국군과 싸웠다. 병력이 모자라자 예비연대는 물론 아버지를 포함한 정찰병 그리고 부상병조차 총을 쏠 수 있는 인원은 몽땅 진지에 배치되었다. 한밤중까지 싸우다가 일단 한국군이 물러가자 인민군은 새벽녘의 어둠을 이용하여 고지에서 물러났다. 고지에서 내려온 아버지네 부대는 주력부대를 따라잡기 위해 죽기내기로 뛰었다고 한다. 이렇게 단숨에 20여리나 뛰고 보니 기진맥진한 나머지 그 때는 호랑이가 달려든대도 까딱 할 것 같지 못했다는 것이 아버지의 회고였다. 한국군 추격부대를 얼마간 떨구어 놓았다고 판단한 뒤에야 숲속에서 휴식명령을 내렸다. 인민군 사병들은 솔잎과 압축과자를 섞어가며 요기를 하였다. 그러다가 서로 마주보는 순간 모두가 웃음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며칠간 세수 한번 못한채 초연에 그을리다보니 원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리 만무했다. 낮이 되자 하늘에는 미군비행기들이 나타났고 모두가 한결같이 기수를 북으로 돌렸으며 남쪽으로부터 들려오는 포소리도 점점 가까워졌다. 부대는 길을 다그쳐 얼마 후 주력부대를 따라잡았다. 주력부대를 따라잡자 새로운 동원이 있었다. 내용인즉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이 인천으로부터 상륙하여 중부지대를 차단하고 있으니 대부분의 인민군부대가 유엔군의 포위속에 들었다는 것, 유생역량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뒤꽁무니의 유엔군을 뜯어놓고 하루 속히 38선을 넘어 북으로 가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사태는 자못 심각했다. 듣는 바에 따르면 대전을 지키고 있던 인민군대가 전라도 방면으로부터 퇴각하는 인민군주력을 엄호하기 위해 필사적인 저항을 했으나 쌍방의 현저한 전력대비에 힘이 딸려 대전을 내주어 전라도 부대들이 산속으로 들어갔는가 하면 서울을 고수하고 있던 인민군부대 역시 연희고지를 육탄으로 막으며 저항하고 있으나 미군부대의 막강한 화력을 막을 수 없어 서울함락 역시 일보직전이라 했다. 서울이 함락되기 전에 시간을 다투어 38선쪽으로 퇴각해야 그만큼 손실을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퇴각하는 길도 쉬운 것이 아니였다. 아니 지난 2 개 월 전 남진할 때보다 더 힘겨운 노릇이었다고 한다. 낮에는 공습이 피해 산에 숨어야 했고 또한 꼬리를 물로 달려드는 한국군과 싸우면서 퇴각해야 함과 아울러 후방보급은 물론 최사령부와의 모든 연락을 할 수 없었기에 곱절 간고했다. 이렇게 자체로 모든걸 분석하고 장악하면서 겨우내 원주부근까지 다 닿았지만 그 때의 원주 역시 한국군의 수중에 넘어간 뒤었다. 가뜩이나 얼마 되지 않았던 인민군 원주수비부대가 서울쪽으로부터 밀려드는 유엔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퇴각했던 것이다. 원주의 유엔군들이 바로 인민군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었다. 그야말로 인민군은 앞 뒤로 협공을 받는 극히 불리한 상황에 처했다. 그 때 인민군의 원 계획은 될수록 원주의 유엔군을 피해 에돌아 북으로 가기로 돼있었지만 식량과 약품이 거덜난 상황에서 그대로 행동하다가는 당장 굶어죽을 사병이 반수 이상이 될 것이 분명했다. 한편 정찰결과 원주에 유엔군이 들어오긴 했으나 시간이 길지 않아 발을 튼튼히 붙이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그 수자도 얼마되지 않았다. 그리고 인민군 역시 38선을 넘기 전야의 마지막 전투를 치러볼 욕심도 없지는 않았다고 한다. 인민군은 일부 부대를 배치하여 남쪽으로부터 오는 유엔군을 견제하는 한편 병력을 집중하여 불의습격으로 원주에 돌입했다. 아니나 다를가 원주의 유엔군들 역시 인민군이 그렇게도 빨리 원주 부근에 나타나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한 모양, 미처 진지에 들어가 보기도 전에 인민군에 의해 섬멸되고 말았다. 그 전투에서 인민군 부대는 얼마간의 탄약과 식량 등을 로획하여 자신을 무장할 수 있었다. 바로 그 전투에서 아버지는 불행하게 부상당하여 평양에 후송됐다가 다시 신의주를 거쳐 당시 교하에 있은 조선인민군 제 2 야전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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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20
  • 中, 올해 들어 음란사이트 1222개 페쇄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 중국 국가인터넷정보판공실은 20일 “인터넷정화” 전문행동 전개상황을 통보, 올 들어 전국적으로 “인터넷정화” 전문행동을 벌인 이래 음란사이트 도합 1222개를 처리, 페쇄했다고 중국신문망이 이날 전했다. 목전까지 각 중앙뉴스사이트, 주요 상업사이트들은 주동적으로 관련 채널 50여개를 페쇄했고 색정적이고 저속한 원고(작품) 2200여편을 사출해 냈으며 정화사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국가인터넷정보판공실에서는 올 들어 4월 말까지 페쇄한 422개 음란사이트에 대한 재조사를 진행했는데 페쇄되었거나 “검은 명단”에 오른 132개의 사이트가 “부활”된 것을 발견, 공업정보화부와 공동으로 처리하고 사회에 공개적으로 폭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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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20
  • 민족문화의 얼을 이어가는 사람들
    연변시조협회(회장 김철학)에서는 6월 13일 오후 연변군중예술관에서 "시조경연회"를 가졌다. 중국의 저명한 시인이시며 중국고려문화원 원장인 김철선생과 그의 부인이며 원 북경 애심협회회장이였던 방채봉녀사의 후원으로 열린 이번 경연회는 역음지름시조 “학 타고”, ”진달래아리랑”, “한그루 비수나무”로 시조합창을 부르며 막을 열었다. 창작시조10수, 시조창10로 20명 배우가 경연했다. 그들은 우시조, 평시조, 남창지름시조등 형식으로 시조창 표연을 하였으며 “팔순고개”, “효도한복” 등 창작시조를 읇었다. 죽국조선족 진달래 민속촌으로 불리는 화룡시 서성진 진달래촌의 현원극촌장과 리길천서기도 그들의 창작시조를 읇었다 이날 자치주 문화국 김희관전임국장, 연변대학 예술학원 전화자교수, 국가1급 작곡가 동희철선생등 연변 음악예술계 원로들과 배우60여명이 경연회에 참가하였다. 경연절목에 이어 “민요련창”, “저대독주”, “표연창--잘 꾸려보세” 등 축하프로가 무대에 올랐다. 시상식에서 저대반주를 담당한 김득호선생에게 공로상을 수여하고, 강춘근의 창작시조 “시조와 합께”와 남창지름시조 “죽림이”를 부른 강금자에게 1등상을 수상했다. 시조에 조예가 깊은 김남호선생과 국가1급 작곡가 동희철선생이 소감발언에서 우리민족의 시조문화가 이어지며 발전해가는 모습을 기꺼이 지켜본다며 민족의 얼을 이어가는 시조창인들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했다. 저명한 김철시인은 협찬과 함께 “나는 연변시조협회 명예회장의 한 사람으로서 시조문학과 시조음악을 결합하는 중국특색 시조로선을 견지해 나가는 당신들의 굽힘 없는 의지와 끊임 없는 노력에 견결한 지지와 성원을 보냅니다”라는 축하문도 전해왔다. / 박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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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외동포
    2014-06-20
  • 광화문광장 붉은악마 거리응원전 열기, 라이브서울로 느낀다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서울시는 라이브서울(http://tv.seoul.go.kr)을 통해 오는 6월 23일(월) 오전 3시부터 러시아와의 무승부로 더욱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알제리전의 광화문광장 붉은악마 거리응원전 현장을 온라인 생중계하고 이어서, 6월 27일(금)에는 벨기에전 광화문 거리응원 현장을 같은 새벽 시간대인 오전 3시부터 경기종료시까지 실시간으로 중계할 예정이다. 응원전 중계는 ‘경기실황 중계’와 달리 TV에서는 볼 수 없는 응원현장에 초점을 맞춰 붉은악마 주관의 공식 응원가 콘서트 및 통천 퍼포먼스, 경기 실황중계중 현장에서의 다양한 응원전 모습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라이브서울에서의 응원현장 중계는 새벽시간대라 광화문광장 응원현장에 직접 올 수 없는 시민이 집에서 현장의 응원열기를 함께 느끼며 좀 더 재미있는 축구중계를 관람하고자 할 때 유용할 것으로 기대된다. 라이브서울은 이미, 지난 18일 오전 3시부터 경기종료시까지 6시간동안 러시아전을 중계하였으며 약 5만 4천여명의 시청자가 함께 하였다. 라이브서울은 대한민국의 16강 진출이 확정될 경우 나머지 거리응원현장도 지속적으로 중계할 예정이다. 김은용 서울시 뉴미디어담당관은 “라이브서울을 통한 광화문 광장 거리응원전 온라인 생중계는 응원현장의 생생한 모습과 뜨거운 열기를 시민과 함께 공유하고자 기획된 방송” 이라며 “이번 방송을 통해 시민과 함께 승리를 염원하고 응원에 담긴 희망의 힘을 함께 공감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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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20
  • 북한 학생들 김정일 당중앙사업 50주년 경축해 사교춤을
    중국신문망 20일 보도에 따르면 현지시간으로 6월 19일, 북한 평양에서 있은 김정일 당중앙사업 시작 50주년 기념 경축행사에서 북한 학생들이 건당기념비 앞 광장에서 사교춤을 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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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20
  • 中, 밤샘 축구팬 겨냥한 보험상품 출시
    [동포투데이] 중국망에 따르면 전세계인의 축제 '2014 브라질 월드컵'이 열리고 있는 가운데 중국에서 밤새 경기를 시청하는 축구팬들을 겨냥한 보험상품이 등장해 관심을 끌고 있다. 16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인터넷판에 따르면 온라인 보험사인 중안(衆安) 보험은 최근 밤새 축구 경기를 시청하는 축구팬의 질병과 사고를 보상해주는 4종의 보험상품을 선보였다. 우선 '밤 올빼미 보험'은 가입 비용 3위안에 보험기간은 30일로 보험 가입자가 사망하면 최고 1만 위안이 지급된다. 또 다른 보험인 '음주 보험'은 가입금이 3위안으로 과음으로 급성 중독 증세가 나타날 경우 가입자에게 역시 최고 1만 위안을 지급한다. 또 경기를 보는 도중 과식해 급성 위장염에 걸리는 경우 보상해주는 '미식 보험'과 치료비와 장애, 사망을 보상하는 상해보험의 일종인 '축구 훌리건 보험'도 함께 출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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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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