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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룡 칼럼]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한국 이념논쟁
    ●김정룡(다가치 포럼 대표) 현시대 유명 정치학자로 손꼽히는 하버드대학교 샤무엘 헌탕턴 교수는 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을 출간했다.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로 반응이 뜨거웠다. 그는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2년 후 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냉전 시대가 종말을 맞았다. 냉전 시대 인간은 대체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진영의 이념에 각각 속해 있었다. 냉전이 종말 된 미래사회에서는 이념이 무의미해졌고 따라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면서 다른 귀속처를 찾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귀속처가 바로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라고 제시하였다. 그가 말한 귀속처는 새로운 문명이 아니라 과거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실제로 탈냉전 후 지구촌의 인간무리들은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에로 재편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중국의 경우 개혁개방 전 해외 화교 화인들 중 고국을 못 마땅해하는 사람들도 개혁개방 이후 즉시 돌아서서 고국에 투자를 서슴지 않았다. 아세아 최고 부자 리카싱(李佳成)이 투자에 나서자 주변에서 ‘사기당하면 어쩌냐?’고 말리자 그는 ‘사기당해도 고향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인데 사기라 생각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벌은 남다른 배포가 있는 법이다. 싱가포르 리콴유(李光曜) 전 총리는 본래 반공자였다가 개혁개방 이후 유교 전도사를 자칭하고 나서 중국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것이 바로 이념을 탈피하여 민족문화에로 회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2008년 북경올림픽 개막식 주제가 공자였는데 이것은 전통문화에로의 회귀를 뜻한다. 1990년 초 동구권에서 있었던 코소보 인종청소 전쟁은 종교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아무튼 세상은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흘러가고 있는 추세이며 이미 새로운 역사 흐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지구촌의 흐름을 역행하는 곳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반도이다. 동서 독일이 통일되고 남북 베트남도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문화로 굴러가고 있다. 오로지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것은 남북한이다. 1990년 베이징아세아게임 때 한국관광객이 대량 백두산투어에 나섰다. 그때 한국여행사 에스코트 00사장이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서 생생하게 맴돌고 있다. “참 세월이 놀랍게 변했어요. 우리가 중국 땅을 밟으면서 백두산 구경을 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현실로 되었어요. 이 추세대로라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남북통일도 10년이면 되지 않겠어요!” 그 후 2000년 김대중 대통령께서 북한을 방문하자 매체들이 ‘10년 안에 통일이 이뤄질 것’처럼 떠들었다. 그런데 그 후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현재 남북통일이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요원해지다못해 요즘은 아주 적대관계가 심각해지고 있는 중이다. “가장 중요한 게 이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전에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시중에서는 모두 뜬금없는 발언이라고 하기도 하고 때아닌 이념타령이라고 공격하기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 발언이 확실히 케케묵은 이념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이게 무슨 시대인데 아직도 이념타령이라니? 역사를 거스르는 행위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요즘 한국 사회는 홍범도 장군의 정체성을 갖고 논쟁 중이다. 양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다. 1943년 홍범도 장군이 사망할 당시에는 침략당한 약소국가들에서 나라마다 민족주의가 우선이지 이념과 사상이 우선 과제가 아니었다. 강대국들도 마찬가지로 이념을 떠나 미국과 소련이 협력하여 반파시스 전쟁에 돌입하였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 이념논쟁을 일으킬 사안이 아니다. 한국 정치는 할 일이 하도 없어서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문제는 왜 윤석열 대통령이 이념을 최대 이슈로 들고나왔는지? 맥락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 일부 진영에서는 아직도 빨갱이타령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 종북좌파타령을 70년 동안 벌여오다가 요즘에는 종북좌파 타령이 질리기도 하고 그 실체도 주목을 받기가 조금 약발이 떨어져 친중좌파 공격으로 방향을 틀고 화살을 돌리고 열을 올리고 있다. 필자는 얼마 전에 한국 지인의 소개로 한국 엘리트들이 참여하고 있는 카톡방에 가입한 적이 있다. 카톡방은 흔히 그렇듯 좋은 정보도 나누고 서로 필요한 교류도 하고 인맥도 넓히고 등등 좋은 점이 많다. 하지만 인간무리에는 취향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 취향이 정치적인 성향이 강하면 골머리가 아파난다. 어느 한 분은 윤석열 대통령을 찬양하는 ‘윤비어천가’를 올렸는데 조선 창시자 이성계를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수령을 찬양하는 ‘어천가’보다 훨씬 뛰어난 솜씨로 현직 대통령을 찬양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을 이렇게 신을 찬양하듯 하는 것을 처음 본다. 일각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을 평가하는 기준이 극명하게 나뉘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문재인은 빨갱이고 북한 간첩이다. 나라를 북한에 팔아 먹는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아무리 좌파 성향을 지닌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설마 나라를 팔아먹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상식을 벗어나 비합리적인 주장을 하면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친미를 확실하게 하면 다른 분야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문재인처럼 나라를 팔아먹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굳건하게 박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을 신을 찬양하듯 하는 행위는 필자와는 하도 상관없는 일이라 개의치 않고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는데 다음 일은 도무지 지나칠 수가 없었다. 기름 개구리를 산 채로 끓는 기름에 넣어 튀기다가 물을 넣고 끓여 먹는다. 한 분은 친중좌파들을 개구리 산 채로 튀겨먹고 끓여먹듯이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으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라는 속담이 있다. “미친 아낙네의 악담보다 더 저질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나가기를 해 버렸다. 종북좌파 타령이나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친중좌파 타령이든 모두 같은 이념타령이다. 이런 이념타령이 시중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고 그 세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대통령의 이념논쟁을 때가 아닌 것이라 하거나 뜬금없는 일이라는 지적은 헛발 짚는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공산주의 빨갱이 타령이 심각한데 진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자가 얼마나 될까? 의문이다. 무엇을 대상을 공격하려면 그 대상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나서 공격해야 마땅하나 한국에서 공산주의 빨갱이 공격은 실체를 모르는 막무내식이어서 안타깝다. tvn방송에 <어쩌다 어른>이라는 강연프로그램이 있다. 몇 년 동안 출연을 가장 많이 했던 최진기 강사가 있었다. 그는 자칭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이다. 액면 그대로 믿기로 하고 그가 이해하고 있는 공산주의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마르크스의 노동 분배 원칙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이다. 최진기 강사는 이 공산주의 핵심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마르크스는 아마 아버지가 돈을 벌 능력이 있고 그 돈을 자녀가 학비로 사용하는 케이스에서 힌트를 얻어 내놓은 이론일 것이다.” 이어서 그는 유명 스타 연예인 강동원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을 어떻게 수요에 의해 분배할 것인가?”고 희죽거리면서 공산주의를 형편없는 애들장난처럼 매도하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만약 공산주의가 최진기 강사의 말처럼 그렇듯 유치한 것이라면 어떻게 지구촌 반 되는 인간무리가 추종했겠는가? 능력에 따라 일한다는 것은 인간이 고도의 의식을 갖추면 타인의 능력과 비교하지 않고 또 타인의 노동기여도와 비교하지 않고 나의 능력껏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사회는 물질이 풍부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되어 불필요한 물질을 탐내지 않고 사치를 탐내지 않는 전제하에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것을 의미한다. 요점은 물질이 풍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실천가능한 원칙이라는 것이다. 빨갱이 뜻은 사상이 빨갛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필자의 부친은 평생 당지서를 맡았는데 사상이 붉다못해 둘째 아들이 휴학하는 해에 참외 밭을 대신해 보게하고는 아들이 생산대 참외를 먹었다고 하여 장부에 가을에 떼어내게 기입해 놓았다고 한다. 필자가 자랄 때 동네 어른들이 늘 저한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너의 부친은 진짜 빨갛다.’는 말을 반복했다. 최진기의 자칭 최고 강사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이 수준이라면 진짜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서강대 00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는 제도로서 실천은 실패했지만 그 이념과 사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존재하고 이직도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있는 이 민족의 현실. 언제 가야 통일되고 하나가 되어 부질없는 다툼에서 벗어날 것인지? 민족의 운명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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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4
  • 일본 핵폐수 해양 방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는?
    ● 철 민(논설위원) 한·중·일 해양 안전 문제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였던 일본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처리 문제가 24일 일본 정부의 바다 방류 개시와 더불어 또 새로운 논쟁거리를 몰아오고 있다. 우선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행위를 두고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나라들로는 일본의 이웃 국가들인 중국과 한국(정당과 사회단체 등), 북한 등과 거리가 멀지만, 남태평양 도서국의 반발도 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후쿠시마 오염수가 바다로 흘러들기 시작해서 240일이면 중국 연해에 도착한다며 정부로부터 국민 매 개인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방류 결정을 국제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고 있다. 한편 중국 정부는 일본산 수산물 수입의 전면 중단을 발표하였다. 한국 언론도 한국의 여러 해산물 시장이 거의 텅 비어 있어 어부들은 미래의 생계를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2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제주도 동문어시장에서 20년 넘게 해산물 장사를 해온 한 상인은 “예전에는 오전 10시경과 오후 5∼7시(두 시간대)에 장사가 안될 때도 시장은 붐볐지만, 요즘은 손님이 없는 텅 빈 고속도로”라며 “코로나19 기간에는 장사가 더 잘됐다”라고 우려했고 한국 서부 해안 도시 군산 출신의 한 어민은 “내일 해산물 경매장에 간다고 생각하니 답답하다”라며 “해산물 소비량이 4분의 1로 줄었고 가격도 더 낮아질 것 같다”라고 탄식했다. 부산종합어시장에서는 조기 한 박스가 보통 4만 원 또는 5만 원에 팔리는데, 전국 해산물의 약 30%가 이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번 주 수요일(23일)에는 조기 한 박스가 정상가의 절반 이하로 판매되었으며, 한국인들의 주요 해산물인 멸치는 평소보다 10~20% 정도 가격이 저렴하게 판매되었다. 24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문을 발표하여 일본이 이날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방류를 개시한 것은 지구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면서 핵 오염수 방류계획을 강행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인류에게 핵 재앙을 초래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반인도적 범죄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외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하기로 한 일본의 결정을 알게 된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에 있는 한 비정부기구가 공개적으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으며 또 피지 수바에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시위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은 해외의 국가와 사회단체의 규탄은 물론 일본 자국 내 어민 단체와 국민의 반발을 사고 있다. 특히 1945년 원폭 피해자 후손들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교도통신은 24일 원폭 피해자 후손들로 구성된 일본-전국 원폭 피해자 2세 단체 연락 협의회가 나가사키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후쿠시마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항의했다고 전했다. 이 단체는 원자폭탄의 피해자인 히로시마가 견딜 수 없다며 성명을 발표했고, 이 성명은 총리 관저에 우편으로 발송됐다. 성명은 “원폭 피해자 2세들은 부모들이 방사능 영향으로 고통받는 것을 오랫동안 목격했고, 자신들도 유전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어 건강을 염려하고 있다”라며 “정부와 도쿄전력이 책임을 지고 육상에서 보존·관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외에도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이루다 나열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고도 높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은 국제원자력 기구(IAEA)의 감찰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IAEA의 권위성과 전문성은 인정하지만, 이 기구의 분석과 결론 모두를 믿는 건 아니다. 특히 IAEA 역시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에 대해 명확한 지지 혹은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도 않았다. IAEA 역시 사상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수치나 분석을 통해서는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없은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일이란 시작이나 과정을 통해서는 어떤 결과가 나타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례로 1945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에는 그 위력이 그 정도로 강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자료도 있다. 다음 우리는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더군다나 믿을 수 없다는 추리가 나온다. 일본인을 두고 말하자면 좋게 말하면 “총명하다”하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각도로 말하면 “잔머리를 잘 굴린다” 혹은 “비열하고 간교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은 조선과 중국 그리고 기타 태평양 지역 국가와 지역에 큰 피해를 주었다. 그것도 아주 음융하고 비열하고 잔혹한 수단과 명분 등으로 말이다. 조선 왕조의 명성황후 음해 사건, 중국 대만 강점과 한일 합방 그리고 지난 세기 30~40년대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집할 때는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등 감언리설로 순진한 소녀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1920년대 말의 만주에서의 황구툰(皇姑屯) 사건과 루거우차오(卢沟桥) 사건 등을 분석 조명해보면 당시 일본이 강하다기에 앞서 음흉하고 뻔뻔스럽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시 일본은 한편으로는 미국과 담판함과 아울러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일본을 함부로 믿어서는 큰 코 다친다는 분석도 함께 나온다. 종합적으로 일본을 평가하면 일본인의 겉면을 보면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고 생활이 아주 규칙적으로 보이지만 일본인의 속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겉과 속이 같은 한국인과는 달리, 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중국인과는 달리 또한 거만하지만 우쭐대지는 않는 서양인들과는 달리 일본인한테는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피해국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역대의 독일 총리들과는 정반대로 일본은 오늘 현재도 기나긴 침략 역사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교과서까지 뜯어고치면서 군국주의의 침략사를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두고 각국은 여러 가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중국과는 달리 미국은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한국 정부는 “지지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입장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 두고 일본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속 궁리가 있는가 하면 다른 일종의 전략이 내포되어 있을 수도 있고 한국은 자국민들한테 미칠 손실보다는 일본과 정부 사이의 마찰을 우려하는 듯한 양상이다… 한편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에 대해 지금 과학적이고 안심할 수 있다는 학술적 수치는 있으나 그 영원성을 장담하는 언사는 한 마디도 없다. 어찌 됐든 일본의 핵 오염수는 방류하지 않는 것이 방류하는 것보다는 ‘명지한 선택’이라 보여지며 방류하는 것으로 나쁜 결과가 있을지언정 반대로 좋은 결과는 제로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가령 앞으로 방류 과정에 혹시라도 일본 자국 혹은 주변국들에 피해 사례라도 발생한다면 그때 가서 아무리 미국이나 국제원자력기구라 해도 결코 일본을 위해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일본이라는 이 섬나라의 위망은 일락 천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서기 2023년 8월 24일, 이날은 인류 역사상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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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5
  • 독도는 ‘무주지(無主地)’ 섬이 아니었다.
    ● 김정룡 (多가치포럼' 대표) 민간속설에 ‘이웃이 먼 사촌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가령 이웃집에서 경사가 생기면 함께 기쁨을 나누고, 안 좋은 일에는 같이 슬픔을 나누고, 급한 일이 생기면 이웃이 가장 먼저 달려와 돕는 등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삶을 영위해온데서 생겨난 속담일 터. 민간백성들의 삶은 대개 이웃끼리 화목한데 비해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구성된 국가의 경우 이웃나라끼리 사이는 그다지 화목하지 못하다. 바다를 사이 두고 이웃으로 살아온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좋은 때도 있었지만 서로 반목하는 일들이 더 많았고 지금까지도 해묵은 갈등들이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는데 그 가운데서 독도의 영유권 문제, 종군위안부 문제, 일본전범기업 강제징용 배상문제 등이 주요 쟁점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가 새로운 갈등으로 부상하여 오랜 갈등들에 얹어져 가뜩이나 썰렁한 냉기를 더욱 차갑게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남아 내려온 갈등도, 새로 생겨나고 있는 갈등도 모두 일본 측의 책임이 크건만 정작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후안무치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아주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느 한 착실한 역사학자의 통계에 의하면 한반도는 서너 차례 모자라는 1천 번의 침략을 당해왔다고 한다. 무려 1천 번이나 침략을 당해왔으나 남을 침략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하니 얼마나 착한 민족인가? 누구인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백의민족은 맞기만 하고 때릴 줄 모르니 선천적으로 DNA에 문제가 있다”고. 아무튼 그 1천 번 가운데서 일본의 침략이 다수였다. 일본은 지진이 많고 태풍이 많기로 지구촌에서도 이름난 곳이다. 게다가 땅이 척박하여 먹을 것이 늘 부족했다. ‘제집’ 내에서 해결책이 안 보이니 눈을 ‘옆집’에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남의 것을 빼앗아오는 약탈행위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가에 왜구의 노략질이 들끓었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곡식도 빼앗고, 옷도 강탈하고, 여자도 납치해가고 등 눈에 보이는 쓸 만한 ‘물건’이면 전부 빠트리지 않고 싹쓸이해갔다. 백의민족의 전통인사말은 ‘무사한가?’인데 그 유래가 바로 빈번한 외침을 당한데서 생겨난 것이다. 일본은 왜구의 노략질도 빈번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차원의 침략도 감행하였고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한반도 식민화였다. 1592년 풍신수길이 발동한 임진왜란이 좋은 근거이다. 명나라 조선 파병 때문에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실패했으나 그 후 결코 한반도 식민화 정책은 포기하지 않았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조선정부는 청나라와 일본을 불러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큰 전쟁을 피하고자 조선정부는 동학농민운동 측과 협상하여 평화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고 청나라 군과 일본군 모두 철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모처럼 좋은 기회를 만난 일본이 철회할 리가 만무했다. 청나라와 군대 철회로 갈등을 빚다가 드디어 무력충돌이 발생하였고 그것이 바로 ‘중일갑오전쟁’이다. 일본을 ‘쌰오르번(小日本)’으로 하찮게 여겨왔던 청나라가 생각 밖으로 일본한테 패배한다. 조선을 청나라 속국에서 벗어나게 하고 ‘독립문’까지 세워준 일본이지만 정작 조선은 독립을 하지 못하고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다. 호랑이가 나간 자리에 승냥이가 들어온 셈이었다. 일본은 강대했던 청나라를 물리쳤으나 또 다른 강대한 적인 러시아와 맞붙어 싸워 이겨야 만주와 조선에서의 이권을 모두 독차지할 수가 있었다. 1904년 일본은 한반도에서 자기네가 마음에 드는 곳에 어디든 군사기지를 세울 권리가 있었다. 러시아와 맞붙으려면 동해바다 섬에 군사기지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하여 일본의 레이더망에 독도가 들어왔다. 1905년 일본은 독도를 ‘무주지(無主地)’라 주장하면서 영토편입을 시도하고 시마네현(島根縣)에 지방고시를 알린다. 남의 나라 땅을 침략하고 그 땅을 ‘무주지’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드는 수법은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을 식민지화 하는 과정에서 활발하게 써 먹었던 수법이었다. 즉 일본이 유럽열강들한테서 배운 것을 조선침략에 활용했다는 뜻이다. 독도는 1905년 전에 과연 ‘무주지’였을까? 아니다. 마찬가지로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에 이르는 곳마다 모두 ‘무주지’ 땅들이었을까? 아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무주지’라 주장하는 것일까? ‘발견자우선주의’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활용했던 것이다. ‘발견자우선주의’의 본뜻은 최초로 발견한 사람들이 소유 우선권이 있다는 의미인데 백인들이 아메리카 땅을 발견하고 개척할 당시 수많은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결코 백인들이 최초의 발견자가 아니다. 분명히 그 땅엔 인디언이라는 주인이 이미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식민지를 개척한 그 땅들에 주인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 전부터 발견하고 삶을 영위해온 원주민들이 거주해왔다. 그렇다면 왜 유럽열강들이 ‘발견자우선주의’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들었을까? 주인이 이미 있었는데 ‘무주지’라 주장하고 거기다 한 술 더 떠 ‘발견자우선주의’를 떠드는 근거는? 유럽열강들은 지구촌 곳곳에 살고 있는 인류 집단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그 땅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3C’ 즉 기독교(Chrisianity), 문명(Civilization), 상업(Commerce)을 통해 식민지 정복을 정당화했다. 1455년 교황 니콜라오5세는 아프리카 서쪽 해안의 영토에 대한 포르투갈의 권리를 승인했다. 최초의 탐험시대부터 이미 그 땅에 인류가 살고 있든 말든 국가가 있든 말든 유럽열강들 중 그 누가 먼저 그 땅에 도착하면 자기네들이 주인이라는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를 적용했던 것이다. 독도는 1905년 이전에 조선의 소유이고 조선이 영유권을 갖고 있다는 역사적인 증거는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산업혁명과 식민지개척 공부에 가장 모범생이었던 일본이 서구열강들이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정당화로 써먹었던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 무기를 휘둘러 독도 영유권을 시마네현에 편입하는 고시를 알리는 수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있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일본 소유로 편입되었던 것들을 바로 잡는 조항에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등 제도들이 조선의 영유권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선의 지리는 육지와 3170 개 섬으로 구성되어 있어 섬마다 일일이 모두 표기할 수가 없었고 그때 독도가 빠져있었던 것을 일본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다. 즉 이것 때문에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한국정부가 독도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군대가 주둔하여 관리하고 있다. 6.25 전쟁 때 한국군 36명의 용사가 독도를 굳건하게 지켜냈고 지금까지도 한국이 독도에 주둔하고 관리하고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존재의 일차적인 이유는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2016년 세월호사건과 지난해 10월 발생했던 이태원참사사건에 전체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정부가 국가의 존재이유를 방기했다는 것이다. 다음 자국의 영토를 지키는 것도 국가존재의 주요 이유이다. 영토를 잃는 것은 안전을 잃어버리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기 때문이다. 한국정부의 독도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으로 명백한 우리 소유의 영토이다. 독도에 대한 영유권 분쟁은 존재하지 않으며 독도는 외교 교섭이나 사법적 해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확고한 영토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어떠한 도발에도 단호하고 엄중하게 대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독도에 대한 우리의 주권을 수호해 나아간다.” 다만 걱정이 하나 있다. 일본정치주류세력인 우익이 줄곧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에 대해 올해만 세 번 한일 양국정상이 만난 자리에서 아무 언급도 없었다. 윤석열 정부의 과거사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는 대일외교방침 때문일까? 일각에서는 이대로 나아간다면 일본이 독도를 완전히 빼앗아가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공동관리 주장을 들고 나오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한다. 독도분쟁은 대한민국의 자존심 문제이다. 자존심을 잃으면 나라의 존재이유가 사라질 만큼 국민의 사기가 저하된다. 그러므로 독도만은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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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31
  • [기고] 전주국제영화제 정준호-민성욱 공동집행위원장 투톱체제 성공을 바라며
    독립영화의 요람 전주국제영화제가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로 전환해 정체성 확립과 대중성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지 관심을 받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는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민성욱 부집행위원장과 정준호 영화배우를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의결했고, 지난 26일 조직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은 시장실에서 위촉장을 전달했다. 마력은 동력의 단위로 높을수록 좋다. 이번 쌍두마차 체제가 앞으로 3년 동안 시너지 효과를 일궈낼 것으로 기대된다. 백제예술대학교 방송연예과 교수인 민성욱 신임 공동집행위원장은 전주국제영화제 출범부터 조직위의 사무국장 및 부집행위원장을 역임한 '지킴이'이고, 정준호 신임 집행위원장은 높은 인지도를 가진 대중성을 확보한 영화배우이기 때문. 어떤 조직이나 더 큰 발전과 생존을 위한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시점이 있다. 세계 초일류 전자제품 회사로 대한민국을 빛내는 삼성이 만일 제일제당 시절처럼 사카린을 밀수해 설탕을 팔던 그대로 운영되고 있다면 지금의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 202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는 비경쟁 위주로 실시됐고 올해 2022년 23회 영화제는 국제경쟁, 한국경쟁, 한국단편경쟁, 특별부문(한국 장편 다큐멘터리, 지역공모작품, 비경쟁 아시아 영화)로 진행되며 업그레이드 됐다. 2023년 24회부터 3년간 시행될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기존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보다 더 대중성을 일으켜 더욱 큰 소통을 통해 영화계 발전과 주최지인 전주 지역발전에 더 크게 기여하는 영광이 실현될 지 귀추가 주목된다. 쌍두마차 체제가 된 전주국제영화제는 전주시민의 선택을 받은 우범기 시장이 조직위원장으로 이끄는 마차다. 우 조직위원장이 전주시 발전을 위한 고뇌 끝에 내놓은 묘수라고 풀이된다. 시장은 시민의 행복과 시의 발전을 도모하는 자리기 때문이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에 대해 기대가 큰 반면에 걱정과 반감도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수립되자, 권해효 배우, 방은진·한승룡 감독이 이사직을 사퇴했다. 이사회에서 자신의 의견과 다르게 의결되었다고 사퇴하는 것이 영화제에 대한 진정성일 수도 있지만 무책임하게 보일 수도 있는 지점이다. 고 자니윤(고 윤종승) 코미디언은 2013년 2월28일 해외동포들과 판문점을 방문한 후 가진 뒷풀이에서 "한국 사람들은 너무 똑똑해요.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이XX 안돼, 저XX 안돼 하는거에요. 일을 해보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한국계 코미디언으로 성공하고 그의 인프라를 총동원해 조국 대한민국 관광발전을 위해 기여하고 싶었으나 좌절된데 대한 의견으로 들렸다. 대한민국은 625전쟁 후 폐허에서 일어나 세계 경제 10대 강국이 되었고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나라다. 지난 80년간 대한민국이 변화가 없었다면 우리 국민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억압속에서 지옥살이를 하고 있었을 게 자명하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는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이사회에서 결정된 사안이다. 임기는 3년이다. 3년간 응원하고 3년 후 큰 성공과 발전을 이루면 박수를 치고, 변화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때 가서 비판해도 늦지 않다. 한국언론인연대 박상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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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30
  • "일본 Z세대 중국에 호감" 중국 호감도 세대별로 다른 원인
    ●오카다 미츠루(일본 저널리스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7일 방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3년 만에 처음으로 중·일 정상회담을 갖고 악화된 양국 관계를 '재조정'하기 시작했다. 기시다는 대중 관계 개선에서 반중 여론과 대중 강경 자민당 우파의 제약을 받고 있지만 반중 여론을 거론하면 일본의 Z세대(18~29세)의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40% 이상으로 다른 연령층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Z세대의 정치적 의지가 선거의 키를 쥐고 있는 세계적 흐름을 보면 '반중 여론'과 '우파'에만 의존하는 기시다 외교가 위태롭다. 45분 동안 진행된 이번 일-중 정상회담은 3시간여에 걸친 중-미 정상회담에 비해 일본의 대중국 중요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일·중 정상은 회담에서 국방부 해상 및 항공 연락 메커니즘의 직통 전화선 조기 개통, 새로운 중일 고위급 경제 대화의 조기 개최, 새로운 중일 고위급 문화교류 협의 메커니즘 회의 조기 개최 등 몇 가지 공감대를 형성했다. 향후 중일관계 개선의 지표 중 하나로 정상 간 상호 방문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시다 총리의 대중 관계 개선의 한 가지 저항은 '반중(反中)' 여론 고조다. 일본의 대중(對中) 인식 악화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각부가 매년 발표하는 '외교에 관한 여론조사'에는 흥미로운 수치가 나온다. 예를 들어 지난 1월 발표된 조사에서 응답자의 20.66%가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지난해보다 1.4% 증가)고 답했다.그러나 연령별로는 Z세대 중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는 비율이 41.6%로 전체보다 배 이상 많았다. 60~69세 13.4%, 70세 이상 13.2%에 비해 Z세대는 중국에 대한 친근감이 높다. 그렇다면 왜 연령대에 따라 중국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싶다. 나는 젊었을 때(저자는 1948년생) 중국의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심을 갖고 있었고,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속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중국이라는 '타자' 위에 자신의 생각을 투영해 기대를 부풀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이나 구미의 통치체계를 중국의 정치와 사회에 투영해 일본이나 구미의 기준으로 중국을 관찰하고 판단한다. 요즘 60~70대 일본인들이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다. 그러나 Z세대는 생각이 다르다. 내가 가르친 대학생의 경우 태어나기도 전에 일본 경제가 침체에 빠졌고,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기를 경험하지 못했다. 이들이 철들었을 때 중국은 이미 미국을 추격하는 대국이 됐고 IT 기술에서 일본을 앞섰으며 애니메이션과 게임 품질에서도 일본을 추월하고 있다. 또 Z세대가 다니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많은 곳에서 중국 유학생과 접촉할 기회가 종종 있다. 다시 말해 Z세대는 중국을 일종의 '대등한'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환상은 없다.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가 사회의 버팀목이 될 때 일본인 전체의 대중국 관념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쇠락이라는 역사적 변화, '탈아입구((脫亞入歐)'의식을 심리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대가 '2선 후퇴'하면 일본의 '반중' 여론도 달라질 것이다. 기시다 정권도 언제까지 반중 익찬 여론에 의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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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3

실시간 칼럼/기고 기사

  • [김혁 칼럼] 어느 화백의 실크로드
    ●김 혁 (재中동포 소설가) 1 인류는 길을 따라 소통하고 교류하며 문명을 꽃피워 왔다. 그 대표적인 길이 중국 장안에서 시작돼 중앙아시아를 관통, 유럽 지중해까지 연결 된 실크로드다. 중국의 고전 “서유기”에서 등장하는 당승의 원형인 현장법사가 1,300년 전 기록으로 남긴 귀중한 자료 “대당서역기”에 대서특필했던 곳이 바로 그 실크로드다. 고구려 고선지 장군의 활약과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신라의 혜초 스님의 법경이 바람소리로 남아 있기도 한 길이 바로 그 실크로드다. 이 길을 통하여 도자기, 향신료, 유리, 보석, 옥, 직물, 쌀, 밀 등 인류가 생산해 낸 모든 물건들이 거래 되었으며 동방에서 서방으로 간 대표적인 상품이 비단이라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됐다. 길을 따라 물건만 오고 간것이 아니라 종교와 문화도 함께 주고받았다. 동서양의 교역과 문화의 네트워크 역할을 톡톡히 하면서 약 6400 킬로미터에 이르는 방대한 육로 교통망이 구축되었다. 2 최근 실크로드는 또 한번 굳잠에서 깨어 나고있다. 중앙아시아의 경제성장 잠재력이 부각되면서 주변국인 일본에서는 실크로드 루트의 동방의 종점은 일본이라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가 하면, 중국을 비롯한 한국, 러시아 등 인접국들은 그 경제협력 진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도 있다. 따라서 한국이 중국의 동부 도시들과만 교류에 그치지 말고 특색있는 서부지역과 교류의 다변화를 꾀해 새로운 “한중-로드”를 구축 할 필요가 있다는 제안도 나오고있다. 한반도 종단 철도를 중앙아시아와 유럽으로 확장하겠다는 한국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구상에서 실크로드는 “장밋빛” 환상의 길목이며 그 길 위에서 한국과 중국은 경쟁자이자 동반자인 셈이다. 3 그 길위에 혼을 묻은 화가가 있다. 1898년 이주민들이 일군 북간도의 용정촌에서 태어 난 그의 원명은 한광우, 한낙연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의 행동반경은 실로 종횡무진이였다 . 1914년 용정에서 헤이그 밀사 이상설이 창설한 “서전서숙”이 전신이었던 용정보통학교를 마쳤고 용정에서 3 ·1운동의 추동을 받은 독립시위에 가담하였다. 일경의 리스트에 오르자 1919년 상하이로 갔고 임정의 초기 멤버로 활약하였다. 상하이에서 중국 최초의 미술전문학교를 나왔다. 1923년 선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1929년 프랑스로 가서 루브르예술학원을 졸업했다. 재학 당시 유럽 각국을 돌며 개인전을 열어 호평을 받았다. 세상의 모습을 올곧게 그려내는 한편 그는 그림에만 매달리는 다른 화가와 달리 좁은 화폭안에서 살아가는 화가로 만족하지 않았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자 그는 곧 중국으로 돌아와 우한, 충칭 등지에서 항일투쟁에 적극 투신하였다. 그는1943년부터 중국에서 처음으로 서역의 벽화모사와 유물 고찰작업에 착수한 사람이다. 이때 티베트, 몽골, 위구르족 등 중국 소수민족의 생활풍습 등을 생동감 있는 화법으로 그려냈는데, 이는 당시 중국화단에 큰 충격을 주었다. 중국의 이름난 석학 성성(盛成)선생은 1980년대 한낙연의 그림전을 보고 이런 글발을 남긴적 있다. “그는 피카소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이었다. 또한 그는 예술사학자이자 탐험가로서 쿠차 천불동에서 당나라 초기의 투시화와 인체해부도를 발견했다. 그의 성은 한씨, 이름은 낙연. 이름이 그 사람을 닮았고 사람은 그의 예술을 닮았으며 그의 예술은 그곳, 그때를 발견했다. 그는 변경 동포로서, 변경 지역의 생활과 문화를 가장 사랑했다…” 1947년 다시 벽화모사와 유물고찰을 마치고 둔황에서 란저우로 돌아오던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한낙연은 실크로드 위에 육신을 바쳤다. 한국에서는 광복 60주년을 맞으며 덕수궁미술관 한낙연 특별전을 가졌고 이어 “대통령상”이 추서(追敍)되었다. 2010년 고향인 용정에 그의 이름을 딴 공원이 조성되었다. 피카소등 세계화단의 불세출의 인물들과 실크로드에 깃들어있는 인류의 보귀한 유산들이 한낙연의 꿈을 키울 모판이 되었고 그의 화법에 그러한 심력이 녹아 들어있다. 조선인 이주민의 후예로서, 예술가로서, 열렬한 사회활동가로서, 굳건한 “역사문물의 지킴이”로서 그는 조선독립과 민족해방의 사명을 짊어지고 젊음을 불살랐고 반일투쟁을 위해 거대한 중국대륙을 무대로 혼신을 던졌으며 무엇보다도 인류의 찬란한 문화유산인 서역의 문화재발굴에 주력하여 선구자적인 업적을 남겼다. 전기적 색채가 짙은 한낙연의 경력은 깊은 잠에서 깨어 난 실크로드와 더불어 뒤늦게 나마 중국과 한국 화단의 주목을 모으고 있다. 2015년 1월 15일 -“청우재(听雨斋)”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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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18
  • [김혁 칼럼]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김 혁 (재中동포 소설가) 1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石榴)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임진왜란 중 진주성이 함락될 때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를 끌어안고 진주 남강에 투신한 의기 논개의 충절을 찬양한 변영로의 시의 한 구절이다. 임진년 왜란을 일으킨 왜적은 진주성을 여러 번 쳤으나 번번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분기탱천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진주성을 무너뜨려 사람과 짐승 씨 하나 남기지 말라 명했다. 야수떼 같은 왜군과 맞서 여러 차례 혈전에서 지켜낸 진주성은 1593년 기어이 무너지고 말았다. 왜적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에서 잔치를 벌렸다. 축하연에서 왜적들은 물가의 돋은 바위에 선 한 여인의 아리따움에 홀려 버렸다. 그가 바로 임진왜란이 일자 의병장인 남편을 따라 화살이 비발치는 전장을 찾아온 논개였다. 논개는 기생으로 위장해 주연에 참석했다.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마음”의 ‘논개’는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반지를 낀 채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끌어안고 “강낭콩보다 더 푸른” 남강으로 뛰어들었다. 한 섬약한 여인의 거사는 왜군의 기세를 꺾었고 이후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데 일조했다. 2 중국헤이룽성 무단장으로 가면 강녘에 “빈강”이라는 이름의 공원이 있는데 그곳에 이제는 무단장의 상징물처럼 되어버린 기념비가 있다. 여덟 여인들의 군상, 일견에도 예사롭지 않은 석조물이다. 손에는 총대를 꽉 부여 잡고 뒤쫓는 적을 응시하는 모습, 여전사들의 표정은 결연하고 눈빛은 강렬하다. 그 비장하고 결연한 모습들이 살아숨쉬는 듯해 보는이들을 전율을 느끼게 한다. 그중 두 명의 치마저고리 차림의 여전사가 유난히 눈에 띄인다. 이 군상 속 여전사들로는 동북항일연군 부녀퇀의 지도원 랭운을 비롯한 여덟 명인데 그중 안순복과 이봉선은 조선족이다. “안언니”라고 친절하게 불리운 안순복은 여전사들중의 골간인물이었다. 키가 1메터55밖에 안되는 작은 체구였다고 한다. 아버지와 오빠를 왜놈에게 잃고 항일에 뛰어든 그는 항일련군의 지도인물인 박덕산과 결혼하여 딸 아이 하나를 보았다. 그후 남편은 태어 난 아이도 보지못한 채 전투에서 희생되었다. 그리고 엄동설한에 적의 소탕을 피하여 부대가 이동하던중 안순복과 여전사들은 아이들을 당지 사람들에게 맡기고 떠났는데 그후 그 아이도 찾지 못하고 말았다. 이봉선에 대한 자료는 아주 적다. 그저 조선인이며 20세 남짓하고 린커우현 사람이라는 것 밖에 알려진 것이 없다. "만주사변"이후 일본관동군은 만주지역에서 피비린 “대토벌”을 감행하였다. 1938년 10월, 원정하여 무단장하류에 도착하였던 항일부대는 무단장 강 기슭에 모닥불을 지피고 숙영하다 밀정의 밀고로 그만 일본괴뢰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일본괴뢰군의 수효는 엄청나 1000여명이나 되었다. 부대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 8명의 여전사가 나섰다. 그녀들의 유인으로 대부대는 순조롭게 적을 따 돌리고 철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8명의 여전사들은 삼면으로부터 적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고립무원에 빠지고 탄약이 떨어졌지만 여전사들은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 마지막 한 개의 수류탄을 뿌리고 탄약이 떨어진 총을 바위에 쳐 부수어 버렸다. 왜놈들이 각일각 조여오자 일본군의 포로가 될수 없다고 판단한 그들은 손에 손잡고 강심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한송이 또 한송이의 낙화처럼 꽃같은 육신을 차디찬 강물에 서슴없이 던진 것이다. 몇해전 중국정부가 선정한 ‘건국영웅 100인’에 재중동포 3명이 선정되었는데 그중 제1위로 “8녀투강”의 여전사들이 뽑힌 가운데 안순복과 이봉선이 방명을 올렸다. 3 할일소재의 텔레비드라마 “8녀투강”이 제작중, “8녀투강”의 이야기가 다시 사람들에게 회자(脍炙)되고있다. 지난해 11월부터 베이징”챵룬”영화텔레비제작사에서 항일소재의 드라마 “8녀투강”을 당시 여전사들이 몸을 던졌던 유적지인 헤이룽장성 린커우현에서 제작 중,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황후화"에서 주요역을 맡았던 배우도 출연하는 등 드라마에 인력, 물력을 대거 투입해 제작하고 있다. 일전 드라마의 컷을 공개 했다. 공개된 사진 속 조선인 여전사 안순복의 역이 눈에 띄인다. "8녀 투강"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영화, 연극, 그림책 등 다양한 쟝르로 각색되어 중국전역에서 항일경전이야기로 떠올랐다. 1950년과 1987년에 두차례 영화로 각색되어스크린에 올랐는데 1950년에 “중화의 딸들”이라는 이름으로 제작된 영화는 신중국이 건립된 후의 첫 전쟁영화이며 또 “카로위발리 영화절”에서 “자유투쟁상”을 수상해 중국영화사의 첫 국제수상작으로 되기도 했다. 왜적들의 강포앞에서 두려움없이 태산보다 높은 명예로운 죽음을 택한 여인들. “붉은 마음”을 품고 “푸른 강”에 뛰여든 여인들의 서사시는 오늘도 전해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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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14
  • [김혁칼럼] 야래향, 지다
    ●김 혁 (재中동포 소설가) 남풍은 쓸쓸하게 불어오고 꾀꼬리 구슬피 우옵니다. 달아래 꽃들은 모두 꿈에 젖는데 오직 달맞이꽃만이 향기를 뿜네요. 주옥같은 노래로 억만 중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가수 등려군의 대표작 “야래향” 의 한곡조이다. 밤에만 조용히 향기를 뿜는 달맞이 꽃처럼 애타는 마음을 절절하게 표현한 등려군의 “야래향”은 마카오, 일본,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여러 나라에서 베스트 가요로 떠올랐고 수많은 가수들이 이 노래를 번안해 불렀다. 한국에서도 트로트 가수 주현미가 불렀고, 국민녀동생 문근영도 영화의 한 대목에서 이 노래를 열창하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이 노래의 원창자는 등려군이 아니다. 맨 처음 이 노래를 세상에 선 보인 사람은 리향란이란 이름의 가수이다. 그리고 그는 이름자와는 달리 중국인이나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다. 그의 본명은 야마구치 요시코. 요시코의 부모는 로일전쟁후 중국 동북으로 이주, 1920년 요시코가 태여났다. 요시코는 당시 중국과 일본, 로씨야인들이 모여 살고 있던 만주에서 일본어 중국어 로씨야어등 다국 언어를 자연스레 익혔다. 그후 아버지의 중국친구인 퇴역장군 리계춘이 야마구치 요시꼬를 양녀로 삼았고 향란(李香兰)이라는 중국이름을 붙여줬다고한다. 야마구치 요시코는 소녀 시절 폐병을 치료하려고 성악을 배웠는데 1933년 봉천(奉天, 지금의 심양시)방송국이 중국인청중을 끌기 위해 기획한 프로- “만주 신가곡”에 발탁되여전문가수가 되였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친구가 지어준 이름인 리향란이라는 이름을 예명을 썼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위만주국을 세운 일본은 “만주국수도” 신경(新京, 지금의 장춘)에 만주영화협회를 설립, 음악영화를 기획했는데 중국녀배우 대역을찾지 못해 골치를 앓던 차에 우연히 신경방송국이 방송하는 “만주신가곡”을 듣고 리향란이라는 인물을 기용하려 마음먹었다. 섹시하고 이국적인 용모와 뛰여난 가창력. 여기에 중국어와 일본어를 모두 구사하는 능력을 인정받아 배우로도 활동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이후 리향란은 수많은 영화에 등장하면서 영화의 주제곡으로 “야래향” “소주야곡(苏州夜曲)” 등을 불렸다. 일석에서는 이 “야래향”을 민족적 울분이 함축된 노래라고 본다. 이후 셜리 야마구치라는 이름으로 할리우드까지 진출한 야마구치 요시코는 미군 장병들과 사랑에 빠진, 동양에서 온 신비한 녀인을 연기했다. 순종적이고 사랑스러운 녀인으로 분한 리향란은 대중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했고 중국과 일본 나아가 할리우드에서까지 사랑받을수 있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중국정부는 친일, 친미 행위를 한 반역자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리향란 역시 처벌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일본 제국주의를 미화시킨 영화를 통해 사람들을 선동한 죄로 법정에 서게 된 리향란은 결국 사형을 선고 받았다. 리향란이 사형 당할 위기에 처하자 그의 부모가 가까스로 호적등본을 찾아내 일본인임을 립증했고 그녀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하지만 그후 리향란은 중국에서 추방됐고 중국에서는 그의 영화와 노래가 금지됐다. 따라서 “야래향”이라는 노래도 40여년간 사라지게 된것이다. 지난해 일본에서는 많은 배우들이 유명을 달리했는데 그중에는 야마구치 요시코도 들어 있었다. 야마구치 요시코는 지난 가을, 도꾜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향년 94세. 중국에서 강제 추방당한뒤 리향란은 일본으로 돌아와 야마구치 요시코라는 본명으로 배우 활동을 재개했다. 유명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추문”을 비롯한 여러 영화에 출연하며 인기를 얻었고 미국 영화와 뮤지컬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동안 일본계 미국인 조각가와 결혼했다가 헤여지고 다시 일본인 외교관과 결혼하면서 영화계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팬들의 부름에 떠밀려 TV 토크쇼 진행자로 복귀했고 국민적 인기를 배경으로 근 20년동안 자민당 참의원을 지냈다. 국회의원 시절 환경성 정무차관까지 지내기도 했다. 연예계 생활 은퇴 후에는 윁남전과 중동전쟁 등에 현장 취재기자로 뛰여다녔고 당시 베일에 쌓여있던 북한의 김일성 수상을 사상최초로 단독 인터뷰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김일성은 언론 로출을 꺼리는 인물이지만 리향란의 팬이라 결국 인터뷰를 수락했다는 후문이다. 야마구치 요시코는 만년에 자서전 “李香蘭私の半生”을 펴냈다. 그 자서전을1990년 중국에서 번역출판했는데 자서전에서 그녀는 “리향란으로 출연했던 영화를 다시 보니 정말 부끄럽다”며 선전영화에 출연했던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일본 제국주의 스타”라는 타이틀을 멍에처럼 짊어지고 살아야 했던 야마구치 요시코는 그후로도 두 권의 자서전과 인터뷰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과거 행각을 반성했다. 또 “아시아녀성기금” 부리사장을 지내며 전쟁 피해자와 종군 위안부에 대해 사죄하고 배상할것을 일본정부에 촉구하는 활동에 적극 참여 했다. 2005년에는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도 반대해 나섰다. 력사의 증인 한명이 사라져 갔다. 하지만 그나마 안위되는것은 그가 보여준 만년의 행보가 어제를 회고하고 반성하는 로인네의 웅숭깊고 착한 자세를 보여줬기때문이다. “만주국”의 실력자로서 “만주오인방”의 하나였고 전후 일본정계를 주물렀던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 아베신죠 일본총리처럼 죄책감이 없는 자들이 스스로 마련한 작은 무대에서 력사를 위배한 광대극을 놀고있것이 작금의 일본이다. 이러한 상황에 요시코의 반성과 노력은 여운을 남긴다. 그것이 리향란, 아니 요시코라는 인물의 서거에 대중이 눈길을 모으며 그녀의 노래를 거부감없이 받아들이는 리유라면 리유다. 야래향은 이제 아름답게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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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09
  • [김혁칼럼] 횡단보도 풍경
    ● 김 혁(재중동포 소설가) 횡단보도, 중국에서는 얼룩말선(斑馬線)이라 부른다. 횡단보도의 표지가 얼룩말의 무늬를 꼭 닮은데서 연유된 이름이다. 얼룩말은 주로 아프리카에 분포하여 서식한다. 얼룩말하면 아름다운 무늬로 유명할뿐더러 조화로운 단체 생활로도 이름있다. 무리를 지어 활동하는데 많이는 그 수효가 수천 마리의 큰 무리를 이룬다고 한다. 령양이나 기린들과 곧잘 어우러지는 온순파인 그들은 이른 아침과 해질녘이면 물을 찾아 먹는데 그렇게 많은 수효임에도 늙은 수컷이 이끄는대로 줄을 지어 물을 먹는다. 참으로 동물계의 질서에 감탄이 절로 나게하는 가관의 풍경이다. 연변에 가면 횡단보도가 필요 없슴돠. 그냥 냅다 뛰여가면 자동차가 느려가지고 사고가 나더라도 상처가 안남돠. 해외 인터넷 사이트에서 조회수가 꽤 높은 랩이다. 그 가삿말이 개그를 방불케 한다. 하지만 개그로만 웃어 넘길수 없는 대목이다. 해외에서도 거론될만큼 사거리에 나서면 붉은 등을 무시한채 무단횡단을 하는 이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횡단보도가 마치 자기 집 뒤뜰인양 지축자축 노량으로 지나는 아저씨, 붉은 등을 그 무슨 모델쇼의 조명등으로 아는지 무시한채 교태를 흘리며 지나는 아가씨, 혼자서는 직성이 풀리지않는양 어깨동무 하고 무리지어 지나는 이들... 하기에 순경들이 목청깨져라 소리 지르고 곤봉을 내저으며 질서바로잡기에 마냥 드바쁘다. 뿐만아니다 무단횡단은 해외에서도 꺼리낌 없이 이어지고 있다. 실제 요즘들어 한국에서 무단횡단하다 교통사고를 당한 조선족의 사례가 속출하고있다. 지난 10월23일, 영등포구 D아파트 앞 대로 인도에서 중앙차로 뻐스정류소를 향해 무단횡단하던 조선족 C(46) 씨가 승용차에 치여 사망했다. 같은 달31일, 금천구 시흥대로를 무단횡단하던 조선족 B(52) 씨가 승용차에 들이받힌 뒤 다른 차선으로 튕겨 나가 다른 승용차와 또다시 충돌하는 사고를 당했다. B 씨는 이 사고로 숨졌다. 지난 11월 12일에는 구로구 디지털단지 오거리에서 무단횡단을 하던 조선족 A(녀·42) 씨가 승용차에 치였다. 이 사고로 A 씨는 오른쪽 발이 부러져 수술을 앞두고 있다. 한국의 매체와 중국동포 관련단체 관계자들은 조선족들이 교통사고가 잦은 까닭이 한국 교통법규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데도 있지만 중국에서 무단횡단하던 습관을 고치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한국에 오는 조선족들에게 자체적으로 기초질서교육과 교통법규교육을 80시간 실시하고는 있지만, 이미 중국에서 무단횡단하던 습관이 있어 고치기가 쉽지 않다”고 짚어말했다. 이에 따라 경찰은 중국어로 된 전단지로 무단횡단의 위험성을 알리며 교통안전 캠페인을 벌이는 등적극 홍보하는등 대책 마련에 나섰다. 그야말로 부끄럽기짝이없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보행자와 자전거의 횡단보도 무단횡단은 교통사고 및 교통체증을 유발시킬뿐더러 한개 도시와 도시인들의 위상에도 커다란 오점을 남긴다. 교통부문에서 교통질서 확립에 만전을 기하고 있지만 횡단보도 무단횡단은 좀처럼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줄을 긋는다는 것은 방향을 정해주고 기호로 만들어 조직화하는 행위이다. 줄무늬는 자연의 무질서를 질서 있게 정돈해서 정화시키고 재정비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가 매일을 접하는 횡단보도의 풍경은 줄지은 얼룩말들이 찾은 못가와도 같은 미경이 아니다. 가장 지능화 된 동물로 군림하여 만물의 질서를 규제한 인간들이 스스로 그 기본적인 질서를 흩트리고 있다. 그리하여 지어 허위단심 찾아 간 고국에서 마저도 그 무질서한 추태를 드러내고있는 것이다. 질서 바로잡기라는 화두는 다만 교통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모두에게 부여된 구체화되고 인성화 된 가장 기본적인 요구이다. 너나가 이 공덕의 대시험장에서 참다운 응시자의 자세를 보일때 이는 량호한 사회품질 및 개인수양의 발현으로 자리잡게 될것이다. 횡단보도, 눈과 발로 걷던 그곳을 마음으로 건너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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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08
  • [김혁 칼럼] 일송정 푸른 솔
    ●김 혁 (재中동포소설가) 내리는 눈을 맞으며 새해의 첫 등산을 했다. 고도(古都) 룡정에서 서남쪽방향으로 약 4키로메터쯤에서 룡정을 보듬어 안은 세전이벌과 평강벌의 복판에 분수령으로 솟았는 비암산이라는 고운 이름의 산에 올랐다. “연변문화유물략편”에 의하면 해발높이 500m되는 비암산은 꼭대기 서쪽의 높은 비탈이 바로 BC 3,000년전 신석기시대의 “비암산유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막상 이 산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것은 한 그루의 나무때문이다. 물론 산에 오르면 사처에 사철 푸른 소나무 투성이지만 이 소나무만은 그 위상이 남다르다. 1930년대에 이미 있었던 이 소나무는 흡사 큰 기둥에 청기와를 얹은 정자와 비슷하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은 “일송정(一松亭)”이라고 부른다. 일송정 푸른 솔은 흘러 흘러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저 유명한 “룡정의 노래”의 첫구절에 나오며 세간에 더욱 알려진 나무, 룡정사람들에게 있어서 일송정은 그야말로 룡정을 징표하는 “마스코드”이다. 일찍 룡정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고색찬연한 일송정은 룡정을 지켜주는 “당산나무"격이였다. 결혼하여 젊은 녀인들은 일송정”이 솟았는 바위를 기자석(祈子石. 아들 낳기를 기원하는 바위)으로 삼았고 가물이 들면 농부들은 일송정을 기우제를 지내는 신주나무로 모셨다. 비암산은 언젠가부터 반일투사들의 비밀아지트 역할도 했다. 일제의 감시 눈초리를 피해 멀리 비암산에 올라 일송정 아래에서 모임을 갖고 일제를 쳐부시고 독립에 대한 결의를 다지고 기원하던 곳이 일송정이라고 한다. 일송정이 룡정사람들의 슬기와 용맹, 절개와 위훈으로 드높은 기상을 보여주는 징표로 부상하자 불안한 일제는 나무에 마수를 뻗치기 시작했다. 잔악한 일제경찰은 일송정에 대못을 박아넣고 구멍을 내고 후추가루를 넣고 급기야는 나무에 대고 사격련습을 하는등 악랄한 수단으로 나무를 고사(枯死)시켰다. 1930년대 “조선일보” 기자로 활약하면서 취재차 룡정행차를 하였던 김기림의 “간도기행” (조선일보 1930년 6월13일~26일) 에서도 당시 일송정의 모습을 찾아 볼수 있다. “평강령 남단을 가로막고 앉은 일송정 봉오리는 고절을 자랑하던 소나무도 옛이야기. 지금은 마른 거루만 남아있다고 한다. 이리하여 간도에 남아있던 최후이며 유일한 소나무도 다만 일송정 이름속에 남아있는것이다.” 1980년대 룡정시의 사회단체들은 그 옛날 민족의 기상을 상징하는 설화가 담긴 소나무를 복원하기로 합의를 보고 복원식수를 하였다. 소나무를 떠다 심었고 나무곁에 팔각정자도 세웠다. 하늘향해 비첨이 건뜩 들리고 단청무늬가 아름다운 정자의 천정에는 가곡 “룡정의 노래”에 나오는 주요한 줄거리를 소재로 하여 우물, 말 탄 사람, 달빛 어린 해란강, 룡주사, 룡문교, 대성중학교등 룡정의 경관들을 그려넣었다. 이후 일송정이 섰는 산정에로 오르는 돌층계, 일송정 기념비, 팔각정자, 조선족 유명 작가 시인들이 지은 룡정관련 시구를 새긴 노래비등을 건립하여 한동안 인적기 드물던 산정에 제법 하나의 풍경구가 조성되였다. 지금 룡정시의 텔레비중계탑, 강경애 문학비와 함께 비암산에 자리잡은 일송정은 룡정의 빠칠수 없는 하나의 주요한 경관으로 되였고 일송정은 정녕 유서깊은 룡정과 더불어 중국조선민족의 애환과 분발을 상징하는 문화유물로 민족의 전설과 력사를 이야기 해주는 신목(神木)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각인되였다. 사철 푸르른 잎새, 철갑을 두른 듯한 몸체, 소나무는 우리 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이다. 혹독한 추위와 매서운 바람도 잘 견뎌내며 허연 눈발을 떠이고도 푸름을 잃지 않는 소나무는 그래서 모진 력사의 시련을 견디며 오늘에 이른 우리 민족정신과도 많이 닮았다. 지난해 말, 룡정시에서는 또 한번 일송정을 새롭게 수선하였다. 300여만원을 투입하였고 한국의 저명한 조경사를 초빙하여 일송정기념비주변을 새롭게 조경하였다. 새롭게 조경한 일송정은 오늘도 비암산의 창공 한 자락을 떠인채 그 전설을 읽으며 찾아드는 유람객들을 맞아 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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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05
  • [김혁 칼럼]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루 종일 시들은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땅거미 옮겨지는 발자취소리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던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고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 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 내 모든 것을 돌려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윤동주의 시 “흰 그림자”의 전문이다. 1942년 저 유명한 “참회록”을 읊조리고는 현애탄을 넘은 윤동주의 일본류학시절의 첫번째 작품이다. 편편마다 훌륭해 “옥석”을 가리기 힘든 윤동주의 시 중에서 많이 읽히지 않은 시, 하지만 양띠해를 맞아 특별히 이 시를 뽑아 읊어 봤다. 시를 보면, 화자는 하루 종일 황혼이 짙어지도록 어떤 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고 있다. 시에서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인 “흰 그림자”는 즉 시인을 괴롭게 만든 수많은 고민이며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은 어두운 곳에서 선택의 갈림길에 선 상황을 은유하는듯 하다. 화자는 마음 깊숙이 이런 고민을 갈무리하고 선택의 갈림길에서 괴로워 한다. 드디여 시인은 “하루종일 시들도록 귀”를 기울인 끝에 이제 어리석고 늦게나마 모든것을 깨닫고 오래 마음 깊은속에 괴로워하던 해결할수 없는 고민들을 하나, 둘 버리기 시작한다. 그 동안 연연하면서 사랑하기까지 했던 그 고민들을 돌려보낸 뒤에 “땅거미”를 옮길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의젓하게 풀을 뜯기시작하고있는것이다. 2015년 새해는 을미(乙未)년 양의 해다. 새로운 문턱을 넘는 섣달 그믐의 밤에 모두 밝은 꿈을 꾸었기를 바래본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초야에 묻혀 지내던 시절 꾼 꿈은 바로 양 꿈이였다고 한다. 이성계가 꿈속에서 양을 잡으려는데 양의 뿔과 꼬리가 떨어지는 바람에 그만 놀라 잠에서 깼다. 꿈자리가 요상해 무학대사를 찾아가 꿈 이야기를 했더니 대사는 곧 임금에 등극할 것이라고 해몽했다. 한자의 “양(羊)”에서 뿔과 꼬리에 해당하는 획을 빼내면 “왕(王)”자만 남게 되니 곧 임금으로 등극할거라는 풀이였다. 이로서 양 꿈은 길몽, 양은 상서로움의 상징이 됐다. 여기서 상서로움의 상”상(祥)”자를 보면, 왼쪽의 보일“시(示)”자는 원래 “신(神)”을 뜻하는 글자이다. 그러니 신이 양을 만나면서 상서로움을 뜻하는 “상(祥)”이 된것이다. 음(音)으로는 밝은 양(陽)과 같아 더욱 길상의 의미가 있다. 아홉 번 굽어진 양의 창자처럼 세상이 복잡해 살아가기 어렵다는 구절양장 (九折羊腸)이라는 말이 있다. 올해의 수호신 양이 어떤 기운을 몰고 올지는 아직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앞길이 아홉번 굽어진 길이 주어질지라도 양처럼 깊은 생각, 인내로 그 위기를 넘어야 할것이다. 그러할진대 자연의 순리를 따르며 조용히, 서두르지 않고 주어진 환경에 조화롭게 적응하는 양의 이미지는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빨리달리기에만 급급해 하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교훈과 계시를 준다. “잎새에 이는 바람”속에서도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주어진 길”을 걸어갔던 윤동주님의 시를 다시 읊어 보는 을미년의 첫 아침이다. 을미년, 푸른 풀밭의 양떼처럼 모두가 행복하고 평화로운 한 해가 되길 소망한다. 김혁-재중동포 소설가 용정.윤동주 연구회 회장, 소설가, 언론인 / 중국 길림성 용정에서 출생.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 석사연구생 수료. 중국작가협회 회원, 중국연변작가협회 이사, 소설창작위원회 주임 "길림신문", "연변일보"등 매체에서 20여년간 언론인으로 근무/ 1985년 단편소설 "피그미의 후손들", "노아의 방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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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03
  • [산문] 겨울, 눈, 평화 그리고…
    ■김철균눈이 내린다. 설을 앞두고 내린 설날이 눈이어서일까? 기대되는 것도 많다. 대줄기처럼 내리 꽂히는 비가 아니어서인지, 한여름도 온 몸이 오싹하게 만든다는 찬비가 아니어서인지 사람마다 눈을 평화에 비유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 아파트 발코니(阳台)에 기대선채 눈 내리는 밤하늘을 바라본다. 지금쯤 이 눈은 우리가 사는 고장 외 다른 낯선 산야에도 내리고 있겠지? 배고동 울리는 부두가에서, 정든 님 기다리는 젊은 여인의 야린 어깨위에 소복히 내려 앉을 눈, 백두산하 그 어느 두메산골 농가의 지붕을 하얗게 장식할 눈, 아니 국경(휴전선?)선 그 어디선가에서도 고향 그리는 젊은 초병의 마음과 마음을 달래주며 내릴듯한 흰 눈이다… 이렇게 짙은 정감을 나타내는 눈이 평화를 상징한다면 평화를 갈망하는 건 모든 인류의 소망이라 해야겠다. 헌데 우리 모두가 공동으로 소망한다는 평화는 이 겨울 어쩌다 눈이 내리듯이, 우리가 사는 지구촌에 쉽게 찾아 오지 않고 있다. 언젠가 모 간행물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추정에 따르면 인류는 자연이 만들어내는 생산성의 약 40%를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한다. 상당 부분이 먹고 사는 기본생활 유지가 아니라 이른바 생활수준 향상을 위해 엄청난 양의 에너지와 물자와 땅을 차지하고 있다…무질서한 개발, 포획과 오염, 생태계의 다른 구성원들의 입장에서 보면 인류는 터무니없는 탐욕과 횡포를 부리면서 지구촌의 열대우림과 다른 생물족들을 훼멸시키는 한편 이젠 그것도 모자라 자기들 인류끼리까지 옴니암니하는 싸움을 벌인다…” 만약 이 대목을 다른 사람이 읽어 본다면 과연 어떤 생각이 들까? 아마 인류의 행실을 두고 스스로 어처구니가 없어 할 것이다. 지구촌 최고의 영장물이고 생물계 문명의 상징이라고 일컫는 인류도 알고 보면 가장 허위적이고 포악한 “짐승”이라는 결론밖에 더 나올 것이 없다고 해야겠다. 또 있다. 인류는 늘 “양육강식”이란 인류사회외 “자연계의 동물세계”에서만 존재한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인류사회가 더 심하다는 생각이다. 겉이자 속이 그대로인 “동물세계”와는 달리 점잖은 양복위에 코트까지 차려 입은 신사가 일단 그 허울만 벗어 버리면 하늘이 높은 줄도 모른다. 그것도 배고파야 기타를 잡아 먹는 “동물세계”와는 180도 이상 다르다. 배가 부르면서도, 있고 많으면서도 수탈하고 점유하고 욕심을 부린다. 이는 개인과 개인, 가정과 가정, 집단과 집단, 나라와 나라 사이도 마찬가지이다. 똑 같다… 그러면서도 티없이 깨끗한 흰 눈을 반겨하고 눈이 내리는 날이면 평화를 기대하는 인류의 모순으로 엉켜진 “내심세계”—그것을 알아채서일가? 몇년전부터인지 우리의 “하느님”은 인간세상에 평화의 눈을 그닥 자주 하사하지도 않는다. 모든 것은 인간 스스로가 초래해 낸 “보응”이란 생각이다. 더 깊이 말 말자 “생태계보호”요, “자연계공존”이요 하고 자꾸 외치지만은 말고 우선 우리 인류부터가 종족과 “체제와 이념”을 벗어나 공존하면서 살자. 욕심 부리지 말고 싸움질 말며 남을 기시하지도 말자. 그러면 생태계보존과 자연계공존도 뒤따라 말만이 아닌 실상으로 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명년 이때쯤 인류와 지구촌 평화를 기원하며 눈내리는 밤하늘을 기대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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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02
  • [김혁 칼럼] 나 홀로 집에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해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꼭 나오는 영화가 있다. 크리스마스 특선이라는 이름으로 세계각지의 여러 영화채널에서 방영한다. “나 홀로 집에 (小鬼当家)”라는 영화이다. 1990년 미국에서 제작된 코미디영화이다. 8살난 아이 케빈은 부모들이 휴가차로 프랑스로 떠나면서 홀로 집에 남겨진다. 성탄절날 아이가 혼자 있는 집에 두 명의 도둑이 들이닥치고 아이는 홀로 도둑들을 맞서 나간다. “나 홀로 집에”는 개봉한지 얼마 안되여 미국내에서 흥행률 1위를, 전 세계에서는 흥행률 3위를 기록했다. 결과 세계적으로 흥행수입 4억 7천만 딸라라는 기록을 올렸다. 그에 힘입어 시리즈로 몇부 더 제작되여 그냥 신화같은 흥행가도를 달렸다. 그후로 이 영화는 반드시 크리스마스 황금 시간대에 편성되곤했다. 2011년에는 5백만이 넘는 가구가 시청하여 력대 크리스마스 최고 시청률이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인 어제저녁, 중앙텔레비방송 영화채널에서도 황금시간대인 9시에 이 영화를 상영했다. “나홀로 집에”를 보면서 뜬금없이 홀로 집에 남겨진 우리의 아이들을 떠올렸다. 즐거워야 할 크리스마스에 청승맞은 하소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부모없이 “나 홀로 집에” 남겨진 아이들, 이 아이들을 우리는 “류수아동(留守儿童)”, “편부모 가족”, "결손가정“이라 부른다. 이 문제는 현재 우리 조선족사회의 최대의 문제점으로 부상되였다. 리산(離散)으로 인한 조선족 가정문제가 심각하다는 얘기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편부모 가족은 조선족의 도시진출, 출국로무열과 더불어 날로 늘어나는 추세이다. 지난해 연변조선족자치주 “조선족학교 결손가정자녀교양연구모임”에서 밝혀진 자료에 따르면 연변의 결손가정이 60%, 일부 학교의 학급은 지어 87%를 차지했다. 과반수이상의 우리의 아이들이 “나 홀로 집에” 남겨진것이다. 또 매체의 조사에 따르면 길림지역 7개중소학교에서도 편부모거나 부모가 곁에 없는 학생수가 재교생총수의 60.65%를 차지했다고 한다. 이중에 부모가 리혼했거나 사망한 학생의 비례수는 12.3%인 반면 해외 로무송출로 부모가 곁에 없는 학생수는 67.4%나 달했다. 그중 량부모가 다 없는 학생비례수도 34.1프로, 적지않은 수자이다. 료녕성 심양에서도 시내 5개 조선족소학교와 2개 조선족 중학교 학생 1천641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 결과 부모가 모두 있는 가정은 35%에 불과했으며 나머지 65%가 결손가정의 자녀였다. 조사 대상 가운데 부모가 리혼했다는 응답은 13.9%였으며 부모 가운데 한 명만 있다는 응답이 27%, 부모 모두 없어 조부모 등 친척과 함께 생활한다는 응답도 24.1%에 달했다. 이러한 집계자료에 따르면 결손을 초래한 가장 큰 원인이 바로 부모 쌍방 혹은 일방의 출국이였고 다음 부모의 리혼이였는데 사실상 부모 일방의 출국으로 인한 가족의 해체(리혼 및 외국인과의 결혼 등)가 큰 비중을 차지하기도 했다. 얼마나 많은 가족들이 현대판 “리산가족”의 비운을 겪고있는지, 얼마나 많은 자녀들이 동강나고 비여진 가족의 아픔을 겪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의 아이들은 이러한 삭막한 가정환경에서 생활면에서, 학업에서 다각적으로 좌절과 갈등을 겪고있다. 부모와 장기간 이별한 상태에서 스스로를 다독이며 살아가야만 하는 아이들의 증후(症候)는 심각하다. 강보의 아이들을 품에서 떼놓고 해외로 나가서는 5년, 6년 지어 20년까지 보내면서 지어 자기 아이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부모들의 사례는 한 집 건너 주변에 수두룩하다.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부모란 그저 한국에서 몇달에 한번씩 걸려오는 전화속의 목소리로 달마다 부쳐보내는 돈의 액면으로만 기억되는 아이들에게 부모는 낯익으면서도 낯설은 존재이다. 이런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공부에 골몰할수가 없고 학업이 뒤떨어지면 곁에서 부축여주는 보호자도 없이 결국 학교생활을 쉽게 포기하고 사회로 나와 떠돌이 신세로 전락해 가고 있다. 그리고 비여진 자신의 책무를 돈으로 상환하려는 부모들에 의해 어려서부터 돈에 맛을 들인 아이들은 그 금전관에도 문제가 생기기 일쑤다. 아이들은 너무나도 일찍이 금전만능, 한탕주의에 환혹되고 있다. 학교의 문제생들 대부분이 이런 가정에서 속출되고 있다는것이 사례와 집계로 증명되고있다. 아이들의 성격 형성과 사회적 관계는 많이는 부모를 통해 배우게 되는데 가정의 부재로 인한 “나 홀로” 아이들에게는 이런 환경이 비여지고 관계가 차단될 수밖에 없다. 돈을 벌어와 금쪽같은 자식들에게 쏟는다고는 하다지만 그 과정이 외려 가족간의 그리움과 애정에 목 말라가고 있는 자식들의 어린 가슴에 멍이 들게 하고있다. 부에 대한 집착과 그로인한 아이들에 대한 소외가 자녀들의 성장과 꿈과 미래에 상처를 덧나게 하고있는것이다. 가족 구성원이 줄어들고 비여 있는만큼 기쁨과 슬픔을 공유할 대상이 줄어들고 아이들은 외로움 지어 원망까지 키우며 살아가고있다. 이 문제를 절감하고 보호와 지원 시스템 마련 등 사회적인 거동이 일고는 있지만 날로 속출하고있는 이 군체에 대한 노력의 손길은 아직도 판부족이고 미비하다. 이미 “빨간 불”이 켜진 우리의 공동체사회에서 결손가정으로 인한 사회적인 증후가 더욱 심하게 불거지지 않기 위해서는 마땅한 처방전의 마련이 화급하다.영화에서 주인공 캐빈이 두볼을 감싸쥐고 비명을 지르는 장면이 압권이다. 그래서 영화의 포스터에도 올랐고 많은 배우들이 그 모습을 패러디 하기도 했다.아롱다롱 성탄수가 불밝혀져있는 따뜻한 방안에서 부모와 풍성한 식탁에 오순도순 마주앉아 캐럴송을 부르며 재롱을 떨어야할 우리의 아이들이 지금 홀로 텅 빈 방에서 마음의 비명을 지르고 있지않을런지 모른다.2014 12월 25일“청우재”에서 김혁 - 재중동포 소설가, 용정.윤동주 연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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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2-30
  • [이런생각] 이주자의 예의
    ■ 전춘화 나는 중국에서는 조선족, 한국에서는 중국동포다. 몇 년 전 까지만도 이러한 나의 정체성이 참 불편했다. 중국에서는 소수민족, 한국에서는 재외동포, 센터가 아닌 변두리라는 소외감에서 오는 불편함 때문 이였을까. 내 부모님은 나라가 돌아가는 일, 이른바 '정치'와 ‘사회’라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 것은 나라님들이 신경을 쓸 일이라 생각했다. 우리는 먹고 사는 것에 관심을 갖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부지런히 살면 그만이었다. 실제로 한국에 와있는 동포 중에 많은 분들이 내 부모님처럼 그들 나름 생계를 꾸리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 중국에서처럼 그렇게 살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한국인들로부터 '돈밖에 모른다'는 비난을 받았다.'동포가 아니라 그냥 중국인'이라는 가슴 아픈 말을 듣는다. 게다가 동포가 저지른 범죄사건 때문에 동포전체가 부정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뭐가 문제였을까? 반대로 생각해보면 나는 한국인에 대한 편견이 없다. 가장 큰 이유는, 내게 도움을 줬던 한국인 '몇 분' 때문이다. 중학교 때 해마다 우리 집에 찾아와 산타할아버지처럼 한국 교회에서 후원했다는 학비와 따뜻한 목도리를 전해준 삼촌도 한국인이었고 한국에서의 유학생활 내내 등록금을 모을 수 있도록 회사에서 일하게 해준 사장님도 한국인이었다. 그래서 나는 가끔 일상가운데 마주치는 한국인의 불친절과 불쾌한 언행에도 "사람 나름'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우리 동포들에게는 '사람 나름'이 적용되지 않을까? 오랫동안 소수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세상 돌아가는 일에 신경을 끄고 먹고 사는 일에만 집중하는 것이 삶의 예의인줄 알았던 우리를 한국인들은 '이기적'이라고 표현한다. 주위 사람 눈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내 방식대로 살았더니 집단의식이 강한 한국인들은 싫어한다. 세상일에 관심을 끄고 나만 열심히 일하면서 간간히 눈에 보이는 친인척과 이웃에게 베풀면서 눈에 띄지 않게 살아가는 것이 다수의 '우리'가 생각하는 삶의 예의였는데 그것이 뭔가 부정당하는 느낌이다. 왜 그럴까? 같은 피, 같은 역사를 나눈 동포이고 한국은 내 조상님의 땅이 맞지만 어쨌든 한국 땅에 발을 내디딘 순간 한국사회와 한국인은 낯설다. 나는 그들에게 엄연히 이주자라는 증거다. 물론 동포라는 신분은 바뀌지 않겠지만. 이런 예를 들어보자. 오랫동안 떨어져있었던 여동생이 어느 날 우리 집에 와서 두 달을 묵기로 했다. 그런데 여동생은 식사 뒤 설거지를 잘 안하나 하면 나의 삶의 방식에 관심이 없다. 여동생은 그동안 살아왔던 방식 그대로 행하면서 내가 이해해주길 바랬고 어차피 두 달 뒤에 다시 떠날지도 모르니 잠시 머무는 나그네처럼 마음을 나누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내게 자매라 한다. 그리고 이 집은 예전에 부모님의 재산이었기에 당연히 와서 머무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자매라지만 밤에 갑자기 동생의 코 고는 소리를 들어야 하고 바닥에 떨어진 동생의 머리카락을 내가 직접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때는 낯선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한국인은 왜 저렇게 반응할까'에 관심을 갖고 이해하지 않고 느낀 바를 오구작작 모여 울분을 토하듯 풀어버리고 다시 나만의 생활패턴에 묻히는 우리가 어쩌면 한국인 입장에서는 얄미운 여동생일지도 모른다. 몇 년 전만 해도 음식가게의 사장님인 한국인 아줌마와 그 가게에서 일하는 동포 아줌마 사이의 갈등은 동포들의 사적인 모임에서 흔하게 거론되는 부분이었다. 그 모임에서 "우리 음식가게 사장님의 이런 부분들이 섭섭하다'고 토로하는 것과 "한국인들은 이렇더라"고 판단 식으로 말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다. 거기에 두어 명이 끼어 공감을 하고 살을 붙이면 한국인은 그러한 이미지가 된다. 우리가 편견을 갖는 한국인에 안타까움을 호소하듯이 우리도 아무렇지 않게 '음식가게 한국인 사장님'에 대해 어떠한 이미지를 만들어버린다. 중국에서 소수민족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 중에 중국의 해방을 위해 참전했고 동북3성의 불모지를 개간하는 등 조상들이 대가지불한 부분들이 있었다. 지금 한국에서 많은 동포들이 3D 업종에 종사하며 한국경제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고 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 한국에 왔다는 타이틀이 벗겨지기에는 약하다. 솔직히 처음부터 한국경제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에 온 것은 아니었다. 먹고 살려고 한 일이 한국경제의 발전에 도움이 된 것 뿐이다. 아무렇지 않게 전철역 계단에서 침을 뱉고, 소리 높게 통화하고 "우린 중국에서 그렇게 하지 않슴돠"라는 말로 한국인들의 옳은 방식까지 거부한다면 그것은 이주민의 예의가 아니다. 한국사회가 지금의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우리는 얼마나 알려고 했고 인정하고 있을까. 그런 발전이 있었기에 지금 돈을 벌려고 한국에 오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단 한 번도 한국인에게 제대로 알린 적이 없다. 조금만 더 그들이 살아온 방식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애써 구축해놓은 옳은 질서와 맞는 가치관에 동참하면서 인정한다면, 중국에서도 이주자였지만 대가지불로 인정을 받은 조상들처럼 우리도 그들에게 환영받는 이주자가 되지 않을까. 물론 한국사회에도 문제점이 많다. 중국동포들도 입을 열면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먼저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고 외부를 향해 삿대질을 한다면 동포사회는 성장할 수 없다. 나는 한국인에게 환영받을만한 이주자였는지를 먼저 생각해보자.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 것이고, 권리를 누리려면 그에 따른 의무가 있다. 중국과 한국에서 소수민족, 동포로 살 수밖에 없는 정체성이 문제가 아니다. 또 어디론가 이주할지도 모르는 불안한 미래가 문제가 아니다. 지금 있는 이곳에서 환영받는 이주자로 선주민을 인정하고 동참하는 자세가 되어있느냐의 문제다. 계속 이중 정체성을 유지하고 살려면 최소한 중국과 한국 모두에 그에 따른 예의를 갖춰야 할 것이다. 그것이 버겁다면 차라리 한쪽 끈을 놓자. 최악의 선택은 '기회주의자'로 사는 것이다. 이상적으로 들리겠지만 글의 마무리에 「민들레 씨앗」을 이야기하고 싶다. 바람에 날려 씨앗들은 어디론가 날려간다. 그리고 그것이 어디든 뿌리를 박는다. 그 씨앗이 성장하면 또 수많은 민들레 씨앗들이 어딘가로 날려갈 것이다. 이미 모체가 날려 온 생명임을 익히 알기에 '노하우'정도는 터득하고 길을 떠날 것이다. 내 조상이 이주자였고 나 또한 이주자라는 것은 역사적 시각에서 동포들에게 플러스가 될 수도 있다. 그 이주를 통해 ‘얼마나 많은 부를 창출했느냐’가 아니라 ‘어떠한 문화와 가치관을 확산하는 이주자로 살았느냐’에 초점이 잘 맞춰진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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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2-18
  • 조선족은 조선족 꿈을
    ◐ 김희수많은 조선족들이 한국에 나가 힘들게 돈을 버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한마디로 지금보다 더 잘 살아보자는 것이 아닐가. 지금보다 더 큰 집을 마련하고 더 좋은 차를 소유하고 더 나은 물질생활을 향수하자는 것, 또 자식들을 대학공부시키고 유학보내고 출세시키고 시집장가 보내고 한밑천 잡아보자는 것이 아닐가. 물론 한국에 나가지 않고 중국에 남아있는 조선족들도 한국에 나가 있는 조선족들과 똑같은 소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보다 더 잘 살아보려는 것이 조선족꿈이 아닐가? 이론적으로는 국가요, 민족이요, 이상이요 하는 미사려구들이 안받침 되여야 하겠지만 통속적으로 이렇다고 하면 너무 용속한 표현일가? 우리는 중국꿈에 대해 많이 얘기해 왔고 얘기하고있다. 중국꿈은 한마디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국가부강, 민족진흥, 인민행복을 실현하는 것이다. 결국 지금보다 더 잘 살아보자는게다. 그러니까 중국꿈은 조선족꿈과 모순되지 않는다. 중국에는 56개 민족이 있다. 그러니까 56개 민족이 각각 자기 민족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면 56개의 꽃이 활짝 피여나 그것이 곧 중국꿈이 되지 않을가 생각된다. 조선족은 중국꿈에 보조를 맞추어 조선족 꿈을 실현하는 것이 목표가 아닐가 싶다. 조선족 꿈은 지금보다 더 잘 사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족이 조선족으로 지금보다 더 잘 살려면 조선족 정체성이 지켜지고 건전한 조선족 사회가 유지되여야 한다. 민족정체성이 유지되고 조선족 사회가 건재하려면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잘 건설해야 한다. 그러니까 조선족 꿈은 다시 말해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잘 건설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없으면 조선족은 자치권리를 향수할수 없게 된다. 우선 우리 글이 소수민족 다섯개 주요문자에서 밀려날것이고 우리 글 출판사, 신문사, 잡지사, 방송 등이 모두 사라지게 될 것이다. 산재지구의 조선족들은 혹시 연변조선족자치주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전체 중국조선족들에게 자치주가 있어야 조선족의 자치권리를 향수할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없으면 중국조선족사회가 무너지고 조선족은 주류민족에 동화되고 말 것이다. 주류민족에 동화되면 중국조선족도 이름뿐이고 따라서 조선족 꿈도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이다. 조선족사회가 없는 조선족 꿈은 있을수 없기때문이다. 조선족 꿈은 지금보다 더 잘 살아보자는 것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조선족이 자치권리를 보장받을수 있는 조선족자치주가 건재해야 한다. 조선족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잘 건설해야 한다 것, 이것이 핵심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잘 건설하려면 우선 조선족인구감소부터 막아야 한다. 자치주가 존재하려면 조선족인구가 일정한 비례로 유지되여야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필연적으로 자치주인구가 증가되기 때문에 조선족인구감소만 막아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한족 및 다른 민족인구의 증가에 따라 조선족인구도 증가되여야 자치주를 유지할수 있다. 조선족인구의 감소세를 막으려면 우선 출산률을 높여야 한다.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 민족의 운명을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되는 일이다. 혼인출산년령도 앞당겨야 한다. 1990년대 이전에는 20대에 결혼하여 30살전에 모두 부모가 되였지만 지금은 20대에 결혼하는 젊은이들은 보기 힘들고 30~40대에 결혼하는 젊은이들이 많은 실정이다. 늦게 결혼한다고 결혼전에 경제적 기반을 이룬 커플들이 많은 것도 아니다. 집도 마련하고 자가용차도 사려면 결혼이 늦어질수도 있지만 어차피 부모의 도움으로 결혼할거라면 일찍 결혼하여 산모와 아이의 건강에 다 좋다는 30살전에 출산하는 것도 조선족 꿈을 위해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된다. 다음으로 외지의 조선족과 외국으로 나간 조선족을 연변으로 돌아오게 하는 방법이다. 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불가능이 없는” 나폴레옹의 사전을 빌려서라도 연변에 조선족인구를 집중시켜야 한다. 중국조선족들이 연길을 중심으로 연변에 모여 살게 해야 한다. 물론 청도, 북경, 상해 등지와 한국의 대림동에 새로운 조선족집거구가 형성되고있고 이는 시대발전의 필연적인 추세라고 하지만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과정에 우리 민족이 분산되고 언어, 문자를 잃어가고있는 현상은 간과해서는 안된다. 조선족들이 연변에 모여 살게 하자는것은 케케묵은 낡은 사고방식이라고 타매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전체 조선족의 미래지향적인 안목으로 높이 서서 보다 멀리 내다본다면 상술한 관점을 수긍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인구문제가 해결되면 다음으로 조선족학교를 잘 꾸려 민족인재를 양성하고 인구자질제고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또 조선족간부마다 앞장서 조선말로 발언하고 조선글을 사용하고 조선족마다 우리 말과 우리 글을 우선시해야 한다. 이것이 중국에서 조선족이 조선족으로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인데 모두가 무관심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가 고민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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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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